고려/조선과의 비교
[clearfix]
1. 개요
고려와 조선의 흥망성쇠는 기본적으로 그 흐름이 유사한 편이다. 하지만 대중적으로는 고려가 후대 왕조인 조선에 비해 자주적인 국가라는 인식을 가지는 등 이미지가 더 좋은 편이다.
이는 고려가 묘청의 난을 진압하고 금나라를 사대하기 시작한 역사부터 시작하여, 원 간섭기로 인해 친원파(부원배) 권문세족이 득세를 하여 왕권이 땅바닥에 떨어지고 내치가 혼란해지며, 대외적으로는 홍건적과 왜구 등 외세의 침략에도 내내 시달리던 고려 말기의 역사보다는 초기의 고구려 계승, 외침 격퇴 등 상무적인 이미지와 전반적으로 여성의 인권이 무척 높고 불교를 숭상하여 문화가 발달했으며 벽란도로 대표되는, 외국과 활발한 교류를 한 시기라는 이미지가 대중에게 자리잡은 탓이 크다.
반면 조선은 고려 말의 여러 폐단을 바로잡고 신생국가답게 경제, 사회, 문화에서 발전을 이루었으며 여성의 인권도 일반적인 조선의 여성 인권하면 떠오르는 것과 달리 높은 편이었던 조선 전기보다는 사대주의 성향의 사림파가 득세하고 유교 기반 문치의 폐쇄성과 군사분야 등 대외적인 무능함, 여성 인권의 하락, 그리고 붕당정치의 변질로 인한 지배계층의 극심한 부패랑 안동 김씨, 풍양 조씨가 주도하는 세도정치로 인해 망국으로 치닫는 민생 파탄의 시대인 조선 중기~ 말기가 많이 부각되는 탓이다. 심지어 고려 찬양과 조선 비하가 너무 과해지면 조선이 고려보다 무조건 퇴보한 사회였다고 폄하하거나 당시에는 이미 망조가 든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와 신진 사대부들을 폄하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과연 조선이 무조건 고려보다 퇴보한 사회였는지, 고려가 조선에 비해 높은 평가만을 받는 일이 타당한지 혹은 조선의 일부 취약점을 고려로 보완할 수 있는지 곱씹을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일각에선 대중들의 인식에 대한 반발로 고려가 과하게 폄하되고 조선이 모든 면에서 이전 시대보다 진보한 것으로 포장되기도 하지만 이러한 주장들도 유의해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2. 민생
고려는 농업 기술의 미비와 빈약한 시설로 인한 저조한 농업 생산량, 잦은 자연재해[1] 와 귀족들의 고삐 풀린 수탈이라는 삼중고가 중첩되었다. 거기에 더해 높은 세율까지 가중되어 토지의 생산량을 훌쩍 넘어서는 가혹한 조세 부담을 도저히 버틸 수가 없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자진해서 귀족들의 노비로 전락하는 극빈층(투탁노비)들과 스스로 자신들의 토지를 버리고 떠돌거나 도망치는 유랑민의 비율이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 심지어 일부는 산속 오지로 숨어들어 화전을 개간하는 화전민이 되기도 하였는데, 이마저도 국가의 손길이 닿으면 다시 도망가는 수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다시 말해 고려의 꽃이라는 고급 문화를 향유할 수 있던 극소수 지배층은 몰라도 적어도 일반 백성들의 생활 수준에 관한 한, 고려는 조선에 비해 열악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조선의 백성들의 삶이 나았냐면 전혀 아니며 고려의 백성들처럼 위와 같은 고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농업 생산량이 크게 올랐고 정부에서는 유교적 도리에 따라 작은 정부 수준으로 민중들의 조세 부담을 낮춰주려고 노력했고 몸으로 때우는 각종 역을 제외한 조선의 세율은 20~30% 남짓으로 동시대 다른 국가들에 비하면 상당히 낮은 세율을 적용하였지만 문제는 이건 공식적인 세율이 이렇다는 것에 불과했다. 특히 조선은 국가적으로는 낮은 세율을 적용하였지만 막상 관료의 수가 많이 필요한 큰 정부를 지향하면서부터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데 단적인 예로 관리는 아니지만 지방 행정업무를 담당하는 아전에게 업무는 과다하게 시키지만 정작 국가에서는 녹봉이 단 한푼도 나오지 않았고 조선의 경우 관리들의 녹봉이 상당히 적어 국가에서 나오는 녹봉 가지고는 생활이 힘드니 지방 수령과 아전들의 가렴주구가 이어지는 등 모순점이 나오는 바람에 늘 만성적인 재정 빈곤에 시달렸다. 거기다 조선은 후대로 갈수록 국가의 모든 역량을 중앙에만 몰빵했기 때문에 이러한 폐단이 더욱 심해졌다.[2] 조선 전기부터 임꺽정, 홍길동 같은 대도들이 활개치고 후기에는 가혹한 세금을 견디지 못해 유랑민이 급증하고 민란이 빈번하게 일어난 걸 보면 알 수 있듯이, 조선 때도 민중들이 고려 때만큼 고통스러웠던 시기가 꽤 있었다.
3. 노비
3.1. 노비의 대우
조선의 노비제를 상대적으로 옹호하는 시각에선 고려시대의 향, 소, 부곡의 주민 같은 차별받은 천민집단[3] 이나 조선 노비의 대부분을 차지한 외거노비나 생활에선 별 차이가 없거나 오히려 노비들이 더 나았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설령 조선의 노비가 고려의 향, 소, 부곡민보다 생활 수준이 높았다하더라도 이건 사회가 비교적 안정적이고 생산량이 늘어난 덕분이지, 상속 매매 증여의 대상인 시점부터 계급적으론 더 못한 대접을 받은 게 맞다.[4] 물론 고려 또한 노비들이 존재했으니 단지 조선과 고려의 차이는 향, 소, 부곡의 특수 천민지역들이 존재하냐 존재하지 않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만 말이다.
특히 노비가 좋은 대우를 받은 것을 꼭 긍정적인 쪽으로 해석할 수도 없다. 간과되기 쉽지만 가난한 양인보다 노비가 훨씬 살만한 건 당연한 일이다. 노비는 기본적으로 납세와 군역[5] 이 면제다. 납세야 상전을 위해 봉사하는 걸로 대신하지만 군역 면제만 받아도 큰 메리트다. 거기다 공노비의 경우엔 하급 기술 관직[6] 을 받을 수도 있었다. 심지어 남존여비 시대에 여자도 궁녀, 의녀 등이 되어 공직 생활[7] 을 할 수 있었다. 현대에 비유하면 일반 양반집 노비들은 중소기업 직원, 끗발 날리는 대감 댁이나 왕족의 노비들은 대기업 직원[8] , 공노비는 9급 공무원쯤 되는 셈이다. 그것도 군 면제에 신분 세습이 되는. 물론 이는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상전이 성격이 더러우면 오만가지 학대를 당할 수 있고 역모죄를 지으면 덩달아 박살나지만 양인들이라고 탐관오리의 폭정으로부터 안전한 게 아니었고 탐관오리들에게 시달렸기 때문에 충분히 감수할만하지 않은가.
그렇기 때문에 고려와 조선에서는 나라가 어려워지면 양민이 스스로를 노비로 파는 일이 성행했다.[9] 조선의 사족들이 노비에게 인간적인 대우를 해줬던 건 집안의 중요 자산인 노비를 확충하기 위한 경영 전략의 일환으로 볼 수도 있다. 노비에게 최소한의 인간 대접을 해줘야 그나마 열심히 일해서 생산성을 높이고 흉년에 양인들이 자기 집에 몸을 팔러 많이 올테니까. 덧붙여 조선 때는 한 집에 거느리는 노비가 워낙 많아서 도망 노비 문제가 심각했다. 특히 도망 노비를 잡으려고 추쇄도감까지 설치했으나 노비들을 잡는 일은 쉽지 않았고 도망 노비들도 집단으로 저항했으며 노비의 도망이 속출했기에 도망 노비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를 막기 위해서라도 채찍뿐만 아니라 당근을 쓸 필요가 컸다.
물론 양민들이 권문세족들에게 노비로서 위탁하는 일명 '''투탁노비'''(양민이나 천민 가운데 군역이나 조세를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어 권문세족의 종으로 제 발로 들어가는 행위)의 폭증은 미국의 한국학 대가인 제임스 팔레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고려 말 부터 그 비율이 엄청나게 폭증하였다고 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조선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고려 말의 재정 파탄을 초래했고, 전시과의 붕괴를 가져온 고려 말의 토지겸병 문제가 그 원인으로 지적되는데, 실제로 고려 말의 지배 질서가 문란해지면서 발생한 이 토지 겸병의 문제는 이후 권문세족들의 끝없는 토지겸병 확대로 이어졌고 그 결과 고려의 권문세족들이 가진 농장의 비정상적인 확대와 함께 토지를 잃은 양민들이 권문세족들에게 노비로서 위탁하는 일명 투탁노비 현상이 폭발적으로 발생하여 노비비율이 폭증하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때 권문세족들이 소유한 토지들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는데 어느정도였냐 하면 고려 귀족들이 소유한 토지는 산과 강을 경계로 할 정도로 광대했다. 당연히 세족들의 이런 토지확대는 필연적으로 고려 백성들이 먹고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토지들마저도 권문세족들이 몽땅 강탈해가는 바람에 백성들 입장에서는 ‘송곳 꽂을 땅’조차 없는 도탄의 지경으로 내몰리게 되었고 그로인해 투탁노비들이 폭증하여 세수도 감소하게 되었고 국가 재정이 궁피해지는 악순환이 반복되어 그것이 조선초기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또한 고려나 조선이나 두 왕조의 노비제가 근본적으론 같기 때문에[10] 조선의 노비가 고려의 노비보다 훨씬 나은 대접을 받았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게다가 조선과 고려 모두 주인이 노비를 일방적으로 살해하는 것만 금지했을 뿐, 그 외에는 상전에게 거역할 수 없도록 했고 주인이 살인 외의 학대를 저질러도 제대로 된 처벌도 하지 않았다.
주로 당나라의 제도를 본받은 고려와 달리 조선은 송나라의 제도를 많이 본받아서 노비에 대한 법적인 처우가 훨씬 괜찮았다는 주장도 있지만, 고려와 조선은 노비제 만큼은 매우 자주적(?)으로 운영했기 때문에 그로 인한 차이가 컸다고 보긴 힘들다. 특히 조선은 노비를 위한 법적 제도를 고려보다 많이 신경 써주긴 했지만 동시에 노비에 대한 주인의 소유권과 상하관계를 보장하는 제도를 고려보다 훨씬 강화했다. 초기부터 노비의 소유권을 명확히 하기 위해 노비변정도감을 설치했고 나중엔 장례원이라는 노비 전담 관청을 세웠으며 도망 노비를 색출하는 노비추쇄도감도 유명하다.
두 왕조의 국교인 불교와 유교가 노비에 대한 처우에 어떤 영향을 줬는지는 여러가지 의견이 엇갈린다. 사실 둘 다 기본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가치 있다는 걸 인정하는 사상이기 때문에 이걸 국교로 하는 나라들은 노비제가 없는 게 자연스럽다. 현실은 그렇지 않지만. 부패한 고려의 승려와 조선의 선비들이 사찰이나 서원에서 많은 노비들을 거느리고 백성들을 수탈한 건 이들 계급과 그들을 처벌하지 않은 국가 권력의 문제로 봐야하지 종교 문제로 지적할 일이 아니다.
3.2. 노비 폭증
고려와 조선 둘 중 어느 나라에서 노비폭증이 시작되었는지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서로 갈린다. 이영훈 처럼 조선 초기에 폭증했다는 사람도 있지만 미국의 한국학 대가였던 제임스 팔레 처럼 고려말 극심했던 혼란기에 권문세족들의 횡포가 겹쳐 투탁노비들이 폭증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기 때문이다.
일다 조선시대에 노비 비율이 폭증했다고 주장하는 측에서는[11] 이를 조선의 어두운 면이라고 평가한다. 또한 권세가들이 가난한 백성들을 노비로 만드는데 열을 올리기 시작한 건 고려 때부터지만, 그 비율은 조선보다는 훨씬 더 적었다고 추정한다.[12]
하지만 고려시대에 노비 비율이 폭증했다고 주장하는 측에서는 고려 말 귀족들의 수탈과 토지겸병 문제는 조선시대 양반들과는 차원이 틀린 수준이었고, 실제 노비제에 관한 고려의 법률은 조선시대 종모법과 큰 차이가 없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고려시대 노비제가 법으로 확실히 규정된 것은 10대왕 정종 때로, 《고려사》 〈형법지〉에서는 “정종 5년(1039), 천것은 어머니를 따르도록 하는 법을 제정했다”고 했다. ‘천것은 어머니를 따른다’란 문장의 한문 표현인 ‘천자수모(賤者隨母)’를 따서, 학계에서는 이 법을 천자수모법이라 부른다. 고려시대의 천자수모법과 조선시대의 종모법은 뉘앙스의 차이가 약간 있긴 하나 본질적으로는 똑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원간섭기 충렬왕 재위시기에 ‘'''일천즉천(一賤則賤: 부모 중 한쪽만 노비여도 그 자손들도 무조건 노비가 되는 법)의 원리'''’를 제창하면서 이후 노비 인구가 '''급증'''하였는데 여기다 고려말 귀족들의 수탈로 인하여 '''투탁노비(양민이나 천민 가운데 군역이나 조세를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어 권문세족의 종으로 제 발로 들어가는 행위)'''들의 수 마저 폭증하면서 고려말 때 노비들의 숫자가 엄청나게 폭증하기 시작했다고 추정하는 것이다.
그나마 중간에 원나라가 정동행성을 통해 고려의 노비제도에 간섭하여 노비제도를 원나라의 법식대로 고치도록 해서 (고려의 부원배 지배층들은 노비들을 늘리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는데, 원나라는 노비를 오히려 줄이는 쪽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노비제도 개혁이 이루어질뻔 하였지만 이마저도 '세조구제'를 내세운 고려 지배층의 격렬한 저항으로 인해 결국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하지만 위화도 회군 이후 정도전 등이 사전 개혁에 찬성하자 이성계가 토지개혁을 강력히 추진하여, 중앙에 급전도감(給田都監)을 설치하고 도의 양전(量田)을 시작하였으며, 또한 반대하는 자는 탄핵·추방하고, 1390년(공양왕 2년) 음력 9월 공사 전적(公私田籍)을 소각하여 철저한 개혁을 실시했다. 이듬해 음력 5월 새로운 전제(田制)의 기준이 되는 과전법(科田法)을 정식으로 공포하였다.
이로써 강력한 왕권의 부재를 틈타 중앙 조정의 국사를 관장하는 도평의사사(도당)를 좌지우지하며 나라의 권력과 부를 독점하다시피 했던 부패한 권문세족들의 대농장들은 모두 사라지게 되었고 세족들에게 속해있던 투탁노비들 상당수 또한 다시 양인으로 되돌아가게 되었다. 추가로 고려 말 토지제도 문란의 3대 요소로 평가받던 토지겸병과 병작 반수제, 지주전호제는 이후 경국대전에서 이 3가지를 모두 법적으로 금지했는데 이유는 당연히 그만큼 폐해가 막심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후 조선은 세조 때 경국대전에 노비법을 정비하여 고려시대 일천즉천으로 법을 다시 바꾸어서 노비의 자식은 무조건 노비로 만들었고 이후 계유정난에 가담한 공신들에 의해 훈구파가 형성되고 성종 때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정계에 진출한 사림파가 대지주층들이 되어가서 이들에 의해 삼정의 문란이 발생하자 양인이 줄어들고 노비 수는 꾸준히 늘어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신분의 경계가 문란해지는 조선 후기때 양천교혼(良賤交婚)과 노양처소생종모종량법(奴良妻所生從母從良法)이 시행된 이후에야 영조 시절을 기점으로 조선의 노비 인구 수는 크게 줄어들게 되었고 이후 구한말 때 법적으로 완전히 폐지된다.
3.3. 노비에 관한 복지
조선의 노비에 대한 정책이 전부 무의미했던 건 아니었다. 공노비에 한해서는 출산 휴가를 비롯하여 다양한 복지 정책을 실행한 조선 쪽이 훨씬 나았다. 그리고 노비들만의 휴일도 있었다.#
사노비의 복지는 주인의 성향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다. 일상적으로 폭력을 휘두르는 주인이 있었는가하면 가족 못지 않게 잘 대해준 주인도 있었다.#
박자청, 장영실, 반석평처럼 노비 출신이지만 본인들의 실력을 인정 받아서 출세한 인물들이나 주인의 위세를 등에 업고 양반 앞에서도 거들먹거렸던 노비들의 사례를 거론하며, 조선시대 때 노비의 위상이 생각보다 높았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런 사례들은 고려 때도 발견된다. 이의민은 노비 출신으로 권력의 정점에 올랐고 최의는 자기 집 노비들에게 벼슬을 제수하기도 했다. 물론 고려의 경우는 반란과 선심성 벼슬 제수였기는 하지만 말이다.
3.4. 노비 학사(虐使) 처벌
주인들이 노비를 학대하고 각종 사적제재와 살해를 일삼는것은 조선도 고려와 다를게 없었다. 조선의 경우 세종이 노비에 대한 살해 뿐만 아니라 구타를 비롯한 사적제재와 가혹행위도 금지하려고 노력했지만 사족들의 반발과 반대로 실질적인 효력이 없었다. 특히 고려나 조선이나 노비는 주인을 고소할 수 없다보니 살인이라도 나지 않는 이상 노비가 받는 학대가 바깥으로 새어나가기 어려웠고 설령 알려진다해도 학대한 주인이 처벌받지 않는게 다반사였다.율문(律文)을 참고하여 보니, 노비구가장조(奴婢毆家長條)에 이르기를, ‘만약 노비가 죄가 있는 것을 그의 가장(家長)이나 기복친(朞服親), 혹은 외조부모가 관(官)에 고발하지 않고 구타하여 죽인 자는 장(杖) 1백 대의 형에 처하고, 죄 없는 노비를 죽인 자는 장(杖) 60대에, 도(徒) 1년의 형에 처하며 당해 노비의 처자(妻子)는 모두 석방하여 양민(良民)이 되게 한다. '''만약 노비가 주인의 시키는 명령을 위범(違犯)하였으므로 법에 의거하여 형벌을 결행(決行)하다가 우연히 죽게 만든 것과 과실치사한 자는 모두 논죄하지 아니한다'''. ’고 하였은즉, 주인으로 노비를 함부로 죽인 자는 일체 율문(律文)에 따라 시행해야 옳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노비는 대대로 서로 전해 내려오는 것으로서 명분이 매우 엄중하여 중국의 노비와는 아주 다르니, 그들을 양민으로 만드는 법은 사세가 시행하기 어려우며, 또 노비의 죄있는 자를 그 주인이 처벌하는 법도 실행한 지가 이미 오래된 것이니 갑자기 고치기는 쉽지 않다. 더욱이 사삿집[私家]의 은밀(隱密)한 곳에서 죄 지은 노비를 그 주인이 어떻게 하나하나 율문을 상고하여 논죄(論罪)할 수 있겠는가.
세종실록, 세종 26년 윤7월 24일
또한 위와 같은 조치가 노비의 권익을 증진시켰다고 해석할수는 없다. 죄없는 노비를 학대하는 것을 금지했을 뿐 죄 지은 노비를 벌 주는 것을 금한 것은 절대 아니다. 이에 대해서는 얼토당토 않게 노비에게 잔혹한 짓을 한 후 '게으름을 부려 혼을 내었다'같은 말을 하면 그 이상 깊게 팔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실제로 노비를 거느렸던 양반 가문들의 기록을 보면 노비들의 군기를 잡는다는 명복으로 태형, 폭행, 고문, 사적제재를 일삼은 게 빈번했다. '죄 없는 노비를 괴롭히지 말라'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말은 전혀 효과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노비가 주인에게 불복종하거나 대들면 관아에 신고해서 관아의 힘을 빌려 얼마든지 처벌할 수 있었다. 주인의 입장에서 노비의 죄야 만들어내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조선시대에 노비를 죽인 걸로 처벌 받은 사례의 대부분은 '''관아에 신고하지 않고 멋대로 죽여서이지 무고한 사람을 죽여서가 아니었다.''' 그리고 웬만큼 엄격한 관원이 아니면 주인이 노비를 폭행하고 학대하며 고문하는 사건은 처벌도 하지않고 쉬쉬하며 넘어갔다.
4. 여성 인권
고려의 여성들이 조선의 여성들보다 자유로웠다는 인식이 주를 이룬다. 고려조에는 이혼 및 과부의 재혼이 자유로웠던 반면 조선조부터 유교의 강한 영향으로 성종 때 과부의 재혼을 금지시켜버렸다. 사실 재혼 일건으로만 봐도 부녀자의 입장에서는 천지차이다. 현대에 비해 조혼을 하는 풍토였는데 만약 남편이 요절하기라도 하면 천수동안 혼자 살아야하는 처참한 형편이었다. 물론 퇴계 이황이 며느리를 몰래 재가시킨 것처럼 남몰래 재가시키는 경우가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조선시대 때도 서민들은 재혼을 많이 했으며 고려의 이혼 및 재가는 가문의 이익을 중시한 성향 탓도 있어서 많은 여성들이 가문을 위해 강제로 이혼당하거나 재가하는 일도 많았다. 게다가 고려도 조선처럼 기본적으로는 가부장제 사회이기 때문에 남성중심이었으며 여성들의 지위를 아주 높게 평가하는 것은 무리다.
http://blog.naver.com/lord2345/220374353356
http://blog.naver.com/lord2345/220374892670
http://blog.naver.com/lord2345?Redirect=Log&logNo=220375064721
특히 고려도 여성은 관직에 진출할수 없고 원 간섭기에는 공녀로 끌려가는 등 편히 산 것만은 아니며 오히려 한글의 보급 덕분에 여성의 문화 참여는 조선시대 때가 더 많았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는 논란의 여지가 많은 주장이다. 애초에 조선의 남성들이 여자가 글을 쓰고 읽고 소설 따위를 읽는 문화를 절대로 긍정적으로 여긴 게 아니다.[13] 또 고려도 법적으론 여성이 남성보다 지위가 낮았다지만, 고려의 여권이 높이 평가받은 건 여성의 경제권과 가정 내 영향력이 남성과 대등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조선도 고려 풍토가 남아있던 초반에는 남녀가 대등했으나 중기에 가면 이조차 없어진다.
그리고 조선 역시 상국으로 섬기던 명나라에 꾸준히 공녀를 바쳤다는 점에서 마찬가지다. 물론 중종 이후로는 더 이상 명나라에 공녀를 보내는 일이 없긴 했다. 하지만 고려는 사실상 정복당했기에 어쩔 수 없이 공녀를 보냈던 것이고 원나라의 힘이 약화되었을때는 바로 공녀를 보내지 않았다. 반면에 조선의 경우 명백히 독립된 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공녀를 보냈던 것이 문제였다. 하물며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끌려갔다 다시 돌아온 여인들이 차별당한 일은 조선의 흑역사 중 하나다. 끌려간 여인들을 조선으로 다시 데려오는 일이 계속되긴 했지만 최명길 등은 병자호란 직후 끌려갔다 돌아온 여인들이 받는 대접이 부당하다고 항의했으며 인조도 최명길의 주장에 동감하여 부녀자들을 내치지 말라고 명을 내리기도 했다. 문제는 이것조차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는 것.
단, 이 부분 또한 한 가지를 더 염두에 두어야 한다. 당시 여성의 권리라는 측면이, 고려나 조선 뿐만 아니라 전근대 동아시아에서 어떻게 인식되었나 하는 점이다. 이는 여성의 성씨를 다루는 점에서 살펴야한다. 성씨라는 것은 원래 '집안(家)'로 표현되는 혈연 집단의 한 표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성의 권리가 신장되었다는 것은 여성이 원래 속했던 또는 출신 가문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하는 차원에서 살펴볼 필요도 있다는 것이다.[14] 고려가 조선과 다른 점은 외척 또는 여성의 가계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흘러갔기 때문에 여성의 지위 또한 보장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조선의 경우도 딸을 족보에 넣어주는 등 고려와 별 다를게 없었지만 임진왜란 이후 여성의 육체적 속박, 즉 '정절'로 표현되는 윤리적 가치가 부상되면서 '삼종지도' 또는 '열녀'의 가치관을 더욱 맹신하게 되었다.
게다가 조선 여인들이 무조건 부당한 대접만 받은 것은 아니다는 의견도 있다. 조선 후기에는 남편을 가르치는 여성인 현처가 등장했으며 임윤지당, 강정일당처럼 성리학을 자기화하는 여성 성리학자들이 나타났고, 이들은 남성 양반들에게서도 자신들과 대등한 수준의 학문적 성취를 이룬 것으로 대접(?)받았다.
사실 고려나 조선이나 대부분의 전근대 국가 특성상 여권(女權)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동시기 유럽에서도 마녀사냥이 일어났으며 중국에서는 전족이 있었고 인도에서는 사티가 있었던 게 전근대 시기 여권의 현실이다. 결론적으로 보면 경제권과 가정 내 영향력이라는 점에서는 고려의 여권이 조선보다 더 높았다. 하지만 고려의 변수는 애시당초 여자는 폭력을 당하는 것에 매우 민감하고 생명이 박탈당하는 것에 민감하기 때문에 때문에 원간섭기뿐만 아니라 거듭된 반란이 계속되고 그로 인한 폭력으로 얼룩진 무신정권과 무신정권이 세워진 이후 전란까지 겹칠 시점에선 크나큰 변수로 적용된다. 특히 거듭되는 반란과 전쟁 속에서 그리고 외부의 압제 속에서 고려 여성들이 자신의 목숨조차도 장담을 못하는 와중에 존엄을 지킬 수 있을지도 변수이다. 경제권과 가정 내 영향력조차도 고사하다. 병자호란 때보다 몇 배나 처참했던 여몽전쟁만 봐도 이미 답이 나올 지경이었고 여몽전쟁 이전에 거듭된 반란이 지속되어 폭력이 난무하던 무신정권만 봐도 그러하다. 본시 거듭되는 반란과 이후 끝났다 싶으면 전란이 터지고 전란이 끝나면 압제가 연이어 터지는데 이런 와중에 여권의 변수도 봐야한다. 이런 상태에서 애초에 인간의 권리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권리인 생명권이 지켜지기도 힘든 마당에 존엄을 지킬 수 있는지 의문이다. 특히 반란과 이후 전쟁과 전쟁 속에 반란과 전쟁이 끝난 이후 압제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희생되는 것은 여성이고 여성뿐만 아니라 노인과 아이, 장애인들이다.
5. 기록문화
조선은 고려 뿐만 아니라 한민족 역사상 가장 뛰어난 기록 문화를 이루어내는데 성공하였다. 물론 고려 또한 그 이전 시절 때 보다 기록 문화가 발전하기는 했지만 조선이 역대 한민족 국가들 중에서 기록 문화가 가장 많이 발전했었던 나라라는 사실은 모두가 인정하는 부분이다. 실제로 조선은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등 굉장히 세분화되고 쓰는 방법이 체계화된 방대한 양의 기록물들을 편찬했으며, 거기다 기록자를 정치적 탄압으로부터 보호하고 객관적인 있는 그대로의 기록을 남기기 위해 왕조차 볼 수 없는 비공개 문서였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더 한다. 또한 전대인 고려시대 때보다 더 발전한 인쇄 기술력을 바탕으로 서적 편찬 또한 활발히 이루어졌으며 조보 같은 세계 최초의 신문 또한 발행되었다.
6. 신분차별
[image]
조선시대에는 문과에 합격하는 서민층의 비율이 많이 늘었을 뿐만 아니라 무과도 시행되어 양인들이 양반이 될 수 있는 기회가 크게 늘어났다. 그덕분에 귀족적인 요소가 강했던 전대 고려왕조에 비해 신분차별이 상대적으로 많이 완화되었으며, 또한 전대에 비해 훨씬 합리적인 관료체계가 완성되었다.
일반적으로 조선의 지배 계급으로 생각되는 '''양반'''은 건국 초엔 계급이나 계층이 아닌 조정에 녹을 받고 일하는 '''관료'''를 지칭하는 용어에 불과했다.[15] 사실 조선 초기의 계급은 전대 고려와 유사한 '''양천제'''(양인 + 천민)였다. 초기만 놓고 보면, 전대 고려의 귀족적 요소들[16] 이 상당부분 제거되었기에 '''고려를 포함한 전대 어느 시대보다도 신분간 편차와 차별이 많이 완화된 사회로 볼 수 있다.'''[17]
그리고 후기에는 신분간의 상하 이동도 전대에 비해 한층 '개방적'이 되었는데 몰락 양반이 많아지고 보다 좀더 자본주의적으로 바뀐 사회상 때문이다. 이 때 부터는 양반이 아니더라도 양인인 경우, 과거 응시 자격이 주어졌고 과거에 합격만 하면 양반이 되어 출세를 할 수 있었다.[18] 과거 제도는 결국 양반층의 계급 세습을 합법화시킨 것이라는 통념과 다르게 조선대의 상민 출신 '''문과''' 급제자 비율은 초기 40% ~ 50%, 이런 초기 과거 급제자 출신들이 문벌을 짓기 시작한 중기에는 점차 낮아져 10% 후반대까지 이르렀으나, 양란 이후 다시 비율을 회복해 후기에는 다시 40% ~ 50% 비율을 유지했으며, 말기에는 60%에 육박했다는 최근 연구 결과도 있다.[19] (한영우 이화여대 이화학술원 석좌교수 겸 서울대 명예교수 연구) 출처 기사1 기사2 추가로 한영우 교수는 ‘과거, 출세의 사다리’(지식산업사)를 4권으로 완결지은 뒤, 4권 말미에 남긴 글 '나가면서'에서 조선왕조가 500년 이상 장수한 비결은 지배 엘리트인 관료를 세습으로 보장하지 않고 능력을 존중하는 과거시험 제도로 부단히 하층 사회에서 충원했기 때문이라며 공부를 열심히 하면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는 탄력적 사회를 유지하려 했던 것이라고 강조했다. 기사
7. 상업
조선 초에는 억상정책 때문에 지방 장시가 열리지 못해서 고려 때보다도 국내 상업이 부진했었다. 하지만 이후에는 한국 역사상 최초로 조직적인 상인조합(유상, 만상, 송상, 경상 등), 어음, 계로 대표되는 원시적인 선물, 금융 거래가 태동했다. 놋그릇[20] , 자개, 칠기 등의 생활 용품이 시장에 출시돼 대중화되었다. 교역 역시 이전 고려시대보다 큰 폭으로 늘어나 ‘민간에 의한 무역’이 이전 시기보다 유의미하게 활발해졌다. 인삼을 가공한 상품인 홍삼의 예처럼 후기에 이르러서는 민간 주도의 무역 상품이 개발되었다. 화폐가 처음으로 대중적으로 쓰이던 시기 역시 조선시대다.[21] 이전 시기였던 고려는 물물교환, 현물화폐의 단계에 머물러 있었고, 제한적인 무역만 이뤄졌었다.
이에 반해 고려는 동전의 사용엔 실패했고 은병 같은 고액 화폐는 꽤 오랜 기간 쓰인 걸 보면 알 수 있듯이 고려의 상업을 주도한 건 민간이 아닌 국가와 귀족들의 대규모 거래였다. 조선은 양란을 겪은 후 대동법 시행을 거쳐 민중들이 전국적으로 동전을 사용하게 만드는데 성공했지만 너무 고액인 은병도 너무 소액인[22] 상평통보도 제대로 된 화폐로 기능하기엔 문제점이 많았고 두 왕조 모두 끝내 현물 경제에서 완전히 탈피하지는 못했다. 결론적으로 국제 무역은 고려가 더 발전했고 국내 민간 거래는 조선 후기가 더 발전했다고 볼 수 있다.
8. 국가의 자주성
자주성에 있어선 고려 쪽이 조선보다 모화사상으로부터 자유로웠다. 고려는 소위 외왕내제, 즉 나라 안에서는 황제국을 칭했다. 고려 때 보이는 연호[23] 라던지, 절일(節日)[24] , 짐, 폐하, 태후, 환구단, 오등작, 조서, 자황포, 황성(皇城), 7묘제 종묘, 묘호 등 수많은 예가 있다. 또한 관직명을 의정부 - 영의정 - 육조판서 - 승정원 - 성균관 - 대군 - 왕자군이 아니라 문하성 - 문하시중 - 육부상서 - 중추원 - 국자감 - 공 - 후으로 썼다.
반면에 조선의 경우에는 이미 건국 초부터 명나라의 제후국임을 자처했다. 특히 조선의 경제적, 제도적 역량이 명백히 우위라고 인정하는 쪽에서도 자주성에서만큼은 조선의 지나친 사대주의 경향을 비판하고 외왕내제를 취하며 내부적으로는 중국의 제후가 아닌 자주국의 격을 유지한 고려를 높이 평가하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는 고려사를 저술할 때 고려시대에 썼던 용어가 참람하다고 태클을 걸어서 바꾸려고 했던 게 조선의 사대부들이다. 물론 세종이 반대해서 고치진 못했다. 세종처럼 사대주의를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대중 외교 방식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었지만, 조선에 친중파들이 많아서 중국에 지나칠정도로 사대를 했던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다.
사실 조선도 초기에는 명나라와 여차하면 싸울 준비를 하거나 순장 풍습에 대해서 왕과 신하들이 뒷담화를 까는 장면이 있었다. 세종도 주자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드러낸 적이있다. 특히 조선 초기에 명나라 사신이 무례하게 굴자 화가 난 조준이 살수대첩을 빌어 시를 지어 사신을 데꿀멍 시킨 일화도 있다. 즉 고려 말 조선 초기 신진 사대부는 성리학을 하면서 모화 사상을 가진 동시에 국가의 자주성도 매우 중요하게 추구한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조선 또한 고려와 같이 묘호를 사용했고, 독자적인 종묘 운영 방식이 있었으며, 환구단도 운영했다. 게다가 조선이 명나라의 반대를 무시하고 국경을 넘어 군대를 파견해 여진족을 토벌해도 명에서는 어찌하지 못했다. 하지만 중기부터는 맨손으로 나라를 일구어낸 창업자들이 하나둘씩 은퇴하고 사림층이 집권하면서 모화 사상이 팽배해지고 이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의 도움을 받으면서 정점을 찍는다. 만동묘 같은 건 일제 시기까지 제사가 이어지기도 했다.
물론 고려는 원 간섭기로 인해 충렬왕 때 부터 많은 제도의 격하를 거쳤으며, 국가의 자주성에도 매우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병자호란 이후의 조선은 국가의 위세만을 따지면 원 간섭기 고려와 다를 바 없었다는 견해도 일부 있지만 조선이 병자호란 이후에도 묘호를 계속 사용하며 외왕내제를 지켰던데 반해 고려는 원 간섭기 이후로는 다시는 묘호를 부활시키지 못했다. 더군다나 원 간섭기 당시 원나라는 정동행성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고려의 내정에 매우 깊숙히 간섭을 행했지만 청나라는 임오군란 이전에는 그런 적이 전혀 없었다. 이는 왕실이 원 황실과 혼인 관계가 되면서 대륙의 정치판과도 밀접해져 원나라에 깊숙히 간섭 당하던 고려와는 달리 조선은 왕실이 청나라와 어떠한 관계도 맺지 않았고 청나라도 무관심으로 대했기 때문에 내치의 자주성을 비교적 잘 유지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대주의라는 것이 그 이전 한반도에 존재한 모든 왕조들의 공통된 '''생존 전략'''이긴 했고, 고려는 물론 현대 한국인들이 요동의 패권국이라고 생각하는 고구려조차도 통일된 중국 왕조에게 사대는 했었다. 이는 사대 항목에서도 나오지만 사대라는게 단순한 상하 관계가 아니라 복잡한 외교 관계였기 때문. 하지만 '''조선의 경우 건국 초기의 잠깐을 제외한다면, 생존이나 외교적 이득을 넘어 중국의 인문, 문화를 지나치게 숭상한 면이 있었기에 비판받는 것이다.'''[25] 다만 이는 고려는 몽골의 부상 이전까지 송나라가 요나라나 금나라와 대립하고 있는 2강 체제였던 반면에 조선은 중화 제국 1강 체제였다는 점을 감안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9. 과학 기술과 문예, 의학
조선시대에는 측우기, 자격루, 혼천의, 앙부일구, 거북선, 화차와 신기전 등등 전대인 고려시대 때보다 한층 더 과학기술이 발전했으며 한민족 문화의 정수라 할 수 있는 한글 창제와 홍길동전 같은 한글 소설의 발달 그리고 형태가 확립된 한국의 대표적인 정형시인 시조의 발전과 궁중 악기인 편경 제작, 궁중음악인 종묘제례악과 악보인 대악후보 같은 문예의 발전이 이루어졌으며 또한 동의보감 같은 의학의 발전 또한 이루어졌다.
그리고 지도 제작 기술 또한 계속 발전해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같은 당대 최고 수준의 세계 지도나 대동여지도 같은 훨씬 더 정확한 지도들이 제작되었으며, 천문학 또한 발전해 칠정산 같은 한국계 국가 최초의 역법이 만들어졌고 세계에서 2번째로 만들어진 전천(全天) 천문도이자 세계 최초의 고경도 석판 위에 새겨진 전천 천문도인 천상열차분야지도 또한 제작되었으며, 선조대에는 인류 역사에 남은 우리 은하 마지막 초신성인 SN 1604(케플러의 초신성)을 관측해 실록에 기록했는데 이는 현대에 와서 이 초신성이 la형 초신성이었음을 알아내는 데 중요한 자료로 쓰일 정도로 세세히 기록되어 있다. 연산군 대에는 은광석에서 순수한 은을 추출하는 첨단 회취법인 연은분리법이 개발되는 등 여러 분야에서 계속 발전이 이루어졌다.
10. 미술
미술적으로는 고려의 불교를 기반으로 한 섬세하고 화려한 건축, 예술, 공예가 대중들에게 더 어필을 한다.
조선 같은 경우 검소함을 미덕으로 삼았기에 전 왕조들에 비해 좋게 말하면 소박하고 나쁘게 말하면 초라한 조선시대 유물, 유적들이 문화적 가치가 낮은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취향을 타서 마니아층의 선호를 받는다. 조선에도 청화백자처럼 화려한 유물이 없는 건 아니지만 섬세함은 고려 때보다 확연히 떨어진다. 다만 이 부분은 시대상을 봐야 하는데, 귀족 중심의 고려 청자와는 달리 조선시대에는 청렴 등 유교적 가치를 중요시 여겼다. 그리고 현대인들의 미의식과는 달리 당대의 미의식으로는 청자의 비색보다 백자의 흰색이 더 아름답고 구하기도 힘든 색이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백자를 구워내려면 청자보다 더 뛰어난 기술과 비싼 재료가 필요하다.
고려시대의 사치품 제작과 또 그걸 향유할 수 있는 계층은 극소수 귀족들이었고 조선시대는 민화 등 서민 미술이 발전했다는 걸 생각하면 '''조선의 미술은 대중적인 면에서 오히려 고려시대보다 발달했다고도 할 수 있다.'''
11. 군사
11.1. 외침 대응
11.1.1. 고려
외세 침략을 격퇴한 점에선 고려를 조선보다 높이 평가하는 의견이 많다. 이는 거란의 3차례의 침략을 시작으로, 여진족 정벌, 산업 혁명 이전에 역사상 가장 많은 영토를 확보했던 국가였던 몽골 제국에 맞서 쉽게 무너지지 않았던 것에 근거한다.
하지만 고려도 전공이 완벽했던 건 아니다. 거란의 침입 당시 1차 때는 전쟁의 성격상 큰 전투가 벌어지지 않았지만 초반에 거란에 패배하고 봉산이 점령당했으며 대규모로 침공해온 2차 전쟁과 3차 전쟁 때는 피해가 막심했다. 통주 전투에서 30만의 고려군이 패배해 3만명이 전사하고수도인 개경이 불타올라 국왕이 피난가야했고, 귀주 대첩으로 대승을 거둔 3차 전쟁때 조차 요나라가 쓸고간 지역은 유물의 질부터 다른 것을 볼 수가 있다.
고려의 여진 정벌 또한 무려 17만의 대병력[26] 을 쏟아붙고도 지휘부의 오판과 무능으로 인하여 고려보다 열세였던 여진에게 역으로 패하는 처참한 실패로 끝나는 바람에 1896년의 13도 체계를 기준으로 평안북도(평안남도는 고려시대에 가서야 완전히 고려의 영토로 편입되었다.[27] )와 함경남도 그리고 함경북도는 모두 고구려와 발해의 멸망 이후로는 고려가 수복하지 못했고 조선시대에 4군 6진을 개척하기 전까지 모두 야인들의 영토로만 남게되어 버리고 말았다.
몽골 제국의 침입 때는 1차, 2차 때에만 그나마 "저항"이란 걸 해본 거지 3차 이후 부터는 조정이 강화도에 틀어박혀 백성들이 학살당하고 전 국토가 유린되는 걸 나몰라라 한데다 전 국토가 완전히 쑥대밭이 되었기 때문에 좋게 볼 여지가 전혀 없다. 특히나 여몽전쟁은 외교적인 부분에서도 비판을 피하기가 힘든데 '''13세기 중반 고려는 사실 병자호란 직전의 조선과 비교할때 외교적 자세를 취하기 한층 더 수월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내란으로 쇠퇴해가던 명나라와 아직 산해관도 넘지 못한 청나라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취할 수 밖에 없었던 조선과 달리 '''13세기 중반 동아시아의 정세는 이미 몽골 제국 쪽으로 확연히 기울어져 있었던 것이다.''' 설령 남송이 위기에서 살아남는다 해도 몽골의 몰락은 기대할 수 없을 정도로 '''그 당시 동아시아의 패권은 몽골이 명확하게 쥐어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외교적인 오판으로 나라를 파국으로 몰고가는 선택을 했다는 점에서 여몽전쟁 당시 고려의 외교적인 실패는 변명이 불가능한 수준이라 평가 할 만 하다.
또한 고려 말기에는 홍건적에게 수도인 개경이 함락당하게 되며, 이성계가 황산에서 왜구를 쓸어버리기 전까지 전 국토가 왜구들에게 수십년 동안 계속 노략질 당하는 최악의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비록 여몽전쟁 이후 권신들이 등장하거나 삼별초의 난 등 내치에서는 많은 문제가 있었지만 그건 왕의 정치문제지 고려의 군사력 문제는 아니므로 일단은 논외.
(거란의 침입은) 고려판 병자호란이었거든요. 초반에 실수도 있었죠. 처절한 패배도 있었고. 하지만 고려는 침착하게 대처해 나갑니다. 침착하게 제도를 정비해 나가고. 중요한건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더 중요한 건 이 이후, 고려와 요나라, 송나라 간의 삼강 체제가 확립된다는 겁니다. 고려는 (귀주 대첩 이후) 120년에 달하는 태평성대를 누리게 되죠.
'''토크멘터리 전쟁史 67부 고려 vs 거란 전쟁2 中'''##
그래도 거란전의 승리는 고려의 국격을 높여 이후 이어지는 황금기의 밑바탕이 되었고, 고려의 여진 정벌은 신흥 강국 금나라한테 고려가 대군을 동원할 역량이 있는 만만치 않은 나라라는 인식을 줬으며[28] , 몽골에게 항복했을 때는 원종이 외교 감각을 발휘해 자치권만큼은 지켜냈다. 고려와 싸웠던 국가들의 국력을 감안하면, 고려로서는 최악의 전쟁이었던 대몽항쟁조차도 상당한 선방을 거둔 셈이었던 것이다. '''다만''', 임용한 교수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 당시 고려 조정의 행태를 강하게 비판한 적이 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여몽전쟁/평가와 여몽전쟁/무신정권 비판 문서를 참조."고려가 혹시라도 침략해오면 너의 군대를 정돈하여 그들과 싸워라. 하지만 '''함부로 먼저 고려를 침범한 자는 승전을 하더라도 반드시 벌을 내리겠다.'''"
'''《금사》 외국열전 고려조 천회 2년(1124년)'''
11.1.2. 조선
반면 조선은 세종대왕 시절에 4군6진을 개척하여 고려보다 더 넓은 영토를 점유하였고 이후 임진왜란에선 승리하긴 했지만 그전까지 있던 방어전에 있어서 쉽게 정복당하지 않는 강국이라는 평가를 죄다 깎아먹고 명나라 군의 참전으로 받은 은혜를 갚기 위해 명, 청 교체기에 명나라에 이리저리 끌려다녔다.[29] 호란은 외교적, 군사적으로 온갖 실수를 반복하다가 청나라에 처참하게 패하다가 삼전도의 굴욕으로 대미를 장식한 패전이었다. 선조가 임진왜란 당시의 행적으로 암군으로 평가가 떨어졌고, 인조가 어떤 취급을 받는지 보면 답이 나온다.[30]
고려시대에 비해 조선시대가 대체로 평화로워 군사의 필요성이 적었기 때문에 기강이 해이해 진 걸 감안해야 한다고 옹호할 수야 있지만, 천재지변도 아니고 조선이 급변하는 국제 정세와 침공해온 외적들에 맞춰 기강을 잡고 민첩하게 대응하지 못한 것은 분명한 조선의 실책이다.[31] 게다가 이것도 임진왜란을 대상으로 쓸 수 있는 핑계다. 200년간 평화에 녹슬어 있던 조선이 전쟁으로 단련된 일본을 상대로 그만큼 싸운 것도 대단하다고 고평가를 받기도 하는데... 임진왜란이 과연 여요전쟁에 비해 어려운 상황이었는지도 확언하기 어렵다.[32] 조선과 일본의 국력 차이가 고려와 당시 한참 전성기를 구가하던 거란의 차이보다 컸을지도 의문이고 고려는 지원군 없이 단독으로 전쟁을 수행했다. 게다가 육로로 쳐들어온 거란과는 달리 일본군은 어렵기로 유명한 상륙전을 감행했으며 그것도 평야 지대가 많은 서남 해안이 아니라 험한 산지로 가득찬 동남 해안이었다. 그리고 상륙에 성공한 뒤에는 험준한 소백 산맥이 가로막고 있었다. 홈그라운드가 한반도였던 고구려와 백제도 신라의 소백 산맥을 뚫지 못했었음을 생각해보자.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한국 넷상에선 좀 과대평가 당하는데[33] , 실제 당시 일본군은 조선의 군사력에 비해 압도적인 군세까진 아니었다. 조선도 초반인 2개월 ~ 3개월만 고생했지 바다에서 어느 먼치킨이 무쌍을 찍고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고 관군도 전열을 재정비하여 반격하여 승리를 거두는 등 서서히 일본군을 몰아내며 승기를 잡아가고 있었다. 당시 일본은 조선보다 많은 인구, 전국시대로 단련된 15만 이상의 대군, 신무기 조총 등의 우세가 있었지만 조선도 수준 높은 행정력, 홈그라운드의 이점, 꾸준히 발전된 막강한 화력이 있었기에 무조건적으로 일본에 불리하지 않았다.[34] 게다가 원의 간섭 때문에 행정도 막장에 북방에서 계속 외침에 시달리다 보니 만 단위 왜구한테 털렸던 고려 말기와는 다르게 조선은 당시까지만 해도 내치에선 후일 목릉성세라 불렸던 안정된 시기였고, 당시 동아시아권의 강대국인 명의 지원도 있었다.
특히 임진왜란 초기엔 명군이 일본군을 얕보고 덤볐다가 뜨거운 맛을 보기도 했지만 제대로 싸우기 시작했을 땐 일본은 패하기 시작해 야전에서 승부를 벌일 생각을 못하고 농성에 들어가야 했다. 게다가 일본군은 명나라 정복이라는 허황된 꿈을 세웠지만 정작 제대로 된 기병 전력도 없었고 화력도 빈약했고, 그 이전에 북관 대첩이나 행주대첩에서 기병과 화력을 제대로 활용한 조선군에게도 박살났다.
그래서 조선은 분명 국방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무신을 천대해서 무신정변까지 겪은 고려와 달리 무과를 실시해서 무관을 어느 정도 대접을 했고, 화약 무기 개발에도 적극적이었으며 왜란이든 호란이든 전쟁 대비에도 나름 열심히 노력했다. 거기다 조선이 마냥 평화롭기만 한 것도 아니었고 틈만나면 쳐들어오는 여진족을 대비해야 했으며 니탕개의 난, 왜란과 호란 같은 대규모 외침을 겪으면서 군사적 폐단을 고치려는 시도도 해봤다.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천, 지, 현, 황 등의 각종 화약 무기들과 판옥선의 발명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크게 활약할 수 있게 해주었고 비격진천뢰의 발명은 일본군에 점령된 경주성을 탈환할 수 있게 해주었으며 문종 때 개발된 화차는 행주 대첩 때 큰 활약을 하였고 결과적으로 조선은 비록 큰 피해를 입었지만 임진왜란에서 승리하여 왕조를 300년 더 유지했다.
그러나 문제는 조선군이 고려군과 달리 막상 실전 상황에서 뚜껑을 열어보니 하나같이 시궁창인 경우가 많은 게 문제였다. 여러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그 중 크게 두드러지는 것이 군사 반란을 두려워한 중앙 정부의 과도한 지방군 통제와 안일한 군사 운용이었다. 특히 제2의 이성계가 등장하는 걸 막고 싶었던 조선은 왕실과 조정이 대군의 지휘권을 가진 장수가 변방에 있는 걸 용납하지 않았기에, 제승방략 같은 허점 많은 제도를 운용하며 고치기 않다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철저하게 박살난다. 물론 감사나 병사가 지방의 대군을 모아서 근왕군을 꾸리기도 했지만 이들은 그냥 자기 도내의 수령들을 모은 것에 불과했기에 지휘 체계도 일원화되지 않았고 손발도 전혀 안 맞았다. 이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조선군이 패전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굉장한 실책이다.
게다가 조선은 고려와 달리 대군을 제대로 지휘할 역량이 부족했다. 조선군 대부분은 하급 지휘관이 없거나 숫자가 매우 부족했다. 전 왕조인 고려가 중앙군과 양계의 진에 중랑장부터 대정까지의 하급 지휘관들을 군대의 규모에 맞게 배치했고 이들은 효과적으로 외적과 싸워 이겼다는 점에서는 확실히 고려보다 퇴보한 셈이다. 하급 지휘관이 없다보니 대군이 모이면 제대로 통제가 안되었고, 아예 적을 앞에 두고 일부가 겁 먹고 튀기 시작하면 군대 전체가 그냥 붕괴되어버렸다. 그 결과가 용인 전투를 비롯한 임진왜란 초 지리멸렬한 전투들이다.
그 후에도 병자호란 전에 야심차게 군제를 개혁해서 전국 각지에 군영을 두고 하급 지휘관도 대대적으로 보충하지만, 그마저도 이괄의 난이 터지면서 망해버렸다. 이괄의 난 이후에도 보완은 커녕 지방의 대군에 지휘관을 보내는 건 위험하다고 판단한 인조의 견제와 간섭 때문에 지방의 장수들은 군사들을 제대로 훈련 못시켰고, 이후 전쟁에서 참패하면서 모처럼의 군사 개혁은 흐지부지해졌다. 그래도 완전히 무의미했던건 아닌게, 병자호란 당시 조선 육군의 질은 임진왜란 때보다는 훨씬 우수했다. 쌍령 전투의 임팩트 때문에 묻혔지만 김화 전투와 광교산 전투에선 승리를 거뒀고, 다른 지역군도 패배하긴 했지만 그냥 무너진 게 아니라 제법 치열하게 싸우고 무너졌다. 다만 인조를 포함한 정부 인사들이 임진왜란 때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무능해서 제대로 된 성과로 이어지지 못했을 뿐이다.
특히 병자호란 때는 조선 인조의 경우가 문제였는데, 조선의 선조나 앞전 고려의 현종처럼 일찍이 피신하여 뒷일을 도모하는게 차라리 나을지도 몰랐다. 물론 선조가 한차례 몽진을 해서 민심이 나빠졌고 국경인의 난이 터졌다는 점에서 보면 반란의 위험이 컸고, 적군에게 사로잡힐 위험성이 제법 컸다. 그리고 인조가 무리하게 실권을 되찾는 것보단 고려의 고종이나 조선의 중종처럼 나가는 것이 차라리 나았을지도 몰랐다. 대신에 이로 벌어질 반란이나 정치적 격변기가 더 앞당겨질 가능성이 크다는게 함정이다.
결론적으로 외침 대응에 있어서는 고려가 조선보다 더 나았다고 말할 수 있다. 전쟁 이전의 외교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고려는 그 유명한 서희는 물론이거니와 몽골과의 항쟁에서도 칸 자리를 두고 생겨난 내전 상황에서 줄을 잘 탐으로서 40년간 몽골에 저항했음에도 자치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군사력인 측면에서 보자면, 군사력이란 제아무리 많은 숫자를 모으고 좋은 무장을 갖춰도 실전에서 제 힘을 내지 못하면 나라를 지킬 수 없다. 그 점에서 조선의 군사력은, 아무리 노력해서 화약 무기를 만들고 군제를 개편했다 해도 하급장교의 부족이나 흐지부지된 군사개혁 등 결과적으로 제 실력을 내지 못했다. 굳이 포장해보자면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수군처럼 잠재력은 있었으나 조선이라는 국가 자체가 그 잠재력을 제대로 이끌어내는데 실패한것이다. 이는 분명한 조선의 실책인데 정책을 구상하고 명령하는 것은 다름아닌 조선의 정부였기 때문. 특히 하급장교의 부족이나 일선지휘관의 판단에 일개 문관이 개입해서 지휘관을 참수해버리고 지휘권을 박탈할 수도 있는 등의 군사체계만큼은 포장조차 하지 못한다. 그 또한 중요한 군사적 역량이니까. 그 때문에 임진왜란때는 이순신이라는 성웅 단 한명[35] 덕분에 나라가 구해진 것이나 마찬가지며, 병자호란 때에는 그조차 없어서 전황에 별 영향을 주지 못하는 곳에서나 몇번 승리했을 뿐 전반적으로 힘없이 밀려나다 결국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게 되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전쟁은 비정한 현실이며 결과만이 가장 중요하다. 또한 군사력이란 어떤 절대적인 기준이 있는 게 아닌, 상대국과의 비교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다만 조선도 초기시절인 태종 ~ 문종 때에는 군사력이 꽤나 강할때였고[36] 세조 시절에는 군사가 '''무려 30만'''이나 되었던데다가 그중에서 '''정예는 10만'''에 '''용맹한 군사는 3만'''[37] 이라는 기록이 있었다. 또한 20만대군을 모았던 공민왕시절 고려 때보다 농업생산량도 높았던 초기조선이 그때보다 국력이 위축되었을 가능성도 없고 이시애의 난 진압과정을 보면 조선 초기때는 훗날 임진왜란 시점에 비해 조선군의 군기가 살아 있었다. '''만약 초기 시절 대규모 외침이 있었다면 조선군도 여수전쟁,여당전쟁당시 고구려나 여요전쟁당시 고려처럼 강한 모습을 보여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조 때의 막강한 군사력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형이 이뤄놓은 유산이 남았기 때문이지, 훗날 조선군이 내리막길을 걷게 되는 근본적인 원인 중 상당수를 세조의 군제 개악이 제공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상대국보다 못한 군사력을 양성하는 바람에 그 백성들이 임병양란에 휩쓸려서 막심한 피해를 입게 만든 것은 분명 조선의 책임이며, 군사력에서는 고려를 조선보다 높게 치는 경향이 우세하다.
11.2. 원정
11.2.1. 고려
예종의 여진 정벌이나 공민왕의 요동 정벌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고구려 계승 의지를 가지고 제1차 요동 정벌을 비롯해 수 차례나 북방 원정을 나갔을 정도로 고구려 계승 의지는 고려 치세 내내 매우 중시되는 사항이었다. 이것 또한 후대에서 조선과 평가가 갈리는 이유 중 하나이다. 조선은 고려보다 훨씬 나은 상황에서도 압록강, 두만강까지 진출한 후에는 북방으로의 확장을 그다지 꾀하지 않았는데, 이것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이상을 위해 없는 힘을 쥐어짜내며 분투한 고려와 대비되고 있다.
하지만 고려의 여진 정벌은 무려 17만의 대병력을 쏟아붙고도 지휘부의 오판과 무능으로 인하여 처참한 실패로 끝나는 바람에 1896년의 13도 체계를 기준으로 평안북도(평안남도는 고려시대때 가서야 완전히 고려의 영토로 편입되었다.[38] )와 함경남도 그리고 함경북도는 모두 고구려와 발해의 멸망 이후로 조선시대 때 4군 6진을 개척하기 전까지 모두 야인들의 영토로만 남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원정이 민중을 고난하게 하며 지도자의 그릇된 이상에서 비롯된다고 보는 의견도 있지만, 모든 원정이 그러한 야욕에서만 비롯된다고 전제할 수는 없다. 원정은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그럼에도 감행하는 이유는 감수할 만한 분명한 국익이 있기 때문이며, 무엇보다도 그 원정으로 인해 그 자손들이 더더욱 부유하고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다면 더더욱 그렇다. 그런 면에서 고려의 요동 정벌은 결코 수 양제나 풍신수길의 침략과 같은 선상에 놓을 수 없다.
또한 고려의 영토 확장 의지를 막연한 이상만을 위해 했다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압록강 일대는 여요전쟁에서 유리한 전쟁 수행을 위해 필요한 지역이었으며 고려의 여진 정벌은 여진의 침략에 대한 예방 전쟁의 성격도 겸했으며, 고려의 요동 정벌도 원명 교체기라는 현실적 여건을 참작한 무력 행사이기도 했다. 고려는 조선에 비해 자국에 유리한 조건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려고 했으며, 여기에 고구려 계승 의식을 부가한 것이었다. 즉 고려의 북진 정책은 고구려 계승 의식만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며, 고려가 영토 확장에서 현실적 여건을 완전히 배제하고 공격만을 외쳤다고 보는 것은 옳지 않다.[39]
더욱이 원정이 아니더라도 주변에 대한 정보 감시를 하는 것도 포함인데, 오늘날의 사할린에 대한 수집이나 더 나아가서 신대륙 개척으로 이어질 탐사도 가능했을 점에서 아쉬우나 고려보다는 조선이 더 가능성이 높음에도 실현되지 않았다는 결과는 고려가 더욱 하기는 힘들었다는 뜻이다.
11.2.2. 조선
조선은 고려에 비해 전쟁에 소극적이었다. 물론 세종 시절에 4군6진을 개척하여 고려보다 더 많은 영토를 점유하기는 했지만 맞닿아있는 나라라고는 조선에서 떠받들던 명나라뿐이었고, 명나라는 건국 초기부터 조선이 군사를 강성하게 기르지 못하도록 군마(軍馬)를 요구하는 등 견제를 가했다. 군사적 열세를 인정하고 문화적, 외교적 실리를 얻으려 한 조선이었지만 문제는 이런 조선의 대(對)명 외교가 명나라가 세가 기울자 조선의 국방이 큰 문제를 야기하게 된다. 조선이 대외 문제로 인해 가장 많이 무력(武力)을 행사한 일은 오늘날 만주 지역에 살던 여진족에 관한 일이었다. 당시 여진족은 조선 입장에서 세력이 커지는 것을 막아야하는 잠재적 위협이었고, 여진족이 북방의 조선 백성들을 노략질하기도 하였기에, 조선은 노략질을 위해 남하한 여진족을 격퇴한 것 이외에도 예방전쟁적 측면으로 여진족 마을과 부족을 습격해 소탕하기도 했다.
조선은 고려 때와 달리 과거에서 무과를 시행하는 등 고려보다는 무관들을 더 대우해주고 무관(武官)을 좀 더 중시하는 행적을 보였으나, 무관들에 대한 통제를 중시하던 송(宋), 명(明)의 제도를 본받고 실정에 맞게 고쳐 쓰고자 했으며, 전반적으로 무(武)를 문(文)보다 천시하는 나라였다. 물론 무신정변의 사례에서 알 수있듯이 무(武)를 천시하던 경향은 고려가 조선보다 좀 더 심하기는 했었으나, 잦은 외침으로 인해 고려 군사들의 기강과 실전 경험이, 오랜 평화를 유지해 지방의 군사체제가 허술했던 임진왜란 초기와 이괄의 난 등의 영향으로 북방 방어선이 붕괴되어 있었던 병자호란 당시의 조선 군사들과 비교하면 훨씬 더 좋았을 것이다. 4군 6진을 개척하며 군사적 자주성을 과시하던 조선 초기와 달리 임진왜란 초기와 병자호란 때의 좋지못한 행보를 보이며 후대에 이 부정적인 인상이 단단히 박힌 조선은, 당시 동아시아 패권국들을 상대로 대첩을 벌여 외교적 위상을 높히고 자주성을 지켜낸 고려와 더욱 비교되기도 한다.
조선시대에도 충무공 이순신같은 불세출의 영웅들이 있었으며, 나선정벌 당시 청나라도 조선의 조총 부대를 높게 평가한 것 등을 생각하면 조선시대의 외침 극복, 군사적 행보는 고려 때와 비교할 때 저평가되는 경향이 있다. 사실 이런 경향은 백성들의 저항(의병 활동)과 군인들의 결사 항전이 저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고려 현종과 조선 선조[40] 의 행적이 너무 대조됐듯 당시 군주와 지배층에 대한 부정적 인식으로써 말미암은 것이 크다.
선조실록에까지 사신(史臣)에 의해 직접 기록된 "우리나라가 일본에 대해서는 '''만세 불공 대천의 원한'''[41] 이 있다. 그러니 하루라도 복수할 것을 잊는다면 이는 조종(祖宗)을 하루 잊는 것이다.[42] "라는 표현과 조선 사대부들의 격양된 반응에서 알 수 있듯이, 임진왜란, 정유재란의 치욕을 겪은 조선에서는 일본을 정벌하려는 생각도 있었지만, 일본 에도 막부의 창건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조선과의 관계 개선에 힘쓰고 조선 내 체제 정비 문제와 후금(훗날의 청나라)의 위협 문제로 인해, 조선은 광해군 시기에 일본과 기유약조를 체결해 국교를 재개하고 평화를 유지하게 된다.
17세기 초에 여진족이 만주족을 자칭하고 세력을 규합해 후금을 세우고, 머지 않아 청(淸)을 국호로 하여 조선을 침략(병자호란)한 이후 조선에서는 효종 치세에 북벌을 준비하기도 했지만, 청나라의 중국 대륙 지배가 확고해지자 민생(民生)을 우선으로 두기로 하여 전쟁을 벌이지 않았다. 강희제 당시 청의 국력과 위세를 생각하면, 전쟁으로 체제가 붕괴된 조선 입장에서 청을 치는 것은 당연히 재검토하고, 숙고할 사항이었다.
'''그렇다면 조선이 대외 원정, 영토 확장을 하지 않은 것은 국가로서 책망받을 일인가?'''
'''조선을 영토 확장, 대외 원정을 하지 않았다고 책망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의견'''.
당장 조선으로서는 꼭 필요했던 4군 6진 개척때만 해도 백성들은 엄청난 피눈물을 흘려야했다. 당시 백성들이 피눈물을 흘려도 장기적인 국익만 있으면 괜찮다는 식의 주장은 크게 잘못됐다. 더구나 대외 원정을 통한 영토 확장이 장기적으로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확실한 보장도 없다. 4군 6진 개척만 해도 백성의 고통이 이 정도인데 민본주의 사상을 중시한 조선을 땅 더 안 넓혔다고 폄하하는 것은 당시 시대 상황과 백성들의 눈물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조선의 상황에서 만주 등에 관한 대규모 대외 원정은 무리한 것이었으며, 대외 원정을 벌일 여유가 있었더라도 조선의 지배층들은 왕조를 안정적으로 이끄는 것과 백성들의 삶을 지키는 것을 이상적으로 여겼기에, 대외 원정에 국력을 쓰고 싶지 않아하는 경향이 짙었다. 게다가 고려가 북진 정책을 펼칠 당시에 만주는 원•명 교체기로 한창 혼란한 상황이었는데, 조선 시기에는 강대한 통일 왕조인 명나라나 청나라가 떡하니 자리잡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외 원정을 함부로 펼쳐봤자 곧바로 중국 측의 견제가 들어올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43] , 영토를 확장해서 패권을 차지해봐야하지 않겠냐는 것도 너무 지나친 생각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훗날 온갖 외세의 압박에 조선이 시달린 것은 대외적인 문제 대처와 내치(內治)를 제대로 못해서지, 세력 확장을 못해서가 아니다.
일단 무리한 원정은 백성들에게 고통만을 안겨주며, 정치 체제에도 큰 위협과 불안정성을 준다. 수양제와 도요토미 히데요시 같은 이를 생각해보자. 무리한 대외 원정을 벌인 영향으로 세력이 완전히 망하고 말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영토를 획득하기 위한 원정은 어떻게 미화, 포장하더라도 침략 전쟁이다. 일본을 예시로 들자면, 메이지시대 당시 일본은 정한론에서 드러나듯이 한국을 정벌하자며 온갖 핑계로 그들의 "정벌"시도를 합리화했지만, 그 본질은 한국을 강제 합병, 정복하여 영토를 넓히기 위한 침략적 행위 지향이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영토 확장을 위한 대외 원정이라는 침략 전쟁을 안했다는 이유를 들어 조선을 책망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더욱이 고려 말 즈음부터 요동 정벌은 보급 측면에서 봐도 현실성이 거의 없었다. 당시 요동에 살고있던 여진족의 세를 꺾어놓는 예방전쟁 수준이라면 모를까, 아예 여진족 근거지의 일부였던 만주 일대를 합병하는건 고려나 조선으로서는 현실성 낮은 어려운 일이었다. 당장에 고려시대의 여진 정벌도 근본적인 목표는 달성했을지언정 획득한 동북 9성을 유지하는데는 실패했고, 조선시대에 4군 6진도 정착시키는데 엄청난 출혈을 감수해야 했다. 하물며, 구태여 막대한 지출과 중화대륙의 압박을 감수하면서 유지가 가능할지도 알 수 없는 만주 지역에 진출하는 것은 극히 회의적일 수 밖에 없다. 게다가 농업을 제일 중요시하게 여긴 조선에서 춥고 척박한 만주에 구태어 진출을 할 이유도 없다. 북방의 영토를 얻고 유지하기 위해서 막대한 지출이 들어가는데, 정작 그렇게 대내외적으로 손해를 봐도 실익이 없다면 대외확장을 시도하는 것 자체가 큰 손실일 수밖에 없다. 괜히 국가적으로도 군사적으로도 한창 힘을 뻗치던 조선 초기에 한반도 북부 지역까지 확장하는 선에서 북진을 그친 것이 아니다.
'''다른의견'''.
혹자는 어떤 나라가 전쟁을 일으켜 땅을 빼앗는, 혹은 획득하는 것을 "침략"이라 말하고, 누군가는 "정벌"이라 말하며, 진출, 침공, 난(亂), 변(變) 등 전쟁을 시작한 사람들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다양한 입장에 따라 같은 전쟁 행위도 많은 단어로 정의되었다. 이는 전쟁이라는 역사적 무력 충돌에 앞으로 더 나은 인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윤리적 비판과 직결해있다. 전쟁이라는 행위를 일으키는 것을 비윤리적인 행위로 보는 위의 견해는 과거와 현재에 관계없이 "영토 확장을 위한 군사 행위=침략 전쟁=보편적으로 사람들이 피하고자 하는 고통과 죽음을, 자신들의 이기심으로 인해 타인들에게 끼침=악(惡)"으로 분석되는 절대적인 기준으로 판단했다는 점에서 합리적이다. 적잖은 이들처럼 "그 시대는 원래 그랬으니까 괜찮아"와 같은 식으로 전쟁 등의 행위를 합리화하는 것은 사실 대단히 위험하고, 비합리적이다. 그러나 오늘날은 국제법이 확립된, 과거와 완전히 다른 사회다. 오늘날 국제질서의 체계성과 국제법으로 드러나는 성문화된 규율은 과거와 같게 견주기 어렵다. 그렇기에 조선의 영토 확장 문제를 현대 기준의 침략과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조선이 영토를 확장하는데 백성들이 고통 받는 것을 고려해야함과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었다는 말은 백번 옳으나, 주변국들이 대외 원정을 통해 세력을 확장하는 반면 조선이 대외 원정, 전쟁을 통한 영토 확장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았고, '''못해서'''(즉, 능력 부정이다.) 한번도 동아시아의 패권을 쥐지 못했다는 점은 후대에 부정적으로 비판받을 수 있는 일이다. 타민족, 타국에게 원정 또는 정벌이라는 미명 하에 해를 끼치는 것도, 백성 개인의 희생과 고통을 함부로 감수하려 하는 것도 옳지 않지만, 국가적 역량을 길러서 적극적으로 대외 원정을 통해 영토 확장과 주변 세력 복속을 시도했어야했다. 대외 확장이 국가의 장기적 안정성과 국력 신장에 무조건 직결되는 것이 아니며 도리어 큰 위험을 품고있지만, 주변국들과 대조되게[44] 대외 확장을 통한 세력 확장을 못해 국가적인 경쟁력을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점은 전근대국가로서 후대에 충분히 부정적 비판을 받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 의견은 윤리적 잣대를 들이댔을 때 "전근대국가는 명확히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 "전근대국가는 정복 전쟁을 펼쳐도 괜찮은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그 결론 역시 '그 시대는 원래 그랬으니 괜찮다'라는 식으로 합리화를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과 비판을 맞닥뜨린다. 하지만 현대 한국에 사는 우리는 조선의 소위 '예방전쟁'을 여진족에 대한 조선의 침략이라 여기지 않으며,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행동을 위대한 정복, 원정으로 여기고 침략으로 여기지 않는 경우가 많고, 고려를 "침략"했던 몽골이 고려인[45] 들과 함께 일본을 원정했던 것을 침략이라 여기지 않는 경우가 많으며, 로마가 카르타고와 전쟁을 벌여 영토를 확장 했을 때 카르타고인들의 눈물에 대해 잘 생각하지 않는다. 이에 관해 조선 조정과 알렉산드로스 대왕, 몽골 제국, 로마군에 대해 어느 쪽으로 치우친 합리화도, 비난도 적절치 않게 느껴진다면, 이 입장을 이해한 것이다.
12. 국교
후대의 국가인 조선에서는 성리학에 기반하여 건국된 국가인 만큼 고려의 멸망 원인을 조선 시대에는 전적으로 불교에서 찾았으며 경연에서 국왕에게 고려사를 강독할 때면 거의 모든 결론이 '고려는 바로 이 불교 때문에 망했습니다'식의 기승전불로 끝났다. 당시 불교는 성리학자 입장에선 타파해야 할 것, 낡은 시대의 유물 같은 것이었으며 그에 기반한 고려도 낡은 국가, 개혁해야할 국가로 여겼던 것이다. 즉 유교(성리학)을 현대의 관점에서 타파해야할 것으로 여기듯이, 당대의 불교는 현대인이 유교를 보는 시선과 정확히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예외로 조선 7대 왕인 세조는 말년에 불교에 심취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때 지은 절이 지금은 터만 남은 원각사.
물론 조선의 불교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인 시각이 결코 근거 없는 것이 아니었는데, 고려는 특히 말기로 갈수록 부패한 승려들의 백성 착취와 각종 불교 행사들을 위한 과세 등으로 백성들의 원한을 강하게 사고 있었다. 신진사대부 세력이 유교를 떠받들며 불교를 미워했던 것도 다 그 때문.
그러나 유교, 성리학이 철저히 구시대의 잔재로 취급되는 현대 대한민국에선 오히려 불교는 조선 시대에 승려가 노예 취급당하던 시절에 비하면 상당히 복권되어 대한민국 주요 종교의 위상을 되찾았다는 점은 역사의 아이러니. 단, 불교와 유교에 시간적 차이만 있는 것이 아니고 국가의 정치철학과 태도에도 영향을 끼쳤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단순히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평가가 달라진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
13. 인구
일단 대략적인 추론을 싣자면, 고려의 경우에는 12세기 쯔음에 대략 500만명 정도로 추정이 된다고 한다. 사실 고려가 한참 전 시대인데다 조선과는 달리 기록에 집착하지도 않았던지라 정확한 인구 추산에는 어려움이 있다.
조선의 경우에도 학자마다 다르긴 하나 중종 시기에는 약 1000만명 정도로 추정되며 구한말 시기에는 1600만명 ~ 1700만명 정도로 추정된다.[46]
어찌되었든 조선시대에는 오랜 평화와 낮은 세율, 농업 기술 발전(농업 생산량 증대)으로 인구가 급격히 증가했다. 조선의 인구는 14세기 말 약 5,500,000명 정도로 추정되는데 18세기에는 약 18,700,000명으로 전근대 시대인데도 불구하고 무려 3배가 넘게 인구수가 말그대로 폭증하였다. 서기 2020년이 된 지금에도 전 세계에서 국력의 펀더멘탈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인구라는 점을 상기한다면[47] , 굉장히 큰 업적이라고 볼 수 있는 부분이다. 특히 당시 조선의 인구 밀도는 중국, 이집트, 일본을 제외하면 세계에서 제일 높았으며, 인구의 절대적인 수치 역시 순위권이었다. 동아시아 문화권의 높은 인구 부양력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14. 결론
넓은 땅을 자랑하던 고구려나 요나라의 공격을 막아낸 고려가 주목받다보니 상대적으로 외세의 침략에 무력한 모습을 보인 조선이 비교 대상이 되어 까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기술과 생산력의 발달, 인구의 증가, 통치 체계의 정비, 목민과 검소를 중요하게 여기는 지배층의 정치 사상 등 일반 서민들의 삶은 국제교역[48] 을 제외한 거의 모든 부문에서 조선이 일반 백성들 ,민초들에게 훨씬 살기 좋은 나라임은 '''틀림이 없는 주지의 진실이다.''' 당장 윗 문단의 인구 항목을 체크해보자, 살기 힘들고, 가난한 나라에서 어떻게 인구 수가 증가를 하겠는가.
군사력의 경우에도 고려 때와는 달리 중국과 일본의 힘이 더더욱 강대해진데다[49] 장수들이 제 힘을 내지 못하게 하는 군사체계의 문제가 병크를 일으켰을 뿐 생산력이나 인구수, 화기 등을 고려해볼때 순수하게 병력과 화력 자체는 조선이 고려보다 우위일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려한 순간에 열광하고 수수한 일상에는 별 관심을 가지지 않는 인터넷의 특성상 고려를 띄워주고 조선은 상대적으로 저평가되는 경향이 크다.
물론 고려를 과하게 치켜세우면서 조선을 지나치게 폄하하는건 분명 잘못된 것이지만 역으로 조선의 더 나은 점들을 칭송하며 고려를 헐뜯는 행위도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역사는 미래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말이 있다. 양자를 공정하게 비교해서 무엇이 뛰어났고 무엇이 부족했는지, 그리고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객관적으로 사료할 때 발전이 있는 것이다.
여요 전쟁 직후 국력의 정점을 찍었던 고려와 세도정치 ~ 구한말 조선을 비교하는 것도 불공평하고, 세종 ~ 문종까지 빛나는 발전을 이룩한 조선과 무신 정권을 거쳐 나라가 막장화되고 몽골의 부마국이 된 고려를 비교하는 것도 불공평하다. 조선은 고려보다 수백년 뒤의 왕조며, 그 수백년 동안 한반도의 인구는 1.5배로 늘었고 기술과 제도들은 정비되고 험지는 개간되었으며 사회는 발전해왔다. 그 과정을 모두 무시하고 사회의 발전상을 단순히 일대일로 비교하면 일부분을 제외한 모든 면에서 고려 시대가 뒤떨어지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이건 조선과 그 후대 시대인 대한민국을 비교하면서 조선이 뒤떨어진 사회였다고 비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물론 현대 국가인 대한민국과 전근대 국가인 고려 및 조선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긴 하지만, 전근대라 해도 그 사회의 제도나 구조는 분명 조금씩이나마 발전하는 것이 일반적이니만큼.
일반적으로 고려를 더 낫다고 여기는 이들은 변질된 유교의 막장성이나 유연하지도 개방적이지도 못한채 시대에 뒤쳐지다 결국 식민지 신세로 전락하게 된 조선의 지배자들에 대한 분노, 세번의 외침으로부터 제대로 나라를 지키지 못했던 조선에 대한 실망감 때문인 경우가 많다. 고려의 경우 중원을 차지한 강대국의 외침을 두번씩이나 성공적으로 막아내면서 외교적으로 상당한 이득을 보았고, 몽골만큼은 결국 당해내지 못했지만 이는 몽골이 말 그대로 전 세계를 휩쓴 강대국이었던데다 외교적으로 선방했다고 할만한 여지도 있다보니 불만족스럽게나마 납득할 여지가 있기 때문. 반면 조선의 경우 임진왜란때는 본래 패배했을 가능성이 높은 전쟁이 사실상 이순신이라는 영웅 한명 덕[50] 에 버틴것이나 마찬가지이고, 병자호란이나 일본에 이르러서는 후련하게 싸워보지도 못하고 졸전끝에 완패를 당해 굴욕을 당하고 나라마저 빼았겼기 때문.
반면 조선이 더 낫다고 여기는 이들은 군사력 외의 국가의 전반적인 시스템이나 백성들의 삶을 두고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경향이 크다. 이는 결국 각자의 가치관이 무엇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지의 차이일 뿐 어느쪽이 옳고 다른쪽은 틀리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일이다.확실한것은 고려를 치켜세우며 조선을 폄하하는이들의 주장처럼 조선이 고려보다 일방적으로 퇴보한 사회는 절대로 아니었다는것이다.[51]
물론 여성인권이라던지 일부분야에선 퇴보한 면이 있지만 애초에 모든시대는 발전과 퇴보가 있고[52] 초기에는 농사직설의 편찬과 후기에는 감자와 고구마 등의 구황작물 도입으로 고려때에 비해 농업이 발전하고 고려때보다 한 층 더 세련된 중앙집권화를 이루었으며 고려말에 들여온 화약무기를 발전시키고 살생을 금하는 불교의 영향으로 백성들이 호환을 당해도 대대적인 호랑이토벌이 없었던 고려와 달리 백성을 중시하는 유교의 영향으로 백성들을 공격하는 호랑이를 토벌하기위해 호랑이잡는특수부대인 착호갑사까지 만들고 극소수의 지배층들만 화려한 사치품을 즐길수 있던 고려와 달리 민화 등 서민미술이 발전한 조선을 일방적으로 고려보다 퇴보한 사회라고 볼 수 있을까? 각각 500년 전후의 역사를 가진 장수국가 였는데 초기에 위대한 군주들이 나라를 이끌었기에 오랜 기간 존속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