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채영/활동 내역
1. 초창기 활동
1.1. 잡지 모델로 연예계 데뷔, 가수 데뷔 과정
유채영은 무남독녀로 집안에서 태어났고, 성장 과정동안 아버지 없이 어머니 슬하에서 홀로 성장했다. 그랬기에 아버지의 얼굴은 한번도 본적이 없었으며 어머니를 지켜야한다는 생각에 열심히 살아왔다고 한다.[1]
유채영은 어렸을때부터 발레리나의 꿈을 갖고 어렸을 때부터 무용을 배웠는데 본인이 가수가 될거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당시 홍콩배우들이 한창 인기를 끌었는데 유명 홍콩배우의 사진을 코팅해서 파는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책방을 많이 다니게 됐는데 단골책방의 주인아저씨가 쪽지를 부모님께 갖다드리라고 하셨고 그게 바로 하이틴 잡지 '여학생' 잡지표지모델 추천서였다.
알고보니 그 분이 잡지 '여학생'의 편집장이었고 당시 대뜸 유채영을 보고 "넌 방송을 해야겠다"며 회사 약도를 그려주었는데 이후 그 회사와 인연이 닿아 1989년 3월호 '여학생' 잡지 모델로 데뷔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녀의 데뷔를 94년 "쿨"로 기억하고 있어서 모르지만 '''첫 연예계 데뷔가 무려 1989년'''이었다. 당시 나이 17살. #
빼어난 외모와 끼로 연예계에 발을 들인 유채영은 첫 잡지가 발매되자마자 여러 연예기획사에서 콜이 왔고 이후 <하이틴>, <주니어> 등의 인기 잡지 모델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던 중 가수 이상은의 제작자에게 픽업 되어 1990년 그룹 푼수들의 2기 멤버로 가수 데뷔를 하는데 당시에는 예명 "유채영"이 아닌 본명 "김수진"이라는 이름으로 데뷔했다.
이 그룹은 지금의 아이돌 형태로 제작된 그룹이었으며 여자 4명의 남자 멤버 1명의 구성으로 댄스 장르를 선보인 그룹이었다고 한다. 타이틀 곡은 "싼타클로스 썰매를 타고"라는 곡이었는데 캐롤을 섞은 듯한 특이한 구성으로 대중들에게 나타났지만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하였다. 이들이 첫 콘서트를 열었는데 겨우 몇십명만 와서 펑펑 울었다고 할 정도로 크게 성공하지 못한다.
이후 푼수들은 해체되고 몇년간의 공백기를 가지게 됐는데 이때 유채영은 안양예술고등학교 무용과를 진학했다. 졸업 후 성인이 된 유채영은 본격적으로 춤에 관심을 두기 시작해서 여러 클럽 가를 전전하며 춤을 추고 다녔는데 워낙 몸선이 이쁘고, 끼가 있어서 당시 가수 지망생들 사이에서도 눈에 띄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러던 1994년 어릴때부터 친구 사이였던 이재훈에게 쿨 멤버가 되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아 그룹 데뷔를 3개월 앞두고 합류하게 되는데, 본래 쿨에 데뷔할 예정이었던 여성 멤버가 탈퇴하게 되자 이재훈이 유채영을 떠올려서 그 빈 자리를 채우게 된 것이다. 유채영도 춤을 추고 다녔고 멤버 오빠들도 아는 사이여서 한번에 오케이를 했으며, 그렇게 1994년 혼성그룹 쿨의 홍일점 멤버로 데뷔하게 된다.
쿨이 MBC에서 첫 TV 데뷔를 하게 되는 날, 유채영의 오랜 친구는 느닷없이 유채영에게 쿨의 멤버가 되고 싶다면서 자기도 껴달라는 부탁을 했고 당연히 이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라 유채영은 그럴 수 없다고 친구를 말렸지만 이때 그 친구는 '''"너가 지금 쿨에 들어가면 우린 절교하는거고, 그렇지 않으면 평생 친구가 되는거다"''''라고 드립을 펼쳤고 결국 어쩔 수 없이 유채영은 친구의 말을 듣고 잠적해버린다.
심지어 그 친구는 대뜸 부산으로 내려가자고 해서 짐을 챙기고 아예 부산으로 내려가 버렸고, 거기서 놀고 있었는데 결국 소속사 사장님과 멤버들이 찾아와서 유채영을 급하게 데려갔다고 한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무대에 등장한 유채영은 '''아주 파격적인 삭발 헤어를 선보여 엄청난 화제를 일으켰다.'''
당시 소속사 사장은 이재훈과 유채영이 누가 남잔지 모르는 컨셉트를 잡았는데 웬만큼 짧게 해서는 티가 안나니까 유채영이 "제가 밀게요"해서 삭발을 했다고. 무용를 전공했기에 머리를 짧게 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해보고 싶은 마음도 컸다고 한다.
유채영의 삭발 헤어는 여학생들에게 폭발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하도 여학생들이 유채영을 따라서 머리를 밀어 젖히다 보니 '''전국의 학교에서는 삭발 금지령을 내릴 정도'''였다고 한다. 가수 김현정 역시 TV에 나오는 유채영이 너무 멋있어서 삭발을 했다가 학교가 난리났었다는 에피소드를 말하기도 했다. 김현정은 '''유채영은 당시 여학생들의 워너비'''였다고 언급하기도.
그래서 결국 당시 방송국에서는 유채영을 외계인 취급해버려서 여러 오해도 많이 받았고 모 방송국에서는 3개월 간 정지도 당한적이 있다고 한다.
또 어느 날은 뉴스에 쿨이 나와서 잘 돼서 그런 줄 알았더니 '유채영을 따라 교복 입은 여학생이 막 밀어 제껴서 사회에 문란을 일으켰다'라는 식의 내용이었다고.
쿨 1집은 신인치고 괜찮은 성적을 보이긴 했지만 상술한 내용때문에 방송 활동보다는 행사를 더 많이 했다고 하며, 실질적으로 유채영의 삭발 헤어나 이재훈의 비쥬얼로 적당한 인기를 얻었을 뿐 가수로서 정점을 찍지는 못했다.
사실 유채영은 '''가수에 대한 의지'''가 대단해서 노래 한 소절이라도 꼭 하고 싶었는데 쿨 1집을 들어보면 유채영의 파트는 거의 없고, 활동 당시에도 신비주의 컨셉을 제시해 말 한마디도 안하고 가만히 있을 정도로 본인 분량이 적어서 유채영은 노래를 정말 하고 싶었다고 한다.
결국 소속사 사장에게 노래 한소절이라도 하고 싶다고 용기내어 말했지만 이내 소속사 사장이 '''"그럼 나가!"'''라고 해버려서 유채영은 "'''한국의 마돈나가 되겠습니다."''''라고 하며 바로 문을 벅차고 나와버렸지만... 문을 닫은 직후부터 후회했다고 하며 이 시점부터 유채영의 고생이 시작되었다.
여담으로, 당시 쿨의 매니저는 방송인 정준하였고, 정준하는 시간이 흐른 뒤 유채영이 예능가에서 활발하게 활약하는 모습을 보고 저런 모습이 있는지 전혀 몰랐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1.2. 그룹 어스(US)로 선풍적인 인기, 그리고 첫 솔로 음반
쿨을 탈퇴한 이후 별다른 활동 없이 매일 음악을 들으러 다니던 유채영은 홍대에서 음반 라이선스를 하는 중국인을 만나게 된다. 그 사람은 유채영에게 "음악을 좋아하면 노래를 하지, 왜 음악만 들으러 가냐"고 했고 유채영은 그럴만한 상황이 못돼서 그렇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 사람은 "그럼 같이 음악을 한번 만들어볼까?"라고 제안해왔고 유채영은 그 사람과 함께 '''어스(US)'''라는 그룹을 제작하게 된다.
당시 해외 음반 라이선스를 하던 제작자와 함께 음반을 제작했기 때문에 그 당시로서는 드물었던 유로 댄스곡들을 녹음하게 되었고, Samira의 When I Look Into Your Eyes를 번안한 "지금 이대로"가 타이틀로 선정됐다. 처음에 유채영은 이 노래가 과연 타이틀이 될까하는 의구심이 들었다고 하며 그도 그럴것이 당시에는 드물던 오리지널 유로댄스풍의 장르여서 한국식 댄스 곡과는 정 반대의 느낌이라 조금 의심이 들었다고 한다.[2]
하지만 주변인들에게 이 곡을 들려준 결과 많이들 좋아했고 객원 랩퍼로 참여하게 되는 신정환(대니 신)과 함께 활동에 나서게 된다. 초반 PR력이 너무 부족해서 전혀 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라디오를 통해서 이 노래가 흐르자 95년 말부터 인기를 끌기 시작했고 모 방송국의 '행운의 스튜디오'라는 복권 추첨 프로그램에 섭외가 된다.[3]
당시 '행운의 스튜디오'는 복권 추첨하면서 가수가 나가는 형식인데 신인 가수들끼리 경쟁을 하며 점수를 매기고 1등한 팀이 다음 주에 또 나올수 있는 형식의 방송이었다. 총 3차로 진행되는데 3차까지 1등을 할 경우, 주말 음악 예능방송에 출연할 수 있는 옵션이 있었고 결국 US가 우승하면서 주말 예능 프로그램을 나오게 되었다. 당시 어스가 이긴 팀은 바로 패닉이었다고.
주말 예능 방송에 출연한 이후부터 가요톱텐등의 방송에서 섭외가 왔고 이후 자연스럽게 대중적인 인기를 끌면서 96년 클럽가를 강타했다. 특히 이 노래는 지금 들어도 특별히 촌스럽거나 하지 않을 정도로 잘뽑힌 싱글이었다. US는 인기의 날개를 달고 활발한 활동을 하게 되었으며 차트에도 상위권에 진입하는 등 사랑받았다.
당시 US는 가요톱텐 기준으로 11위까지 랭크되었으며 어떠한 대형 기획사의 홍보력 없이 대중들이 좋아하면서 자연스레 순위권에 진입했다. 그리고 1집 음반은 15만장~20만장 이상의 판매량을 올려 준수한 판매량을 기록했다.
1집 앨범은 번안곡이 수록되어 앨범에 RCA 마크(미국의 음반 레이블)가 붙어있으며 배급사 역시 BMG Korea였다. 당시 앨범에 수록된 '무관심' 등의 곡에서는 당시 드물던 일렉트로니카를 선보여 신선한 사운드를 선보였고 95년에 발매된 앨범이지만 그 당시치고는 세련된 사운드를 보여주고 있다.
활동 후반부에는 '지금 이대로'를 리믹스한 음원으로 활동하여 1집 재판 버전에 수록하여 재발매하기도 했고 정식 후속곡은 아니지만 '끝없는 사랑'이라는 곡으로도 무대에 올랐다. '''유채영이 가수 활동을 하면서 가장 인기를 누렸던 시기이기도 하다.''' 또 이 시절 유채영의 스타일링이나 댄스 실력이 최근들어 재평가 되기도 하는데, 채리나를 연상시키는 느낌있는 춤 실력과 그루브 그리고 힙한 스타일을 선보여 당시에도 여성 팬들에게 큰 지지를 받기도 했다.
이때 한 극성팬이 다짜고짜 유채영에게 달려들어 귀를 자를 속셈이었는지, 가위를 귀에 들이대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US로 상승가도를 달리고 있던 와중 US가 돌연 활동 중단 해버리는 일이 발생했는데 원래 이 그룹 자체가 프로젝트 식으로 결성되기도 했고 유채영과 랩퍼 대니 역시 각자 하고 싶은 음악이 있었기에 '지금 이대로'가 히트하자 마자 팀이 해체되버린다.
당시 여러 연예 가십 기사에 유채영이 잠적했다 혹은 US 불화설[4] 등의 얘기가 자주 나돌았다고 하며 유채영 역시 솔로에 대한 욕심도 있고, 대니도 자신이 하고 싶어하는 음악이 있었기에 결국 후속 활동 없이 US가 잠시 해체되버린다.
그 뒤 유채영은 쿨 시절 함께 활동하고 같이 탈퇴했던 최준명('날개 잃은 천사'등을 작곡한 최준영과는 다른 인물.)과 기타 작곡가들의 도움을 받아 1996년 솔로로 독립했다.
유채영은 96년 여름~가을께 US 시절의 음악 연장선상에 있는 유로 댄스 음반 "A High Speed 1996 : 快速"을 제작했다. 당시 이 음반은 국내에 발매될 예정으로 언론에 보도되기도 하고 당연히 국내에서 솔로 활동을 이어갈 것으로 보였지만 이 음반을 제작한 프로듀서가 미국에만 이 앨범을 풀어버리고 정작 국내에는 정식으로 발매하지 않았다.
LA나 뉴욕 등지에만 이 음반이 풀려서 유채영도 모르게 해외에만 발매가 되었고, 어느 날 외국에 있는 친구에게 "너 앨범 나왔더라?"라고 연락을 받을 정도로 유채영도 모르게 발매된 앨범이다. 이후 유채영은 친구의 도움을 받아 음반을 겨우 구했다고.
이 음반은 국내에 정식 발매되지 않았지만 국내 음원 사이트에서 서비스 되고 있으며 마이클 잭슨의 곡을 리메이크 한 곡과 심수봉의 노래를 리메이크 한 곡도 실려있다. 녹음 당시 이 노래를 좋아해서 한번 불러봤는데 의외로 잘 어울린다고 해서 수록된 트랙. 타이틀 곡은 'Go! Go!'이며 US 시절의 음악을 연상케하는 유로 댄스곡.
유채영이 2013년 세바퀴에 출연하여 음반 사기를 당했다고 고백한적이 있는데 그때 언급한 사기 행적과 이 96년 음반과는 상관이 없으며, 당시 방송을 보면 사기당한 앨범은 발매하지도 못했다고 했지만 이 음반은 외국에 발매가 되었으며 국내에서도 어둠의 경로로 소량 발매된것으로 추정된다. 유채영 역시 2009년 디시 인사이드와의 인터뷰에서 이 음반에 대해서 아무 거리낌 없이 언급했으며 전혀 사기를 당했다는 언급은 하지 않고 좀 특이한 음반 정도로 소개하고 있었다.[5]
다만 앨범을 다 녹음하고 미국에만 앨범을 푼 뒤, 상식적으로 한국에서 활동해야할 가수인데 국내에서는 앨범 발매도 하지 않고 나몰라라 방치한 것은 거의 사기에 가까운 형태이기 때문에 '''이 앨범도 어찌보면 유채영이 당한 사기 중 한 사례라고 봐도 무방'''하긴 하다.
결국 야심차게 녹음한 이 솔로 앨범은 어떠한 활동 없이 묻혀야 했으며, 사실상 거의 시간만 낭비하고 결국 솔로로 무대에 오르지 못한 안타까운 앨범이 되었다. 국내에 정식으로 나온 앨범은 아니기에 정식 1집으로 치지는 못하며 비공식 1집으로 칭하고 있다.
그래도 나름 유채영의 앳된 목소리와 96년에 제작된 유로 댄스 사운드를 느낄 수 있는 앨범이다. 유채영의 팬이라면 한번쯤 들어볼만 한 앨범.
참고로 대니는 여성 멤버인 장보영을 새로 영입해 2집 앨범인 '자유'로 활동했지만 별다른 히트를 치지 못하면서 해체되었으며 그 뒤 장보영은 U-two의 멤버로 활동했다.[6]
1.3. 무산된 아무로 나미에와의 듀엣 프로젝트
첫 솔로 앨범이 흐지부지되고 유채영은 이모가 계신 일본에 왔다 갔다 하면서 지냈는데 그 시절 일본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아무로 나미에를 유채영 역시도 무척이나 좋아했고 일본에서 많이 보고, 들으면서 여러 가지로 문화를 느끼며 도움을 받고 있었다.
이때 한국에서 UP를 제작했던 '''조선 음향'''에서 일본의 에이벡스가 공동으로 주최한 프로젝트가 진행되었는데 바로 그게 아무로 나미에와 한국 가수가 듀엣으로 싱글을 내는 프로젝트였고 당시 에이벡스 임원들이 모두 한국에 와서 오디션을 개최하게 된다. 이 시절 '''조선음향'''이 일본과의 여러 프로젝트를 타진하던 시절이라 이 프로젝트의 한국 진행을 담당하게 되었다고 한다.[7]
그러나 이 오디션에 지원하기에는 나이가 두살 정도 많아서 오디션을 볼 수 있는 나이에서 벗어났지만 원가 아무로 나미에의 팬이라서 꼭 그녀와 함께 듀엣을 하고 싶어했던 유채영은 무리해서 이 오디션에 참가한다. 당시 오디션 조건이 일본 곡 세곡을 준비하고 안무도 짜야하는 상황인데 워낙 베테랑이었던 유채영은 모든 것을 완벽히 준비하고 오디션 장에 찾아간다.
이때 다른 것은 다 괜찮다며, 나이가 두 살 정도 많지만 제발 보게해달라고 했더니 처음에는 주최 측에서 안된다고 하다가 하도 유채영이 부탁을 해서 결국 오디션 기회를 얻게 된다. 그래서 결국 오디션 현장에는 유채영이 초대 손님으로 소개되는 형식으로 오디션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KMTV 공개홀에서 진행된 이 오디션에는 정말 많은 지원자가 왔고 3차로 진행되는 오디션을 진행했다. 결국 최종적으로 유채영과 가수 지망생 한명이 후보에 올랐고, 이 둘중에 하나가 뽑히면 바로 일본에 넘어가는 상황에 이른다. 이때 유채영은 정말 기뻐했고 일본 관계자들을 만나기로 한다.
그런데 일본 측 관계자들은 숙소 및 생활할때 필요한 모든것들을 지원해줄테니 열심히 하라고 했고, 한가지 조건을 내걸었는데 그것이 '''"한국사람인것을 밝히지 않고 활동하라"'''는 조건이었다. 이 조건을 들은 유채영은 내심 마음에 걸렸고 이유를 물어보자 "일본에서 활동하는 한국 사람들이 많지만, 최정상에 올라가서는 아무 상관이 없다. 하지만, 처음부터 밝힐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때 유채영은 나중에 이 사실이 밝혀지면 파장이 심하겠구나 하는 생각과 자존심이 상해서 결국 '내가 고생을 하더라도 차라리 한국에서 해야지, 나중에 기회가 또 있겠지' 하는 생각에 거절했다. 그렇게 이 프로젝트 자체도 무산되어 버렸는지, 아무로 나미에와 한국 가수가 듀엣한 싱글은 공개되지 않았으며 유채영은 한국에 돌아와 어두운 지하실에서 열심히 연습을 이어가게 된다.
이후 유채영은 이모가 계신 일본에 왔다 갔다하면서 아무로 나미에의 춤과 패션, 그리고 문화를 배우며 나중에 있을 솔로 데뷔를 위해 여러 가지 준비를 했다고 한다.
2. 정식 솔로 데뷔
2.1. 솔로 1집 <Emotion>
유채영은 1999년 한국에 돌아와 쿨을 제작했던 id Media의 차영철 대표와 다시 인연을 이어가게 됐고, 그 회사에서 솔로 앨범을 드디어 진행하게 된다. 당시 최고의 주가를 날리던 주영훈과 손을 잡고 앨범을 제작하게 된다.
유채영은 1999년 10월, 주영훈 작곡의 하우스 테크노 곡 "Emotion"을 들고 복귀했으며 본인이 평소 동경하던 아무로 나미에의 패션을 의식한 모습과 사이버 여전사 컨셉을 믹스시켜 화려하게 복귀했다. 당시 언론에서 유채영을 소개할때 "한국의 아무로 나미에"라고 소개하기도. 실제로 자켓 사진과 뮤직비디오에서 아무로 나미에의 의상을 오마쥬한듯한 느낌을 물씬 풍겼다.
참고로 96년에 제작된 1집은 정식 1집으로 인정되지 않아서 이 Emotion 앨범이 정식 1집으로 소개되었으며, 96년 솔로 음반의 존재를 아는 사람들은 당시 조금 의아하게 여겼다고 한다.
그러나 막상 앨범 자켓도 멋있게 찍고 음악도 최고 잘나간다는 주영훈의 곡을 받아 초반 기세가 좋았지만 정작 뮤직비디오와 무대 위에서 선보인 컨셉이 무려 '''삼지창 컨셉'''이어서 엄청난 괴리감을 주기 시작한다.
섹시 미녀 여가수였지만 그 모습을 다 가려버리는 기괴한 삼지창 마이크와 더불어 1주일의 격차를 두고 등장한 가수 이정현이 더 파격적이고 획기적인 컨셉의 <와>를 들고 나오는 바람에, 유채영의 <Emotion>은 거의 묻혀버리는 상황이 되었다.
사실 유채영과 이정현 모두 사이버 여전사의 궤를 따르고 있었지만 이정현의 경우는 컨셉 스토리텔링이 인간을 사랑한 외계인이었고, <와>의 컨셉은 동양 풍의 사이버 여전사였으며 유채영이 선보인 과격한 사이버 여전사 컨셉은 한 끗 차이로 혹평 받으며 예상만큼의 호응을 얻지 못했다. 더군다나 이정현이 <와>를 흥행해놓고 후속곡으로 선보인 <바꿔>의 컨셉이 <Emotion>과 흡사한 부분이 많아서 여러모로 유채영은 안타까운 상황에 놓인다.
차라리 이정현보다 몇달 일찍 내놨거나, 그 삼지창만이라도 없앴다면 꽤 괜찮은 인기를 누렸을텐데 컨셉이 너무나 기괴하고 경쟁자가 강력해서 성공적인 결과를 불러일으키진 못했다.
결국 활동 중반부부터는 삼지창을 걷어내고 보통의 사이버 틱 컨셉을 선보였지만 큰 호응은 얻지 못했다. 그래도 노래 퀄리티가 워낙 좋아서 클럽 가에서 꽤 많은 인기를 끌었고 대중적으로도 완전 실패하지는 않은 적당한 반응을 얻은 바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유채영은 서세원이 진행하는 토크 박스에 출연해 반전 매력을 선보이는데 그게, 유채영의 예능 포텐 시초가 되는 '''막강한 입담과 토크 능력(...)'''이었다.
평소 섹시하거나 카리스마있는 여가수의 이미지가 있었지만 이 방송에서 스님 에피소드[8] 를 선보이며 폭발적인 호응을 얻어 토크 왕에 올랐으며 이 방송을 기점으로 예능가에서 유채영이 많은 사랑을 얻었고 예상치 못하게 음악 활동보다는 토크 방송 위주에서 유채영이 인기를 얻게 된다.
그래서 본업인 가수는 잠시 제쳐두고 여러 예능 방송에 게스트로 출연해 '''개그맨 보다 웃긴 가수'''라는 호칭을 얻었고 당시 여러 토크쇼를 전전하며 유채영의 이름을 알렸다.
예능가에서 사랑받는 것까지도 좋았고 사실 이후의 유채영의 행보를 보면 워낙 긍정적인 예능 실력을 선보이는 호감 탤런트가 되어 좋은 결과를 불러일으키긴 했어도, 유채영은 활동 내내 가수 활동을 하고 싶어했기에 이때 가수로서 자리를 잘 잡았더라면, 그후에 생기는 여러 가지 사기 행각으로 가수 활동을 못하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또 유채영이 생전까지도 가수에 대한 끈을 놓치 않은것으로 알려져서 더 안타까운 부분. 당시 이 회사에서는 유채영을 예능용 가수로서 소모할 뿐, 앨범 컨셉도 괴상하게 잡고 케어도 제대로 못했다.
이 시절 대형 기획사에 소속되어 있었거나 회사에서 케어만 더 잘했더라면 예능 활동과 음악 활동을 꽉 잡는 멀티 엔터테이너로서 더 크게 성장할 가능성이 많았다(...). 더군다나 연기쪽에도 재능이 있던 터이니.
사실 1집 녹음 당시만 해도 주영훈이 "유채영 1집은 분명 대박을 낼 것이다"라고 생각했는데 첫방송 모니터 이후 커다란 포크같은걸 쓰고 나와서 이 노래는 안되겠구나(...)하고 생각했다고 하며, 당시 삼지창을 벗은 유채영의 모습은 왕조현이나 아무로 나미에를 닮은 '''이국적인 외모와 늘씬한 외모, 걸출한 춤 실력을 자랑했기에 더더욱 가수로서 잘 풀리지 못한게 아쉬울 따름'''이다.
더군다나 하우스 장르나 유로팝 장르에 최적화된 음색을 가지고 있어서 소속사에서 잘만 이미지 메이킹을 했다면 가수로서도 능력을 인정 받았을텐데, 당시 유채영의 매니지먼트를 맡은 회사가 체계적인 운영을 하지 않아 다른 소속 가수도 해당 회사와 잡음을 겪을 정도로 부실해서 유채영을 예능으로만 소모시키고 본업인 가수로서 푸쉬는 거의 하지 않았다.
2.1.1. 뒤늦게 예능가에서 역주행에 성공한 Emotion
사실 1999년 발매 당시에는 20위권 정도로 그냥 보통의 인기를 누린 곡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 <Emotion>이 예능가에 자주 흘러나오고 대부분 삼지창 댄스 정도는 다 알정도로 유명해진 계기가 있는데, 발매된지 몇년이 흐른 모 예능 프로그램에서 고등학생 두명이 이 노래에 맞춰 굉장히 재미나게 춤을 추는 영상이 흥행하면서부터였다.
SBS 예능 프로그램 <자아도취 노래방>에서 두 여자 고등학생이 "두 여자쇼"라는 이름으로 이 <Emotion>을 춘것이 화제가 되어, 무려 2005년도 유튜브 초창기 시절에 이 영상이 크게 화제가 된 것인데 이 영상은 <'''Korea Madness'''>라는 이름으로 아직도 유튜브에 존재하는 영상이고, 댓글을 살펴보면 해외 네티즌들이 "내 첫 유튜브 영상이었음"이라는 식으로 성지순례를 할 정도로 당시 한국 문화가 지금처럼 유행하지 않던 시절에 먼저 화제가 될 정도로 유행을 탔던 '''원조 한국 UCC'''였다. 나중에 유명세를 탄 영상은 그 유명한 춘브라더스의 중화반점 정도다.
현재까지 조회수 1000만회를 달성한 이 영상을 계기로 다시금 <Emotion>이 암암리에 사랑받기 시작했으며 이후 2007년부터 유채영이 각종 예능 버라이어티에서 전성기를 누리자 자학개그 식으로 유채영이 여러 방송에서 "삼지창"을 쓰고 부르는 모습이 히트가 돼서, 당시 수많은 연예인들이 삼지창을 쓰고 <Emotion>을 패러디 하기에 이른다.
그 연예인들만 해도 이효리, 김나영, 버스커버스커, 한상진등이 었으며 한동안 예능가에서 이 <Emotion>이 큰 인기를 모았다.
하도 여기저기서 Emotion을 해대는 바람에 강호동은 유채영에게 "이 노래 당시에 1위 했죠?"라고 물어볼 정도로 뒤늦게 인기를 끌기도 했다. 그리고 이 질문에 유채영은 멋쩍은듯이 이정현의 눈 부채에 밀려 중국으로 날아갔다고 센스있게 받아쳤다(...).[9]
어찌보면 발매 당시에 걸림돌이 됐던 '''삼지창이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 이후 주영훈은 불후의 명곡에서 이 곡을 불운의 명곡으로 소개하기도 했고 유채영 또한 이 노래를 아주 좋아해서 많이 아쉽게 생각했다고 한다.
2.2. 솔로 2집 <Shake>
1집 활동 종료 이후 기존 소속사 id Media가 폐업하면서 자연스럽게 FA 시장에 나온 그녀는 예능 활동을 번갈아하면서 2집 앨범을 제작할 소속사 gomax Music을 만났고, 2001년 9월 2집 앨범 <Shake>를 발매했다. <Shake>는 유로팝과 일렉트로니카 색채를 이어간 댄스 풍의 곡이었고 기존의 다크하고 카리스마 있는 분위기에서 밝고 건강한 느낌의 컨셉을 선보였다.
당시 새로운 소속사 gomax Music은 SM의 투자를 받아 해당 앨범을 SM 배급으로 발매하였다. 그래서 발매 초창기 SM 관련 행사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렇게 2집 앨범을 내놓고 케이블 음악 방송과 여러 잡지를 통해 얼굴을 알린 유채영은 예능 활동까지 중단하면서 의욕을 펼쳤지만 활동 시작과 동시에 '''사장님이 잠적'''해버리는 최악의 상황이 발생했다. 아마 투자금을 먹고 날랐을 가능성이 높으며 이 사건으로 현재까지 2집 앨범은 음원사이트에서 서비스가 되지 않고 있다.
결국 유채영은 2집 활동을 잠시 중단하고 고민하다가 2001년 12월께부터 자신이 직접 사비를 들여 운전하고 매너지들 월급 주고, 코디네이터도 직접하였고 심지어 의상도 직접 협찬 받으면서 활동을 힘겹게 이어가기 시작했다. 앨범 땡스투에는 멀쩡히 코디팀과, 매니저 팀의 이름이 등장하나 2001년 9월 첫방송 이후 갑작스레 3개월 간의 공백이 생겼고 2001년 12월부터 다시 방송활동을 이어갔는데 이때부터 초반 코디 컨셉과는 조금 다르게 획일된 컨셉이 아니라 조금 중구난방 스타일의 의상으로 무대에 올랐다.[10]
하지만 혼자 모든 것을 해결하기에는 너무나 힘든 일이었고 2집 앨범의 반응도 저조해서 결국 얼마 못가서 활동을 접게 되었다. 당시 2집 앨범의 후속곡으로 생각해둔 <울랄라>라는 곡은 유채영은 물론 지인들도 좋아하는 곡으로 케이블 방송[11] 과 몇 번의 지방 행사 무대에서도 선보였지만 우수한 곡 퀄리티를 가졌음에도 결국 정식으로 활동하지 못했다. 몇년 뒤 라디오를 듣던 와중 친구들과 함께 놀다가 모 방송에 사연 신청을 했는데 전화 연결이 당첨돼서 유채영 본인이 직접 자신임을 밝히고 이 <울랄라>를 신청했다는 일화가 있다. 친구들도 이 <울랄라>라는 노래를 참 좋아했다고.
그렇게 2집 활동을 마친 이후 유채영은 2002년 영화계로 발을 돌려 특유의 오버 액션으로 영화 색즉시공의 치어리더 주장 한유미 역으로 캐스팅 돼 본격적인 코믹 연기를 선보이며 배우로서 활동을 이어갔다. 이때 매니저 없이 혼자 스케쥴을 돌아다니며 많은 고생을 했다고 알려진다.
그래도 영화가 좋은 반응을 얻어 이후 여러 작품에 코믹 배우로 등장하여 활동을 이어갔으며, 가수 활동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2003년 개인 회사를 차려 후속 앨범을 준비했다.
2.3. 발매되지 못한 솔로 3집과 수억대의 사기 피해
유채영은 2003년 본인 회사를 차려, 3집 앨범을 제작하기 위해 각 분야의 스탭들을 직접 섭외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이때 '''유명 작곡가들과 감독들이 유채영을 상대로 엄청난 사기 행각을 벌이기 시작'''하는데 이것이 아주 끔찍할 정도로 악질적이었다. 앨범의 프로듀서로 섭외된 모 유명 작곡가는 유채영에게 곡을 주기도 전에 작사와 작곡비를 선불로 요구했고 이 금액이 '''1억 5천만원'''이었다.
그 이후부터 프로듀서는 연락이 잘 안되기 시작하더니 조금 의아하긴 했지만 워낙 유명한 작곡가라 의심할 여지가 없었던 유채영은 그를 철석같이 믿었고, 일단 앨범 활동을 위한 매니저도 섭외에 나선다. 매니저는 아는 지인을 통해 소개받았는데 그 매니저가 케이블 부터 홍보를 돌려야겠다며 3천만원 입금을 요구했는데 이 조차도 아는 지인에게 소개 받았기에 의심의 여지 없이 바로 보내줬다고 한다.
이후 매니저와는 통화만 하고 서로 얼굴은 마주치지 않은 상황(...)이었는데 어느날 매니저는 지금 거의 홍보 준비가 다 되었는데 조금 아쉬운 부분이 있다고 하며 '''2천만원을 추가로 요구'''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이미 유채영은 돈을 거의 다 써버린 상태였고 일처리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기에 고민했지만 '''이 부족한 PR비 때문에 또다시 활동이 수포로 돌아가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결국 2천만원을 보내줬다고 한다. '''그런데 그 날부터 매니저는 연락두절이 되었다고(...)''' 이후 행방을 알아보니 이 사기범은 해외로 도주했다고 한다.
한편 연락이 잘 안되던 작곡가는 어느 날 타이틀 곡이라며 곡을 두 곡을 겨우 보내줬는데 가사도 멜로디도 없이 "붐붐붐(...)"하다 끝나는 말도 안되는 트랙들을 보내주었고 이 곡을 가지고 빨리 뮤직비디오를 찍으라고 말해서, 뮤직비디오 감독 또한 지인에게 소개받아 진행하게 된다. 그렇게 감독을 소개를 받고 뮤직비디오 회의를 하는데 준비에 필요하다며 2천만원 송금을 요구했다.
그렇게 2천만원을 간신히 모아서 보내준 다음 촬영 현장에 가보니 세트장이 스티로폼으로 되어있었고(...) 말 그대로 '''엉망진창'''인 세트를 준비해 뒀다고 한다.
말도 안되는 세트장이었지만 일단 해야해서 억지로 춤을 췄는데 얼마 안가 모두 부숴져버렸고 결국 유채영은 그 자리에서 펑펑 울고 말았다고 한다. 지금 이 사기 피해를 다시 정리해도, '''정말 있을 수 없는 악질적인 사기 행각'''이었으며 더 안타까운 것은 유채영이 당시 누구한테 조언을 구할 사람이 없어서 이 수억대의 피해금을 고스란히 사기범들에게 먹히고 '''어떠한 보상 조차 받지 못했다'''고 한다.
이렇게 전재산을 투자한 3집 앨범이 모두 물거품이 되버린 유채영은 강아지 사료조차 줄 돈이 없었고 하루하루 쌀 걱정을 해야할 정도로 절망적인 상황이 되어버렸다.
이 앨범은 당연히 어떠한 형태로도 발매되지 못했으며, 이후에도 여러번 회사를 옮기며 R&B 음반도 준비해보고 가수 활동에 나섰지만 회사가 망하거나 사라져버려서 한동안 음악 활동을 못하게 되었다. 공식적으로 발매된 앨범은 2장(Emotion, Shake)지만 모 인터뷰에서 사적으로 갖고 있는 앨범은 4장 정도 된다고한다.[12]
사실 2003년 쯤에 자신의 초대 팬카페[13] 에도 곧 3집이 발매된다고 기대해달라는 글을 몇번 썼었는데 이때 사기를 겪고나서 팬카페에 더이상 글을 올리지 않았다. 이후 이 피해 사실을 밝히고 사기 행각이 뒤늦게 알려지자 많은 팬들과 대중들이 분노했다.
이후 인터뷰를 통해 이 시기를 긍정적인 어머니 덕에 겨우 이겨낼 수 있었다고 하며 자신의 긍정적인 성격으로 이 위기를 극복했다고 말했다.
여담이지만 유채영이 3집 앨범을 구상할 당시 주영훈이 건넨 곡이 훗날 김종국의 히트곡이 된 '사랑스러워'였다고 한다. 이 노래가 여러 가수한테 오고 갔는데 그 중 한명이 유채영이었다고.
3. 방송 탤런트로서 제2의 전성기
3.1. 예능가의 핫이슈로 떠오른 유채영
3집 앨범의 사기 사건 이후 침체된 기간을 겪던 유채영은 다행히 이 시기를 잘 이겨내 재기를 꿈꿨으며, 영화 색즉시공을 토대로 선보인 코믹 연기를 기반으로 여러 드라마에 단역, 조연으로 출연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별다른 활동이 없었지만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온 유채영의 용기는 대단'''했고, 가수로서 다시 활동하기 위한 그의 굳건한 의지도 있었다.
이 시절 방송 스케쥴이 없어서 들어오는 섭외마다 마다하지 않고 했었는데 어느 날은 술을 먹으며 토크하는 방송에 섭외가 들어오자, 술 한잔도 못하는 유채영이 방송을 못하게 될까봐 술을 아주 잘마신다고 말하고 이 방송에 출연했다. 그랬는데 주는 데로 받아마시다가 결국 PD가 "유채영씨 개인기 좀 해주세요, 개인기!"라고 말하자 취한 유채영이 '''"그렇게 잘하면 너나해~!"'''라는 주옥같은 멘트를 날려 한동안 방송을 쉬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이후 유채영은 여러 케이블 드라마에 출연해 찰진 연기력을 선보여 조금씩 대중들에게 다시금 주목받기 시작하는데 tvN 케이블 드라마 <쩐의 전쟁>에 출연해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의 연기를 펼쳐 여러 곳에서 호응을 얻었다. 이 영상에서 선보인 주옥같은 욕 연기는, 정말 말그대로 연기이며 '''실생활에서 유채영은 욕을 거의 쓰지도 않는 내성적인 성격'''이라 더더욱 고평가 받는 영상. #
얼마 뒤부터 유채영은 영화 색즉시공2에 출연하고 여러 예능 방송에 출연하기 시작하는데 이때 KBS 불후의 명곡 시즌1에서 엄청난 코믹 액션과 애드립을 선보여 시청자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기 시작했고 여러 예능 프로그램에서 정말 엄청난 애드립과 코믹 댄스를 선보이자 여러 방송계에서 유채영을 섭외하기 시작한다.
여러 방송에서 몸을 아끼지 않는 입담과 춤을 선보인 유채영은 이내 수년만에 소속사를 찾아 안정적인 활동을 하기에 이르렀다. 사실 불후의 명곡 출연당시 소속사가 없어서, MC가 소속사 사장들에게 한마디 하라고 하자 이 방송을 본 봄날 엔터테인먼트는 긴급 회의를 열고 어떻게든 유채영을 데려오자고 회의할 정도로 당시 유채영이 방송가에서 상당한 이슈를 몰고 다녔다.
또한 2008년에는 수년간 교제하던 남자친구와 결혼식을 올리며 일과, 사랑 두 마리 토끼를 잡아 전성기를 누렸고 유채영 본인도 지금이 자기 인생의 전성기인거 같다고 말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았다.
결혼을 위해 남편하게 프로포즈 하는 모습을 담은 방송 "체인지"에서 보여준 모습이 시청자들에게 많은 공감과 감동을 주어 이 시점부터는 '''마냥 웃긴 연예인이 아니라 어딘가 마음이 편안하고 정감 가는 호감 연예인'''으로서의 인식도 있어서 폭넓은 지지를 받아 안티가 거의 없는 연예인이라는 칭호를 얻기도 했다.
3.1.1. 수년만에 생긴 팬클럽 <가디스>
그렇게 유채영이 여러 곳에서 활발히 활동하자 하나 둘씩 새로운 팬들이 생겨났고 기존의 팬들도 하나 둘씩 유채영을 응원하기 시작하면서 다음에 유채영 팬카페 <가디스>가 개설되었다. 과거 다른 이름의 팬카페가 존재했으나 여러 사정으로 정전 상태에 접어들었었고 이후 유채영이 다시 활발하게 활동하자 생겨난 새로운 팬클럽인 셈.
그 후 다음 카페측에서 이 카페를 홍보해주고, 당시 유채영과 측근들도 가입하는 등 단기간에 유채영을 응원하는 팬들이 많이 가입하였으며 얼마 뒤 본인이 진행하던 방송 <오늘밤만 재워줘>에서 유채영은 오랜만에 팬카페가 생겼다며 감동의 눈물을 흘렸고 이 모습이 방송을 타자, 기하급수적으로 회원수가 늘어나 무려 1만명이 넘는 회원수를 거느리게 된다.
당시 긍정적인 이미지로 사랑받는 연예인이었기에 이 팬카페는 많은 접속자와 회원수가 생겨났고 유채영 역시 지독한 컴맹이였지만 이 카페에 큰 애정을 두고 거의 매일 글을 쓰고, 접속하기도 했다.
유채영을 부르는 팬들의 호칭은 대표곡 <Emotion>을 딴 '''이모'''였으며 유채영 역시 이 별명을 아주 좋아했다.
훗날, 유채영이 사망하고 모 커뮤에서 이 팬카페가 생긴 이유가 유채영을 조롱하면서부터 생긴것이라는 '''헛소문'''을 퍼뜨려 가디스에 가입했던 멀쩡한 회원들이 들고 일어서고 운영자가 반박하는 일까지 벌어졌는데 상식적으로 고인이 생전 애정을 갖고 행복한 기억을 가진 팬카페를 왜곡하여 글을 올리는 일은 하지말자. 이후 반박글이 올라오자 최초 유포자는 자취를 감추는 치졸한 행보를 보였다. 유채영 팬카페의 진실이라고 떠도는 헛소문에 대한 반박문.[14]
현재도 이 팬카페는 계속 방문하는 팬들이 있으며, 몇년동안 자리를 지키는 회원들이 있다. 그리고 그 회원들은 설립 초반부터 있던 회원들이고 전혀 헛소문속에 등장하는 커뮤니티 회원도 아니고 유채영을 진심으로 응원하는 팬이다.
3.2. 8년만의 가수 복귀, 디지털 싱글 <좋아>
몇년만에 봄날 엔터테인먼트[15] 와 계약을 체결하고 활동을 이어가던 유채영은 2001년 <Shake> 이후 8년만에 앨범을 발매한다. 사실 회사와 계약하면서 가장 부탁했던 것이 앨범 활동이었기에 더욱 더 값진 컴백이었다. 당시 주가를 올리던 신사동호랭이가 작곡한 복고 풍의 <좋아>가 타이틀 곡이었고, 디지털 싱글로 발매하기로 결정된다.
사실 앨범 작업 당시 구상한 컨셉은 70~80년대 복고풍이었고 가사에 등장하는 요일이 "토요일"이어서 노래 제목도 <토요일 좋아>였는데 공교롭게도 같은 시기, 같은 녹음실에서 컴백을 준비한 손담비와 '''컨셉도 일치하고 심지어 요일까지 일치해서''' 결국 일주일 먼저 컴백한 손담비와 겹치지 않기 위해 제목도 수정하고 컨셉도 수정한다.
노래도 상당히 잘 뽑혔고 유채영이 가장 주목받던 시절이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별다른 인기를 누리지 못하고 몇주간의 방송활동을 끝으로 활동을 종료했다. 그래도 활동 기간동안 여러 음악방송에 참여했으며 곡 퀄리티도 상당히 호평받은 바 있다.
생각해보면 <Emotion>때도 그러더니 <좋아>때도 대형 여가수와 컨셉도 겹치고 시기도 귀신같이 겹쳐서 의도치않게 유채영이 안타까운 상황이 되어버린 것(...). 이쯤되면 운이 지지리 없어도 너무 없는 케이스였다.
여담으로 안무 디렉터가 오랜만에 춤을 추는 유채영이 잘 따라올까 생각했는데 예전 그 춤실력은 어디 안간다고, 생각보다 너무 빨리 습득해서 굉장히 놀랬다고 한다.
또 싱글 앨범에 Emotion 리믹스를 비롯한 세곡(최종적으로 신곡은 두곡 수록된 셈.)이 들어갔는데 PR용 비매 CD를 보면 공식적으로 발매되지 않은 미공개 곡의 가사가 대신 실려있다. 아마 신곡 3곡을 녹음했는데 한곡이 누락된듯.
4. 이후 행보
4.1. 점점 줄어드는 활동
싱글 <좋아> 활동 이후, 계속 예능 활동을 이어가던 유채영은 2011년쯤부터 방송가에서 활동이 조금씩 줄기 시작한다. 사실 그 시기 소속사와의 계약이 만료되고 다른 소속사로 이적했기 때문이고 당시 측근에 따르자면 이때 스케줄이 너무 많아서 감당하기가 힘들다보니 결국 회사와 일을 정리한 뒤 다른 회사로 갔다고 한다.
이후 유채영은 몇몇 드라마에서 단역으로 출연하고 가끔 예능 게스트로 출연했으며 한동안 방송활동이 뜸해져갔다. 이 시기 출연한 드라마는 천명, 패션왕 등이 있다.
2013년에는 tvN 더폰 코리아에 출연했는데 당시 앨범 제작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출연했다고 밝혔으며 연예인임에도 과감히 출연 의지를 불태웠다고 알려졌다. 제작진에 따르면 유채영은 새 음반을 발매하고 싶었으나 곤란을 겪어왔다고 말했다.
이 시기에도 유채영은 가수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이후 유채영은 MBC 라디오 "좋은 주말 김경식, 유채영입니다"를 진행했고 거짓말처럼 '''이 방송이 유채영의 유작 방송이 되어버렸다.'''
5. 별이 지다
그러던 2014년 7월 21일, 언론을 통해 유채영이 위독하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너무 갑작스러운 소식에 많은 이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것도 위암 초기가 아닌 말기였으며 아주 위독하다는 얘기여서 그 전까지 이 사실을 모르던 팬들은 충격에 빠졌다.
유채영은 2013년 10월부터 투병 생활을 했고, 항암치료를 하며 라디오를 진행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몸이 굉장히 약해졌음에도 끝까지 방송을 위해 매진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대중들은 더욱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7월 22일, 고비를 넘겼고 연예계 동료들과 대중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유채영의 호전을 기원했으나......
이틀 후, '''그녀는 결국 우리 곁을 떠났다.'''
정말 갑작스레 우리 곁을 떠난 그녀를 많은 대중들과 연예계 인물들이 추모했으며 장례식에는 수도 없이 많은 동료들이 마지막 가는 길을 찾아왔다. 특히 절친했던 김현주와 동료 방송인 송은이, 박미선도 함께 임종을 지킨것으로 알려졌고 별다른 유언은 없었지만 남편과 김현주, 가족들을 차례대로 쳐다보고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장례식장에 찾아온 과거 동료들은 유채영이 생전 너무 착했고, 너무 믿기지 않는다는 얘기를 했으며 그와 함께 일했던 동료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그와 함께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는 말을 전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친구사이였던 DJ DOC의 김창열은 당일 라디오를 진행하다 오열했고, <좋은 주말 김경식, 유채영입니다>는 고인의 목소리를 담은 추모 방송을 내보냈다. 유채영이 떠난 7월 24일은 실제로 비가 추적추적 내렸는데 하늘마저 유채영이 떠나간 것을 슬퍼하는 듯 보였다.
향년 4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유채영은 아직까지도 그녀의 행복한 에너지를 그리워하는 사람이 많다.
유채영이 사망한 이후 쿨 멤버들은 히든싱어 등의 방송을 통해 원년멤버 유채영에게 그리움을 전했고, 김현주 역시 다시는 유채영같은 친구를 만나지 못할것 같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김현주는 지난 2015년 ‘가족끼리 왜이래’ 종영 인터뷰에서 “제일 친한 친구, 지금은 없다”며 “원래 유채영 씨와 제일 친했다”고 말문을 열었다.이어 “채영 언니는 나를 무한 애정의 시선으로 봐줬다”며 “늘 긍정적으로 봐주고 날 항상 지지해줬다”며 각별한 애정을 드러냈다.
아울러 “내가 어두운 터널에서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채영 언니의 힘이 크다”며 항상 곁에서 자신을 향해 긍정적인 발언과 아낌없는 사랑을 줘서 슬럼프를 극복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많이 그립고 또 그런 친구를 사귈 수 있을까 생각이 든다”며 “그런 사람이 나한테 또 올지 남자친구보다 더 그랬을까?라는 생각이 든다”고 전했다.
더불어 “남자도 그렇게 날 사랑해주진 않을 것 같다”며 “너무 고마운 사람이고 짧게 함께해서 아쉽다”고 너무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故 유채영을 그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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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 고인과 가장 각별했던 배우 김현주의 인터뷰 中
[1] 그러나 이후 유채영이 데뷔하면서 유채영을 찾아왔고 그 날은 솔로 1집 <Emotion>의 첫방송 날이었다. 아버지의 얼굴은 본적도 없었지만 아버지의 얼굴을 보자마자 "아빠"라는 말이 절로 나왔고, 원래 아버지에게 원망이 많았지만 그때 아버지는 이미 간암 말기였다고 한다. 죽기전에 딸 얼굴을 보기 위해 찾아왔고 유채영에게 사과하며 마지막 여생을 딸과 함께 보냈다. 아버지는 1999년 간암으로 돌아가셨고 아버지가 살고 계신 부산에서 마지막 임종을 지켰다.[2] 원래 내정됐던 타이틀 곡은 "끝없는 사랑"이었는데, 막판에 교체되었다고.[3] 3곡이 들어간 프로모션 싱글이 95년 12월부터 돌기 시작했고 앨범은 그해 말에서 96년 1월쯤 발매된것으로 추정된다.[4] 다만 불화설은 사실이 아니며, 각자 하고 싶은 음악이 있어서 헤어졌다고 한다. 심지어 두 사람간의 폭행설도 있었지만 이것도 사실 무근이다. 2014년 유채영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 모 언론사에서 대니 신과 인터뷰를 진행했을 때 모두가 유채영을 사랑했으며 그녀가 호전되기를 바란다고 인터뷰했다.[5] 또 세바퀴 방송에서는 이름만 대면 알만한 프로듀서가 사기를 쳤다고 했으나 당시 96년 앨범에 참여한 프로듀서 중에 유명인은 단 한명도 없다. 유채영이 수억대의 사기를 당한 앨범은 2003~2004년쯤에 발매될 예정이었던 3집 앨범이다. 당시 유채영을 좋아하던 팬들은 어느정도 알고 있는 사실.[6] US 해체 이후 대니는 힙합씬에 머무르며 여러 가수들을 제작했고 애프터스쿨 가희가 데뷔전에 참여한 힙합그룹 <DVS>로 활동도 하며 꾸준히 음악활동을 이어갔으며 해외가수 내한에 힘 쓰는등 여러 방면에서 활동했다고 알려진다.[7] 그래서인지 이 회사에서 최초의 한일합작 그룹 Y2K와 써클 등이 데뷔하기도 했다.[8] 이 영상은 나중에 전설의 토크 박스라는 주제로 <놀러와>에서 리앵콜로 선보인 에피소드 영상이다.[9] 실제로 유채영이 영화배우로 활동할 당시 Emotion을 중국어로 번안하여 활동해 인기를 꽤 얻었다고.[10] 그래서 9월에 프로모션 했던 엠넷 등 케이블 방송분의 일관된 컨셉과 연말 되어서야 출현했던 지상파 무대 컨셉이 완전 다르다. 지상파도 어렵게 딱 2번 출연했다. KBS 뮤직뱅크, SBS 인기가요 각각 1회[11] 현재는 사라진 방송국인 '''채널V'''의 음악방송에서 한 번 올랐다고 전해진다. 이 날 컨셉은 모피 롱코트에 귀 밑으로 오는 염색한 바람머리 숏컷 스타일이었다.[12] 그 중 한장은 96년 쾌속이라는 앨범일듯.[13] 카페 명은 <유채영을 사랑하는 모임>이었고 다음 초대 유채영 팬카페였다. 그러나 2004년부터 카페가 정전상태에 접어들었고 2008년에 새로운 팬카페 <가디스>가 창설되어 많은 회원을 거느렸었다.[14] 당시 모 커뮤니티에서 유채영을 드립용으로 쓰다 흥하자, 유채영 글이 너무 많아져서 여기가 유채영 팬카페냐며 다른 곳으로 옮기라는 의견이 등장했고 장난 삼아 팬카페를 만들어서 스탭들도 해당 커뮤의 회원들이었지만 얼마 안가 모두 탈퇴해버려서 카페가 정전되었다는 괴소문을 만들었다. 반박문은 보면 알겠지만 이 사실이 매우 웃긴게 언급하는 해당 커뮤니티의 회원들이 다 모여도 1만명이 넘는 <가디스> 회원수를 만드는거 부터가 말도 안되는 일이며, 당시 카페에서 스탭으로 활동하고 카페에 운영했던 사람은 이미 수년전에 개설되어 현재는 등업도 안되는 원조 유채영 팬카페 회원이기도 하다. 그리고 카페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사람들도 모두 금시초문이라는 내용이 흘러나왔고 "<가디스> 회원들의 추억을 부정시키는 찌질이의 소행에 모두 분노했다."[15] 현영, 김나영 등이 소속되었던 엔터테인먼트 회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