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군밤의 왕/개변된 역사

 




1. 아시아
1.1. 조선
1.2. 일본
1.3. 류큐 왕국
1.4. 청
1.5. 베트남
2. 유럽
2.1. 프랑스
2.2. 러시아 제국
2.3. 대영제국
2.4. 독일 제국
2.5. 오스만 제국
3. 아메리카
3.1. 미국
3.2. 하와이 왕국
4. 아프리카
4.1. 콩고 자유국
4.2. 트란스발 공화국


1. 아시아


  • 조청일수호조규
일본이 청과의 조약을 맺을 때 자립국이 아닌 자주국으로써 맺기 위해 조선을 끌어들여 청과 맞서게 하려고 했는데 청, 일본 어느쪽의 원망도 사기 싫었던 귀남이 조선과 일본은 서양 나라와 같은 자주국이되 청은 대국이니 다른 서양 나라와는 달리 같은 자주지국을 거느릴 수 있다고 제안하였고 자존심만 남았지 실력은 아직 없는 3국이 동의하여 서로를 자주국으로 인정했다. 다음 묘사를 보면 청은 조선에 공사를 파견하였고, 청 조정 내에서는 그냥 겉으로 보이는 상황에 만족하는 사람 반, 이 겉치레라도 하지 않으면 천조의 천명이 무너질테니 놔두자는 사람 반이라고 한다.
  • 아시아개발은행(Asian Development Bank)
디즈레일리 내각과의 물밑협상으로 극동에 대한 이권을 인정받은 러시아가 이때다 싶어 조선에 조러수호조약 개정을 비롯해 이런저런 황당한 요구를 내놓았다. 그런데 반침략 연대의 활약과 더불어 더비 백작의 폭로로 국내 여론이 들끓어 디즈레일리 내각의 입장이 난처해졌고 러시아 극동 관계자들 입장에서도 이러다가 조선인의 두만강 월경이 금지되면 그 날로 블라디보스토크 문 닫을 판국이라 북해도 공화국 투자를 알선해서 손해 보는 바를 벌충해주겠다는 귀남의 제안을 받아들여 아시아개발은행이 원 역사보다 거의 100년 앞서서 등판하게 됐다.
흑기군에 프랑스군이 참패하는 상황에서 조선측의 제안에 따라 조선, 청국, 일본, 베트남, 프랑스, 영국, 미국 등 7개국의 법학자 및 철학자들로 구성된 재판부가 조선 한양에 설치되어 약 2년여간 서양 중심의 국제법 뿐 아니라 동양의 관습법에 뒤이어 그 기반이 되는 동서양 철학[1] 등을 위시로 한 대토론을 벌인 끝에 무기 밀수를 제외한 모든 혐의에 대부분 무죄라는 결론을 내렸으며 유영복 본인에 대해서는 월남국 영구 입국금지 및 프랑스에 대한 소정의 배상금 지불을 명하였다. 물론 여기에는 당시 아프리카 식민지를 둘러싸고 유럽 각국의 각축전에서 벨기에측이 조선측의 논리를 이용해서 다른 유럽국가들을 곤란하게 만들자 이에 프랑스측이 도저히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국제사법재판을 대충 처리하고 벨기에측에 대응하려고 시도했는데 이를 알아차린 조선측은 프랑스측에게 도움을 주는 대가로 유영복을 풀어준 것에 가깝다. 재판 후 유영복은 동철에 스카웃되어 청나라 내의 철도 개설에 부정적인 사람들을 설득하는 임무를 맡아 전역을 떠돌고 있다.
'비유럽적 공산주의'를 추구하여 제2차 인터내셔널에 초청받지 못한 만민공산당이 1889년에 인천에서 일본 공산당을 끌여들어 이른바 '나머지 세상'의 인터내셔널 모임을 개최했다. 만민공산당 대표로 전봉준과 엘러노어, 일본 공산당 대표로 가타야마 센, 사이온지 긴모치가 참가했다. 그리고 경일학당에 머무는 청국인 몇몇, 하와이와 류큐 청년 두서넛도 무슨 일인가 싶어 찾아왔다. 거기에 분란을 일으키라는 옥균의 명을 받고 이완용도 참관했다. 이번 모임에서 양력 유럽처럼 오월 초하루를 노동절로 삼을 것인가, 아니면 조일 양국에서 모두 쉬는 백중날을 노동절로 지정할 것인가를 논의하였다.
  • 동아시아 유학 만방대회
상술한 동아시아 인터내셔널 모임에서 이완용의 유도로 '공맹의 말이 반드시 진리는 아니다.'라는 발언이 나와 유림의 여론이 들끓었고 안 그래도 공산당을 고깝게 여기던 귀남이 이럴 때 선비들이 가만히 있어야 되겠냐며 최익현을 설득하여 공자묘가 있는 취푸에서 조선, 청국, 일본 등 국적불문하고 정학을 닦은 이들이 모여 공자를 기리는 석전대제를 겸해 일종의 대규모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단순히 고준담론 오가는 자리가 되지 않도록 일부러 학통이 다른 사람들끼리 묶었다. 조선에서는 런던 한복판에서 골턴의 우생학을 정면으로 비판한 전우를 필두로 화서, 노사, 한주학원 선비들이 참가하였고, 청국에서는 광서제의 스승 옹동화, 각각 장지동, 이홍장의 추천을 받은 장패륜, 엄복[2] 등이 참가했다. 일본에서는 국학도들이 쓰와노파의 학통을 잇는 후쿠바 비세이 이하 대표단을 보냈고 이 소식을 들은 개화신사들은 고루한 무리가 일본의 학명에 누를 끼친다며 후쿠자와 유키치의 등을 떠밀었다. 거기에 모임 취지에 크게 감명을 받은 나카에 조민도 얼굴을 내밀었다. 그 외에도 류큐와 베트남에서도 사람을 보냈고 공자를 문수보살의 화신으로 여기는 티베트 불교에서도 흥미를 느껴 승려들을 보냈다.

1.1. 조선




1.2. 일본


통신사 파견을 조공으로 왜곡한 '야도 마사요시'[3]를 규탄하고 다시는 이런 망령된 말로 두 나라의 신의를 해치는 자들이 나오지 않도록 촉구하기 위해서 수신사 파견이 원 역사보다 9년이나 빠른 1867년에 이루어졌고 이와 함께 흔히 강화도 조약으로 알려진 '조일수호조규'가 일본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독소 조항 없이 조선과 도쿠가와 막부 사이에서 체결됐다. 그런데 조일수호조규에 '조일 양국은 자립국이되 (중국으로부터 책봉을 받았으므로) 자주국은 아니다.'라는 문구가 들어가서 이에 격분한 아이즈 번 존황양이파 낭인들이 테러를 감행하였고 인명 피해는 없었으나 수신사가 타고 온 제너럴 셔먼호가 침몰했다. 이로 인해 조약 재개정 문제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고 결국 일본은 대외적으로 자'주'국이 아니라 자'립'국이 됐다.
  • 반쪽짜리 신정부 출범
조선의 수신사 파견이 불러온 나비효과로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지지하는 동국 번들이 막부군의 연전연패에도 기세를 올리며 한데 뭉쳤기에 조정은 끝까지 중립을 지켰다. 그로 인해 토막파가 관군으로 인정받지 못했으니 에도 무혈개성도 일어나지 않았다. 결국 나라를 반절로 쪼개는 내전을 벌일 각오까지는 되어있지 않았던 웅번들이 에도성 공략을 포기하고 철수하여 보신전쟁이 무승부로 끝이 났다. 그리하여 공식적으로 출범한 신정부는 말이 하나의 정부지 사실상 웅번들이 우세하되 주도하지 못하는 서부와 요시노부가 공경들의 중재를 받아들여 늦게나마 쇼군직을 버리고 막부를 해체했음에도 여전히 도쿠가와의 접시꽃 문양이 휘날리는 동부로 나뉠 수밖에 없었다.
  • 류큐 왕국 병합 포기
원 역사보다 2년 빠른 1872년에 대만을 침략했지만 청으로부터 배상금을 받지도 못했고 코치웨카타 초조가 끌어들인 조선의 중재로 대만의 경작권을 얻는 대신 류큐 병합을 포기하기로 했다.
원 역사와 달리 메이지 6년 정변이 아닌 타이완 침략과 류큐 왕국 병합 실패가 원인이 되어 자의반 타의반으로 낙향하여 병환으로 작고했다.
원 역사보다 빠른 조선의 근대화, 사이고 다카모리의 낙향, 조일수호조규의 존재로 인해 메이지 6년 정변 이른바 정한론 정변이 일어나지 않았다.
원 역사에서는 오쿠보 정권에 대항한 친 사이고 유신지사들의 장외투쟁 성격이 강했으나 본작에서는 신정부가 군대 대신 민의를 모아 옛 좌막파 번들을 흔들어보겠다는 심산으로 사람을 풀어 자유민권운동을 주도했다. 바로 이때 조선이 뜬금없이 '선의'로 의원제를 도입할 생각이라면 어떻게든 도와줄 용의가 있다고 제안하였고 그 결과 자유민권운동을 두고 동국 땅의 여론이 두 동강났다. 신정부 입장에서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역시 '선의'로 두 쪽 난 여론을 봉합하는 데 도울 수 있을 만큼 돕겠다는 조선의 개입을 끽해야 에도에서 연설 한두번 하고 말 것이라고 생각하여 허용하면서 일이 더 꼬이기 시작했다.

조선의 선비들은 통신사 보내던 시절의 인연을 내세워 지번사들을 찾아가 일일이 의원제를 받아들이고 그 안에 당을 하나 꾸리게 되면 무가의 입장에서도 이익이 된다는 논리로 설득하였는데 오쿠보와 이토 히로부미의 기대와 달리 번주를 몰아낼 생각까지는 없었던 호농과 부민들이 이를 그럴듯하다 여기고 옛 다이묘나 대가의 당주 등 각 번에 확실히 뿌리내린 '어르신'들을 찾아가 신정부라 해 보았자 '외지인'이니 자신들에게 조금 양보만 해 주면 영영 번의 웃어른 자리를 유지할 수 있도록 협조하겠다는 타협안을 제시한 것이다. 인구로 보나 석고로 보나 의회가 설치되면 동국의 지분이 높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니 당초 승부를 걸어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요시노부를 비롯한 옛 좌막파들이 마음을 바꾸어 신정부에 합류하기 시작하여 겉으로 보기에는 동서의 분단이 그럭저럭 봉합되었지만, 실역사에서 있었던 과감한 개혁은 불가능해졌다.
  • 훗카이도 공화국 건국
바로 위에서 설명한 요시노부의 변심에 절망한 원 역사의 에조 공화국 초대 대통령 에노모토 다케아키가 무사들만의 나라를 세우고자 도쿠가와 가문 밑에서 버티다 보면 신정부가 제풀에 못이겨 내각과 군부에 자신들의 자리를 마련해주리라 여겼던 옛 좌막파의 하급 사무라이들과 함께 요코하마 항의 옛 막부 해군을 한데 그러모아 쓸 만한 함선이란 함선을 모두 끌고서 북해도로 건너가 마츠마에 번을 그대로 집어삼켜 독립을 선포하였다. 원 역사처럼 막부의 잔당 정도만 데리고 변방에서 최후의 저항을 벌이는 것이었다면 봉쇄 정도만 해두어도 알아서 무너졌겠지만, 본작에서는 쓸데없이 먼저 발전한 언론 때문에 북상하는 함대에 올라탄 무사만 해도 수백에 삿쵸 동맹의 전횡에 실망한 규슈의 사족들까지 합류하여 그 규모가 차원이 달랐다. 그리고 에노모토가 자치권만 주면 독립하지 않고 구성국으로 남겠다며 먼저 고개를 숙여 더 이상 적을 늘어나면 곤란했던 신정부가 이렇게 된 이상 북해도 개발을 미끼로 러시아 자본이나 먹어보자는 생각으로 에노모토의 공화국 건국을 승인하였다. 단 대일본국 구성국의 이름에 오랑캐(에조)가 들어가면 이상하니 국명을 북해도 공화국으로 바꾸었다. 북해도 공화국은 현재 아시아개발은행을 통해 러시아 자본이 들어오고 원 역사처럼 개척민도 받아들여[4] 착실히 성장중이다.
사이고 다카모리가 타이완 침략과 류큐 왕국 병합에 실패하고 실의에 빠진 채 낙향하여 일어나지 않았다.
  • 키오이자카의 변 ×
신정부에 불만을 품은 하급 사족들이 모조리 북해도 공화국으로 건너가 오쿠보가 암살당하지 않고 장기 집권하고 있다.
  • 의회 설치
원 역사의 제국의회보다 대략 10년 빨리 개원했다. 이름은 조선을 따라할 수 없었기 때문에 '국회'. 선거는 아직 백성들에게 이르다는 판단에 각 번에 고쿠다카에 따라 의원들을 적게는 둘, 많게는 다섯을 추천하게 하였다. 이로 인해 석고가 높던 동국의 우세가 이뤄진다. 한편 국회 개원이 빨라지면서 이토 히로부미입헌정우회 창당도 앞당겨져졌다. 그리고 전 쇼군 요시노부의 지원에 힘입어 민권운동 세력이 주축이 된 애국공당이 원내 1당을 차지하였다.
옛 좌막파 세력이 건재하여 여전히 동부에서 그 이름을 지키고 있다. 동국의 경찰 역할을 하고 있다.
  • 조일동맹 체결
이토 히로부미가 친조노선의 선봉장 요시노부를 실각시키기 위하여 원교근공으로써 정한을 이룩해야 한다고 선동하는 책자 '일본책략'을 유포하였다. 그런데 새로 만든 국제(헌법)에 따라 대책회의를 참관하던 귀남이 듣자하니 사건 수괴가 '나쁜놈' 이등박문이라, 혹시 그놈이 나쁜놈인 것 아니냐고 묻고 신하들도 있을 법하다고 생각해 뭔지 몰라도 생각대로 안되게 진행하는 방안을 떠올린다. 그것이 조일간에 군사동맹을 맺는 것. 이는 결박동맹이라 하여 가상적국간에 군사동맹을 맺어 서로의 군사활동을 감시함으로서 안전을 확보하는 방법 중 하나다. 물론 자신의 군사활동도 제약되지만 애초에 전쟁할 생각 자체가 없는 조선에게는 전혀 손해가 없고, 현재 조선의 육군은 20만 명으로 일본의 세 배나 되니 알려져도 무서울 것도 없었다(...). 그리고 거절할 명분이 없었던 오쿠보 내각이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조일동맹이 성립되었다. 그러고나자 이번엔 극동의 양대 개화국이 군사동맹을 맺었다는 소식에 청국과 러시아가 기겁을 하지만. 한편 불장난이 거하게 실패한[5] 이토는 행동을 같이 하던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조슈 번에게 해군을 넘겨주겠다는 오쿠보의 약속에 넘어가 자신을 팔아버려 권력을 잃고 미국으로 도피성 유학을 떠나게 됐다.
  • 육군 육성 잠정적 포기
20만 육군을 보유한 조선과 동맹을 체결한 것을 계기로 육군을 잠정적으로 포기하고 강력한 해군을 육성하여 강병을 이루기로 하였다. 원 역사와 달리 사쓰마 번이 아니라 조슈 번이 해군의 주도권을 잡았다.
  • 제1대 총선거
동일본 지역에 밀릴걸 걱정하는 조슈의 결사적 저항으로 원 역사보다 7년 미뤄져 1897년에 처음 일어날 예정이다. 사이온지 긴모치가 만들었고 가타야마 센이 이끄는 일본공산당이 애국공당 뒤에서 지지자를 모으는 중.
시베리아 철도 기공식이 앞당겨졌고 홋카이도 공화국을 매개로 일찍부터 교류하여 반러 감정이 강한 것도 아니라서 일어나지 않았다.
원 역사보다 대략 10년정도 앞선 1890년에 영일동맹을 체결한다. 이로인해 조일동맹은 파기되지만, 조선에서 먼저 영국 쪽에 일본에 대한 추천장(?)을 써서 보내며 추천하는 형태로 성사된 영일동맹이기 때문에 조선과는 직접적인 무력충돌을 자제하자고 미리 합의한다. 또한 조선과의 동맹파기로 인해 입헌정우회 주도로 육군 육성에 들어간다.
  • 징병제 도입
영일동맹을 계기로 신식 무기를 도입하는 등 군대를 더 강하게 키울 수 있게 되었기에 입헌정우회의 오쿠보 도시미치가 애국공당의 도쿠가와 요시노부에게 사정하여 원 역사보다 몇십년 늦었지만 징병제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막연히 섬나라니 해군만 기르면 될 것이다 여겼는데, 조선의 상승세가 그칠 줄 모르고, 그만큼 부단히 군비가 늘어나 영국이 제공한 원조와 차관으로 최신 어뢰정을 여럿 구비했다. 조선의 거함은 덩치만 크고 내실은 없으니 어뢰를 이용하면 충분히 격퇴할 수 있다는 말을 믿고 도입한 것인데 원 역사를 생각하면...

1.3. 류큐 왕국


  • 독립 유지
일본이 조선의 중재로 타이완 경작권을 얻는 대신 류큐 왕국 병합을 포기하였다. 다만 이미 있던 일본의 이권은 인정하는 방향으로 합의가 이루어졌고 어차피 사탕수수 농사와 중계무역 외에는 먹고살 길이 그리 많지 않은 나라라서 경제적으로 일본에 종속된 것은 달라지지 않았다. 물론 류큐 입장에서 사실상 종속과 실제의 합병은 하늘과 땅 차이겠지만. 그리고 독립국으로서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위해 가까운 나라인 조선과 일본에 공사를 파견한다.
  • 관광업 활성
대만에서 설탕이 나오기 시작하여 먹고살 길이 사라진 주민들이 그렇게 원수처럼 여기는 가고시마(사츠마)와 일손이 부족하다는 바다 건너 하와이 왕국으로 일거리를 찾으러 떠나고 있다는, 초대 주조선공사로 부임한 코치웨카타 초조의 푸념을 들은 귀남이 관광업을 떠올리고 그 모범으로 대원군에게 국비지원 효도관광을 제안했다. 뒤이어 오경석이 역관들에게 준비를 시키는 과정에서 한성의 손탁호텔을 본따, 귀한 분들이 유람을 할 때 머물법한 고급 여관을 짓는 등 투자를 시작했다.

아울러 해외까지 갈 형편이 안되는 이들은 조선 국내여행이나 유자들의 워너비였던 중국 강남지역으로도 관광을 가기 시작했고 그에 따른 투자도 이루어지고 있다. 여기에 더해 일반 노동자들도 세상 구경 하고 싶다며 도중(노조)을 통해 15일씩 휴가를 달라고 요구해왔다. 임금인상 요구였다면 도중을 허가한 취지에 맞지 않는다고 거절할 수 있지만 나라 정책을 따르겠다는 것인지라 자본가들은 한숨만 쉬는 실정.

덤으로 류큐에 다녀온 흥선군은 난초 그림에 더해 야자수가 있는 바다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1.4. 청


  • 조청 철도사업
월남 문제가 끝난 뒤 서태후의 자기 정치로 조선 내에서 반청 분위기가 고조됨에 따라 어떻게든 유혈 사태를 피하고 싶었던 귀남이 조청 양국의 우호협력관계를 증진하고자 '선의'로 동삼성 철도 공동부설을 제안하였다. 그런데 이런 월척을 내버려둘 수 없었던 이홍장이 판에 뛰어들면서 단순히 만주에 공동으로 철선과 전신을 깔자는 정도였던 제의가 양광(兩廣)[6]에서 경상도까지 철도를 놓는 넉넉잡아 50년간 추진할 일대 대사업으로 확장됐다.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공상의 영역에 속한다고 여기던 시절이니 당초 '만주 철도사업' 입찰에 뛰어들었던 영프독 삼국의 철도회사들이 난색을 표했으나, 사업의 타당성은 떨어져도 장기적으로 수익성이 천장을 뚫고 치솟을 것이 너무나 명백하므로 결국 청과 조선 양국에 제철소 건설, 기술학교 설립, 설비 국산화 지원 등 대규모 기술이전을 감수하고 공사에 착수했다. 참고로 조선측 제철소는 해주 인근에 짓게 된다.[7] 작중에서 장지동이 30년 정도면 양광에서 경상도까지 노선이 완성될거라고 말하는걸 보면 순탄하게 진행하고 있는 듯 하다.
  • 서태후의 동아철도회사 지분 확보
서태후가 양이들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다는 장지동의 말에 낚여 원명원 증건 예산을 빼돌리고 비장해 두던 자신의 재보들까지 적잖이 헐어내어 청의 양광에서 조선 경상도에 이르는 철도 사업을 책임질 '동아철도회사' 일명 '동철'의 최대주주가 됐다. 아시아 대륙을 가로지르는 초거대 공사에 경악했던 서양 투자자들은 뒤이어 서양식 주식 제도를 이해하고 절반 이상 투자하면 동철 공사를 장악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서태후가 진짜로 과반액을 투자하자 그 재력에 경악하게 되었다. 이후 정권을 장악한 이홍장이 북양군을 육성하기 위해 황실 지분 일부를 처분해 서태후가 여전히 최대주주는 맞지만 과반선이 붕괴했다.
심복 장문상에게 공격 당해 중태에 빠진 것은 원 역사와 같지만 본작에서는 서양 의사들의 발빠른 응급처치 덕분에 마신이가 죽지 않았고 다리를 저는 정도의 후유증을 가진 채로 끝나게 되었다. 참고로 이러한 것 때문에 청나라에서 조선으로 양의학 유학을 오는 사람도 몇 있다고 한다.
새로운 왕이 즉위함과 동시에 빠르게 문명국으로 발전하는 조선을 보고 자극을 받은 공친왕이 반란을 일으켜 북경을 점령했지만, 기관총 등 선진 무기로 무장한 관군의 격렬한 저항 때문에 가장 중요한 동치제의 신병을 확보하지 못해 거사가 사실상 무위로 돌아갔다. 그때 귀남이 무탈하게 동삼성을 지키고 일굴 이가 있으면 좋겠다며 이 기회에 딴집 살림 차려 나가는 것이 어떻냐고 제안하였고, 이홍장이 서태후를 견제하고자 이를 받아들여 얄팍한 수[8]로 모든 잘못을 이홍조를 비롯한 청류파에게 뒤집이 씌워 숙청하고 공친왕을 신설한 동삼성총독에 제수했다. 비록 당초의 바람대로 주공은 되지 못하였으나 공친왕은 이에 실망하지 않고 청국이 끝내 고꾸라져 다시는 일어서지 못했을 때 만인들이 살아갈 터전을 미리 닦는 대업이라며 동삼성 개발에 열중하고 있다. 서양 농법을 도입하고 조선인과 한인을 받아들여 소출이 날로 증가하고 있으며 뜻있는 만인 젊은이들이 넘어오고 있다. 만주에 많은 철광과 석탄을 이용해 역사대로 만주에서 중공업을 발전시킬 계획도 있으며, 생각 외로 잘 돌아가서 아예 독립해버릴까 하는 생각이 문득문득 든다고. 이에 더하여 만주어를 정비하여 동서고금의 명저들을 만주어로 옮기고 동삼성에 만주어를 보급하고 있다.
  • 서태후의 조선파천
이홍장이 실권을 잡고 난 후 한인과 만주인을 가리지 않고 능력주의 채용 정책을 펴서 만주인 사이에 불만이 높아진 걸 본 서태후가 이들을 이끌며 서양 나라 사이의 다툼을 이용해 정권을 되찾기 위해 러시아 교회로 어린 광서제를 데리고 피신한다. 이를 옆에서 본 조선, 주로 김옥균이 중재에 나서 친러시아파 만주인으로 구성된 새 정권을 세우고, 영국을 달래기 위해 이홍장에게서는 실권을 빼앗되 군권은 남겨두고, 서태후는 조선으로 잠시 피해있게 된다.
  • 강남 만인소 운동
강남 향신들 사이에서 근대화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조선처럼 의회를 설치하여 천하의 공의를 모으고 부세의 쓰임을 놓고 가부를 결정해야 한다는 생각이 형성되고 있었는데 강유위가 '천하의 흥망에 필부도 책임이 있다.'는 '조선변정고'의 마지막 문장이 문제가 되어 투옥당했다. 이에 역시 만인 조정을 믿을 수 없다는 반감이 확산되었으나 졸지에 흥한 운동의 구심점이 된 유영복이 무력 투쟁은 불가하다는 입장을 고수하여 꿩 대신 닭이라고 강남 관광중이었던[9] 김병국의 조언을 받아 강유위 신원, 의회 설치를 주장하는 만인소 운동을 시작했다. 그런데 병국은 양가 일대의 서생이 결코 일만 명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몰랐다. 소주만인소, 항주만인소, 소흥만인소, 통주만인소를 시작으로 강소성과 절강성을 넘어 안휘, 호북, 강서에서도 소가 올라오니 만인소가 아니라 수백만인소에 가까웠고 이러한 향신들의 열정이 광서제를 각성시켰다.
  • 의회 설치
이론 무장을 마친 광서제가 이홍장의 주장을 친히 논파하고 원 역사에서 흠정 헌법 대강 선포와 동시에 이루어진 자의원(하원), 자정원(상원) 설치를 앞당겼다.
조선에서 활동하고 있는 앙리 뒤낭이 국제 모금 활동을 벌여 청에 적잖은 지원금을 전달하였다.
  • 자의국 설치
각 성에 지방 의회라고 할 수 있는 자의국을 설치하였다.
  • 남양군 강화
서태후가 가지고 있던 동철의 지분 절반을 독일에 넘기고 함선과 무기를 받아와 장지동이 이끄는 남양해군에게 넘겨주면서 북경 정계에 복귀하였고 그로 인해 북양군의 무력 독점이 깨어졌다.
  • 백가쟁명 백문제개
의회 설치를 계기로 한족과 만족의 갈등이 본격화될 것이라 내다본 프랑스-러시아 동맹이 중국 진출의 야욕을 드러내자 청이 계속 유지되어야 중공의 발흥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 귀남이 시무책을 올렸고 광서제가 이를 받아들여 백가쟁명 하듯 만백성이 하등의 꺼림 없이 나라에 도움 될 방도를 진언케 하겠다고 포고하였고 거기에 더불어 청이 한 나라에만 마음을 주면 다툼이 일어나니 백문제개, 즉 시장 전면 개방을 선포했다. 식민지 경쟁의 후발대라고 할 수 있는 독일과 미국은 당연히 이를 쌍수를 들고 환영했고 영국은 시장을 독점하고 있던 터라 영 마뜩찮았지만 유럽 대륙 전체와 맞서지 않기 위해서는 독일에게 조금은 양보할 필요가 있어 부득이하게 이 문호개방 정책을 찬동했다.
  • 공자개제고 조기 출간
요순의 성세란 실제 있던 것이 아니라 만세사표 공자가 탁고하여 당대와 후대에 널리 가르침을 펴기 위해 만들어낸 이상이라 주장한 강유위의 저서 공자개제고가 동아시아 유학 만방대회를 맞아 원 역사보다 8년 일찍 출간되었다.
  • 광서제의 국혼
서태후의 조카딸 예허나라 정분(효정경황후)이 아니라 원 역사에서 광서제의 총애를 받았던 후궁 각순황귀비 타타라씨가 황후가 되었다.
  • 국민당과 흠정당
의회가 설치됨에 따라 서태후가 유영복과 강유위 등 혈기 넘치는 서생들을 영입하여 국민당을 차렸다.[10] 그리고 이홍장이 국민당에 대항하여 흠정당을 꾸렸다.
원세개가 자의원 집회일에 의화단을 동원하여 국민당 의원들을 습격할 생각이었으나 때마침 북경에 체류하고 있었던 전봉준이 김가진의 부탁을 받고 이들이 '땅을 달라! 일을 달라!' 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요구를 하도록 유도하여 북양군의 뜻과 달리 오히려 서태후가 주도하는 개혁 여론에 힘이 실렸다. 그리고 저들도 모르는 사이 저들 비호해주던 북양대신의 등을 찔러서 후원자가 사라진 의화단은 먹고 살 길을 찾아 트란스발 공화국으로 향했다. 반영감정으로 똘똘 뭉친 의화단은 역시나 영국이라면 치를 떠는 아프리카너들과 죽이 맞아 트란스발 공화국에 쉬이 정착하였고 비슷한 처지의 흑인들에게 권법을 전파하였다.(...)
조선과 청의 학자들이 성현의 발자취를 찾는다고 중국 곳곳을 쑤시고 다니는 중에, 원역사보다 6년 정도 일찍 왕의영이 용골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때마침 기자의 흔적을 찾느라 눈이 벌개진 조선 학자들[11]이 그것을 보고 혹시 고대 갑골문이 아니냐고 추측하여, 역사보다 빠르게 갑골문의 출처를 추적하고 은허를 발굴하게 되었다. 원 역사에서 왕의영은 1900년 의화단 운동의 여파로 서양 군대가 중국에 쳐들어오자 절망에 빠져 자살했고 중화민국 시기가 되어서야 은허 발굴이 시작되지만, 작중에서는 의화단 사건이 훨씬 빠르게, 소규모로 터져 유야무야된데다 원 역사보다 훨씬 빠르게 은허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결국 직접 은허를 발견하는 영예를 누렸다.
자의원에서 국민당 영수 노릇을 하던 서태후가 독살을 당할 뻔한 사건이 일어난다. 이에 이홍장은 자신 밑에 있던 원세개가 수를 썼든 서태후에 불만을 품던 국민당의 청년들이 일을 내든 어느 쪽이든 간에, 그래도 서태후가 만인이니 자의원에서 나온 정책에 불만을 품었더라도 크게 반발하지 않았던 몽고와 토번의 왕공들이 경각심을 가져 대청이 흔들리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하지만 몇 년간 서태후를 보필한 김옥균이 보기에는 서태후의 자작극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였고 실제로 서태후가 국민당 내에서 자신에게 불편한 기색을 보이자 이를 걸러내고자 만든 자작극이었다.
서태후의 독살 미수 자작극이 조선에 의해 광서제에게 들켜 약점을 잡히게 되어 서태후가 이끄는 국민당도 황제의 뜻을 따르게 되고 이홍장 또한 하직한다. 이홍장의 후계로 원세개가 북양대신 자리에 올랐으며 무근전에서 손덕명, 양계초, 담사동 등이 변법하여 자의원에서 통과시키고 있고 이에 불만을 느낀 세력들은 원세개가 총칼로 다스리고 있다. 서양 언론에서는 이를 친위 쿠데타로 추측하고 있다.
  • 남양군 해체 및 성 방위군(?) 창설
광서제의 개혁에 반발하는 몽골, 티베트의 왕공들이 남양대신 장지동에 접근하자, 이를 우려한 중앙 조정은 남양군을 해체하여 북양대신 원세개의 신군으로 흡수하되 운영을 각 성의 자의국에서 맡게 하였다. 위험한 조치지만 강남의 반발을 최소화하려면 어쩔 수 없었고, 난이 일어나도 강력한 구 북양군이 능히 제압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여 위험을 감수하기로 한다.
  • 차하르 반란 진압
청 조정의 변법에 불만을 품은 몽골(차하르)의 왕공족들이 젭춘담바 후툭투 8세의 만류도 뿌리치고 옛 조상들처럼 말에 올라 반란을 일으킨다. 당연하지만 산업혁명의 시대에 먹힐 리가 없어서 기관총 등의 근대적 신무기로 무장한 원세개의 신군에게 순식간에 진압당했다.
  • 북양군의 쿠데타 및 조청전쟁
북양군 파벌의 남양 병공창 장악을 두고 병공창에 투자지분이 있던 조선과 마찰이 발생하자, 조선의 요구를 수용하면 북양군 파벌이 권력을 잃고 조선이나 일본의 군부처럼 내각의 명령에 복종하는 평범한 군대가 될 것을 우려한 원세개의 휘하 제장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온건파 광서제를 자금성에 사실상 유폐시킨 뒤 병기창 접수를 강행한다. 이에 반발한 조선이 군을 출동시켜 압록강을 넘으면서 조청전쟁이 발발한다. 원세개는 처음엔 '조선군 병력 3만이 압록강을 건넜다'라는 보고를 받고는 이 정도면 쉽게 대응할 수 있다며 자신감을 보였고, 이후의 보고들도 같은 '조선군 병력은 3만'이라는 내용이라서 더욱 안심하였지만, 저 보고가 제각각 다른 부대들을 지칭한 것, 즉 조선군이 최소 총병력 9만 명 이상의 대군이라는 걸 뒤늦게 깨닫고 경악한다.

1.5. 베트남


  • 제2차 사이공 조약
청의 개입과 조선의 중재로 외교권을 지켜냈고 조약에 '청국과 월남국은 법국(프랑스)이 월남 강역 내외에 얻은 이익을 존중하며, 법국은 그 이익으로 말미암아 월남 또한 발전할 수 있도록 적극 협조한다.'라는 애매한 구절이 덧붙여졌다.

2. 유럽



2.1. 프랑스


비공식(?) 주코뮌 조선공사 최익현, 앙리 뒤낭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에 원 역사대로 무너지기는 했지만 코뮌 내 강경파의 포로 학살도 정부군의 초강경진압 이른바 피의 일주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들 코뮌 주류파는 조선으로 망명(추방)하여 조선에 '작은 파리'라는 거주구역을 만들었고 급격히 개화중인 조선에 서구 문화와 서구식 체계를 도입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아울러 프랑스에서는 극동의 준문명국과 거의 평등한 조약을 맺었을 뿐 아니라 다수의 행정관까지 제공한(물론 어쩌다 제공했는지는 조선이나 프랑스나 둘 다 제껴뒀다.) 자신들이야말로 문명개화의 책임을 다하고 있다고 마구 선전해대는 중.
  • 튀일리궁의 보존
원 역사에서 일어났던 파리 코뮌 강경파의 자살행위와 같은 요인 살해(대표적으로 파리의 대주교인 조르주 다르부아)와 문화재 반달행위는 작중에서는 최익현의 노력으로 코뮌군 사령관 돔브로프스키가 조기에 항복함으로써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 그 결과 원 역사에선 코뮌 측의 방화로 불탄 튀일리궁이 무사할 수 있게 되었다. 작중에서는 튀일리궁은 그대로 대통령궁으로 사용된다.
  • 1889년 만국박람회
조선이 조선 국명으로 처음 참가한 1889년 만국박람회도 역사와 비슷하게 개최되었다. 바스티유 습격 100주년을 기념하는 만국박람회라 서구 왕정국가들은 공식적으로 참여하지 않고 민간의 참여만 있었지만 전 왕조를 뒤엎고 현재 체제가 된 조선과 청은 떳떳하게 참가하였다. 원 역사의 이 박람회에서 프랑스는 세네갈의 현지인을 데려다가 토굴을 짓고 민속적인 모습을 전시했는데 여기서는 식민지의 문명화라는 명분이 널리 퍼진 상태라 현지인을 프랑스인처럼 꾸미는데 치중하였다.
  • 조러불동맹
원 역사의 러불동맹에서 조선과 추가로 동맹을 맺는다.
알프레드 드레퓌스 대위가 억울하게 간첩으로 몰려 처벌받자 오페르트 집안 사돈댁인 드레퓌스 가문[12]의 지원 요청을 받은 오페르트와 조선 측이 여론전에 가담한다. 주프랑스 조선공사로 있던 김홍집은 여론전에서 밀리자 드레퓌스 사건은 독일 간첩들의 조작으로 일어난 일이며, 삼백 명의 간첩단 명부를 확보했으나 신변의 위협으로 밝힐 수 없다는 당당한 선동과 날조를 날려 응수한다. 결국 드레퓌스 대위는 여론전과 조르주 피카르 중령의 수사에 힘입어 원 역사보다 훨씬 빨리 무죄로 석방된다.
드레퓌스 대위가 석방된 후 오페르트가 테오도르 헤르츨과 대화를 나누던 도중 "오스만 정부의 고질적인 부채를 유대인이 대신 갚아주기라도 하지 않는 이상 술탄은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에 눌러앉는 것을 용인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던졌는데, 이를 들은 헤르츨은 "루이지애나도, 알래스카도 사고 팔 수 있는데, 가나안 땅이라고 안 되리란 법 없다"며 돈을 모아 팔레스타인 땅을 매입한다는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수석 랍비의 지지를 받아 유대 복지재단을 설립한다. 그리고 오페르트와 김홍집을 통해 조선에 유대인의 사정이 전해지자 귀남이 궁방전의 일부를 빌려주면서, 동유럽 유대인들이 조선으로 이민을 오게 된다. 그리고 이들을 통해 조선에 키부츠농협이라는 이름으로 퍼진다.

2.2. 러시아 제국


  • 조러수호조약
공식적으로 확정된 바 없던 조·러 간의 국경을 확실히 하고, 두 나라 백성의 교역을 자유롭게 한다는 명분 하에 조러수호조약을 체결하였다. 그 내용은 내륙을 통한 교역을 허용하고 조·러 백성들이 양국 접경지대에서 통상, 이동, 거주의 자유를 가진다는 것이다. 협상을 주도한 무라비요프 백작은 조러수호조약을 앞세워 함경도 일대를 차근차근 집어삼킬 속셈이었다. 그런데 예상을 훌쩍 뛰어넘은 조선 농민들의 개척 러시 때문에 오히려 연해주의 경제가 조선에 종속되는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황급히 귀화하고 3년간 정주하지 않으면 종자와 농기구를 제공하지 않겠다고 포고했지만, 그랬더니 대부분의 농민들이 그럼 일만 하다가 겨울에 돌아가겠다는 반응을 보였으며 농기구 장사를 하기 딱 좋다고 조선인 상인들이 몰려들었다. 블라디보스토크 내에 거주지 않으면 고용할 수 없게도 해 봤지만 지방 행정이 어설프다 못해 중세적인 구석까지 남아있는 러시아의 지방관들에게 어지간한 평민들도 여차하면 관청에 소장을 쓸 줄은 알 정도로 관을 대하는 데 익숙한 조선인들은 너무나 벅찬 상대였다.(...) 그나마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키거나 해서 행정 및 치안을 엉망으로 만들지는 않고 왠만하면 러시아 관청에게 협조하는 것만으로도 러시아 입장에선 감지덕지할 수준.
심지어 연해주 개척 소식을 듣고 새로 유럽에서 들어오는 이들도 태반이 조선과의 교역에만 관심을 가졌다. 결국 원하던 조항이 필요 이상으로 들어갔다며 영국의 반발을 무마시키기 위해서 녹둔도를 조선의 영토로 인정했을 정도로 김칫국을 마시던 러시아에서 조약을 체결한 지 한 해도 지나지 않아 재개정을 간청했다. 물론 조선의 반응은 "응 싫어."
반침략 연대의 활약으로 발칸의 국가들이 캐나다 수준의 자치권을 획득하면서 양국이 충돌을 피했고 그 결과 산 스테파노 조약 체결과 베를린 회의가 일어나지 않았다. 그로 인해 러시아가 최소한의 피해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으므로 3제 동맹이 파탄나지 않았고 알렉산드르 2세의 자유주의 정권이 굳건히 유지되고 있다.
  • 아시아개발은행(Asian Development Bank)
데즈레일리 내각과의 물밑협상으로 극동에 대한 이권을 인정받은 러시아가 이때다 싶어 조선에 조러수호조약 개정을 비롯해 이런저런 황당한 요구를 내놓았다. 그런데 반침략 연대의 활약과 더불어 더비 백작의 폭로로 국내 여론이 들끓어 데즈레일리 내각의 입장이 난처해졌고 러시아 극동 관계자들 입장에서도 이러다가 조선인의 두만강 월경이 금지되면 그 날로 블라디보스토크 문 닫을 판국이라 북해도 공화국 투자를 알선해서 손해 보는 바를 벌충해주겠다는 귀남의 제안을 받아들여 아시아개발은행이 원 역사보다 거의 100년 앞서서 등판하게 됐다.
원 역사보다 5년 늦은 1886년에 발생했다. 그리고 차르 암살을 주도한 단체 '인민의 의지' 구성원들 일부가 체포되지 않고 조선으로 도주했다. 그리고 그들은 조선의 선의빔을 얻어맞고 붕괴해버렸다.[13]
  • 조러불동맹
원 역사의 러불동맹에서 조선과 추가로 동맹을 맺는다.

2.3. 대영제국


  • 반침략 연대(Anti-aggression League)
디즈레일리와 러시아의 밀약으로 조선을 비롯한 극동이 미끼로 던져진 것에 분개한 전우 이하 영국 유학생들이 동방문제의 평화적인 해결을 바라는 글래드스턴과 손을 잡고 원 역사보다 6년 빨리 반침략 연대가 결성했다.
  • 아일랜드 자치법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러시아를 격파한 글래드스턴 내각이 기세를 몰아 원 역사보다 28년 빠른 1886년에 아일랜드 자치법을 통과시켰다.
원 역사보다 대략 10년 빠르게 조선의 추천(?)으로 일본과 동맹을 맺는다.
조선의 개입으로 의화단이 포함된 중국인 노동자가 트란스발 공화국으로 대거 넘어갔고 거기다 조선에서 공식적으로 트란스발 공화국에 대한 무기 수출을 진행하면서 이에 나비효과가 일어나 보어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

2.4. 독일 제국


  • 세 황제의 해 ×
프리드리히 3세가 조기에 후두암 수술을 받아 비록 벙어리가 되었지만 1888년이 세 황제의 해가 되는 일은 없었다. 프리드리히 3세는 자유주의 헌법을 의회에서 통과시키는 등 여러 업적을 남기고 1892년 안락사를 택한다.
  • 자유주의 헌법
프리드리히 3세가 일찍 죽지 않고 비스마르크를 앞세워 자유주의 헌법을 통과시킨다. 이로인해 비스마르크에게 배신당했다고 여긴 보수파와 원래 사이가 좋지않던 카톨릭,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비스마르크가 재상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다.

2.5. 오스만 제국


  • 동방문제
사사건건 훼방을 놓는 조선을 러시아에게 먹이로 던져주고 러시아와의 전쟁도 불사하려는 영국의 디즈레일리는 언드라시 문서[14]를 받아들이는 시늉만 한다. 물론 오스만 제국은 자유화할 생각이 없었고 디즈레일리의 속셈대로 되는 듯 했지만 조선 선비들과 글래드스턴이 주축이 된 반침략 연대에 의해 반전여론이 높아져 결국 오스만 제국의 자유화를 채권단[15]이 강제하는 방향으로 화해하게 된다.

3. 아메리카



3.1. 미국


조선의 개입으로 원 역사보다 약해진다.

3.2. 하와이 왕국


  • 대검 헌법[16]
귀남의 조언을 들은 칼라카우아 국왕이 전제군주정을 고집하지 않고 선제적으로 유색인종의 참정권까지 보장하는 개헌을 추진하였다. 이에 후술할 호놀룰루 사건으로 기세가 꺾인 백인 지주들이 한발짝 물러나고 칼라카우아 국왕 역시 양보하여 모두의 참정권을 인정하되 재산 제한을 조정하여 얼추 백인과 비백인이 동률을 이루게끔 합의를 보았다.
  • 호놀룰루 사건
조선의 주선으로 하와이로 건너가 칼라카우아 국왕의 친위대 노릇을 하게 된 사이토 하지메와 그의 일도일포류 제자들이 어명을 잘못 전달한 수상 깁슨의 말을 받들어 할라와 한 농장을 습격하여 호놀룰루 소총대 대원 넷을 도륙했다.[17] 이 소식이 샌프란시스코에 전달되면서 워싱턴 D.C. 조야에 황화론이 불어닥쳤는데 이 사건이 언론계의 두 거물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조셉 퓰리처의 자존심 싸움으로 변질되면서 황화론은 흐지부지되고 결국 조선과 일본이 함께 시찰단을 보내 중간에서 하와이의 원주민들과 백인들의 갈등을 조정하는 쪽으로 중재되었다.

4. 아프리카



4.1. 콩고 자유국


레오폴드 2세가 콩고를 사유화하기 위하여 조선의 사례를 걸고 넘어지자 이에 프랑스측은 조선측에 유영복을 풀어주는 대가로 조선의 지원사격을 받았다. 더 이상의 식민지 경쟁을 막고 싶었던 영국은 프랑스와 조선이 베를린 회담에서 내놓은 논리에 재빨리 탑승하였고 여기에 주인공의 선의로 프랑스와의 공동노력으로 조선이 얼마나 발전했는 지에 대한 자료까지 현장에 살포되면서 나머지 국가들도 프랑스측의 논리에 동조하여 '실효지배'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현지를 점유하고 있는 정치 세력에 대한 문명화 지원, 그런 노력 성과에 대한 상세한 정보들을 공개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어 레오폴드 2세의 콩고 사유화가 무산되었다.

4.2. 트란스발 공화국


  • 복서의 반란(Boxer Rebellion)
일거리를 찾아 트란스발을 찾아온 의화단 출신의 청나라 노동자들과 이들에게 권법을 배운(...) 흑인들이 처우개선을 주장하며 일으킨 시위. 영국인들과 보어인들에게 저들끼리 다투어서는 이들에게 속절없이 당할 수밖에 없다는 위기감을 심어주어 절로 여러 민족 사이에 세력의 균형이 이루어졌다. 참고로 의화단 운동을 영어로 '복서의 반란'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원 역사와 달리 의화단 운동이 청나라가 아니라 트란스발 공화국에서 일어난 것이다.
[1] 예를 들어 동양적 군신관계의 기본 전제인 충(忠)의 개념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2] 베이징 대학의 초대 교장이다.[3] 원 역사에서도 같은 주장을 신문에 실었다.[4] 원 역사에서 일본의 홋카이도 개척은 한족의 만주 개척, 미국의 서부 개척에 뒤이은 세번째 규모 인원의 이동이었다.[5] 작중 묘사로는 - 불장난을 하다 보면 연기에 놀란 이웃이 대문 박차고 뛰어들어 물을 퍼붓기도 하는 법이다.[6] 광둥성과 광시성.[7] 해주 인근 재령군과 은율군 일대에는 상당한 규모의 철광이 있다.[8] 자신과 이홍조의 이름이 비슷하다는 것을 이용해 장문상의 자백을 왜곡했다.[9] 류큐 항목 참조.[10] 놀랍게도 서태후가 직접 정한 이름이다.(...)[11] 조선에서 평양의 기자묘를 발굴해보려 했으나 실패로 돌아가면서 기자의 존재성 자체가 의심받고 있었던 시기였다.[12] 원 역사에서와 같이 작중에서도 사돈관계가 되었는데 드레퓌스 대위와는 성만 같고 혈연 관계는 없는 랍비 명문가이다. 그런데 조선에선 이게 와전되어서 오페르트의 집안이 알프레드 드레퓌스의 집안과 사돈을 맺은 것처럼 알려져서 조선 측에서 직접 가담하게 되었다.[13] 정확히는 망명 후에 받은 '이곳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자기들이 알아서(...) 내분을 일으키고 붕괴해버렸다. 그리고 이는 러시아를 거쳐 각 유럽 열강들에게까지 전달되어 대반사회세력 대책이 이들을 양지로 끌어내어 내분을 일으키는 방식으로 전환되는 계기가 된다.[14] 원 역사에서 오스트리아 헝가리의 외무 장관 언드라시 줄러가 제안한, 오스만 제국의 자유화를 통한 발칸 평화안을 담은 문서를 말한다.[15] 원 역사에서 OPDA, 오스만 공적 채무 관리국[16] 1887년 미국인 및 미국계 하와이인들이 무장조직 '호놀룰루 소총대'로 칼라카우아 국왕을 협박해 제정한 헌법. 하와이 왕국은 입헌군주제 국가이며 비백인 주민들은 참정권이 없다고 명시했다.[17] '호놀룰루 소총대가 무엄한 생각 품지 못하도록 단단히 경고를 해 주라'는 어명을 '호놀룰루 소총대가 무엄한 생각 품지 못하게끔 하라'라고 잘못 번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