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트 게임
1. 개요
'''The Great Game / Большая игра'''
1813년(러시아-페르시아 굴리스탄 조약)부터 1907년(영러협상)까지의 대영제국과 러시아 제국의 작게는 중앙아시아와 인도에서 크게는 흑해 연안에서 극동을 아우르는 유라시아 전역의 패권을 두고 일어난 전략적 경쟁을 뜻한다. '''그림자의 토너먼트'''라고도 한다. 일부에서는 "'''냉전이 그레이트 게임의 연장전이다.'''"라고 주장할 정도로 19세기 세계 정세와 그 후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동유럽에서는 크림 전쟁, 중동과 중앙아시아에서 가운데 오스만 제국과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을 두고 했던 경쟁, 그리고 티베트와 위구르도 인도에 자리잡은 영국과 북쪽에서 간을 보는 러시아 두 세력의 각축장이었고 동아시아와 캄차카 반도에서도 직·간접적으로 대결했다. 어떻게 보면 작게나마 엮인 곳들을 모두 따져보면 유라시아를 넘어 '''전세계'''이기도 하다. 러시아는 한때 하와이에 영향력을 내세우려고 했었고, 러시아령 알래스카를 미국에게 팔아넘긴 것도 결국 영국(지금의 캐나다)을 견제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또한 일본의 메이지 유신과 조선에서의 거문도 사건과 제주성 위협사건이나 영일동맹, 러일전쟁, 한일합방 역시 크게는 그레이트 게임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일본이 영국의 대리인 역할)
'그레이트 게임'이란 용어는 영국 동인도 회사 육군 웨일스 기병대 정보 장교였던 아서 코놀리의 말에서 따왔다. 군인 출신 언론인 겸 역사가인 피터 홉커크가 쓴 책 '그레이트 게임'[1] 역시 이 주제를 다루고 있다.
공식적으로는 1907년(영러협상)을 통해 영국과 러시아가 우호 관계를 맺으면서 끝난 것으로 간주한다. 일부에서는 1917년 10월 혁명을 종점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며 1905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전하면서 끝났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결론은 '''러시아 제국의 패배, 대영제국의 승리인 셈.'''
2. 역사
19세기 내내 영국의 정치가들을 악몽에 시달리게 한 것은 러시아라는 거인에 대한 공포였다. 러시아의 남하는 오스만 제국과 페르시아와 영국의 인도 지배에 대한 위협이 가중 됨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제프리 브룬, ''19세기 유럽사'' [2]
나폴레옹 전쟁 이후 반프랑스 동맹군의 승리를 이끈 주역인 영국,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의 소위 4대 전승국이 형성된다. [3][4] 이들 중에서도 영국과 러시아가 전쟁에서 가장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나폴레옹의 패망 이후에는 영국과 러시아 간의 대결구도가 자연스레 형성되었다. 특히 영국은 자국의 안보를 위해 유럽 대륙 내에서 패권국가가 출현하는 것을 저지해왔기 때문에 러시아의 팽창에 대응해야 했다."영국의 주요 관심사 중 하나는 다른 국가가 인도로 접근하는 것을 막는 것, 즉 수에즈 지협을 통과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영국은 오스만 정부를 통제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러나 인도로 향하는 또 다른 육로가 있다. 수에즈 지협을 통과하는 것보다는 어렵지만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오직 러시아만이 이 길을 이용할 수 있다. 실제로 이 길을 이용하지 않고 단지 페르시아와 아프가니스탄 등의 부족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만으로도 러시아는 영국령 인도에 큰 타격을 줄 수 있다.
러시아로서는 지정학적인 이유로 해양 진출이 제한적이었다. 달리 말하자면 국방과 전쟁수행에 있어서 병력의 이동은 내선 전략에 의지해야했다. 이 점은 유럽 대륙의 다른 강대국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러시아의 경우에는 국토가 워낙 광대한데 반해 험난한 자연환경으로 인해 수송에 난항을 겪을 수 밖에 없었다. 오늘날의 러시아는 철도 같은 교통수단의 발달과 함께 공군이나 공수군과 같은 신속대응 부대로 이런 한계를 극복하고 있다. 하지만 19세기의 러시아 제국에서는 병력을 재배치하는데만 해도 몇 개월에서 심지어는 연단위로 시간이 소요되었다. 결과적으로 러시아는 광대한 국토를 커버해야되는데 해양력이 제한적이니 유사시 병력을 신속하게 재배치하거나 집중하기 어려웠다. 때문에 외국, 특히 영국과의 분쟁에 있어 전략적 방어자라는 부담을 가져야 했다.
크림 전쟁에서는 이같은 취약점이 극명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크림 전쟁 당시 러시아 제국은 러시아 남부가 직접 위협받고 있는 위기상황에서도 곳곳에 병력의 분산 배치를 강요받았다.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 근해의 발트해에도 침공 위협 때문에 30만이나 되는 병력이 배치되었고 동시기 카프카스에도 20만에 달하는 병력이 묶여 있었다. 뿐만 아니라 프로이센이나 오스트리아의 참전 가능성까지 대비해야되서 폴란드 방면으로도 상당한 병력을 할애 해야했다.[5] 여기에 추가적으로 앞선 곳들보다 규모는 작아서 수천~수만 정도이지만 국내 곳곳에 치안을 위해 병력을 주둔해야했다.
크림 전쟁 결과, 잘나가는 놈은 일단 다구리 놓는 유럽의 역사적인 전통(...)을 따라 영국이 주도하여 다른 강대국과 함께 러시아의 팽창을 견제하려 들면서 러시아가 생각보다 몹시 취약하다는 점이 새삼스레 확인되었다. 1870년 당시에 러시아 전쟁부는 여기저기에 고정적으로 배치해야되는 병력을 제외하고 러시아 제국이 유럽 방면에 가용가능한 병력은 60만 정도로 결론지었다. 분명 적은 규모가 아니지만 같은 시기 유럽 대륙의 다른 강대국들은 단독으로 그 이상의 병력을 동원 가능하다고 평가되었다. 영국이 주도하는 잠재적인 연합을 상대해야 된다고 상정했을 때 상당히 암울한 결론이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타개책으로 제시 된 것이 바로 인도를 공격한다!였다. 당시 러시아 지도부는 인도를 실재적으로 정복한다기보다는 영국에 군사적 압박을 가함으로써 특히 유럽방면에서의 부담 해소를 목적으로 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즉 일종의 군사적 시위 라 볼 수 있다. 겸사겸사 중앙아시아에서 영향력도 강화하고.
군사-외교 뿐 아니라 경제적인 문제에서도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당시 러시아 제국은 파탄난 경제가 전통이라 할 정도로 여러모로 맛이 가있는 나라였고 농업 산업 전반면에서 빈약한 입지에 있지만, (비록 당시엔 제대로 개발하진 못 했어도) 천연자원은 많다. 하지만, 러시아에는 당시에 돈 잘 벌리는 물품들(차, 커피, 담배, 고무 따위의 환금작물Cash Crops)에 접근할 수 있는 신대륙이나 동남아시아 쪽으로 진출할 방도가 없었다. 발트해에 어느정도 진출하긴 하였으나, 그쪽 항구는 겨울이면 얼어버리기 십상에, 발트해 넘어가 봐야 나오는 건 영국 뿐(...)[6]
지금이야 바렌츠 해 쪽에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부동항인 무르만스크가 있지만, 이곳은 지리적 위치상 신대륙이나 동남아 방면으로의 진출이 쉽지 않고 이 시기만 해도 무르만스크 일대는 거의 개발되지 않은 오지였기 때문에 당시에는 반쯤은 있으나마나 한 땅이었다.[7]
한편 크림 반도를 통해 장악한 흑해 또한, 결국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지 못한다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8] 그걸 건넌다 처도 지중해를 지나 지브롤터를 거처 대서양으로 나온다는 것도 무리다. 나온다 처도 신대륙은 어떻게 가고 희망봉은 또 어떻게 돌아가겠는가? (수에즈 운하가 생긴 이후엔 이야기가 좀 다르지만 그건 프랑스가 만들고 영국이 관리했다.)
범슬라브주의를 내세우며 발칸 반도로 진출해서 갈망의 도시를 따버리는 것도 방책이긴 하지만, 바로 그 '''갈망의 도시'''를 러시아가 낼름하게 가만히 둘 유럽 나라들은 아무도 없다. 결국 방법은 아예 지중해와 발트해, 대서양을 안 거처가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캅카스 산맥을 넘어서 페르시아로 밀고 들어가는 방법이 있는데, 그 험준한 캅카스 산맥을 넘어서[9] 어떻게 페르시아까지 갈 것이며, 가는 길에 만나는 오스만 제국은 또 어찌할 것이며, 페르시아도 더럽게 넓고 험준한데 그건 또 어떻게 다 따먹을지 답이 안 나온다.
결국 눈길은 중앙아시아로 쏠리게 되었다. 희대의 똥땅 취급받는 척박한 동네지만,[10] 이걸 뚫고 내려가면 바로 인도양에 도달할 수 있지 않겠는가?[11] 아니면 신장-위구르 지역을 뚫고 내려가서 버마를 거쳐 동남아시아를 뚫고 말라카 해협에 갈 수도 있을 노릇이었다.[12]
한편, 이런 러시아의 행보를 보는 영국은 "저 커다란 러시아 놈들이 중앙아시아 고속도로(?) 타고 인도에 처들어온다!!!"는 공포에 시달렸다.[13][14]
당시 대영제국은 명실공히 세계 최강의 열강이었으나, 국력도 쎄고, 지하자원도 많고, 땅도넒고(당시 2위), 인구도 많은[15] 러시아 제국은 언젠가 영국에 맞먹을 수 있는 잠재적인 경쟁자로 꼽혔고,[16] 러시아의 영향력 확장을 영국은 전 세계 각지에서 필사적으로 방해했다. 결국 크림 전쟁에서 양측이 정면충돌을 벌였고 뒤떨어진 기술력과 산업력을 보유하고 있던 러시아 제국이 패배하게 되었다. 자타공인 유럽의 경찰국가였던 러시아가 패배하면서 러시아는 큰 충격에 빠지고 본격적인 개혁을 단행하게 된다. 한편 영국은 방심하지 않고 곳곳에서 러시아의 진출을 견제하기 위한 군사-외교적 공작을 벌이고 다녔다.
그나마 1860년 베이징 조약으로 청나라에게 연해주를 떼어가서 마침내 제대로 바다에 진출 할 수 있게 되었지만, 저 멀리 서쪽에서 연해주까지 함대가 날아서 갈 수도 없고, 당시엔 북극항로 같은거 없었고, 지금도 북극항로는 말로만 존재하는 전설 속 무언가 취급 받는 수준의 개노답 뻥 항로 상태를 못 벗어나고 있다.[17] 심지어 연해주를 통한 확장도 러일전쟁에서 깨지면서 처참히 박살났다. 물론 당대 열강 중 산업화 면에서 제일 후발주자였던 일본 제국 '''혼자서는 절대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고 실제로 인명피해도 매우 많았으나''' 영국의 엄청난 지원 덕에 승리할 수 있었다. 러시아 제국의 최강 함대 발트 함대를 비롯한 해군력은 일본에 완전히 박살난 상황이었고 더 이상의 해양 진출을 노릴 수단 조차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반면, 영국은 큰 피해 없이 일본을 통해 러시아의 해군력과 극동의 거점을 박살낼 수 있었으므로 실제론 영국의 완승이었던 셈.
한편, 독일 제국이 엄청나게 팽창하고 있었던 상황이고 페르시아에선 민중 봉기가 일어나던 상황이었다. 영국과 러시아는 독일 제국을 견제하고 페르시아 지역을 차지한다는 점에서 서로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졌던 상황이었다. 결국 1907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양측이 영러협상을 맺게 되고 양측이 프랑스와 더불어 동맹을 체결하면서 그레이트 게임은 공식적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3. 영국과 러시아의 격차
러시아 제국은 세계에서 두번째로 넒은 영토를 통치하는 국가였고 한 때 나폴레옹의 아성을 깨트리고 19세기 초반만 하더라도 유럽의 경찰 국가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나라였지만 실상은 대영제국에 비해 속빈 강정이라 할 수 있었다.
- 산업 혁명을 연달아 주도하던 나라가 영국이었다. 당시 영국은 증기선, 철도, 전기 등 여러 공학 및 산업 기술 면에서 최선두를 달리던 국가였고 러시아는 기술 발전이 크게 정체되던 국가였다. 당연히 이러다 보니 전반적인 군사력 면에서 여러 가지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었다. 일례로 크림 전쟁 당시 러시아 제국은 전유럽을 상대해도 충분한 수준의 군병력들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광활하고 넓은 영토 특성상 도로와 같은 인프라의 건설은 부진했고 각지에 분산되었던 군사력을 하나로 모을 수가 없었다. 반면, 영국은 세계 최초로 군용 철도를 부설해 병력과 물자를 신속하게 이동시킬 수 있었으며 기본 화기도 미니에 탄과 강선 머스킷총으로 무장하고 있어 아직도 활강식 머스킷을 운용하던 러시아군보다 훨씬 먼거리에서 사격을 가할 수 있었다. 당연히 대포의 사정거리도 강철 대포로 무장한 영국이 청동 대포로 무장한 러시아보다 우위였다. 거기다가 의료체계의 혁신을 통해 러시아군보다 전염병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 영국은 세계 1위 해군국이었다. 영국은 섬나라라는 특성상 해군은 국가안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군사집단이었고 거기다가 광대한 식민지에서 발생하는 풍족한 자원들을 전부 무역 항로를 통해 받아야했기 때문에 이를 관리할 수 있는 막강한 해군은 필수적이었다. 그렇기에 의회 차원에서 막강한 해군력 투자를 지원한 것은 물론이고 선박 관련 기술도 발달했기 때문에 100년 이상 동안 해군으로 도전하는 상대가 없었을 정도로 양과 질 모두 세계 최강의 해군이었다. 반면, 러시아 제국은 광활한 영토를 유지하는 것은 물론이고 농경지에서 벌여지는 반란도 대비해야 했기 때문에 거대한 육군을 유지할 수 밖에 없었고 이러한 현상은 자연스럽게 해군력에 집중 투자하기엔 미흡한 환경으로 이어졌다. 거기다가 느린 경제, 산업 발전력 때문에 영국에 필척하는 해군력을 육성할 수가 없었다.
- 러시아의 뒤쳐지는 사회 시스템은 영국과의 경쟁에서 더더욱 뒤쳐지는 결과로 이어졌다. 러시아는 여전히 귀족들이 주요 권력과 부를 독점하는 국가였고 자연스럽게 산업 발전은 느려질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아직도 농노제를 유지하는 국가였기 때문에 지주들이 농노들의 생산력을 착취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농업 생산력은 서유럽과 비교해 현저히 낮은 것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인구가 농노이다 보니 산업 생산에 동원될 수 없어서 러시아 산업 증가는 침체될 수 밖에 없었다. 농노제로 착취당하는 러시아인 대다수의 교육 수준도 대부분의 인구가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영국보다 뒤쳐질 수 밖에 없었다. 이미 산업 혁명을 통해 중산층이 발전되고 연달아 사회 혁명을 시도하는 영국과 크게 대비되는 양상이었다. 알렉산드르 2세가 러시아 제국의 발전을 크게 옥죄는 농노제를 폐지했지만 체제 유지를 위해 농노의 권리와 부는 크게 제약되어 서구보다 노동력 동원면에서도 크게 제약될 수 밖에 없었다.
- 영국은 입헌군주제 국가로 국민들이 선출하는 입법부, 입법부에서 선출된 내각이 국가의 주요 정사에 관해 의사결정할 수 있었다. 이러다보니 여러 명의 의사결정권자가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방향으로 의사소통을 진행해 정책을 결정할 수 있었다. 반면, 러시아는 차르에게 모든 권한이 부여되어 있었고 의사결정권이 극소수에 밀집된 러시아 제국의 의사결정력도 당연히 비효율적일 수 밖에 없었다. 이러다보니 통치력이 부족한 차르가 권력을 잡을 경우 문제가 많이 발생할 수 밖에 없었으며 이는 니콜라이 2세 시절에 증명되다 못해 국가 자체가 붕괴되는 사태로 이어졌다.
- 알렉산드르 3세가 '러시아의 동맹은 단 둘, 우리의 육군과 해군 뿐이다.'라고 말했듯이 러시아는 이미 외교적으로 적을 많이 만들었다는 문제점도 있었다. 19세기 이후 러시아제국은 오스만 제국에 이어서 유럽세계의 공공의 적이 된것이다.''' 제 아무리 역사적으로 영국과 다툰 역사적 경험이 많은 프랑스도 러시아의 해양 진출 견제를 위해선 영국과 협력하고 크림 전쟁에선 군대까지 보내 도와줄 정도니 말 다했다. 이외에도 영국은 일본 제국에도 접근해 영일동맹을 맺은 뒤 일본에게 수 많은 지원을 했으며 이러한 지원은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 러시아 제국이 여러 모로 영국과 서구보다 뒤쳐진 상황이었음에도 오스만 제국, 청나라, 조선보다는 매우 막강한 국가여서 이들 국가들에게 틈만나면 군사력으로 압박하거나 진출해서 영국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오스만 제국은 경제와 산업 면에서 러시아보다 훨씬 열세인 국가였고 그렇기에 러시아군과 전투를 벌일 때 마다 빈번히 패배했다. 청나라는 당연히 러시아 제국 상대로 게임이 안되는 국가였고 그렇기에 1858년, 아이훈 조약으로 아무르 강 이북 지역 일대가 러시아로 할양된 것은 물론이고 1860년, 베이징 조약으로 연해주 일대가 러시아 측으로 불평등하게 할양되어야 했다. 조선의 경우도 러시아와 수교를 맺을 시 불평등 조약으로 맺어야 했으며 러시아 해군 함대가 제주성 위협사건을 벌이기도 했다. 당시 조선은 해금정책으로 인해 해군 육성도 지지부진한 상황이었고 그나마 가지고 있던 낙후된 목선으로는 철갑증기선으로 무장한 러시아 해군을 상대할 수도 없었다. 이후 고종은 생존을 위해 적극적인 친러 외교 정책을 펼치며 러시아에 의존했으나 러일전쟁 과정에서 영국이 일본을 지원하면서 이러한 구상은 무참히 깨지고 만다.
4. 2차 그레이트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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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에도 영국은 러시아 제국의 뒤를 이은 소련을 견제했다. 네빌 체임벌린을 비롯한 영국의 보수당 출신 총리와 각료들은 반공, 반러 감정이 상당했고 거기다가 혁명과 적백내전의 혼란기를 극복하고 낙후된 농업국가였던 소련을 금방 '''세계 2위 경제대국이자 공업 대국으로 성장시킨''' 이오시프 스탈린에 대한 경계심은 높을 수 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네빌 체임벌린은 '''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 독일과 손을 잡고 소련의 진출을 견제하고자 했다.''' 당시에는 나치와 히틀러에 대한 인식이 전세계적으로도 나쁘지 않았던 시절이었으며 영국 입장에선 베르사유 조약을 어기고 재무장하는 히틀러를 잘 이용한다면 소련의 진출을 견제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렇기에 라인란트 재무장과 오스트리아 병합을 묵인했으며 뮌헨 협정을 통해 체코슬로바키아를 배신하고 히틀러의 주요 요구 조건을 모조리 들어주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러한 영국의 행동은 히틀러를 방심하게 만들었고 결국 영국이 독립 보장을 걸고 있던 폴란드를 침공하게 되면서 영국은 원하지 않았던 독일과의 전쟁에 끼어들 수 밖에 없었다. 결국 독일과의 외교 파탄과 여러가지 악화된 전황으로 인해 네빌 체임벌린은 사퇴해야 했고 강경론자였던 윈스턴 처칠이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게 된다.
하지만 윈스턴 처칠도 매우 완고한 반공주의자였다. 그렇기에 실제로 독소 불가침조약을 체결한 소련의 바쿠 유전지대에 대한 폭격 작전도 검토했다. 이후 독소전쟁이 터지면서 양측은 공동의 적인 나치를 막기 위해 협력을 했고 영국은 소련에 적지 않은 랜드리스를 지원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처칠은 소련에 대한 경계는 늦추지 않았고 전쟁 막바지에는 독일을 항복시킨후 독일군을 연합국에 포함시켜 소련군을 독일에서 몰아내고 더 나아가 소련을 칠 생각도 했다. 그러나 소련은 독소전쟁의 어마어마한 피해를 이겨내고 유라시아 일대를 장악한 새로운 패자이자 '''미국과 더불어 세계를 양분하는 초강대국으로 부상했고''' 막대한 전쟁 피해를 입은 영국은 더 이상 이런 강력해진 소련을 견제할 힘이 없었다.
이 것이 제대로 증명된 것이 1957년, 수에즈 전쟁 당시였다. 수에즈를 침공하는 영국을 향해 소련의 서기장 니키타 흐루쇼프는 영국을 향해 '''핵공격을 위협했고''' 제3차 세계 대전을 우려하는 미국으로부터도 압박이 있었다. 결국 미소 양국의 위협을 이겨낼 국력도 없었고 핵무기도 없었던 영국은 굴욕적으로 수에즈 운하를 완전히 상실해야 했다. 이후 영국은 자국을 지키기 위해 독자적으로 핵무기를 개발하고 미국과의 동맹 관계에 더더욱 메달리게 된다.
거기다가 1960년대 이후 소련의 서기장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와 해군 총사령관 세르게이 고르시코프가 해군력을 크게 증가시켜 소련 해군은 세계 2위 대양 해군으로 성장해 그 천하의 영국 해군을 앞지르기에 이른다. 이때 영국은 복지를 위해 군비를 계속 삭감한 대다가 1970년대에 복지병으로 인한 경제침체까지 겪었기 때문에 해군 투자가 상대적으로 침체되었기 때문이다.[18]
5. 관련 문서
- 부동항
- 페르시아(카자르 왕조): 고래 싸움에 등 터진 새우이자 일종의 완충지대. 러시아에게 캅카스와 본거지인 아제르바이잔 영토마저 전부를 내 주고, 호라산 일부 지역을 상실했으며 대영 제국에게는 발루치스탄 땅을 빼앗겼지만 명목상의 독립은 유지했다. 라이벌이었던 옆나라와 함께 비록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는 되지 않았지만 심심하면 얻어 터지는 샌드백으로 전락했다.
- 크림 전쟁
- 러시아-튀르크 전쟁
- 메이지 유신
-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
- 듀런드 라인
- 거문도 점령 사건
- 제주성 위협사건
- 알래스카 조약
- 영일동맹
- 러일전쟁
- 영러협상: 그레이트 게임의 끝을 알린 협상.
- 세력권
- 히바 칸국
6. 대중매체
- 신부 이야기: 작품의 시간·공간적 배경이 바로 이 그레이트 게임이 한창 이루어지고 있던 19세기 중후반의 중앙 아시아 지역이다.
- 죽은 자의 제국: 영국과 러시아가 신형 '죽은 자'를 제조한 알렉세이 카라마조프를 추적하기 위해 첩보전을 벌이던 중 주인공 존 H. 왓슨이 아프가니스탄으로 파견된다.
- 왕 그리고 황제: 86~90화의 부제로 쓰였다. 대체역사물로서, 고종이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영국과 러시아를 이용하는 이야기.
- Victoria: 게임의 배경이 되는 특성상 크림 전쟁 이벤트를 시작으로 세계 도처에서 영국과 러시아가 각축전을 벌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 셜록 홈즈 시리즈: 화자이자 홈즈의 동료 존 왓슨은 이 시기 제2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에 군의관으로 참전하였다가 중상을 입고 의병전역 하였다.
[1] 국내에 번역, 출판되었다. 부제는 '중앙아시아를 둘러싼 숨겨진 전쟁'[2] Geoffrey Bruun ,''Nineteenth Century European Civilization: 1815-1914.'', 118pp (Oxford University Press, 1960.)[3] 여기에 프랑스까지 포함한 5개국이 강대국의 반열에 있었고 이는 19세기의 열강을 거쳐 영국, 프랑스, 러시아는 오늘날 UN 상임이사국에까지 이르고 있다.[4] 프랑스는 한동안 전범국 비스무리한 취급을 받았었다. 하지만 3년 뒤 점령군이 철수하고 신성동맹에 가담하면서 강대국 지위에 공식적으로 복귀했다.[5] 특히 오스트리아는 러시아에게 빨리 강화협상 안하면 참전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은 상태라 대비를 안할 수가 없었다.[6] 그나마 덴마크가 열심히 뜯던 발트해 관세는 짭짤한 수익을 자랑했다.[7] 무르만스크에 철도가 부설된 것은 1차 세계대전 중인 1915년의 일이다.[8] 유럽의 병자 소리 듣던 퇴물 오스만 제국이지만, 어쨌든 갈망의 도시를 쥐고 있는 한 보스포루스 해협을 오스만 협조 없이 러시아가 건너는 것은 꿈 같은 이야기. [9] 옛 페르시아 속담에 "왕이 미치면 카프카스로 전쟁하러 간다"라는 말이 있을정도니...[10] 당장 구글 지도나 구글 어스만 봐도 카자흐스탄-러시아 국경 아래쪽은 녹지를 찾아보기도 힘들고 사막이 대부분이다.[11] 그런데 이게 현대에서도 별로 실현 가능하지 않을 정도로 중앙아시아 쪽은 대책 없는 황무지다. 하물며 당대 수준으로는 거길 넘어서 유의미한 통행을 한다는 것 자체가... 자동차는 갓 생겨난 상태라 이용하기 어려웠고, 철도를 부설하려 해도 이런 황무지에 철도 부설이 만만한 일은 아니고 설령 부설한다 쳐도 증기 기관차 운용에 필요한 물을 구하는 것부터가 난제였다. 물론 이것은 러시아나 러시아를 상대하는 영국이나 별 관심거리가 아니었다. 지도로 얼핏 보기에는 인도행 고속도로니까.[12] 이것 또한 현대에 와서도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으로 판명났지만 역시나 당시에는 알 게 뭐야 취급.[13] 아무리 당대 수준으로 중앙아시아를 유의미하게 통행하는 것이 불가능 했다곤 해도, 인도로 들어올 수 있는 길이 있기는 하다는 것 하나만으로 충분한 골칫거리다. 그리고 과연, 지금도 제대로 통행할 수 없음에도 인도와 맞닿은 지역은 여전히 분쟁요소로 남아있다.[14] 좀 황당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지도 펼쳐다 인도 주변 땅을 모조리 러시아로 칠해 놓고 보면 좀 많이 무섭다.(...)[15] 1813년까지는 프랑스 제국이 인구 4400만명으로 유럽국가중 인구 1위였고 1814년 이후 현재까지 러시아가 계속 유럽 인구 1위를 차지한다. 1815년 러시아 제국의 인구는 4200만명이었고 1907년에 이르면 인구가 '''1억 5100만명으로 1세기도 안되서 거의 4배가까이 증가했다.'''[16] 실제로 약 100여년이 지나, 러시아 제국을 계승한 소련은 제2차 세계 대전을 기점으로 영국의 국제적 영향력을 확실히 뛰어넘어 미국과 함께 초강대국에 등극하니 영국의 우려는 결국 실제로 이뤄졌다. 실현된 방식이 당대 영국이 생각한 것과는 많이 달랐지만. [17] 최근엔 지구 온난화 때문에 점점 눈길을 끌고있긴 하다.[18] 물론 해군 투자를 포기한 것은 아니어서 NATO 내에서 해군력 2위를 차지할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