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4세기, 축록중원은 시작되었다!/위/등장인물

 


1. 역대 군주


말 그대로 위나라의 전성시대를 이끌었던 스레 시작 당시의 위나라 군주. 본인의 능력과 판단력은 물론이고, 당대에 있었던 인재들 또한 위나라의 최전성기를 이끌던 기라성들이었다.
당대 최강이었던 위나라의 압도적인 힘을 바탕으로 삼진을 비롯한 동맹들을 지원하는 것 만큼은 앞 뒤 안 가리는 정도의 패권국가로써 제대로 된 행보를 보이는 인상적인 군주. 다만 시작 시점이 시점인 만큼 얼마 안 가 천수를 다할 운명이었고, 당연히 이는 이 당시에 거느렸던 인재들도 마찬가지였기에 어떤 의미에서는 위나라의 역사적인 내리막길의 서막을 알린 군주이기도 하였다. 사후 위무후 위격이 자리를 계승한다.
AA덕분에 역사보다도 더 다혈질적인 느낌을 주고 행적도 비슷한 느낌인 위나라의 2번째 군주. 다만 오기 관련 사건 때에는 이상하리만치 자신의 분을 삭여가면서 생각보다는 이성적이거나 관대한 판단을 내렸고, 이는 오기가 위나라에서 이탈하지 않고 겸허함을 겸비하여 직책도 마다하고 동부군에서 남은 생을 쏟아붓게 하는 역사 개변을 일으켰다. 공숙좌가 이렇게 된 오기의 지식을 빨아먹어서 기량이 아득하게 상승한 것은 덤이다.
노나라의 멸망 이후 위나라의 패권을 위협할 정도로 성장한 제나라와 서하를 계속 노리는 영사습의 진나라 등에 대응하기 위해, 위무후 입장에서 일단 끼어들면 이상하리만치 판을 꼬아버리는 조선을 어느 정도 묶어두고자 태자 교환을 제안하기도 한다. 이 때 조선의 태자 기이에게 애증 수준의 감정을 지니게 되는데, 이유는 자기 딸(위앵)이 기이만큼 배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왜 기이가 자기 딸이 아닌가에 대한 울화통이었다.(...)
진나라의 서하 공략은 일진일퇴를 반복하는 등으로 양호하게 저지하였지만, 제나라의 성장을 견제하고자 시도한 2번 정도의 공략이 미진한 성과를 내면서 패권이 흔들리는 단초가 되었다.
최후는 역사적인 사건을 그대로 따라갔는데, 제위를 목적으로 움직인 위완에게 시해당한다.
조선과 애증의 관계가 된 파란만장한 삶의 소유자
첫 등장은 조선의 중원계 공인 과정에서의 사신 및 슈퍼 공숙좌의 위장용 껍데기(...)위나라 동부 월경지에 자신의 영지가 있었고, 여기에 위무후가 과한 신경을 쓰는 것에 의문을 품은 스레주의 판정 결과 위앵임이 밝혀졌다.
위무후의 주도로 이루어진 조선-위 양국간의 태자 교환으로 조선에 손님으로써 보내졌는데, 이 과정에서 사방팔방 돌아다니며 궁금한 것, 모르는 것 다 체통을 생각지 않고 물어보는 통에 기식을 비롯한 당대 조선 주요인사들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조선의 군사적 부문의 해프닝이었던 기병 만능론의 창시자이기도 하는 등 보통 말썽이 아니었지만, 이 과정에서 조선의 당시 주류 사상이었던 인의패도론을 습득하여 역사보다 향상된 기량을 보이기도 하는 등의 수확도 거두었다.
이 당시의 기억에 더해 본디 역사적으로는 제위를 목적으로 위무후를 참살한 위완과 대판 싸워야 했던 탁택 전투의 위기를 조선의 적절한 개입으로 매우 깔끔하게 넘기면서 조선에 일반적인 동맹 이상의 긍정적인 인상을 가지게 되었으나, 방연을 전적으로 중용하면서 생긴 물밑에서의 동맹간 외교적 결례나 마찰 등이 화근으로 작용해 한나라와 조선이 돌아서면서 상당군을 비롯한 상당수의 영토를 상실하게 되어, 이 중 가장 적극적으로 공세를 전개한 뒤 아직까지 사과가 없는 조선에 맹목적이라고 보일 정도의 적개심을 가지게 되고 만다.
다만 이후의 조선과의 국지적 분쟁에서 패자인 제위왕의 중재로 상당군을 위시한 조선의 위나라 방면 국경의 방비 해제 및 혼인 동맹이 성사되었는데, 이때 얻은 사위를 매우 마음에 들어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 사위가 능력으로만 보면 공숙좌를 대신할 정도라 해도 무방할 인재이건만 중요한 상황에서 기억을 하지 못하는 안습함도 동시에 보이는 등, 현재 위나라의 침체 상황에 어느 정도 일조를 하고 있었지만, 조선 유가 명사 자격으로 설득을 시도한 기비의 노력으로 일단은 어느 정도 감정을 정리하였다.
후일 후계구도 문제로 불거진 물밑 갈등을 포착하지 못하여 위사의 거병으로 인한 내전을 맞고, 여기서 다시 조선의 도움[1] 을 받아 또 안정화되는 식으로 자신의 대에만 위나라가 내전에 2번을 휘말리는 것을 봐야 했다.
위신이 위사의 귀신을 보고 급사하자 토혈과 함께 졸도하였다가 깨어나 자신에게 얼마 남지 않은 시간동안 급작스럽게 왕위에 올라야 하는 손주를 걱정하고, 안심해도 된다는 자신에 찬 위로를 듣고서야 여지껏 겨우 버텼다는 듯이 쓰러져 이승을 하직하였다.
위왕 위앵과 공자 위신이 연달아 급사하여 왕이 된 인물. 위신과 기람의 자식으로, 위앵이 위신을 후계자로 내정할 때 여기에 더해 만일 본인이 죽으면 그 자식에게 승계하겠다는 확답의 당사자이다. 공손연에게서 살아남기 위해 소진을 상방에 올리는 도박을 하고, 조선의 도움을 받아 서하를 탈환하는 데 성공한다. 이후 조위초 동맹에 참가하여 제나라를 공격한다. 그러나 전후회담때 소진의 설득으로 대조선 합종군을 만들었지만 진나라 왕위 계승전쟁때 조선군이 초군을 몰아내고 영탕을 왕위에 올리는 것에 성공하여 합종이 깨지고 만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초나라와의 연대를 시도하면서 마침내 대조선 합횡을 선포하는데 성공한다.

2. 왕가 위(魏)씨


혹은 공중완(公中緩). 원역사에서는 위혜왕과 위나라의 권좌를 두고 내전을 일으켜 위나라를 망하게 할 뻔한 탁택 전투의 시발점이 된 인물.
... 이어야 하지만, 여기서는 이 과정에서 전투로는 당시 따를 자가 없던 명성을 자랑한 조선군의 협력을 얻고 매우 기뻐하였으나, 사실 조선은 업과 방릉을 댓가로 하여 반란을 진압할 목적으로 들어온 것이었기에, 방심한 상태에서 수뇌부는 수뇌부대로 병력은 병력대로 조선군에게 제압당하는 양상으로 참패하여 위앵에게 보내져 처형된다.
전투민족 조선 떴다! 이걸로 이겼다!란 명대사를 남기기도 했다.
  • 공자 위앙(AA:)
원 역사에서 상앙과 친분을 맺었던 위나라의 공자. 훗날 이 인연으로 인해 진나라 군대를 이끌고 온 상앙과 만나러 갔다가 포로로 잡히고 서하 지역을 통째로 뺏긴 걸로 유명하다(...)
공숙좌의 사후 서하 주둔군을 담당하게 되었지만 공손앙이 조선에 간 덕분에 역사적인 기만을 당하진 않았으나, 조선-제-한의 연합 공격에 위 동부가 아비규환 상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영거량의 최정예병 2만을 추려서 치고 들어온 급습에 끝까지 저항하다 전사한다.
위혜왕의 장남으로 원 역사에선 전쟁터에 나갔다가 전사한 인물.
조선이 제, 한과 함께 위나라를 칠 때 상당군 쪽의 방어담당이었으나 규모를 잘못 예측한 것이 화근이 되어 회전을 시도하다 탈출에 실패해 사로잡힌다. 이후 상황이 돌이킬 수 없음을 알고 최소한 피를 덜 보게 하기 위해 자신의 관할지역의 수비병들, 그리고 긴급히 증원 병력을 이끌고 달려왔으나 역시 규모가 부족한 상태에서 회전에 돌입하여 밀릴 조짐이 보이는데도 전투 속행을 결의하는 장평 성주를 설득하였다.
이후 조선의 예측을 뛰어넘는 호전성을 경계하는 태도를 보였지만, 조선-위 간의 국지적 분쟁의 조정을 계기로 남편이 조선의 방계 공족이 되었다. 당장 위나라의 인재 상태가 상당히 불안정했기 때문에 능력이 되는 이상 뭐라도 써야 한다는 매우 정확한(?) 판단을 내렸다. 다만 조선에 대한 감정을 죽인 것은 아니어서 조선과의 외교를 위사에게 떠미는 행동을 하였다. 위사의 반란 이후 한을 공격할 준비를 하다 위사의 귀신을 보고 사망.
위혜왕 대의 장수이자 위나라의 공족. 사기에선 위조로 등장. 원 역사에서는 자치통감에 따르면 혜문왕 원년에 안문 전투에서 진나라 군대에게 패배하고 포로로 잡혔다는 기록이 나온다.
원역사에서는 위혜왕 위앵 그 다음의 위양왕이 되는 인물. 위신이 감정상 처리를 안 하려는 대 조선 수교를 담당하게 되었다. 위앵이 왕위를 위신에게 물려주려 하자 반란을 일으켜 11만 3천의 대군으로 수도 대량을 포위하였으나 약 20만의 조선-제-송-한(+하동 지원군) 연합군의 공격을 받자 순간적인 상황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대량을 점령하는 것에 집착하다가 부하의 배신으로 사망했다. 사망으로 인해 후손인 신릉군또한 소멸 확정.
위래의 자식. 소진을 견제한다.

3. 기타


원역사에서도 위무후 시절 상방을 맡았던 인물. 맹상군과는 별개의 인물이다. 오기와의 역사적인 짧은 논쟁 이후 존재감 없이 어느샌가 수명이 다했다.
살아서는 위나라의 충신, 죽어서는 위나라의 귀신이라는 말로 요약되는 삶을 살다 간 비운의 인재.
역사와는 미묘하게 달라서 여기서는 서하에 오기의 영향력을 감소시키는 선에서 오기를 변호도 하고 견제도 하다가, 이후 오기가 은퇴 아닌 은퇴를 할 때 그를 붙들어 1주일 단위로 그의 병법 등을 사사받았는데 그 성취도가 94%... 이를 바탕으로 지력 100등의 매우 향상된 능력치로 스레민들에게 일명 슈퍼 공숙좌라는 - 별칭을 얻었다.
그러나 지력이 100인데도 조선-위의 조나라 합공 전후 처리에서 자리에도 없었던 기식에게 비단 주머니 하나로 논리에서 압도당한 것을 시작으로 위나라를 위하여 몸을 아끼지 않다시피 했으나 위무후 위격 시절에는 위무후가 다소 무리한 명을 내려서, 위앵 시절에는 스스로가 백방으로 뛰는데도 능력치에 비해 다소 미진한 성과 등의 불운이 있었다. 역사적으로는 탁택 전투였어야 할 해프닝 이후로 위앵에 의해 위나라의 상방으로써 군권과 외교권등의 전권을 보장받았고, 이후 위에 절대적인 충성을 바칠 것을 결의한다.
공숙좌 본인이 거의 말년에 주도한 진나라 수도의 대대적인 공략에서 13여만을 동원하였으나 사습과 거량의 운까지 따라준 압도적인 기량으로 인해 좌절되고 동원 병력의 약 1/3을 잃는 참패를 겪었고, 이 죄는 용서받았으나 위앵의 신임에 약간 금이 가고 말았다.
자신의 뒤를 이을 인재로써 평소 눈여겨보던 작은 위나라의 공족 태생인 공손앙을 키우고 있었고 그녀를 위후에게 추천하면서 쓰지 않을 거라면 죽여야 한다는 말까지 하면서 만남을 주선했으나, 공손앙의 등용이 좌절된 이후 공손앙에게 이미 위나라의 행패 등으로 인해 공숙좌는 몰라도 위나라는 미워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듣는다. 그렇기에 위후를 시험해봤다는 것이라는 말을 듣고 애원하다시피 다시 한번 생각해달라고 하는 공숙좌는 공손앙의 이미 마음이 돌아섰다는 선언에 좌절한다. 여기에 노환 등으로 인해 약 10일 이후 삶을 마친다.
위나라 최종병기 1. 손무와 쌍벽을 이루는 전설적인 군사 이론가이자 명장. 오랜 기간동안 위나라에서 망명 생활을 했었던 영사습의 표현에 따르면 사람이 아닌 자.[2] 워낙 유명한 인물이지만 원 역사처럼 상방 전문에게 대놓고 따질 정도로 성질머리 역시 그대로인지라 스레민들이 위나라 견제를 목적으로 흉노를 용병으로 하여 서하지역 약탈을 활용해 역사대로의 방출을 기도했었다. 처음엔 오기라는 이름값 답게 오는 족족 흉노를 갈아버렸으나 흉노 선우가 서하주둔군을 피하고 오로지 백성을 대상으로 한 약탈작전으로 선회하자 골머리를 싸맨다. 보다못한 오기가 추가 지원을 위무후에게 여러번 요청했으나 위무후가 이걸 씹고 파직 크리를 내리면서 스레민들의 계획대로 되는 가 싶었는데...
그러나 위무후가 미묘하게 관대하거나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고 공숙좌도 오기의 영향력만 줄이려 했지 덮어놓고 오기를 대놓고 모함하지 않고 경우에 따라서는 변호도 한 덕분인지, 오기 본인도 자신이 이렇게까지 출세할 수 있었던 데에는 선대 위문후를 비롯해 자신을 믿어주고 뒷받침해주는 사람이 있었음을 깨닫고 위무후가 내린 태부 자리를 마다하고 군무에서 은퇴 아닌 은퇴. 모든 직책을 내려놓고 위나라 동부로 이동하여 제나라의 암살로 명을 달리한 서문표 대신 동부군의 기강을 바로잡는데 여생을 보낸다. 다만 비록 은퇴는 했지만 동부군 사령관이라는 직함은 남아있는지라 중원대전을 벌인 제나라의 계획을 알아채고 군을 움직여 승구를 구원하고, 동부군을 이끌고 한단 공략전에 참전하는 등, 명성에 걸맞는 노련한 지휘를 선보였다.
조선-위 간의 태자교환으로 인해 당시 조선의 태자였던 기이가 위나라에 들어왔을 때 다른 위의 걸물들과 함께 그 자질을 경계하였으나[3], 어느날 기이에게서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위문후 위사의 모습을 본 끝에 홀리듯이 자신의 모든 것을 전수하게 된다. 이후 기원전 379년에 사망.
악자의 아버지. 여기서는 증산국 정벌 때에 손을 써서 어떻게든 자신의 자식을 탈출시켰지만, 소문은 역사와 거의 다르지 않게 났고 이후 자신의 연로함을 이유로 굳이 중책을 맡지 않으려 한 채 한직을 맴돌았다. 이후 서문표의 주선으로 악자와 만날 수 있었고, 그 자리에서 일족 중 가장 공명을 떨친 것을 명분으로 악자를 악씨 문중의 차기 당주로 임명한다.
의외로 마당발인 위문후-위무후 시기의 명장. 원 역사와 크게 다르지 않게 사건이 소문난 악양과의 친분을 가지고 있었고, 그 외에도 조나라 상방 공중련과도 사적으로는 나쁘지 않은 사이였다.
결국 위무후 시절에 조나라에 대한 횡포가 심해진 것을 계기로 조선과 연합한 조나라와 싸우게 되는데, 공중련이 전사하면서 씁쓸함을 표하다 이 때 뒤늦게나마 지원 온 악자와 조선군에 의해 부상을 입었다. 마주치자마자 악양의 딸임을 알아보고 더 이상의 피를 보지 않게 해달라는 부탁에 응하여, 이후 악양과의 만남을 주선하였다.
악양이 병에 걸려 악씨의 차기 가주를 임명할 때 드러난 바에 따르면 아예 악양의 본심을 간파할 수준이며, 이후 동부군을 담당하다 제나라의 자객에게 암살당한다.
역사대로의 공명심에 언젠가 손빈을 족쳐놓을 생각이었지만, 출세가 생각보다 빠르지 않아서 손빈이 스스로 방연의 연줄을 포기하여 연이 끊겼다. 이후 작은 위나라를 선동하여 자신의 휘하 병력과 함께 일시적으로 읍성 하나를 점령하였고, 제의 증원으로 후퇴할 때 사건의 원인을 작은 위나라에 성공적으로 뒤집어씌우는 등의 능력 또는 만행을 보여 공숙좌의 눈에 띄어 승진과 동시에 목줄이 채워졌다.
공숙좌 사후 위앵에게 상당히 중용되는데, 이 과정에서 정말 마음대로 날뛰는 동시에 작은 위나라와의 유착과 한나라의 증원 요청을 성의가 부족하다 란 이유로 씹어버리는 등으로 부패하여 스레민들이 결정적인 순간 위나라를 배신하고 제-한과 함께 위나라를 합공해 상당군을 상실하게 만드는 근원이 되었다. 덕분에 현재는 대량으로 천도한 위나라의 수도방위사령관 정도로만 기용되고 그 외의 일에는 철저히 배제당하고 있다.
진나라가 손빈을 통해 서하의 완전한 병탄을 마무리 지으려 할 때 서부 방어선에 막 배속되었던 탓에 서부군을 장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손빈에게 참패를 당하고 목숨이 위중한 부상을 입고 달아났으나 명이 다하는 결말을 맞았다.
위혜왕 대의 장수. 원역사에서는 공숙좌의 입을 통해 파녕과 세트메뉴로 짤막하게 언급된 정도? 특이사항으로 원래는 군무를 더 이상 볼 수 없을 정도의 부상을 입고도 이내 회복해버린 전적이 있다.
사기에는 왕착(王錯)으로 나온다.(錯이 착으로도 읽을 수도 있고 조라고도 읽을 수 있기 때문.) 원 역사에서는 위무후-위혜왕 대의 신하로 오자병법에 따르면 오기와는 앙숙관계였다고 나온다. 위혜왕 대에는 상방을 지냈으며 위혜왕에게 방연을 추천한 인물이기도 하다. 또한 태평광기에 따르면 귀곡자 왕리(王利) 혹은 왕후(王詡)의 아버지 되는 사람이기도 하다.
여기서는 역사적으로 탁택전투였어야 했을 사건에 등장하여 공자 위앙 등을 포섭해 위앵과 일종의 거래를 시도했으나, 애초에 위앙은 군주란 거래 및 교섭의 대상이 아닌 무조건적인 충성을 바쳐야 할 존재라 생각하기에 이미 공숙좌와 짜고 적절한 때에 등을 돌렸다. 이에 당황하여 급하게 말을 바꾸는 등의 추태를 보이다가 위앵 및 공숙좌의 명을 받은 흔양에 의해 처형된다.
위혜왕 대의 장수로 원역사에선 오기 이후의 서하 지역의 담당자이다. 당연히 삼국지연의의 이 사람이랑 전혀 상관없는 사람. 여기서는 공숙좌 이후 서하태수로 부임하였는데, 오기와 공숙좌가 쌓아올린 장성과 서하주둔군의 숙련도 덕분에 진헌공 영사습이 이끄는 진군과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이다가 공숙좌가 총지휘한 서하대전에서 영거량에게 대패하고 포로로 잡혔다가 귀환. 이후 파직되면서 출연 끝.
위혜왕 대의 장수. 원 역사에서는 이 사람도 상앙은 물론 훗날 진혜문왕과도 좀 많이 얽힌다.
공자 위앙의 사후 서하를 담당했으나 손빈이 진나라 특유의 아득한 숙련도의 병력 약50000명을 이끌고 오자 대응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바로 후퇴하였다.
이후 위후 위앵의 명으로 조선령으로 넘어간 중도 성을 4만여의 병력으로 공략하고자 하였으나 그곳에는 세가 있어 시간이 끌렸고, 뒤이어 당시 일개 현령이었던 고정이 훈련도가 낮은 병력으로나마 위군의 배후를 들이치자 전투를 벌이기 이전부터 상태가 좋지 않았던 위나라의 재정상태를 감안한 판단으로 후퇴한다.
이 과정에서 추격까지 허용하여 결과적으로 적보다 약 4배의 병력을 가지고 4배의 병력을 잃은 기적의 교환비를 달성한 끝에 위앵의 신임을 잃고 관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조선-위 간의 국지적 분쟁의 사후 조정의 결과 위나라와의 혼인동맹을 위해 보내진 조선의 방계 공족, 위후 위앵의 입장을 빌리자면 위나라와의 혈맹관계를 배신한 국가 출신이라는 것을 감안하고도 좋게 평가할 수 있을 정도의 재능을 가진 사람이다. 위신의 남편자격으로 같이 참전한 대 초나라 합종전에서 조선군과 위군의 충돌을 무마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이후 공손연의 농간 내지는 설득으로 인하여 위신과 별거 상태가 되었으나, 그럼에도 자식인 위래를 훌륭히 키우고 비공식적인 루트지만 위사의 반란 소식을 조선에 직통으로 전하는 등 조용히 활약하였다.
참고로 AA 선정 당시에 작은 소동이 있었는데, 다이스를 굴려서 나온 결과는 둔재였는데 참치가 아이젠을 앵커해 버렸고, 어장주는 변태가면 같다고 직설적으로 까면서 이 이후로는 이전에 굴린 다이스와 캐릭터의 속성이 모순되는 것 같다면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삼인성호라는 사자성어로 유명한 인물, 한-송이 한의 월경지역을 이어두는 전쟁을 벌일때 병력 약 4만의 대언의 성과를 지역방위군과 함께 최소화 시키며 등장했다. 여기서는 방연의 조카로 등장한다...?
합종론으로 유명한 그 소진이다. 위래 재위 직전 고조된 한-위 갈등을 봉합하는 과정에서 위래의 눈에 띄었다. 당시 실세이던 공손연이 정적인 전수의 식객인 소진을 대놓고 견제해서 위나라를 뜰려고 했지만, 위래가 파격적으로 객경에 임명하고 자기를 믿어주자 위나라에 남았다. 이후 위나라의 외교를 담당하면서 전방위로 활약했다. 특히 합횡군을 처음으로 제시해서 조선을 견제할 것을 주장하고 다이스 운이 상당히 좋은 편이라서 참치들의 두려움을 사기도 했다.[4] 결국 대조선 합횡 조직에 성공하기까지 한다. 위나라가 아니라 위래 개인에게 충성하는 것이나, 파격적인 바보들에게는 페이스에 휘말리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원역사에서는 종횡가로 활약한 사람. 위사파에서 위신파로 줄을 갈아타거나하는 영악한 모습을 보여줬다. 위나라 내전에서는 주나라를 겁박해 주나라는 공손연이라면 치를 떤다. 위나라 내전 이후 공손연의 기반인 하동은 멀쩡한데 하남은 황폐화되고 정적 전수는 해임되어서, 권신으로써 위래에게 위협을 느끼게 만들기도 하였다. 하지만 위래가 서하를 되찾아오고 왕권이 강해지자 소진에게 점점 밀려나기 시작했었다.[5] 그러던 중 위나라가 진을 공격하면서 음진 공격에 나섰고, 조선이 위의 배신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한데 더해서 음진현령이 낙하산으로 들어온 어린 사람 인 것을 보고 방심했다. 하지만 네임드 보정까지 받은 음진현령은 이미 위의 배신을 알고 있었고, 음진에서 사로잡혀 심문당했다.
이것을 기점으로 초래된 음진 방면군의 지휘체계 혼란과 내부의 분열, 이어 들어온 백기의 증원군에 자신이 직접 길러낸 정병이 모조리 수장당하고 공성군은 단순히 질량으로 들이받다가 나가떨어진 상태로 합공을 받아 와해되는 환장의 상황을 목도하고는 졸도하였다.[6] 이후 진나라에 인솔되어 처형당한다.
원래 진나라의 장군이었다. 그러나 초나라와의 전투에서 무관 방어에 실패한 뒤 도주하여 위나라로 갔다. 이후 신분과 외모를 바꾸고 위나라의 장군이 되어 하동 방면을 지킨다. 공손연 사후 하동군의 책임자가 되었다.
소진의 동생. AA의 이름이 기유와 같아서 스레민들에게 속칭 기붕이라고 불린다. 사건에 대해 전후 맥락없이 오해살 수 있는 한 문장만 던져서 사회관계가 좋지 않다. 소려가 이를 해석해서 겨우 무마하는 수준. 위래가 불쾌하게 생각할 정도. 그러나 한나라 외교의 과정에서 이런 행동들이 속임수였고 자신의 이름을 알리지 않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소진의 동생. 소진이 가장 믿고 일을 맡기는 인물. 소대가 이상한 말을 하면 그것을 해석해서 수습해주는 역할도 하고 있다.
제위왕의 추천으로 위나라의 상방이 되었다. 제나라 왕족의 후손이지만 위나라를 진심으로 위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제나라 왕족이었기 때문에 견제를 받다가 쫓겨나서 맹상군의 식객으로 살다가 죽는다.

[1] 전과는 달리 다른 나라의 군대도 위나라 국왕군을 지원했지만, 일단 그 공로의 지분은 조선이 제일 컸다. 추가로, 위사의 거병 소식은 기람을 통해 비공식적인 방식이긴 하지만 조선에 신속하게 전달되었다.[2] 아예 스레주가 대놓고 괴물이라 언급했다.[3] 정확히는 기이 개인에 대한 경계라기 보단 조선에 대한 경계심에 가까웠다.[4] 다만 이게 소진의 전력은 아니라고 공인된 것이, 지금 소진은 위나라에 묶여있기에 합횡 결성이나 자신의 능력을 전부 발휘하기는 오히려 힘들다는 듯[5] 소진이 공손연을 견제하는 것이 좀 심해서 위래가 살짝 불편히 여기기도 했다.[6] 본인 입장에서는 졸도한 게 차라리 정신을 차린 편일 정도의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