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비/인간성
1. 개요
조비의 인간성에 관해 서술하는 문서. 여러모로 인간성에 문제가 많았다. 당장에 이 항목에 인간성에 대해 비판하는 내용이 무척 많다. 여러 이유가 있기는 했지만 조조가 조식을 오랫동안 후계자로 고려한 것은 조비의 이 인간성 문제도 있었다. 그리고 결국 아버지의 우려대로 이 인간성으로 인해 방계종친인 하후상을 죽음으로 내모는 최악의 선택을 저지르고, 아내 문제와 자식 방임은 아들의 인생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치게 되어[1] 초반부터 위나라 멸망의 씨앗을 제대로 뿌리게 된다. 개인적으로 오질 같은 소인배를 총애한 것도 문제로 꼽힌다.
무재와 문재에 뛰어난 동생들인 조창과 조식은 아버지 조조에게 유독 총애를 많이 받았고 반면에 평범한 조비는 늘 동생들의 타고난 재능에 압도당하는 형국이여서 조조가 다소 조비를 멀리한 묘사가 많다. 거기까지면 모르지만 뛰어난 동생들로 인해 후계자리를 두고 처절하게 경쟁해야되는 환경이었기 때문에 애초부터 있던 선천적인 인성 문제가 더욱더 극대화 된 사례라고 분석할 수 있다.
2. 치졸함과 뒤끝
조비는 자기애성 성격장애가 의심될 정도로 인격이 엉망이었다. 영화, 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금수저 재벌 2세를 생각하면 간단하다. 오만하고 자의식이 강한데다 귀하게만 자라 쓴소리 싫어하고 아첨을 좋아했으며, 한 번 찍힌 사람은 한참 뒤까지 기억했다가 기어이 보복했고, 친한 사람에게도 지나칠 정도로 오지랖이 넓었다. 거기다 하필 이 인간이 황제였으니, 맘에 안 드는 사람은 유배를 보내거나 죽이곤 했다. 오죽하면 삼국지 관련 커뮤니티에서 조비의 별명은 사이코패스 아니면 조'''막장#s-1.1''' 등으로, 좋은 별명은 없다.[2]
이런 인성질의 대부분이 조비가 황제가 되고 난 후에 벌어졌는데, 조비의 재위기간은 '''불과 6년'''이었다. 만약 조비가 장수하면서 수십년 동안 황제 자리에 있었다면 지금보다 몇 배, 몇십 배는 더 분량이 많았을지도 모른다.
몇몇 부분은 조비의 입장, 정치적인 상황을 고려해서 판단해야 할 문제도 있기에 몇몇 인물에 대해서는 다른 시선도 서술해두었다.
형 조앙#s-1을 죽인 책임을 물어 장수를 몰아붙인 끝에 자살하게 만들었다는 기록이 〈장수전〉에 주석으로 나온다.[3] 조비는 조조와 같이 완성에 있으면서 형과 사촌형이 어떻게 죽었는지 봐야 했고 장수에게 자신의 목숨마저 위협받았다. 그가 이복형인 조앙을 잘 따랐는데 이때 조앙의 죽음을 보고 트라우마가 생겨서 사람이 비뚤어졌다는 해석도 있다.# 이 가설대로면 연회 중에서도 계속 그를 쏘아붙이고 몰아댔던 것도 큰형에 대한 마음의 부채 문제로 보아야 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건 조비의 개인적인 사정이고 그 당시 장수는 분명 자비를 구하며 스스로 항복해온 '투항자'이고, 조조는 이런 장수와 사돈까지 맺고 환영잔치를 벌이며 과거를 묻지 않겠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조조가 이런 태도를 보인다면 아들이자 신하인 조비도 겉으로나마 따르는게 마땅한데, 대놓고 장수를 불러다가 과거일을 거론하며 직접적으로 무안을 준다는건 조비의 미성숙한 성격을 잘 보여준다. 아버지 조조의 명을 어기고 얼굴에 먹칠을 하는거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조비의 이런 노골적인 행동이 독단적인 게 아닌 조조의 의도라는 추측도 있다. 조비가 한두번도 아니고 계속 이러면 조조 귀에 안 들어갈 수가 없는데, 그럼에도 조조는 이에 대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 근거라는 것. 자세한 내용은 장수 문서 참조.
하후상은 조비의 친구로, 조비의 일족인 덕양향주 조씨[4] 와 결혼했는데, 본처 덕양향주를 놔두고 다른 애첩을 매우 총애했다. 그러자 조비는 그 애첩을 죽여버리는 오지랖 넘치는 일을 저질렀다. 물론 자기 일족이랑 결혼해놓고 소홀히하는 것이 불쾌한 것 까지는 이해가 가지만 저렇게 무턱대고 죽이는 건 정말로 선 넘은 짓. 결국 하후상은 슬픔에 못 이겨 애첩의 무덤을 파 시체를 껴안는 등 정신 질환을 보이다 결국 병을 얻고 죽어버린다.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조비의 절친이었던 터라 그의 잔악한 성품과 복수심을 알고 있었기에 그 배신감과 공포심이 얼마나 컸을지 자명하다. 조비는 그가 정신적 충격으로 애첩의 무덤을 팠다는 소리를 듣고는 잘못을 뉘우치기는 커녕 이래서 두습이 하후상을 하찮게 여겼다는 말이나 했다. 물론 총애하는 하후상이 진짜로 이 때문에 병을 얻어 죽을 줄은 몰랐는지 하후상이 죽어갈때 직접 면회하여 울었지만 결국 사과했다는 기록은 없다. 결과적으로 이는 조비가 저지른 최악의 실수라고 볼 수 있는데, 그의 죽음으로 인해 유사시 황실의 보호막 역할을 할 인물이 조진, 조휴 정도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들의 후손들이 유능했음 다행일텐데, 그 후손은 숙부와 아버지에 비하면 함량미달의 인물이었고 결국 고평릉 사변이 일어나 사마의 일파에게 조상 일파가 숙청당하면서 위나라는 바로 멸망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5] 어쩌면 결국 조비의 행동이 위나라 멸망의 단초가 되었다고까지 볼 수 있겠다.
왕충이 기아에 못 이겨 인육을 먹은 적이 있었다. 조비가 오관 중랑장이던 시절, 조조를 수행하는 왕충이 식인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던 조비는 광대를 시켜 무덤에서 해골 하나를 도굴한다. 그리고 그걸 왕충의 안장에 매달게 해서 웃음거리로 삼았다. 이 일화는 오질과의 연회 자리에서 조홍과 함께 진땀을 뺐던 에피소드와 함께 거론되어 조비 정권에서의 왕충의 설움을 강조하는 데 언급되곤 한다. 그리고 고작 사람을 조롱하겠다는 이유만으로 멀쩡한 무덤을 도굴해 유골을 꺼내왔다는 것도 분명 잘못된 행동이다.
조비의 인간성이 비판받는 데 빠지지 않는 대목. 아버지 때 뛰어난 활약을 펼쳤던 명장#s-2 우금[6] 이 관우에게 항복했다가 손권에 의해 석방되고, 항복 사절과 함께 돌아온 후, 오나라에 사자로 보내면서 가는 중에 조조의 묘에 들러서 참배토록 했는데 그곳에다 미리 관우가 방덕과 우금을 사로잡는 장면을 그려두었다. 그것도 방덕은 떳떳한 모습인 반면 우금은 비굴하게 항복하는 모습으로 그렸다. 이를 본 우금은 울화통이 터져 병을 앓다가 죽게 된다. 게다가 사후에 준 시호는 여(厲)로, 시법의 해석에 따르면 "무고한 이들을 살육함(殺戮無辜曰厲)"을 뜻한다. 심지어 막상 우금 앞에서는 위로를 하며 "재해를 만나서 진것이지 우금의 잘못이 아니다"라는 식의 말을 해놓고 뒤로는 저런 졸렬한 행동을 저질렀다. 우금의 항복에 대해서는 오늘날도 의견이 상당히 나뉘지만, 조비가 우금을 죽게 만든 수작이 실로 비열하고 치졸했다는 것은 대체로 부정되지 않는다. 우금의 투항이 괘씸하다면 법으로 따져서 공정히 처벌하는 것이 순리고, 하다못해 실망했더라도 과거의 공을 기억해서 그냥 적당히 기용하지 않는 선에서만 끝내기만 해도 되었을 걸 정신적으로 커다란 모욕을 줘서 홧병에 걸려 죽게 만든 만큼 조비의 도덕관을 의심케 한 사건이다. 사마광도 자치통감에서 조비가 우금을 죽이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 그 수법의 비열함은 임금이 할 짓이 아니라고 직접 의견을 적었다. 수십 년 조조를 따라 종군하며 크고 작은 공훈을 세웠고, 완에서는 위기에 몰린 조조를 구하기도 했던 장군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도 없는 짓이니만큼 더더욱 많이 거론되는 일화이다.
220년 장수교위(長水校尉) 대릉이 조비가 사냥하러 가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고 여러 차례 건의하자, 조비는 크게 노하여 대릉에게 사형죄를 내렸다. 그래도 나중에는 이보다 한 단계 낮은 형벌로 경감시켰기에 그나마 낫긴 하다. 이 사례처럼 조비는 수렵을 광적으로 좋아했다.[7] 사실 한 나라의 황제가 수렵을 좋아했다는 것은 단순히 황제가 할 일 안 하고 농땡이 부리는 수준을 넘어 백성들에게 심각한 민폐를 끼치는 일이었다. 한 번 사냥갈 때마다 몰이꾼에 호위병에 수천 명이 동원되는 건 예사라 적지 않은 예산이 소모되었고, 넓은 사냥터 부지가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라 대개 도읍 주변의 민가와 논밭을 밀어버리고 만든다는 것도 큰 문제였다. 피해를 입은 백성들에게 돌아가는 보상도 마땅치 않았다. 한국사의 폭군인 연산군이 백성들에게 가장 크게 끼친 민폐 역시 사냥이었으며, 충혜왕도 사냥에 탐닉했다는 기록이 있다.
조비가 사냥을 나갔을 때 나무 울타리가 허술해 사슴이 울타리를 넘어 도망치자 분노한 조비가 칼을 뽑아서 감독하는 관리들을 전부 잡아들여 죽이려고 했다. 이때 소칙이 머리를 조아리고 조비에게 그들을 죽이지 말라고 간언하자 조비는 소칙에게 그대는 충직한 신하라고 말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나마 좋게 끝난 것 같지만... 얼마 후 소칙을 타지로 좌천시켜 버리고(!) 소칙은 임지로 가던 길에 사망한다.
악사 두기(杜夔)가 주종공(鑄鐘工) 시옥이 만든 종의 소리를 듣고는 퇴짜를 놓았는데, 이에 시옥이 억울하다고 하여 조조가 직접 시험해보니 두기의 말이 맞아 시옥과 그 두 아들에게 말을 돌보는 벌을 내렸다. 그런데 시옥과 친했던 조비는 이 일로 두기에게 불만을 품었다. 또한 일찍이 두기에게 좌전 및 빈객들 가운데서 생황을 불고 금술을 타라고 명하자 두기가 곤란한 기색을 보인 적이 있어서 이 일도 앙심을 품고 있었다. 결국 조비는 트집을 잡아 두기를 체포해 옥에 가뒀고, 두기는 결국 옥사했다.
상술한 우금과 함께 조비의 사이코 일화로 자주 손꼽히는 부분이다. 조비는 어렸을 적 돈을 빌려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당숙인 조홍을 미워했으며[8] 나중에 황제가 되자 트집을 잡아 사형시키려 했다. 하지만 어머니인 변씨가 조비를 질책하는 한편 조비의 아내 곽여왕에게도 조홍이 처형당하면 황후 자리를 보존하지 못한다고 압박하여 곽여왕도 조비를 말려서, 간신히 조홍의 면직으로 끝났다. 이마저도 석방하면서 재산은 몰수했는데 변씨가 다시 조비를 힐난해서 결국 재산도 돌려줬다. 이에 대해 조홍이 재물에 인색했다는 말이 나오기도 하지만, 사실 제아무리 조카라도 돈을 빌려주고 말고는 본인 맘이다. 그리고 조홍은 조조가 서영에게 깨지고 목숨을 잃을 궁지에 몰렸을 때 구해준 적이 있는 정말 위나라 최고의 개국 공신 중 한 명이라는 걸 감안하면 말도 안되는 처사긴 했다. 심지어 조비는 돈을 빌려 놓고 갚지 않는 일도 많았기 때문에 채무자로서도 떳떳한 입장은 아니었다. 게다가 이때는 하후돈, 조인 등이 세상을 떠났기에 조홍은 황족인 조씨 일가의 최고 웃어른이었으며, 군부의 원로이기도 했다. 금전 관계로 이런 거물을 죽이려고 한 조비의 인간 됨됨이는 조홍이 진짜 인색했더라도 그것과는 별도로 욕을 먹어도 싸며, 실제로 중신들이 이 일로 조비를 원망하는 마음을 품었다는 기록까지 있다. 이 일은 당시 곁에 있던 조진 입장에서도 곤혹스러운 것이었다. 일전에 조홍이 오질, 왕충과의 연회 자리에서 조진을 뚱뚱하다고 놀린 적이 있는 상황이었는데,[9] 하필 조진이 옆에 있을 때 조홍을 구금하자 조진이 "이러면 제가 조홍을 모함해서 일이 난 거라고 오해를 받잖습니까"하고 불만을 드러냈음에도 조비는 "내가 조홍을 잡아가둘 뿐인데 네가 왜 난리야."라는 말로 씹었다.[10] 가까스로 풀려난 조홍은 조비를 칭송하는 아부성 가득한 글을 써서 바쳤는데, 말년에 억울하게 감옥살이 및 처형 직전까지 갔다가 간신히 살아난 만큼 더욱 비참해 보인다. 아이러니하게도 조비는 조홍을 괴롭혔던 그해에 세상을 떠나고 조홍은 복직되었으며 그보다 6년을 더 살다가 갔다.
포훈의 아버지 포신은 조조를 초창기에 지지하고 지원해주었다. 조조는 승상이 된 후, 포신의 공을 기려 그의 아들 포소와 포훈을 후하게 대우했다. 포훈은 굉장히 공명정대한 사람으로, 조비의 첩이었던 곽여왕의 동생이 도둑질을 하다 체포되자 봐달라고 하는 조비의 부탁을 무시하고 공정하게 법을 집행해서 사형시켰다. 이 일로 포훈은 조비한테 미운털이 박히게 되었다. 나중에 조비가 조조의 상중에도 사냥을 다니자 포훈이 나서서 이를 절제해달라고 표를 올렸으나 조비는 오히려 표를 직접 찢어버리고 사냥을 나섰다. 이후에도 포훈은 간언을 많이 해서 조비에게 밉보였고 조비는 트집을 잡아 포훈을 잡아들인다. 포훈을 재판하는 관리는 징역이면 충분하다고 했으나 조비는 법을 위반하고 기어코 포훈을 사형시킨다. 이 때 대신들이 공동으로 표를 올려 선처를 부탁했지만 소용없었다. 포훈이 죽고 그 집을 가보니 사사로이 모은 재물이 하나도 없었고 사람들은 그 억울한 죽음을 슬퍼했다. 이마저도 포훈이 죽고 나서 약 두 달 뒤 조비가 죽었는데 그제서야 눈치 안보고 슬퍼할 수 있었다고 한다. 보다시피 사냥에 연루되어 욕을 본 신하만 해도 대릉, 소칙, 포훈 세 명이나 된다. 조조는 비록 권력에 방해가 된다 싶으면 공신이라도 쳐내는 비정한 인물이었을지언정 그릇은 커서 신하들의 간언을 경청하였으나, 조비는 황제로서 민생을 굽어 살펴야 하는 입장임에도 백성에게 부담이 되니 사냥 좀 자제하라는 간언을 한게 고까워서 바른말 하는 신하들을 죽였던 것이다. 이건 암군, 폭군의 가장 보편적인 유형이다.
양준은 인물평을 좋아했는데, 조조에게 자신과 조식을 칭찬하면서도 조식이 아름답다고 말한 이유로 조비는 이를 한스럽게 여겼다. 그래서 완에서 수레를 이끌고 갈 때 저자거리의 열기가 가득하지 않다는 죄목을 달아서 양준을 자살하게 만들었다. 조비의 친구이던 사마의까지 말렸는데도 허락하지 않았다. 사실 양준이 조식의 인물평을 내렸을 때가 아직 조비와 조식 중 누가 태자가 되느냐가 정해지지 않았던 때인 만큼 조비 입장에서는 굉장히 한스러웠을 것이긴 하다. 하지만 그래도 저런 식으로 죽인 것은 너무하다는 평이 다수.[11]
조식과는 친하면서 자신과 친한 하후상과는 사이가 나빴다는 이유로 미워했다고 한다. 허나 순운과 마찬가지로 하후상과 사이가 나쁜 두습은 딱히 미워했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봐서 조식과 친한 것이 가장 큰 이유였을 공산이 크다. 특히 조비는 순운은 미워했으되 그 자식들은 총애했기 때문에 단순히 순운 본인에게만 감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순운은 일찍 죽어서 조비에게 직접적으로 해를 입진 않았다.
조비는 금향공주의 남편 하안을 싫어해서 살아있는 동안 관직에 얼씬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세설신어에 따르면 조비가 하안이 얼굴에 분을 칠하고 다녀서 얼굴이 하얀 것이라고 여기며 망신을 주기 위해 여름철인데 뜨거운 국을 자리에 내오게 했다. 하안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수건(혹은 옷소매)으로 얼굴을 닦았는데, 수건이 (분이 묻어) 더욱 희어졌다고 한다. 하안의 훗날 행적을 보면 조비가 하안을 개인적으로 싫어한 것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뿐만이 아니라 전반적으로 친지에 대해서 알레르기 반응을 심하게 보인 조비 본인의 성향까지 더해진 결과로 보는 게 더 사리에 맞을 것이다. 하안은 조조가 사실상의 양자로 양육한 인물로, 조비가 하안을 가리켜 '가짜 아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이와 관련된 컴플렉스가 작용된 것일 공산도 있다.
정의가 원래 조조의 딸 청하공주와 결혼하기로 하던 걸 조비가 '한쪽 눈이 먼 정의는 너무 못생겨서 안 된다'는 이유로 무산시킨 바 있다. 하필이면 그 대신 혼담을 넣은 상대가 자기랑 친한 호색한에 인간성도 능력도 바닥인 하후무였다는 것이 문제. 훗날 청하공주와 하후무의 결혼생활은 그리 순탄하지 못했다. 조조는 뒤늦게 정의의 재주를 보고 "정의가 장님이었더라도 사위로 삼았어야 했다"며 후회했다. 조비는 즉위 후 하후상이 울면서 이들을 살려달라고 간청하는데도 정의, 정이 형제를 잡아 가뒀다가 죽이고 정의, 정이 형제의 집안 남자들은 어린 아이부터 노인까지 모두 죽였다. 정의와 정이 형제는 양수와 함께 조식과 두터운 친분을 쌓았고, 조조가 조식을 내심 태자로 세우려 할 때, 정의와 그의 동생 정이도 조식에 대해 좋게 말하여 조비에게 밉보인 바 있다. 특히 정의는 조비의 후견인 역할을 했던 최염과 모개를 탄핵해 실각시킨 장본인이었으므로 조비 입장에서 이들은 강력한 정적이었다. 군주가 권력을 안정시키기 위해 반대파를 쳐내는 것은 참작 가능한 일이지만, 일족을 남녀노소 전부 주살한 것도 분명 잔인하거니와, '조비가 청하공주와의 혼담을 반대한 탓에 정의가 조식파로 들아간 것'으로 선후 관계를 잡는 경우 문제의 근원은 결국 조비에게서 시작된 것이기에 이 역시 긍정적으로 거론되지 않는다.
조조가 업성을 도륙하고 원씨의 많은 부녀자들을 강제로 빼앗았으며 그 과정에서 조비가 유주에 자사로 있는 원희의 아내 견씨를 아내로 삼았다. 약탈혼으로 문소황후를 들인 후에는 조비가 첩을 늘리고 이들에게 총애를 쏟아 본처인 문소황후가 소외되자, 실의에 빠진 문소황후는 조비에 대해 원망의 말을 말했다고 문소견황후전에 전해진다. 이 행동이 조비의 노여움을 사 조비는 문소황후에게 자결을 명령했다. 모함으로 인한 것이든 특정한 동기가 있었든 간에 조비가 조강지처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조비의 반인륜적 행위 중에서도 가장 중대한 건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조정 신하들이 죽거나 굴욕을 당한 다른 사건도 가볍지 않으나, 문소황후의 아들인 조예가 말년에 사치, 특히 궁궐 건축에 몰두한 이유가 어머니의 죽음을 알았기 때문이라는 추측을 신뢰한다면 이 행동은 조위의 파탄에도 간접적으로 기여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문선(文選)》에 기록된 조비의 편지에 따르면, 종요가 아름다운 옥결(옥으로 만들어 허리에 차는 고리)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손뼉을 치면서 기뻐하면서 동생인 조식을 보내 종요에게서 옥결을 강탈(...)했다.[12] 옥결이 든 상자를 받을 때 '오장이 다 후들거리고 두근거렸다' 며 오버를 떠는 걸 보면 어지간히 기뻤던 모양이다. 그래놓고선 '진소왕이 화씨지벽을 본 것 같은 기쁨은 있었으나 인상여 같이 계책으로 화씨지벽을 탈취한 속임수는 없었다'라고 하곤 '공의 아름다운 하사가 후하니 감히 공경스럽게 받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아예 종요가 조비에게 하사(?) 한 것처럼 너스레를 떨었다.
3. 불효자
한무제 이후 본격적인 유교질서의 장려로 당시 지배층 사이에서는 유교 도덕이 매우 절대적인 가치 기준이었고 조비 자신도 통치 정당성을 얻고 황권을 강화하기 위해 유교 도덕과 장유유서의 질서를 강조했으나, 정작 본인은 그에 걸맞은 행적을 보여주지 못했다.
아버지 상중에 잔치하고, 사치품 모았으니 불효자라는 게 아니라 대국을 이끌어 가야할 정치가인데 자제력이 너무 부족해서 문제인 것이다. 국가이념 및 황권과 관련된 정책을 실행하려면 뚝심을 가지고 행동거지 하나하나 절제해서 이미지 메이킹을 하는 게 중요한데, 조비의 행적에는 유독 기본적인 식욕과 물욕을 못 참거나 감정에 지나치게 충실해 절제가 없는 등 나이만 먹은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 간혹 드러난다. 세자로 낙점받은 뒤 체통도 잊고 신비를 끌어안으며 기뻐했다는 일화, 맹달의 투항을 받은 뒤 신하들 모인 자리에서 촉에선 고기를 꿀에 절여 먹는다는 이야기를 늘어놓은 일화, 그리고 아래의 기타 일화들이 그렇다.
- 조조가 죽자 유비가 조의금 차원으로 위나라에 사신과 예물을 보냈는데, 조비는 유비가 초상을 빌미로 화친을 구한 것을 미워해서 그 사신을 죽였다.(촉서 선주전 주석 위서)[13][14]
- 220년 갑오일에 고향인 초#s-5에 가서 관현은 물론 백성들과 함께 날이 저물도록 크게 축제를 벌이며 같이 즐겼다. 고향 땅에서 군주가 축제를 벌이는 일이야 뭐가 문제인가 싶지만 이때가 조조의 삼년상 중이었다. 그것도 바로 조조가 죽은 그 해. 위진남북조시대 동진의 역사가인 손성#s-2은 이를 두고 "왕이 이 모양이니 나라가 오래 못 가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비판했다.(위서 문제기, 위서 문제기 주석 위서) 당시에도 삼년상을 정석으로 치르는 일은 드물고, 또한 위정자이기 때문에 제대로 치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긴 했지만, 이럴 경우 삼년간 음주가무를 피하는 것이 기본이고 이미지를 위해서라면 간간이 효성으로 회자될 만한 쇼를 하든가, 하다못해 먹는 거라도 단촐하게 해 이미지를 가꾸는 게 정치적으로 몹시 유리한 상황이었다.[15] 그런데 이미지 관리는커녕 축제를 즐겼다는 것은 도의적 군주상에 있어 상당한 결함을 보인 셈이다. 조조 스스로 장례를 간소하게 하라고 유언으로 남기긴 했으나, 그렇다고 축제를 즐기는 것이 영리한 행동이었는지는 의문이다.
- 조비는 왕이 된 그 해 6월 남방을 정벌하기 위해 거병하였다고 하지만, 실상은 남방 정벌은 추진되지 않아 사냥하러 간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다만 4개월 뒤 헌제의 선양이 이어지므로, 이를 위한 밑작업성 무력시위라고 보면 되려 계산적인 행보가 된다.
- 다음 해인 221년에는 업에 있는 조조의 무덤에 가지 않고 낙양에 있는 건시전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민간의 제사와 동일하게 제사를 지냈다.(위서 문제기 주석 위서) 조조는 죽을 당시 위왕이었고 조비가 선위를 받아 황제로 오른 뒤에 태조 무황제로 추증까지 했으니 제왕의 격식에 맞는 제사를 지내야 한다.
- 손권은 형주 침략 이후 조비와 화친을 맺은 뒤에 오왕으로 책봉받았다. 이에 신하인 조자를 보내 감사를 표시하고자 했는데 조비는 온갖 사치품을 요구했다. 문제는 이때가 조조의 3년상 기간 중이었다는 것. 이에 오나라의 신하들은 보내는 물품에 대한 규정에 있어 예법에 맞지 않으므로 거절해야 한다고 했지만, 손권은 격노한 유비를 막느라 위의 군주인 조비에게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라서 보내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런 무례하고 굴욕적인 상황에서 손권은 '아비의 복상 기간 중에 사치품을 구하려는 사람하고 어떻게 예법을 논하겠느냐[* 원문에서는 양암(諒闇)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고 말해서 조비의 체면을 팍 깎아내렸다.[16] 또한 손권은 조비가 요구하는 사치품을 자신에게는 '기왓조각이나 돌멩이와 같다'고 평하여 자신의 검소함과 도량을 드러내 보였다.(자치통감 69권)[17] 이로서 형식적으로는 손권이 조비에게 조공하는 모양새가 되었지만, 손권이 언플을 펼쳐 조비를 예의를 모르고 불효하며 사치스러워 상대하기도 귀찮은 놈으로 만드는 동시에, "이까짓 조공 나한텐 아무것도 아니다. 얼마든지 준다."는 발언으로 오히려 조비의 무례함이 손권의 도량과 대비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 정사가 아니라 《세설신어》 현원편(賢媛篇)에 등장하는 이야기가 있다. 조조는 죽을 때 자신의 측실들로 하여금 바느질을 하며 스스로 먹고 살라며 약간의 재물을 주고 귀향시켰는데, 조비가 병에 걸려 생모인 무선황후 변씨가 조비의 침실로 문병을 갔더니 조조의 측실들이 있었다. 왜 이곳에 있냐고 물어보니 조조가 죽은 직후부터 조비가 그들을 불러 살게 했다. 경악한 변씨는 자신의 아들이 죽어가는데도 불구하고 "네가 남긴 것은 개나 쥐도 먹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조비가 죽고 난 후에도 무덤에 가서 애도하지 않았다. 단순히 아버지의 유언을 어긴 것이라기보다는 아버지의 여자를 채갔다는 뉘앙스가 있다. 세설신어는 시대의 유명인사들에 대한 일종에 썰을 담아낸 이야기 모음집이라 역사적 신빙성은 낮은 편이지만 이 썰을 통해 얼마나 조비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는지를 알 수 있다.
- 조비에게도 효자로서의 일화가 없는 것은 아니다. 조비가 조조 상중에 잔치 벌이고 놀았다는 것 때문에 까이긴 하지만 진서 안평헌왕부열전(사마부전)에 따르면 조조 사망 후 조비가 슬픔이 과하여 계속 꺼이꺼이 울어대고 신하들도 곡만 하며 절차 진행을 하지 못하는 바람에 위나라 조정이 마비된지라 결국 사마부가 총대를 메어 조비에게 "천하가 전하의 명에 기대고 있으니 위로는 종묘를, 아래로는 만국을 위해야 하는데 어찌 필부의 효를 본받고 있습니까?" 라고 일갈하여 조비를 정신 차리게 하고, 화흠과 함께 나머지 신하들도 그만 좀 울고 일하라고 간언해 겨우 수습했다고 한다.
사실 일화 자체는 '너무 효심이 깊어 몸까지 상하신 황제와 그런 황제를 충심으로 다잡아 주시는 올곧은 신하'의 프로파간다 미담적 냄새가 나긴 하지만, 여하튼 조비도 조비 나름의 효심이 있었다는 증거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훗날 죽림칠현의 일원인 완적이 모친상중에 술과 고기를 먹는 걸 보고 하증이 디스했을 때,'효로 나라를 다스리는' 입장인 사마소가 오히려 완적을 쉴드친 사례도 있고. 위진 시기에는 삼년상 같은 상례 문화에 좀 유연성이 적용된 느낌이다.[18]
4. 콩가루 형제
조조는 조비는 물론 조식이나 조창보다도 마음에 들어하는 아들이 있었는데, 이름은 조충#s-1이며 10대 초반에 일찍 병사했지만 굉장히 사려 깊고 지혜가 뛰어나 조조가 이미 후계자로 마음 두고 있었다 한다. 조비도 제위에 오른 후에 '만약 창서(조충의 자)가 살아있었다면 나는 천하를 지배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종종 얘기했을 정도. 조조는 조충이 죽자 남은 자식들에게 '조충이 어린 나이에 죽은 게 나에게는 불행이나 너희들에게는 행운이다.'라고 말했다는 기록도 있다.
문무 양방에서 천재적인 재능을 두루 보인 조조의 자식들 답게, 조비의 형제들은 뛰어난 재능을 갖추고 있는 이들이 많았다. 물론 위에서 보듯이 조비 역시 나름대로 능력을 타고 났으며, 무엇보다 조앙과 조삭의 사망으로 인한 것이긴 하나 장자의 자리를 타고 났으니 나름대로 행운아라고 할 만 하다. 그러나 동시에 유능한 아우들과 비교되어야 했던 불운아이기도 했다. 이 중 조비와 가장 갈등을 많이 빚은 형제들은 칠보시로 유명한 조식과 오환족을 토벌한 것으로 군사적 재능을 입증한 조창#s-2이었다. 공교롭게도 모두 무선황후의 아들이었다.
결국 이런 견제 속에 왕(그리고 황제)이 되고 난 후에는 형제들을 권력의 핵심에서 몰아낸다. 조식과 조창 등의 형제들을 경계하여 각각 왕위를 줘서 지방 임지에 묶어두고 감시하면서 수도로 절대 올라오지도 못하게 했고, 벼슬이나 일도 맡지 못하게 했다. 형제로서는 좀 비정하지만, 친족들이 정치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차단하여 권력의 안정성을 높인 선택이었다고 보면 군주로서 비판할 일은 아니다. 실제로 자신의 권력에 해를 끼칠 여지가 전혀 없는 막내동생 조간에게는 너그러운 모습을 보여주는 등, 형제들에 대한 냉랭한 태도는 조비가 본성적으로 사이코여서 그렇다기보다는 일종의 통치술이라고 보는 편이 더 합리적이다. 다만 이것이 조예 대로 가면서는 황제의 친위세력이 될 만한 친족들이 빌빌거릴 지경이 되어 사마씨의 권력 찬탈에 유리한 환경이 되었다는 것도 유념해야 한다.
- 조웅(연의)
후계자 쟁탈에서 가장 큰 라이벌이었던 조식에게 "일곱 걸음 안에 형제를 소재로 시를 지어라. 다만 그와 관련된 글자가 들어가서는 안 된다."라면서 칙명을 내리고는 짓지 못하면 칙명을 어긴 죄로 죽이겠다고 했다. 이때 지어진 칠보시는 21세기 현재까지 회자되는 명시로, 결국 조비는 조식을 죽이는 걸 포기하고 그를 추방하는 데에 그쳤다. 조식은 왕으로는 봉해졌지만 항상 봉지가 바뀌었다.(견성왕 - 옹구왕 - 준의왕 - 옹구왕 - 동아왕 - 진왕)[19]
조창이 임지로 돌아가자, 연이어 해마다 식읍을 추가하고(220년), 공으로 봉하고(221년), 왕으로 봉하는(222년) 등 후대한 편이었다. 그러나 다음해 수도에 와서 조비를 알현한 뒤 갑자기 병에 걸려서 수도에 있던 관저에서 급서(의문사)했다. 《세설신어》에는 조비가 조창을 독살했다고 나온다. 다만 조창은 조조의 장례 후 가규에게 옥새의 행방을 물으며 살벌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등 여러 기록상으로는 꽤 권력 투쟁에 적극적이었던 것이 나타나기에 형제들 중에서도 특히 큰 위협이었을 것이다.
조비는 형제들을 전부 왕으로 봉했지만 엄격하게 통제해서 친우든 친척이든 함부로 만날 수 없었으며 형제끼리라도 사사로이 왕래를 할 수가 없었다.[20] 심지어 따로 관리하는 사람까지 두어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게 했다. 조곤은 학문을 좋아하고 몸가짐이 바르기에 감시하는 관리가 좋은 뜻으로, 마땅히 이러한 선행도 보고해야 한다고 하자 조곤은 크게 놀라고 두려워했다. '강용하다' 내지는 '인망을 샀다' 같이 경계심을 자극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몸가짐이 바르다는 칭찬인데 그마저도 조비의 귀에 들어가는걸 이토록 무서워 했을 정도니 형제들에 대한 견제가 얼마나 서슬퍼랬는지 알 수 있다. 조곤은 원래 자신을 내세우는 걸 극도로 꺼린 인물이기에 그러한 천성도 반영된 일화일 것이나 조비의 감시가 매우 철저했음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막내동생인 조간에게는 유독 호의적이었다. 조조가 죽기 전 "조간이는 이제 어린 나이에 엄마 아빠도 없으니 니가 잘 보살펴 줘라."라고 부탁하기도 했고, 아무리 냉혹한 조비라도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된 조간은 너무 불쌍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조간이 너무 늦게 태어나 후계자 분쟁과 상관이 없었던 것이다. 조조가 조간을 본 나이가 60대로 조조가 죽기 몇 년 전에 태어난 격. 조창, 조식, 조충은 후계자 자리를 놓고 자신과 다투었지만 조간은 이미 조비가 후계자로 선정된 다음에 태어났다. 나이차 때문에 조간은 조비를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하며, 그때마다 조비는 조간에게 "난 네 형이다."라고 고쳐주는 한편 일찍 아버지를 잃은 조간을 딱하게 여겼다고 한다.
이쪽은 동생이 아니라 누나인 경우이지만, 조비는 자기 이복누나를 단지 친하다는 이유만으로 하후무와 혼례를 주선했다. 결과적으로 무능하고 호색한 인간에게 시집을 보내서 누나를 곤경에 빠뜨린 셈.
매우 비극적인 경우. 이복동생인 조절은 헌제의 황후였다. 선양을 받아내고 황제에 오르는 과정에서 이복동생과 대립한 것이다. 헌목황후는 "하늘은 결코 너희를 돕지 않을 것이다!"는 독기 어린 말까지 해 가며 조위 정권의 찬탈을 비난했다.[21] 이 케이스는 무엇보다도 '같은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다른 왕조를 섬기는' 구도가 아주 문학적이기 때문에 자주 거론되며 조비의 비난에 이용되는 경향이 있는데, 조비가 아니라 다른 이가 왕이 되었어도 유명무실한 한실 대신 조위가 천자를 선양받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상당한 개연성을 갖는 일이기 때문의 조비의 잘못이라기 보다는 시대적 흐름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수 있다.
4.1. 의도적인 황족 배제
물론, 친족에 대한 집요한 견제와 권력 약화 문제를 단순히 '조비의 인간성이 졸렬해서' 라고 볼 것이 아니라, 일종의 정책적인 문제에서 봐야 할 필요가 있다. 조식은 조비가 확실히 후계 자리를 다지기 전까지 양수 등의 뛰어난 인재들의 지원을 받아 후계 싸움을 벌였으니 고금 제일의 명문장가라는 것을 따지기 이전에 제위 등극 이후에도 경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며, 조창은 맹수와도 싸우는 무골에다 북방 정벌로 잔뼈가 굵은 장수이며 가규와의 대화만 봐도 제위에 욕심이 없는 인물로 볼 순 없기 때문에 경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거기에 이런 피비린내 나는 후계자들끼리의 암투는 전 세계 어디서든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멀리 갈 것 없이 이방원의 왕자의 난이 그렇다. 동복형제들은 아니지만 이방원은 자신의 형제들을, 특히 청소년에 지나지 않던 동생 의안대군마저도 죽여버렸다. 형제 숙청극을 벌인 일본 가마쿠라 막부의 쇼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22] , 직접적으로 반란을 일으켰기에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긴 했으나 각각 동복 동생인 노부유키와 슈르하치를 처형한 오다 노부나가와 누르하치 같은 예도 있고, 오스만 제국은 아예 형제 숙청이 일종의 불문율일 정도로 지독한 중앙 집권 체제였다. 그렇기에 친족에 대한 조비의 견제는 유독 비난받을 만하다거나 세계 역사에 유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저런 견제가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조비가 안정적인 상황에서 후계자가 된 것도 아니어서, 조조가 죽기 고작 2년 전인 218년에도 이미 허도에서 반란이 일어나 왕필이 사망하고, 불과 1년 뒤에는 위풍이 업에서 모반을 계획하는 등 말년의 조조 정권은 상당한 불안에 시달리는 상황이었다. 이럴 때 도의에 맞는 방법만을 시도하는 것이 반드시 능사라고는 할 수 없다. 즉 조비가 형제들을 가혹하게 대한 것은 시대적 요구에 따른 선택이었으며, 그마저도 특단의 조치가 아니라 전제군주국에서는 흔한 일일 뿐이라는 것이다.
한국 삼국지 팬덤에서도 비교적 조비에 대한 인식이 개선된 뒤에는, 조비의 황족 홀대를 성격적 결함의 발로라고 해석하는 데에서 벗어나 조위를 멸망케 한 정책적 실패로 보는 경향도 나타났다. 조위는 후한 말 내조를 장악한 환관, 외척과 대립했던 지방 호족들을 조조가 포섭해 성립한 정권이어서 권력 구도에서 환관, 외척은 철저히 배제했다. 그런데 거기에 황족들까지 배제해 버리니 황권과 귀족권의 균형이 무너졌을 때 황실을 수호할 세력이 미약했다. 그나마 조비는 군권과 내조에 방계 조씨 일족과 세력 기반이 약한 호족들을 배치하며 균형을 꾀했고, 그 뒤를 이어 받은 조예는 최소한 자기 대에서 자기가 부리기엔 문제가 없는 정치 지형 속에서 이를 조절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조예 말 이 균형이 본격적으로 무너지면서[23] 제대로 저항도 못 해보고 나라를 내주게 된다.
조위가 사마씨의 찬탈에 취약했던 이유인 방계 황족의 약세는 결과적으로는 조비 대의 정책으로 소급된다. 하지만 반대로 사마씨의 서진은 조위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방계 황족의 힘을 키워 줬더니 그로 인해 팔왕의 난이 일어나 나라가 망했다. 조비가 거국적인 선택을 잘못 했다기보다, 섬세한 강도 조절에서 실패했다고 봐야 한다. 정책적 문제란 것이 언제나 그렇지만 조씨의 위와 사마씨의 서진이 내놓은 답은 둘 다 적확한 균형점을 찾아내지 못해 한쪽의 역기능이 극대화되건 것이다. 단순히 방계 황족의 힘이 약해서 나라가 망했다는 식의 설명은 그 반대의 문제를 해결할 대안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황실 친족의 힘이 너무 강해지면 황권이 위협당하고, 반대로 너무 약해지면 유사시 황실을 지켜줄 세력이 없어지니까, 방계 황족의 힘이 너무 강해지지도, 너무 약해지지도 않고 황제 및 다른 귀족들의 힘과 적절한 균형을 이루게 하는 것이 가능한지는 둘째치고 원론적으로는 맞는 이야기일 것이다.
조비에 대한 비판이 주가 된 이후의 팬덤에서는 조비의 친족에 대한 견제 부분을 평가하며 '조비가 위나라 망국의 근원을 만들었다'는 식으로까지 비판하는 경우도 잦은데, 최소한 조비 시절에는 대사마 조인이 이름 뿐인 태위 가후 대신 실질적 일인자 노릇을 했고 그의 사후에는 대사마 조휴와 대장군 조진이 조씨 방계 친황세력으로서 군부 투 톱으로 대오, 대촉 전선을 책임졌다. 사마의는 명백히 그들보다 아래였다. 또 조예는 죽을 때 처음엔 연왕 조우를 대장군에 임명했다. 거기에 하후헌, 조상, 조조(조휴 아들), 진랑 등 젊은 친족들에게 그를 돕도록 했었다. 이렇게 친족들을 전진 배치하고 특히 조우를 대장군이자 탁고대신으로 삼았다. 그러니까 조비 대를 지나 조예 대만 해도 조씨/하후씨는 충분히 근황세력이었다. 그러나 조예의 명령은 불과 사흘 만에 번복되어 조우를 내쫒고 사마의를 불러들여 탁고를 맡기게 된다. 이유는 출신이 불분명한 조방의 정통성을 위협할 수 있기 때문. 결국 조예의 책임이 더욱 직접적인 것이다. 더구나 조예는 후계 구도도 불안정했다.
또 조홍과 하후상에게 수모를 준 것은 조진, 조휴가 군의 중진을 맡았다는 사실과 견주어 본다면 저 두 사람은 조비의 맛 간 성격에 희생된 것이지 고의적으로 배제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5. 조비가 후대했던 이들
조비는 다른 세력에 있다가 조위를 섬긴 항장들을 비교적 후하게 대우했는데, 몇 가지 사례가 있다.
관우의 죽음으로 처지가 곤란해진 맹달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사마의나 유엽 등이 맹달을 중히 쓰지 말라고 간언했으나 조비는 이를 묵살하고 상용태수로 두고 높은 관직에 앉혔다. 근데 그 이유가 좀 깬다. 이유는 재능도 뛰어나거니와, 무엇보다 맹달이 용모가 뛰어나서. 《정사 삼국지》 〈위서〉에는 맹달의 용모를 좋아했기 때문에 상용 태수 자리를 줬다고 명백히 적혀 있다. 결국 맹달은 조비가 죽자 제발저려서 제갈량과 내통하고 자멸해버린다. 특정 인물에 대해 그 사람의 인격과 능력 따윈 뒷전이고 오로지 외모만 보고 중용을 결정하는 병크를 터뜨렸다. 신언서판으로 일컬어지는 외적 특징이 당대 인재 선발에 중요한 기준이었던 것은 사실이나 조비는 정의의 혼사를 막은 것도 그렇고 외모를 판단 기준으로 삼은 일화가 하나가 아니라서 돋보이는 것도 사실.
이릉대전에서 포로로 잡아온 황권의 경우, 유비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것을 쌤통이라 여기며 잔치를 베풀면서 다들 크게 기뻐하는 와중에 황권 혼자만 서럽게 울자 이런 황권을 조비는 충의지사라며 총애했다. 조방 대에는 심지어 군부의 최고 인사 가운데 하나인 거기장군으로까지 승진하는데, 조비 대의 호의가 아니었다면 이 정도의 고위 인사로 승진했을지는 의문이다.
오래 전의 항장인 전예에게 신경을 써주기도 한다. 황초 연간(220~226년) 전예가 호를 토벌했는데, 영호준이 전예가 지시를 조금 위반했다고 법으로 잡으려 했다. 조비는 분노해 영호준을 포박하고 벼슬을 파면해 죄를 묻고서 조서를 내렸다. 조비가 조서를 내리면서 영호준은 어찌 그리 멍청하냐고 했기에 우(愚)를 이름으로 삼았다.
자신의 형을 죽게 만들고 자신조차 위험에 위험에 빠뜨린 인물인데도 핍박받은 장수와는 달리 조비 휘하에서 중용받았다. 가후의 성향상 보신적이었으며, 그 역시 조씨가문에 한 일과 동탁 밑에서 일했다는 오점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기에 더욱 몸을 사리고 주군의 기분을 최대한 해치지 않는 선에서 조언하는 등 스스로 처세를 잘했다. 조조에게 원소와 유표의 일을 말해 에둘러서 조비를 지지한 일도 한 몫했을 터이다. 조비 또한 이걸 전해 듣고는 따로 가후에게 후계 자리를 공고히 할 수 있는 방안을 물어보기도 했고. 이에 대한 보답인지 가후는 군권은 없지만 태위라는 고관대작에 임명된다. 다만 실권이 없는 명예직이라고 해도 대외적으로 나설 수 있는 인사는 못 되었기에 손권은 조비의 안목을 비웃었다.
원래 원소 밑에서 일했으나 조조를 섬긴 인물. 조비와 개인적으로도 친밀하여, 세자 책봉 때 너무 기뻐서 신비를 꼭 끌어안았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조비 때 간언을 하다가 신세를 망친 인물이 한두 사람이 아니지만, 신비는 직언을 하고도 조비에게 해를 당하지 않은 몇 안 되는 신하이다.
항장을 우대하는 것은 물론 조비만의 특색이 아니고, 어느 세력이든 적대 세력으로부터의 항장은 우대하는 것이 정상이다. 유훈, 왕충, 방덕, 허유 등의 인사는 물론 오자양장 중 장료, 장합, 서황 셋이 항장이다. 조비의 항장 우대는 항장의 특성과 결부지어 생각해 볼 수도 있다. 대체로 항장은 항복하고 나면 정치 기반이 전혀 없기 때문에 군주의 비호를 받지 않고는 권력의 핵심부에 접근할 수가 없다. 즉 경우에 따라서는 군주의 친위 세력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큰 부류이므로 군주가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도 가능하다. 다만 이 경우 공을 들인 인사인 맹달이 완전히 실패한 인선이었고, 나머지도 딱히 조위 정권을 수호하는 친위 세력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사람들은 아니기 때문에 조비의 진의야 어쨌든 조비의 항장 우대가 정권에 기여한 바는 없었다.
유학자. 조비가 크게 아낀 학자로, 함께 서전을 논의해 해가 저무는 것도 모를 정도였으며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설군'이라는 존칭으로 불렀다.
명망 높은 학자. 조비와 조식이 모두 불러들이려고 했으나 조조가 조식에게 소속시킨다. 이후에 조식의 스승이 되어 조조에게 조식을 칭찬하는 등 조비에게 원망을 샀는데, 미운털이 박힐 일을 한 것치고는 아무런 해도 입지 않고 말년을 편안하게 보냈으며 오히려 글을 잘 쓴다고 상을 받기도 한다.
조조의 명으로 조비는 이들에게 아들과 손자의 예를 갖춘다. 그런데 병원의 경우 조비가 논쟁으로 떠본 듯한 기록이 있어서 후대했다고만 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항목 참조.
[1] 조예 항목을 보면 알다시피 조예가 망가진 근본적인 원인은 전부 조비 때문이다.[2] 심지어 조비의 능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도 조비의 성격을 쉴드치는 경우는 잘 없다.[3] 《위략》에 의하면 장수를 일부러 잔치에 초대한 뒤 형을 죽인 네가 뻔뻔하게 말을 거냐는 식으로 쏘아 붙였으며 이런 짓을 여러 번 반복했다고 한다. 다만 년도에 오류가 있는데 위략에는 207년에 오관장 조비가 장수를 갈구어서 죽게 했다는데 실제로 조비가 오관중랑장이 된 것은 위서 문제기에 따르면 211년이다.[4] 덕양향주의 아버지는 진소였는데, 그는 조조의 목숨을 구해주고 대신 죽었다. 이에 조조는 그 공을 기려 그의 성을 조씨로 바꾸고 그의 아들 조진, 조빈과 딸 덕양향주를 자기 자식들과 같이 길렀다. 그러니 조비와 덕양향주가 친남매는 아니었어도 친남매처럼 같이 자란 사이였다.[5] 만약 하후상이 죽지 않았다면 조진과 조휴가 연달아 죽었어도 하후상이 살아있는 동안 사마의에게 병권이 가는 일은 없거나 최소한 견제는 되었을 것이며, 그 하후상의 아들 하후현도 당대의 명사이자 기재였기 때문에 고평릉 사변은 일어나기 힘들었을 것이다. 물론 역사에 만약은 없기에 정말로 어땠을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실히 원래와는 크게 달라졌을 가능성이 높다.[6] 《촬요(撮要)》의 기록이다. 흥미롭게도 이 대목은 조선왕조실록 〈정종실록〉에서도 등장하는데, 영락제가 건문제를 두고 일으킨 정난의 변에 대한 당시 정황과 연관되어 있다. 문서 참조. 여기에 따르면 유엽은 손권이 훼이크치는 거라며 믿지 말라고 했는데 조비는 낚였다는 식이다.[7] 세자 시절 업군에 있을 때 이미 최염에게 사냥 좀 그만 하라는 쓴소리를 들은 바 있고, 새벽에 사냥을 나갔다가 밤에 들어오는 일이 있자 잔잠에게도 자제하라는 간언을 들었다.[8] 비단 100필을 달라는 말도 있었다고 한다.[9] 정확히는 '오질이 조진의 건강을 생각해서 하는 말이다.' 이런 식으로 편을 들어줬다. 오질이 조비라는 뒷배경을 밑고 위나라 원로인 조홍과 친족인 조진에게 대놓고 오만하게 굴면서 도리어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일이 허다했다.[10] 조비가 후일 일찍 세상을 뜨자 조진을 탁고대신으로 삼은 것을 생각했을때 이는 조진이 충분히 불만가질만 하고 조비의 경솔한 행위가 맞다. 조비가 유사시 탁고를 맡길 정도로 조진은 당대 조씨 황실을 지탱할 유력한 종친 중 한명이었는데 그런 이의 명성을 깎아서 좋을게 뭐가 있겠는가. 또한 앞서 설명한대로 조홍은 조씨 일가의 최고 웃어른인 만큼 조진도 말은 못했지만 조홍을 그렇게 대하는 것이 당황스러웠을 것이다.[11] 비슷한 케이스인 한단순은 조식을 칭찬했을 뿐만 아니라 조식의 사부였음에도 죽지 않았다.[12] 업성에서 옥결을 받았다고 하니 황제 즉위 전, 낙양으로 천도하기 전 얘기다.[13] 유비가 왜 원수가 상을 치르는데 상주에게 조의금을 준 건지 알 수 없지만, 유비와 조조는 한때 반동탁 연합군에 종군한 걸 포함하여 친분을 나눈 적도 있는 등 관계가 단순한 원수가 아닌 복잡한 관계였음을 고려할 때 조조에 대한 감정 정리 차원이었던 것 같다.[14] 사실 유비와 조조는 사적으로 인척 관계였을 가능성도 있다. 유비가 잠시 조정에 몸을 담았을 때 조조는 유비의 의형제들인 관우와 장비에게 자신의 친척들과 혼인을 주선한 일도 있었던 만큼(장비의 처가 하후씨라는 말도 있고 하후패가 촉한에 망명했을 때도 촉한의 황실과 인척관계라며 - 유선의 정실이 장비의 딸이다 - 대우를 받았던 것도 있다.) 사적으로 전혀 교류나 관계가 없을 리는 없었을 것으로 추측된다.[15] 원소는 삼년상을 두 번이나 묵묵히 하여 명성을 얻어냈다.[16] 출처: 오서 오주전 주석 강표전[17] 이 밖에도 손권은 조예 때는 보석을 주고 말을 받아오는 등 긍정적인 모습을 보여, 세종대왕도 본받아야 한다며 칭찬하기도 했다. # 그게 너무 과해서 궁색해 보인다는 평도 있지만.[18] 그 와중에 한가지 재밌는 사실은. 한문제 이후 왕/황제는 삼년상 안치르는게 관습화 되었는데,'백성들을 예로 교화해 온 집안의 사람인 내가 그래서야 되겠느냐'고 준엄하게 꾸짖으며, 관습을 깨트리고 삼년상 강행한 것으로 후세 사가의 극찬을 받은 황제가 있었으니 바로 진무제 사마염, 하긴 진나라의 태생적인 원죄 때문에 충보단 효를 더 강조할 수 밖에 없었던 사정도 감안해야 할 듯 싶다.[19] 다만 조비가 바꾼 것은 견성에서 옹구로 한 번이고 나머지는 조예가 바꾸었다. 하지만 조비가 조식의 처우에 대해 유언을 남겼을 테니 사실상 조비의 뜻에 따라 봉지가 하루가 멀다하고 바뀌었다고 할 수 있다.[20] 이러한 배경 속에 조식은 이복동생인 조정과의 이별을 안타까워하며 석사부라는 글을 지었으며 친척들과 교류를 할 수 있게끔 압박을 풀어달라는 식의 상소를 올리기도 한다.[21] 헌목황후 조씨는 260년 6월 7일에 사망했는데, 같은 달 조모가 사마소에게 살해당하며 결국 그녀는 죽기 전 위가 멸망해가는 모습을 보고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22] 왕조의 말로도 비슷한 경우다. 가마쿠라 막부의 실권은 호조 씨에게 넘어간다.[23] 조예는 조비 시절까진 경력이 별 볼 일 없었던 사마부에게 탁지상서(호부상서#s-2에 해당한다.)에 제수하는 등 다방면으로 힘을 실어줬다. 군사, 재정이라는, 국가에서 가장 주요한 두 분야에서 강한 푸쉬를 받은 사마씨는 구품중정제로 완전히 특권 계층으로 자리잡은 호족들의 대변자가 되어 세를 착실히 불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