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레/국가대표 경력

 



1. 개요
2. 데뷔~1958년 마이너 대회
2.1. 1957 코파 로카
2.2. 1958 타사 오스바우두 크루즈
3.1. 조별 리그
3.2. 토너먼트
5. 1959년~1962년 마이너 대회
5.1. 1959 코파 베르나르도 오이긴스
5.2. 1960 코파 델 아틀란티코
5.3. 1962 타사 오스바우두 크루즈
6.1. 조별 리그
6.2. 토너먼트
7. 1962년~1966년 마이너 대회
7.1. 1963 코파 로카
7.2. 1964 타사 다스 나소잉스
8.1. 조별 리그
9. 1966년~1970년 마이너 대회
9.1. 1968 타사 오스바우두 크루즈
10.1. 지역 예선
10.2. 조별 리그
10.3. 토너먼트
10.3.1. 8강전
10.3.2. 4강전
10.3.3. 결승전
11. 1970년~은퇴
12. 연도별 기록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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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r=#373a3c> '''Pelé'''
펠레의 국가대표팀 경력에 대해 서술하는 문서이다.

2. 데뷔~1958년 마이너 대회



2.1. 1957 코파 로카


이 대회는 브라질과 아르헨티나가 맞붙어 아메리카의 최강자를 가리는 친선 대회였다. 아르헨티나의 전 지도자인 훌리오 아르헨티노 로카(Julio Argentino Roca)의 이름을 따서 코파 로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참가팀과 경기 성격이 완전히 같기 때문에 2011년부터 개최된 수페르클라시코 데 라스 아메리카의 공식적인 전신으로 인정받고 있다. 불규칙적으로 열리는데다가 대회마다 한두 경기만 진행하는 친선 경기였지만, 이 대회 또한 나름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1918년, 1922년, 1923년, 1939-40년, 1945년 이렇게 대회가 다섯 차례 열렸던 전례가 있으며, 최근 두 번의 대회에서는 브라질이 모두 우승했다. 1957년 대회는 12년만에 열리는 대회였고 선수진 구성이 많이 바뀐 탓에 누가 승리를 거둘지 종잡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대회 전, 1940년대의 브라질 스타플레이어이자 당시 브라질 감독이었던 시우비우 피리유는 상파울루 FC가 구장 신축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개최한 친선 대회를 보러 갔다. 이 대회에는 수많은 팀이 참가했고 바다 건너 디나모 자그레브, SS 라치오, 세비야 FC 같은 팀들도 참가했다. 마라카낭에서 열린 이 대회에서, 피리유는 왼발 오른발 머리를 가리지 않고 마구 득점포를 쏴 대는 산투스 FC 소속의 흑인 소년을 봐 두었다. 10대의 나이에 상파울루 주립 리그의 '빅 5' 중 하나인 산투스 FC의 주전을 꿰찼던 그 소년의 이름은 에드송 아란치스 두나시멘투였다. 1957년 당시 나이는 16세. 소년의 별명은 '펠레'였다. 피리유는 펠레의 플레이가 무척 마음에 들었고 대표팀에 그를 선발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리고 펠레에게 다가가 말했다.

'''"토깽이 같은 녀석이군. 기회를 주마!"'''

코파 로카는 7월 7일에 열렸다. 양측 모두 선수단이 쟁쟁했다. 브라질은 지지와 가린샤가 참가하지 않았지만 자우마 산투스, 이우데라우두 벨리니, 지투, 페페 등 이름난 선수들이 많이 참가했다. 아르헨티나는 앙헬 라브루나, 오마르 코르바타, 아마데오 카리소, 네스토르 로시 등 자국 최고의 스타들이 대부분 멀쩡했고 전력 누수가 거의 없는 상태였다. 브라질의 선발 공격수로 선택된 것은 만 19세의 신동 주제 아우타피니였다. 친선경기였던 만큼 선수 교체를 많이 했고, 많은 선수가 기회를 부여받을 수 있었다. 후반전에는 주제 아우타피니, 이탈리아계 브라질인인 에마뉘엘 델베키오가 빠지고 모아시르, 펠레가 경기장에 들어섰다. 등에는 13이라는 숫자만 덩그러니 적혀 있었다.
당시 아르헨티나의 주장이었던 아마데오 카리소를 비롯한 대부분의 아르헨티나 선수들은 펠레가 누군지도 몰랐다. 그래서 펠레에게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 경기는 펠레가 셀레상 소속으로 처음 뛰는 경기였고, 펠레는 당시 경기장에 서 있는 느낌이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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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r=#373a3c> '''펠레의 데뷔골'''
펠레는 경기장을 밟은 지 30분이 지난 75분경 박스 안에서 공을 받았다. 그리고 아마데오 카리소를 뚫고 득점을 기록했다. 펠레의 국가대표팀 데뷔골이 터지는 순간이었다. 당시 펠레는 태어난 지 16년 259일밖에 안 된 상태였다. 말 그대로 소년이었다. 이 골은 현재까지 브라질 역사상 최연소 A매치 골 기록으로 남아 있다.#
펠레의 득점에도 불구하고 1차전에서 브라질은 2-1으로 패했다. 그러나 3일 후 상파울루에서 2차전이 열렸고 여기에서 펠레가 또 골을 터뜨렸다. 그리고 주제 아우타피니가 추가골을 터뜨렸다. 브라질은 2-0 승리를 거두었다. 우승이었다. 펠레는 처음 참가한 국가대표팀 대회에서 눈에 띄는 활약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 때를 기점으로 브라질 전역이 펠레에게 주목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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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r=#373a3c> '''1957년의 축구잡지 기사에 실린 펠레'''

2.2. 1958 타사 오스바우두 크루즈


타사 오스바우두 크루즈란 1950년에 시작하여 1976년까지 불규칙적으로 개최했던 브라질과 파라과이 간의 친선 컵이다. 당시에는 2팀만 참가하여 1, 2차전으로 우승자를 가리는 유형의 대회가 꽤 많았다. 공식 경기가 아니지 않느냐고 할 수 있는데, 이 대회는 엄연히 공식 A 매치로 간주되었으며 지금도 A매치로 인정해 준다. 아르헨티나와 브라질만 참가하는 코파 로카와 마찬가지로, 타사 오스바우두 크루즈 참가팀은 파라과이와 브라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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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r=#373a3c> '''타사 오스바우두 크루즈 2차전에 나온 브라질 대표팀'''
브라질의 사령탑에는 비센치 페올라 감독이 부임했다. 펠레는 상파울루 주립 리그 득점왕이었지만, 여전히 유망주 티가 많이 나는 선수였으므로 비센치 페올라 감독은 펠레를 완전히 신임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월드컵 이전에 기량 테스트도 해 볼 겸 지우마르, 디노 사니, 마리우 자갈루 등과 함께 선수단에 포함시켜 데려갔다. 대회 일정은 1958년 5월 둘째 주로 잡혔다. 펠레는 5월 4일에 히우지자네이루에서 열린 1차전에서 교체 선수로 출전하여 팀의 네 번째 골을 득점했고, 이 득점은 펠레의 세 번째 A매치 득점이었다. 펠레는 코파 로카 두 경기에서 넣은 골을 포함해 A매치 3경기 모두에서 득점을 기록한 셈이 되었다. 특히, 이 중 두 골은 교체 출전으로 인해 적은 시간을 부여받는 와중에 기록했다. 이 경기는 특히 마리우 자갈루가 다이빙 헤더 골을 포함해 멀티골을 터뜨리는 등 만점활약을 보여주었고 그 결과 브라질의 5-1 대승으로 마무리되었다. 3일 후 상파울루에서 열린 2차전에서 페올라 감독은 펠레를 내보내지 않았고 브라질과 파라과이는 0-0 무승부를 기록했다. 합산 스코어 5-1로 브라질이 우승하게 되었다.
한 경기에 내보내 펠레의 플레이를 지켜본 비센치 페올라 감독은 6월에 열리는 월드컵 팀에 만 17세의 펠레를 승선시켰다.

3. 1958 FIFA 월드컵 스웨덴


1957년에 진행되었던 1958년 월드컵 남아메리카 예선은 피 말리는 승부였다. 브라질은 페루, 베네수엘라와 같은 조에 속했다. 베네수엘라가 참가 신청을 철회했고 페루, 브라질 중 한 팀이 월드컵에 나가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페루의 홈에서 펼쳐진 1차전에서는 페루의 알베르토 테리가 경기 38분에 먼저 브라질의 골문을 뚫어냈다. 경기 48분에 터진 인디우의 동점골 덕에 1:1로 간신히 비겼다. 2차전에서는 지지가 한 골을 득점하며 1:0승리를 거두었고, 월드컵 진출권을 따내는 데 성공했다.
브라질은 1950년 대회에서는 끝없는 자만 끝에 우루과이에게 말도 안 되는 역전패를 당했고, 1954년 대회에서는 푸슈카시 페렌츠가 빠져 있던 매직 마자르에 패배한 후 깨진 병을 들고 라커룸에 난입하여 베른의 난투를 일으켰다. 경기도 지고, 매너도 졌다. 물론 경기장에서부터 브라질 선수들과 치고박고 싸운 헝가리 선수들도 잘한 건 없다. 브라질은 욕을 바가지로 먹었고, 국제 축구계에서의 이미지도 실추되었다. 이번 월드컵에서는 나아진 모습을 보여주어야 했다. 유일한 개근 팀이라는 명성에 흠이 가지 않도록.
당시 브라질 대표팀에 동석했던 심리학자는 펠레와 가린샤가 대표팀에 선발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었다. 펠레는 너무 어린아이 같아서 선수로서 반드시 가져야할 호전적인 정신이 부족하고 책임감도 없다는 게 이유였다. 당시 펠레의 나이가 17살이었는데 12살 수준의 정신연령(다른 기록에서는 정신 연령이 아니라 사회성 점수라고도 알려져 있다)을 가지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1] 게다가 가린샤의 경우 월드컵 예선 통과에 크게 기여한 데다가 히우지자네이루 주립 리그에서도 최고의 선수로 인정받는 수준의 선수였지만 펠레는 FIFA 월드컵 남미 지역 예선에도 참가하지 않은 선수였다. 충분히 우려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반면 페올라 감독은 (뒤에서 설명하겠지만) 몸이 빠르고 찬스에 강한 둘을 기용하는 게 좋을 거라고 추천했다.

'''당신의 의견이 맞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신은 축구를 알지 못하며, 나는 펠레의 플레이를 보았다.'''

비센치 페올라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브라질은 펠레와 가린샤가 포함된 22명의 명단을 FIFA에 제출했고 스웨덴으로 떠났다. 브라질은 소련, 잉글랜드, 오스트리아와 함께 4조에 속했다.

3.1. 조별 리그


첫 상대는 오스트리아였다. 브라질은 주제 아우타피니의 한 골로 일찍 앞서나갔다. 그리고 경기 50분, 펠레와는 별 관련 없지만, 역사적인 장면이 하나 등장한다. '''레프트 풀백 니우통 산투스가 오버래핑하여 골을 넣어버린 것'''이었다. 니우통 산투스는 클럽에서 적극적인 공격 가담을 보여주는 수비수였고, 브라질 감독 비센치 페올라는 공수 밸런스가 무너지는 것을 우려해 니우통 산투스에게 공격 참여를 자제하라고 지시를 했었다. 그런데 그것을 상큼하게 씹어버린 것이었다. 이것은 풀백 포지션의 선수가 기록한 FIFA 월드컵 역사상 최초의 필드골이었다. 니우통 산투스의 이 골로 인해 브라질은 첫 경기부터 관중들에게 인상적인 느낌을 주게 되었다. 하지만 펠레는 허벅지 부상으로 인해 회복에만 전념하고 있었다.

<color=#373a3c> '''잉글랜드 vs 브라질'''
다음 상대는 잉글랜드였다. 1차전에서 소련과 2:2 무승부를 거두었던 잉글랜드에는 톰 피니, 조니 헤인스, 빌리 라이트, 바비 찰튼[2] 등 어마어마한 선수들이 있었다. 이런 잉글랜드에 비하면, 브라질은 일종의 '검증되지 않은 팀'이었다. 주제 아우타피니 등 브라질이 자랑하는 최고의 공격수들은 잉글랜드의 캡틴 빌리 라이트를 뚫어내지 못하고 매우 고전했다. 잉글랜드는 공을 빼앗을 때마다 무섭게 역습을 해 왔다. 공격형 미드필더 조니 헤인스는 말도 안 되는 퀄리티의 패스들을 구사하며 브라질을 괴롭혔다. 다행히 골키퍼 지우마르가 맹활약하며 모든 찬스를 막아내 준 덕에 한 골도 실점하지 않았고, 0-0 무승부를 기록했다. 이 경기는 월드컵 역사상 최초의 무득점 경기로 남았다. 펠레는 경기장 한구석에 앉아 조니 헤인스의 환상적인 패스 쇼를 지켜보며 감탄만 할 수 밖에 없었다. 원래 패배해도 할 말이 없는 경기였으나 지우마르가 지켜낸 경기였고, 이 환상적인 활약을 계기로 지우마르는 펠레의 지속적인 신임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 상대는 소련이었다. 소련은 이고르 네토, 레프 야신, 유리 보이노프 등 상당한 실력자를 데리고 있었다. 1956 멜버른 올림픽에서 우승한 대표팀의 주축 멤버들을 거의 그대로 끌고 온 터라 그들의 실력은 검증되어 있었다. 그래도 어느 정도 안심할 만한 사항은 월드컵에 개근한 브라질과 달리, 소련은 월드컵에 나와본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경기에서 소련에게 지게 된다면 조 2위가 되는 셈이었고, 다음 상대는 개최국 스웨덴이 될 확률이 매우 높았다. 스웨덴은 개최국이니만큼 어느 정도의 홈 어드밴티지를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었고, 거기에 군나르 그렌, 닐스 리드홀름, 오바르 베리마크 등 유럽 각지에서 엄청난 활약을 펼치던 선수들을 그대로 데려왔기에 선수들의 클래스 역시 당대 최고 수준이었다. 8강부터 이런 괴물같은 팀을 만난다는 것은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거기에, 소련에게 지고 동시에 잉글랜드가 이기게 되면 아예 탈락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 때, 비센치 페올라에게 펠레가 부상에서 회복되어 경기에 출전 가능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페올라 감독은 주저하지 않고 선발 명단에 펠레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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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r=#373a3c> '''1958년 월드컵에서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이 주로 사용한 포메이션'''
페올라는 펠레와 가린샤를 공존시키고 최대의 활약을 이끌어내기 위해 4-2-4 진형을 고안해냈다. 이것이 축구 역사에서 최초로 나온 포백 수비라인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훗날 데트마어 크라머가 페올라에게 이 진형에 관해 물어보자 '사실 그건 4-2-4가 아니라 극도로 유동적인 4-3-3이었다'라고 대답했다는 모양이다. 지지가 공격에 전념할 때 지투가 아무리 수비력이 절륜한 미드필더라 할 지라도 혼자 중원을 다 떠맡기 벅찰 수 있으므로 아웃사이드 레프트였던 마리우 자갈루에게 반쯤은 미드필더, 반쯤은 포워드라는 특이한 역할을 맡겼다.

<color=#373a3c> '''브라질 vs 소련'''
이 전략은 신의 한 수였다. 가린샤는 언제나 그랬듯이 측면을 탈탈 털어버렸다. 소련 선수들은 훌륭했지만 가린샤의 특이하고 위력적인 드리블 앞에 와르르 무너졌다. 지지의 활약도 엄청났다. 위 영상 2분 25초경 침투하는 바바에게 찔러주는 저 아름다운 패스를 보라. 지지의 활약은 저게 다가 아니었다. 경기 내내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클래스를 입증해 보였다.
가장 빛난 것은 지지와 가린샤, 그리고 두 골을 기록힌 바바였지만 펠레 역시 빛났다. 이 경기는 펠레의 월드컵 데뷔전이었다. 펠레는 페올라 감독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한 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팀의 승리에 큰 도움을 주었다. 펠레는 경기 종료 직전 바바에게 어시스트를 제공했다. 그런데 바바의 득점 이후 펠레가 신이 난 나머지 소련의 골대로 들어간 공을 집어 들고 한번 더 차 넣는, 매너 면에서 절대로 좋게 봐 줄 수 없는 행동을 했다. 다행히 소련의 골키퍼 레프 야신은 배포가 큰 사람이었고 이 상황을 그냥 넘어갔다. 여튼 브라질 대표팀의 분위기와 조직력은 17세의 펠레가 선발 팀에 오른 이후 확실히 더 좋아졌다. 브라질은 2대0으로 소련을 이기고 3경기 승점 5점을 쌓았다. 조 1위였고, 8강 토너먼트에 진출하는 데에 성공했다. 소련은 득실차가 같았던 잉글랜드와 플레이오프를 진행하여 8강에 올랐다.

3.2. 토너먼트


8강에서 만난 상대는 희대의 선수 존 찰스가 있던 웨일스.[3] 웨일스는 지역예선도 통과를 못 해서 특별 플레이오프의 수혜자로 월드컵 조별 리그에 간신히 진출한 팀이었다. 조 배정은 당연히 망했다. 헝가리, 스웨덴, 멕시코와 같은 조에 속해 탈락이 확실시되는 분위기였다. 그럼에도 웨일스는 기 죽지 않고 정말 열심히 뛰었다. 말 그대로 '이빨 빠진 호랑이'였던 헝가리와의 승부에서는 요세프 보직에게 선제골을 허용하지만 존 찰스가 동점골을 터뜨리며 무승부를 기록했다. 멕시코를 상대로는 선제골을 기록했고, 하이메 벨몬테에게 막판 동점골을 허용해 아쉽게 비겼다. 그리고 개최국 스웨덴의 엄청난 공격력을 완강한 수비력으로 전부 막아내며 0-0무승부를 기록했다. 조별리그 기록은 0승 3무 0패. 당시에는 승리 시 승점 2점이 주어지는 방식이었다. 웨일스는 플레이오프에서 1승 1무 1패의 헝가리와 맞붙게 되었다. 그리고 이 경기에서 2-1승리를 거두었다. 비록 1승도 기록하지 못했지만, 웨일스는 언더독이라는 말을 듣기에 충분한 좋은 팀이었다.
브라질은 지지, 가린샤, 니우통 산투스 등 내보낼 수 있는 선수는 다 선발팀에 내보냈다. 그리고 소련전에서 좋은 활약을 한 펠레도 선발팀에 오른다. 경기는 브라질이 우세했다. 가린샤는 또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와도 같은 드리블을 몇 차례 보여주며 웨일스를 크게 위협했다. 경기 66분경 브라질에게 좋은 찬스가 주어진다. 주제 아우타피니가 웨일스 주장 데이비드 보웬과의 경합 과정에서 머리 높이로 뜬 공을 바로 중앙으로 차 넘겼고, 애매한 위치에 떨어지려는 공을 지지가 헤더로 가로챘다.

<color=#373a3c> '''브라질 vs 웨일스'''
펠레는 페널티 박스 안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샤페우(Chapéu)'라고 불리는 기술을 사용해 지지의 헤더를 받아냈다. 현대에는 영미권 축구 문화와 결합하여 '솜브레로 플릭'이라고도 불리는 기술이다. 펠레를 수비하던 웨일스의 멜 찰스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플레이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골대 바로 앞에서 맞이한 오픈 찬스, 냉정한 오른발 발리 슈팅, 골. 국가대표팀에 승선 여부도 불확실했던 소년이 만 17세의 나이로 '''월드컵 최연소 득점 선수'''라는 기록에 자신의 이름을 써넣는 순간이었다. 펠레는 폴짝폴짝 뛰며 좋아했다. 이후 경기가 끝날 때까지 아무런 득점도 나오지 않았고, 펠레의 골은 결승골이 되었다. 브라질은 4강에 진출했다.
다음 4강의 상대는 프랑스. 프랑스에는 조별리그와 8강전 4경기에서 8골을 때려박은 득점의 신 쥐스트 퐁텐이 있었고[4] 1956년부터 2년 연속 발롱도르 3위에 오른 '나폴레옹' 레몽 코파가 있었다. 로저 피앙토니라는 훌륭한 공격수 역시 보유하고 있었다. 5일 전 8강전에서는 북아일랜드를 4-0으로 박살내 버렸고, 브라질과의 경기 이전까지 조별리그와 8강전 합해서 4경기 15골을 터뜨리며 압도적인 공격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color=#373a3c> '''펠레 vs 프랑스'''[5]
1958년 6월 24일 4강전이 열렸다. 먼저 골을 터뜨린 것은 브라질이었다. 경기 시작 2분만에 지투의 패스를 받은 바바가 감각적인 터치 이후 발리슛으로 골망을 갈랐다. 그리고 7분이 흘러 코파가 브라질 진영에서 스루패스를 날렸고, 퐁텐이 지우마르에 앞서 공을 가로채며 골망을 갈랐다. 경기는 계속되었다. 39분에는 지지가 엄청난 중거리 슈팅으로 골망을 흔들며 앞서가기 시작했다. 전반 종료 휘슬이 울렸고 프랑스는 위기에 몰렸다. 후반전에는 반드시 경기 분위기를 바꿔놓아야 했다.
경기 52분, 자갈루가 올린 크로스를 골키퍼 르메트르가 잡으려다가 놓쳤다. 펠레의 왼발 앞에 공이 떨어졌다. 펠레는 바로 밀어 넣었다. 점수 3-1. 동점골을 넣어도 모자랄 판에 추가골을 허용한 프랑스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12분 후, 펠레는 가린샤가 준 패스를 왼발로 받고 오른발로 붕 띄웠다. 프랑스 수비수 레몽 캘벨이 다가왔다. 펠레는 아주 지능적으로 슈팅을 때리는 척 하더니 슬쩍 힘을 빼고 왼쪽으로 공을 띄워 넘겼다. 캘벨은 완전히 속아 넘어갔다. 펠레의 패스를 받은 바바는 슈팅을 때렸으나 막혔다. 그리고 튀어나온 볼을 펠레가 파워풀한 슈팅으로 마무리했다. 4-1. 3점 차로 벌어졌다. 이미 후반전이었고, 천하의 쥐스트 퐁텐도 이런 점수 차 앞에서는 어찌할 바가 없었다. 그리고 경기 72분에는 지지의 패스를 페널티 박스 부근에서 무릎으로 띄우 올리더니, 오른발 발리슈팅으로 멋지게 마무리지었다. 펠레의 해트 트릭이었다. 그것도 에드문트 코넨에 이어 월드컵 역사상 두 번째로 10대 선수가 터뜨린 해트 트릭이자 '''역대 월드컵 최연소 해트 트릭'''이었다.[6] 경기 83분, 로저 피앙토니가 만회골을 넣지만 이미 4점이나 벌어져 있던 점수차를 한 점 줄인 것에 만족해야 했다. 브라질은 펠레의 해트 트릭을 앞세워 프랑스를 5대2로 꺾었다.
이 경기 후 펠레의 A매치 득점 수는 8경기 9골이 되었고, 경기당 1골을 넘어섰다. 펠레가 언제까지 A매치 경기당 1득점 이상의 기록을 유지하는지 지켜보자.
대망의 결승전 상대는 개최국 스웨덴. 당시 스웨덴의 선수진은 굉장했다. 비록 AC 밀란의 50년대 전성기를 이끌던 한 축이자 당시 세리에 A 최고의 스트라이커였던 군나르 노르달은 없었지만 닐스 리드홀름이 주장이었고 군나르 그렌도 데리고 있었다. 수비진에는 유럽 최고의 라이트 풀백으로 명성을 떨쳤던 오바르 베리마크가 있었다. 거기에 양쪽 윙어는 가히 스웨덴 역사상 최고였다고 단언할 만 했는데, 왼쪽이 렌나르트 스코글룬드, 오른쪽이 쿠르트 함린이었다. 거기에 중원에는 4강전에서 프리츠 발터의 선수생활을 끝내 버린 파워 태클러 지게 팔링도 있었다. 스웨덴 선수들은 피지컬적으로 아주 강한 팀이었다. 반면 브라질은 기술 위주의 팀이었다. 선발 명단의 11명 중 골키퍼 지우마르와 레프트백 니우통 산투스, 센터백인 벨리니와 오를란두를 제외하면 모두 키가 179cm 이하였다. 스타일 차이가 현격했다.
스웨덴 캡틴 리드홀름이 경기 시작 4분만에 브라질 수비진을 완전히 농락하고 정교한 슈팅으로 골을 터뜨렸다. 경기는 스웨덴 쪽으로 기우는 듯했다. 그러나 5분 후 브라질이 반격을 시작했다. 가린샤의 땅볼 크로스가 살짝 굴절[7]된 것을 바바가 침착하게 마무리하며 동점이 되었다. 24분 후, 가린샤와 바바는 완전히 똑같은 모양새의 골을 하나 더 집어넣었다. 준결승과 비슷한 양상으로 흘러가는 듯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반전 종료 휘슬이 울렸고, 곧 후반전 시작을 알리는 휘슬이 울렸다. 그리고 10분이 흘러 니우통 산투스가 박스 안에 있던 펠레에게 볼을 전달했고...

<color=#373a3c> '''원더 골'''
펠레가 완벽한 가슴트래핑에 이어 정말 아름다운 궤적의 샤페우를 성공시켰다. 그리고 발리 슛으로 골을 터뜨렸다. 놀라운 장면이었다. 월드컵 무대에서 이렇게 멋진 골이 나온 적은 없었다[8][9]. 이 환상적인 득점 이후 기세가 오른 브라질은 스웨덴을 더욱 몰아붙였다. 68분에는 자갈루가 왼쪽에서 치고 들어와 추가골을 만들었다. 스코어 4-1. 브라질의 우승이 거의 확실해졌다. 80분에는 앙네 시몬손이 만회골을 넣었다. 4강전과 마찬가지로, 3점 벌어진 점수차를 줄이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여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경기가 끝나기 직전, 펠레는 자갈루에게 백힐 패스를 건네 주더니 바로 페널티 박스로 들어가 자갈루가 올려 준 크로스를 머리에 맞혔다. 이 헤더 슈팅은 절묘하게 날아가 골망에 꽃혔다. 펠레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바로 쓰러졌다. 이내 경기 종료 휘슬이 울렸다. 브라질의 5대2 승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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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r=#373a3c> '''지지, 지우마르의 품에 안겨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펠레'''
아직 10대의 소년이었던 펠레는 경기가 끝나자마자 감격의 눈물을 흘렸으며, 지우마르지지 등 많은 베테랑 선수들이 펠레를 다독여주었다. 그리고 주장 벨리니가 단상 위에 올라 쥘리메컵을 들어올렸다. 펠레가 첫 월드컵에서 한 일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만 17세의 나이에 월드컵에 출전하여 4경기 출전 6골 2어시스트로 '''팀 내 득점 1위+전체 득점 2위+최연소 득점+해트 트릭+결승전 출전 및 멀티골+우승'''[10]에 '''월드컵 실버볼 수상'''[11][12]. 빅게임에 약한 것도 아니어서 본선 토너먼트에서만 6골을 터뜨렸다. 월드컵 결승에서 나온 역대급 골은 덤이다. 월드컵 데뷔 참 쉽죠? 단연 역대 축구 선수 중 가장 센세이셔널한 데뷔이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이런 데뷔는 없다.[13]

4. 1959년 코파 아메리카


브라질은 1957년 최정예 멤버를 이끌고 코파 아메리카에 참가했었다. 1957년의 대회는 브라질의 플레이메이커가 교체된 상징적인 대회였다. 이 대회 이전까지 브라질 최고의 에이스는 지지뉴였다. 지지뉴는 어느덧 36세가 되었다. 이제는 브라질 축구의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해 세대 교체가 필요했다. 그리고 1957년 코파 아메리카를 기점으로 지지가 대표팀의 중심이 되었다. 지지는 미드필더임에도 불구하고 이 대회에서 6경기 8골을 몰아치며 브라질의 2위 안착을 이끄는 괴물 같은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1958년 월드컵에서 '붐'을 일으킨 펠레가 브라질 1군 팀의 고정 멤버가 된 후, 1959년 3월에 아르헨티나에서 코파 아메리카가 열렸다. 브라질은 1958년 월드컵 우승 당시의 주축 멤버를 반 정도만 데려왔다. 전 대회에서 MVP급 활약을 펼친 지지, 월드컵 올스타 팀 윙어 가린샤 등 참가한 선수도 많았으나 니우통 산투스, 바바, 벨리니 등은 불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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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r=#373a3c> '''1959년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에 참가한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
이 대회는 팀당 한 경기씩 맞붙는, 단일 리그 식으로 경기를 진행했다. 펠레는 바바를 대신해서 온 보타포구 FR의 주전 공격수 파울루 발렝칭과 함께 공격진에 서게 되었다. 발렝칭은 펠레보다 8살이나 많았지만 A매치 경험이 전무했던 선수였다. 둘은 친선 경기에서조차 합을 맞추어 뛴 적이 없었고, 이 조합은 누가 봐도 잘 안 맞을 것 같은 조합이었다.
1라운드는 페루와의 경기였다. 지지가 선제골을 터뜨렸고, 펠레가 추가골을 넣었다. 하지만 후안 세미나리오에게 연달아 두 골을 허용하며 무승부를 기록했다.
2라운드는 5일이 지난 시점인 5월 15일에 진행되었다. 펠레는 전반전이 끝나기 직전인 43분, 45분에 연달아 득점을 기록했다. 칠레는 한 골도 기록하지 못했고, 지지가 경기 종료 직전에 한 골을 추가하며 쐐기를 박았다. 펠레는 벌써 두 경기에서 세 골이나 득점했다.
6일 후 열린 3라운드 상대는 볼리비아전였다. 이 경기에서, 펠레와 파울루 발렝팅은 환상적인 조합을 보여주었다. 펠레가 먼저 선제골을 터뜨렸고 발렝칭이 펠레의 득점 이후 2분만에 한 골을 넣더니 8분 후 펠레의 어시스트를 받아 또 추가골을 득점했다. 그리고 지지는 또 경기 종료 직전에 한 골을 추가했다. 브라질은 좋은 팀이었고, 펠레와 지지는 팀 내에서 서로 사이좋게 득점 경쟁을 이어갔다. 3라운드까지의 기록은 펠레 4골, 지지 3골이었다.
4라운드 상대는 우루과이. 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축구에 한한다면 우루과이와 브라질은 전통적으로 좋지 않은 사이이다. 1950년에는 브라질이 패배했으나 1959년은 그렇지 않았다. 대회의 위상 차이가 크기 때문에 복수했다 보기도 어렵고 큰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결과부터 말하자면 브라질이 우루과이를 3-1로 완전히 눌러 버렸다.

<color=#373a3c> '''브라질 vs 우루과이'''[14]
이 경기에서 펠레는 득점을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공격진의 파트너인 파울루 발렝칭을 향해 양질의 크로스를 제공하여 한 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했다. 발렝칭은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펠레와 함께 팀 내 득점 공동 선두가 되었다.
5라운드 상대는 파라과이였다. 파라과이는 당시 남미에서 꽤 경쟁력을 갖추고 있는 국가대표팀이었다. 1959년 코파 아메리카에는 호세 아베이로와 카예타노 레, 호세 파로디 등 유명한 선수들도 많이 참가했다. 파라과이의 호세 파로디가 경기 4분만에 브라질의 골망을 갈랐다. 그러나 브라질은 아주 강했다. 펠레는 25분에 동점골을 넣었고 31분에는 역전골을 넣었다. 그리고 치네시뉴가 4분 뒤 추가골을 기록하며 3-1이 되었다. 후반 63분, 펠레는 한 골을 추가했다. A매치에서 두 번째로 기록한 해트트릭이었다. 브라질은 펠레의 대활약 덕에 파라과이를 4-1로 꺾었다. 아르헨티나와의 승점 차이는 단 1점이었고, 아르헨티나를 이긴다면 우승이 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이었으니 6라운드는 결승전이 아니었지만 사실상의 결승전이나 다름없었다. 상대는 개최국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는 오마르 코르바타, 후안 호세 피수티 등을 앞세워 대회 2연패를 노리고 있었다. 브라질은 4승 1무로 승점 9점이었고 아르헨티나는 5전 전승으로 승점 10점이었다. 브라질이 우승하는 방법은 오직 승리뿐이었다.

<color=#373a3c> '''브라질 vs 아르헨티나'''[15]
홈 관중들의 열띤 응원 속에서 아르헨티나 선수들은 좋은 플레이를 펼칠 수 있었다. 마침내 아르헨티나는 지우마르를 뚫어냈다. 득점자는 베테랑 공격수 후안 호세 피수티였다. 얼마 안 되어 전반전이 종료되었고, 후반전이 시작되었다. 펠레는 경기 58분에 가린샤의 크로스를 받아 동점골을 득점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의 수비는 튼튼했고 펠레를 포함한 브라질 공격진은 이 골 외에 다른 골을 터뜨리지 못했다. 결국 1-1 동점으로 경기가 종료되었다. 리그 1위는 최종 승점 11점을 기록한 아르헨티나가 차지했다. 브라질의 최종 승점은 10점이었다. 정말 아쉬운 결과였다. 펠레는 정말 좋은 활약을 펼쳤음에도 트로피를 들어올리지 못했다.
1959년 아르헨티나에서 개최된 코파 아메리카에서 펠레가 보여준 활약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페루전 2-2 무 펠레 1골

칠레전 3-0 승 펠레 2골

볼리비아전 4-2 승 펠레 1골 1어시스트

우루과이전 3-1 승 펠레 1어시스트

파라과이전 4-1 승 펠레 3골

아르헨티나전 1-1 무 펠레 1골

'''총 6경기 8골 2어시스트'''

이후 펠레는 남미축구협회 주관 대회인 코파 아메리카에 계속해서 나오지 못했다. 이것은 코파 아메리카가 쇠락기를 맞고 있어 대회의 위상이 상당히 떨어졌기 때문에 브라질 축구협회 측에서 자신들의 보물단지나 다름없는 상파울루 주립 리그, 히우지자네이루 주립 리그 등 대형 주립 리그 소속의 선수들을 코파 아메리카 대회에 보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1959년에 에콰도르에서 또 열린 코파 아메리카에도 브라질 팀이 참가하긴 했으나, 그 멤버 면면을 살펴보면 브라질 국가대표팀이라기보다는 페르남부쿠 주립 리그의 올스타 팀이었다. 이후 1967년 대회에서도 브라질 축구 협회의 결정은 마찬가지였다. 1963년 코파 아메리카에 참가한 브라질 대표팀의 명단을 보자. 우리가 많이 들어본 선수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한 술 더 떠서, 1967년에는 브라질 축구협회 측에서 코파 아메리카에 아예 불참하겠다고 밝혔다. 결국 펠레의 코파 아메리카 활약은 이 대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었다. 당시 브라질 1군 팀의 전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생각한다면, 이것은 참 아쉬운 부분이다.
펠레는 처음 참가한 코파 아메리카 대회에서 아주 좋은 평가를 받았다. 대회 최고의 선수로 선정되었으며, 아르헨티나의 유명 언론 엘그라피코 선정 대회 베스트팀에도 선정되었다. 아래 나온 것이 1959년 당시 엘그라피코가 선정한 대회 베스트이다.# 단 한 번만 참가한 대륙 국가대항전에서 그 한 번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최우수 선수로 선정된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것이다.
[image]
'''El Grafico 1959 Copa America Best XI'''[16]
OL
'''라울 벨렌'''
[image]
CF
'''블라다스 도우크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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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
'''가린샤'''
[image]
IF
'''펠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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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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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B
'''엘리세오 모우리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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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B
'''블라디슬라프 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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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B
'''알시데스 실베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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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B(CB)
'''빅토르 베니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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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B
'''미트로 다보이네'''
[image]
GK
'''라파엘 아스카'''
[image]
1959년 코파 아메리카 아르헨티나 대회가 끝난 시점, 펠레의 A매치 기록을 확인해 보면 15경기 19골이다. 즉, 경기당 1골 이상의 기록을 계속해서 유지했다.

5. 1959년~1962년 마이너 대회



5.1. 1959 코파 베르나르도 오이긴스


[image]
<color=#373a3c> '''코파 베르나르도 오이긴스 트로피'''
이 대회는 1955년부터 1966년까지 비정기적으로 칠레와 브라질 간에 진행되었던 친선 컵이다. 위의 코파 로카, 타사 오스바우두 크루즈와 아주 비슷한 개념의 대회이다. 칠레의 독립 영웅인 베르나르도 오이긴스를 기리는 대회이다. 2년 전인 1957년에도 대회가 열렸었는데, 칠레 국가대표팀이 승리했었다. 당시 펠레는 참가하지 않았다.
1959년의 9월의 대회는 브라질 축구의 중심지인 히우지자네이루와 상파울루에서 열렸다. 1차전은 히우지자네이루에서 열렸다. 브라질은 레알 마드리드로 떠난 지지, 그리고 부상당한 니우통 산투스와 가린샤를 제외한 정예 멤버를 그대로 데리고 나왔다. 이번엔 펠레도 참가했다. 지우마르가 골대에 섰고 자우마 산투스, 오를란두, 코루네우가 수비진을 구성했다. 지투가 하프백에 섰고 지지 대신 디노 사니가 공격형 미드필더 자리에 섰다. 나머지 공격수 네 명은 콰렌치냐, 펠레, 도르바우, 자갈루였다.

<color=#373a3c> '''1차전 하이라이트. 경기 녹화본 대부분이 유실되었다.'''
결과는 압도적이었다. 펠레는 경기 3분, 14분, 28분에 한 골씩 터뜨리며 국가대표팀 통산 세 번째 해트트릭을 기록했고 도르바우가 한 골, 콰렌치냐가 한 골, 디노 사니가 두 골을 터뜨리며 7-0 스코어를 만들었다. 펠레는 경기 도중 부상을 당해 마사지사 마리우 아메리쿠에게 붙들려 나갔다. 그대로 경기가 종료되며 브라질이 승리를 거두었다. 지지가 없어도 브라질은 충분히 강했다.

<color=#373a3c> '''2차전 하이라이트'''
하루 뒤 바로 열린 2차전은 펠레의 팀 산투스 FC가 있는 상파울루에서 열렸다. 펠레는 전날 경기장에서 부상으로 빠져나가야 했지만 하루 만에 회복하는 데에 성공했고, 그래서 브라질의 라인업은 1차전 때와 완전히 같았다. 칠레는 고군분투하여 브라질의 총공세를 잘 막아냈다. 하지만 브라질 공격수 콰렌치냐에게 한 골을 실점했고, 결국 이번에도 1-0으로 브라질이 승리를 거두었다. 우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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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r=#373a3c> '''1959 코파 베르나르도 오이긴스에서 우승한 브라질 국가대표팀'''
펠레는 20세가 채 되기도 전에 A매치에서만 세 번의 해트트릭을 기록했다. 정말 대단한 공격수였다. 이 대회가 끝난 시점에서 펠레의 A매치 기록은 18경기 22골이었다.

5.2. 1960 코파 델 아틀란티코


메이저 국가대항전은 아니지만, 코파 델 아틀란티코는 코파 로카, 타사 오스바우두 크루즈 등에 비하면 나름 큰 대회였다. 초대 대회인 1956년 대회에서는 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3개국이 참가했으며 2대 대회인 1960년 대회에서는 파라과이가 추가로 참가하며 4개국이 참가했다. 마이너 버전의 코파 아메리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코파 아메리카와 마찬가지로, 단일 리그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번 대회에는 니우통 산투스가 참가했으며, 지지가린샤, 지투를 제외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그 '황금기 멤버'들이 대부분 참가했다.
브라질의 첫 상대는 파라과이였다. 7월 3일 아순시온에서 경기가 열렸고 브라질이 2-1로 승리했다. 펠레는 출전하지 않았다.
[image]
<color=#373a3c> '''우루과이전 직전에 찍은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의 선발팀 사진'''
두 번째 경기도 원정 경기였다. 우루과이를 상대했으며 몬테비데오에서 경기가 열렸다. 펠레는 이 경기에 출전했으나 브라질은 도밍고 페레즈에게 실점했다. 펠레는 브라질의 1-0 패배를 막지 못했다. 4팀이 한 경기씩 맞붙는 방식이었으므로 남은 경기는 단 한 경기 뿐이었다. 상대는 코파 아메리카에서 브라질을 물 먹였던 아르헨티나였다. 이번 경기는 아르헨티나가 아니라 브라질에서 열렸고, 그것도 '성지'라고 불리는 마라카낭에서 열렸다. 펠레는 몸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았음에도 출전했다. 그리고 한 골 혹은 두 골을 득점했다.[17] 전반전 종료 휘슬이 울렸고, 펠레는 후반전 시작 전에 바우두와 교체되었다. 전반전만 뛰고도 팀 승리에 확실하게 기여했다. 브라질은 펠레의 결승골에 힘입어 5-1 승리를 거두었다.
최종 순위는 아래와 같았다.
순위
국가
승점
경기






1
[image]브라질
4
3
2
0
1
7
3
+4
2
 [image]아르헨티나
4
3
2
0
1
6
5
+1
3
 [image]우루과이
4
3
2
0
1
3
5
-2
4
 [image]파라과이
0
3
0
0
3
2
5
-3
코파 델 아틀란티코는 총 세 번 열렸으며 지금까지 열리지 않고 있다. 펠레의 국가대표팀 데뷔 전인 1956년, 1960년, 그리고 펠레의 국가대표팀 은퇴 후인 1976년에 한 번 열렸다. 브라질은 세 번 열린 이 대회에서 모두 우승을 차지했다. 펠레는 아르헨티나전에서 아주 훌륭한 활약을 펼침으로써 두 번째 우승에 크게 기여하였다.
펠레는 7월에 열렸던 이 대회 이전, 5월 1일 이집트와의 A매치에서 팀의 세 골을 혼자 집어넣으며 3-1승리를 이끌고 A매치 통산 네 번째 해트트릭을 기록하기도 했다. 코파 델 아틀란티코가 끝난 시점에서 펠레의 A매치 기록은 24경기 26골이었다. 일단 FIFA에서 아르헨티나전 펠레의 멀티골을 인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26골로 표기한다.

5.3. 1962 타사 오스바우두 크루즈


1961년, 펠레는 A매치에 한 경기도 나오지 않았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당시에는 A매치 주간을 보장해 주지 않았기에 멀쩡한 기량을 가지고도 A매치를 한 경기도 진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꽤 있었다. 아마 펠레도 이런 사례+부상 때문에 1961년의 A매치 기록이 없는 것이 아닐까 짐작된다. 펠레는 1961년 클럽에서 주립 리그, 전국 대회에서 모두 우승을 거둔 데다가 주립 리그에서 26경기를 뛰는 동안 47골을 집어넣는 괴물같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국가대표팀에 승선할 실력이 안 되었다는 말은 완전히 어불성설이다.
1962년 4월, 오스바우두 크루즈가 또 개최되었다. 1961년 대회는 파라과이에서 열렸으며 펠레는 참가하지 않았고 브라질은 파라과이에 패했다. 1962년 돌아온 지지&펠레와 마라카낭에서 함께한 브라질은 어떤 결과를 만들어냈을까?
[image]
<color=#373a3c> '''1962년 타사 오스바우두 크루즈에 참가한 브라질 팀'''
4월 21일 첫 번째 경기, 마라카낭에 모습을 드러낸 펠레의 존재감은 확실했다. 브라질은 파라과이를 6-0으로 뭉개버렸고 펠레는 1골을 득점했다. 3일 후 펼쳐진 2차전도 마찬가지였다. 펠레는 멀티골을 기록하며 4-0승리를 이끌었다. 합산 스코어는 10-0이었다. 두 경기동안 펠레에게 세 골이나 실점한 파라과이는 완전히 자존심을 구기고 말았다. 브라질은 1961년에 빼앗겼던 트로피를 탈환해내는 데에 성공했다.
이 대회가 끝난 시점에서 펠레의 A매치 기록은 26경기 29골이었다.

6. 1962 FIFA 월드컵 칠레


1962년 5월, 월드컵 직전에 열린 평가전에서 브라질은 포르투갈과 웨일스를 초청하여 각 두 경기씩 친선전을 진행했다. 펠레는 포르투갈과의 2차전에서 결승골을 득점했고 웨일스와의 경기에서는 1차전 1골, 2차전 2골을 집어넣었다. 펠레는 클럽에서도 대단했다. 1962년 2월에 열렸던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조별리그에서는 총 두 골을 넣으며 7월에 진행될 본선 토너먼트에 일찌감치 산투스를 진출시켰다. 펠레만한 공격수는 세계 어디에도 없었으며, 월드컵에서도 당연히 핵심 공격수로 활약할 예정이었다.
1958년 월드컵에서 센세이셔널한 모습을 보여주며 우승한 브라질 대표팀은 지역예선을 치르지 않고 바로 본선 조별리그 배정을 받았다. 브라질은 스페인, 체코슬로바키아, 멕시코와 함께 3조에 배정되었다.

6.1. 조별 리그



<color=#373a3c> '''펠레 vs 멕시코'''[18]
첫 경기는 멕시코전이었다. 경기의 대부분동안 브라질이 공을 점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반전 동안 계속된 슈팅 시도에도 불구하고 득점이 터지지 않았다. 특히 펠레가 찬 프리킥은 안토니오 카르바할의 선방에 막힌 뒤 골대에 맞고 튕겨나갔다. 그러다가 경기 56분, 펠레가 멕시코 진영의 페널티 박스 안에서 수비수 호세 비예가스의 공을 빼앗아냈다. 찬스였다. 펠레는 무리하지 않고 반대편의 자갈루에게 공을 띄워 전달했다. 자갈루는 전매특허인 다이빙 헤더로 카르바할이 지키는 골문을 뚫어냈다. 스코어는 1-0이 되었다. 펠레는 계속해서 멕시코 수비진을 유린했다. 경기 73분, 펠레는 잠시 서서 느슨하게 각을 재더니, 오른발로 공을 툭 치고 엄청난 스피드로 튀어나갔다. 펠레는 첫 터치로 한 명을 제쳤으며 엄청난 스피드로 두 번째 선수를 제치고 공에 도달했다. 공에 도달함과 동시에 세 명 제쳤다. 오른발로 툭 치고 네 명까지 제쳤다. 멕시코 수비진은 몇 초 사이에 완전히 풍비박산이 났고 센터백 두 명이 달라붙었지만 펠레의 왼발은 이미 공을 골대로 찬 상태였다. 골키퍼 카르바할은 막아낼 도리가 없었다. 원더골이었다. 경기는 그대로 끝났고, 브라질의 2-0 승리였다. 펠레는 월드컵 첫 경기부터 팀의 모든 득점에 직접적으로 관여했다. 20대가 된 펠레는 신체적인 파괴력까지 추가적으로 갖추게 되었고, 확실히 1958년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17세의 소년보다도 더 위력적인 선수로 성장해 있었다.
두 번째 경기인 체코슬로바키아와의 경기. 멕시코를 상대로 압도적인 플레이들을 잔뜩 선보인 펠레는 체코슬로바키아에게도 당연히 견제 대상 1호였다. 펠레에게 견제가 집중되어 상대적으로 가린샤에 대한 견제가 느슨해졌고, 가린샤는 물 만난 고기처럼 본격적으로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특히 가린샤가 하프라인부터 두어 명을 제치고 페널티 박스 부근에서 바로 슈팅을 날리는 장면도 있었는데, 시로이프의 손에 맞은 뒤 골대를 강타하며 아쉽게 득점이 불발되었다.

<color=#373a3c> '''펠레의 부상'''
펠레는 전반 도중 왼발로 강력한 중거리슈팅을 시도했다. 시로이프는 좋은 다이빙으로 이것을 튕겨냈다. 그런데, 중계 카메라는 시로이프가 아닌 펠레를 비추었다. 펠레에게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 갑작스럽게 통증을 호소하며 다리를 절기 시작했고, 곧 그라운드에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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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r=#373a3c> '''이번 월드컵은 끝났다는 것을 직감한 펠레'''
[image]
<color=#373a3c> '''펠레의 부상에 머리를 감싸쥐며 안타까워하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비수 스바토플루크 플루스칼'''
이 상황에서 볼 수 있듯이, 펠레는 21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미 상대편 선수들에게 존경을 받는 수준의 대선수였다. 이 안타까운 상황은 수비수의 잘못 때문에 나온 상황도 아니었고 펠레의 잘못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저 운이 없는 상황이었다. 펠레는 빨리 뛰고 싶었지만 마사지사 마리우 아메리쿠의 처치에도 불구하고 회복하지 못했고, 계속 경기장 한구석에서 관전하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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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r=#373a3c> '''간신히 일어나 초조한 마음으로 관전하는 펠레'''
펠레의 부상 이후, 체코슬로바키아는 한 명이 많은 상황에서 플레이할 수 있게 되었다. 디펜딩 챔피언 브라질을 꺾을 수 있는 좋은 찬스였다. 그러나 체코슬로바키아 선수들은 공격을 자제했다. 그리고 매우 매너 좋은 플레이를 펼쳤다. 요제프 마소푸스트 같은 경우에는 부상당한 펠레를 부축해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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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r=#373a3c> '''펠레와 마소푸스트'''
경기는 0:0으로 종료되었다. 펠레는 경기 종료 후 마소푸스트에게 다가가 감사를 표했다. 다른 체코슬로바키아 선수들도 펠레에게 다가와 부상당한 곳은 괜찮냐고 물어보았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아름다운 매너에 감동한 관중석에서는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펠레는 아직도 그 당시 체코슬로바키아 선수들이었던 요제프 마소푸스트, 얀 포플루하르, 얀 랄라, 빌리암 시로이프 등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아름다운 경기는 승부와는 별개의 문제였다. 당장 다음 경기가 루이스 수아레스가 있는 스페인과의 경기였는데, 펠레가 없는 브라질은 노인정이나 다름없었고 기동력 문제가 여실히 드러날 것이 분명했다. 당시 21세인 펠레를 포함해 선발 선수들의 평균 나이가 무려 '''만 29.9세'''였다. 펠레가 빠지면 브라질 선발팀의 평균 나이는 30세가 넘어갔다. 당시 여러 가지 이유로 선수 생명이 더 짧았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것은 심각한 문제였다. 세대교체가 전혀 안 되어 있었던 것이다. 특히 1925년생인 니우통 산투스는 생일까지 넘겨 만 37세였고 1928년생인 지지 역시 만 34세를 바라보는 노장이었다. 선발 선수 중 기동력을 책임져줄 수 있는 선수는 가린샤밖에 없었다. 남은 경기에서 펠레를 대체할 수 있는 공격자원은 산투스의 페페, 코치뉴와 보타포구의 아마리우두가 있었다. 아이모레 모레이라 감독의 선택은 아마리우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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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r=#373a3c> '''펠레의 이탈 이후, 브라질이 1962년 월드컵에서 주로 사용한 포메이션'''
1승 1패를 기록한 스페인은 브라질을 꺾어야만 8강 진출이 가능했다. 프란시스코 헨토, 푸슈카시 페렌츠, 아델라르도 로드리게스 등의 스타 플레이어들을 싹 다 내보냈다. 말 그대로 모든 전력을 풀가동했다. 그리고 펠레가 없었던 브라질. 역시 경기는 스페인이 주도했다. 33세가 된 자우마 산투스는 헨토의 빠른 발을 당해내지 못했고 중앙 수비수들은 푸슈카시의 환상적인 패스들을 전혀 제어하지 못하며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니우통 산투스는 명백한 핸들링 파울을 저질렀으나 주심의 오심으로 그냥 넘어갔다. 가린샤만이 위협적인 드리블 몇 차례를 보여주며 브라질의 체면을 살릴 뿐이었다. 결국 경기 35분, 아델라르도 로드리게스에게 선제골을 허용했다.
후반전에는 니우통 산투스가 페널티 박스로 뛰어 들어오는 스페인 캡틴 엔리케 콜라르에게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다. 명백하게 페널티박스 안에서 일어난 파울이었지만, 주심은 박스 바깥에서 파울이 발생했다고 판단했다. 결국 스페인은 페널티 킥을 얻어야 할 상황에 얻지 못했다. 이 프리킥에서 푸슈카시의 크로스를 헨토가 바이시클 킥으로 때려 넣었지만 이 또한 무효 처리되었다. 그리고 스페인의 나머지 슈팅들은 슈퍼맨 모드가 된 지우마르에 의해 전부 막혔다.

<color=#373a3c> '''브라질 vs 스페인'''
오심으로 불이익을 본 스페인. 이제 찬스는 브라질에게 넘어왔다. 지지의 경기력이 살아났고 가린샤는 계속해서 수비진을 흔들었다. 그리고 경기 72분, 자갈루의 크로스를 아마리우두가 때려 넣으면서 스페인의 견고한 수비진이 무너졌다. 푸슈카시는 35세의 나이 때문인지 아마리우두가 동점골을 넣을 때쯤, 힘이 빠진 듯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지우마르의 2연속 슈퍼세이브가 터지고 몇 분 후인 경기 86분, 가린샤가 스페인 수비진을 전부 헤집어 놓은 뒤 크로스를 올렸고 아마리우두가 그것을 헤더로 받아치며 역전골을 만들어냈다. 오심+지우마르의 선방쇼 때문에 약이 오를 대로 올랐던 스페인 선수들은 이 골이 터지자 분통을 제대로 터뜨렸다. 레알 마드리드 소속의 하프백이었던 파친은 몇 분 후 아마리우두를 향해 고의성이 다분한 백태클을 걸기도 했다. 주심은 파울을 선언하지 않았다. 이내 경기 종료 휘슬이 울렸다.
펠레만큼의 영향력은 보여주지 못했지만, 골 두 개를 터뜨린 아마리우두는 브라질의 8강 진출을 이끈 영웅이 되었다.

6.2. 토너먼트


가린샤는 노쇠한 팀에서 지투, 지우마르와 함께 가장 빛나는 선수였다. 아마리우두의 활약 덕에 8강에 올라왔고, 8강 상대는 1958년에도 만났던 잉글랜드였다. 4년 전과 스쿼드 변화가 거의 없던 브라질과 달리 잉글랜드는 상당히 많은 변화를 거쳤다. 빌리 라이트가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함에 따라 조니 헤인스가 주장이 되었고 중앙 수비수는 바비 무어로 바뀌었으며, 바비 찰튼이 주전 아웃사이드 포워드로 올라섰다. 가린샤는 바비 무어와 레이 윌슨을 상대로 축구 레슨을 제대로 시켜주었다. 전반 31분, 자갈루의 코너킥을 가린샤가 헤더로 연결하여 골망을 갈랐다. 7분 뒤 히친스가 동점골을 넣고 전반전이 끝났다. 후반 8분 가린샤의 프리킥을 바바가 헤딩으로 받아 역전골을 넣었고, 6분 뒤 가린샤가 멋진 중거리 슈팅으로 쐐기 골을 터뜨렸다. 브라질의 3-1 승리였다.
준결승전에서도 가린샤의 미친 활약은 이어졌다. 준결승전 상대는 1960년 유러피언 네이션스컵 우승팀 소련을 이기고 올라온 개최국 칠레였다. 전반 9분 칠레 수비수 맞고 흘러 나온 공을 가린샤가 때려 넣었다. 전반 32분, 가린샤는 자갈루의 코너킥을 헤딩으로 받아 두번째 골을 넣었다. 10분 뒤 칠레의 주장 호르헤 토로가 프리킥으로 만회골을 넣고 전반전은 2-1로 끝났다. 후반 2분 가린샤의 코너킥을 바바가 헤딩으로 받아 골을 넣으며 3-1로 달아났다. 후반 16분 칠레의 레오넬 산체스가 페널티킥을 넣으며 스코어를 3-2로 좁혔으나, 17분 뒤 자갈루의 크로스를 받은 바바가 4번 째 골을 넣으면서 브라질이 4-2 승리를 거두었다. 조별리그 2차전 이후 펠레가 나오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브라질은 가린샤의 활약 덕분에 결승까지 쉽게 진출했다.
브라질은 결승에서 체코슬로바키아를 다시 만났다. 체코슬로바키아도 이번에는 인정사정없이 경기에 올인했다. 그 결과 마소푸스트가 15분만에 골을 터뜨렸다. 하지만 브라질은 금방 반격했다. 자갈로의 스로인을 받은 아마리우두가 왼쪽에서 침투해 들어가 2분만에 동점골을 터뜨렸고, 경기가 그대로 흘러 후반전이 시작되었다. 후반 24분, 아마리우두의 크로스를 지투가 헤딩으로 받아 골망을 갈랐다. 후반 33분, 시로이프가 자우마 산투스의 크로스를 잡았다가 놓쳤다. 이를 바바가 곧바로 집어넣었다.
결국 경기는 브라질의 3-1 승리로 끝났다. 브라질은 월드컵 2연패를 달성했고, 1934년 월드컵1938년 월드컵을 연속으로 들었던 이탈리아의 기록을 재현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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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r=#373a3c> '''자신의 공백을 잘 메워 준 아마리우두와 포옹하는 펠레'''
펠레는 이 월드컵에서 2경기에 나와 1골 1어시스트를 기록했다. 펠레는 신체능력이 더욱 향상되어 1962년에 그야말로 최전성기를 달리고 있었다. 1962시즌, 클럽에서는 토르네이우 히우-상파울루를 제외한 모든 대회에서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축구 역사상 첫 트레블도 이 해에 달성했다. 그래서 1962년은 펠레의 커리어에서 가장 완벽한 해가 될 수 있었지만, 월드컵에서 부상으로 이탈하며 조금만 기여한 것이 되었기에 그 빛이 살짝 바랬다. 특히 이 대회는 득점왕이 4골을 넣은 가린샤 외 5명이었는데, 그런 만큼 만약 펠레가 부상을 당하지 않았다면 펠레의 국대 커리어의 두 가지 오점(펠레는 국대 커리어에서 코파아메리카 우승과 월드컵 득점왕 딱 2가지만 없다.) 중 하나인 월드컵 득점왕을 달성할 좋은 기회였던 대회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펠레는 멕시코를 상대로 승점 2점을 벌어 오며 이 대회도 1경기 이상 캐리해 노쇠화되어 가는 브라질에 큰 보탬이 되어 주었고, 확실하게 우승에 기여하였다. A매치 경기당 1득점 이상의 기록도 유지했다. 1962년 월드컵이 끝난 시점에서 펠레의 A매치 기록은 32경기 34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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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r=#373a3c> '''쥘 리메 트로피를 들어올리는 펠레'''

7. 1962년~1966년 마이너 대회



7.1. 1963 코파 로카


펠레는 1960년의 코파 로카에 참가하지 않았고, 브라질은 펠레가 없어도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좋은 경기력을 보여주며 승리했다. 1963년의 코파 로카에는 펠레가 참가했다. 그러나 가린샤, 니우통 산투스 등은 불참했다.
1963년 대회는 브라질에서 열렸고, 1차전과 2차전 모두 브라질이 경기를 주도했다. 1차전 하이라이트. 1차전에서 펠레는 미지근한 활약을 보여주었다. 산투스 동료 페페가 멀티골을 터뜨렸지만 브라질은 후안 랄라나에게 두 골을 내주고 에르네스토 후아레스에게도 한 골을 실점하며 2-3 패배를 기록하고 말았다. 1958년 월드컵 프랑스전 이후로 A매치 경기당 1골 이상의 기록을 유지했던 펠레였지만, 이 경기에서 무득점에 그치며 33경기 34득점을 기록하게 되었고, 다음 경기에서 무득점을 기록한다면 기록이 끝나게 되는 상황에 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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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r=#373a3c> '''1963년 코파 로카에 참가한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
그리고 두 번째 경기. 펠레는 마음을 단단히 하고 나왔다. 펠레는 페페, 아마리우두, 도르바우와 함께 공격진을 구성했다. 펠레는 20분만에 선제골을 터뜨렸다. 아마리우두가 1분 만에 추가골을 터뜨렸다. 엔리케 페르난데스가 만회골을 넣고 전반이 종료되었지만, 후반전이 시작한지 5분이 지나 펠레가 추가골을 기록하며 한 점 도망갔다. 그리고 10분 후 또 한 골을 추가하며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해트트릭을 완성했다. 이것은 펠레가 국가대표팀에서 터뜨린 다섯 번째 해트트릭이었다. 남미 최대의 라이벌 아르헨티나를 상대하여 얻은 결과이니만큼 더 값졌다. 코파 로카는 1957년 대회부터 스코어에 상관 없이 2차전 연장전까지 진행했다. 연장 5분에 아르헨티나의 라울 사보이가 득점을 추가하며 4-2로 점수차를 좁혔다. 그러나 아마리우두가 10분 후 한 골을 득점하면서 점수차를 다시 3점 차로 벌려 놓았다.
브라질의 우승이었다. 1945년부터 1957년, 1960년, 1963년 대회까지 우승했으니 코파 로카 4연속 우승이었다. 이 대회가 끝난 시점에서 펠레의 A매치 기록을 살펴보면 34경기 37골이다.

7.2. 1964 타사 다스 나소잉스


펠레의 기량은 날이 갈수록 올라갔다. 1963년 친선전에서는 프랑스를 상대로 또 해트트릭을 달성하며 브라질의 3-2 승리를 이끌었다. 링크. 두 번의 월드컵 우승을 이끈 가린샤가 30대에 접어들며 슬슬 노쇠화를 겪기 시작했지만, 만 23세밖에 안 된 펠레가 있는 브라질 국가대표팀은 걱정이 없었다.
이 대회의 포르투갈어 이름은 Taça das Nações. 영어로 바꾸면 'Nations Cup'이다. 브라질에서 단 한 해만 이벤트성으로 열렸다. 영연방에서는 Little World Cup이라는 호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브라질 축구협회가 개최한 대회였으며 이 대회에 참가한 국가는 국제 축구계에서 잔뼈가 굵은 팀들이었다. 아르헨티나, 포르투갈, 잉글랜드, 그리고 개최국 브라질. 포르투갈의 경우 국제 무대에서 별로 좋은 성적을 낸 적이 없었지만 당시 에우제비우라는 신성이 등장한 상태였고 마리우 콜루나, 자임 그라샤 등 탑클래스의 미드필더진을 갖추고 있어 1966년 월드컵에 나온다면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많은 기대를 받고 있던 팀이었다. 포르투갈 선수가 대부분인 SL 벤피카가 유러피언컵 2연패를 달성하기도 했으니 이런 기대는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여튼 이 대회는 나름 잔뼈 굵은 강팀들끼리 맞붙은 친선 대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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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r=#373a3c> '''브라질의 잉글랜드전 선발 라인업. 우리에게 익숙한 뉴 페이스가 몇몇 보인다.'''
5월 30일의 개막식 이후 처음 열린 경기는 개최국 브라질과 축구 종주국 잉글랜드의 경기였다. 열광적인 홈 관중을 등에 업은 브라질. 공격수 히나우두가 선제골을 집어넣었다. 후반전이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지미 그리브스가 동점골을 득점했다. 그러나 히나우두가 경기 58분 득점을 또 추가하며 2-1이 되었다.

<color=#373a3c> '''잉글랜드를 무너뜨리는 펠레'''
그리고 펠레가 63분에 먼 거리에서 발리슛으로 추가 득점을 올렸다. 그리고 35세의 노장이었던 줄리뉴가 5분 후 한 골을 더 집어넣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호베르투 디아스가 경기 종료 직전 한 골을 더 터뜨리며 잉글랜드의 혼을 쏙 빼놓았다. 스코어 5-1. 브라질의 완승이었다. 이 경기에는 지미 그리브스, 바비 무어, 바비 찰튼, 레이 윌슨, 조지 코헨 등 잉글랜드를 대표하는 선수들이 거의 다 출전한 상태였고, 일시적인 부상 때문에 뛰지 못한 고든 뱅크스를 제외한 주축 멤버가 전부 멀쩡히 선발로 뛰고 있었다. 그런데도 5-1로 박살이 나버린 잉글랜드. 축구 종가의 체면은 바닥에 떨어졌다.
다음 경기 상대는 아르헨티나였다. 아르헨티나는 강했지만 브라질 수준의 전력은 당연히 아니었다. 브라질 사람들은 당연히 브라질이 이길 것이라고 예상했다. 1년 전 코파 로카에서도 브라질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바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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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r=#373a3c> '''안토니오 라틴과 펠레의 경합'''
그러나 이 경기에서는 브라질 공격수 누구도 힘을 제대로 써 주지 못했다. 그리고 에르민도 오네가에게 한 골을 실점하더니 로베르토 텔치에게 두 골을 연달아 내주었다. 공격진의 파괴력도 문제가 있었지만, 포백 중 A매치 경험이 많은 선수가 전무했던 것이 이렇게 대놓고 밀린 원인이었다. 이 대회 당시 브라질 감독이었던 비센치 페올라는 세대교체를 하기 위해 자우마 산투스 같은 베테랑 선수들을 선발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선수를 라이트백에 기용했는데, 그 선수가 다름아닌 만 19세의 카를루스 아우베르투였다. 아우베르투를 비롯해 센터백 브리투와 조엘 카마르고, 레프트백 히우두는 이 대회 전까지 A매치에 10경기도 채 나오지 않았던 선수들이었다.[19] 아르헨티나의 노련한 공격수들은 이것을 잘 이용하여 세 골이나 득점했다. 브라질의 3-0 패배였다. 홈에서 아르헨티나에게 대판 깨진 만큼 그 충격은 상당했다.
다음 일정은 포르투갈전이었다. 포르투갈은 5월 31일 아르헨티나와의 경기에서 이슈를 만들어낸 바 있었다. 주전 공격수 주제 아우구스투 토히스가 주심의 뺨을 때리려고 시도하다가 퇴장당하는 사건을 일으켰던 것이 그것이다. 토히스는 당연히 이 대회에서 퇴출되었다. 그리고 포르투갈은 타겟멘의 부재에 시달리며 잉글랜드와 무승부를 기록했다. 어차피 1위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날아간 만큼, 포르투갈은 경기하고자 하는 의지가 많이 없었다. 브라질은 포르투갈을 신나게 두들겨팼다. 펠레가 10분만에 선제골을 터뜨렸고, 11분 후 줄리뉴 대신 오른쪽 윙어로 선발 출전한 만 19세의 자이르지뉴가 국가대표팀 데뷔골을 넣었다. 마리우 콜루나가 27분에 만회골을 넣었지만 제르송이 76분, 80분에 연달아 두 골을 넣으며 멀찍이 도망쳤다. 브라질의 4-1승리였다.
브라질은 3전 2승 0무 1패로 나쁘지 않은 성적을 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가 3전 전승을 기록했고, 승점 2점이 밀려 아르헨티나에게 우승을 내주었다. 펠레는 3경기에서 2골을 터뜨려 득점 공동 선두에 이름을 올렸지만 무조건 우승할 것이라고 믿었던 대회에서 준우승에 그친 것은 분명 좋지 않은 결과였다. 그래도 이 대회는 브라질 국가대표팀이 제르송, 자이르지뉴,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등 1940년대생의 선수들을 중점적으로 기용하며 세대 교체를 시도했고 그 선수들이 어느 정도 좋은 활약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
이 대회가 끝난 시점에서 펠레의 A매치 기록은 42경기 43골이었다.

8. 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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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r=#373a3c> '''벨기에와의 경기에서 바이시클 킥으로 골을 넣는 펠레'''
펠레는 1965년 6월 2일의 친선 경기에서 벨기에를 상대로 환상적인 바이시클킥 득점을 포함해 세 골을 터뜨리며 브라질의 5-0 승리를 이끄는 한편 국가대표팀 통산 '''일곱 번째 해트트릭'''을 기록했다. 이 경기를 포함한 1965년의 A매치에서 펠레는 8경기 9골을 기록했고 브라질은 무패를 기록했다. 여전히 펠레의 적수는 없었다. 1966년 월드컵 대표팀에 선발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지난 2번의 월드컵과 뭔가 미묘하게 분위기가 달랐다. 일단 브라질팀의 1966년 연습 게임이 지나치게 많았다. 칠레, 페루,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스코틀랜드, 스웨덴과 친선 경기를 치렀는데 체코슬로바키아와는 두 경기나 진행했다. 총 7경기. 쓸데없는 평가전 때문에 체력소모가 심했다. 게다가 이게 브라질로 초청해서 치른 친선경기만 있는 것이 아니고, 비행기로 엄청나게 날아다니면서 경기를 진행했다. 그리고 A매치 경기당 1득점 이상의 기록을 유지했던 펠레는 1966년 6월 30일에 괴테보리에서 있었던 스웨덴전에서 무득점을 기록하며 57경기 56골을 기록하게 되었고, 1958년 6월 24일 월드컵 준결승전 이후 '''8년'''을 유지해왔던 그 기록을 끝낼 수밖에 없었다. 피로 누적의 당연한 결과였다. 게다가 주전과 비주전이 가려지지 않아서 뭐가 뭔지도 하나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사람들은 자우마 산투스가 이제 은퇴하고 카를루스 아우베르투가 선발될 것으로 예상했으나 카를루스 아우베르투는 아예 선발되지도 못했다. 이런 내홍 속에서 결국 1966년 월드컵 본선에서 브라질을 이끈 감독은 1958년 월드컵에서 브라질을 우승시켰던 비센치 페올라였다.
이래저래 팀 분위기가 정상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 선수들이라도 남아 있으면 좋을텐데 가린샤도 옛날 같지 않고 지지도 없었다. 선수들의 몸 상태도 정상이 아니었다. 펠레의 자서전에 의하면 축구를 하다보면 힘든 건 당연한 것이지만 이 대회를 뛰면서는 정말 심하게 힘들었다고 회고했으며, 경기를 뛰며 이런 몸 상태가 왔다는 것 자체가 준비가 덜 되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고 평했다.
잉글랜드 월드컵 조직위원회에서 브라질이 뛰는 3경기 중 2경기의 심판을 자국 출신 심판으로 배치하기도 했는데, 뭔가 이 때부터 꿍꿍이가 보이기 시작했다. 사실 더블 디펜딩 챔피언(2연속 우승한 전 대회 우승팀)인 브라질이라서 굳이 잉글랜드가 아니라도 누구든 브라질 상대로 공포에 질릴 만 했다.[20]
브라질은 포르투갈, 헝가리, 불가리아와 함께 3조에 속했다.

8.1. 조별 리그



<color=#373a3c> '''펠레 vs 불가리아'''[21]
첫 경기 상대는 불가리아였다. 펠레는 경기 14분 드리블로 찬스를 만들어내던 중 디미타르 야키모프의 태클에 걸려 넘어졌다. 펠레는 본인이 얻은 프리킥 찬스에서 직접 슈팅을 때렸는데, 이 슈팅이 골망을 가르게 되면서 브라질의 대회 첫 득점을 장식했다. 불가리아 골키퍼가 두 손을 모두 뻗어 방어를 시도했으나 그대로 골대 안에 꽃혔다. 그야말로 엄청난 파워의 프리킥이었다. 경기 초반부터 펠레는 강한 인상을 주었다. 그리고 내내 위협적인 장면을 만들어내며 경기를 지배했다. 경기 63분에는 가린샤가 아웃프런트 킥으로 환상적인 프리킥 득점을 터뜨렸다. 가린샤는 30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드리블 실력으로 경기 내내 불가리아 수비진을 유린했다. 경기는 그대로 흘러갔고, 심판 쿠르트 첸셰르가 휘슬을 불며 경기가 종료되었다. 2-0승리였다. 컨디션이 상당히 안 좋았던 것 치고 산뜻한 출발이었다. 펠레는 정말 만능 공격수가 되어 있었다. 역시 브라질은 브라질이었다.
그러나 펠레는 피로했던 탓인지 경기 이후 통증을 호소했다. 결국 다음 경기 헝가리전에서는 뛰지 못하게 되었다. 헝가리는 세대교체를 완료한 상태였고, 여전히 유럽에서 알아주는 선수들을 상당히 많이 보유하고 있었다. 1962년 월드컵에서 최우수 신인 선수로 선정된 플로리안 얼베르트도 있었다. 매직 마자르 시절만큼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매우 강한 팀이었다. 브라질은 페렌츠 베네에게 오프닝 선제골을 얻어맞았다. 그리고 10대의 신예 토스탕이 멋진 동점골을 터뜨렸다. 경기는 상당히 팽팽했다. 그러나 경기 64분 야노스 파르카스가 골을 터뜨렸고, 칼만 메스죌리가 13분 후 추가골을 터뜨리며 브라질의 패색이 짙어졌다. 펠레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3대1로 패배하였다. 이 경기는 가린샤가 브라질 국가대표팀에서 뛰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기록한 패배이기도 했다.[22] 브라질은 1954년 이후 12년 만에 월드컵 무대에서 패배를 경험했다.
다음 상대는 포르투갈. 포르투갈에는 에우제비우를 비롯한 벤피카 선수들을 필두로 모든 선수들이 독기를 잔뜩 품고 있었다. 벤피카는 4년전 1962년 인터컨티넨탈컵에서 펠레를 앞세운 산토스에 참패했던 기억이 있고 포르투갈 국가대표팀 역시 1964년의 타사 다스 나소잉스에서 새파랗게 어린 선수에게 결승골을 내주며 4-1로 패배했던 전적이 있기 때문이다.
페올라 감독은 펠레가 부상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이겨야 하니 내보냈다.[23] 그러나 컨디션이 좋지 않았던 펠레는 평소라면 날쌔게 피했을 태클들을 전부 얻어맞았다. 시작부터 마리우 콜루나의 거친 태클이 들어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비센테에게 걷어차이면서 옆에 있던 마리우 콜루나 위에 그대로 엎어졌다. 펠레를 향한 태클에 분노한 브라질의 발테르 시우바는 프리킥 상황에서 골키퍼 호세 페헤이라에게 고의적인 차징을 걸기도 했다.[24] 양측이 불필요한 파울들을 주고받은 이후 경기는 신경전으로 번졌다. 양팀은 서로 더러운 플레이를 했고, 포르투갈이 시모잉스의 골로 1-0 리드를 가져갔다. 브라질에게는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12분 후 마리우 콜루나의 롱패스를 191cm 장신의 주제 아우구스투 토히스가 머리로 편안하게 받아서 중앙으로 보냈고, 에우제비우가 이를 놓치지 않고 득점을 기록했다. 포르투갈이 2-0으로 앞서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골이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축구 경기 중에 나와서는 안 될 비매너 플레이가 나왔다.

<color=#373a3c> '''더블 백태클'''
포르투갈의 라이트 백 주앙 모라이스가 펠레의 다리를 노리고 백태클을 걸더니,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난 펠레의 다리를 향해 노골적인 태클을 한 번 더 걸었던 것이다. 이것이 그 유명한 '''더블 백태클'''이다. 펠레도 이 때 입은 부상이 커리어에 있어 최악의 부상이었다고 회고한다. 실제 많은 전문가들이나 고전 축구 매니아들은 펠레의 신체적 능력의 정점이 끝난 시기를 이 시기로 꼽는다. 모라이스의 태클은 아예 대놓고 펠레의 선수 생명을 끊으려 시도했던 악질적인 반칙이었지만 잉글랜드 출신의 심판 조지 맥케이브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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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r=#373a3c> '''경기장에 쓰러진 펠레'''
펠레는 잠깐 밖에 나가서 치료를 받고 경기는 끝까지 뛰었다. 이 때는 선수 교체 제도가 없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결국 에이스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던 이 경기에서 브라질은 악전고투했지만 포르투갈에게 3대1로 패배하며 짐을 싸고 말았다.[26]
이 대회에서 플레이는 커녕 수비수들에게 얻어맞기만 하고 온 펠레는 분통을 터뜨렸다. '''"유럽 선수들은 풋볼이 아니라 풋복싱을 한다! 두 번 다시 월드컵에 출전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펠레의 분노는 누구나 이해할 만 했는데, 사실 당시 에이스 공격수에 대한 보호책은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먼저 선수 교체. 부상당한 선수를 교체해 줄 수가 없으니, 경기 중 A가 부상을 입으면 A의 팀은 10명만 뛰어야 했다. 게다가 그 한 명이 펠레 같은 에이스라면 효과는 더했다. 그래서 당시에는 에이스 공격수 중 몸이 약한 선수들은 자주 부상을 입었다. 1958년 월드컵에서 불멸의 기록을 세운 쥐스트 퐁텐 역시 커리어 내내 수비수들의 악질적인 태클에 시달리다 결국 28살의 나이에 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으로 선수생활 은퇴를 선언했다. 또한 60골로 잉글랜드 리그 한 시즌 역대 최다골 기록을 가지고 있는 딕시 딘도 수비수와의 경합 과정에서 한쪽 고환이 파열되는 부상을 입었다고 전해진다.
그렇게 펠레는 1957년부터 1966년까지 59경기에 출전해 57골을 넣고 만 '''25'''세의 나이에 국가대표팀 유니폼을 집어 던졌다.

9. 1966년~1970년 마이너 대회



9.1. 1968 타사 오스바우두 크루즈


하지만 펠레의 국가대표팀 복귀를 바라는 팬들은 브라질 뿐만이 아니라 세계 각지에 깔려있었다. FIFA에서도 선수 교체와 카드 제도를 만드는 등 선수 보호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하는 움직임을 보이자 펠레의 마음도 슬며시 움직였다. 처음에는 계속 거절했다. 1968년 6월까지도 그 입장에는 변함이 없어서, 우루과이와의 친선 대회인 타사 히우 브랑쿠에 참가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68년 7월 타사 오스바우두 크루즈에 참가하며 국가대표팀에 복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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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r=#373a3c> '''펠레 리턴즈'''
1966년의 실패 이후 2년이 흘렀고, 국가대표팀 멤버들은 많이 바뀌었다. 라이트백 자우마 산투스가 은퇴했으며 카를루스 아우베르투가 주전 라이트백이 되었다. 주장 역시 바뀌었다. 1966년 월드컵 당시에도 주장이었던 이우데라우두 벨리니는 은퇴했고, 카를루스 아우베르투가 브라질 대표팀의 주장 자리를 이어받았다. 그리고 제르송, 토스탕과 자이르지뉴는 어엿한 주축 선수가 되었으며, 1946년생의 히벨리누는 대표팀 주전 멤버가 되었다. 1968년의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에는 펠레와 함께 1958년의 역사적인 첫 우승을 함께했던 멤버가 단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았다.
1968년의 타사 오스바우두 크루즈는 파라과이 아순시온에서 개최되었다. 7월 25일에 1차전이 열렸다. 펠레는 국가대표팀 복귀전에서 상큼하게 두 골을 터뜨리며 팀의 4-0 대승을 이끌었다. 3일 후 같은 경기장에서 열린 2차전에서는 0-1로 패했다. 그러나 득실차가 3점이었고, 브라질은 당연하다는 듯 우승을 차지했다. 펠레는 최다 득점자였다.
이 대회가 끝난 시점에서, 펠레의 A매치 기록은 61경기 59골이 되었다.

10. 1970 FIFA 월드컵 멕시코


펠레는 타사 오스바우두 크루즈 이후 7번의 A매치에 참가했으며 그 중 1968년 11월 3일 벨루오리존치에서 열린 멕시코와의 경기는 펠레의 63번째 A매치였는데, 이 경기에서 펠레는 자신의 A매치 60번째 골을 넣었다. 1968년 11월 6일 FIFA XI[27]와의 대결에도 참여하였다. 이 기간동안 총 3골을 기록했다. 1965년까지 경기당 1골쯤은 여유롭게 넘어줬던 펠레였으므로 이런 득점 페이스는 다소 아쉬웠다. 하지만 점점 줄어들어 가는 득점능력과 반대로, 펠레의 플레이 메이킹 능력은 날이 갈수록 더욱 발전하고 있었다.
지금 돌아보면 매우 믿기 힘든 이야기이지만 1970년 월드컵 당시 브라질 대표팀에 관한 우려의 목소리가 매우 많았다. 첫 번째 이유는 전 대회인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의 광탈. 두 번째 이유는 선수단 구성 문제였다. 감독 자갈루가 뽑아놓은 베스트 11을 보면 펠레를 포함하여 토스탕, 호베르투 히벨리누, 제르송 등 무려 4명이 소위 말하는 10번 유형의 플레이메이커였다. '이들을 모두 함께 공존시키는 것이 힘들 텐데, 어찌 좋은 성적을 기대하겠느냐?'가 이 의견의 핵심이었다.
여튼 이 대회는 월드컵 역사에서 중대한 의의를 지니는 대회였다. 기존의 흑백 중계를 탈피해 전세계의 거리와 안방에 생생한 컬러 중계를 전달하는 첫 대회였기 때문이다.

10.1. 지역 예선


우선 놀라운 사실 하나. '''펠레는 지금까지 월드컵에 세 차례 참가하면서 월드컵 지역예선에서 단 한 번도 뛴 적이 없었다.''' 1958년 월드컵 예선 때에는 유망주 티를 못 벗은 탓에 참가하지 못했으며, 1962년 월드컵과 1966년 월드컵에서는 지역예선을 치를 필요가 없었다. 펠레의 위엄이 엿보이는 부분이다.
펠레에게 있어서 월드컵 지역예선이라는 대회는 특이한 느낌이 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펠레는 시종일관 변함없는 클래스를 보여주었다. 브라질은 베네수엘라, 파라과이, 콜롬비아라는 만만찮은 팀과 같은 조에 속해 각 팀당 두 경기씩 총 여섯 번의 경기를 치르게 되었다. 특히 이 당시에는 파라과이가 난적이었다. 사투리노 아루아라는, 파라과이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하나로 간주되는 선수가 있었고 아루아 이외의 선수진 자체도 상당히 괜찮았다. 1966년 월드컵에서의 실패 때문에 브라질 국가대표팀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조금 있었다. 여튼 지역예선이 파라과이와 브라질의 2파전으로 갈 것은 분명했다. 당시 월드컵은 16팀만 진출할 수 있는 꿈의 무대였기 때문에, 네 팀 중 오직 한 팀만이 월드컵에 나갈 수 있었다. 즉, 펠레가 자신의 네 번째 월드컵을 뛰려면 브라질을 무조건 지역예선 1위로 만들어 놓아야 했다.
브라질의 첫 번째 경기 상대는 콜롬비아였다. 이 경기는 보고타에서 열렸다. 콜롬비아 홈 관중들은 1966년의 실패를 겪은 브라질 대표팀이 한번 더 져 주기를 바랐지만, 토스탕이 전반 막판에 혼자 두 골을 넣어버리며 콜롬비아를 침묵시켰다. 2-0 승리였다.
두 번째 경기 상대는 베네수엘라였다. 카라카스에서 열린 원정 경기였다. '부왕' 토스탕이 경기 60분에 한 골을 터뜨렸고, 펠레가 11분 후 골을 터뜨렸다. 토스탕은 펠레의 골에 대답하듯이 1분만에 한 골을 추가했다. 그리고 2분 후에 한 골을 더 넣으며 해트트릭을 작렬했다. 펠레도 지지 않고 1분만에 한 골을 추가하며 멀티골을 작렬했다. 5-0 승리였다.

세 번째 경기 상대는 파라과이였다. 사람들은 나름 빅 매치가 될 것으로 예상했다. 아순시온에서 열린 경기, 즉 파라과이의 홈이었기에 브라질 대표팀이 더 불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브라질은 발렝칭 멘도사, 자이르지뉴, 에두의 골로 3-0 승리를 챙겼다.
네 번째 경기는 다시 콜롬비아와의 경기였다. 각 팀과의 2차전은 모두 '성지' 마라카낭에서 열렸다. 먼저 토스탕이 15분만에 선제골을 터뜨렸다. 하지만 이번엔 콜롬비아 역시 가만히 있지 않고 3분 만에 동점골을 터뜨렸다. 브라질은 다소 당황했다. 그래서 전반전이 끝날 때까지 골을 기록하지 못했다. 후반전 시작 3분만에 에두가 골을 추가하며 브라질이 앞서기 시작했다. 12분 후, 펠레는 감각적인 득점을 올리며 점수를 3-1로 만들어 차이를 벌려놓았다. 콜롬비아는 완전히 넋이 나갔다. 경기 86분과 88분, 자이르지뉴와 히벨리누가 각 한 골씩을 터뜨리며 6-1이 되었다. 브라질의 긴장이 풀리며 수비가 느슨해졌고, 콜롬비아의 호르헤 가예고가 1분만에 이 틈을 파고들어 만회골을 기록했다. 최종 스코어 6-2. 또 압도적인 승리였다.
1969년 8월 24일에 열린 베네수엘라와의 2차전. 베네수엘라는 이미 탈락이 확정된 상태였고 선수들의 의욕은 바닥까지 떨어진 상태였다. 그렇다고 브라질이 봐 줄 리는 없었다. 자비 없는 선수였던 펠레와 토스탕은 전방에서 엄청난 콤비플레이를 펼쳤다. 토스탕은 7분 만에 펠레의 어시스트를 받아 골을 넣었다. 전반 21분, 토스탕은 슈팅을 놓친 골키퍼에게 다가가 간단하게 추가 득점을 뽑아냈다. 3분 후, 제르송의 패스가 토스탕에게 전달되었고 토스탕은 두 명을 간단히 제치며 오른발로 살며시 밀어넣어 득점을 기록했다. 전반 24분만에 해트트릭을 기록한 것이었다. 베네수엘라 선수 중 아무도 토스탕의 상대가 안 되었다. 경기 30분, 자이르지뉴가 골문 앞에서 에두의 크로스를 대기하다가 골키퍼에게 차단되어 튀어나온 공을 오른발로 강력하게 마무리지으며 브라질의 4번째 득점을 기록했다. 그리고 14분 후 펠레는 토스탕을 향해 천재적인 로빙 패스를 제공했다. 베네수엘라는 토스탕을 막고자 했으나 파울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당연히 페널티킥이 선언되었고, PK 전담 키커였던 카를루스 아우베르투는 공격수 중 맏형인 펠레에게 PK 찬스를 주었다. 펠레는 왼쪽으로 간결하게 슈팅을 날렸다. 골. 전반이 끝나기 전, 스코어 5-0이 되었다.

<color=#373a3c> '''엄청난 침투 이후 감각적인 득점으로 스코어 6-0을 만들어내는 펠레'''
브라질은 자비 없는 팀이었다. 경기 70분, 펠레는 베네수엘라 수비진을 깨고 순식간에 침투해 들어가더니 순식간에 골 에어리어까지 도달해 볼을 잡아냈고 감각적으로 공을 띄우며 골키퍼까지 제쳤다. 그리고 차분하게 마무리지었다. 돌아온 '킹 펠레' 앞에서 베네수엘라는 전혀 상대가 안 되었다.
브라질은 5전 전승으로 승점 10점을 쌓았다. 그러나 월드컵 진출이 확정된 것은 아니었다. 승점 8점을 기록한 파라과이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파라과이가 9-0으로 승리를 거둔다면(?) 득실차에서 브라질을 역전하게 되고 브라질의 월드컵 진출이 좌절되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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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r=#373a3c> '''파라과이전 직전의 브라질 팀'''
뭐 당연히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았지만, 파라과이는 브라질의 홈에서 상당히 고군분투하며 0-0 스코어를 계속해서 지켜내는 멋진 모습을 보여주었다. 브라질 선수들은 '어차피 월드컵 진출하는 거 이왕이면 예선 전승을 기록하고 진출하는 게 깔끔할 거야!'라는 마인드로 계속해서 공격적인 전술을 유지했다. 경기에 임하는 태도는 양측 모두 훌륭했다.

<color=#373a3c> '''남아메리카 지역 예선 6전 전승을 결정짓는 펠레'''
승부를 결정지은 것은 킹 펠레였다. 경기 68분에 찾아온 오픈 찬스를 놓치지 않고 마무리지었고, 브라질은 1-0으로 앞서갔다. 그리고 그 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브라질은 영웅 펠레의 결승골로 1-0 승리를 이뤄냈다.
지역 예선 6경기에서 브라질은 '''6전 전승, 23득점 2실점'''의 성적을 거두었다. 펠레 개인은 6경기에서 6골을 득점하며 10골(!)을 기록한 토스탕[28] 다음 가는 활약을 펼쳤다. 그러다가 당시 브라질의 감독이었던 사우다냐가 펠레를 빼겠다는 둥 독선적인 태도[29]를 일삼다가 결국 축출되고 1958년에 함께 뛰었던 마리우 자갈루가 감독으로 오게 되었다. 1969년 11월 19일, 펠레는 클럽에서 CR 바스쿠 다 가마를 상대로 개인 통산 1000번째 골을 넣게 되었다. 이렇게 대단한 커리어를 쌓았는데 자신의 활약으로 진출한 월드컵에 참가하지 않는 우를 범해 명예로운 마무리를 짓지 못한다면 뭔가 어정쩡한 상황이 될 것이었다. 펠레는 별 고민 없이 참가를 결정했고, 그렇게 브라질은 1970년 월드컵에 새로운 팀이 되어 출전했다.
1969년의 지역예선이 끝난 시점에서 펠레의 A매치 기록을 보면 74경기 68골[30]이다.
브라질은 잉글랜드,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와 함께 3조에 속했다.

10.2. 조별 리그


첫 경기의 상대는 체코슬로바키아. 체코슬로바키아는 이보 빅토르, 라디슬라프 쿠나 등 명선수들을 보유한 데다가 월드컵 결승전에 두 번이나 진출한 기록이 있는 월드컵 전통 강호였다. 펠레도 1962년 월드컵에서 이들과 맞붙어 본 적이 있었으므로 만만찮은 상대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브라질 수비진은 라디슬라프 페트라쉬에게 농락당하며 경기 11분만에 선제골을 내주었다. 펠레는 환상적인 두 차례의 더미 플레이로 체코슬로바키아 선수들을 완전히 속여버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경기 23분, 드리블로 공간를 만들어 내다가 상대 수비진의 반칙에 막혀 넘어졌다. 이 상황에서 주어진 프리킥을 히벨리누가 차 넣었고 펠레의 어시스트로 기록되었다. 스코어는 동점이 되었고 브라질 팀의 분위기가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color=#373a3c> '''펠레 vs 체코슬로바키아''' [31]
펠레는 체코슬로바키아 골키퍼 이보 빅토르가 골대에서 멀리 나와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하프라인에서 바로 슈팅을 때렸다. 이 슈팅은 세계 각지의 캐스터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결국 살짝 빗나갔지만, 빅토르를 당황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브라질은 제르송과 펠레를 중심으로 공격 작업을 이어가며 맹공을 퍼부었다. 후반전이 되고 후반전 역시 브라질이 경기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후반전이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카를루스 아우베르투의 스로인을 받은 펠레가 제르송의 앞 공간에 절묘한 패스를 넣었다. 제르송은 냅다 때려갈겼다. 엄청난 파워의 슈팅이었지만, 골대에 맞고 경기장 안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두 번째 어시스트가 날아가는 장면이었다. 펠레는 계속해서 체코슬로바키아를 벼랑 끝까지 몰았다. 경기 59분, 제르송이 펠레를 향해 아름다운 궤적의 긴 패스를 날렸다. 펠레는 빠르게 날아오는 패스를 가슴 트래핑으로 완벽하게 받아냈다. 1:1찬스였고, 오른발로 발리 슈팅을 때렸다. 골이었다. 이로써 펠레는 출전한 모든 대회에서 득점을 기록한 선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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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r=#373a3c> '''체코슬로바키아전에서 슈팅을 시도하는 펠레'''
자이르지뉴가 2분 후 멋진 기술로 빅토르를 농락하고 세 번째 골을 득점했다. 점수 차는 2점이 되었다. 펠레의 체코슬로바키아전 활약은 여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경기 82분 경, 오른쪽 빈공간에 혼자 서 있는 자이르지뉴를 향해 스루패스를 보내 주었다. 자이르지뉴는 압도적인 기동력을 발휘하며 자신을 막아서는 두 명의 수비수를 추풍낙엽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골대 왼쪽 코너를 향해 강력한 슈팅을 날렸다. 점수는 4-1이 되었고, 이것은 펠레의 두 번째 어시스트였다. 그리고 경기가 종료되었다. 중계 카메라는 경기가 끝나자마자 펠레를 비추었다. 체코슬로바키아 공격수 라디슬라프 쿠나가 펠레에게 다가가 유니폼 교환을 요청하는 모습이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겼다. 펠레의 유니폼을 받으러 온 사람은 많았지만, 결국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던 쿠나가 펠레의 유니폼을 차지했다.
다음 상대는 잉글랜드. 캡틴 바비 무어가 이끄는 잉글랜드는 1966년 월드컵 때부터 엄청난 수비력으로 명성을 떨쳤던 팀이다. 1966년 월드컵에서는 442분 연속 무실점 기록을 달성했고 최종 6경기 3실점을 기록하며 우승했다. 또 유로 1968 본선에도 진출하여 2경기 1실점만을 기록한 바 있었다. 제르송은 결장했고 대신 '카주'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파울루 세자르가 출전하였다.
경기는 예상대로 막상막하였다. 잉글랜드는 난공불락의 수비를 자랑했다. 그래도 찬스는 어떻게든 브라질을 찾아왔다. 경기 9분, 카를루스 아우베르투가 침투하는 자이르지뉴를 향해 완벽한 스루패스를 넣어 주었다. 자이르지뉴는 길게 툭 치고나가며 테리 쿠퍼를 제치고 중앙에 있는 펠레를 향해 높은 크로스를 올렸다. 바비 무어가 자이르지뉴 쪽으로 간 상태였고, 펠레는 엄청난 점프력으로 튀어오른 뒤 공을 정확하게 이마에 맞혔다. 공은 골대의 사각지대로 향했다. 펠레는 두 팔을 들어 환호했다.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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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r=#373a3c> '''The Greatest Save Ever'''

'''"What a fantastic save by Banks!! What a fantastic save by Gordon Banks...!"'''

휴 존스, ITV 해설위원

고든 뱅크스가 말도 안 되는 선방으로 이 슈팅을 막아냈다. 펠레는 골이 들어간 줄 알고 셀레브레이션을 시작하는 중이었다. 펠레는 골대 안을 다시 확인하고 나서야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깨달았다. 역사에 남을 명장면이었다.
절호의 찬스였지만 득점하지 못한 브라질. 이 장면 이후의 전반전 동안 잉글랜드 주장 무어는 펠레, 토스탕, 자이르지뉴, 히벨리누를 싹 다 막아버리며 축구에서 '수비'란 무엇인지를 세계 전역에 보여주었다. 전설적인 활약이었다. 그리고 바비 찰튼 또한 몇 차례의 환상적인 드리블과 패스를 보여주며 브라질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역시 월드컵 디펜딩 챔피언 잉글랜드는 브라질이 그동안 상대했던 팀들과는 클래스가 다른 팀이었다.

<color=#373a3c> '''펠레의 지능적인 어시스트'''
무어가 이끄는 잉글랜드 수비진은 후반전에도 별 찬스를 내주지 않았다. 그러나 경기 56분, 토스탕이 왼쪽 측면에서 무어를 뚫어내는 데에 성공했다. 부드러운 드리블로 압박에서 벗어난 뒤, 페널티 박스 중앙의 펠레에게 공을 전달했다. 이 시점에서 무어는 반대편에 있었고, 펠레는 찬스를 놓치지 않았다. 찰나의 시간 동안 오른쪽에 있는 자이르지뉴를 확인했고, 약하게 패스를 해 주었다. 펠레의 슈팅을 예상하고 달려오던 브라이언 라본과 테리 쿠퍼는 완전히 속아 넘어갔다. 공은 자이르지뉴에게 연결되었다. 자이르지뉴는 강력한 슈팅으로 골망을 흔들었다.
이 득점 이후 바비 무어가 브라질 공격진을 거의 다 막아냈고 골대로 향한 몇몇 슈팅들은 고든 뱅크스가 모조리 막아냈기 때문에 펠레 역시 이렇다 할 찬스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잉글랜드는 찬스를 굉장히 많이 잡았지만 앨런 볼과 프랜시스 리가 거의 다 날려먹었다. 결국 경기 종료 휘슬이 울렸고, 1-0으로 브라질이 승리를 거두었다.
경기 종료 이후 펠레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브라질을 가장 고전하게 만든 잉글랜드의 캡틴 바비 무어를 찾아가는 것이었다. 펠레가 먼저 무어에게 찾아가 인사를 건넸고 둘은 서로 포옹을 나누고 유니폼을 교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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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r=#373a3c> '''영웅들의 유니폼 교환''' [32]
펠레는 또 공격 포인트를 기록하며 브라질의 승리를 이끌었다. 또한, 이 경기의 결과로 브라질은 조 1위 자리를 굳건히 할 수 있었다. 역사에 남을 명경기였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바비 찰튼은 나중에 이 경기를 되돌아보며 "축구의 교과서적인 경기로 축구의 모든 것이 이 한 경기 안에 들어있다." 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다음 경기인 루마니아와의 경기에서도 제르송이 결장했고, 이번에는 히벨리누까지 결장했다. 대신 나온 선수는 센터백 주제 폰타나, 그리고 저번 경기에도 나왔던 파울루 세자르였다. 이번 경기에서는 센터백으로 기용되던 피아자가 본 포지션인 수비형 미드필더 자리에서 기용되었고, 따라서 4-2-4 포메이션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전반 19분, 루마니아 수비수들은 펠레의 돌파를 막기 위해 무리하게 드러누워서 태클을 시도했다. 이 태클은 그저 의미없는 저지 시도였다. 펠레는 넘어지지도 않았다. 주심은 파울을 선언했고 그 위치에서 프리킥을 차게 된다. 토스탕과 펠레가 킥을 하기 위해 섰다. 브라질은 약속된 플레이를 했다. 펠레는 자이르지뉴가 서 있던 위치를 향해 오른발 바깥쪽으로 강하게 감아 찼고, 자이르지뉴는 펠레의 킥 직전에 바닥에 드러누웠다. 공은 절묘한 궤적을 그리며 휘어들어갔다. 아름다운 프리킥 득점이었다.

<color=#373a3c> '''브라질 vs 루마니아'''
그리고 3분 후, 파울루 세자르의 땅볼 크로스를 자이르지뉴가 놓치지 않고 득점했다. 12분 후에는 브리투가 수비 과정에서 실수를 범하며 1:1찬스를 내주었고 두미트라체가 이것을 놓치지 않고 골대 밑으로 침착하게 밀어넣으며 스코어 2-1을 만들었다. 격차가 좁아졌다. 브라질은 점수차를 벌리려고 맹공을 퍼부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대로 전반전이 끝나고 후반전이 시작되었다. 경기 67분, 자이르지뉴가 측면에서 크로스를 올렸다. 그리고 토스탕의 천재적인 플레이가 나왔다. 토스탕은 오른발 발뒤꿈치를 사용하여 자신에게 달라붙는 루마니아 선수들 너머로 공을 흘려 보냈다. 이 패스의 수취인은 펠레였다. 펠레는 놓치지 않고 바닥에 미끄러지며 오른발로 공을 골대에 밀어 넣었다. 펠레의 멀티골이었다. 이 시점에서 브라질은 승리를 확신하게 되었다.
에메리크 뎀브로브스키가 경기 종료 6분 전 헤더 슈팅으로 만회골을 터뜨렸지만, 그것이 끝이었다. 브라질은 조별 리그 3전 3승 0무 0패 8득점 3실점의 성적을 거두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실력이었다. 조별예선 3경기 동안 펠레는 3골 3어시스트를 기록했다.

10.3. 토너먼트



10.3.1. 8강전


8강의 상대는 페루. 페루는 D조에서 주장 엑토르 춤피타스, 1949년생의 신예 테오필로 쿠비야스, 우고 소틸 등을 중심으로 돌풍을 일으키며 8강에 올라온 강팀이었다. 특히 조별리그 1차전에서는 불가리아 상대로 2-0으로 지고 있는데, 금세 경기를 역전시킨 바 있다. 그런 페루의 감독은 다름아닌 지지였다. 당연히 지지는 누구보다 브라질의 약점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브라질은 강했지만, 돌풍의 팀 페루를 상대로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중원 사령관 제르송이 복귀한 것은 희소식이었다.
제르송은 시작부터 어마어마한 패스를 뿌렸다. 패스를 받은 선수는 다름아닌 펠레였다. 펠레는 침착하게 공을 트래핑한 후 오른발로 간결하게 마무리를 시도했다. 하지만 공은 골대에 맞고 튀어나왔다. 펠레는 골대에 맞고 튀어나온 공에 포기하지 않고 달려들어 백힐 패스를 통해 찬스메이킹을 시도했다. 이 백힐 패스는 토스탕에게 향했다. 하지만 토스탕이 대놓고 홈런을 날려버리며 펠레의 어시스트가 날아갔다. 경기 11분, 펠레는 페널티 박스 오른쪽에서 중앙의 토스탕을 향해 다소 부정확한 왼발 크로스를 날렸다. 하지만 라이트백 엘로이 캄포스가 이것을 가슴으로 차단한다는 것이 토스탕에게 흐르게 되었다. 토스탕은 페널티 박스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히벨리누 앞 공간으로 살며시 공을 굴려 주었고, 히벨리누는 전매특허인 왼발 슈팅으로 골대 구석을 향해 정확한 슈팅을 때렸다. 공은 골대에 맞고 데굴데굴 굴러 들어갔다. 1-0이 되는 순간이었다. 이후 페루는 무섭게 반격하면서 1:1찬스를 만들어냈지만, 펠릭스가 쿠비야스의 슈팅을 완벽하게 저지하면서 무위에 그쳤다. 토스탕과 히벨리누는 경기 15분 코너킥 상황에서의 좋은 콤비플레이로 한 골을 추가했다. 이번엔 히벨리누의 어시스트, 토스탕의 골이었다.

<color=#373a3c> '''펠레 vs 페루'''[33]
2-0이 되었는데 아직 시간은 많이 남아 있었다. 반대로 경기를 뒤집을 시간도 많이 남아 있었으므로 페루 역시 가만 있지 않았다. 경기 26분, 주장 엑토르 춤피타스가 왼쪽 측면으로 침투하던 가야르도를 향해 완벽한 패스를 보내 주었다. 가야르도는 카를루스 아우베르투를 순간적인 속도로 제치고 튀어나갔다. 그리고 좁은 각도에서 바로 슈팅을 때렸다. 펠릭스는 어려운 슈팅들을 잘 막았지만, 이상하게도 이런 쉬운 슈팅을 막지 못했다. 만회골이었다. 경기는 2-1이 되었다. 전반전이 종료되기 직전, 펠레는 페널티 박스 부근에서 왼발로 중거리 슈팅을 시도했다. 골키퍼 루비뇨스가 막아냈지만 슈팅이 워낙 강력했던지라 골대 쪽으로 흘렀고, 골이 들어갈 것 같았으나 골대에 맞고 나왔다. 펠레의 대회 네 번째 골이 좌절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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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r=#373a3c> '''페루전에서 플레이를 펼치는 펠레'''
경기 52분경, 펠레는 우측면으로 침투하면서 자이르지뉴의 패스를 받아 1:1찬스를 만들었다. 펠레는 슈팅하지 않고 센스 있게 수비수를 이용했다. 펠레를 막으러 달려오던 수비수는 펠레가 찍어 찬 공에 반응할 도리가 없었다. 이 공은 그대로 침투하던 토스탕에게 전달되었다. 물론 토스탕이 이걸 놓칠 리가 없었다. 스코어는 3-1이 되었다. 경기 70분에는 페루가 위협적으로 역습을 전개하더니 쿠비야스가 떠 있는 공을 멋지게 발리슈팅으로 마무리하며 만회골을 넣었다. 3-2였다. 그러나 브라질에는 히벨리누와 자이르지뉴가 있었다. 경기 75분 히벨리누가 자이르지뉴에게 완벽한 로빙 스루 패스를 건네 주었고, 자이르지뉴는 골키퍼를 간단하게 제친 뒤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침착하게 마무리지었다. 펠레는 절망에 빠졌지만 마지막까지 열심히 뛰었다. 경기 85분, 쿠비야스가 완벽한 왼발슈팅을 때렸지만 펠릭스가 더 완벽한 선방으로 그것을 막아내며 브라질의 2점 차 리드를 유지시켰다. 경기 종료 휘슬이 울렸다. 브라질의 4-2 승리였다. 경기가 끝나자마자 페루의 로베르토 찰레가 다가와 펠레에게 유니폼 교환을 요청했다. 펠레는 기쁜 마음으로 유니폼을 교환했고, 브라질 대표팀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라커룸에 들어갔다. 펠레는 이 경기에서 1어시스트를 기록했다.

10.3.2. 4강전


다음 상대는 우루과이. 펠레는 이 경기를 가장 고대해왔다고 술회한다. 그 이유는 마라카나주를 자신들의 손으로 되갚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루과이는 만만찮은 상대였다. 핵심 중의 핵심인 페드로 로차가 조별 리그 1차전 이후 부상으로 빠져서 공격작업에는 문제가 좀 있었지만, 아틸리오 안체타와 루이스 우비냐가 버티는 수비진은 든든했다. 거기에 그 뒤에는 당시 고든 뱅크스와 함께 세계 최고의 골키퍼 자리를 놓고 다투었던 라디슬라오 마수르키에비치가 있었다. 우루과이는 그 덕에 조별 리그부터 8강전까지 4경기를 치르며 단 1개의 실점밖에 기록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놀라운 수비력이었다. 펠레는 1950년의 복수를 위해서 마수르키에비치를 꼭 뚫어내야 했다.
하지만 브라질은 시작부터 분위기를 망쳤다. 골키퍼 펠릭스가 루이스 쿠비야의 크로스성 슈팅을 그냥 골대로 흘려보내는 대형사고를 쳤고 이것이 바로 골대로 들어갔던 것이다. 1950년의 참사가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순간이었다. 브라질에게는 영웅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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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r=#373a3c> '''클로두아우두와 함께 기뻐하는 펠레'''
우루과이전의 영웅은 클로도아우두였다. 클로도아우두는 수비형 미드필더답지 않은 대단한 침투를 보여주었다. 클루두아우두에게 공을 건네받은 토스탕은 계산적인 스루패스를 찔러 주었고, 튼튼했던 우루과이 수비진이 찰나의 빈틈을 보였다. 클로두아우두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토스탕의 패스를 빠르게 마무리지었다. 경기 44분, 전반전 종료 직전에 터진 동점골이었다. 효과는 대단했다.
사기가 오른 브라질. 펠레 역시 덩달아 사기가 올랐다. 펠레는 엄청난 드리블을 보여주었다. 클로두아우두가 쓰러지면서 간신히 건네 준 패스를 하프라인에서 받았고, 40m정도를 순식간에 치고 나갔다. 우루과이 선수 다섯 명이 함께 쫓아왔고 두 명은 태클까지 걸었지만 펠레는 전부 뚫어냈다.

<color=#373a3c> '''펠레의 엄청난 드리블'''
하지만 아틸리오 안체타의 반칙성 태클에 걸려 넘어지고 만다. 역사에 남을 골 찬스를 파울로 잃어버린 펠레는 자신에게 태클을 걸지도 않은 폰테스를 한 대 치면서 불같이 화를 냈다. 주심의 판정도 이상했다. 분명 페널티 박스 안에서 발생한 파울이었지만, 주심은 페널티 박스 바깥에서 일어난 파울이라며 프리킥을 선언했다. 펠레는 상당히 흥분했던 상태였던지라 우주선을 쏘아올리고 말았다. 그리고 바로 이어진 마수르키에비치의 골킥. 펠레는 이 골킥을 발리슈팅으로 받아쳤다. 마수르키에비치가 간신히 이 슈팅을 잡아내긴 했지만, 그 조차도 펠레의 갑작스런 슈팅에 깜짝 놀라서 한 바퀴 뒹굴었다.
경기 75분, 자이르지뉴가 폰테스의 패스를 가로채고 펠레에게 공을 건네 주더니 기가 막힌 스피드로 일직선 침투를 시작했다. 펠레는 기막힌 연계로 공을 토스탕에게 전달해 주었다. 공은 센터서클을 막 지난 상태였고, 자이르지뉴는 어느새 라인을 부수고 있었다.

<color=#373a3c> '''히어로 자이르지뉴'''
토스탕이 이런 상황을 놓칠 리가 없었다. 토스탕은 천재적인 패스로 자이르지뉴의 앞 공간에 공을 전달해 주었다. 그리고 자이르지뉴는 엄청난 신체능력으로 베테랑 센터백 로베르토 마토라스를 완전히 제쳤다. 1:1상황이 되었고, 자이르지뉴는 이것을 침착하게 마무리했다. 1950년 마라카낭에서 알시데스 기지아가 있었다면 1970년 과달라하라에서는 자이르지뉴가 그 역할을 했다.
그리고 경기 끝나기 2분 전, 토스탕이 우비냐의 헤더를 가로채 펠레에게 연결했다. 펠레는 빈 공간으로 공을 툭툭 치며 달려나갔다. 그리고 뒤에서 달려오던 히벨리누를 확인하고는 오른발로 살며시 패스를 건넸다. 왼발의 달인 히벨리누는 가차없이 텔스타를 후려쳤다. 원자폭탄 키커의 슛은 그 명성대로 엄청난 파워를 자랑했고 마수르키에비치가 방어해보려 했지만 무위에 그쳤다. 펠레의 어시스트를 통해 탄생한 브라질의 세 번째 골이었다.
패색이 짙어진 우루과이. 브라질은 20년 전 일에 앙심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플레이가 느슨해지지 않았다. 자이르지뉴가 토스탕에게 공을 건네 주었고, 토스탕은 중앙으로 뛰어들어가는 펠레를 보았다. 토스탕의 왼발은 여느 때처럼 환상적인 패스를 뿌렸다. 그리고 펠레는 야수와 같은 스피드로 뛰어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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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r=#373a3c> '''위대한 노 골'''

'''이제 우리는 안다. 왜 사람들이 이 사람을 왕이라고 불러 왔는지, 그가 왜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축구선수로 알려져 있는지...[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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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럴드 신스타트, ITV에서 1970년 월드컵 준결승전을 해설한 해설자

펠레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더미 플레이를 선보였다. 펠레는 골을 넣지 못했지만, 경기장에 있던 관중들은 환상적인 트릭에 대해 찬사를 보냈다. 그리고 1분 후 경기가 종료되었다. 경기가 종료되자마자 빨간 옷을 입은 한 팬이 경기장에 뛰어들어왔고, 펠레의 유니폼을 가져가려고 억지로 유니폼을 끌어당겼다. 펠레와 유니폼을 교환하려 했던 아틸리오 안체타는 눈살을 찌푸리며 돌아갔다. 펠레는 그 광팬에게 유니폼을 벗어 주었으나 브라질 코치 중 한 명이 유니폼을 도로 빼앗아 펠레에게 돌려주었다. 흥미로운 장면이었다.
이 경기 결과, 브라질은 8년 만에 다시 월드컵 결승전에 진출했다. 4강전 두 경기는 동시에 진행되었는데, 서독과 이탈리아가 연장전에서 엄청난 혈투를 벌인 탓에 40분 정도가 지나서야 에스타디오 아스테카에서 열린 4강전의 소식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탈리아가 서독을 4-3으로 이겼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브라질의 상대는 아주리로 정해졌다.

10.3.3. 결승전


이 경기는 여러 모로 의미가 깊은 경기라고 할 수 있었다. 최강의 창과 최강의 방패가 만나는 대결인 동시에, 양 팀이 2번씩 월드컵에서 우승을 하였기 때문에 줄리메 컵의 은퇴 경기이기도 했다.[35] 자친토 파케티가 이끄는 이탈리아의 포스는 엄청났다. 공격진에는 로베르토 보닌세냐루이지 리바, 그리고 산드로 마촐라가 있었다. 이탈리아의 수비진은 정말 화려했다. 주장 파케티, 센터백 로베르토 로사토, 피에르루이지 체라, 라이트백 타르시치오 부르그니치. 그리고 골키퍼 자리에는 디노 조프를 밀어내고 올라온 엔리코 알베르토시가 있었다. 이탈리아는 이미 조별 리그 세 경기에서 무실점을 기록하고 올라오며 그 수비력을 만천하에 증명한 바 있었다.
브라질은 이에 맞서 최고의 정예 멤버들을 출전시켰다. 아래의 사진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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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r=#373a3c> '''1970 FIFA 월드컵 결승전 브라질 라인업'''[36]
당시 펠레가 브라질에게 우승 타이틀을 선물할 것인가? 아니면 끝내 실패할 것인가?에 대한 갑론을박이 굉장히 성행했다. 이 시점에서 펠레는 세계가 가장 주목하는 선수였다. 월드컵에서 세 번 우승한 선수는 축구 역사를 통틀어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루디 글뢰크네르 심판이 휘슬을 불었고, 보닌세냐가 첫 터치를 시작했다. 분위기는 아주 긴장되어 있었다. 경기가 시작된 지 2분도 채 되지 않은 시점에서 루이지 리바가 별명처럼 번개 같은 슈팅으로 브라질의 골문을 위협했다. 아주 위협적인 슈팅이었고, 펠릭스가 이 공을 간신히 쳐내며 실점을 모면했다. 경기 3분만에 펠레는 첫 번째 백태클을 당했다. 태클을 건 선수는 마리오 베르티니였다. 하지만 주심은 프리킥 이외에 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이 프리킥을 시도한 것은 히벨리누였다. 히벨리누는 미끄러지면서 넘어졌고, 공은 알베르토시가 처리하기 쉽게 날아왔다. 1분 후, 파케티가 자이르지뉴에게 파울을 범하면서 또 프리킥이 주어졌다. 펠레는 히벨리누와 함께 서서 킥을 준비했다. 펠레는 이번 프리킥에서도 킥을 하지 않고 지나갔고, 히벨리누가 찬 슈팅은 골대를 한참 넘어갔다. 브라질은 1분이 흐를 때마다 찬스를 하나씩 만들어냈다. 경기 6분에는 카를루스 아우베르투가 오른쪽에서 펠레를 겨냥해 크로스를 올렸다. 하지만 알베르토시가 중간에 공을 쳐내며 찬스가 또 무산되었다.
브라질의 찬스가 연이어 무산되자, 이탈리아가 경기의 주도권을 잡았다. 경기 11분에는 리바가 찬스를 잡았다. 그러나 이번 슈팅은 별로 위협적이지 못했고, 펠릭스가 안정적으로 잘 막아냈다. 경기 15분에는 펠레가 발을 높이 들어 파울이 선언되었다. 이탈리아의 세리에 A는 예나 지금이나 리그 스타일이 수비적이어서 세트 피스에서 어떻게 하느냐가 승부를 결정짓는 주 요인이었다. 이 때문에 세리에 A 소속의 선수가 대부분인 이탈리아 국가대표팀 역시 세트 피스를 중요하게 여겼고 또 아주 잘 처리했다. 킥 테이커는 마촐라였다. 그리고 킥은 리바를 향했다. 리바는 용수철처럼 튀어올라 엄청난 헤더 슈팅을 시도했다. 이 헤더는 아주 작은 차이로 골대를 넘어갔다. 펠레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경기 17분, 토스탕은 이탈리아의 오른쪽 진영을 혼자 헤집고 중앙의 펠레를 향해 크로스를 올렸다. 하지만 파케티가 어느새 중앙으로 넘어와 머리로 공을 처리했다. 브라질의 스로인이었다. 토스탕은 뛰어오던 히벨리누의 앞 공간을 향해 공을 던졌다. 그리고 히벨리누는 공중에 뜬 공을 중앙으로 넘겼다. 공의 목적지에는 펠레와 부르그니치가 기다리고 있었다. 둘은 동시에 점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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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r=#373a3c> '''펠레와 부르그니치의 경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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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r=#373a3c> '''펠레의 득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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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r=#373a3c> '''"El Rey Pelé!"'''

'''What a beautiful goal from Pelé! El Rey Pelé!'''

휴 존스, ITV에서 1970년 월드컵 결승전을 해설한 해설자

득점이었다. 부르그니치가 펠레를 저지하기 위해 손까지 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펠레는 이 골을 득점함으로써 출전한 두 번의 월드컵 결승전에서 모두 골을 넣은 선수로 기록되었다.[37]
득점이 터진 후 양 팀은 다시 경기에 집중했다. 경기 22분, 브리투가 리바의 압박을 신경쓰지 않고 제르송에게 패스하다가 그대로 인터셉트를 당하며 엄청난 위기에 몰렸다. 다행히 펠릭스가 과감히 페널티 박스에서 뛰쳐나와 공을 걷어낸 덕에 위기를 모면했다.
경기 25분 프리킥 상황에서 펠레와 히벨리누는 모두를 속이는 페이크 세트 피스를 시도했다. 하지만 습기를 머금은 잔디 때문에 히벨리누가 미끄러졌고, 결국 의도한 플레이를 하지 못하며 무위에 그쳤다. 1분 후, 펠레는 두 번째 백태클을 당했다. 이번 태클러는 펠레의 헤더 골을 막지 못했던 부르그니치였다. 뻔뻔한 태도를 보인 마리오 베르티니와는 달리, 부르그니치는 펠레에게 바로 사과했다. 그러나 태클 자체가 상당히 악질적인 태클이었고 펠레는 약 1분이 지나서야 경기장에서 일어설 수 있었다.
펠레가 얻어낸 이 프리킥. 그러나 히벨리누는 또 무리하게 슈팅을 시도하다가 우주선을 쏘아올리고 말았다. 물론 당시의 공은 지금과는 아주 달라서, 찼을 때 아주 멀리 나가거나 아예 날아가지 않거나 둘 중 하나였다. 보너스로 지금과는 차원이 다른 잔디 상태, 뻣뻣하기 짝이 없는 축구화까지 있었으니 당시의 프리킥 난이도는 당연히 지금보다 훨씬 높았다. 이탈리아전에서 연이어 나온 실수로 히벨리누의 프리킥 실력을 깎아내려서는 안된다는 이야기.
전반전은 계속해서 이렇게 치고 받는 양상으로 흘러갔다. 그런데 경기 36분, 4강전의 영웅이었던 클로두아우두가 대형 사고를 치고 만다. 뒤에 누가 있는지 확인하지도 않고 백힐 패스를 시도했는데, 곧바로 보닌세냐에게 인터셉트를 당했다. 순식간에 위기에 몰린 브라질. 여기에 보닌세냐를 막으러 온 브리투와 각을 좁히러 나온 펠릭스가 부딪히며 쓰러지며 완전한 오픈 찬스가 되었다. 그리고 보닌세냐가 빠르게 골대 안으로 공을 집어넣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1-1 동점이 되었다.
전반전이 끝나기 직전 브라질에게 프리킥 찬스가 왔다. 키커는 제르송이었다. 제르송은 펠레에게 긴 패스를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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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r=#373a3c> '''애매한 종료 휘슬'''
펠레는 공을 받아 골망 안으로 밀어넣었다. 하지만 노 골이 선언되었다. 전반 종료 휘슬이 이미 울렸다는 이유에서였다. 주심은 너무 애매한 타이밍에 경기를 끊었다.
다시 시작된 후반전. 후반전이 시작한 지 1분만에 브라질은 초대형 찬스를 잡았다. 주장 카를루스 아우베르투가 오른쪽에서 엄청난 스피드로 침투하며 이탈리아 수비진을 전부 뚫어버리는 빨랫줄 같은 땅볼 크로스를 날린 것이었다. 크로스는 침투하던 펠레에게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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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r=#373a3c> '''기회를 놓친 펠레'''
그러나 펠레는 골대 바로 앞에서 미끄러지며 이상한 슈팅을 날리고 말았다. 아쉬운 장면이었다. 펠레는 2분 후 제르송의 좋은 패스를 받을 수 있는 상황에 놓였지만, 부르그니치에게 페널티 박스 안에서 붙잡혀 있었다. 문자 그대로 붙잡혀 있던 상황이었고 명백한 파울 상황이었지만 주심은 이를 무시했다. 펠레는 엄청나게 화가 나서 주심에게 노발대발 따졌다. 눈에 안 띄게 파울을 저지른 부르그니치는 나 몰라라 하고 있었다.
3분 후, 이탈리아 진영에서 혼전 상황이 발생했다. 펠레는 공을 잡으려고 다가갔다. 이 상황에서 갑자기 부르그니치가 바이시클 킥으로 클리어링을 시도했다. 불필요하고 위험한 플레이였으므로 주심은 간접 프리킥을 선언했다. 골대와의 거리는 20m가 채 안 되었다. 하지만 이번엔 제르송이 수비벽을 넘기지 못하며 득점에 실패했다. 이는 바로 이탈리아의 역습으로 이어졌고, 파케티가 엄청난 질주를 보여주며 순식간에 하프라인을 넘어왔다. 레프트백 에베라우두가 도멘기니의 슈팅을 잘 막아서며 실점 위기를 모면했다.
경기 57분에는 히벨리누가 펠레를 위해 프리킥을 양보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펠레가 공을 골대 뒤의 관중석으로 쏘아올렸다. 1분 후 또 프리킥 찬스를 맞았고 히벨리누가 킥을 했다. 히벨리누가 주로 쓰는 발이 아닌 오른발 슈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슈팅은 골대를 강타했다.
이후 약 3분동안 브라질은 이탈리아 진영에 계속 머무르며 기회가 생길 때마다 슈팅을 때렸다. 이런 슈팅 퍼레이드는 66분에서야 끝이 나게 되었다. 미드필더 제르송이 파워풀한 왼발 중거리 슛으로 골문을 열어젖힌 것이었다. 분위기는 브라질 쪽으로 크게 기울었다.
제르송의 골이 터지자 이탈리아의 플레이는 거칠어졌다. 대표적으로 이 장면이 이탈리아의 급박한 심정을 잘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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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r=#373a3c> '''거칠어지는 아주리'''
사진의 13번 선수는 안젤로 도멘기니이다. 해서는 안될 행동이었지만, 심판은 구두주의만 주었다.
그로부터 2분 후, 제르송이 펠레를 향해 엄청난 롱패스를 날렸다. 펠레는 머리에 공을 살짝 맞혀 가운데로 침투하는 자이르지뉴 앞에 떨어뜨렸다. 자이르지뉴는 엉겁결에 다리에 공을 맞히고 말았다. 그런데 골키퍼 알베르토시가 강한 슈팅을 예상하고 미리 엎드리는 바람에 이 상황에 대처하지 못했고, 공이 그대로 데굴데굴 굴러가기 시작했다. 뒤에서 따라오던 파케티는 이미 늦었다. 브라질의 세 번째 득점, 자이르지뉴의 전 경기 득점, 그리고 펠레의 대회 여섯 번째 어시스트가 터지는 순간이었다.
경기는 20분가량 남아 있었다. 그리고 남은 시간 전부는 '브라질 타임'이었다. 점수 차가 크게 벌어지며 부담을 덜어낸 히벨리누는 본인의 최고 장점인 다양한 개인 기술을 십분 활용하여 이탈리아를 괴롭게 만들었고 불안했던 브리투의 수비에는 자신감이 붙었다. 자이르지뉴는 아예 파케티를 가지고 놀기 시작했다. 토스탕은 한결같았다. 펠레는 12년 전에 스웨덴에서 그랬듯이, 그림을 그리듯 편하게 축구를 했다. 그 결과 브라질은 자신들이 그릴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냈다.

<color=#373a3c> '''아름다운 팀 플레이'''
클로두아우두는 네 명을 연속으로 제쳤고, 히벨리누는 자이르지뉴에게 정확하게 패스했다. 자이르지뉴는 스피드로 수비수들을 제치고 펠레에게 공을 전달했다. 펠레는 여유롭게 공을 받으며 우측면으로 침투하는 캡틴을 확인했다. 그리고 오른발로 아주 적절한 패스를 전달했다. 캡틴 카를루스 아우베르투는 오른발 아웃프런트 슈팅으로 완벽한 방점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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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r=#373a3c> '''골을 넣은 주장과 함께 기뻐하는 브라질 공격수들'''
스코어는 4-1. 펠레는 카를루스 아우베르투의 골로 어시스트를 하나 추가하며 이번 대회 7번째 어시스트를 기록했다. 3점 차가 되었고, 이탈리아는 따라붙는 것을 거의 포기했다. 교체 투입된 잔니 리베라가 후반 44분 크로스 실수를 한 이후에는 더더욱 그랬다. 그런데 주심이 계속 종료 휘슬 부는 것을 주저하며 경기를 질질 끌었다. 관중석에서는 야유가 쏟아졌다. 급기야 속옷 차림의 관중이 경기장에 난입했다. 브라질 팬들은 이미 우승을 축하할 준비를 마친 상태였고, 주심의 휘슬이 울리면 모든 것이 완성되는 상황이었다.
상황이 절정으로 치달아 관중이 난입하기에 이르자, 주심은 그제서야 경기 종료를 선언했다. 브라질의 4-1 승리였다. 펠레는 12년 전과 마찬가지로 결승전에서 훌륭한 활약을 펼치며 브라질의 3점 차 승리를 이끌었다. 경기 종료 후 모든 방송국의 카메라와 경기장 사람들의 눈은 펠레를 향했다. 모두가 펠레를 다급하게 찾았다. 분명 역사에 남을 날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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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r=#373a3c> '''경기 종료 후 다급하게 펠레를 찾는 로사토'''
이탈리아 선수 중에도 자존심 따위 내팽개치고 펠레를 어떻게든 찾아 유니폼을 교환하겠다며 나선 이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AC밀란의 전설적인 수비수 로베르토 로사토였다. 로사토는 두리번거리다가 펠레를 찾아냈고, 펠레를 꼭 껴안았다. 그리고 펠레는 흔쾌히 로사토에게 옷을 내주었다.[38] 펠레는 맨몸이 되어 경기장의 열광적인 분위기를 즐겼다. 누가 뭐래도 이 날은 펠레의 날이었다. 펠레는 군중들 틈에서 높이 들어올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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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r=#373a3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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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r=#373a3c> '''축구 황제 펠레'''
펠레는 포효하며 주먹 쥔 오른팔을 들어올렸다. '''월드컵 3회 우승'''이라는, 그 누구도 가까이해보지 못한 업적을 남기며 진정한 축구 황제로 등극하는 순간이었다. 브라질은 펠레와 함께한 마지막 월드컵에서 우승했고 쥘 리메 컵을 영구히 소유하게 되었다. 펠레는 최강팀 브라질의 에이스로서 그 명성에 걸맞는 원숙한 기량을 뽐내며 세계인에게 충격과 경이로움을 안겼다.[39] 펠레는 총 4골 7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월드컵 단일 대회 최다 도움을 기록했고 월드컵 골든볼에도 선정되었다.
1970 FIFA 월드컵이 끝난 시점에서 펠레의 A매치 기록을 확인하면 87경기 75골이다.[40]

11. 1970년~은퇴


펠레는 1970년 월드컵 이후 1970년의 나머지 A매치에서 두 경기에 출전해 한 골을 득점했다. 1970년이 끝나는 시점에서 펠레의 A매치 기록은 89경기 76골이 되었다. 그리고 1971년 7월 11일 상파울루에서 열린 오스트리아와의 경기에서 자신의 마지막 A매치 득점을 기록했다.
[image]
<color=#373a3c> '''노란색 유니폼을 마지막으로 입고 뛴 경기'''[41]
1971년 7월 18일 유고슬라비아와의 경기를 마지막으로 국가대표팀에서 두 번째 은퇴를 선언하며 완전히 셀레상을 떠났다.

<color=#373a3c> '''마지막 경기 펠레 볼 터치 모음'''
펠레는 A매치 총 91경기에 출전하여 77골을 터뜨렸다. 펠레가 국가대표팀에서 한 일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 득점 기록(메이저 대회 본선은 '''볼드체''' 표기)

* 1957 코파 로카 '''2'''경기 '''2'''골

* 1958 타사 오스바우두 크루즈 '''1'''경기 '''1'''골

* '''1958 FIFA 월드컵 4경기 6골'''

* '''1959 코파 아메리카 6경기 8골'''

* 1959 코파 베르나르도 오이긴스 '''2'''경기 '''3'''골

* 1960 코파 델 아틀란티코 '''2'''경기 '''1'''골

* 1962 타사 오스바우두 크루즈 '''2'''경기 '''3'''골

* '''1962 FIFA 월드컵 2경기 1골'''

* 1963 코파 로카 '''2'''경기 '''3'''골

* 1964 타사 다스 나소잉스 '''2'''경기 '''2'''골

* '''1966 FIFA 월드컵 2경기 1골'''

* 1968 타사 오스바우두 크루즈 '''2'''경기 '''2'''골

* 1970 FIFA 월드컵 지역예선 '''6'''경기 '''6'''골

* '''1970 FIFA 월드컵 6경기 4골'''

* 기타 A매치 '''50'''경기 '''34'''골[42]

* '''FIFA 월드컵''' 요약

'''14'''경기 '''12'''골 '''10'''어시스트

* '''해트트릭 7회'''

* '''멀티골 12+7(해트트릭)회'''

* 우승 이력

* '''FIFA 월드컵''': 1958, 1962, 1970

* 코파 로카: 1957, 1963

* 타사 오스바우두 크루즈: 1958, 1962, 1968

* 코파 베르나르도 오이긴스: 1959

* 코파 델 아틀란티코: 1960

* 수상 이력(메이저 대회 한정)

* FIFA 월드컵 골든볼: 1970[43]

* FIFA 월드컵 실버볼: 1958[44]

* FIFA 월드컵 실버슈: 1958[45]

* FIFA 월드컵 영플레이어상: 1958

* FIFA 월드컵 올스타팀: 1958, 1970

* 코파 아메리카 MVP: 1959

* 코파 아메리카 득점왕: 1959


12. 연도별 기록


<rowcolor=#373a3c> '''소속 대표팀'''
'''연도'''
'''경기'''
'''득점'''
브라질
1957
2
2
1958
7
9
1959
9
11
1960
6
2
1961
0
0
1962
8
8
1963
7
7
1964
3
2
1965
8
9
1966
9
5
1967
0
0
1968
5
[46]
4
1969
9
7
1970
15
8
1971
2
1
'''통산'''
'''91'''
'''77'''

[1] 그런데 가린샤무학력자인데다 8살 수준의 정신 연령을 가진게 정설로 되어 있다.[2] 찰튼은 이 당시 참사에서 살아 돌아온지도 얼마 안 되었던 상태였고, 그래서 찰튼보다는 톰 피니와 빌리 라이트, 조니 헤인스가 잉글랜드의 중심적인 역할을 맡고 있었다. 찰튼은 22인 명단에만 있었다. 1958년 잉글랜드 국가대표팀 스쿼드에는 현대 들어서 감독으로 더 유명세를 얻은 바비 롭슨도 있었다.[3] 다만 부상으로 인해 존 찰스는 이 경기에 뛰지 못했다. 펠레의 결승골 한방에 패했으니 존 찰스가 뛰었다면 끝까지 몰랐을것이다라는 의견도 있다.[4] 퐁텐은 결국 이 대회에서 토탈 13골을 넣어 '''월드컵 한 대회 13골'''이라는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은 불멸의 기록을 세우게 된다.[5] 펠레의 골은 3분, 3분 50초, 4분 48초에 나온다.[6] 그야말로 독보적인 기록으로, 최연소 해트 트릭은 커녕 월드컵 10대선수 멀티골 기록조차 60년이 지난 2018년 러시아 월드컵에서 프랑스의 킬리안 음바페가 기록할 때까지 나오지도 않았다. 60년 만에 월드컵에서 10대 멀티골 기록을 재현해 낸 음바페는 당시 펠레보다 두 살 많은 만 19세였다.[7] 펠레 혹은 스웨덴 수비수의 발에 맞고 공이 살짝 굴절되었다. 대다수의 언론은 이것을 펠레의 어시스트로 집계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찍은 영상을 보면 스웨덴 수비수의 발에 맞은 것으로도 보인다.
[image]
중계영상은 각도가 애매하고, 이 영상은 화질이 좋지 않아서 진위여부를 확인하기 어렵다.
[8] 골을 먹힌 스웨덴의 골키퍼조차 이 골을 넣었을때 박수를 치고 싶었다고 말할 정도였다.[9] 골이 들어갔을 때를 기준으로 하면 그렇다. 참고로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FIFA에서 전세계 네티즌에게 역대 월드컵 최고의 선수와 최고의 골을 뽑는 투표를 했었다. 펠레가 넣은 이 골은 전체 3위를 차지했다. 2위는 1998년 월드컵 16강 잉글랜드 VS 아르헨티나 경기에서 나왔던 마이클 오언의 골, 1위는 1986년 멕시코 월드컵 8강전에서 나온 디에고 마라도나의 유명한 오관돌파 골이다.[10] 당시에는 최연소 출전 기록까지 가지고 있었지만 1982년 월드컵에서 북아일랜드노먼 화이트사이드에 의해 깨졌다.[11] 골든볼은 팀 동료 지지. 현재와 같은 방식의 골든볼은 1982년 스페인 월드컵에서 처음 시작되었고 그 이전의 월드컵 골든볼, 실버볼, 브론즈볼은 그 당시가 아닌 나중에 재선정한 것이다.[12] 이렇게 당시가 아닌 나중에 지정한 탓인지 한편 펠레는 1998년 아르헨티나의 <Clarin>에서 선정한 역대 월드컵별 해당 대회 바람직한 MVP 수상자로 1958년 대회 MVP로 지정되기도 했다. 1970년은 실제 역사처럼 그대로 MVP이고. # [13] 10대의 나이에 월드컵 무대를 밟아본 선수들을 대라면 리오넬 메시, 사무엘 에투, 마이클 오언, 킬리안 음바페 등을 댈 수 있다. 이런 선수들은 선발 당시에도 탈유망주급 기량을 가졌고 부상 같은 돌발 변수가 없는 한 소속 국가의 최고급 선수로 성장한다. 하지만 차기 월드컵을 염두에 두고 경험치를 쌓으라 선발한 것이지 팀에 당장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에서 선발한 것은 아니다.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 영 플레이어 상을 수상한 마이클 오언이 오히려 특이한 케이스이며 마라도나처럼 아예 뽑히지 못하는 경우도, 호나우두시오 월콧처럼 엔트리 한 자리만 차지하고 출전은 못 하는 사례도 많다. 즉, 10대의 나이에 팀의 '''주역으로''' 월드컵을 우승시킨 선수라면 펠레가 유일하다. 펠레만큼의 비중은 아니지만 1982년 스페인 월드컵에서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의 레전드 수비수 주세페 베르고미와 프랑스의 킬리안 음바페도 10대의 나이에 월드컵 우승을 차지했었다.[14] 펠레의 어시스트 장면은 11분 47초부터 나온다.[15] 가린샤의 크로스를 받아서 헤더 득점을 기록했지만 펠레의 득점 장면이 온전히 남아있는 이 경기의 녹화본은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16] 선수의 로마자 이름은 링크 참고하시기 바랍니다.[17] FIFA 측에서는 일단 한 골로 보고 있는 듯하다. 이 경기에서의 득점 수가 1점이어야 펠레의 A매치 득점 수가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77득점이 된다. 그런데 RSSSF의 해당 경기 기록을 보면 펠레가 PK로 한 골을 더 넣었다고 되어 있으며 스페인어 위키 역시 펠레가 두 골을 넣었다고 써 있다. 영상이 남아있지 않아서 어느 쪽이 사실인지 확인이 불가능하다.[18] 펠레의 어시스트는 6분 2초부터, 골은 7분 27초부터 나온다.[19] 이 당시에는 경험 부족으로 인해 패인으로 지적받았으나, 이 중 카를루스 아우베르투와 브리투는 6년 후 대표팀 붙박이 주전이 되며 축구선수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예을 누리게 된다.[20] 물론 1950년 대회 당시의 이탈리아도 더블 디팬딩 챔피언이긴 했지만 지난 대회와 무려 12년 씩이나 차이나는 긴 간극도 그렇고 1949년수페르가의 비극으로 스타 플레이어의 과반수를 잃은 이탈리아였기에 축구팬들은 이탈리아니, 잉글랜드니 우루과이니 이런 식으로 누가 우승할 것이다라고 서로 옥신각신하는 수준이었지 이탈리아가 무서워서 벌벌 떠는 수준까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1966년 대회 당시의 브라질은 바로 4년전과 8년전에 우승한 그 브라질인데다가 '''펠레'''라는, 엄마 뱃속에서부터 축구선수였던 인물이 있었던지라 브라질 하면 모두가 공포에 떨던 시절이었다.[21] 펠레의 골 장면은 1분 30초부터 나온다.[22] 가린샤의 A매치 출전 및 득점 기록[23] 이것은 36년 후 2002년 월드컵에서 프랑스가 부상중이던 팀의 에이스 지네딘 지단을 억지로 내보냈던 상황과 일맥상통한다.[24] 아래 영상 1분 26초경 참조[25] 이런 식으로 유럽이 비유럽에게 잔인한 반칙을 저지르고도 심판이 가만 냅두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2006년 월드컵 8강전 아르헨티나 대 독일 전에서도 독일의 공격수 미로슬라프 클로제가 아르헨티나의 골키퍼 로베르토 아본단시에리에게 고의로 마치 죠 히가시타이거 킥을 연상케 하는 무릎찍기를 시전했고 이로 인해 아본단시에리는 갈비뼈가 부러지면서 들것에 실려나갔지만 심판은 클로제에게 그 어떤 판정도 내리지 않고 냅뒀다. 이 때의 상황은, 아르헨티나가 독일을 1-0으로 앞서고 있던 상황이었고 로베르토 아본단시에리는 당시 남미 최고의 골키퍼로 이 월드컵에 나와서 코트디부아르에게 1골, 멕시코에게 1골을 내준 게 전부일 정도로 철벽 수비를 자랑했다. 이것 때문에 골키퍼가 바뀐 아르헨티나는 결국 실점을 했고 승부차기까지 가서 패하고 말았다.[26] 월드컵 우승팀이 다음 대회(4년 후)의 예선에서 짐을 싸는 경우는 이것 말고도 1950년의 이탈리아, 2002년의 프랑스, 2010년의 이탈리아, 2014년의 스페인, 2018년의 독일이 있다.[27] [image]
레프 야신(라디슬라오 마수르키에비치, 46분 교체), 알베르트 셰스테르네프(라디슬라프 노박, 46분 교체), 빌리 슐츠, 실비오 마르솔리니(로베르토 페르푸모, 46분), 프란츠 베켄바워, 볼프강 오베라트, 아만시오 아마로(슬라바 메트레벨리, 46), 라요스 쉬츠, 플로리안 얼베르트(페드로 로차, 46분), 드라간 자이치(야노스 파르카스, 46)
[28] 1968년~1969년에 펼쳐진 1970년 월드컵 지역예선에서 세계로 범위를 넓혀도 토스탕보다 많이 득점한 선수는 없었다. 토스탕의 짧은 스페셜 영상이라도 한 번 보면 느끼겠지만, 토스탕은 절대 스트라이커 유형의 선수가 아니며 플레이메이커 성향을 강하게 띠는 공격수였다. 따라서 이 6경기 10골 기록은 토스탕이 얼마나 대단한 선수였는지 알 수 있게 해 주는 기록이다. 게르트 뮐러가 6경기 동안 9골을 넣어 가장 근접한 기록을 세우기는 했다.[29] 무려 한꺼번에 '''7명'''을 교체했다[30] 1968년 11월 6일에 진행된 FIFA 선발팀과의 경기 제외 시[31] 펠레의 하프라인 슈팅은 2분 35초, 골은 4분 15초, 어시스트는 5분 23초부터 나온다.[32] 참고로, 좌우 반전이 적용된 사진이다. 사진 우측의 사진사 유니폼에 있는 'Mexico 70'의 '0'이 왼쪽에서부터 나온다는 점에서 이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33] 펠레의 골대 강타는 5초부터, 펠레의 패스에서부터 시작된 브라질의 첫 번째 득점 장면은 37초, 또 다시 골대를 맞춘 장면은 2분 23초, 펠레의 어시스트는 3분 27초부터 나온다.[34] 해설: Now we know... that we have a thought it before 'Why they call this man the king, Why he is known of the greatest footballer in the world'...[35] 줄리메컵을 처음 만들 때 3번 월드컵에서 우승하는 팀이 있다면 그 팀에게 줄리메컵을 영구히 소유하도록 규칙이 만들어졌었기 때문이다. 사실 줄리메는 이 컵을 만들면서 한 팀이 3번 우승하려면 최소한 100년은 걸릴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예상은 한 사기 유닛 때문에 너무도 빨리 끝나버리고 말았다. 뭐, 그 예측이 완벽히 틀린 것도 아닌게 월드컵이 시작된지 80년이 넘었지만 현재 월드컵에서 3번 이상 우승한 나라는 브라질, 이탈리아, 독일 이 3개국 밖에 없다.[36] 왼쪽부터 주장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브리투, 제르송, 피아자, 에베라우두, 토스탕, 클루두아우두, 히벨리누, '''펠레''', 자이르지뉴, 펠릭스이다.[37] 이 기록은 바바, 펠레, 파울 브라이트너, 지네딘 지단만 가지고 있는 기록이다.[38] 로사토는 이 유니폼을 경매에 올렸고, 이 유니폼은 2002년에 15만 7750파운드(3억 조금 안되는 가격)에 팔리며 역대 축구 유니폼 중 가장 비싼 유니폼이라는 타이틀을 얻게 되었다.[39] 역대 월드컵에서 예선에서부터 전승을 거두고 우승한 팀은 현재까지 1970년의 브라질이 유일하다. 브라질의 통합 성적은 12전 12승, 42득점 9실점. 본선에서의 성적은 6전 6승, 19득점 6실점이다. 1970년 월드컵의 브라질 대표팀은 말 그대로 무적의 팀이었고, 결국 축구라는 스포츠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지속될 찬란한 명성을 얻게 되었다.[40] 1968년 FIFA 선발팀과의 경기 제외 시[41] 물론 현역 시절로 한정해서[42] 1968년 11월 6일 FIFA XI와의 경기 제외 시[43] 후대 평가[44] 후대 평가[45] 헬무트 란과 공동수상, 비공식 수상[46] 2001년 1월, FIFA는 1968년 11월 6일에 열린 브라질과 FIFA 선발팀과의 경기를 A매치로 인정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CBF는 여전히 FIFA 선발팀과의 경기를 A매치로 인정하며, 펠레의 A매치 경기 수를 92경기로 집계하고 있다. 이는 펠레와 함께 FIFA 선발팀과의 경기에서 뛰었던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자이르지뉴, 히벨리누, 토스탕 등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현재 나무위키에 있는 이 선수들의 A매치 기록은 FIFA가 아닌 CBF의 기록에 근거하여 작성되어 있는 것으로, 91경기로 되어 있는 펠레 문서와 이 문서의 기록과는 다르게 1968년의 해당 경기를 포함한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