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4세기, 축록중원은 시작되었다!/조선/등장인물

 


1. 개요
2. 군주
3. 관료(to내 인재)
3.1. 기원전 432~403
3.2. 기원전 402~373
3.3. 기원전 372~343
3.4. 기원전 342~313
4. 기타 인물
5. 이름이 없는 엑스트라


1. 개요


◆는 현재(170스레)기준으로 사망 ◇는 은퇴

2. 군주


군주의 능력치 중 100에 달하는 항목이 있을 경우 그에 관련한 부분에서 치세 동안 조선 자체가 보정을 받는 시스템이 있다. [1]
  • 조선 부족장 겸 초대 조선후 기 아무개 (AA:브로리)
기원전 8세기 당시에 들어온 송나라 귀양자들을 통해 상나라의 예법과 기자의 존재들을 전해들은 뒤 입막음을 위해 모두 처리하고 스스로를 기자의 후손으로 둔갑시킨 인물. 그의 시기에 본디 기자를 함께 제압한 부족들간의 화합의 상징이었던 청동 옥좌는 지배자의 상징이 된다.
  • 조선세후 기식(AA:쇼쿠호 미사키, 통/무/지/정/매: 65/63/100/84/94) ◆ 기원전 427년
스타트 3인조 중 한명. 1대째 조선후. 즉 군주. 높은 지력으로 인해 외교적으로 많은 혜택을 보았다. 중국으로 진입했을 때 기자의 후손이라는 자칭이 송나라에게 먹히면서 중원 국가로 인정받게 된 것은 그 절정. 풍부한 인재풀을 바탕으로 연나라와 조나라를 병탄하고 조선을 요동반도의 일개 국가에서 중원의 강국으로 우뚝 솟아오르게 한 명군이자 효웅이라고 할 만하지만 자기 밑의 신하들을 막 갈궈대는 악덕상사의 기질과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냉혈한의 면모를 보인다. 게다가 최측근이라고 할 수 있는 충문군 문예마저 믿지 않는다고 태자에게 대놓고 말할 정도로 속이 배배꼬였다. 오죽하면 측근인 충문군마저 군주 앞에서 대놓고 '너님 폭군'이라고 대차게 깔 정도. 하지만 스타팅 3인방인 고거와 문예, 그리고 딸인 기이는 말한 것과는 다르게 상당히 아꼈다.[2]말년에 태자에게 군주의 인장을 맡기며 충문군에게 태자를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사망. 시호는 세(世). 어장 초반에 진행 방식이 아직 불안정했고 전개가 매우 빠른 것 때문에 잊혀지는 경향이 있지만 현재까지 등장한 조선 왕 중 가장 많은 영토를 정복하고 자기 치세에 중원국가 둘을 멸망시키고 운이 따라주긴 했어도 외교나 첩보에서 대활약해 조선의 기반을 다진 정복왕이자 내정군주로서도 상타인 무시무시한 군주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창업군주로서의 평가가 올라가는 중.
  • 조선유후 기이(AA:IA, 통/무/지/정/매: 99/69/89/100/90) ◆ 기원전 408년
2대째 조선후. 젊은 시절에 인질교환 차 위나라 안읍에서 지냈는데 워낙 스텟이 좋아[3] 위나라 상방 전문, 서하태수 오기, 업령 서문표[4]에게 경계를 살 정도였고 위무후는 되려 자기 자식과 비교하다 못해 질투할 정도. 그나마 우호적인 공숙좌 밑에서 공부를 했는데 이 때 같이 동문수학하던 사람이... 이후 양평으로 돌아와 조나라 정벌을 진두지휘했는데 당시 조나라 수도였던 진양을 수공으로 공략했던 지백의 일을 떠올리며 '무고한 희생이 없게 물이 없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거나 살아남은 조나라 공자 조어를 이용하여 반란분자를 색출하려던 어머니 기식에게 반대하는 등 여러모로 철혈군주라 할 수 있는 어머니와는 정반대의 면모를 지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기식 사후 조선후를 계승해서 수도를 맥성으로 천도하는 등 외정보다는 내치에 주력하려고 했고, 170어장까지 쓰이는 삼공체제를 완성하고, 어머니 때 정복한 정복지들을 안정화시키는등 크게 성과른 보았지만, 주변정세가 급변하는 흐름 으로 인해 본의아니게 혈맹이었던 위나라를 배신하고 상당군을 접수하는 바람에 외교적 신용을 깎아먹고[5] 졸지에 위나라와 원수지간이 되면서 여러 모로 마음고생하다 기비가 위앵을 설득하였던 해를 넘기지 못하고 향년 59세로 사망하였으나, 본디 소요가 있었을지도 모르는 상당군을 비롯해 딱히 아무런 일조차 생기지 않을 정도의 선정을 베푼 것이 밝혀진다.[6] 시호는 유(裕).[7]
3대의 조선후 그리고 1대 조선왕. 상당군 공격을 진두지휘했다. 높은 매력을 바탕으로 조선후가 된 이후 주로 인재 등용에 전념하고 있다. 유목 출신 안문호에게 조선의 카칸으로 불리우고 태자가 국가예산에서 비상금을 살짝 차출했다는 것을 듣고 그 자리에서 4일간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두들기는 등 고생한다. 이후 어그로 관리(...)용으로 대초합종군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임호 등의 유목민들을 몰아내고 기미부주를 설치해 북방을 안정시켰다. 또한 요서도로 건설과 관제개혁, 도량형 통일 등 내정에 집중했다. 기원전 328년 전인제가 주나라 왕에게 사과를 거부하고 모욕을 가할 때, 전인제의 편을 들어 전인제에게 뜻하는대로 행동하라고 말했다. 이후 병든 몸으로 낙양에 가는등 무리를 해서 쓰러졌고, 얼마 못 가서 향년 5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죽기 전, 태자에게 인생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 어장 내외를 관통하는 유언을 남겼고, 이는 어쩌다 보니 장왕의 치세 그 자체를 상징하는 명언이 된다.[8] 시호는 정(靖)
  • 조선장왕 기유(AA:나루카미 유우, 통/무/지/정/매: 83/71/90→93/93→99/86 )◆ 기원전 364년
2대 조선왕[9]. 태자 시절에는 당시로써는 다소 무모한 계획인 장거리 항로 개척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안전한 항로부터 시도한다는 조건을 달긴 했어도 추진할 것을 피력하는 등의 호방함을 보인다. [10] 제후 전인제가 조상의 무덤이 있다는 이유로 조선령이었던 패구를 내놓으라는 억지요구[11]에 그곳에 살던 백성과 물자를 모두 소개하고 땅만 준다는 계획을 수립한 장본인. 백성과 물자를 빼갔다는 사실을 알고 전인제가 따지자 '그곳에 살던 사람은 용담 출신의 예맥인이니 거기 출신 아님.'이란 이유로 전인제의 입을 다물게 하는 패기를 선보이기도 했다.[12] 물론 전인제 입장에선 어디까지나 조선과의 상하관계 정리라는 목적만 달성하면 되었기에 적당히 빠질 생각이기도 했지만 그 전인제를 상대로 뛰어난 임기응변을 선보였다. 이후 공손앙과 함께 화폐개혁을 시행하거나 진과 위를 중재하는 등 내외적으로 다양한 활약을 했었다. 하지만 기토가 죽고 왕의 되어서 처음 시행한 외교인 칭왕회동에서 전인제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계속 송나라의 칭왕을 주장하다가 열국의 국군들 앞에서 전인제에게 무릎을 꿇고 사죄하는 치욕을 당하고 낭야의 지분을 몰수 당했다.[13] 그 뒤로 남은 재위 기간을 하간 개발과 위나라와의 동맹을 공고히 하는데 썼다. 기원전 313년에 조선, 위, 초, 진의 합종군을 일으켜서 제나라를 공격해 제나라 국토의 절반을 정복하고, 이후 진나라의 왕위 계승에 개입해 조선에 인질로 와 있던 영탕을 왕위에 올렸다. 임종 직전에는 전인제를 이상적인 왕으로 생각해 선망했다는 사실을 기설과 곽외, 옥로의 앞에서 밝히고, 기설에게 옥로와 곽외를 곁에 두라는 말을 남겼다.[14] 그리고 그 후 얼마 안 가 향년 54세로 사망했다. 시호는 장(莊)
  • 조선왕 기설(AA::와이스 슈니, 통/무/지/정/매 12/58/90/89/75) 기원전 325년
3번째 조선왕. 158어장 기준으로 현재의 조선왕이다. 기유의 첫째가 너무 병약하여 일찍 세상을 떴기에 후계자가 되었으나, 그녀 또한 조옹이 어디선가 구해온 900년근 산삼이 아니었다면 단명이 예견될 정도로 몸이 약했었다.[15] 때문에 조선에서는 처음으로 미성년이고 능력을 입증하지 못 한 태자가 왕위에 오른 경우이다. 310년 시점에서는 조선상 조옹과 승상 비의의 섭정을 받고 있었다.
제나라를 반토막내 노른자땅을 죄다 얻은 여파가 아직도 잔존하던 시절에 즉위하여, 즉위 초에는 구 제나라령 및 제나라 방면의 일에 몸소 나서는 일이 많았다. 특히 조선의 신영토 관리에 최대한 차질을 주려는 제의 유격전 시도를 일단 완전히 일소한 곡부 대전의 성과로, 전후 협상의 결과 자기 부모 뻘이었던 제왕 전벽강을 자신의 앞에 꿇려버리는[16] [17] 바람에 국제적으로 본인 이미지를 단단히 각인시키고 안으로는 아버지 대에서부터 이어지는 설욕전의 종지부를 찍으며 화려한 친정 데뷔를 하였다.
그와는 별도로 일단 아직도 배우는 단계이기에 때로는 가르침을 받고 때로는 국정에서 조금씩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며 적응해 나가는 중이다. 여담으로 술을 처음 마셨는데 유명한 술고래인 조옹을 낯빛 하나 안 변하고 격침시킨 만주불침의 몸이라는듯하다(...).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해 애지중지 키웠고, 10대 초반부터는 최강대국의 유일한 후계자, 10대 중반 이후로는 최강대국의 왕이였기에 상당히 아가씨스러운 면을 보이기도 한다. 성격이 온화한 편이였던 기토나 기이, 즉위 초창기에 전인제에게 크게 데여서 인내심을 기른 기유와는 다른 부분. 덕분에 조선은 (패권국의 위신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있지만) 상당히 도발에 민감하게 반응했고, 소진은 기설을 호전적인 군주라고 평가했다.

3. 관료(to내 인재)


현재(50스레)기준 조선의 관직은 조선상(相) - 육경(六卿) - 아경(亞卿) - 대부(大夫) - 박사(博士)로 구분되며, 조선상은 타 중원국가의 상방과 동일한 직책이고 육경은 조선 시대 6조의 수장이었던 판서와 같은 위치에 있다. 육경의 수장 및 담당은 다음과 같다[18].
대총재(大冢宰) - 천관(이조) (인사,종합업무)
대사도(大司徒) - 지관(호조) (재정업무)
대종백(大宗伯) - 춘관(예조) (외교업무)
대사마(大司馬)[19] - 하관(병조) (군정업무)
대사구(大司寇) - 추관(형조) (사법업무)
대사공(大司空) - 동관(공조) (공사업무)
원래 스타팅 시점의 조선은 중국식 관제를 제대로 따르지 않았는데, 연나라 정벌 이후 조선상과 대사마대장군등의 직위를 만들어서 중국식 관제를 따라하기 시작했다.
이 중 대사마대장군 직위는 군사권을 한 관직에 몰아넣은 수준이였는데, 이는 세후가 구귀족들을 숙청하고 억누르기 위해 측근들에게 군권을 집중시켜서 그렇다[20]
또한 세후 때 조선상 문예의 제안으로 조선상을 보조하기 위한 비서직인 승상이, 유후 때 기라의 제안으로 감찰부서의 수장이며 군주의 비서직인 어사대부가 신설되었다[21]
승상은 조선상과 육경[22] 사이에 위치한 지위이고, 대사마대장군은 조선상 밑에서 군사업무 전반[23]을 돌보는 역할을 맡았다. 어사대부는 아경과 동급의 직책이었다가 육경급으로 승진, 이후 대사마대장군,승상과 동격인 삼공급으로 지위가 올랐다.[24]
이들 승상,대사마대장군,어사대부 세 관직을 삼공이라고 부르며 조선왕(후), 조선상,삼공이 회의에서 국가의 큰 일들을 정한다.
유후 재위기 중반까지는 한 번 임관하면 부서를 어지간하면 멋대로 바꿀 수 없었고, 군사들이 실적이 없으면 말을 안 들을 가능성도 있었지만 유후 때 공손앙,기라등이 실행한 개혁 이후 그런 제약이 약화되거나 사라졌다.
그리고 이후 장왕 때 소부[25]가 지관에서 독립해 어사대로 들어갔고, 대간을 만들어서 어사대 소속으로 배치하였다. [26]
전체적으로 조선상(상방)-삼공-육경(+소부)-아경-중외대부-상중하대부 순서의 관직 체계이며, 육경에 소부를 더한 칠경과, 아경을 경이라고 부르고, 중외대부와 상중하대부를 대부라고 부른다.
이 중 대부급은 현장직이라서 카이두의 경우처럼 현장에 대신 일할만한 사람이 없으면 실적이 쌓여도 대부 직위에서 오랫동안 머무르기도한다.
장왕 재위 말기와 기설 때는 조옹과 같이 오랫동안 한 관직에서 머무르며 권신화 되는 현상이 문제로 꼽혔고, 당시 대사마대장군이던 비비오가 은퇴하고 난 뒤로부터는 육경 급은 임기에 제한이 생기었다.[27]
190어장 기준으로 대사마대장군의 권한축소나 6관의 이름을 바꿀 관제개혁의 이론을 정리하고 실행하기 위해 대기중이다.
작중 이 항목에 추가된 인물과 추가될 인물이 계속해서 증가함에 따라, 이들을 태어난 연도 기준으로 세부 분류한다.

3.1. 기원전 432~403


  • 위호군 악자(AA:스카자하(Fate 시리즈), 통/무/지/정/매: 79/96/45/21/40) 별부사마 → 위장군 → 대사마대장군 ◆ 기원전 432년
영광의 이 항목 최연장자(...) 중산국을 정벌한 위나라 명장 악양의 딸. 정확히는 중산국 정벌 도중 고깃국이 되어야 할 자식이 여기서는 무사히 살아남아 조선에 임관하였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악양 항목 참고. 스텟을 보면 알겠지만 무력이 최상급이라 고거의 부장으로 시작해 연나라 정벌에서부터 무쌍을 찍었고 중산 전투에서 조나라와 연전을 치뤘긴 했지만 업령 서문표가 지휘하는 위군을 격파하고 서문표를 포로로 잡기도 하였다. 심지어 위나라 공자 위완의 반란을 진압하러 갔을 땐 비록 방심했다지만 맨손으로 위완의 호위병을 제압하는 등 인간흉기라는 말이 아깝지 않을 정도. 명실상부 고거, 기황과 함께 조선 군부를 이끈 전설의 1세대. 다만 군편제를 기병 위주로 하다가 쓸데없이 지출을 내는 바람에 고거랑 같이 문예에게 설교를 듣는 실수를 하기도.[28] 조선에 임관해서 악씨 문중의 본관이라 할 수 있는 영수를 공격했기 때문에 악양의 뒤를 이어 악씨 문중의 가주가 되었음에도 악조를 비롯한 악씨들과 사이가 영 좋지 않았으나 마지막에 악조와 훈훈하게 화해를 하고 은퇴하여 가문을 관리하다 사망하였다. 시호는 위호군.
  • 충문군 문예(AA:사기사와 후미카, 통/무/지/정/매: 37/71/81/98/99) 대부 → 조선상 ◆ 기원전 427년[29]
스타트 3인조 중 한 명, 문관 대표. 조선의 내정을 관리하고 여러 인재와 함께 변법을 추진하여 구 귀족들을 척결하여 조선의 중앙집권화를 실질적으로 설계하고 완성한 인물. 명실상부한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 할 수 있겠다. 개인적으로도 기식과 친분이 두터운지 사석에서 자주 붙어다니는데 속이 배배꼬인 기식의 장난질 때문에 본의 아니게 뒤처리 담당 역할이기도 하다. 그덕에 기식에게 대놓고 직언을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원칙주의자 중 하나.[30] 기식 역시 본인 입으로는 예를 포함해서 아무도 믿지 않는다고 했지만 죽을 때가 돼서야 태자를 부탁한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역시... 기식 사후 차기 군주인 기이를 보필하다가 과로로 사망한다. 시호는 충문. 그리고 별로 주목되지 않는 사실이 하나 있는데 이 사람, 스타트 3인조 중에서 유일하게 실존 인물이다.
  • 공양군 고거(AA:타카라 미유키, 통/무/지/정/매: 73→99/79/67/24/97) 장군 → 대사마대장군 ◆ 기원전 424년
스타트 3인조 중 한 명. 무관 대표. 시작때는 춘추시대 국인(國人)의 전쟁관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나 극초반에 제나라를 통해 손자병법을 입수하면서 전국시대의 전쟁관으로 변화하고 이로인해 통솔이 급상승했다. 훗날 영입하는 악자와 함께 연나라 정벌을 시작으로 조선의 무패전설을 이룩한 조선 군부 전설의 1세대. 사망하는 그 순간까지 한 번도 패하지 않아서 semi-손무, 무패장군이라는 후덜덜한 별칭들이 붙어있다. 그리고 문관 대표인 충문군 문예에게 항상 한 수 접어준 덕에 본의아니게 조선의 문민통제에 큰 기여를 하기도 했다.[31] 시호는 공양. 스타트 3인조 중에서 가장 먼저 사망했다.
박사 → 정동장군 → 우장군 → 위장군 → 대사마대장군 ◆ 기원전 417년
고거, 악자와 함께 조선의 군부를 이끈 1세대 장수. 고거와 악자가 중원 방면에서 공적을 쌓았다면 이쪽은 만주의 예맥을 토벌하면서 공훈을 쌓았다. 예맥의 근거지인 국내성를 토벌하는 과정에서 여자는 죽이고 남자는 겁탈하는 등 가혹한 잔학행위를 하는 바람에 반조선 예맥 국가인 부여의 태동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훗날 악자와 함께 부여를 정복하는데 성공하였지만 예맥 부족의 포섭에 상당한 시간을 들였음에도 여전히 온전히 포섭하지 못한 원인이 되었다. 이후 기이가 오자병법을 가르치려 했을 때 그 성취도가 가장 높았다. 그 외에는 무난한 지휘력으로 여러 전장을 전전하며 승리를 거머쥐었고 악자 사후 대장군의 자리를 물려받은 뒤 수명이 다해 사망했다. 시호를 강양군이라 하였다.
  • 스어(곽달호)(AA:샤아 아즈나블, 통/무/지/정/매: 92/90/88/86/92) 박사 → ??상 → 지관대부 → 대사도 ◆ 기원전 415년경
본래 송화강에 살던 친조선계 예맥 부족장 출신. 조선이 동진할 것을 예측하고 가솔을 이끌고 조선에 출사하였다. 내정에 대한 공적을 인정받아 지방의 상으로 있다가 세제개혁 건으로 대사도 기취와의 다툼을 계기로 중앙에서 일하게 되었다.[32] 스텟은 무관에 조금 더 치우쳐진 만능형이지만 당시 내정요원이 부족했던 탓에 오랫동안 내정관으로 건실하게 일했다. AA탓인지 기라를 보고 우리가 다 아는 불후의 명대사(...)를 지르다가 기취에게 얻어터지고 관료들에게 끌려나가기도(...) 현 시점에서 자식들을 조정에 천거하고 은퇴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다. 은퇴 사유는 일이 너무 많아서(...) 고향에 돌아가서는 큰 동네에서 크게 출세하고 오신 어르신 대접을 받으며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기다가 나중에 은퇴한 기취보다 좀 늦게 세상을 떴다. 이후 그의 후손은 그의 조선명을 따서 곽씨 가문을 형성한다.
  • 기취(AA:후키요세 세이리, 통/무/지/정/매: 20/91/80/90/58) 대사도 → 대종백 → 대사공 → 조선상 ◆ 기원전 410년
특이사항으로 방계 공족이다. 본래 대사도 직으로 기식의 명을 받던 스어[33]를 따라 세제개혁을 완수하라는 명에 반발하여 사표를 던졌다가 기식에게 합격 판정을 받아 눈에 들게 되었다. 그후 내정관으로서 여러 고위직을 거치다 충문군 사후 차기 조선상으로 취임.[34] 기식과 관련된 일화를 보면 알겠지만 원리원칙에 굉장히 깐깐한 성격으로 서슴없이 돌직구를 던지는 스타일. 이 탓에 대종백으로 초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되려 초왕 웅량부의 성깔을 건드린 적도 있다. 이후 제나라와의 황하 공동 개발, 점령지 및 할양지 안정화 등의 여러 일을 처리하다가 은퇴하였다. 기이가 사망한 지 얼마 안되어 병사.
  • 악조(AA:사토 카즈마, 통/무/지/정/매: 88/87/69/58/95) 정남장군 → 후장군 → 위장군 ◆ 기원전 410년
영수 악씨 문중의 일원 중 한 사람. 악양의 뒤를 이어 가주가 된 악자의 반대파 중 수장격에 위치한 사람으로 사사건건 악자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지만 군공과 계급차가 차이인지라 속으로만 궁시렁거리고 있다. 박사 공수속이 개발한 신형 공성병기를 이끌고 제나라와 월나라와 함께 노나라를 공략한 것을 시작으로 조선의 공성부대를 이끌고 굵직한 활약을 펼쳤다. 악자가 나이가 들자 이만 퇴직하여 가문을 돌보는 것이 어떠냐는 직언을 하자 악자는 이를 받아들여 은퇴. 사심이 아니라 악씨 문중을 위해 악자의 반대편에 서 있었다는 나름 뜻깊은 속내를 보여주기도 했다. 태자 기토가 총지휘한 상당군 공격의 일군을 지휘하여 활약한 것을 끝으로 군부의 실질적 수장 역할을 고비에게 물려주고 관직에서 은퇴 후 사망.
  • 방릉군 공손기(AA:레이첼 알카드, 통/무/지/정/매: 2/72/95/88/83) 천관대부 → 대종백 → 조선상 ◆ 기원전 408년
원 역사에서 한의후에게 간언하여 위나라 내전에 참전해 위나라를 멸망시킬 뻔 한 탁택전투의 기획자인 그 공손기 맞다. 본디 위나라 출신의 공족이었지만 서자출신이라는 이유로 한나라에서 퇴출당하자 이에 실망하여 조선으로 건너가 충문군 문예의 식객이 되었다. 이후 출사하자마자 한나라와 위(衛)나라와의 동맹을 성사시키면서 단숨에 대종백으로 고속승진하였고 기이의 재위 내내 조선의 외교를 담당하면서 방릉군이란 군호까지 받고 공족과 사돈을 맺은데다가, 승상의 군정권 처리 문제 때문에 1년도 안되어 은퇴하긴 했지만 기라 대신에 조선상의 자리까지 오르는 등 조선에서 제대로 출세했다. 은퇴하면서 기이와 기토에게 다른 나라에게 끌려다니지 않는 외교를 추구할 것을 당부하였다. 이후 별탈없이 사망하며 퇴장.
  • 안월(AA:츠키무라 스즈카, 통/무/지/정/매: 82/43/18/74/95) 천관대부 → 동관아경 → 대총재 ◆ 기원전 406년
기황과 함께 출사한 조선의 관료. 그리고 스레민 공인 인간승리와 근성의 대명사. 출사 내내 만주를 비롯한 변방 개척에만 돌려지는 바람에 입사동기인 황이 대장군을 찍는 동안 혼자서 30년 넘게 대부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공손앙이 개성의 개척민들을 상대로 무리한 법치를 진행하려던 것을 막은 공훈으로 아경에 제수되면서 관운이 피더니, 조선상 기취가 공을 물려준 덕에 육경의 일각인 대총재에 올랐다. 그녀의 사후 조선후 기이는 조회를 3일간 파했으며, 비록 공이 부족하여 시호가 내려지지는 않았으나 장례에 추모 행렬이 끊이지를 않았다.
  • 마위(AA:아처(5차), 통/무/지/정/매: 16/46/75/100/85) 하관대부 → 춘관아경 →대사공 ◆ 기원전 406년
동호 출신의 목동. 조선의 군마 개량을 위해 영입된 인재로 원래 영입될 의향은 없었으나 정치력 100이란 경이적인 스텟을 보고 스레민들의 만장일치로 등용. 예맥도 아니고 이민족인 동호 출신이다보니 악조를 비롯한 다른 관리들에게 백안시당하고 있었으나 기라에게 내정관으로서의 자질을 인정받았고 춘관아경으로서 공손기 밑에서 일하기도 하였다. 초기에 상태가 처참했던 조선의 군마를 유목민의 것과 비교해도 일부 부문에서는 오히려 앞서는 경지까지 도달시킨 공이 있다.[35] 유목민 하위층 출신이라는 절대적인 벽과 이로 인한 멸시에도 불구하고 의연함을 내비쳤지만, 그 실력을 눈여겨본 기라에 의해 육경의 일원으로 올라섰을 때에는 역시 그 설움은 기억하기 때문인지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요서회랑 도로공사를 맡아 진행하던 중 사망하였는데, 60세가 되도록 결혼을 하지 못했으며 그 이유가 출신 성분때문이라는 이유가 밝혀져 다시 한 번 스레민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후일 공적을 인정받아 공덕비가 세워졌다.
  • 백두(AA:샤를로트 뒤누아, 통/무/지/정/매: 56/28/98/94/82) 대사공 겸 정주상 ◆ 기원전 403년
본래 정주상으로 양평에 상경한 지방귀족. 이 때문에 사투리가 외국어 수준으로 심했다. 대량살상병기(...)를 만들어낸 공수속의 악명(...)을 듣고 이를 따지려고 찾아왔다가 이를 보고 재미있겠다고 끼어든 조선후에 눈에 띄어 등용된 인재.[36] 동호에게 농사와 관련된 인재를 보내준 답례로 동호 기병 1만을 제공받는 등의 공적으로 세우고 하간의 치수를 감독하는 일을 맡다가 병으로 급사하면서 조선측 네임드 중 첫 번째 단명이라는 타이틀을 획득했다. 5번째 1000번 효과로 조선에 합류한 인물. 지력은 90-100[37], 나머지는 1-100으로 돌렸는데 정치 94에 매력 82가 나왔다.

3.2. 기원전 402~373


  • 고비(AA:레비(블랙 라군), 통/무/지/정/매: 90/80/85/81/92) 별부사마 → 전장군 → 대사마대장군 ◆ 기원전 397년
공양군 고거의 차녀. 군부의 명문가면서 동시에 양평 뒷골목의 큰누님(...)이라는 이율배반적인 타이틀을 거머쥔 인물. 위장군 악조가 은퇴한 직후 대사마대장군을 겸직한 승상 기라 대신 실질적인 군부의 대표 가 되었다. 이후 기라가 승진할 때 무관들의 불만을 해소하는 것을 겸해 대사마대장군이 되었다. 기토 때에 동호에 외교를 위해 보내졌는데, 오랜 세월의 중간관리직 경험(...) 덕분에 원만한 진행과 함께 여러 정보를 얻는 등의 행운이 있었다.
하지만 343년에 요서도로 공사를 감찰하러 갔다가 사고사로 사망했다.(...)
  • 문성군 기라(AA:마슈 키리에라이트, 통/무/지/정/매: 87/82/93/100/82) 지관대부 → 춘관대부 → 동관아경 → 승상 → 승상 겸 대사마대장군 → 조선상 ◆ 기원전 396년
충문군 문예와 기취가 눈여겨 보고 키워낸 젊은 천재, 15살에 나이에 총명하단 소문을 듣고 충문군 문예가 만나보려고 했다가 "조선상께선 나라의 인사를 맡고 있으니 사사로이 만날 수 없다."라는 이유로 이를 거절했고, 문예 역시 조선의 관료라면 응당 이래야 한다고 칭송했다.[38] 빠르게 능력을 인정받아 문예, 기취, 고구 등과 조선의 변법을 진행하고 조선상의 비서로 신설된 승상으로 내정받는 등. 조선 2세대 인재풀의 대표격 인사로서 활약. 또한 조선으로 임관을 청하러 온 공손앙과의 설전에서 공수속과 유이하게 승점을 따내는 등 천재라는 위명을 다시 한 번 증명했다. 이 특출한 능력으로 인하여 대사마대장군과 승상을 겸직하는 과정에서 군정권이 대사마대장군에서 승상 쪽으로 붙는 문제가 발생하였으나, 기취의 은퇴 이후 승진을 미루면서 해당 문제를 1년도 안되어 처리하는 등, 조선을 위해 철저히 헌신해 170어장까지도 쓰이는 삼공 체재를 완성해냈다. 이후에도 조선을 위해 헌신하다 340년에 사망.[39] 시호를 문성군이라하였다.
공양군 고거의 삼녀. 조선의 독설가. 모두까기 인형. 자기 성미에 맞지 않으면 일단 까고 보는 핵이빨의 소유자.[40] 이렇듯 내정관으로서의 능력은 좋은데 성깔이 하도 뭐같아서 오죽하면 승진이 누락될 때가 있었는데, 성깔은 세간에 익히 알려져 원인으로써는1%의 비율도 차지하지 못할 정도. 다만 이 계열의 끝판왕인 공손앙과의 설전에서는 찍소리도 못하고 논파당하는 다소 안습한 모습을 보이기도... 선천적으로 몸이 약한 탓에 과로+지병이 겹쳐서 사망. 조선 네임드 중 두 번째 단명
  • 고위군 공손앙(AA:나가토 유키, 통/무/지/정/매: 91/81/100/100/70) 추관대부 → 추관아경 → 대사구 -> 어사대부 ->. 승상 ◆ 기원전 390년
중국 3대 개혁가이자 법가의 시조인 그 상앙 맞다. 원 역사대로 위나라의 상방 공숙좌 밑에서 오랜 기간 있다가 공숙좌가 죽기 직전에 위앵에게 추천되는데, 정작 공손앙은 조국인 위(衛)나라를 침탈한 위나라를 싫어했기에[41] 일부러 위후를 도발하여 그의 분노를 샀다. 이후 공숙좌가 죽자 조선후 기이와의 인연으로 조선에 출사, 당시 공손앙의 소문을 들은 조선의 주요 관리와 학자들과 설전을 벌였는데 그 중 기라와 공수속과의 대담을 통해 자신의 사상에 보완할 점을 깨닫고 조선에 머물것을 결심. 다짜고짜 전권을 달라고 했던 위후 때와는 달리 자신에 맞는 관직을 요청하면서 원 역사보다 조금 유해진 모습을 보였다. 다만 청구(지금의 한반도) 개척민을 상대로 실적을 내지 못한 관료들을 무자비하게 처형[42]하면서 여전히 과격한 법가의 시조다운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임관한지 10년 째 되던 해에 법을 지역과 상황의 변화에 따라 다르게 해야 한다는 점을 받아들였고, 동시에 자신의 사상이 일방적으로 받아들여지거나 배척되지 않는 등으로 인해 다른 사상과 과격한 학술적 교류를 받아들이는 정도까지 유해졌다.(?) 이후 화폐개혁등으로 여러모로 활약하다 어사대부로 승진했지만 전공 문제로 승상이던 기비와 자리를 바꾸었다. 333년 기이와 공숙좌의 환상을 보면서 편안하게 사망. 시호를 고위군이라고 하였다.
  • 이세(AA:윌리엄 매사추세츠, 통/무/지/정/매: 93/99/96/100/95) 춘관대부 → 춘관중외대부 겸 정서장군 → 어사대부 -> 조선상 ◆ 기원전 388년
연나라 출신의 신흥 사(士) 계층 출신. 기이 대에 대대적으로 시행한 구현령으로 등용된 인재로 능력 없이 고위직을 차지하는 귀족들을 혐오하는 성향이 있다.[43] 임관 직후에는 승상 기라 밑에 있었다가 상당군 침공 이후 벌어진 중도 방어전에서 5천으로 4만의 위군을 막아내는 공훈을 세워 중외대부 겸 정서장군으로 승진해 두각을 드러냈다. 이후 적성상의 이유로 문인을 승상으로 올리는 과정에서 완성된 삼공 체제의 일원으로써 어사대부에 제수된다. 이후 조선상이 되어서 은퇴할 작정이였음에도 군주교체 시기를 지켜주고 은퇴 후에도 조선상 고정의 치사를 권하는 등 활약하나 죽을 때 별로 눈에 띄는 공적이 없다는 이유로 추존되지는 못했다.
  • 악월(AA:유즈키 유카리 통/무/지/정/매: 90/71/99/77/94) 진남장군 → 하관 중외대부 겸 진남장군 -> 위장군 ◆ 기원전 385년
전 위장군 악조의 딸. 조선의 남쪽 군무를 담당하는 진남장군 직에 제수되었다. 천부적인 재능은 기책을 비롯한 지력이었지만, 집안 분위기 상 병법을 공부한 덕분에 무난하게 무관이 될 정도의 통솔을 갖추게 되었다고. 군대는 실력주의라는 것에 대해서는 어찌저찌 넘어가지만 자신의 가슴에 대해 말을 함부로 한 경우는 용납하지 않는다(...) 제나라의 주도하에 대 초나라 합종군에 조선측 지휘관으로 참전했으나 타국의 지휘관보다 지위가 낮다는 이유[44]로 병력을 차출당하는 등의 부당대우를 받았다. 후에 제후 전인제가 악월을 불러 직접 위로하였는데 여기서 타국의 복잡한 속사정을 눈치채고 전인제에게 고생이 많다고 말한다. 이후 고비의 빈자리를 태자였던 기유가 채우자 위장군으로 승진해 실무를 돌보게 되었고, 이후에도 활약하였지만, 331년에 곽구, 아무로 등과 도매급으로 묶여서 사망했다.(...)
  • 고정(AA:타카마치 나노하, 통/무/지/정/매: 100/97/100/97/55) 열현령 → 진양현령 → 하관대부 → 하관대부 겸 별부사마 → 하관 중외대부 겸 별부사마 -> 하관상경 -> 승상 -> 조선상◇ 기원전 384년
원래 세의 중도 방어전에서 등장한 이름없는 모브 현령이었으나 훈련도가 낮은 7천의 지원군으로 4만의 위군 배후를 기습하여 혼란상태에 빠지게 만들고 결국 퇴각하는 위군을 급습하여 승리를 따내는 등 화려한 전적을 과시하며 등장했다. 조나라 평민 출신으로 현령까지 올라온 입지전적인 인물이며 전후 공적으로 진양현령으로 승진했고 대총재 월과 인맥을 쌓는 데 성공. 현재 하관대부로 중앙에 진출, 경력과 공적을 인정받아 군령, 군정 양쪽 모두를 담당하고 있다. 악월과 함께 대 초나라 합종군에 참전후 중외대부로 승진. 이후 임호 토벌전 등에서 활약하고, 신인재 카이두와 대담을 통해서 황제국으로 가는 길을 발견하고 카이두를 탐내거나(...), 요하도로를 세우는 데 관여하는 등 다방면으로 활약하다가 은퇴했다. 그런데 80세가 넘도록 살아남는 바람에[45] 최초로 어장주가 공개적으로 수명다이스를 굴렸고, 거기서 또 크리가 터지면서 생존, 85세까지 생존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로써 기식의 치세에 태어나서 기이,기토,기유 세 군주를 섬기고 기설이 친정에 나서는 것도 목격하는 전후무후한 위업을 세웠다. 다만 본인은 친구인 안타가 죽고 유망주라고 생각했던 카이두가 먼저 가는 걸 보면서 기나긴 수명 때문에 슬퍼하는 중. 게다가 손녀가 뜻이 꺾이고 자기 자식들이 죽는 것도 봐야했다. 여러모로 장수가 독이 된 케이스.
  • 아무로(AA: 아무로 레이 통/무/지/정/매: 95/85/79/74/54) 진동장군 ◆ 기원전 383년
본디 흉노의 좌대당호로, 흉노가 동호 및 그 외 유목 세력에게 세가 꺾이자 이에 실망한 전사들을 6천명이나 모아서 조선으로의 귀부를 계획하였다. 흉노의 고위직으로써 35살의 나이까지 온 덕분인지, 그의 말과 행동에는 유목민의 색채가 짙다.[46] 이때 이를 사전에 조선에 알리는 과정에서 흉노의 밀사라는 위장으로 접근하였고, 중간 경로에 해당하는 동호에게 자신이 아는 흉노의 군사적 정보를 모두 넘기고 길을 빌리면서 동호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으며, 같이 데려온 전사들을 그대로 지휘하는 식으로 진동장군에 임명된다. 이후 기토의 예맥 순행에 참여하는 등 진동장군으로써 일하다가 331년에 사망. 이후 사병의 색채가 강하던 진동군은 딸인 크라우가 계승한다.
  • 평양군 안타(양타) (AA: 페이트 테스타로사 통/무/지/정/매: 100/95/91/91/61) 하관 중외대부 -> 춘관대부 -> 춘관 중외대부 -> 대종백 -> 어사대부 -> 조선상 ◆ 기원전 381년
안월의 딸이다. 고정하고는 애초에 파장이 맞는 사이로, 등장이 좀 늦었지만 어쨌든 동갑처럼 지냈다. 항해 관련 감독관으로 기유에게 임명된다. 하지만 자기가 담당하던 요서도로 공사에서 대사마대장군이 사고사하는 대참사가 일어나고 대부로 강등, 이후 춘관에서 다시 캐리어를 쌓기 시작했다. 장의의 부추김을 받은 고질의 반대로 6경에 오르지 못 할 뻔하지만, 당시 고위직 대부분이 반대해서 대종백으로 승진에 성공한다. 이후 청구의 문제를 무난하게 해결하는 등 활약해서 어사대부로 승진하였다. 원래라면 조옹이 조선상이 되어야하나 서류업무가 싫다는 이유로 조옹이 거부하자 대신해서 조선상이 되었다.
60세에 은퇴한 이후 어머니 때부터 인연이 있던 청구의 평양으로 이주해서 씨를 양씨로 바꾸었다. 312년에 사망. 그 시호를 평양군이라고 하였다.
  • 곽구(AA:라크스 클라인, 통/무/지/정/매: 99/73/94/70/70) 학사→ 별부사마 -> 전장군 ◆ 기원전 381년
곽달호(스어)의 둘째딸, 진양현령 고정하고 술친구. 별부사마로 제수되면서 공병대를 맡게 된다. 제후 전인제의 패구 할양요구에 대응하여 태자 기유가 계획한 패구 주민들의 통계조작(?)을 실행하였다. 이후 안문관을 쌓는데 기여하는 등 활약하나 331년에 사망한다.
  • 기화(AA:타치바나 아리스, 통/무/지/정/매: 87/74/92/99/40) 지관대부 ->지관아경 -> 대총재 ◆ 기원전 380년
전 대사마대장군 기황의 딸. 기황의 다소 문란한 성생활에도 불구하고 적법한 황의 상속녀로써 등장하였다. 지관에 임관되면서 대사도 스어의 소문을 익히 들었기에 경계하는 모습도 보여주였지만, 스어가 은퇴하면서 다행히도 기라와 같은 일을 경험하지는 않게 되었다. 여러모로 조선을 위해서 헌신하였지만, 하필이면 327년에 군주교체, 칭왕문제 등으로 한창 바쁠 때 죽어서 제대로 애도도 못 받고 일 늘었다는 반응만 받으며 사망(...)
충문군 문예의 손녀. 작중 조선 최초의 어사대부이다. 위나라의 재침을 대비 겸 경고로 춘관대부 세를 정서장군으로 올릴 것을 대총재 월에게 건의하였다. 관운이 기묘하게 좋은데, 제나라 첩보 때 추기와의 연줄을 만든 것을 시작으로 새로이 분리된 감찰기관의 장으로써 올려졌고, 관제 개혁으로 해당 기관 및 그 장의 지위를 상승시키는 과정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지위가 상승하여 실질적으로 승진하였다. 여기에 기라의 안배로 인하여 어사부에서 승상으로 전직한(?) 것은 덤. 승상에 취임한지 얼마 안 돼서 걱정하던대로 과로로 사망. 논란이 있었지만 가문빨(...)로 시호를 따냈다. 시호를 온간군이라 하였다.
  • 기비(AA:실비아(괴물왕녀). 통/무/지/정/매: 88/74/99/76/67) 춘관대부 -> 승상 -> 어사대부 ◆ 기원전 379년
강의 뒤를 이은 조선 유가 대표. 성을 보면 알겠지만 공족 출신이다. 조선 유가의 명사 자격으로 위앵을 설득하여 냉각된 관계를 완화시킨 공이 있다. 마위가 사망한 이후 춘관 상대부로 임관했는데 공족 신분과 조선 유가의 대표라는 지위도 있고 공적도 공적이라 지위는 상대부지만 대종백 외엔 춘관 내에서 그녀를 건드릴 이가 없을 정도로 위상이 높다. 결국 대종백도 거치지 않고 바로 삼공에 오르지만, 적성이 맞지 않는 승상부를 고집하다가 결국 어사대부였던 공손앙과 위치를 바꾸기도 했다. 326년 사망.[47]
  • 무양군 고질 (AA:야가미 하야테 통/무/지/정/매:99/93/63/51/50 ) 하관 중외대부 -> 위장군 -> 대사마대장군 ◆ 기원전 373년
사고사로 죽은(...) 고비의 딸. 어린 나이에 임관해서 실력으로 중외대부까지 간 전적이 있었지만, 안타의 승진을 방해한 건으로 찍히고,[48] 뭣보다도 대사마대장군인 조옹이 몇 십년을 대사마대장군 직위에서 뻐기는 덕분에 위장군에서 대사마대장군 자리 차지하는데 굉장히 오래걸렸다.(...) 이후 그 조옹이 너무 막나가려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탓에 서로 신경전을 벌이는 사이가 되기도 했지만, 후일 논공행상에서 유서깊은 명문의 짬 내지는 빅 데이터로 적절한 이미지메이킹을 구사해 이런 쪽에 아직 서툰 조씨 문중 내지는 조옹을 상대로 영원한 승리자가 되었다.
to가 부족해진 참치들이 치사를 권유했을 때 거부해 원성을 사기도 했지만, 산동대전에서 비비오를 보내 제수전투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냈고, 참치들은 중원최고명장이라고 칭송하며 손바닥을 돌렸다(...). 진나라 왕위계승전쟁 때는 진직도의 이용에 반대했지만 조옹이 기어이 성공시키는 것을 보고 은퇴. 얼마 안가서 낙마로 사망했다.[49] 시호는 무양.

3.3. 기원전 372~343


  • 지로 (AA:로이 머스탱 통/무/지/정/매: 96/98/85/97/73) 천관대부->동관대부->천관아경◆ 기원전 369년
극초반부에 등장한 를르슈의 후손. 준수한 능력치를 가졌으나 기유가 빽으로 있는 후배 비의에게 추월당한 것도 모자라서 비의가 승상직에 올라 상관이 되기도 하는 등 관운이 별로 좋지 못하였다. 말년에 조선 전역에서 불러모은 대연회를 기유가 주최하자 자기 커리어의 마지막 일이라고 생각해 전력을 쏟아부었지만, 이 과정에서 양평의 왕족들을 건드렸고, 결국 어사대부로 취임한 기지에게 처음으로 탄핵당하였다. 게다가 이 뒤로 자식들은 to에 선발되지도 못하고 자신은 기지에게 돈을 뜯기는 등 고생했다. 심지어 몰년은 확정되지도 않은 채 명을 다한다. 안습(..)
  • 비비오(투제[50]) (AA:타카마치 비비오 통/무/지/정/매: 97/96/99/80/80 ) 운중태수 -> 진북장군 -> 우장군 -> 좌장군 ->위장군 -> 대사마대장군 ◇ 기원전 366년
흉노가 조선령 운중을 공격해올 때 크리로 나온 구원군. 조옹의 측근이였다던 인망과 지휘력을 이용해 흉노의 지휘관을 죽이는 업적을 세우면서 운중태수로 임명됬다. 이후 상사이던 조옹의 추천으로 진북장군에 임명됬다.[51]
밸런스 잡힌 능력치[52]와 적절한 위치가 결합되어서 중앙에 온 뒤로는 위나라 구원전이나 산동대전에서 피날레를 장식하는 대활약을 펼치고 중원계나 요동계가 아닌 최초의 삼공이 되었으나, 후일 벌어진 동초원대전에서의 자신의 전후협정에서 단기적으로 평화를 갈구한 나머지 차질을 빚은 것을 계기로 자신이 싸움에 질렸다는 것을 깨닫고, 은퇴를 결심하였다. 은퇴를 결심한 사정에서 알 수 있듯이 누구보다도 돌격으로 성과를 낸 일이 많은 맹장이였지만, 의외로 평화주의자다.
  • 무령군 조옹(AA:호시가미 제나, 통/무/지/정/매: 99->100(진)/99/77/68/61) 하관 중외대부 겸 진북장군 -> 대사마대장군 -> 조선상 ◇ 기원전 364년
대군 조어의 장녀. 원 역사대로라면 기원전 340년에 출생이지만 이미 역사가 바뀌어도 한참 바뀌었다는 다이스갓의 농간(?)으로 기원전 364년 출생이 되었다.[53] 아버지인 대군 조어와 조선 공실과의 인연 덕에 동갑내기인 태자 기유와는 거의 사촌남매와 가까울 정도로 친밀한 사이.
조선 왕실의 비호를 받으면서 임호 토벌을 시작으로 여러 전투에서 승승장구해 조선상 자리까지 올랐으며 제나라를 반토막내 밀어붙이고 영사의 사망 후 초원의 우회로로 진나라에 들어가 영직과 영직을 지원하던 초군과 친초 세력을 박살내고 영탕을 진왕으로 옹립하는 등 군사 부분에서 맹활약했다. 그러나 싸움 잘하는 뇌근 전투형 개그캐 성격이 강해서 묻히지만 조어가 죽기 전 기유를 기식으로 착각하고 가문원들을 살려달라고 빌면서 죽은 것을 본 것, 조씨 가문이 고씨나 문씨에 비하면 신흥세력이라는 점 떄문에 은근 열등감과 트라우마가 있다. 주로 고질과의 충돌에서 이런 면모가 드러난다. 기설이 대에 들어서서는 가문의 이익과 국가의 이익이 충돌해 딜레마를 일으키기도 하고, 왕이 되고부터 정치가로써 성장하는 기설을 보고 미묘한 감정을 보여주는 중.[54] 이후 조하의 6경 취임을 담보로 은퇴, 대군에서 머물고 있지만, 조선이 합횡군에게 패배한 후 인심을 사는 모습을 보여 참치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 명역군 카이두 (AA: 카이즈카 이나호 통/무/지/정/매: 100/89/95/91/68) 동관대부 -> 추관 중외대부 -> 대사구◆ 기원전 359년
공손앙의 제자. 이름에서 보이듯이 임호 기미부주 출신이다. 어릴 때부터 법가 사이에서 길러졌다는 듯하다.[55] 기유의 눈에 들기도 했고, 황제국이란 명칭을 처음으로 제시해 고정이 눈독을 들이기도 하는등 많은 기대를 받았다. 조선에서 지방공무원들은 여태껏 한자가 안 통하고 장계를 올리는 방법도 잘 모르는 지역이 많았는데[56] 이를 해결하는데 많은 신경을 기울여 성공시켰다. 하지만 관학을 세우는데 재정문제로 실패하고 제나라의 풍토가 조선과는 너무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 대에는 도저히 기본조차도 끝낼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고 결국 관제개혁이나 관학의 성과를 보기도 전에 죽어서 참치들의 슬픔을 불러일으키도 했다. 시호는 명역.
원역사에서 연나라를 통채로 먹을 뻔한 그 자지다. 원래는 이름없는 양평 왕족[57]으로 등장했지만, 지로를 탄핵하면서 네임드화했다.[58] 어사대부에 왕족이라 기유의 측근 중 하나로써 합종군을 성사시키는 등 활약했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나오던 뒤가 구린 행보들답게 산동대전 승전안에 뇌물을 받고 임치를 넘겨주려한 반역죄로 처형되었다.
  • 크라우 (AA:벨벳 크라우 통/무/지/정/매:94/90/88/98/61 ) 진동장군 ◇ 기원전 357년
아무로의 딸. 곽전과는 안다(의형제) 관계이다. 유년기에 무슨 일을 겪은 것인지 상당한 인간불신에 시달렸기에 안다인 곽전과는 초반에 여러모로 마찰이 있었던 듯 하지만 어떻게든 봉합했다. 이후에는 진동군을 이끌면서 개마고원을 개척하는데 시간을 보냈고, 개척이 끝나자 직위를 가현에게 물려주고 315년에 은퇴해서 집에서 놀고있는 중. 지극히 후일이긴 하지만, 자신의 수하 중 탐관오리 짓을 하는 녀석을 제거함에 있어 양수의 손을 빌린 인연이 있다.[59]
  • 비의 (AA: 무사시(경계선상의 호라이즌) 통/무/지/정/매: 4/42/96/98/60) 한단대부 -> 동관대부 -> 동관 중외대부 -> 승상 -> 조선상 기원전 356년
원역사에서는 호복기사를 지지하고 오랫동안 조나라의 내정을 돌본 전적이 있는 그 비의이다.[60] 위나라와 진나라의 화의를 이루기 위해 태자 시절의 기유가 이세의 추천으로 알게 되면서 급격히 관운이 펴졌다. 실적과 빽으로 31세에 승상 지위에 오르고, 위세가 대단히 높던 조옹에게 일침을 놓아서 조옹의 눈에 들기도 했다. 하지만 대사마대장군은 군대를 이끄는 관직이고 조선상 조옹은 내정은 영 젬병인데다가 좋게도 나쁘게도 상식을 파괴하는 사람인지라 실질적으로 내정의 총책임자로써 고생 중(...)[61] 신도의 제자이기도 하다. 결국 조선상으로 취임했지만, 얼마 안되서 합횡군에게 패전해 재정이 정상화될려는 찰나에 다시 적자로 돌아설 예정이기에 고생길이 열렸다.(...)
  • 곽전 (AA: 아사다 시노 통/무/지/정/매: 90/93/87/85/88 ) 정동장군 ->전장군 -> 하관상경-> 위장군-> 대사마대장군->위장군 기원전 356년
곽구의 딸. 크라우와는 안다 사이다. 선비의 상황이 수상함을 이유로 이례적으로 진동장군이 있는데도 정동장군으로 시작했다. 서하대전에서 활약하는 등 활약이 있었지만 대사마대장군과 위장군 자리를 몇십년동안 지키던 조옹과 고질 덕에 승진이 정체되어서 승진이 늦어졌다(...) 그래도 대사마대장군인 비비오가 결국 은퇴하여 조선 최초의 예맥계 삼공이 되었다...만 조선군 최초로 패장이 되어 그 책임을 지고 강등. 다시 위장군이 되었다.
  • 지헌군 악구(字는 지) (AA: 메구밍 통/무/지/정/매: 90/63/98/100/73) 지관 중외대부 -> 춘관아경 -> 대종백 ◆ 기원전 354년
의외로 실존인물로, 악지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무가의 명문가인 악씨답지 않게 문관인게 특징적. 여러모로 안정적인 능력치와 지위덕에 외교관으로 활약중[62]
그런데 분명히 능력치는 무척이나 준수하고[63] 능력 있는 편이지만 뭔가 허당끼가 넘쳐서 참치들에게는 못 미덥단 취급이다.(...) 기원전 303년에 졸하였는데, 자신의 자만을 이제야 넘어설 수 있게 되었음을 아쉬워했지만, 자신이 걸어왔던 길들이 다른 이들에게 이정표가 될 수 있음을 깨닫고 편히 눈을 감았다. 시호는 지헌군으로 되었다.

  • 하기 (기기) (AA: 히이라기 시노아 통/무/지/정/매: 98->100/94/93/100/42) 동관대부 -> 동관 중외대부 -> 하관 중외대부 겸 별부사마-> 하관상경-> 어사대부 기원전 352년
기화의 딸. 원래 이름은 기기인데 기유가 이름이 이상하다는 이유로 하씨를 내려줘서 하기라고 불리게 되었다(...)[64] 원래는 동관에서 일을 했지만, 묵가와 일하면서 군사에 재능이 있단 사실이 밝혀져서 하관으로 자리를 옮겨 승진했다. 이후 산동대전에서 세운 공과 선임 어사대부가 처형된 덕분에 어사대부로 발탁됬다.[65]
  • 문소 (AA: 하네사키 아야노 통/무/지/정/매: 90/89/95/91/60 ) 천관대부 ->천관 중외대부 -> 천관아경 -> 대총재 -> 승상 기원전 349년
오랜만에 나온 문씨의 후계자. 출사하지 않았던 문부의 딸이다. 문씨가 최고명문가임을 고려하면 승진속도가 그리 빠른 편은 아니지만 이는 의도한 것으로 너무 눈에 띄는 것을 피하면서 올라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66] 실제로 옥로를 상대부직에 꽂아넣는 걸로 그 힘을 보이기도 했다. 이후 감무를 상대로 곡부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대총재로 승진했다.
  • 이태 (AA: 나나리 람페르지 통/무/지/정/매: 36/91/87/99/66 ) 어사부 어사 ->간의대부 기원전 349년
사구정변에서 조무령왕을 죽인 그 이태다. 처음은 무력이 99가 나와서 사구정변은 사실 이태가 조무령왕을 때려죽인거냐는 개드립도 나왔지만(...)문관인데 이건 좀 아니라 판단한 어장주가 다이스를 굴려서 정치와 무력을 바꾸었다. 조옹이 기유에게 추천되어어사부에 등용되었다.(...)[67] 빽 덕분에 어사대부 기지가 편의를 봐주어 간의대부가 되었지만, 기지가 처형당하자 기지가 뒤를 봐준 것을 빌미로 협박되어서(...) 조옹의 삼보 취임을 반대해 조옹에게 찍혔다. 하지만 덕분에 문씨나 고씨의 눈에 들기도 했다.[68]

3.4. 기원전 342~313


  • 옥로 (AA:루비 로즈 통/무/지/정/매: 75/98/63/91/79 ) 춘관대부 -> 동관 대부 기원전 340년
청구출신이지만, 청구의 귀족과 문소와 술 먹고(...) 의기투합해서 자기 딸을 맥성에서 교육시키기로 해서 맥성에서 교육을 받았다. 이 때 악의와 친해지기도 했다. 유의관[69]으로 취직해서 악의에게 부탁해서 산동대전에 참여할려고 시도하는 등 출세를 위해서 이리저리 노력해보지만 구직활동에 실패하는 안습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후 문소가 힘을 써서 춘관 상대부로 취직하지만 적성이 안 맞아서 어사대부인 하기에게 찍혀서 강등되는 불운을 겪기도 한다.임치군 태수로 발령난 문소와 같이 임치에 가서 활약 좀 해보나 싶었는데 양수가 해결하는 바람에 묻히기도 했다(...)[70] 하지만 이후 매사매골로 유명한 곽외와 같이 유언을 남기려던 기유와 기설 부녀에게 난입해서 천하를 손에 넣으란 말을 해 기설의 측근이 되었다. 그 다음부터는 관운이 펴서 맥성운하를 만드는 데 활약하고, 강등 전적 때문에 옥로를 나쁘게 보던 하기와 화해했다. 하지만 임치에 부임하고 제장성 공사가 진척이 잘 안되고, 후임인 극신과 싸우는 등 영 일이 안 풀리며 임치와 뭔가 맞지 않음을 증 명했다(...). 이후 극신과의 다툼과 나름 안정된 임치군의 상황을 고려해 다시 중앙에 복귀했다.
원역사의 제합종군을 이끈 그 악의. 서하대전에서 임비와 맞붙는 모습을 보이거나 주변정리에 동원되는 등 활약했고, 조옹에 눈에도 든 모양. 산동대전에서는 조옹의 부관으로써 활약했고, 별부사마 직을 받았다. 170어장 시점으로는 사수군 태수로써 반란을 조기 진압하는 등 훌륭하게 일하는 중. aa보정에 원역사 보정으로 인해 통제가 불가능한 to외 인재임에도 무척이나 안정적이고 유능해서 역으로 to에 못 들어가고 있었으나, 악구의 죽음과 때맞추어 터진 태산 장성 동부 부근의 위기[71] 로 인해 스레민들의 만장일치급 간택을 받아 들어가게 되었다.(...)
  • 고나[72] (AA:마이 나츠메 통/무/지/정/매: 100/97/99/94/70) 하관 하대부 -> 하관 중외대부 기원전 337년
무양군 고질의 양녀. 본디 고질의 친딸은 아니고 조카뻘이지만, 그 재능 때문에 고씨 문중 내부에서 차기 당주로 내정되어 있었다. 이러한 관계로 고질의 공이 후계자(내지는 자식)의 등용을 보장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자, 만일 자식이 아니라서 불가하다면 양녀로 들여서라도 천거하겠다는 의지를 보여 장왕이 이를 가납한 것.[73] 그녀의 대에 이르러서야 고씨 문중은 조선 내의 외국인 첩자를 솏아내는 것을 겸해서 받는 모든 뇌물을 먹고는 입을 싹 닫아버리는(...) 전통이 있음이 밝혀졌다. 제나라가 태산장성 동부를 장악할 당시 이에 대응한 14만 규모[74]의 무력 시위 과정에서 곽전과 함께 군대를 나눠서 맡았다.
  • 가현(블레이크) (AA: 블레이크 벨라도나 통/무/지/정/매:46/32/89/98/82 ) 진동장군 -> 춘관 중외대부 -> 천관 중외대부 기원전 333년
크라우의 딸. 이 때 진동군 세습이 사실상 끝났다. 가문빨이 있었지만, 어린 나이에 중외대부라는 높은 지위를 얻고 제북태수 일을 잘 해내는 등 여러모로 승승장구 중. 출생지도 그렇고 아무래도 어머니랑 가까운 곽전과의 인연이 꽤 깊다.
  • 양수(안수) (AA: 테레사 테스타롯사 통/무/지/정/매: 97/100(일기당천)/지력 100(대지약우)/90/100(침어낙안)[75] 춘관대부 -> 지관대부 ->어사중승 ->소부 기원전 333년
안타의 딸. 크리 삼연타로 트레잇이 붙은 100 능력치가 셋이나 나온 유망주이다. 능력과 빼어난 외모 덕에 젊은 나이에 to에 들어와서 임치의 문제를 관정분리를 도입해 해결하는 등 활약해 지관으로 자리를 옮겨서 임치군의 태수가 되었다. 이후 임치군수로써 제장성 공사에서도 대활약을 하면서 어사대에 들어와서 30대가 되기도 전에 아경 급인 어사중승이 되었다. 능력치가 무척이나 높은데다가 무력이 높아서 장수가 예정되있기에 참치들의 기대를 한 몸에 사고 있는 인물. 특이하게도 조선에서는 비주류인 도가를 배운모양.다만 관직에 들기 전에는 의기 등으로 인해서 크라우의 사람 중 일부 부패한 자를 단신과 노궁 하나로 무쌍을 찍으며 처단 내지 참교육(...) 끝에 성불구자로 만들었다.
[76] 염파랑 의기투합해 친하다는 듯하다.
  • 염파 (AA:도몬 캇슈[77], 마스터 아시아[78] , 통/무/지/정/매: 100(진)/98/54/81/86) 정남장군->잡호장군 기원전 329년
원 역사적으로 조사와 엮인 일화가 많은 그 염파가 맞다. 구 제나라령을 안정화시키는 과정에서 비의가 양수의 비서 격으로 붙여주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했고, 비비오가 은퇴하면서 약간 못 미더운 부분이 있는 극신을 제치고 TO에 들어간다. 상당히 성격이 거친 것으로 묘사되는데 기설이 이런 모습을 보고 팬이 되었다는 묘사가 있다. 아내만 없었으면 후궁(...)으로 삼았을 것이라고. 첫 전장인 조가에서 활약했지만, 복양의 배신으로 합횡군에 대패했기에 강등. 잡호장군이 되었다. 안타에 이어서 곽전가 함께 두번째로 강등된격.
  • 진진 (AA:키쿠치 마코토 통/무/지/정/매: 64/62/97/93/75 ) 지관상대부 기원전 326년
법가 쪽에서 조정에 최소한의 영향력 확보를 위한 목적을 겸하여, 법가의 본래 목적에 맞는 자질을 가진 이를 소개하여 등장. 희성진씨로 진문공의 먼 후손이다. 맥성의 운하 및 확장 등을 담당하는 중이다.
  • 조하 (AA:아라라기 코요미 통/무/지/정/매: 27/82/86/95/91 ) 하관상경->어사대부 기원전 325년
무령군 조옹의 둘째. 원역사에서의 조혜문왕.
조옹의 은퇴조건 협상에 의해 낙하산인사로 하관상경에 취임했다.
원래는 대사마대장군을 분리시키고 거기 조하를 앉힐 생각이였지만, 패전 후 조씨의 영향력을 사용해서 북방을 안정화시켜야하고곽전의 강등으로 공석이 된 대사마대장군 직을 하기가 수행해야했기에, 어사대부로 취임했다. [79] 덕분에 26세에 삼공이 되어서 어머니로부터 최연소 삼공이라는 타이틀을 뺐어왔다.

4. 기타 인물


압록강 근처에 살던 소영주로 고거가 찾아가 사관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공문십철 중 한 사람인 자하가 세운 자하학파의 유생. 제태공 전화가 조선에 보낸 유생이며 조선 유가의 기틀을 세운 인물. 근데 정작 본인은 찬탈자인 전화를 싫어하여 제나라를 뛰쳐나왔다. 자하학파 내에서도 이단아에 속하는 인물로 중화의 전통적인 화이관을 부정하고 패도를 추구하였으며 무능한 주 왕실을 대신할 새로운 천자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훗날 조선 유가의 대표이론인 인의패도론을 최초로 주창한 장본인.[80] 조선을 가리켜 싹수가 있다고 평가하고 기식을 비롯한 조선의 지도층들에게 유학을 전파하였다. 그 중에서 대사공 백두를 눈여겨 보고 있었는데 백두가 급사하자 이를 매우 슬퍼하였다. 이후 제자인 하관박사 강에게 학맥을 잇게 하고 출연 끝.
송나라 묵가 지부에서 파견된 묵가인이자 중원의 천재 공학자 공수반의 후예. 수성을 중요시하던 묵가와는 달리 공성이 전공분야인 묵가의 이단아로 '천하'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 스스로 조선에 출사하였다. 조선의 기술력을 책임지는 천재 공순이로 노나라 정벌때 신형 공성병기를 선보여 제나라를 비롯한 중원을 놀라게 하였고, 하간군 요새화를 1달만에 후딱 처리하면서 제나라를 또 놀라게 했다.[81] 단순한 공순이가 아니라 끊임없이 천하란 무엇인가를 갈구하는 철학가로서의 면도 진해서 공손앙과의 설전 와중에 천하란 과연 뭐냐고 물어서 그 공손앙을 데꿀멍하게 만들었다. 말년에는 공수추에게 조선 묵가를 맡기고 천하를 확인하기 위해 서쪽으로 떠났다.[82] 그녀의 마지막은 세상을 계속해서 알려다 암살을 당한 것이다.
공수속의 나이 차이 많이 나는 동생.....이지만 사실은 딸이라는 출생의 비밀을 지니고 있다. 전공분야는 함선 건조. 다만 모친만큼의 괴짜는 아니라, 당시 시대 수준의 세계관을 확고히 지니고 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요서회랑의 그 뻘밭에도 상당히 수월하게 도로를 낼 수 있는 묵가의 비급이 존재한다(...)
원 역사의 조숙후. 아들이 바로 그 유명한 조무령왕되시겠다. 조선의 조나라 정벌로 인해 살아남은 유일한 조나라 공족으로 기이가 보호해줘서 목숨을 건졌다. 기식이 조어를 진양군에 봉해 진양에 남아있는 조나라 귀족들과 함께 제거될 뻔 했으나 조어가 스스로 나서서 조나라 귀족들을 해산시킨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후 당시 변방인 대 땅을 봉지로 받아 중앙으로부터 멀리 떨어졌는데 원래 기이는 맥성과 가까운 무종이나 고죽에 머물게 하려고 했지만 충문군이 이를 반대하면서 무산되었다. 조나라가 망하면서 조후 지위는 박탈되어 대군으로서의 지위만 남아있고 조씨 문중도 세 파벌로 갈라져 있기는 하나 유후 기이대 부터 이어진 조선공실과의 인연 덕에 조선 내에서 제법 대접받으며 지내고 있다.[83] 본인 스스로도 조국인 조나라를 멸망시킨 조선에 대해 완전히 앙심을 접지는 못해도 하다못해 자식들은 조선 사람으로 살아가길 바랄 정도로 조선에 많이 동화된 듯.
죽기 직전에 이르러서는 편히 갈 마음을 먹었건만, 하필 환각이 일어나 본 것이 자신과 일족을 한때라도 싸잡아 쓸어버리려 했던 세후 기식이었던지라 유언마저 그 때처럼 용서를 구하고 필사적으로 설득하는 것이 되는 씁쓸한 결말과 함께 명을 다하였다.
조나라가 망하여 그 공실이었던 조어가 조선에 의해 변방으로 보내지고 시간이 좀 무르익은 뒤, 조씨 문중 중 조범 세력과 함께 별도의 소수파였다. 다만 조어가 잘나가는 이유와 대세를 먼저 보고 빠르게 조선의 사람으로 녹아들 생각을 했기에 사실상 이후 조씨 문중은 힘과 대세를 보고 뒤늦게 무릎을 꿇은 조범 파벌까지 더해 재융합의 수순을 거쳤다. [84]
월나라에서 파견된 뱃사람.
노나라 정벌 이후 월나라에서 파견된 군사고문.
월왕 제구가 조선과의 무역 재개를 요청하는 조건으로 파견된 뱃사람. 당대 동아시아 최고의 선장으로 반우(지금의 광저우)까지는 문제없이 항해한 경력이 있다. 중원 기준으로도 떨어지는 항해술과 그와 달리 호전적이고 중원 최고의 전투기술을 지닌 조선 수군의 전투력[85]을 보고 매우 황당해했다. 월나라 멸망 이후 월국부흥군에 참전하여 초 수군 상대로 승리 후 사망.
  • 항해&수군 자문역 향 선장(2대) AA:히비키(함대 컬렉션) ◆
작 선장의 양녀. 어렸을 때는 무척 험하게 자랐다는 듯. 초나라에 가서 감상에 잠기는 등의 행보를 보였다. 하지만 이후 산동대전 때 제나라의 첩자들[86]을 운반한 죄로 반역죄에 엮여서 사형. 참치들을 슬프게 했다.
좋게도 나쁘게도 정통 묵가적 성향을 띄었던 묵가인이다.
비비오의 조카라는 특이사항이 있다. 비비오의 직계 자손이 모두 인재 후보에서 반려되었기에 유일한 투씨 2세대 네임드이다.
카이두 이후의 법가 수장. 종합하는데는 능력이 있지만, 관료로써 능력이 부족해 진진에게 후계자 자리를 넘겨주었다.
무생의 뒤를 이은 조선의 유가 대표. 조선 법가의 대표였던 공손앙과 대립각을 세웠다. 최신 스레 기준으로 수명이 다해서 조선후 기이에게 '당신은 틀리지 않았다.'라는 말을 남기고 사망. 미등용 인재 중 첫 번째 사망자.
  • 악시(AA:시로에->회수됨, 통/무/지/정/매: 51/80/56/90/41) ◆
스레주의 언급에 따르면 악씨 문중의 당주일 가능성이 높은 편인 악씨의 일족. 오랜 기간 동안 등용이 되고 있지는 않지만 악씨 문중의 관리도 관리거니와 본인 스스로가 권력에 욕심이 없어서 얌전히 살기로 한 듯.
첫 등장은 위사의 반란 시점. 위나라 호편성주로 비숙련병 32백으로 전영이 이끄는 숙련도 99의 병력 4만을 막아내었다. 이후 이를 눈여겨본 전벽강에 의해 제나라로 넘어와 제양현령에 배치되었다. 그러나 대제 합종군 당시 수춘 공략을 위해 성을 비울 때 제대로 된 방비태세를 갖추지 않았다는 죄로 파직되어 맹상군의 식객이 되었다. 곡부 공방전에서 물자를 공급하기 위해 병력 3천2백을 이끌고 출전했지만 4만 7천의 조선군을 마주쳐 홀로 탈출한다. 그 후 더나은 직장을 찾아서 조선으로 넘어와 현재는 고씨의 식객 상태. 어장주 공인으로 중원에서도 백병전은 손꼽힌다던가, 처음 겪는 초원의 기동전에서도 어찌저찌 낙오하지 않는 등 몸은 확실히 강한 듯하다.
대진운이 안 좋기로 유명한데, 한번도 자기가 유리한 상황에서 싸운 적이 없고, 자기 특기인 수성전을 살려서 싸운건 등장할 때 한 번 뿐인 것으로 모자라, 마지막에 참전한 동초원 대전에서 전사하고 만다.(...)[87]
문인 이후 문씨의 후계자. 능력치가 그닥 높지 않아서 to에 들어오지는 못했다. aa답게 자신을 17세 소녀라고 부르거나 하면서도 장수중. 비록 중앙의 관직에 들지는 못하였으나, 정왕 기토의 인덕에 감화된 탓인지[88] 굳이 다른 나라에 출사하진 않고 고향에서 여생을 보내는 중이다.
법가의 3대 인물 중 세치를 맡는 자. 제자로는 비의가 있다. 조선이 연나라와 조나라, 그리고 위나라와 제나라를 베어문(...) 영역을 자랑하면서 출생지가 조선 영역이 되었고, 직하에서 배움을 찾다가 이후 고향으로 돌아왔었다.
비비오의 뒤를 이은 임호의 전설 2번째로 기원전 324년 월지연합이 구원군을 공격하였을때 이를 요격하여 섬멸하였다. 뛰어난 무력과 통솔력을 지닌 맹장이지만 머리가 딸려 전과보고를 할때 대충 1명당 100명씩 목을 쳤다라고 기록하여 나중에 직속상관인 비비오에게 크게 깨졌다. 산동대전때 비비오의 부관으로 활약하였고 이후 비비오가 은퇴했을때도 곁에 있는것을 보니 같이 은퇴한것으로 보인다.
고정의 손녀. 지력이 높은 전형적인 종횡가이다. 균형을 통한 평화라는 대의를 가지고 있었으나 최강대국인 조선 입장에서 이는 조선에 불리한 학설이라 숨기고 산 모양 [89] 30대 중반이 되도록 중용해주지 않는 조선을 떠나서 자신의 이상을 이룰 수 있고 두혁이란 커넥션이 있던 초나라로 갔지만, 위나라는 진나라 내전에서 딱히 조선을 돕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도 돌아오는 건 상식적으로 판단해서 헛소리라는 퇴짜뿐이었다. 그래서 조선에 소진과 위나라가 배신할 의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렸지만 이것도 비의를 제외하면 무시당하고 참치들 사이에서는 진실만 말하는데 아무도 안 믿어준다는 뜻으로 카산드라란 별명을 얻었다. 조선에 돌아온 이후는 쪽팔린단 이유로 집에 안 돌아가고 소진의 거짓말을 밝힐 방법을 연구 중. 304년에 위가 통수를 때리면서 중용될[90] 가능성이 높아질까 싶었건만, 자신의 명예가 회복되었다고 인식하자마자 다시금 자신의 이상인 합횡을 이루고자 한 것이 결국 평소 돈을 빌리는 사이었던 방훤 선에까지 감시망에 닿아있는 어사부에게 사로잡혀 고문을 당하며 강제로 뜻을 꺾이고 조선의 관리로 살아가는 운명으로 돌아왔다. 아이러니한 점은 목숨 건지고 관직에 등용되는 결말이라 최소한 겉보기에는 이것보다 나은 결말은 없었다는 것.[91]
  • 양소룡(AA: 양 샤오롱 , 통/무/지/정/매: 95/85/85/96/98) 기원전 351년
기비 다음의 조선 유가 계승자. 학자 치고는 굉장히 균형있게 높은 능력치가 특징적으로, 웬만해서는 제 몸 건사할 정도의 무력을 갖춘 이유는 대회의 최후 수단인 물리적 대화(...)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등장 당시 장왕 기유는 성년이었고, 그 첫째딸은 너무 일찍 죽어 이후 주로 기설에게 유가를 강의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장평대전으로 유명한 그 조괄의 아버지인 조사가 맞다. 조선 최초의 월경지인 음진을 조씨 문중의 추천에 힘입어 위의 관중 경락 시도 직전에 담당하였다. 젊은데다가 이 때문에 낙하산 취급을 받기 딱 좋게 되었지만 실력만은 진짜여서, 공손연은 당사자를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고 내부에서 음진을 뒤흔들려 했으나 역으로 사로잡아 심문하였고,[92] 이후 지휘계통이 완전히 혼란해진 음진방면군을 백기와 함께 실질적으로 와해시키는 데 성공했다.
매사매골로 유명한 그 곽외. 기유가 기설이에게 유훈을 남기려고 할 때 끼어들어 주목받고, 기설의 선생님 역할을 했다.
킹덤에서 방난으로 유명한 사람.[93] 극신과 얘기하는 것으로 첫등장.이 때 극신에게 군사는 영 별로라는 평을 들었다.(...)[94]할머니에게 돈 빌리는 게 창피해서 대신 자신의 돈을 빌리고 있는 고애와 딱히 아무런 이유 없이 계속해서 어울리고 있었던 한참 어린 친구기도하다.(...) 사실 이미 고애를 주시해야 할 인물로 찍고 있던 어사부의 방첩망 중 하나였다. 때문에 고애는 자신의 뜻인 합횡을 굽히지 않음이 확실해지자 바로 사로잡히게 되었다. 일단 종횡가라는 듯하다
카이두의 제자 중 일원으로써 첫 등장. 카이두가 제국 및 관학의 진척에서 실책을 저지를 당시 이를 지적하면서 카이두의 심정을 듣게 되었다. 능력치 자체는 염파보다 낮지만, 염파 특유의 성향[95] 때문에 곽전의 눈에는 더 들었다. 본인의 재주가 나쁜건 아니지만, aa나 원역사에서 자기를 패사시킨 방훤을 보고 군사에 재주 없다고 하는등 뭔가 취급이 나쁘다(...) 순우로 쳐들어온 맹상군을 진개와 함께 패퇴시켰으나 그 과정에서의 독단으로 인해 속전+춘관 상대부로 부서이동했다. 스레민들의 열렬한 지지(...)속에 aa를 교체했다.
  • 진개(秦開) (AA: 카자나리 츠바사, 통/무/지/정/매: 96/91/53/31/70) 순우성주 -> 임치군수 기원전 324년
원 역사에서 조선과 동호를 쳐부수던 연의 명장이다. 본디 순우성주로 인덱스를 대리aa로 쓰는 모브 였으나 순우로 쳐들어오는 맹상군을 극신과 협동(...)하여 막아내고 이후 판정에서 진개임이 확정되고 임치군수로 승진했다.

5. 이름이 없는 엑스트라


공숙좌의 요청 으로 조선이 조나라와 동맹하고 중산과의 동맹을 파기하였음을 중산 환공에게 전달한 사자. 이에 환공이 조선과 중산이 적대한다고 반드시 전쟁이란 법이 있느냐는 질문에 되려 웃으면서 그거 참 재미있는 일 아닌가! 하고 답하는 패기를 선보였다. 그리고 인재 등용까지 고려한 스탯 다이스를 굴렸는데, 통솔 66, 무력 37, 지력 73, 정치 64, 매력 9가 나와버려서 단역 확정 처분. 그리고 거기서 출연 끝. AA는 를르슈인데 단역인 이유는, 저 AA가 동맹 파기를 알리는 사신으로 가는 시점에서 죽을 확률도 있었기 때문에 죽지 말고 살아돌아오라는 이유로 스레민이 최애캐를 들이밀은 것이 당첨된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일단 AA를 먼저 정하고, 활동이 정해지고, 마지막으로 스탯을 굴려서 결과값이 나온 것. 그래도 중반부 TO 멤버인 지로의 아버지로 판정이 난 점은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 고죽대부(연)→무원성주(조선)→무원상(조선)(AA:멜트릴리스/BB(Fate/EXTRA CCC)[96])
조선의 연나라 정벌에 기여한 진정한 1등공신이자 생존의 달인. 조선과의 국경지대인 고죽의 방위를 맡고 있었는데 조선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도 '그깟 오랑캐 정도야.'하면서 요충지인 요서회랑[97]을 비워두는 실책을 저지르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조선군의 연나라 진군을 수월하게 도와줘버렸다. 이후 어찌어찌 정체를 숨기고 무원성주가 되어 조선에 귀의하였고 무원을 잘 다스리는 것을 마지막으로 등장 끝. 무원 지방 영주의 대리 AA로는 가끔 등장 중.
일시적으로 제나라의 평판이 하락[98]하자 제나라의 직하학궁을 나와 조선으로 왔으나 조선의 사상이 중원의 것과 크게 이질적이었지만 그들 중 반은 '이것도 나쁘지 않은데?'라는 반응을 보이며 그대로 눌러앉았다.
예전부터 조선의 기득권을 차지하고 있던 세력들. 기식 대에 변법을 통한 지속적인 탄압 정책으로 세가 꺾이고 충문군이 죽으면서 남긴 추은령[99]을 통해 완전히 뿌리가 뽑힐 예정이다.
본래 구귀족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조선후가 끌어들인 신흥 세력이었으나 되려 구귀족 세력과 붙어먹는 짓을 저지르는 바람에 군주의 신임을 잃고 끈떨어진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위에 나온 추은령 크리로 구귀족과 나란히 쓸릴 예정. [100] 이후에는 조선의 모브 AA로 사용 되는 중.
[1] 그 결과 1대에는 외교나 첩보 및 기책, 2대에는 점유지 안정화 및 본령화 및 조선 내를 개혁하거나 민간 대규모 시설 등을 축조하는 행동, 3대째에는 인재 등용, 인재 관리, 그 외 잡다한 행동 등에서 인재를 발탁하거나 확인하게 될 확률의 증가 등에서 이점이 있었고 그 이득을 보았다. 통솔과 무력은 아직 사례가 없어 유추는 해도 정확한 효과를 알 수 없다.[2] 공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적인 자리에서도 비판 가능한 건 고거, 문예, 기이 세 명 뿐이였다는 듯. 다만 고거랑 기이는 성격상 기식에게 딱히 사적으로 비판을 가하거나 하지는 않았다.[3] 원래는 92/51/83/45/80이었는데, 1000번대 효과로 정치력 상승 리다이스가 나와서 88로 상승했다. 이후 성장효과가 더해진 것이 위의 수치.[4] 관련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전부 당대 위나라의 전성기를 이끌던 실세 중의 실세들이다. 그런데 오기는 노년에 기이랑 개인적으로 가까워지는 바람에 자신의 병법을 전수했다. 그리고 서문표는 바로 그 해에 제나라 자객에게 암살당했다.[5] 그나마 제나라가 동맹을 제의해준 덕분에 최악은 면했다.[6] 고대에 이런 일이 가능할려면 군주의 몸을 갈아서 일을 해야 가능하다. 그만큼 기이가 신경을 많이 쓴것.[7] 본인이 생전에 원했던 시호는 정(丁)이었다.[8] 틀리는 것을 무서워 하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색, 이제 이 나라는 너의 것이니 죽이고 살리고까지 마음대로라는 말은 않겠지만 전적으로 너의 행동으로만 움직인다는... 착각은 하지 마라. 오히려 조금이라도 물러서는 순간 너의 색이 지워질 염려를 하는 쪽이 건설적일 것이다.[9] 다만 기토가 죽고 기유가 국군이 된 이후의 칭왕 회동에서 제,조선,위,한,진의 국군들이 왕으로 칭호를 올릴 것을 결의했기에 실질적으로는 조선의 첫 번째 왕이다.[10] 단지 여기에 더해서 부족하다면 자신의 비상금을 동원하겠다는 발언을 했는데, 이게 자신의 10년치 품위유지비 수준의 규모를 조선의 예산에서 꿍쳐둔 것이라서 어머니 기토에게 호되게 두들겨맞았다...[11] 정확히는 제나라와 대등한 세력인 조선을 무릎꿇리고 중앙군 원수 전기를 비롯한 주전파들을 잠잠하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당연히 패구에 조상의 무덤이 있다는 사실은 거짓말.[12] 실제로 용담 출신의 개척민들이 대다수이긴 했으나 2세대나 중원 출신 역시 다수 섞여있었다.[13] 이는 당시에는 "역대 조선왕 중 가장 병신같은 녀석이다." 같은 말을 듣게 만드는 우행 그 자체였으나, 동시에 후일 제나라의 천하를 완전히 끝장내는 포석이 된다.[14] 이 때 기유는 그 옛날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을 다시금 떠올리고서, 본래 자신의 딸에게 하려고 했던 말을 남길 평정심을 얻었다.[15] 이 때 조옹은 감사를 표하는 장왕 기유에게 정 그렇게 고맙다면... 알지? 같은 투로 맥성 내 왕실 술창고의 술 절반을 하사받았다(...)[16] 이 때 스레주가 사용한 묘사는 야인시대에서 김두한이 시라소니에게 딱 봐도 자기보다 위라서 싸움을 걸지도 않고 꿇는 그 묘사를 그대로 사용할 정도였다.[17] 이 결과 전벽강은 치욕을 당한것에 더해서 동생 전영이 정치생명을 희생해 비난을 무마해줘서 멘탈이 나가버렸다. [18] 이는 주례에 실려 있는 주나라의 관직구성 시스템과 비슷한데, 다소의 차이가 있다. 우선 상 혹은 상방은 문서에도 있지만 정식 관직이 아니기 때문에 언급이 없다. 그리고 천관의 수장은 대총재가 아니라 '대재'이고 이 사람이 실질적 수상이다. 주례의 편목상으로 천관총재, 지관사도, 춘관종백 등으로 이어지고 다른 직책은 그 편목명에 대를 붙여서 장관을 의미하는데, 천자 직속인 천관만 그 구성이 다르다. 이호예병형공에 일대일 대응 되는 것도 아니지만, 저 내용도 그렇고 대총재도 그렇고 한참 후대의 조선시대 느낌이 난다.[19] ...지만 현재는 대장군과 통합되어 대사마대장군으로 이름이 넘어가고 실재로 하관업무를 보는 것은 하관상경이다.[20] 비슷한 이유인지는 안 나왔으나 악자도 군주 직속의 별부사마로 오랫동안 많은 병사들을 통솔했다.[21] 중국역사에서 어사대라는 조직과 어사대부라는 관직은 진시황이 처음 만들었다. 이후 전한시대에 정착. 다만 이후 지위가 많이 떨어져서 단순 감찰역으로 변하게 된다. 간단히 말해서 고려시대의 어사대가 변한 것이 조선시대의 사헌부이다. 사헌부의 수장인 대사헌은 종2품으로, 정2품인 판서보다 낮다. 즉, 어사대부가 아경급이었던 것은 조선시대 대사헌의 위치와 비슷했던 것.[22] 군사 업무를 보는 하관 제외.원래는 하관의 업무중 군정계의 일도 보았지만, 업무가 너무 광범위해져 권한이 너무 강해지는지라 분리되었다.[23] 군사행정과 군사운용 이중 군사행정을 군정이라고 부른다.[24] 승상이나 대사마대장군과는 달리 어사대부는 조선상을 거치지 않고 군주 직속이다.[25] 왕실의 재정을 담당하는 부서, 특이사항으로 아직 인물과 관직제도의 분화가 완전히 일어나지 않은지라 소부의 상경은 소부상경이 아니라 소부라고 불린다.[26] 대간의 수장은 간의대부인데 중외대부의 지위이다.[27] 삼공이나 조선상은 해당사항이 없으나 압박으로써는 작용한다는 모양[28] 참고로 조선 내에서 기병 만능론을 주창하여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한 건 다름 아닌 이 사람[29] 세후 기식과 동갑이다. [30] 나머지 둘은 기취와 기라. 모두 원칙주의자들이다(...)[31] 대표적인 예시라고 들기에는 뭣하지만, 문예가 점점 기력이 떨어지고 있음을 이유로 차기 조선상을 정할 당시에는 능력주의 기조가 조선에 그리 강하지 않아 연공서열에 의해 조선상이 될 처지에 놓이자, 정확히 4주 이내로 존재 자체만으로도 국정을 혼란시킬 자신이 있다는 냉정한 자기 평가로 고사하였다. 세후가 이를 가납하여 두 번째 조선상은 기취가 된다.[32] 이때 기식이 말하는 게 흠좀무한게 중앙에서 일 안하면 조만간 출정할 조선군의 말발굽에 예맥 부족 몇이 밟혀도 난 모른다? 라고 하자 스어는 그저 데꿀멍...[33] 당시 스어는 지방의 관리인 상으로 실권은 몰라도 계급상으로는 엄연히 기취보다 낮았다.[34] 작중 기준으로 승상의 유래가 되는 일화가 이 때 생성된다. 기취가 조선상에 취임하는 조건으로써 자신의 비서로 들일 인물을 기라로 선정하는데, 그 관직의 이름을 무엇으로 하는가에 대해서 이미 기라 등이 생각해 둔 것이 그대로 적용되게 된 것이다.[35] 본디 조선의 말은 유목민의 것과 동등했으나 시작 시점에서는 누군가 인위적으로 온순하고 왜소하도록 개량하였다. 이것을 실질적으로 원상복구시킨 것[36] 백두는 기식을 몰라보고 너 이름 대라 니 조선후한테 다 말할끼다! 이랬다가 옆에 있던 문예가 정체를 밝히자... 그리고 악마같은 조선후는 '너 대사공할래? 아니면 사형 받을래?라는 무자비한 선택지를 제시하고 그 이후론 이하생략.[37] 요구가 위대한 철학자였기 때문에 보정을 받았다.[38] 역덕후라면 어디서 들어본 이야기라고 생각할 만 한데, 바로 충무공 이순신이 율곡 이이의 만남을 거절한 일화와 판박이. 그래서 스레주 공인 '충무공급 원리원칙주의자'란 별명이 붙었다.[39] 정왕 기토의 시대에 들어서는 조정의 원로이자 왕의 친척이었던 탓인지, 재위 직후부터 정왕은 문성군에게 심적으로 기대는 부분이 좀 있었다는 게 사후 밝혀졌다.[40] 심지어 자기 어머니인 공양군의 마지막 출정이었던 무성 공략전을 무익한 희생만 낸 전쟁이라고 대차게 깠다.[41] 공손앙은 본디 위(衛)나라의 공족이다.[42] 그나마 월이 뜯어말린 덕에 전후사정은 들어주고 처형했다(...).[43] 이러한 이유로 재능은 있지만 출신이 이민족의 하층민인 탓에 텃세와 멸시 등에 시달리는 마위의 상황에 분통을 터뜨리기도 하였다.[44] 제나라는 2인자인 추기, 위나라는 공자 위신과 부마 기람, 송나라는 공자 대언이 지휘를 맡았고 한나라의 경우 아예 한후가 직접 참전했다.[45] 하도 오래 살아서 누구 장례식에 고정이 나오면 어? 아직 살아 있었어요?!라고 놀라는 게 정형화된 패턴이 되기도 했다(...)[46] 일단 이름을 조선이나 중원식으로 변형하지 않고 아무로라고 그대로 사용하며, 조선후가 아닌 조선의 카칸을 찾아뵙고자 한다고 말하고, 기토가 술자리를 마련하였을 때 '카칸이 베푸는 술자리! 오오 감사' 같은 반응을 보인다. 이후 기토가 조선의 요동 지역을 순방할 때에는 왕(...)으로 부르는 정도까지 적응하였다.[47] 죽기 직전 살 날이 얼마 안 남음을 느끼고 퇴청을 신청했고, 이를 윤허받은 시점 이후 시스템 적으로 신하의 은퇴를 권할 수 있게 되었다.[48] 어디까지나 불의의 사고라고 점찍고 넘겼었지만 그래도 어머니인지라 사감이 완전이 지워지지는 않았는데, 당시 고씨의 식객이었던 장의가 다시금 불이 붙은 탓도 있었다.[49] 이 때 고질보다 10살 정도 연상이던 고정은 맨날 말 타면서도 멀쩡하단 사실이 나왔다(...)[50] 투제라는 이름은 일종의 별명이자 중원식 이름인데 삼황오제할때 그 제를 쓴 덕분에 중원식 이릉은 한자로는 쓰지 말란 소리를 들었다(...)[51] 훗날 비비오가 은퇴할 때에 보인 반응을 볼 때, 조옹은 측근이 아니라 친구라고 여기고 있었다.[52] 무력과 통솔 외에는 별 보정이 없다는 선택지가 걸렸는데, 정작 지력이 99가 나와서 어장주가 경악하기도 했다(...)[53] 단, 그때문에 가상인물로 판정되기 때문에 실존인물 보정은 가지지 못한 채로 시작했으나 손빈병법의 힘으로 이를 회복하였다.[54] 동시에 참치들도 조옹을 계속 활용하는 것이 국가에 더이상 이익보다 손해가 크다고 판단해서 자를려고 하면서도 워낙 세운 공이 많아서 미묘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55] 이로 인해 진나라 파견 법가가 학살당할 때 격분해서 끌려나가기도 했다.[56] 왕한테 올리는 문서에 나,너 라는 단어를 쓰거나 아무튼 목을 많이 뱄다! 수준의 문서도 올라왔다(...)[57] 조선 왕족이 자성 기씨라는 것이 복선이었다.[58] 그 덕분에 이 어장에서 자주 당하게 되는 괴상한 이름이 지어지는 것을 도리어 피한 실존인물이 되었다(...)[59] 다만 물증이 충분치 않은 것도 있었지만 당사자가 고자가 될 줄은 몰랐다고.(...)[60] 삼국지의 그 비의와는 동명이인이다.[61] 특히 산동대전 이후로는 돈 없는데 돈을 무더기로 써대는 무관들에게 열 받은 모앙(...)[62] 무려 파촉 제외한 모든 중원국가에 외교관으로 파견된 전적이 있다.[63] 상관인 비의보다 모든 능력치가 상위호환이다. 그런데 오히려 비의한테 공부 좀 하라고 혼나는 장면이 나와서 능력치가 절대는 아니라고 보여 주는 예시가 되기도 [64] 덕분에 정작 기유는 별 생각 없었는데 태자의 측근으로 낙인찍혔다는 듯(...)[65] 어사대부 자리가 군주의 최측근임을 고려하면 하기가 기유의 최측근인 것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66] 다만 대총재 직은 예전에 6경의 수장이였기에 6경 중에서도 특별한 면이 있어서 아무리 문씨라도 조금 더뎌질 수밖에 없어서인 면도 있다.[67] 조선상이 인재 추천하는게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좀 노골적인 부분이 있었다[68] 본인도 후견인 격이던 조옹에게 태클을 건 것은 자신의 입장에서 궁여지책이었던지라, 고씨와 문씨의 저녁식사 초대를 받고서는 자신은 살아남는데 성공했다고 속으로 여러 번 쾌재를 불렀다(...)[69] 지금으로 따지면 관아의 비정규직이다.[70] 양수가 평양으로 이주했던 사실이 밝혀지고 난 뒤로는 참치들에게 출생지 메리트(?)까지 양수 하위호환이라고 놀림받기도 했다 [71] 제나라 군이 산적으로 위장해 기회를 보는 식으로 건설 중이던 장성의 동부를 점거하였다.[72] 본인이 남자를 많이 탐하는 것은 아니지만, 노출도가 무진장 높은 복장이나 이름이 발가벗는다는(나체 할 때의 그 한자다.)뜻이 있어서 참치들 사이에서는 치녀 취급(...)을 받고 있다. AA적 문제도 더하여 나이를 먹고도 노출도가 높은 복장을 선호할 예정인 것은 덤.[73] 가문의 보전과 이미지메이킹을 염두에 둔 결과인 것은 이미 장왕의 눈에는 안 봐도 비디오였다.[74] 조선의 성향과 그 수를 정확히 예측할 수 없는 당대의 한계로 인하여 이는 대외적으로 20만 규모로 부풀려진다(...)[75] 이는 현 역대 능력치가 확인된 모든 인물을 통틀어 최상위에 달하는 것이다. 참고로 차상위자는 능력치 100 2개에 그 중 통솔에 진 트레잇이 붙고 실존인물 보정을 받는 악의. 향후 이 순위는 극히 변경될 확률이 적을 전망이다[76] 이 때의 일은 원칙 상 중형 내지는 거금의 속전을 벌로 치루어야했고, 군주의 측근들도 포함해서 수많은 곳에서 모금을 받았기에 해결되었다. 후일 이 사실은 승진에 영향을 줄 정도로 오래 갔는데, 이 문제로 아직도 살아있던 전 조선상 고정의 도움을 받았음에도 당시에는 완전히 무마하지는 못했다.[77] 청년기[78] 장노년기[79] 당시 6경급은 조하와 양수정도였는데 양수는 반쯤 편법으로 소부가 되는 것으로 상경급으로 올라온지라 맡기기 어려웠다.[80] 스레주에 의하면 패도를 지향하는 것을 제하면 후대의 맹자가 주창할 역성혁명론과 근접하다고 평했다.[81] 제환공 전오는 이제 질세라 돈을 뿌려가며 이를 따라잡으려 했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저희는 묵가인이 아닙니다(...)'[82] 스레주의 말에 따르면 장수할 경우 석가모니알렉산드로스 대왕과 만날 수도 있다고(...)[83] 현 조선후인 기토에겐 오라버니라 불릴 정도로 각별하며, 태자 기유 역시 조어를 숙부로 깍듯이 모시고 있다.[84] 이러한 조씨 문중의 사정 때문인지, 일단 한자상 성씨가 같(아진)다면 동족으로 볼 정도로 그 범위가 넓어, 후일 원 역사적으로는 더 말해 무엇할 정도의 남남이었던 조사가 조씨 문중의 일원으로 취급되어 후원을 받아 현령으로 천거되었다. [85] 조선 수군 전투력의 진실은 다름아닌 배를 너무 못만드는 바람에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전투원들의 수준이 높아진 것. 이걸 알게된 작 선장은 억지로 배를 못만들어서 전투원을 향상시킨다는 놀라운 발상이라고 감탄했다.[86] 월인들로 오랜만에 고향 사람과 만난 향 선장은 반가워서 큰 의심을 못 했다는 듯[87] 부고 소식은 제나라에 있었던 가족에게 전달되었다.[88] 메타적으로는 정왕이 죽은 이후 그녀의 매력치 100에 해당하는 인재 관리 보정의 최후의 불꽃이다. 이는 똑같이 능력치 100인 항목이 있던 세후 기식과 유후 기이 또한 보유하고 있었다.[89] 다만 합횡과 연종등의 논의는 조선에서 활발히 일어나서 눈에 띄지는 않은 듯하다.[90] 본인은 모르지만 초나라에서 한 주장들이 영직에게 도박수를 던지게 만들어서 304년에 합횡이 결성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어떤의미로는 자기 일자리를 만든 격(...)[91] 조선 고관들이 쓸모 있다고 여겼고, 조선상이었던 고정의 손녀가 아니었다면, 애초에 기어이 고문을 동원해서 뜻을 꺾어버려서까지 살려두고 관직을 줄 이유조차 없었다.[92] 이 때문에 실질적(당시 위나라의 공격은 철저하게 기습이었기에 백기가 움직인 시점은 모든 게 확실하지는 않은 상태로 감을 따른 감이 있었다.)원군으로써 출진했던 백기는 상황이 어느 정도 진정되고 조우하여 자초지종을 알아보려는 중, 상식적으로 적장이 이리도 허무히 붙잡힐 일이 없기에 음진현 단독으로 위군의 2파까지 격퇴한 것으로 오인하는 일이 있었다.(...)[93] 다만 킹덤과는 달리 사서를 따라서 지장겸 문관으로 묘사된다.[94] 원역사에서 극신은 방훤에게 패해서 죽었다(...)[95] 협 계통의 행보를 지향하는 편이며, 이 때문에 양수와도 죽이 좀 잘 맞았다.[96] 모녀관계로, BB가 퇴각해서 모친에게 의탁한 이후에는 행적이 분리되지 않고 직책을 승계하였다.[97] 요동과 중원을 잇는 통로. 그 유명한 산해관이 이 근방에 있다.[98] 이는 본의아니게 조선과 연관이 있는데 조선후 기식이 승하하고 기이가 계승하자 모든 나라에서 조문객을 보내는 와중에 월나라만 조문객을 안보냈다. 그 이유가 뭔가 하니 '제나라랑 적대관계니까 안보내도 되겠지?' 덕분에 중원 모든 국가들이 월나라는 물론 월나라 뒷배를 봐주고 있던 제나라를 의심하자 제환공 전오가 쇼미더머니를 퍼부어 간신히 무마시킬 수 있었다. 여기서 끝났으면 좋았는데 이후 기이가 양평에서 맥성으로 천도하자 모든 나라가 축하사절을 보내는 와중에 또 월나라 혼자 안보냈다(...) 한번도 아니고 두번씩이나 외교적인 결례를 저지르자 월나라와 밀접한 관계에 있던 제나라는 아예 양아치 국가로 찍혀버렸다.[99] 쉽게 말해 은혜를 넓힌 다는 뜻으로 본래 장자에게만 상속되는 가독을 자녀들 전원에게 상속시킨다. 대략 오초칠국의 난 직전에 가의조조(전한)가 제안한 제후왕 견제책의 프로토타입이라 할 수 있겠다.[100] 그래도 이후 조선의 권역과 활동에서 엑스트라들이 필요하면 이들이 등장하는 식으로 구귀족 세력과는 달리 죽어서 얼굴은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