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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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 육군 기병 병과 휘장. 기병용 외날도 세이버 두 자루를 교차시킨 모양새다. 현재는 미 육군 기갑, 공중강습, 기계화보병 등의 부대 중 기병 부대에서 개편된 일부 부대가 전통 계승 차원에서 전투 병과 인원들이 해당 휘장을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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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육군에 존재했던 말을 타고 싸우는 전투병과. 똑같이 말을 탄다고 해도, 이동을 위해 말을 사용하는 보병 병과 장교, 기마보병, 포병, 수송 병과 등은 기병이 아니다.'''기병은 전투 전에도, 전투 중에도, 전투 후에도 유용하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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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뿐만 아니라 말 또한 훈련과정에서 단련된다. 말은 군마로 쓰기 위해서 최소 3년 정도는 집단 훈련과 빠른 걸음, 구보의 연습 및 사람과의 친화 등을 가르쳐야 하였으며, 그 이후에도 지속적인 훈련으로 능력을 키워나가야 했다.[5] 그런 말을 예비마까지 포함해 몇 필이나 거느려야 하는 것이 기병. 그래서 유목민처럼 목축이나 수렵 따위의 생업(生業)을 목적으로 사람과 말이 함께 자연스럽게 단련이 되는 경우가 아니라면, 인위적으로 기병이라는 병종을 얻기란 무척이나 힘들었다.[6] 한마디로 '''고급 병과'''.
기병에 대한 흔한 오해 중 하나는 '무조건 말을 타고 이동하기 때문에 기동력이 좋다'는 것이 있다. 그러나 이건 반만 맞는 말이다. 여건에 따라서 기병은 말에서 내려 걸어다녔다. 항상 말을 타고 이동한다면 전투에 돌입했을 때 말이 이미 지쳐있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기병이 아무리 정찰대의 역할을 자주 맡는다고 해도 기본적으로는 보병과 함께 다니기 때문에 보병과 보조를 맞출 겸 걷는 경우가 많았다. 겸사겸사 말도 좀 쉬고. 기병대가 진짜로 기동력이 우수한 이유는 말이 가지는 수송력 때문이었다. 기병 한 명이 말 여러 필을 대동하기 때문에 수송력 또한 좋았다. 진짜 전투용 말은 어지간하면 짐을 싣지는 않았지만 상기했듯 기병은 말 여러 필을 대동한다. 반대로 보병의 기동력이 낮은 것도, 진지를 설치하기 위한 치장들의 수송, 진지 설치와 식사를 위해 늦어도 초저녁에는 진군을 멈춘 것 등에 있다.
냉병기가 효과적이고 화기의 위력이 좋지 않았던 시대에는 매우 중요한 전력이었다. 단적인 예로, 사무라이 같은 무사 집단이 있었던 일본을 살피면 스와 분쿠로[7][8][9] 와 같은 일개 기수에게 무사들도 손쉽게 패했다. 보병으로 유명한 로마조차 등자가 없던 시절에서도 기병 30명은 보병 100명과 똑같은 투표권을 행사하게 했다.
그러나 기병이 항상 보병보다 우세한 것은 아니었는데, 돌격력이 죽어버린 기병대는 보병대보다 오히려 전투력이 떨어졌다. 기병대가 돌파를 시도했으나 적의 보병대가 완강히 버텨낸 경우가 특히 위험했다. 말은 속도를 제공해주지만 반대로 멈춰있을 때는 기병이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잘 훈련된 보병의 밀집대형은 기병들에게도 상당한 부담이었다. 로마군의 내전에서도 카이사르 휘하 소규모 중보병대가 더 많은 수의 폼페이우스 기병대를 저지한 전과도 있고 고구려 동천왕의 중기병대는 위나라 관구검의 창병대에게 참패를 당했으며 프랑스 네 원수의 근위기병대는 영국 레드코트의 방진을 뚫지 못했다.
2. 기병의 장점(위력)
나는 다른 점에서는 스키타이 족이 훌륭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한 가지 가장 중대한 인간사에 있어, 그들은 우리가 아는 모든 부족들을 능가한다. 그들이 해결한 중대사란 '''그들이 추격하는 자는 아무도 그들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들이 따라잡히고 싶지 않으면 아무도 그들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이다.''' [중략] 말을 타고 활을 쏘기에 능하고, 농경이 아니라 목축으로 살아가는데 그런 그들이 어찌 다루기 어려운 불패의 부족이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헤로도토스 『역사』 6권 46p
기사들이 대열 가운데로 모여들더니 창을 부여잡고 전쟁 구호를 복창하자 보병 부대가 길을 열어주었다. 그들은 그 사이를 통과해 나와 사방으로 돌진해가며, 일부는 우익으로 일부는 좌익으로 또 일부는 중앙으로 밀고 들어가 '''우리 군을 초토화시켰다.''' 나는 중앙군이 공격받는 것을 보고서 좌익으로 대피하려 했으나 '''그쪽은 이미 중앙보다 먼저 무너진 뒤였고, 심지어 우익의 상황은 그것보다 더 심각했다.'''
바하 앗딘, 『술탄 살라딘의 진귀하고 탁월한 역사』[10]
기병은 아래와 같은 강점으로 인해 보병에 대해 '''절대우위'''를 가진다. 크게 분류하자면 하나는 충격력, 다른 하나는 기동력이다.왜적은 철환(鐵丸)을 비 오듯 퍼붓는데 한번 맞기만 하면 곧바로 쓰러지고, 근접해서는 칼을 사용하는데 그 검술이 지극히 기이하니, 이들은 참으로 상대하기 어려운 적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지금 이 적병으로 말하면 그렇지 않아서 다른 기예(技藝)는 없고 단지 궁시(弓矢)와 전마(戰馬)만이 있을 뿐인데, 그 궁시는 사거리(射距離)가 우리 군사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형편이다. 다만 '''그들의 전마는 힘이 매우 좋아 치달리며 진격하기에 적격이라서, 순식간에 아군(我軍) 속으로 돌입(突入)하기 때문에 아군이 저절로 그 위세에 눌려서 무너지곤 한다.''' 예로부터 중국 사람들이 오랑캐와 전투를 벌일 적에 접전할 때마다 꼭 패하곤 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따라서 그들의 전마를 막을 기구를 설치하여 돌입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아군의 마음을 안정시켜 동요되지 않게 하고는 꿋꿋이 서서 사격을 하게 하면, 적병이 진입을 하려다가 그렇게 하지 못한 채 지체하며 머뭇거릴 것이요, 그러는 사이에 선봉(先鋒)이 모두 죽으면 뒤에 오는 자들도 모두 겁을 먹고 도망칠 것이 분명하니, 그들이 도망치는 기회를 이용해서 추격하며 사격한다면 크게 깨뜨릴 수 있을 것이다.
조익, 『포저집』
- 충격력은 기병이 가진 질량과 속도에서 오는 것으로, 말과 기수의 무게를 합치면 적어도 500kg이 넘어가고[11] 이런 덩치가 최소 50~60km/h의 속도로 달려오면 그 운동에너지는 어지간한 자동차에 들이받히는 것과 맞먹는다.(대형 전투마쯤 되면 치중이 700-800kg, 짐말로 쓰이는게 보통이지만 질량으로 밀어붙이는 초대형 말은 1톤까지 나간다. 순수하게 무게만으로도 경차 수준이다.) 매체에서의 묘사와는 달리 갑옷과 방패는 엄청난 방호능력을 발휘했기에 화살은 물론이고 백병전에서도 단칼에 쓰러지는 일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기병의 돌격으론 적 두세명이 그대로 꿰뚫렸다고 기록될만큼 그 위력은 고전시대 다른 병과와는 궤를 달리한다.
- 상대방에게 강력한 위압감을 주며 기선을 제압할 수 있다. 멀리서부터 돌진해 오는 기병대의 위압감은 상상 이상으로[12] , 시각적인 위용뿐 아니라 소음, 특히 땅이 울릴 정도의 진동[13] 은 아무리 대기병 훈련을 받고 무기와 방어시설을 준비한 보병이라 할지라도 진형을 유지하는 것조차 초인적인 용기를 필요로 할 정도로 엄청난 공포심을 선사한다. 현대로 비유하자면 수십~수백 대의 전차와 장갑차 부대가 주포를 당신 방향으로 일제히 겨누고 전속력으로 아군에게 정면으로 돌격해 온다고 보면 된다. 기병대가 돌진해오는 것만으로도 비숙련보병들은 사기가 무너져 그대로 패주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아니, 전차나 장갑차까지 갈 것도 없다. 경마장에서 전력질주하는 말들 앞에 달랑 몽둥이나 회초리 하나 들고 서 있다고 생각해 보면, 버틸 수 있겠는가? 가벼운 경주마에 맨몸인 기수만 해도 그렇다!
- 기병 돌격의 반복되는 충격력에 대열이 무너지면, 거의 대부분은 그걸로 끝이었다. 대열이 무너진 구멍으로 기병들이 계속 돌파해 들어오며 보병대의 내부, 후방, 측면을 정신없이 타격하기에, 아무리 정예보병[14][15][16] 이라 할지라도 오래 버티지 못하고 진형 전체가 무너지게 된다. 기동력에서 밀리는 보병으로서는 아군 기병이나 원거리 무기의 충분한 지원 없이는 기병의 움직임을 제어할 길이 없고, 그렇지 못하면 무작정 버티면서 아군의 증원이나 지원을 기다리는 수 밖에 없는데, 그 전에 기병들에게 모조리 썰리고 꿰이면서 전열이 무너지고 조직 자체가 붕괴되는 게 더 빠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일단 후퇴하여 대형을 재편성하는 건 그것이야말로 최악의 수가 되는데, 뿔뿔히 흩어지는 보병들은 기병들에게 순식간에 따라잡혀 하나하나 학살당하기 때문이다. 만회할 길이 없는 진퇴양난이 되는 것이다.
- 말이 가진 힘 자체도 무시하기 힘든 요소다. 전투마는 품종개량 및 훈련을 통해 전투에서 공격성을 발휘하기 마련인데, 말발굽질은 제대로 맞으면 뼈가 박살나며, 체급 대비 악력이 부족할 뿐, 반 톤에 이르는 큰 덩치에서 나오는 치악력은 굉장히 치명적이다. 이러한 점들은 방어구를 잘 갖추고 튼튼한 대열을 유지하고 있는 보병들에게는 큰 효과를 기대하기 힘들지만, 대열이 무너진 보병들이 기병에게 취약한 이유 중 하나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경험을 수기로 남긴 프랑스 기병 장교의 기록에도 말이 한 입 물어 뜯으니 얼굴 가죽이 뜯겨져 나가고, 복강이 뜯겨 내장이 흘러나올 정도였다는 살벌한 내용이 있다.
- 무엇보다도 기병의 절대우위를 보장하는 가장 중요한 근본적인 이유는, 기동성 그 자체였다. 전쟁사상 명장들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 전략/전술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원하는(유리한) 때에, 원하는(유리한) 곳에서 싸우는 것이다. 보병에 대해 압도적인 기동력을 가지고 있는 기병은 거의 대부분의 전투에 있어 보병에 비해 싸울 때와 장소를 먼저 고를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이점이었다. 반대로 보병에게는 시작부터 엄청난 핸디캡을 깔고 시작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기마 그 자체만으로도 전장에서 보병보다 훨씬 넓은 시야(높이)가 보장되며, 각종 보고와 명령을 빠르게 주고받는 정찰 및 전령에서도 압도적 우세였기에 보병대보다 훨씬 빠른 선제대응이 가능했다. 그렇기에 기병은 오랜 세월 동안 전장의 주역으로서 활약해 올 수 있었던 것이다.
- 목책이나 마차, 장창병 등 장애물을 설치하여 충격력과 기동력을 저지하고, 활, 쇠뇌, 머스켓 등 원거리무기로 딜링을 하면 기병을 상대할 수 있다는 것 쯤은 머나먼 고대시절부터 다들 알고 있었다. 실제로 백년전쟁때 잉글랜드가 프랑스를 장궁병을 잘 활용하며 연승했던 경우 등 예외적인 사례도 있기는 하지만[17][18] 기병이 가지고 있는 절대우위는 여전했다. 싸움을 피하고 상대방의 주위를 빙빙 돌며 방비가 잘된 곳은 피하다가 취약점이 보이면 그곳을 집중공략할 수도 있고, 탈출하려는 적병만 추적 도살하고 이따금 소규모 교전만 치르며 대규모의 적군을 이동하지 못하도록 묶어버릴 수도 있고, 아무리 봐도 영 아니다 싶으면 그 전장에서 아예 떠나 버리고 상대방의 후방기지 등 또 다른 약점을 터는 것 또한 기병의 마음대로였다. 보병은 이런 변덕스러운(?) 기병을 따라 헉헉대며 뛸 수 밖에 없었으며, 아무리 열심히 뛰어도 기병보다 늦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헉헉거리며 달리는 보병들의 집중력이 좀 흐뜨러졌다 싶으면 킬각을 본 기병이 돌아와 쾅! 이런 일방적인 선택권 하나만으로도 기병이 (그 비싼 비용에도 불구하고) 선호되었던 것이다.
- 근대 이후 기병이 가진 위력적 장점은 모두 퇴색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차 세계대전 까지 잘 써먹었는데 보병을 쫓는덴 기병만한게 없었기 때문이다. 러시아 원정 실패 이후 나폴레옹은 각지에서 들고 일어난 적과 싸워야 했는데, 물자가 바닥나는 상황에서도 계속해서 승리하여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불리한 강화는 거절할 정도였으나, 러시아 원정에서 기병 대다수를 잃은 결과 막상 이겨도 큰 피해를 주지 못해 계속되는 전쟁과 그로 인한 물자 바닥과 등돌린 민심으로 인해 전투에선 승리해도 전쟁에선 패배하여 황제 자리에서 내려오게 된다.
이렇듯 기병은 전략적, 전술적으로 보병에 대해 '''절대우위'''를 갖기에 망치와 모루 전술에서 망치 역할을 담당하는 등 핵심전력으로 분류되어 왔다. 보병으로도 망치 역할을 한 경우도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중국의 정통 농경왕조처럼 기병전력이 부족한 경우에나 어쩔 수 없이 택한 것이고, 언제 어디서나 망치 역할로는 기동력과 충격력이 있는 기병을 더 선호한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심지어 한니발 같은 전쟁사상 최고의 명장조차 기병전력이 상대보다 열세인 경우에는 패하기도 했다.
랜스(랜스차지), 스웜 전술, 망치와 모루 전술 등의 항목들에 기병의 속성에 대한 추가설명이 잘 되어 있으니 참조하자.
3. 기병의 단점
이토록 강력한 병과가 기병이지만, 적지 않은 단점도 있다.
- 지형이나 날씨의 영향을 상당히 많이 받는다. 폭우가 쏟아지면 정말 답이 없는데 특히 물렁한 지형에서 폭우가 쏟아진다면 정말 제대로 망했어요. 말의 다리가 논두렁 같은 지형에 빠져서 나오지 못하면 완전히 살아있는 과녁으로 전락하고 만다. 말의 다리는 소에 비해 생각보다 무척 연약해서, 수렁에서 억지로 빠져 나오려다 다리가 부러질 수도 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 최강의 기병을 지휘했던 맹장 신립이 탄금대 전투에서 지리멸렬하게 패배한 이유도 중기병의 부재 등 여러가지 이유가 있으나, 전날까지 이어진 비로 전장이 진흙탕이 되어 버려 주력인 경기병들이 제대로 된 기동을 할 수 없었던 것도 중요한 이유이다. 코르테스의 남미 정복 때 모세의 기적 수준으로 무적을 자랑하던[19] 23기의 기병도 불리한 지형에서 싸우다가 패한 적이 있다. 다만 윗의 글에 언급한대로 뛰어난 기동성으로 불리한 지역을 피하고 유리한 장소를 먼저 골라서 싸우는 걸로 해결할 수 있다.
- 보병들의 방진에 취약하다. 단순히 방진이라서가 아니라, 특히 말이 달릴 만한 충분한 공간이 확보되지 않은 공간에서 세워진 방진에 취약하다. 삼국지에서는 공손찬이 기병의 달인이었고 공손찬의 백마의종이라면 명성이 자자한 기병대였다. 그 공손찬의 4만 기병을 강변의 다리를 하나 두고 국의가 배치한 단 800명의 방진으로 완벽하게 깨버렸다. 이는 부피와 질량의 차이로 보면 이해하기 쉽다. 보병이 어깨를 맞대고 서면 1m 당 3~4명이 붙을 수 있지만 기병은 1명이 한계. 최악의 경우 기병 1명은 보병 4명과 동시에 대결해야 하며, 이 경우 순식간에 끔살 확정이다. 다만 윗의 장점에서 언급한대로 방비를 잘된 곳은 피하다가 취약점이 보이면 그곳을 집중공략하거나 영 아니다 싶으면 그 전장에서 아예 떠나 버리고 상대방의 후방기지 등 또 다른 약점을 파고드는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다.
- 정밀한 기동지휘 및 돌발상황 대응이 보병에 비해 어렵다. 기병돌격을 생생하게 그려낸 워털루(1971년 영화)나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 같은 작품들을 보면 알 수 있듯, 일단 돌격명령이 떨어져 수백~수천 기의 기병이 우르르 달려 나가기 시작하면 신호전달이 매우 어려워진다. 목소리는 커녕 나팔 소리도 듣기 힘들 정도로 소란스러우며 흙먼지 때문에 깃발신호를 눈으로 보기도 어렵기에, 한 번 시작한 돌격을 취소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20] 여기에 기병들이 차지하는 단위면적까지 매우 크다 보니 대형이 거대해지는 문제까지 더해져, 기병대가 정밀한 기동을 짜기는 매우 어렵다. 따라서 정교한 작전 및 포진, 상황대응이 가능한 보병에 비해, 앞선 지휘제대의 방향전환에 따라 후속제대가 일제히 방향을 트는 정도의 매우 단순한 기동으로 제한된다는 단점이 있다.
- 공성전에서 매우 불리하다. 특히 공격쪽일 때 그게 두드러지는데, 궁병이 제일 유리한 공성전 특성상 기병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그나마 수비를 할 때에는 말에서 내려 돌던지기라도 하거나, 성문을 열고 나와 기습이라도 할 수 있지만 공격을 할 때에는 말은 사다리를 탈 수 없으므로 화살이나 돌에 맞아가며 성문이나 두들겨야한다. 보병이 사다리 타고 성벽을 넘고 궁병은 성벽에 붙은 병사들을 때려잡고 있는 동안 말이다.[21]
- 윗의 단점들은 지휘하는 능력과 전술에 따라 해결할 수 있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가 매우 어려웠는데 바로 병참(군수)의 문제로, 기병을 훈련하고 유지하는 비용이 엄청나다. 기병은 인간인 기병뿐 아니라 동물인 군마가 필수적인데, 군마는 가장 좋은 말을 골라 쓰는데다 이를 사육해서 훈련시키고 먹이는 비용이 장난 아니었다. 일례로 미국 남북전쟁 당시 기병대 1개 연대를 조직하는 데 당시 돈으로 30만 달러(지금 돈으로 약 80억원), 유지하는 데 연간 10만 달러(지금 돈으로 약 13억원)의 비용이 소요되었다. 지금의 미국은 겨우 수십~수백억원 단위의 비용에 그리 신경쓰지 않지만 당시엔 이는 엄청난 부담이었으며[22] 남군과 북군 모두 개전 초에는 비용 문제 때문에 기병대를 적극 활용하지 못했다.[23] 즉 유목민족이 아닌 이상 기병을 양상시키는데 드는 어마어마한 비용을 감당하기가 벅찼고 보병에 비해 숫자가 적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이였다. 더구나 보병들이 먹는 군량(쌀, 밀, 콩 등)에 비해 군마들이 먹어야 하는 마초(풀)는 부피가 대단히 커서 수송에 애로사항이 꽃피게 된다. 수송이 어렵다고 아무 풀이나 먹여 현지조달을 하면 되지 않느냐 생각할 수 있지만, 수백~수천 마리의 말이 먹을만큼 풀이 넉넉한 곳도 생각보다 드물 뿐더러, 아무 풀이나 마구 먹였다간 말이 힘을 내기는 커녕 배탈 등으로 픽픽 쓰러질 수도 있기에 반드시 검증된 마초를 먹여야 한다. 덤으로, 말은 물도 많이 마시기에 식수 보급도 생각보다 큰 부담이 된다. 따라서 보급로를 확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게 되었다. 군마에 대한 보급의 어려움을 잘 묘사한 작품 중 하나가 남한산성(영화)인데, 애써 몰고 온 값비싼 군마들이 고립된 남한산성에서 제일 먼저 비상식량으로 전락하는(...) 생생한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4. 역사
4.1. 고대: 기원전 9세기 ~ 기원 후 4세기
고대의 말은 품종 개량이 되지 않아 크기부터 작았다.[24] 승마도구인 마구(馬具)가 발달하지 않았고, 일부 기마민족을 제외하고는 직접 말을 타는 일이 드물었다. 대부분의 지역에서 전차가 많이 등장한다.[25] 기병은 보통 정찰용으로 쓰거나 말을 타고 투창의 용도로 사용하였고 말 위에서 칼이나 활을 쓰지는 않았다. 실제 전투는 말에서 내려서 하는 기동 보병이 많았다. 후대의 용기병 또는 현대의 기계화보병과 유사한데, 말의 기동성만 이용한 것이다.
어쨌든 이후 말의 품종 개량과 마구 발달을 통해 무장한 전사(戰士)를 태우고도 빠르게 질주할 수 있는 군마가 탄생하면서 전차는 도태되고 중기병(重騎兵)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등자없이 승마하여 칼과, 창, 투창, 활 등을 다루는 훈련영상.
고대에는 아직 등자가 발명되지 않았고, 안장도 제대로 개량되지 않았지만, 그럭저럭 낙마하지 않고 달리면서 창과 검을 자유롭게 쓰고 돌격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물론 초기에는 추격전과 투창 등을 이용한 유격전이 많았다가, 마케도니아 왕국의 필리포스 2세 때부터 장창을 들고 돌격하는 기병이 충돌전술을 사용하기 시작하여, 이후 고대 그리스, 고대 로마의 기병들도 창을 쥐고 적 보병을 향해 돌격하여 진형을 무너뜨리는 기록이 많이 나오고, 실제로 수차례 승마실험을 통하여서 검증도 되었다. 물론 안장과 등자가 있는 것에 비해 승마 안정감이 떨어졌고, 중세 유럽처럼 겨드랑이에 창을 끼워놓고 돌격하는 것은 아니었다.
중앙아시아에서 동아시아에 이르는 광활한 초원지대의 유목 민족들은 말을 타고 싸우는 전투법을 일찍부터 썼는데, 중국에서는 조나라 무령왕이 이들을 본떠 호복기사(호복을 입은 기마무사)라는 기병부대를 편성하여 승마에 적합한 의복과 무장을 갖추고 활을 쏘는 궁기병을 편성하여 운영하기 시작하였고, 전국시대 진나라에서는 냉병기로 무장한 기병부대를 별도로 편성하였는데, 장평대전에서 백기가 기병대로 적의 보급로를 끊어서 승기를 잡은 일화가 유명하다.
4.1.1. 경기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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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중국 조나라의 호복기사. 말이 대단히 작은데, 잘못 그린 것이 아니라 당시 마종의 크기를 고려하여 그린 것이다.
고대의 전장에서 기병이 처음으로 그 위력을 발휘했던 것은 활을 사용하는 궁기병이었다. 중앙아시아에서도 활을 든 기병대가 제일 먼저 등장하였으며 일찍이 아시리아 제국에서도 주요 병과로 취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동아시아에서는 유목민족들의 기병대에 착안하여 등장한 조나라 무령왕의 호복기사(오랑캐 옷을 갖춘 기마무사)들 역시 활을 쏘는 경기병이었다.
경기병은 서쪽으로는 우크라이나의 스텝 지대로부터 동쪽으로는 만주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유목민들의 주력 병종이었다. 유목민들에게는 목축과 수렵이 생계수단이었기에 고대부터 자연스럽게 경기병이 육성되었고, 광활한 초원은 활을 필요가 아닌 필수품으로 만들었기에 양다리만으로 말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면서 양손을 이용해 활을 쏘았다고 한다. 흉노를 비롯한 중앙아시아의 많은 민족들이 스스로를 '활의 백성'이라 자처했으며 중국의 문헌에도 이들을 '장성 이북 궁술의 나라'라고 일컫는 표현들이 보인다.
빠른 기동력을 갖춘 경기병들이 다수 모이면 칼이나 창 등의 냉병기를 든 보병은 그저 과녁일 뿐이고 중기병조차도 대응이 힘들었다. 똑같이 원거리 무기를 갖추지 않았으면 이들의 화살공격에 맞설 수 없었고, 무장이 가벼워 빠른 탓에 말을 타고도 이들을 추격하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이러한 경기병을 많이 보유한 유목민족들은 정주민들에겐 악몽같은 존재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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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티아의 궁기병
이 활을 든 경기병들은 다른 병과들처럼 대오를 맞춰 적과 교전하는 것이 아니라, 군대를 여러 뭉텅이로 쪼개어 적을 에워싼 뒤 벌레떼(swarm)처럼 우르르 달려들어 공격하다가 우르르 빠지는 것을 반복하였다. 반복되는 화살 공격에 적들이 손실을 견디지 못해 전투의지를 상실하거나, 대오가 무너지거나 할 때 중기병 등을 이용한 돌격을 겸하여 적을 무너뜨리기도 했는데 카르헤 전투가 대표적이다.
다만 근접전에서는 불리하였고 마상사격이 일반 사격에 비해 어렵고 사거리가 짧아서, 보병들이 전투력을 온존하고 있다가 역습, 경기병들에게 근접전을 강요함으로써 패배시키거나, 보병의 화망에 압도당해 경기병이 패배한 경우도 많았다. 보병의 경우는 사거리가 더욱 길고 관통력 운동에너지가 모두 큰 롱보우/장궁을 사용한 반면 경기병은 말위에서 휘두르기 좋게(말위에서 사용할 때 덜 거치적거리는) 숏보우/단궁을 많이 사용했기 때문이다.
예컨데 중국에서는 전국시대 때에 조나라 이목이 흉노군을 유인하여 백병전을 펼쳐 흉노군 10만 명을 몰살한 적이 있었고, 한나라의 흉노 원정에서는 곽거병이나 이감이 기병대로 돌격하여 백병전으로 이들을 제압한 이력이 있었다. 삼국시대 때는 원소군의 국의가 활을 쏘며 전진해오는 공손찬의 백마의종 기병부대를 방진과 쇠뇌를 이용하여 격퇴한 바 있고, 위나라의 전예가 조창과 함께 수송용 수레를 원형으로 빙 둘러 장애물을 삼아 원진을 만들고 그 안에서 쇠뇌를 쏘면서 오환의 기병대를 격퇴한 바 있다. 로마에서는 트라야누스 집권기에 기병과 궁병을 대규모로 육성하여 파르티아 원정을 펼치어 유목민족 기병대를 제압하기도 하였다.
4.1.2. 중기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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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의 카타프락토이
인류 최초의 기병은 경기병이었으나, 말의 품종과 마구가 개량되어 보다 무거운 무게를 지탱할 수 있어져 중기병이 탄생했다. 최초의 중기병은 고대 중동에서 등장한 카타프락토이였다. 정확히 언제부터 등장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기원전 10~7세기경에 아시리아 기병의 화려한 장식에 영향을 받아 마갑을 입힌 카타프락토이가 등장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렇게 말과 기수를 갑주로 감싼 중장기병은 기원전 5~6세기경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때 화살에 잘 견디기 위해 등장하였다고 한다. 이때 중장기병은 철제 흉갑, 투구, 그리고 말 전면만 가리는 철제 마갑을 씌운 모습이었다. 활과 단창, 철퇴와 장검으로 무장하여 돌격과 돌파보다는 말을 타고 적을 기습하거나, 측면과 후방교란, 그리고 갑옷을 입었기 때문에 활을 쏘는 적 궁기병 혹은 궁병과 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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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도니아 왕국의 중기병 헤타이로이
기병의 돌격전술은 조금 나중인 기원전 4세기경 마케도니아 왕국의 필리포스 2세에 의해 개발되었는데, 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즐겨 쓰면서 대외 원정을 다니다 보니 아시아 고원에까지 알려졌다. 보병과 협동하여 기병의 충돌력을 활용하는 이 전술을 망치와 모루 전술이라고 한다. 파르티아, 박트리아의 유목민들은 철제비늘갑주와 마갑을 씌우고, 장창을 도입한 중장기병으로 돌격과 충격전술을 구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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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고분벽화에 그려진 중기병 간의 교전 장면. 양손으로 창을 쥐고 어깨 위로 들어서 찌르는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이 시기 중기병은 아직 안장의 발달이 미흡하고 등자도 없어 후대의 본격적인 중기병과는 차이가 있었다. 보통 말 위에서는 창을 겨드랑이에 끼는 방식인 카우치드 랜스가 아니라 양손으로 창을 움켜쥐고 내지르거나 어깨 위로 들어서 찌르는 방식을 사용하였는데, 이러한 방식은 승마 시 안정감이 떨어졌고 양팔을 모두 사용하는 동작의 한계상 전투 간격이 넓어 조밀한 전투대형을 이루기도 힘들었다. 그러나 육중한 갑주와 말의 돌파력은 결코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어서, 알렉산더의 동방원정 당시 이들 중기병들이 막강한 활약을 펼치는가 하면 고대 지중해 유역에서도 중기병은 많은 활약을 펼쳤다. 흔히 궁기병에 로마군이 유린됐다고 알려진 카르헤 전투에서도 이들 중기병이 돌격전을 벌여 로마군에게 큰 타격을 입히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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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티아 카타프락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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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벽화에 남아있는 개마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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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기마인물형 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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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수나라 시기까지의 중기병 발전을 카툰풍으로 묘사한 그림.
동아시아에서는 기원후 2~3세기경 삼국시대까지도 마갑을 입힌 중장기병의 수가 없거나 매우 적었으며 본격적으로 대량 운영된 것은 중국판 게르만족 대이동이라 할 수 있는 5호 16국 시대부터였다. 마갑이 동아시아에서 독자적으로 개발되었는지는 아니면 유목민들을 통해 중앙아시아로부터 수입된 건지는 불분명하지만, 기원후 2~4세기경 선비족이 먼저 중장기병을 대량 운용하기 시작해 본격적으로 등장함을 보면 유목민으로부터 전파받은 걸로 추정된다. 한국은 서기 300년대 중반에 만들어진 고구려의 안악 3호 고분에 개마무사가 나타나, 그 쯤에 중장기병이 운영된 걸로 추정된다. 이밖에 가야에 기마인물형 토기나 마갑 유물 등이 발굴되어 마갑을 씌운 중장기병이 한반도 남부에서도 운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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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마갑을 씌운 중장기병의 등장이 늦다는 것이지, 동아시아에서도 중기병을 이용한 충격 전술 자체는 일찍부터 존재하였다. 본격적으로 기병을 이용한 돌격전이 등장하는 것은 기원전 2세기경 한나라의 흉노 원정 당시로, 이 무렵부터 기병대가 본격적인 전투병력으로 대량 육성되면서 이광의 아들 이감이 흉노 기병대에게 돌격전을 펼쳐 승리하거나 곽거병이 기병 800명을 이끌고 흉노군 2천 명을 궤멸하는 등 주로 기병 간 돌격전이 많이 펼쳐졌다.
이후 기원후 2세기경 삼국시대때에 여포가 기병을 이끌고 장연에게 돌격해 승리한 기록이 있고, 조인이 기병을 이끌고 돌격전을 펼쳐 포위당한 아군을 구출한 기록들이 등장해 기병대가 보병에게 돌격한 사례가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그 밖에 관우가 말을 타고 돌격하여 적 지휘관인 안량을 살해한 기록도 있으며 기원후 240년경에 고구려의 동천왕이 5천의 철기병(중장기병인지는 불분명)으로 위나라 군대에 돌격하여 위나라의 관구검이 방진으로 맞섰다는 기록이 있다.
4.2. 중세: 기원 후 4 ~ 15세기
지역을 불문하고 고대에도 기병대는 중요했으나, 서로마 제국이 멸망할 즈음의 서유럽에서는 기병대의 역할은 종전보다 더 중요해졌다. 이미 동서 로마제국에서도 보병보다 중무장한 기병대가 전력의 주축이 되어가고 있었으며,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세워진 프랑크 왕국의 군대도 초기에는 보병이 중심이었으나, 8세기 중엽부터 군벌들에게 봉토를 나눠주고 각각 사병을 육성하고 기마병을 육성하기 수월한 봉건제도를 실시하였고, 이미 그 전부터 기사계급이 성장하여 기병의 중요성이 점점 부각되고 활약상도 점점 증가하였다. 주로 창이나 냉병기를 이용해 백병전 위주로 싸우는 경우가 많았고 창대를 겨드랑이에 끼는 카우치드랜스라는 창 파지법이 유행하면서 창을 든 중기병대가 주축이 되었다.
동로마 제국과 중동에서는 국가 단위로 대규모로 기병을 육성하였는데, 서유럽에서 중기병들이 대거 활약하는 것에 비해, 동로마와 중동의 중기병대는 측면이나 후방의 돌파를 위해 가끔 쓰이는 것에 그쳤고 서유럽과 달리 궁기병의 활용이 매우 빈번했다.
동아시아에서는 일찍부터 활을 이용한 경기병이 존재하였으며, 후한시대부터 기병을 이용한 충돌 및 돌격전술이 부분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남북조시대부터는 마갑까지 갖춘 중무장기병대의 돌격전술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하며 한민족 국가들도 여기에 영향을 받아 개마무사를 다룬 벽화가 등장하거나, 마구, 마갑 등이 출토되기도 한다.
한반도 역대 왕조들은 농경국가임에도 기병 비중이 은근히 높은 편인데 고려도 마찬가지였다. 1018년 강감찬은 흥화진에서 '''기병 12,000기'''를 매복시켜 거란군을 격파한 바 있으며, 고려사 병지에 따르면 북계의 주진군 총병력이 4만 명인데 그중 기병이 약 5천여 명 정도로 추산된다. 전체 병력 중에 8분의 1이 기병이라는 것이다.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기병으로 윤관이 창설한 별무반의 신기군을 들 수 있으며, 고려 말 홍건적과 왜구를 상대로 싸운 인간흉기 이성계 사병 2천 명도 대부분 기병으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황산전투 이후 왜구가 타고다니던 말 1,600여 필을 노획했다.
4.2.1. 중기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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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이란계 민족 소그드족의 허리띠 장식. 5세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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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상전투와 갑주검술을 디테일하게 묘사한 13세기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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롱소드와 런들대거로 전투를 벌이는 트랜지셔널 아머 시대의 서유럽 기병들. 14세기 후반 그림
동로마 제국과 중앙아시아에서는 일찍부터 중기병대와 궁기병대의 제병협동 전술이나 돌파전술이 유행하였고, 서로마 제국 멸망 후 프랑크 왕국에서도 백병전을 하는 기마병의 사회적 위치는 지속적으로 상승하였다. 후한~ 남북조 시대를 기점으로 동아시아 역시 중기병의 역할이 부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동아시아에서는 남북조시대에는 마갑을 갖춘 선비족 기병대 등이 활약하는 등 3~4세기 이후부터 마갑을 갖춘 중무장 기병대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는데 한국에서도 여기에 영향을 받아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중장기병이 육성되고 운용되었다. 삼국시대 공손찬의 백마의종도 마찬가지지만, 유럽의 중기병과 달리 동아시아나, 중앙아시아, 동유럽 등에서는 기병대열에 궁기병을 섞어서 활을 쏘면서 돌격하는 중기병 대열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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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우치드 랜스
서기 9~10세기에는 창을 겨드랑이에 끼고 돌진하는 "카우치드 랜스(Couched Lance)"라는 새로운 기병전술이 등장했다. 등자와 함께 등장한 이 기술이 서유럽에서 기병이 활약할 수 있게 더욱 보탬이 되었다. 카우치드 랜스는 창을 잡을 때 겨드랑이를 활용함으로써 한손만으로도 창을 안정적으로 쥘 수 있었고, 남은 다른 한손으로는 방패를 쥐어 화살이나 적의 공격을 방어할 수 있었으며[26] , 양손으로 창을 쥐는 것과 달리 많은 공간을 필요로 하거나 양팔의 간격이 넓지 않아 좌우로 간격을 좁혀 집단으로 대열을 이루기도 수월하였다.
정확히 언제부터 등장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린 화이트(Lynn Townsend White Jr)에 의하면 이미 서기 10세기 이전부터 동로마 제국과 이슬람에서는 흔하게 쓰였다고 한다. 동아시아에서는 몽골 등이 많이 사용하여 수렵이나 전투를 그린 회화에서 많이 보이고, 청나라 시대에 기병을 그린 삽화에서도 확인된다. 10세기 이전 서유럽에서는 마상전투를 다룬 그림이나 태피스트리에서 창을 쓸 때는 여전히 말 위에서 두 손으로 창을 잡은 모습이 확인된다.
그러면서도 중기병을 서유럽에서는 동로마 제국이나 이슬람보다도 더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동로마와 중동은 여전히 중기병대를 적진의 측면이나 후방을 타격하는 용도로 사용하였으나, 서유럽에서는 중기병을 보병/기병, 정면/측면을 가리지않고 적진에게 돌파하는 용도로 수시로 사용하고, 돌격의 횟수도 단번이 아닌 여러 차레로 나누어 축차돌격을 감행하는 등 전투 내내 말이 탈진하여 쓰러질 정도로 중기병들의 돌격을 많이 활용하였다.[27] 이를 통해 11세기 말에 벌어진 제1차 십자군 원정에서부터 이미 서유럽의 중기병대는 근접전에 한해서 이슬람권의 기병대를 압도하고 있었다. 기창돌격을 맨몸으로 맞아야했던 보병들에 대해서는 자세한 설명까지 필요없을정도로 강력한 위력을 드러냈다. 대표적인 사례가 도릴라이움 전투로, 앞뒤로 서유럽 중기병대의 돌격을 받은 튀르크군은 패주를 면치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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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추세에 맞춰 창의 형태도 한손으로 잡고 겨드랑이에 끼기 쉽도록 변화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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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병용 갑옷의 오른쪽 가슴 부위에는 창받침이 생겨났다.
또한 카우치드 랜스의 도입으로 기병대 대열도 약간 변화하였는데, 종전에는 마름모나, 삼각형, 쐐기형으로 대열을 편성하여 대열을 두껍게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가로로 길고 얇게 펼쳐진 횡대 대열을 꾸리는 경우가 많아졌다. 대열을 가로로 길게 배치할수록 창을 이용하여 적을 더 많이 찌르는 것이 가능했다. 게다가 대열이 얇아 최초 돌격이 저지되었을 경우 병력을 후퇴시켜 재정비한 후 재돌격하는 것이 두꺼운 대열에 비해 더 수월하였다.
이것 말고도 중장갑화로 서유럽의 기병들은 막강한 돌격능력을 가지게 되었는데, 동로마 역사가 안나 콤니니는 서유럽의 노르만인 기병대를 보고 "거인의 힘으로 당긴 화살을 튕겨내며 바빌론의 성벽마저 뚫어버릴 수 있을 정도"라고 평가하였고, 실제로 서유럽의 보두앵 4세는 1177년 몽기사르 전투에서 예루살렘 왕국군 500명과 성당 기사단 80명의 기병대를 이끌고 돌격을 감행해 2만 6천명의 살라딘 군대를 박살내버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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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는 중기병의 갑옷이라고 해봐야 체인메일이었을 시절이라 이후 휘황찬란한 플레이트 아머가 도입되기 훨씬 전이었으며 말도 이후의 육중한 체구의 군마가 아니라 조랑말보다 조금 더 큰 수준의 소형마를 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갑옷을 갖춰입은 중기병대의 돌파 능력이 빛을 발한 것은 이때까지도 기병 돌격에 대해 대처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는 것을 방증한다. 장창병들이 빼곡히 늘어서서 돌격을 저지하거나 똑같이 중기병을 돌격시켜 맞불을 놓거나, 그도 아니면 지형과 요새 등의 기물을 이용해야 했는데 장창병들의 경우는 기병 돌격에도 눈하나 꿈쩍하지 않고 버틸 강단있는 정예 보병대일 필요가 있었으며 중기병 맞돌격의 경우는 장비와 기량 차이에 심하게 영향을 받는다는 문제가 있었고 마지막의 경우는 전술적인 선택의 폭이 좁아진다는 문제가 있었다.
잉글랜드의 경우 14세기 중반부터 중기병을 유동적으로 사용하였다. 11세기 잉글랜드 노르만 왕조가 열리면서 서유럽 깡패 기병대 중 하나였던 노르만 기병대의 후예로서 기병전력이 훌륭했고 백년전쟁 이후 거의 잃기는 했으나 11세기부터 프랑스땅도 많이 소유했었기에 좋은 군마들과 평지를 확보했었다. 실제로 12세기엔 리처드 1세와 함께 십자군 전쟁에서도 중기병의 어마어마한 위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위에 '기병의 장점' 항목 상단에 인용된, 살라딘의 회고록에서 나타나는 서유럽 기병대의 무시무시한 무용의 주인공이 바로 리처드1세와 앵글로-노르만 기병대이다.[28] 그러나 웨일스와의 전투에서 장궁의 위력을 알게되었고 14세기 백년전쟁에서 자신들보다 양적, 질적으로 우수한 프랑스군을 상대하기위해 방어적인 전략을 취하면서 중기병들을 하마, 중보병 전력으로 활용하고[29] 장궁병을 대폭 활용하여 방진을 짠후 니가와를 시전하는 전법을 쓰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잉글랜드 중기병들은 자주 하마하기 시작했으나 말에서 내린 중기병들은 필요하다면 언제든 다시 말에 올라 본래의 기병 역할을 수행했으며 기본적으로 기병인만큼 마상전투를 고도로 훈련했다고 한다.[30] 몇개의 사례로 크레시 전투에서는 하마기사들이 후퇴하는 적들을 향해 기병으로 전환하여 추격 섬멸하였고 푸아티에 전투에서도 일단 하마하여 싸우다가 막바지에 전황이 불리한 순간 다시 중기병으로 전환, 결정타를 날리며 승리를 이끌었으며 장미전쟁에서도 일단은 하마한 채로 싸우다가 추후에 기병돌격을 감행하는 등 대륙국가와는 차별되는 독특한 기병 전략을 운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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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중기병.
동시대 동아시아에서는 거란, 여진족 등 철광을 확보한 유목민족들이 집중적으로 중기병을 육성, 그 군사력으로 북송을 재패하고 만주, 연해주, 북중국을 장악하면서 한때를 호령했으며, 남송과 고려역시 마갑을 씌운 중장기병을 운용하였던 것으로 확인된다. 몽골족 역시 군의 편성에서 중장기병을 많이 운영하였다. 마갑을 씌운 중무장기병은 원나라 말기까지, 멀리는 청나라 때까지 존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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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의 갑주와 마갑
조선은 초기에는 중기병을 40%, 활을 다루는 궁기병을 60%로 구성했으나 세조대 궁기병 비중을 대폭 늘리면서 중기병은 사실상 없어지고 임진왜란 직전에는 주로 궁기병들만 남게 된다. 단 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에 창기병의 모습이 그려져있는것으로 보아 중기병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이후 편곤등의 근접무기들이 자리잡으면서 서양과 비슷한 방향으로 기병 활동 성격이 변하게 된다.최형국, 『조선후기 기병전술과 마상무예』 조선군 환도는 일본 와키자시와 비교해도 짧을 정도로 좀 많이 짧기 때문이다.
근세 직전에 오면 갑옷의 고도의 발달로 기사가 죽는 게 더 힘든 지경까지 오자 이전엔 쐐기진으로 돌격진을 두텁게 하여 돌격력이 죽지 않게 신경썼으나 이제는 기사들은 단순히 일자형으로 진형을 짜서 그대로 돌격해 최대한 많은 적을 죽이는 데에 집중했다. 롱소드는 어떻게든 갑옷의 틈을 찔러 보라고 가늘어지고, 보병들은 보잘것 없는 개인의 무력을 뽐낼 수 없게되자 한번 사장됐던 파이크를 다시 들어 최대한 덜아프게 맞기나 바래야 했다.
4.2.2. 경기병
중세 전장에서 경기병이 자주 맡은 역할은 정찰 및 적진 교란과 전투 종반에 후퇴하는 적의 추격이었다. 적이 진형을 구성하고 있을 때 경기병이 먼저 나가서 전반적으로 찔러보고 약점을 찾는 식이거나 중기병의 돌파 시에 함께 나아가 적진에 사격을 가해 중기병의 돌파를 쉽게 해주는 식이다. 실제로 금나라의 기병 편제는 항상 중기병과 경기병이 한 부대로 편성되었다. 이 경우 중기병의 돌파가 쉬워질 뿐 아니라 적도 중기병으로 맞대응할 경우 충돌 전에 먼저 적의 숫자와 기세를 꺾어둘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게다가 전투의 종반에 도망치는 적을 추격하여 전력을 가장 확실하게 줄이는 데에 경기병만큼 좋은 병과도 없었다.
고대에서부터 최초의 기병은 경기병[31] 이었고, 중세에도 활을 든 경기병은 꽤 많은 활약을 했다. 활약의 내용은 고대나 중세나 크게 변하지 않아서, 말을 타고 계속 이동하면서 적에게 화살을 퍼부어서 타격을 입히는 전술을 구사하였다.
12세기 초반에는 경무장한 금나라 기병 17명이 자기들을 쫓아오는 2,000여 명의 북송 보병대를 활만 쏘아 일방적으로 유린하여 궤멸시킨 일화가 있다.[32]
14세기 잉글랜드는 백년전쟁에서 chevauchee라는 기마 약탈 전략을 운용했는데 경기병의 기동성을 활용해 프랑스 영토들을 초토화하고 약탈하는 전략을 운용했다. 다만 약탈하는 과정에서 하마하는 경우도 있었을테니 관점에 따라 승마보병으로도 볼 여지가 있다. 잉글랜드만 썼던 전략은 아니었으나 유독 잉글랜드가 자주 사용했다. 푸아티에 전투에서 화살을 소진한 장궁병들 중 일부가 즉흥적으로 기병으로 합류하기도 했는데 잉글랜드가 저런 기마 약탈 전략을 상당히 자주 썼던만큼 충분히 가능했을 수 있다.
몽골 제국의 경기병은 두 종류의 합성궁과 세 종류의 화살을 사용했는데, 활의 사용은 단순한 엄호, 견제를 넘어서 적의 대열을 와해시키고 타격을 주는 역할까지 담당하였다. 중기병도 다수 존재했으나 역시 동시대의 기병들과 비교하면 비교적 경장이고, 전투의 주력은 주로 활을 든 경기병이 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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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예프 공국 중보병을 쏘아죽인 몽골 경기병.
유목민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던 나라들에서 유독 활을 이용한 경기병을 많이 운용하였는데, 예컨대 유럽의 헝가리나 중동의 여러 이란계, 튀르크계 제국들이나 중국이 많은 경기병을 운용했다. 그 중에서 사산 왕조나 맘루크에서는 중무장한 기병이 활을 쏘며 돌격하는 전술로 유명했다. 조선은 정책적으로 궁기병을 집중적으로 운용하였고, 일본의 초기 사무라이들 또한 마상궁술을 중시 여겼다. 또한 카우치드 랜스가 발달하기 전 일부 서유럽 기사들도 마상궁술을 사용하곤 했다.
4.2.3. 중기병 VS 경기병
서양이든 동양이든, 근현대의 역사가들은 경기병을 중기병보다 우위에 두었으며, 중기병의 갑옷을 겁쟁이의 자기위안급으로 폄하하기까지 했다. 버나드 로 몽고메리는 봉건기사의 갑주를 '리더십의 결여'의 산물로 평하며 유럽 중기병의 갑옷이 기병의 생명인 기동성과 화력을 떨어뜨리고 실질적으로 기습을 불가능하게 만든 반면, 몽골의 경기병은 기동력의 우위를 바탕으로 유기적인 전술을 펼 수 있었다고 했다. 또한 존 키건은 날붙이를 부딪히는 것을 고집했던 중기병의 전법을 육탄전을 고무하던 게르만족 특유의 군사문화와 결부하기도 했다. 바투가 행한 서방원정이 이를 증명한다고 믿었다.
특히 레그니차 전투는 유럽식 중기병과 중앙아시아 경기병의 충돌로 서양에서도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사건이다. 오히려 서양 쪽에서 많은 의의를 두고 있으며, 아이러니하게도 훗날 프로이센이 리그니츠의 전장 위에 군사학교를 설립하는 바람에 숱하게 강의주제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주로 전장에서의 기동력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사례로 차용되며 당시 유럽식의 충격기병이 경장비의 기병을 상대하는데 겪었던 어려움을 말한다. 이에 대해서는 위키피디아에도 언급이 있다.
하지만 '''몽골군 전력의 20~40%은 항시 중기병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비록 유목민 징집병이긴 했지만 유목민의 특성상 사냥[33] 과 약탈이 일상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삶 자체가 전투훈련의 연속이어서 일반적인 농경민족의 군대와는 이야기가 다르다. 괜히 화약무기가 대량으로 보급될 때까지 농경국가가 유목국가를 완전히 제압하지 못한 게 아니다. 그리고 '''몽골군은 말이 사람보다 많아서 무장을 해도 군마의 체력에 크게 신경쓰지 않아도 되었다.''' 또한, 리그니츠 전투에서 튜튼기사단의 참전 여부는 여전히 논란의 사안이며, 튜튼기사단 참전의 주요 출처인 얀 듀고츠 연대기에서 전투에 참가, 전사했다고 기록된 기사단장 포포 본 오스테른의 사망연대가 리그니츠 전투 10여 년 후고, 당시 기사단장도 아니었으며, '''리그니츠 전투 직후 프로이센에 대한 튜튼기사단의 대규모 공세'''를 미뤄보면 리그니츠 전투에 튜튼기사단이 참전했더라도 주전력의 참가는 아니었을 확률이 높다. 또한 바투가 직접 지휘한 사조강 전투에서 헝가리군은 숫적으로 열세한 상황인 데다 귀족들이 등을 돌려 추가적인 지원을 받기 힘들었고 전력의 상당수가 보병이라 기병전에서 불리한데도 불구 '''사조강을 배경으로 몽골군의 기동을 제한시키고 백병전을 강요, 오히려 몽골군을 위기에 몰아넣었다'''. '''바투가 직접 가신들과 친위대를 이끌고 돌격'''해서 전황을 안정시키고 수부타이군이 뒤늦게 도하에 성공해서 헝가리군의 배후를 습격해서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승리와 패배가 한끝차이인 상황이었으며 40년 후 헝가리군은 이때보다 더더욱 중무장화가 진행되었음에도 몽골계 노가이칸의 침공 당시 성공적으로 결전을 강요, 격파한 바 있다. 즉 지휘관이 우수하고 시기가 잘 맞아떨어지고 운을 제대로 탄 것이 몽골의 최고의 장점이다. 이런 우수한 지휘관이 없고 오히려 상대편에 우수한 지휘관이 있는 원 말기의 경우 기병대의 무장이 충실함에도 불구하고 주원장의 병사들에게 깨져나갔다.
또 인터넷에는 몽골군의 임팩트 때문에 경기병이 중기병을 압도한 사례들이 주로 퍼져있지만 실제로는 중기병을 열심히 육성한 세력이 경기병 위주의 세력을 제압하고 복속시킨 사례 또한 많다. 최초로 중장기병을 육성했을거라 추정되는 사르마티아는 그 중장기병의 힘으로 다른 유목민들을 제압하고 전성기를 누렸으며, 고구려에서는 유목민족들의 경기병에 대한 효과적인 대비책으로, 요동에서 생산 되었던 많은 양의 우수한 철을 바탕으로 중장기병을 양성했으며 이러한 중장기병의 힘을 바탕으로 경기병이 날뛰는 남만주와 중만주를 오랫동안 지배하였다.
또한 고구려와 발해가 멸망한 뒤 들어선 요나라와 금나라에서도 중장기병을 운영했고 청나라도 중장기병을 운영했다는 것에서 드러나듯이 직접적으로 싸우는 데는 중장기병이 우세했다. 특히 금나라는 극단적인 초중장기병[34] 까지 나올 정도로 중장기병 육성에 심혈을 기울인 국가였는데, 바로 그 중기병의 힘으로 다른 유목민인 요나라를 완파하고 몽골고원의 유목민 또한 복속시켰다.[35]
이는 아랍에서도 드러나는데, 이집트의 맘루크 중기병과의 전투에서 몽골기병은 여러 가지 이유로 맘루크 기병과의 근접전을 강요받았고, 그 근접전에서 몽골기병은 크게 패한다. 다만 맘루크가 근접전만 했던 것은 아니다. 맘루크는 기마술, 창술, 검술, 궁술에 모두 통달해야 했으며 4 과목에 대한 시험을 모두 통과해야 정식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아인잘루트에서는 몽골군이 돌격해오자 맘루크들도 활을 쏘며 응전했다는 기록이 있다. 즉 맘루크들은 근접전''''만'''' 잘한 것이 아니라 근접전''''도'''' 잘했던 것이다. 아무튼 맘루크 기병대는 충실한 갑옷의 힘으로 마상사격에서도 우위를 점했고 결국 몽골군은 사격전에서 우위를 점하지 못해 근접전 승부에 끌려나올 수 밖에 없었다.
십자군 원정에서도 이슬람 경기병은 번번히 유럽의 중기병의 돌격을 저지하지 못했으며, 심지어 570기의 중기병이 2만이 넘는 이슬람군을 박살내는 전투까지 있었고 이런 전투들이 한두가지도 아니고 아예 시리즈물로 많았다. 결국 나중에는 이슬람에서 육성한 동급의 중기병이 이에 대항하여 유사한 형태로 돌격하는 일이 자주 벌어졌다.
http://basiloikon.egloos.com/1642282 여기에도 드러나듯이 중무장한 로마군이 숫적으로 훨씬 우세했던 튀르크군을 이겨버렸다.
중기병은 전장에서 증명하듯 매우 강력한 병종이었으며 중기병 무시 풍조는 17-19세기에 걸쳐 유럽에 팽배했던 중세 무시 사고와 그 맥을 같이 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경기병과 중기병중 어느 쪽이 언제나 우세하다고 확실히 단언할 수는 없으며 '전투의 상황에 따라' 그 효력이 다른 병종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증명하는것이 두차례의 도릴라이움 전투로 십자군 중기병이 근접전을 강요한 1차 도릴라이움전투에서는 십자군이 승리했지만 투르크 궁기병의 스웜전술에 휘말인 2차 도릴라이움 전투에서는 신성로마제국 십자군이 궤멸당했다. 근접전에서는 중기병이 우세한 반면, 경기병은 적과 직접 충돌하기 전에 유리한 상황을 조성하는 데에 더 유용했다.[36] 어차피 대부분의 전쟁은 전투에서 승부가 나기 때문에 중장기병을 중심으로 경기병이 보조하는 형태로 병력을 구성했다.
애당초 경기병>>>중기병 이라는 단순한 논리대로라면 중앙아시아,서아시아,동아시아,유럽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국가들이 죄다 경기병만 죽어라 양성하지 중장기병을 양성하지 않았을것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화약무기의 발달 이전까지 대다수의 문화권이 심혈을 기울여 중장기병을 육성했고 유목민조차 정복한 땅의 자원을 이용할 수 있게되면 최대한 중장기병을 많이 육성했다.[37] '''애당초 중장기병 자체가 경기병을 카운터 치기 위해 나온 병과다'''
4.3. 중세 말: 기원 후 15~18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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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군의 화기에 의해 저지당하는 프랑스 중기병의 돌격. 1503년에 벌어진 체리뇰라 전투(Battle of Ceriñola)를 다룬 그림이다.
튼튼한 갑옷과 말의 빠른 기동성으로 움직이는 중장기병은 냉병기 시대의 현대전차라 할 수 있을 만큼 위력을 발휘했지만, 이후 화기가 널리 보급되면서 아예 기병자체가 점차 힘을 잃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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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부터 서서히 기병의 주무장이 검과 권총으로 바뀌게 된다.
기병끼리의 전투에서 총으로 원거리 사격을 가하는 것이 백병전을 하는 것보다 유리하고, 총을 쏘아대는 보병들에게 기존의 중기병으로는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없었다는 등의 이유가 있었다. 특히 1587년 쿠트라 전투(Battle of Coutras)에서는 프랑스 국왕군의 중기병이 위그노군의 총기병에게 패배하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기존의 중기병들인 돌격기병들이 쇠퇴하고, 사격 위주로 싸우는 총기병대가 오와 열마다 번갈아 교차 사격을 하는 카라콜 전술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보병화기의 화력이 기병화기보다 위력이 높았기 때문에 카라콜의 변형전술인 신교도 카라콜, 스네일(snail), 리마콘(limacon) 등이 그 주를 이루다가 30년전쟁에서 스웨덴의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총을 쏜 뒤 돌격하는 "하카펠리타트"를 육성함으로써 돌격기병을 부활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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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갑이 줄어들고 기마병이 입는 갑옷도 변화하였는데, 화기가 발달하기전에는 전신 판금갑옷을 입다가, 화기가 발달하고 나서부터는 총알을 막으면서 사람이 입고 다닐만한 무게를 지니기 위해 맞아도 덜 치명적인 부위의 갑옷을 없애는 대신, 중요 부위를 매우 두껍게 하는 갑옷양식이 유행한다.
이후 서양에서는 흉갑이라던지 방어구를 충실히 입은건 총을 가진 검기병 또는 검을 든 총기병들이었다. 그래도 창기병은 울란을 퀴레시어와 후사르들을 보조하는 용도로 적절히 조합해서 쓰던 나폴레옹 덕분에 나폴레옹 전쟁 이후 약간은 살아났지만 이미 주력은 이전시대부터 그랬듯 총을 가진 검기병 또는 검을 든 총기병들이었다. 창기병은 따로 익혀야 할 훈련이 많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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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기병대
동아시아에서도 마찬가지로 기병대의 전술이 과도기적인 모습을 보여주는데, 명나라 군대는 마갑을 폐지하고 핸드 캐논 등을 활용하는 기병대를 같이 운용하기도 하였고, 청나라 군대는 별도의 편성없이 기병대가 기병무기 전반을 다루기도 하였다. 그러나 청나라 군대도 부분적으로 마갑까지 갖춘 중장기병을 잔존시켜 운영하기도 하였고, 사르후 전투에서는 조선군을 상대로 돌격전을 펼쳐 승리하기도 하였다. 이들의 창기병들은 경기병의 장비를 갖추어 빠르게 이동하도록 하였다.
조선의 경우 일찍이 창기병이 사장되었으며, 왜란 이후 조총수 중심으로 편제가 뒤바뀜에 따라 서양 국가들처럼 다른 기병-특히 궁기병-들의 입지도 매우 좁아진다. 또한 인구 증가로 인해 초지가 농지로 개간되며 말을 키울만 한 지역 자체가 지속적으로 감소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점차적으로 유럽의 용기병이나 후사르를 결합한 듯한 운용법을 보이게 된다. 거점 방어 시에는 하마하여 가지고 있던 총이나 활로 보병들과 함께 방어전을 수행하였으며, 야전에서는 수색대로 활동하거나 포병과 보병을 엄호하였다. 그러다 화력에 짓눌린 적이 후퇴하기 시작하면 말을 타고 돌진하여 편곤이나 기병용 환도를 휘두르며 그 뒤를 추격하여 추가적인 피해를 입히고 전과를 확대하는 것이 이들의 주된 역할이었다.출처: 후기 조선군 기병의 후사르/드래군화가 되어간다는 잡설들
일본의 경우 보병 중심의 전투가 벌어졌던 전국시대와 평화로운 에도 막부를 거치면서 전투용 마술의 맥은 거의 끊어지다시피 했지만, 그래도 센다이 번과 토사 번을 중심으로 의전용 마술이 근근히 이어져내려왔다. 특히 토사 번(현재 고치 현)은 마술 문화가 매우 발달해 말을 키우기에는 열악한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일본 내 2위에 달하는 약 3만 5천마리의 말을 생산했을 정도였다. 토사의 번교에서는 무사들에게 마술 교육을 매우 장려했으며, 심지어 조선 통신사가 보여준 조선군 기병대의 진법인 마상재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조선류요마술(朝鮮流要馬術)'''까지 카와고에 번(현재 사이타마 현)에서 배워와서 번의 주요 마술로써 가르치기도 했다.출처: 이명진,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 마상재(馬上才) 공연과 일본의 마술(馬術) : 조선류요마술(朝鮮流要馬術)을 중심으로, 영남대학교 대학원, 2019년 2월
총기가 등장하고부터는 활을 이용하는 궁기병들의 입지가 줄어들고, 총을 사용하거나 권총을 이용하는 기병의 수가 증가하였는데, 이미 일찍부터 서유럽에서는 이를 이용한 카라콜 전술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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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가르군과 청군의 교전
특히 준가르와 청나라의 전쟁에서 기병대의 화기사용이 더욱 두드러졌다. 준가르군은 뛰어난 소구경 화포와 기동력을 이용하여 화력전을 펼쳤고, 적이 다가오면 지리적인 엄폐물을 활용하거나 수송용으로 쓰인 낙타등을 엄폐물로 삼아 말에서 내려 총격전을 펼쳤는데, 청나라 군대도 이에 하마사격과 화력전으로 대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양군의 기병대가 마상궁술과 하마총격술, 화포사격술 등 다양한 사격전술을 펼치며 기술적 변화에 대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4.4. 근세 : 기원 후 18~19세기
18-19세기에 이르자 머스킷을 사용하는 전열보병이 전장의 주력이 되었고, 소총에 장착하는 총검이 발명되어 이제는 장창병의 보조도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이제 기병대가 단독으로 잘 정비된 총병 전열을 향해 뛰어드는 것은 자살행위로 취급되었다. 거기에 기술의 발달로 포병이 더욱 강화되면서 굳이 기병을 보내지 않더라도 선제타격으로 보병대열에 충격을 가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기병은 다시 고대 세계처럼 보조군으로서의 능력을 더 절실하게 요구받았고, 이에 따라 '''보병이 할 수 없는 모든 일'''을 도맡게 되어 수많은 병과가 파생된다.
물론 돌파력을 이용한 돌격전도 여전히 존재하였으나, 다른 병과와 협동해 제한적으로 실시되었고, 원거리 투사무기를 사용하는 경기병 역시 거의 사라져 돌격전에 사격을 하거나 돌격을 하면서 한 두발 사격하는 경우가 많았다. 마상에서 활과 총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던 이집트 맘루크 기병대가 나폴레옹의 프랑스군 보병방진의 화력을 못이기고 궤멸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이 시대의 기병의 가장 큰 특징은 기병이 전장의 주역에서 밀려나 전장의 보조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여전히 보병 사이를 파고 들거나 도주하는 적군을 추격해 사살하는 것에서는 기병이 압도적이었으나, 화력으로는 보병과 포병에 밀리고, 가격에서는 보병에 잽도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장에 기병이 없어서는 안 되었다. 이 당시 보병은 대부분 총검으로 무장한 머스킷총병이었고, 이들의 원거리 화력은 얇은 선형진에서 극대화되었다. 또한 아군 포병이 이들을 잡으려 하여도, 고폭탄이 개발되지 않아 볼링공같은 탄환을 날릴 뿐이었던 이 당시의 포병들은 얇은 선형진을 상대로 그 효율이 극도로 떨어졌다. 포탄이 공처럼 통통 튕기며 지나가면서 그 궤적에 있는 보병을 죄다 으스러뜨리는 것이 이 당시 포병의 개념이었는데, 선형진 상대로는 직격해 봐야 그 위치에 선 적 병사 두셋만 잡고 땡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선형진은 측면에서의 기병 돌격에 극도로 취약하기 때문에, 아군 기병대가 달려들면 이들을 상대하기 위해 적군 보병들은 필연적으로 원형진 또는 방진을 짜서 밀집대형을 갖추어야 했고, 그러면 아군 포병의 사격이 제 효율을 발휘하기 시작하는 식이었다. 따라서 기병은 중세의 기사들과는 달리 정면돌격으로 적의 전열을 직접 무너뜨리는 것보다는 적의 측후면을 교란하고 아군 포병의 사격이 진가를 내도록 도왔으며, 패잔병을 추격하고 정탐을 수행하는 등의 역할을 중점적으로 수행하였다. 따라서 기병 장교들은 첩보장교를 맡기도 하였으며, 기병 장교들과 부사관들의 중요한 역할은 전장에서 언제 돌격할지 타이밍을 재는 것이었다. 적의 전열이 빵빵한 시점에서 정면돌격하는 것은 순식간에 압도적인 보병의 화력 앞에서 벌집이 되어 전멸하는 결과를 불러올 것이며, 기병대가 제 때 돌격하지 않으면 적이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 공격해 올 말미를 헌납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가 되면 기병용 갑주가 거의 사라져 중기병과 경기병의 차이는 주로 말의 중량에 좌우되고[38] 승마자의 장비는 별 상관 없는 경우가 많았다. 일례로 나폴레옹 전쟁기의 워털루 전투에서 괴멸당한 영국군의 스코츠 그레이(Scots Grey)는 후사르와 다를 바 없는 복장을 했고, 근위 기병대(Horse Guard)는 군복에 투구만 착용했지만 말이 대형마였기 때문에 중기병으로 분류된다.
이 시기 주요 기병의 병과는 다음과 같다. 각 병과의 자세한 설명은 개별 항목을 참고.
4.4.1. 울란
Ułan(폴란드어)/Ulanen(독일어)/Uhlan(영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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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봉기 당시 러시아군에게 돌격하는 포즈난 기병대.
근대 창기병. 울란(우완)은 폴란드 등지에서 부른 이름이며, 영어로는 랜서라고 했다.
나폴레옹이 쏠쏠하게 전쟁 내내 써먹은 창기병대의 경우 제대로 진형을 짜서 들이치면 경기병인 후사르는 물론 심지어 중기병인 드라군이나 흉갑기병을 능가하는 전력을 과시했다. 워털루 전투에서는 프랑스 경창기병 연대가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영국의 정예 중기병대 '스콧츠그레이'(ScotsGrey)를 개발살내기도 했다.[39]
물론 이때 당시엔 두 부대의 정면격돌이 아니라 스콧츠그레이가 프랑스군 보병과 포병을 상대로 무쌍을 찍다가 너무 신나서 대열이고 뭐고 엉망이 된 상태에서 프랑스 퀴레시어와 울란의 공격을 받아 괴멸당한 예외적인 상황이었다.[40] 일단 검기병이 아무 준비도 없이 창기병이 해달라는 대로 정면으로 꼴아박는 일부터 잘 없으니까.
이 때문에 영국군에도 창기병이 등장하게 된다. 윈스턴 처칠도 창기병 출신이다.[41]
다만 어디까지나 나폴레옹의 대 기병 기병대의 주력은 16개 연대의 프랑스 퀴레시어이다. 나폴레옹은 장비를 일신하여 갑옷 착용율을 높였고, 폐지되어가는 분위기였던 배갑도 부활시켜 장갑 방어력을 늘려서 프랑스 기병대의 대 기병 요격부대로 큰 활약을 벌였다.
그리고 같은 경기병이지만 척후임무 및 적 전열의 측후방 타격이 가능한 등 매우 기동성과 활용도가 높은 검기병인 후사르에 비해 창기병이라 방향전환이 힘들어[42] 측면이 약하고 검기병이 창기병이 해달라는 대로 순순히 아무 대책도 없이 정면충돌해 주지 않는 데다가, 진형이 풀리거나 창의 거리 안쪽으로 파고들면 급격하게 불리해지는 단점이 있었다. 창은 기본적으로 조준해서 찌르는 무기인데다가 창을 가지고 진형을 만든이상 적이 움직인다고 해서 그에 맞춰 창의 지향 방향을 바꿀 수도 없었고, 검도 가지고 있었지만, 급할 찰나에 빠르게 뽑아서 대응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훈련 강도도 일반 기병보다 강해 쉽게 양성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폴레옹 이후로도 기병의 주력은 검과 총을 사용하는 후사르가 될 수 밖엔 없었다.
병과상으로는 경기병에 속한다. 이유는 빠른 기창돌격를 위해 덩치보다는 속도가 빠른 말을 지급했기 때문이다.
4.4.2. 후사르
Huss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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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 전쟁기 영국군 제11 후사르 연대[43] 의 후사르.
대표적인 경기병/검기병. 폴란드의 윙드 후사르 또한 경기병에서 출발했지만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중세 기사급의 중기병이 되어버린 케이스다. 후사르의 원조는 헝가리 등지의 동유럽계 경기병이었으며, 19세기 전쟁 등을 다룬 영화에서 흔히 보이는 굽은 검인 세이버를 휘두르는 털모자 쓴 기병이 바로 후사르다.
4.4.3. 샤쇠르
Chasseur à chev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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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돌격하는 프랑스군의 엽기병. Keith Rocco 作
프랑스의 추격기병. 사냥꾼을 의미하는 프랑스어 'Chasseur'를 직역하여 수렵의 렵(獵)자를 사용해 엽기병이라 일컫는다. 이들은 후사르와 장비 면에서는 비슷했지만, 사냥꾼이라는 의미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는 것이 주임무.
4.4.4. 퀴레시어
Cuirassi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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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털루 전투에서 영국군에게 돌격하는 프랑스군의 퀴레시어.
흉갑기병. 총탄과 기병도에 대한 약간의 방호력을 가진 두꺼운 흉갑을 입는 돌격용 병과. 대표적인 중기병이었다. 이들은 중기병이었기에 굽은 검인 세이버를 쓰는 후사르나 샤쇠르와는 다르게 큰 충격을 줄 수 있는 직선형의 기병도를 장비했다.[44] 중기병보다 상대적으로 작고 속도가 빠른 말을 타는 경기병인 샤쇠르나 후사르는 속도를 이용한 베기에 유리한 세이버를 장비했다.
또한 나폴레옹의 대 기병전용 기병대의 주력으로 활약했는데 나폴레옹은 장비를 일신하여 갑옷 착용율을 높였고, 폐지되어가는 분위기였던 배갑도 부활시켜 장갑 방어력을 늘려서 프랑스 기병대의 대 기병 요격부대로 큰 활약을 벌였다.[45]
4.4.5. 드라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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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다온다 전투(Battle of Majadahonda)에서 프랑스군의 흉갑기병을 상대하는 영국군 용기병.[46]
용기병. 기병총 드라군을 다루는 병사로 어원은 이들이 다뤘던 총의 이름에서 나왔다. 본래는 말을 타고 이동하다가 전장에서는 말에서 내려 하마전투를 하는 승마보병으로서 기병이 아닌 보병이었으나, 이후 18세기에 들어와서부터는 후술하는 총기병과 비슷하게 말 위에서 사격하는 기병으로서의 승마 전투도 행하게 되면서 보병에서 기병으로 바뀌게 되었다.
영국군에서는 18세기 후반부터 잡다한 기병 병과를 해체하고 중 드라군과 경 드라군으로 개편했지만, 나폴레옹 전쟁을 겪은 뒤 오히려 대륙의 영향을 받아 여러가지 기병 병과가 생겨나게 된다.
4.4.6. 캐러비니어
Carabinier(프랑스어)[47] , Carabineer/Carbineer(영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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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기병대 소속의 후기 캐러비니어. 1812년 보로디노 전투 당시의 총기병대를 그린 그림이다. 우상단 언덕에서 전장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나폴레옹이다. 총기병대는 제국 근위대 소속은 아니지만 2개 연대밖에 없던 최정예 기병대라 종종 나폴레옹의 경호를 서기도 했는데 이 그림도 그런 상황을 그린 것이다. 해당 그림의 총기병대 부사관은 나폴레옹의 명령서를 전달하고 있으며 퀴러시어보다도 잘 차려입은 갑옷이[48] 눈에 띈다.
총기병. 카빈총[49] 을 다루는[50] 병종으로, 이쪽은 드라군과는 달리[51] 처음부터 말 위에서 사격하는 기병으로서의 승마전투를 염두에 두었던 부대이다. 따라서 적의 탄환을 막을 충분한 갑옷과 총을 다루는 것의 편의를 위해 대형마를 운용 했다. 따라서 중기병으로 분류.[52] 이들은 루이 14세 당시의 프랑스 기병대중 최정예를 기마총병대라고 부르던 것에서 유례했다. 총기병대가 왜 최정예 기병 취급을 받았는지 살펴보자면 원래 18세기 당시 기병들의 화기는 권총 정도 였으나 프랑스 총기병대는 기병총을 들고 마상 사격까지 할 수 있었다. 이는 사격과 승마 모두에 도통하지 않고는 어려운 일이었고 그렇기에 총기병대는 엘리트 기병으로 대우 받았다. 나폴레옹 휘하에서 총기병대는 두개의 연대를 갖추었고 낭수티등 유능한 중기병 지휘관들의 지휘를 받는 중기병 사단에 배속되어 싸웠다. 이들은 흉갑기병 연대가 10여개에 달하는 숫자를 갖추었을 때 겨우 2개 연대를 갖추었을 뿐이었기에 그 희소성은 엄청 났다. 하지만 실전에서 이들은 졸전을 거듭했는데 대표적인 예가 바로 라이프치히 전투에서의 졸전이다. 이들의 진형에 일련의 헝가리 후사르들[53] 이 돌격해 왔고 이들의 지휘관인 세바스티아니 장군은 중기병에게 경기병이 돌격해오다니 저 바보들ㅋㅋㅋ 하며 박장대소 했지만[54] 이게 웬걸 총기병대는 장군을 버려두고(!!!) 패주했다. 결국 이 후사르들과 교전한 것은 총기병대 뒤에 서있던 제1 흉갑기병 연대였고 전투 후에 이들은 모든 중기병들로부터 손가락질 받았다. 어쨌든 이 사례 외에도 그 멋진 장비와 두 개 연대 뿐이라는 희소성에 비해 총기병대는 나폴레옹 전쟁 내내 졸전을 거듭했지만 총기병은 19세기까지 남은 대표적인 기병 병종이었고 나중에 가면 퀴레시어와 크게 다르지 않은 흉갑기병이 된다. 사실 총기병대가 흉갑기병이 된데는 조금 슬픈 내막이 있다. 원래 총기병대는 곰가죽 모자에 검정색 말을 탄 나폴레옹의 프랑스 제국근위대 소속 기마척탄병 연대와 크게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55] 하지만 1809년 오스트리아와의 피튀기는 치열한 전역에서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들이받는 오스트리아 울란과 앞쪽 갑옷밖에[56] 안입은 오스트리아 흉갑기병에게 계속 피해를 입자 최우수 인적자원이[57] 전쟁에서 자꾸 소모되어감을 우려한 나폴레옹의 명령으로 흉갑과 곰가죽 모자 대신 프랑스 경창기병 연대와 거의 같은 디자인의 금속제 신그리스풍 투구를 지급했다. 웃긴 것은 이 명령을 받은 이들의 반응인데 이들은 나폴레옹이 자신들의 용맹을 의심하여서 흉갑을 입으라는 줄 알고 크게 반발했다. 하지만 여러 모로 불편한 점도 많았지만 흉갑이 사람을 안전하게 해주는 것은 사실이었기에 이들은 그 후에도 쭉 투구와 흉갑을 입고 싸우게 된다.
이들 역시 드라군과 마찬가지로 치안 유지에 투입되었고, 이 때문에 세월이 흐른 오늘날에도 여전히 남아있는데, 현재 이탈리아군 소속 국가 헌병대인 카라비니에리는 1814년에 창설된 사보이 왕가 소속 총기병 연대가 1861년 이탈리아 통일과 함께 이탈리아군에 편입된 것이 기원이다.
4.4.7. 시파히
سپاهی(오스만 터키어)/sipahi(영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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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빈 포위 당시의 시파히 기병대.
오스만 제국의 정규 기병대[58] 로, 예니체리와 함께 오스만 제국 군단의 핵심전력. 크게 근위대인 '카프쿨루'와 유럽의 봉건 기사격인 '티마를르'로 나뉜다. 훗날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식민지군이 운용하던 경기병대인 '스파히'와 영국 동인도 제국 소속 인도인 용병인 '세포이'의 모티브기도 하다. 항목참조.
4.5. 근대: 20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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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의 기병대. 붉은 바탕에 녹색 옷깃·소매는 기병병과의 복색이였으며 이들이 소지하고 있는 기병창 및 기병도는 전부 독일,러시아제를 구입해서 사용했다고 한다.
20세기 들어 이름은 騎兵이지만 사실상 機兵으로 체계화되었다.
19세기 후반 미국 남북전쟁을 참관한 유럽 기병 장교들은 "미국 기병은 총만 쏘네?"하며 비웃었다. 미군, 특히 북군의 총이 발달한 것도 있지만 급히 군의 규모를 늘리다 보니 마상 검술을 비롯한 수준 높은 승마술을 훈련시키지 못한 것도 사실이었다. 남군의 기병 사령관이었던 존 싱글톤 모스비의 부대는 세계 최초로 기병도를 장비하지 않은 기병대로 유명하며 젭 스튜어트와 함께 남군 최고의 기병사령관으로 꼽히는 네이선 베드퍼드 포레스트의 기병대는 말은 이동수단으로 사용하고 거의 대부분의 전투를 하마상태에서 치뤘다. 하지만 리볼버와 레버액션식 라이플을 비롯한 연발총의 발달로 기병이 칼 휘두를 일은 거의 사라졌고, 마상에서 연발총 쏘는 게 효율도 좋았다. 남군의 한 장교는 세이버는 캔따개나 요리용으로 쓰는것이라고 자조하기도 했다. 단 기병의 세이버 돌격이 아예 없었던건 아니다.영문위키를 참조
사실 세계대전 시기 이전부터 기병의 역할은 꾸준히 축소되는 경향을 겪어왔는데, 이러한 경향은 화약의 성능이 시대에 따라 개선되어 가면서 시작된 일로 여겨지며 특히 무연화약의 개발이 결정타가 되었다. 이 시기 화약 성능이 개선되어 살상력이 강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장터에서 불발탄의 비율도 크게 낮아졌다.[59] 더군다나 제1차 세계 대전에는 참호에서 기관총을 난사해대니 기병의 입지는 더 급추락했다. 정찰 임무마저 비행기가 발명되면서 운용이 크게 줄었다. 그래도 동부전선, 특히 인구밀도가 낮은 중동 지역에서는 그나마 활약했는데, ANZAC 용기병대가 터키 보병대에 돌격해 승리한 베르셰바 전투나 아라비아의 로렌스로 유명해진 아랍 반란군의 활약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오히려 기술이 더 발달한 제2차 세계 대전 때에는 폴란드의 창기병대과 러시아의 카자크 기병대가 크게 알려져 있고, 전간기에는 신생 폴란드 공화국의 창기병대와 소련 적군 카자크 기병대 간의 기병전이 벌어진 적이 있다. 폴란드 창기병대는 창 들고 전차에 꼬라박은 뒤 전차가 나무로 만들어진 줄 알았다고 말했다는 일화로 유명하나, 이건 사실 용맹히 싸웠던 폴란드군을 바보로 선전하기 위한 이탈리아와 나치 독일, 헝가리와 같은 추축국의 프로파간다였던 것을 폴란드가 공산화된 뒤 세계대전 중 공산국가들의 기여를 격하하고 싶던 영국과 미국이 받아서 퍼뜨린 것이다. 실제 폴란드 기병대는 독일군 보병의 포위망을 돌파하려다가 전차부대와 충돌, 끝까지 저항하다가 몰살당한 사례이며 이 장면을 찍어다 프로파간다용으로 쓴 게 퍼진 것이다.
이 시대의 폴란드 창기병은 말이 창기병이지 기관총도 가지고 있었고, 전원 개인 화기로 무장한, 말로 이동하는 정예 보병에 가까웠고 말의 역할도 이전 시대같은 충격 전차보다는 고기동차량에 더 가까웠다. 연대 규모로 가면 대전차포와 대공포, 부속 기갑중대까지 붙은 세계대전 기준으로는 매우 현대화된 부대였으나 "창기병"이란 이름이 아깝지 않도록 기병창과 기병도 역시 지급하고 훈련도 했으며, 실제로 창기병 돌격으로 독일군 보병중대를 격파한 적도 있다고 한다. 또한 전멸한 사례 중 일부는 퇴각 중인 후방부대가 도망칠 시간을 벌기 위해 싸우다 전멸했다고 한다.폴란드 기병대는 세계대전 일어나기 몇년 전에 일어난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서 소비에트 러시아군을 분쇄한 활약으로 세계에 '''막강한 폴란드군'''이라는 인상을 심어준 장본인이기도 하다.
독소전쟁 개전 이후 동부전선에선 나치 독일에 포섭된 카자크 기병들이 활약했지만, 소련 육군 역시 카자크족을 징집해 추격전이나 게릴라전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소련 육군은 여기에 1개 기병군단과 1개 기계화군단을 조합하여 임시편제한 기병-기계화 집단으로 전차나 차량화, 기계화소총제대가 기동하기 힘든 지형에 투입하거나 일반적인 전차부대보다 더 빠른 기동력을 발휘하게 하여 추격과 포위 기동에 활약하게 했다. 전쟁 막바지에는 카자크들이 도망치는 독일군들의 '''목을 수확하고 다녔다고 한다'''.
독일군은 2차세계대전 당시 6개 기병 사단을 운용했으며, 대부분 동부전선에서 운용했고 일부 발칸 반도에서 사용한 기록도 있다. 대부분 후방의 빨치산에 대응하기 위한 기동성을 확보하기 위해, 차량과 함께 기병을 편성해 운용했다. 또, 적백내전 당시 백군파에 속했던 카자크를 모집해 2개 카자크 사단을 창설하였고, 이들 중 일부는 서부전선에도 참전한바 있다. 무장SS는 치안유지와 후방 게릴라 소탕을 위해 여러 기병부대를 유지했는데 대표적인 사례로 무장SS의 제7기병사단 플로리안 가이어 가 있다. 이로 인해 발생한 일화가 있는데, 미육군으로 입대한 어느 인디언 병사(Joe Medicine Crow)는 워치프가 되기 위한 과업 중 2가지, 아군을 전쟁으로 이끌고 적의 말을 훔치는 것을 휘하 부대를 이끌고 SS의 말 50필을 훔침으로써 달성한 바 있다. 기병이 아니라 군마의 경우, 독일군의 차량화와 기계화 비율은 대단히 낮은 편[60] 으로 전쟁 기간동안 엄청난 숫자의 말을 징발했다. 1939년 개전 당시에 59만 마리, 1945년 1월에는 120만 마리에 이를 돌보는 인원만 수만명이었다. 중간에 죽거나 다친 말까지 포함하면 유럽 전역에서 최대 700만 마리의 말을 징발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독일군은 고질적인 석유 부족으로 최일선의 전차부대를 제외하면 말을 굴려야 했다. 이 말은 수송부대나 포병대, 지원장비 등을 견인하는데 사용되었다.
이탈리아군 역시 기병대가 존재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독소전에 파견된 육군 사보이아 기병연대의 기병돌격. 1942년 8월 24일에 있었던 일로 '''포병 지원까지 받던 소련 육군 시베리아 보병연대를 기병 돌격으로 박살내버렸다.''' 졸전으로 유명한 이탈리아군이지만 이런 분전도 많았다. 그리고 실질적인 기병대가 투입된 마지막 전투는 후술된 허난 성 전투지만, 그 기병대로 성공적인 돌격을 달성한 것은 사보이아 연대의 기병돌격이 현재 역사상으론 마지막이다.
일본 육군은 태평양 전쟁 당시 기병을 잘 사용하지 않았다. 사실 일본에는 좋은 말이 드물어 근대 이전에도 기병을 대규모로 활용하지는 못했다. 1차대전 직후인 1919년 기병폐지론이 강하게 일어나서 이를 주장한 쿠니시 고시치 육군 소장과 이를 반대하는 제4기병여단장인 요시하시 토쿠사부로 육군 소장 간에 격론이 벌어졌는데, 요시하시 장군의 자살과 함께 기병 폐지론이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1920년대부터 보병사단에 소속된 기병연대를 먼저 기병정찰대대로 축소한 다음 차츰차츰 폐지했다. 중국 전선에서는 여전히 기병을 사용하여 중일전쟁에서는 4개 기병여단을 유지했지만, 1940년 기병 1여단이 차량화되었고, 1941년 기병2여단이 해체, 1945년에 초에 기병3여단이 해체되어 패전 당시까지 보유한 기병대는 기병4여단 하나뿐이었다. 1945년 6월 중국 허난 성 라오허커우시에서 비행장을 확보하려는 중국군과 일본군의 교전이 벌어졌는데, 이 전투에 일본 육군 기병4여단이 참전하여 여단 이상급 대단위 기병대가 전투를 벌인 마지막 전투라고 한다.
몽골군 역시 2차대전 시기에 기병대가 존재했고, 할힌골 전투에서 활약 했다.
2차대전 당시 자력으로 전군의 기계화를 이뤄낸 군대는 하나밖에 없었는데 바로 미군이다. 말과 마초를 저 멀리 태평양과 대서양을 건너 수송하는 것보다 차량을 수송하는 쪽이 훨씬 효율적이고 경제적이었기 때문이다. 소련군 또한 쿠르스크 전투 이후부터 엄청난 물량의 전차를 찍어내 군의 기계화에 성공한다. 미군은 기병대를 전간기에 이미 대부분 폐지하거나 차량화 하였으나 제2차대전 까지도 소수의 기병대를 운용했으며 1942년 1월 16일 필리핀 바탄 반도 방어전을 수행하던 제26기병연대가 일본군을 상대로 미국 역사상 최후의 마상 돌격을 시행해 수적 우세를 점하던 일본군을 격퇴한 전적이 있다.
1차 대전과 달리 전선이 고착되지 않고 기동전 위주가 된 덕분에 기병이 반짝 활약은 할 수 있었지만, 현대에 와서 기병이 활약할 여지는 기마경찰대로서 사용하는정도이다. 이미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장에서의 독일이나 영국, 미국 육군의 '기병대'는 많은 경우 말로만 기병이고, 헬기, 차량화부대나 기갑 또는 기계화 보병이 되어있었다.
물론 한자어로 번역을 해서 기병이 되긴 했지만, 사실은 'cavalry'라는 단어의 뜻 자체가 변한 것에 가깝다. 한국에서 쓰이는 한자어 중 비슷한 변화를 겪은 비슷한 분야의 단어를 찾는다면 전차가 있다. 현재는 탱크를 이르는 말이지만 원래는 춘추전국시대에 널리 쓰던, 말이 끄는 전투용 수레를 이르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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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당시 대구역에 집결한 육군 기병대
한국전쟁에서도 대한민국 육군 독립기갑연대 휘하에 기병대가 2개 중대 정도의 규모로 있었다. 개전 초기 전역부터 지연전역 때까지 전장에서 계속 싸웠다. 물론 북한군 탱크에 정면으로 돌격하는 미친 전술은 당연히 아니었고, 말을 타고 이동하다가 교전시 말에서 내려서 보병 전투를 진행하는 드라군처럼 운용하였다. 지연전 전개 기간 동안에는 기병대장 장철부 소령이 적에게 포위되어 전사[61] 하는 등 사실상 괴멸되었지만, '''북한군을 상대로 기병돌격을 감행'''해 '''포위망을 뚫고 이기는''' 등 상당한 활약도 했다. 그러나 1950년 8월을 전후한 무렵에는 말이 거의 전멸한 상태에서 추가 수급이 불가능해 보병으로 개편되었다. 이때 살아남은 말들은 훗날 경찰 및 육군 헌병에 흡수되어 기마경찰대와 기마헌병대가 되었다가 역시 1950년대를 넘기지 못하고 사라졌다. 1972년에 육군 제1군사령부에서 강원도 산악지대에서의 수송과 대간첩 작전의 효율성을 위해 토종 조랑말을 이용한 타마(駝馬)부대를 창설하기도 했으나 말먹이를 수급하기 어렵고, 기계화 장비들을 도입하면서 필요성이 줄어들어 1982년에 공식 해체되었다.[62] 현대 한국군에서 정식으로 말을 운용하는 곳은 육군사관학교에서 생도들의 승마 교육을 담당하는 군마대가 유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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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군대인 로디지아군도 게릴라전에 쓰기 위해 기병을 운용했었다. 지형상 차량을 원활히 운용하기 어려운 곳에서 유용했을뿐만 아니라, 말이 원래 아프리카에 사는 동물이 아니라서 그런지 교육수준이 떨어지는 흑인 게릴라들은 말의 존재를 처음 보는 경우가 많았고, 따라서 심리적 압박감도 상당했었다고 한다. 로디지아군 항목의 동영상을 보다보면 드라군 마냥 총들고 말 달리는 모습이 나오는데, 그런 이유다. 물론 로디지아 자체가 사라지고 나서는 반짝 부활했던 이 기병들도 뿔뿔이 흩어졌겠지만...
4.6. 현대
현대전에서는 기술 발달로 육군이 기계화되면서, 의장대와 기마 경찰대 정도를 제외하면 말을 이용하는 부대는 거의 없으며, 과거에 기병이 맡았던 역할은 전차와 장갑차, 그리고 헬리콥터들이 계승했으므로, 실질적으로 이들을 현대의 기병이라고 봐도 된다. 실제로 기갑 부대나 헬기 강습 부대 등은 이전에 기병이 하던 일을 대신하고 있다. 타던게 말에서 장갑판 두른 자동차나 헬리콥터가 되었을 뿐이지. 현대에 와서 중기병의 "충격력" 개념은 전차가 계승했고, 경기병과 총기병의 "속도와 범용성" 개념은 헬기와 장갑차가 계승한 격이다. 이 중 장갑차는 기병처럼 기동하는 역할이 아니라 보병을 수송하는 개념이므로, 전략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기병의 기동성을 가진다.[63] 즉, 과거의 승마보병 드라군의 개념을 계승한 것으로 봐도 되겠다. 처음에는 하마(하차) 전투를 위주로 하다가 점점 승마(승차) 전투를 주요 교리로 하게 된 것도 드라군과 장갑차를 타는 기계화보병의 공통점.
많은 기갑 부대, 헬기 강습 부대들이 부대 마크에 편자를 넣고, '기병(Cavalry)'이라거나 '드라군(Dragoon)'[64] 등을 부대 이름으로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유명한 예로는 미국 육군의 제1기병사단이나 제2기갑기병연대 등이 있다. 2차 대전중의 독일군 기갑부대는 복장과 마크에서 프로이센 창기병을 계승하고 있었다.
보통 유럽 군대에게 있어서는 기병대는 과거 군대의 전통을 상징하기에 부대의 역사가 몇백년 되어 기갑으로 변환한 병과들도 후사르, 창기병, 샤쇠르, 쿼러시어, 드라군 등의 명칭을 이어받고 있다. 러시아 군가 초원(군가)에서도 가사에 말, 전차가 번갈아 나온다.
반면 이런 전통이 빈약한[65] 미국은 비교적 빠른 속도로 모든 기병 병과가 단 하나로 통일되었고, 지금의 수색대 단대호는 본래, 그리고 현재 미국 기병의 단대호이기도 하다. 베트남 전쟁 당시에 UH-1 휴이를 주력으로 공중강습전을 벌이는 '''공중 기병대'''(Air Cavalry), 기갑차량을 편제받아 위력정찰 역할을 하는 '''기갑 기병대'''(Armored Cavalry)로 개편된다. 이후 공중 기병대는 보다 전문적인 공중강습부대나 공수부대 등에게 그 자리를 넘겨주고 대신 카이오와 정찰헬기 등을 사용해 기갑 기병대의 눈 역할을 맡고 있으며, 기갑기병은 각 사단 내지 여단전투단에 연대 단위로 파견되어 활동하기도 한다.
그러나 일부 산악지역, 사막 등 차량이 이동하기 어려운 곳에서는 21세기에도 여전히 '''진짜''' 기병이 유용하게 쓰이는 경우도 있다. 정말 험난한 곳은 말로도 못 가니까 걸어가야만 하겠지만, 그 정도가 아니라면 산악 지역같은 험한 곳은 말은 힘들긴 해도 그럭저럭 갈 수 있는데 장갑차로는 택도 없는(…) 경우가 자주 있기 때문. 굳이 말을 타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이동만 말을 타고 하는 드라군식의 운용으로도 이런 지형에서는 쓸모가 있다. 그냥 걷는 것보다는 빠르기에 험지에서도 기동성을 어느 정도 발휘할 수 있으며, 사람 대신 기관총이나 견인포 같은 무거운 공용 화기를 '''운반하는 용도'''로 쓸 수도 있기에[66] 아주 말이 안 되는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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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인민해방군 기병대. QBZ-03으로 무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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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총과 기병도를 들고 돌격하는 중국 인민해방군 기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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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군 기병대.
한 예로 사막과 산악이 대부분인 중국의 서북부 지역에는 기병대가 현존하고 있다. 이쪽은 아무래도 지형 특성상 차량화부대의 유지, 보수가 어렵기 때문에 이러한 형태로 발달한 듯. 비슷한 이유로 몽골 역시 기병대를 유지하고 있다. 독일과 러시아의 산악부대도 산 같은 험지에선 바퀴달린 탈것보다 4족 보행 군마가 더 적합해 사용중이다.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도 기병이 활약했다. 원래 이 땅에 살던 북부동맹이나 탈레반 등은 기계화된 기동 병력을 유지하기 어려운 특성상 기병을 사용했는데 미국과 전쟁이 발발하면서 북부동맹에게 지원나간 미군 특수부대가 폭격 유도를 해주면 북부동맹이 기병 돌격(!)을 실시했다고. 몇몇 전투에선 미군 특수부대도 같이 기병 돌격했다고 한다(...). 이후에 미군도 현지의 열악한 도로 사정 때문에 노새를 이용한 물자 수송을 하기도 했다. 이 일화를 다룬 영화가 12 솔져스다.
4.6.1. 공중 기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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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면 알겠지만 미국 기병대로 위가 빨갛고 아래가 하얀게 인도네시아나 모나코 국기와 닮았지만 당연히 별 관계 없다. 원래는 성조기에서 Stripes에 해당하는 빨간색과 하얀색이다. 1862년 일반명령 4호에서 기병대 깃발(guidon)을 성조기 줄무니를 이용해 만들라는 명령이 내려왔고 그에 따라 만들어진 것.
'''Air Cavalry'''
냉전과 그에 수반된 베트남 전쟁 당시, 보병으로는 극복하기 힘든 지형들을 통과하여 전장을 자신들이 먼저 고른다는 개념으로 미 육군 제1기병사단이 공중강습사단으로 개편되어 제11공중강습연대가 사단 내에 예하 부대로 배속되면서 베트남 전쟁을 상징하는 하늘을 뒤덮은 휴이의 파도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지금에 와서는 수송헬기를 이용한 공중강습전은 여타 다른 공중강습사단들에 소속하는 보다 전문적인 공중강습부대들에게로 넘기고, 정찰헬기와 무장헬기·공격헬기 등을 이용한 정찰과 화력지원·대전차전 등을 주로 수행하고 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역할은 기갑 기병대의 눈으로서 OH-58 카이오와 정찰헬기나 AH-64D 롱보우 아파치 공격헬기 등을 통하여 기병대의 정찰을 주로 도맡는 역할이다. 물론 그렇다고 수송헬기 자체를 아예 안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며, UH-60과 CH-47 등으로 구성되는 수송헬기 전력도 자체적으로 어느 정도 보유하고 있다. 또한 공중기동 기병대라고 해서 장갑차 같은 지상 기동장비들을 쓰지 않는 것도 아니다.[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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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문인지 부대에서 운용하던 헬기의 퇴역식에서는, 과거 기병대의 전통에 따라 애마를 안락사시키듯이 퇴역하는 헬기를 보내는 행사를 하기도 한다. 이 부대의 강습보병들과 조종사 등 항공대 인원들도 군복의 병과표지를 기병의 것으로 달기도 한다.
4.6.2. 기갑 기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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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mored Cavalry'''
베트남 전쟁의 종결 이후, 공중강습사단이었던 미 육군 제1기병사단이 삼중임무수행능력(TRICAP, 기갑/항공/강습 3개 임무의 동시수행)을 요구받으면서, 공중강습과 더불어 편제에 전차와 기병전투차를 편제받기 시작한 것으로부터 현대적인 기갑 기병대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기갑차량을 활용한 위력정찰이 주된 임무이며, 각 사단 내지 여단전투단에 연대 단위로 파견되어 활동하기도 한다. 또한 기병전투차만이 아니라 전차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단순히 정찰만을 수행하는 부대는 아니라고 볼 수 있다.
기갑 기병대는 수색대의 역할을 맡고 있는 부대이지만, 타 국가의 수색부대와는 교리가 다소 다르다. 한국을 포함한 많은 나라의 수색부대들은 가급적 직접교전을 피하여 정찰을 하나, 미군 기갑 기병대의 경우에는 정찰을 한 뒤 그 상대들을 '''직접 갈아버리는''' 교리를 가지고 있다. 마치 전근대의 기병과도 비슷하다. 아예 현용 CFV(기병전투차)와 주력전차가 배정되고 직접 교전을 꺼리지 않는 점에서 점에서 타국의 수색부대와는 차이가 큰 편. 중과부적이라고 판단될 때에는 육군 항공대(상기한 공중 기병대도 당연히 포함)나 공군 등의 지원을 요청하게 되지만, 기본적으로는 정찰만이 아니라 교전에도 스스로 적극적으로 나서기 때문에 단순한 수색부대는 아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 육군 편제에서는 각 기계화 보병사단 직할의 기갑수색대대와 독립 기갑여단의 기갑수색중대가 그 명맥을 이어받았다. 영문 명칭 역시 동일하게 사용한다.
4.6.3. 주한미군 기병대
주한미군 한정으로 기병부대를 '항공기갑수색대'라고 부른다. 엄밀히 말하면 주한미군의 카투사 관련 부대들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겠다. 공중기병과 기갑기병을 합친 표현이다.
다만 부르는 명칭은 다소 독특한데 2000년 초반 기준으로 미2사단 항공여단 예하의 4th Squadron, 7th Cavalry Regiment 7항공기갑수색연대 4대대를 '사칠기갑'이라 부르고, 미8군 예하의 6th Cavalry Brigade, 6항공기갑수색여단을 '육항공'이라 부른다. 이는 같은 기병이라도 '사칠기갑'은 M1 에이브람스, M3 기병전투차 등 기갑기병 위주의 부대[68] 이기에 기갑이라고 불렀고 '육항공'은 AH-64 아파치와 OH-58 카이오와 워리어 등 보유한 공중 기병대였기 때문인것으로 보인다.
위키백과 한국어판에 따르면 "2005년, 미국 육군의 개편의 일부 계획인 전투항공여단 계획에 따라 제2보병사단 항공 여단에 제17항공여단과 합쳐져 제2전투항공여단으로 개편되어, 제6기병여단은 편제에서 사라졌다. 배속되었던 제43방공포병연대, 1대대는 제35방공포병여단에 재배속되었다. 제6기병연대, 1전대는 제1보병사단에 옮겨가고, 제3전대는 해산하였다." [69]
5. 유명한 기병대
5.1. 현실
-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70] - 개마무사
- 그리스(마케도니아 왕국 포함) - 헤타이로이
- 누미디아 - 누미디아 기병
- 러시아 - 카자크[71][72]
- 로마 제국 - 스콜라이 팔라티나이, 클리바나리, 아르콘토풀레
- 몽골
- 미국 - 러프 라이더
- 스웨덴 - 하카펠리타트
- 신성 로마 제국 - 흑기병(Schwarz Reiter)
- 오스만 제국 - 시파히
- 잉글랜드 - 노르만 기사[73] , 철기대, 스콧츠 그레이
- 중국
- 중동 - 맘루크
- 카르타고 - 신성 기병대, 누미디아 기병
- 파르티아, 사산조 페르시아 - 파르티안 카타프락토이, 푸쉬티그반
- 폴란드-리투아니아 - 윙드 후사르
- 프랑스 - 노르만 기사[75] , 장다르메[76] , 프랑스 제국 근위 기병대, 메종 드 루아(프랑스 왕국 근위 기병대), 퀴레시어, 캐러비니어
- 헝가리 - 후사르[77]
- 폴란드 - 울란
5.2. 가상
6. 기병으로 유명한 인물들
6.1. 현실
- 곽거병
- 고노자
- 공손찬
- 관영
- 광개토대왕
- 다케다 신겐[78][79][80]
- 드제
- 리처드 1세
- 마씨 일가[81]
- 설인귀
- 글필하력
- 제베, 수부타이 등 몽골제국의 장군들
- 세묜 부됸니
- 숭덕제
- 신립
-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
- 아키야마 요시후루
- 여포[82]
- 얀 소비에스키
- 올가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
- 올리버 크롬웰
- 우에스기 겐신[83]
- 유금필
- 이성계
- 장철부
- 정문부[84]
- 장 바티스트 베시에르
- 제임스 이월 브라운 스튜어트
- 조아킴 뮈라
-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
- 칭기즈 칸
- 필리프 르클레르
-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자이틀리츠
- 한스 요아힘 폰 치텐
6.2. 가상
- 브라도 켄드리드[85]
- 세오덴[86] 을 비롯한 로한인들
- 아라고른[87] 과 회색부대, 임라힐과 백조 기사단
- 칼 드로고
- 키리코 큐비 - 장갑기병대 소속 병사로 무적무패의 강자다. 물론 장갑기병 보톰즈는 SF 로봇 아니메이므로 여기서 말하는 기병대는 말이 아니라 소형 전투 로봇에 탄 병사들이지만, 적진을 향해 총을 난사하며 롤러 대시라는 고속 주행으로 돌진하는 전술을 사용하는 기동타격대다.
- Fate 시리즈 - 라이더 클래스 전원
7. 각종 매체에서의 기병
대부분의 매체에서는 가상, 현실 배경 상관없이 말을 쓰지만 그 세계의 환상종을 탈것으로 쓰는 경우도 많다. 심지어 날 수 있는 종의 경우는 그걸 타고 날기도 한다. 하지만 공중이건 지상이건 대부분의 동물들은 사람을 태울 만큼 힘이 남아도는 경우는 품종개량을 하지 않는 한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특히 새는 자기 몸 날게 하는 것도 힘들다. 때문에 하늘을 나는 것에 사람을 태우면 그리핀 같이 새와 포유동물의 특징이 합쳐진 환상종은 물론 아예 거대화한 조류나 비룡에 탑승하며, 강력한 정예병이나 영웅이면 드래곤을 타기도 한다. 랑그릿사 시리즈 같은 곳에서는 비병으로 분류된다.
SF, 특히 스팀펑크 배경인 경우 오토바이가 이와 비슷한 역할을 한다.
7.1. 드라마, 영화
한국이든 외국이든 영화, 사극 등에서 기병전이 '''제대로''' 묘사되는 경우는 생각보다 드물다. 대개는 그냥 말탄 기병들이 보병들의 옆을 얌전히 지나가거나, 기병과 보병이 대치한 상태로 칼질, 창질을 주고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역사나 군사에 관심이 많은 사람은 이런 묘사에 분통을 터뜨리는 경우가 많지만, 현실적인 제약이 너무 크다. 일단 말은 매우 비싸며, 말을 탈 줄 아는 전문 배우를 구하기 힘들고, 훈련된 말이라 해도 결국 동물인 만큼 촬영에 여러가지 문제가 있는데다, 기병의 충격력과 돌격을 묘사하는 과정에서 배우들과 말들이 크게 다치거나 심지어 '''사망하는''' 사태가 벌어질 위험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어지간한 사람 머리 높이에서 떨어지는 낙마 장면은 전문 스턴트맨을 써야 할 정도로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히 위험하다. 백병전과 달리 살아있는 생물인 말을 이용한 전투는 사실적인 리인액트가 무척 어렵고 위험이 따르게 된다.
그래서 칸나이 전투를 다룬 BBC의 다큐멘터리에서 한니발군의 기병을 묘사하기 위해 고용된 리인액터들은 '''카우치드 랜스'''를 사용해야 했다. 고증을 따르자면 창을 양손으로 쥐고 돌격하거나 창을 역수로 잡고 밑으로 내려 찍는 방법을 써야겠지만, 이는 고삐를 다룰 손이 없으며 몸의 중심을 잡기가 어려운 탓에 낙마 사고의 위험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사극 한편에 수십 수백 억의 예산을 쏟아 붓는 '''BBC 마저도''' 기병전의 묘사를 줄이는 쪽으로 가닥을 잡을 정도로 기병의 연출은 어렵다.
기병전을 그나마 볼 수 있는 영상 매체는 현재로서는 블록버스터 영화 정도이다. 그나마도 대부분은 첫 돌격, 그리고 뒤이어지는 백병전을 살짝살짝 다뤄주는 정도다. 상술했듯 안전 문제가 크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대중적으로 가장 유명한 기병 돌격 장면은 바로 영화 반지의 제왕의 펠렌노르 평원의 전투의 로한 기마대 돌격장면이다. 배우들의 연기력, 막대한 물량, CG와 실사가 조화된 소설적인 연출, 웅장한 BGM(#Riders of Rohan, The Battle of the Pelennor Fields) 등이 아름답게 어울려, 영화 속 전투장면 베스트를 논할때 항상 빠지지 않고 상위권에 랭크되는 희대의 명장면이다. 기병이 보병과 접촉하기 전에 3~4회의 화살세례를 온몸으로 뒤집어 써야 한다는 현실적이고도 처절한 요소도 잘 묘사되었다.
다만 이 기병 돌격장면은 지나치게 단순화시켰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비록 영화 속에서는 오크들이 변변한 대기병진형도 형성하지 못 했다 하나 숫자가 너무 많았다. 그토록 두터운 진형을 짜고 있는 보병들을 상대로 기병들이 일직선으로 돌격하면 충격력이 금방 없어져 정지해 버리고[88] 보병들에게 둘러싸여 학살 당할 뿐이다. 제대로 묘사하면, 실제 기병돌격처럼 여러 웨이브로 나누어 보병의 전열이 무너질 때까지 돌격을 반복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묘사는 관객이 보기에는 다소 맥 빠져 보일 수도 있으며, 원작에서도 세세한 기병 돌격이 묘사되기 보다는 원경에서 마치 빗자루가 먼지를 쓸어내듯이 묘사되고 있으니 영화감독 입장에서는 이런 연출을 택해야만 했을 것이다. 로한인의 군마가 현실의 군마와는 다르다는 반론을 내세울 수도 있으나, 위의 각주에서 보이듯, 두려움따윈 아예 존재하지 않고 군마의 수십배의 힘을 내는 자동차라 할지라도 보병방진에 그대로 돌진하면 결국 돌진하며 죽인 시체들로 인해 더 이상 앞으로 가지 못하게 된다. 또한, 반지의 제왕 영화 시리즈 자체에서 기병들이 보병들을 쓸어버리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는 것도 변명이 되지 못한다. 굳이 따지자면 이 장면은 반지의 제왕 원작 자체가 기병들로 보병을 쓸어버리는 묘사들이 나오기에 최대한 원작을 반영하기 위해 현실성을 무시했다고 봐야한다.
덤으로 이 장면을 촬영하다가 두 명의 기수가 낙마해서 촬영팀은 아 죽었구나 하고 다들 기겁했는데 다행히 기적적으로 둘다 아무 말에도 짓밟히지 않고 살아남았다고... 영상물에 기병을 잘 담아내는 것이 이렇게 위험하고 힘들다(...)
<킹덤 오브 헤븐>에서의 기병전 묘사도 매우 훌륭하다. 케락의 백성들이 성으로 안전하게 들어올 시간을 벌기 위하여 이벨린의 발리앙(올랜도 블룸)이 이끄는 소수의 유럽 기병대가 압도적 다수의 이슬람 기병대를 상대로 일자형 진형을 장방형으로 바꾸어 가며 돌격하는 장면이 장렬하다. 중장갑이어서 그런지 대부분 포로로잡히는것도 고증에 맞는다. 영상
<브레이브 하트>도 역사왜곡 논란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여러 볼거리가 충실하게 채워진 훌륭한 작품이다. 나무를 깎아 만든 장창을 기습적으로 빼든 스코틀랜드 보병방진이, 코앞까지 돌진한 잉글랜드 기병을 제압하는 스털링 전투의 묘사가 인상적이다. 잉글랜드 기병이 출진하여, 충분한 충격력을 얻을 때까지 속도를 서서히 올리는 장면은 묵음처리가 되는데, 시청자로 하여금 긴장감을 증폭시키는 연출도 훌륭하다.
최근에는 HBO의 미국 드라마 <왕좌의 게임> 시즌 6 9화의 쟁점인 윈터펠 전투에서 존 스노우와 램지 볼턴이 각기 이끄는 스타크 병력과 볼턴 병력의 기병 충돌 장면이 화제가 되고 있다. 잠깐의 시간이지만 블록버스터 영화를 거진 쌈싸먹는 어마어마한 퀄리티를 보여주는 명장면으로, 극중 지휘관들의 전략적 오판과는 별개로 중세 기병의 돌격력과 기병 대 기병간의 난전 묘사를 그 어떤 영화보다도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특히 존 스노우의 시점에서 난전의 현장을 보여주는 롱테이크 장면은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초반부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중세판으로 옮겨놨다 봐도 될 만큼 압도적. 전투 종반에 볼턴 창병대의 방진에 존 스노우의 야인 군대가 끔살당하기 직전, 그들을 지원하러 온 베일의 대규모 기사단이 방진의 후미를 강타해 압살해 버리는 장면도 볼 만하다.
하지만 기병전 묘사의 TOP는 역시 '''1970년 영화 <워털루>'''이다. 시대가 시대인만큼 CG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진짜 코사크 기병 2000여 기'''까지 동원된(!!!) '''14,000 여''' 정도가 동원된 것이 장관이다. 평원을 뒤덮을 기세로 몰려든 기병들이 보병들의 수많은 방진들 사이로 '''말려드는''' 장면은 그 중에서도 압권. 배우 하나가 낙마하면 그 사람은 100% 끔살 확정일 정도로 대단히 위험한 장면이었는데 어떻게 이런 걸 찍을 생각을 했는지. 또 포탄이 터질 때마다, 보병들의 일제사격이 있을 때마다 기병들이 무더기로 넘어지는 장면은 도대체 어떻게 연기한 것인지 놀라울 따름이다.
전쟁과 평화에서도 기병 돌격 장면이 있다. 비슷한 시대를 배경으로 했지만 45년 동안 촬영기법이나 녹음장비가 발전해 훨씬 현실감 있는 디테일한 묘사가 가능해졌다.
워 호스에선 1차 세계대전 당시 기병 돌격의 장관과 기병의 몰락을 처절하게 그려냈다.
폴란드 영화 "바르샤바 전투 1920"에서 묘사된 볼셰비키 기병대, 복장을 보고 소련군이 아니라 파르티잔이나 민병대로 볼수도 있겠지만 당시 볼셰비키 적군이 트로츠키의 전시 징병제로 급조로 편제된 군대인걸 고려한다면 고증오류가 아니다
프랑스의 TV시리즈 나폴레옹에서 아일라우 전투 당시의 기병돌격을 잘 연출했다. CG없이 액션만으로 말이 보병을 돌파하고 부닥치는 위험한 장면을 잘 보여주었다.
(1분 56초 지점부터)
(처음 지점부터)
바이킹스에서 묘사한 기마 충격 전술. 전투장비나 기술 및 생활사 등 미시사적 고증이 충실한 이 드라마에서 눈여겨볼만한 부분 중 하나이다. 방패벽(shield wall) 전술을 비롯한 보병 방진은 부대 질량이 충분할 경우 방패를 들고 전열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기병의 돌격을 저지할 수 있었으나, 해당 장면처럼 겨우 2열 남짓한 정도로는 말과 기수의 체중에 속력까지 빠른 기병의 충격력을 저지할 수 없었다. 무기를 휘두르지 않아도 그냥 부딪쳐 오는 것 자체가 보병들에게는 엄청난 위협이었던 것. 사실 부대 질량이 돌파를 저지하기에 충분하다고 해도 전열의 앞 부분은 기병의 충격력을 고스란히 받기에 피해가 크기 마련이었는데, 이는 서유럽 내에서 기창을 이용한 지속적인 기병 충격으로 적에게 피해를 강요하는 전술이 발전하는 요인이 되었다.[89]
서부극의 영향으로 미국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암담한 상황에서 기다리는 지원군이나 구조대를 기병대로 부르는 관행이 있다. 대표적으로 오버워치의 트레이서 대사 중 "안녕 친구들. 해결사가 왔어!"는 원래 영어판에서 "Cheers Love. The Cavarly is here!"이다.
특이하게도 기병이 활약할 여지가 없는 듯한 현대전에서의 기병돌격을 묘사한 작품도 있는데 바로 12 솔져스. BM-21의 포탄이 머리를 스치고 탈레반의 총세례 속에서 돌격하는 21세기판 기병 돌격을 나름 비장미 있게 묘사한다. 시대가 시대인지라 검이나 창이 아닌 총을 들고 마상사격을 하며 돌격을 한다는 점도 주목할 요소.영상
7.2. 게임
대다수의 전략 게임에서는 기병을 그저 빠르고 강한 보병수준으로 구현해 놓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시리즈를 비롯한 고전 RTS 게임에서도 이런 경향이 강한데, 게임 엔진상 기병의 충격력을 묘사하는 게 어렵고, 게임의 기본 디자인 자체가 전쟁을 정확하게 그리는 데 초점을 맞춘 작품이 드물기 때문이다. 대신 고증에 맞춰서 보병(검병, 중장보병)과 포병에 보너스 데미지를 주는 대신 장창병에게서 보너스 데미지를 받는 것이 보통이다.
삼국지 시리즈는 전통적으로 기병, 보병, 궁병이 등장하며, 기병은 빠른 기동력과 공격력이라는 게임에 등장하는 전형적인 기병 묘사다. 게임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보면 병종 적성도가 존재하는데, 기병 적성도가 높을수록 기병의 위력이 강해지기에 기병 적성이 높은 장수가 없는 세력은 기병 운영에 애를 먹는다.(예를 들면 오나라 세력은 전통적으로 기병 약체다.) 일부 시리즈(특히 삼11)에서는 북방에 말이 특산물이고,북방에 기마대를 잘 지휘하는 장군이[90] 깔렸다.빠르고, 전투기술만 풀찍으면 캐사기.
이에 반해 토탈워 시리즈나 마운트 앤 블레이드처럼 꽤나 훌륭하게 구현해 놓은 게임도 있다. 게임상에서 멈춘 기병은 보병의 좋은 먹잇감이 되며[91] , 창병이나 전열보병에 매우 취약하지만, 돌격을 수차례 반복하여 적을 약화시키거나 적을 패퇴시킨 후 전과확대 단계에서 추격하는 임무를 맡는 등.[92] 상당히 현실적이다. 또한 일단 붙어서 칼질을 하는 다른 게임과 달리 충돌시 적 보병이 뒤로 날아가기도 하며, 혹은 한번 들이받았을 뿐인데 전열이 개박살나면서, 모랄빵이 나는걸 생생히 볼 수도 있다.
킹덤 언더 파이어 : 더 크루세이더와 히어로즈도 토탈워나 마운트 앤 블레이드처럼 기병을 지속적으로 움직이며 적에게 충격 공격을 가해서 영웅이나 유닛이 가진 특수 능력에 필요한 스킬 포인트를 모으는 컨트롤이 중요하다. 하지만 아무 적에게나 이러면 안 되고 보병이나 궁병에 들이받고, 인간의 창병이나 마족의 오크 도끼병 같은 카운터는 피해야한다.
또한 경기병과 중기병간의 특성이 꽤 커서 경기병은 창기병이 아닌한 큰 충격을 주기가 어렵고 방어가 약해 잘 죽지만 쉽게 지치지 않고 빠르며, 중기병은 강한 공격력과 방어력을 가지고 있으나 첫 돌격 이후 지치기가 쉬우며, 기동 또한 경기병에 비하면 많이 뻑뻑한 편이다.
온라인게임에서는 보기 힘든 직종이다. 그도 그럴것이, 뭔가를 타면서 공격까지 가능해진다면 파티 플레이때 다른 파티원에 비해 이동속도가 넘사벽으로 차이가 나게 되는데, 그러면 그만큼 팀웍에 장애가 생기기 때문이다. 사냥 속도에 따른 성장 및 아이템 파밍 면에서도 밸런스 붕괴가 되기 쉽다. 그리고 일단 기마상태의 전투 자체를 구현하기가 썩 쉽지가 않다. 단순히 시스템을 구현하는것이든, 밸런스를 맞추는 것이든 난점이 산적한다. 3D 오픈월드 계통의 온라인 게임이라면 더불어 조작성까지 난해해진다. 그래서 탑승물 개념이 있는 온라인게임도 대부분 전투가 아닐때만 탈 수 있고 전투상태가 되면 탑승물이 사라진다. 굳이 구현하려 든다면 트리 오브 세이비어의 캐터프랙트와 슈바르츠라이터, 메이플스토리의 와일드헌터가 대표적이다. 디아블로3의 성전사가 군마질주라는 일시적 이동버프 스킬로 구현하기도 한다.
라그나로크 온라인은 검사가 상위직업으로 전직하면 탑승물을 탈 수 있다. 이동속도가 민첩성 향상 버프를 받는 수준으로 빨라지고 인벤토리 무게제한도 오르지만 패시브 스킬을 찍지 않으면 평타 공격속도가 절반으로 뚝 떨어져버리기 때문에 스킬포인트가 빡빡한 편이다. 3차 전직을 하면 탑승물이 쓰는 전용기술도 생긴다. 이동속도가 빠르니 파티원이 못따라가는건 아닌가 싶겠지만 현실은 기동성과 맷집을 살려서 몹을 몰아오는데 이용한다.
리그 오브 레전드의 헤카림의 경우 정통 기병의 기동력은 물론 충격력까지 가장 잘 구현한 몇 안되는 사례다. 파멸의 돌격(e)은 이동 속도가 최대치로 증가할수록 가할 수 있는 피해량도 최대로 늘어난다. 이동속도가 많이 추가될 수록 공격력도 늘어나는 패시브는 덤. 이 충격력을 구현한 스킬의 위력을 극대화한 전략이 바로 유성 헤카림. 헤카림의 궁극기인 그림자의 맹습(R)은 적에게 공포를 거는 효과가 있어서 기병의 돌격에 모랄빵이 나오는 것을 어느정도 구현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헤카림은 엄밀히 말하면 기병이 아니고 켄타우로스이다. 헤카림을 제외하고 리그 오브 레전드에서 기병이라고 부를만한 챔피언은 세주아니, 클레드정도밖에 없지만 그나마도 각각 멧돼지와 목도리 도마뱀을 타고 다닌다. 이후 렐이라는 그랄싸한 기병 챔피언이 추가되었다.
배틀필드 1의 경우 1차대전인 만큼 기병이 등장했는데 현실의 기병의 장단점이 자연스레 구현되어 있다. 빠른 기동력과 선회력으로 보병에게 우위를 차지하지만 바위나 장애물등에 기동력을 잃거나 멀리서부터 관측당하면 고화력화기에 벌집이 되거나 저격수에게 머리를 따여 죽는게 다반사다.또는 무리하게 돌격하다 전차나 장갑차에 호떡이 되기도 한다
히어로즈 오브 마이트 앤 매직 시리즈의 인간 진영에서 전통적으로 등장하는 기병대인 챔피언의 경우 이동한 거리에 비례하여 공격력이 증가하는 특수능력으로 기병대의 돌격 능력을 어느 정도 구현했다. 3편의 경우 창병이 챔피언의 돌격 특수능력을 무효화시키는 것으로 기병과 창병 간의 관계도 구현했다.
랑그릿사 시리즈와 영걸전 시리즈 같은 일부 SRPG에서는 지형에 따라 유불리를 다르게 설정하기도 한다. 이로 인해 대표적으로 조정되는 능력치가 바로 기동력이며 이 지형 패널티 때문에 특히 주요 어려운 전투에 실내와 동굴 등의 지형이 대거 포함되어 있는 랑그릿사 시리즈에서는 기병이 시리즈 내내 취급이 좋지 못한편이다.
도미네이션즈에서 철기 시대부터 훈련소에서 훈련 가능한 유닛으로 등장한다. 프랑스와 그리스는 고유 유닛을 가지고 있으며 방어 건물을 우선적으로 공격하며 산업 시대부터 전차로 변모한다.
- 영웅 병력 : 일부 영웅이 20레벨 이하일때 기병으로 등장한다.
- 연맹 병력 : 전차 궁병
- 지상 전술성 병력 : 화궁 사무라이, 몽골족 올록, 켈트 전차, 버팔로 병사 부대, 화승총 사무라이, 쌍권총 흉갑기병, 윙드 후사르, 만델칼루
- 영웅 전술성 병력 : 이순신 장군, 페르디앙 포슈, 영웅 퍼싱, 칭기즈칸, 관우, 도모에 고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