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위구르 관계

 



1. 개요
2. 역사적 관계
2.1. 삼국시대 & 남북국시대
2.2. 여말선초
2.3. 현대
2.3.1. 논란
3. 여담
4. 관련 문서


1. 개요


한국 정부의 공식 입장은 하나의 중국을 지지하지만 한국 내 민간에서는 동튀르키스탄 독립운동을 호의적이고 위구르족들에 동정심을 갖는 한국인들이 늘고 있다.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에서도 중국 간의 마찰이 심해지고 중국 정부의 위구르족 탄압이 연일 뉴스에 오르내리면서 한국인들 중에서 위구르족들을 지지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특히 한국 내 이슬람권 혈통 혼혈인들(주로 동남아시아계, 남아시아계, 중앙아시아계)은 동튀르키스탄 독립운동에 대해 더더욱 호의적인 경우가 많다.

2. 역사적 관계



2.1. 삼국시대 & 남북국시대


고대 타림 분지 지역과 한반도가 직접 교류한 것을 증거해주는 사료는 남아있지 않으나, 중국 사료에서는 이를 짐작하게 할 만한 사료들이 남아있다. 흉노와 전쟁을 벌이던 전한한무제는 흉노를 공격하기 앞서서 흉노의 오른팔에 해당하는 알티샤르 일대에 이광리 등등의 장수를 파견하여 둔전을 설치하였으며, 같은 시대 흉노의 왼팔 취급을 받았던 고조선 역시 한나라 군대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고 한사군이 설치되었다.
위구르는 고구려, 발해와도 교류를 했었다. 위구르는 당군의 번병으로써 당의 고구려 전쟁에 동원되기도 하였으며 돌궐이 무너지고 그곳에 새로 일어난 위구르 족장 비속독이 661년 고구려-당 전쟁철륵의 우두머리로 봉기를 일으켜 고구려의 승리에 기여를 하기도 했다. 이 때 당나라는 부여도행군총관 소사업의 부대를 급히 선악도행군총관[1]으로 새로 임명해 철륵 전선으로 빼야 했고 심지어는 연남생과 전투 중이던 계필하력의 요동도행군까지도 빼야 했다. 덕분에 평양성을 포위하던 소정방의 평양도행군과 임아상의 패강도행군, 방효태의 옥저도행군은 모두 외부의 지원이 끊기며 고립되었고 결국 평양성을 굳게 수비하던 연개소문이 이끄는 고구려군에게 깔끔하게 도륙이 나며 소정방은 부랴부랴 신라김유신이 제공한 군량만 받아챙기고 몸만 빠져나가기 급급했다.
이후 발해는 위구르 칸국과도 담비의 길과 비단길의 지류인 초원길로 무역도 했으며, 때로는 동맹을 맺기도 했었다.
통일신라 시대 혜초는 타림 분지와 투르판 일대를 거쳐 중앙아시아와 인도 일대를 여행한 후 이를 기록한 왕오천축국전을 남겼다.

2.2. 여말선초


위구르와 한국사에서 가장 많은 교류가 있었던 시기는 고려 시대이다. 위구르인들은 위구르 제국 시절부터 소그드인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2] 마니교를 믿던 소그드인들의 영향을 이들도 불교, 기독교, 마니교, 유대교, 이슬람에 대해서 실용적인 관점과 폭넓은 이해를 가지게 되었으며, 교역을 중시하던 소그드인들과의 혼혈로 인해 위구르인들 중에서 다국어가 가능한 사람이 많았다.[3] 서하, 요나라, 서요, 몽골 제국 전역에서 위구르인들은 지식인 관료층으로 활약했으며, 러시아에서부터 고려까지 몽골인들을 대신하여 외교관으로 활약했다. 고려시대 원 간섭기 시절 역관들이 가장 중요하게 배웠던 언어가 바로 위구르어였다. 조선 초기에도 역관들에게 위구르어를 교육시켰다 한다.
몽골 제국에서 활약하게 된 위구르인 중 고려에 시집을 간 몽골 공주들이라던지 다루가치들을 따라 '''고려에 온 사람들도 많았다.''' 고려에서는 이들을 회회인(回回人)이라고 불렀다. 회회인(回回人)으로 통칭되던 위구르인 중에는 기독교 신자나 불교 신자, 마니교 신자도 적지 않았지만 많은 수가 무슬림이였으며, 몽골인 다루가치의 수행원으로 많은 위구르 무슬림들이 우리나라에 정착하였다. 가장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고려 말에 귀화하여 덕수 장씨의 시조가 된 장순룡(張舜龍)을 들 수 있으며, 학계에서는 그가 지금의 신장 위구르 지방에 해당하는 회회 출신이라는 점을 들어 무슬림으로 추정하고 있다. 몽골 제국에서는 위구르인들을 색목인으로 규정해서 몽골인 바로 다음가는 인종 계급으로 분류하고 여러 실무직에 앉혔고, 원나라와 고려 사이의 교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위구르인들과 고려와도 주기적인 접촉이 이뤄졌다. 고려가요 쌍화점에서는 이슬권의 영향을 받은 만두 상점과 회회아비의 묘사가 등장한다.[4] 회회교(回回敎, 즉 이슬람) 자치구역도 있어 개성 한복판에 이슬람 성원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에 정착한 위구르인 중 적지 않은 수가 교통이 발달하지 못했던당시 시대상황상 고려에 그대로 귀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덕수 장씨의 시조 장순룡(張舜龍)과 경주 설씨의 시조 설손(偰遜)[5] 등이 있고 고려사를 보면 우왕이 1387년에 김비(金鼻)의 집에 가서 딸을 요구했다가 거절당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김비 역시 회회인 즉, 위구르족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고려에 거주하는 위구르족들이 1279년에 충렬왕을 위해 연회를 베풀었다는 기록도 있고 충혜왕이 위구르족들에게서 베를 주고 그 이자를 취하였으며, 소를 도축하여 고기를 날마다 15근씩 바치게 하였다는 기록도 있다.[6]
그 밖에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이런 기록들도 찾아볼 수 있다.

'''예조에서 종묘에 배알한 뒤에 조하(朝賀)하는 의식을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중략) 다음으로 승도(僧徒) 및 회회인(回回人)들이 뜰에 들어와 송축(頌祝)하고 끝나면, 판통례가 꿇어 엎디어 ‘예(禮)를 마쳤다. ’고 아뢰고, 통찬이 예를 마침을 창하면, 전하가 좌에서 내려오고 풍악이 울린다. 통찬이 ‘국궁하라.’ 창하여, 여러 관원이 모두 허리를 굽히고, 그 사이에 전하는 안으로 들어간다. 풍악이 그치고, 통찬이 ‘평신하라.’ 창하면 여러 관원이 모두 허리를 펴고 통례문은 문무 여러 관원들을 나누어 인도하여 차례로 나간다.'''

- 세종실록 1권, 세종 즉위년 9월 27일 갑술

'''임금이 면복(冕服) 차림으로 왕세자와 문무의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망궐례(望闕禮)를 의식대로 행하고, 강사포(絳紗袍) 차림으로 근정전에 나아가서 조하(朝賀)를 받았다. 왜인·야인(野人)과 귀화(歸化)한 회회인(回回人)과 승인(僧人)·기로(耆老)들이 모두 조하에 참예하였다.'''

- 세종실록 35권, 세종 9년 1월 1일 경인

'''예조에서 계하기를, "신부(新婦)가 시부모에 첫 인사를 드리는 날은, 오로지 기세를 보이기에만 힘을 써서 수레와 말과 종과 수종꾼이 찬란하게 문을 메우고, 술과 안주를 성대히 장만하여 이고 들고 가는 하인의 수가 30여 명에 이르며, 신랑집 역시 거기에 맞춰 치르기 위하여 소비하는 것이 심히 많아서, 가난한 사람은 빚을 내기까지 하므로 그 폐가 적지 않습니다. 이후로는 찬품(饌品)은 오성(五星) 두 가지, 떡 두 가지, 삼미탕수(三味湯水) 세 가지로 모두 일곱 쟁반에 불과하게 하고, 유모(乳母)는 1명, 시비(侍婢) 2명, 노자(奴子)는 10명을 넘지 못하도록 해야겠나이다."하고, 또 계하기를, "회회교도(回回敎徒)는 의관(衣冠)이 보통과 달라서, 사람들이 모두 보고 우리 백성이 아니라 하여 더불어 혼인하기를 부끄러워합니다. 이미 우리 나라 사람인 바에는 마땅히 우리 나라 의관을 좇아 별다르게 하지 않는다면 자연히 혼인하게 될 것입니다. 또 대조회(大朝會) 때 회회도(回回徒)의 기도(祈禱)하는 의식(儀式)도 폐지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 세종실록 36권, 세종 9년 4월 4일 임술

이렇게 고려시대~조선시대에 걸쳐서 위구르족들이 한반도에 와서 거주하기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한반도에 와서도 자신들의 종교인 이슬람교를 유지하며 예궁(禮宮)이라 불리는 모스크를 짓고 조정에서 이슬람교 예배를 올리는 대조회송축을 거행하기도 했다는 사실이 조선왕조실록에 잘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위 기록에서 보다시피 1427년에 예조에서 위구르족들의 의관이 조선 사람들과 이질적이라 조선 사람들이 위구르족과 혼인하기를 부끄러워하고 이왕 조선에 와서 살기로 했으면 조선 사회에 동화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면서 나중에는 억지로 조선 사회에 동화시켜버렸다. 사실 명나라도 쇄국정책을 실시하며 이슬람을 탄압하는 바람에, 조선에 상주하던 위구르인 공동체는 다른 위구르인들과 연락과 교통이 모두 끊어진 상황이었다. 어차피 몇 세대 이후에는 동화가 필연적이었는데 조선 조정에서는 그 과정을 좀 더 빠르게 한 것이라고 봐야한다.


2.3. 현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이른바 오타니 컬렉션이라 해서 고대 신장 지역 주요 유물들을 일부 보관하고 있다.# 은연중에 현재 신장 지역을 지배중인 중국이 반환을 바라기는 하지만, 일단은 무시하는 중. 세계 위구르 회의, 즉 동투르키스탄 독립 망명정부도 '중국에게 돌려줘봐야 서북공정으로 써먹을 테니, 한국이 그냥 보관하길 원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2008, 2009년도 기준으로 위구르인 유학생들이 국내에도 일부 있었으나 요즘은 위구르인들이 국내 이태원 이슬람 사원에 예배보러 오는 경우가 목격되지 않고 있다.
2009년 세계 위구르 회의의 3대 대통령 돌쿤 이사의 대한민국 입국이 거부된 적이 있었다.#
반미 성향이 있는 국내 진보 언론에서조차 중국의 위구르인 인권 탄압 및 역사왜곡 문제에 대해서는 비판 의견을 내는 편이다.서북공정·서남공정…멈추지 않는 중국 ‘패권주의’ / 이이화 동북공정 사례나 중화권-위구르 관계에서 볼 수 있다시피 중국의 위구르 역사를 자국 역사로 편입하려는 시도는 한국 입장에서 남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2.3.1. 논란


국내 일부 친중 세력들 중에는 '한국에서의 이슬람공포증 역시 만만치 않은데 중국의 위구르 탄압을 비난하는 것은 모순'이라는 비판도 있지만, 이런 주장들은 네이버에 혐오성 댓글 다는 사람들이 한국인 전반을 대표하는 것처럼 생각한다는 오류를 가지고 있다. 한국에 이슬람공포증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우리나라에서 터키가 한국전쟁 당시 파병한 것까지 부정적으로 평가절하할 정도로 이슬람혐오증에 눈이 먼 것도 아니다. 특정 소수민족들을 다짜고짜 수용소에 가두는 행위는 엄연히 인종차별, 심하면 제노사이드로 비판받을 행위인데 해당 물타기 주장은 이런 행위까지 진영 논리로 감싼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하겠다. 이런 친중파들의 막연한 생각과는 다르게 중국의 위구르인 탄압을 비판하는 것은 한국 보수 뿐만이 아니다. 국내 진보 언론 중 하나인 한겨레의 경우 오늘날보다 중국 정부의 위구르인 탄압과 박해가 훨씬 약했던 00년대에도 중국의 위구르 소수민족 탄압을 비판하는 기사를 여러차례 게시하였던 바 있다. 물론 00년대의 위구르인들의 상황은 오늘날 수용소에서 고문, 강간을 당하는 상황에 비하면 천국이나 다름없는 수준이었다.

3. 여담


박지원열하일기에는 위구르인들에 대한 기록이 상당히 자세하게 나와있다. 박지원이 동튀르키스탄 지역까지 여행한 것은 아니고 일부 위구르인들이 몽골 팔기에 소속되어 북경에 주둔했기 때문에 이러한 일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열하일기에 나오는 합밀왕(哈密王)의 합밀은 투르판 분지 동부의 하미(쿠물)을 의미한다. 하미는 청나라가 준가르 칸국을 토벌하기 이전부터 청나라의 세력권 안에 있던 도시였다.

'''동직문(東直門)을 나서서 열하를 향하여 몇 리를 못 가서 북경의 교군 30여 명이 어깨에 가마채를 메고 발을 맞추어 간다. 그리고 회회국(回回國 이슬람 국가) 사람 십여 명이 뒤를 따르는데 얼굴이 사납고, 코가 크며, 눈은 푸르고, 머리와 수염이 억세게 났다. 그 중 두 사람은 눈매가 맑고 고우며, 복색이 가장 화려하였다. 붉은 전립을 썼는데, 좌우 가장자리 끝을 말아 붙이고 앞뒤 가장자리는 뾰족하여 마치 아직 피지 않은 연 잎사귀 같았다. 이리저리 돌아볼 때는 경망스러워 보기 우스웠다. 마두(馬頭)들은 추측만 하고 그를 회회국 태자(太子)라고 불렀다. 앞섰다 뒤섰다 작반을 해서 간 지 사나흘 동안 때로는 말 위에서 담배도 서로 나누어 피우곤 했는데, 그 행동이 꽤 공순하였다. 하루는 한낮이 되어 너무 덥기에 말에서 내려 도중 삿자리 가게 아래서 쉬고 있는데 두 사람이 뒤따라 와서 역시 말에서 내려 마주 대면하여 의자에 앉았다.'''

...

'''《당서(唐書)》를 상고해 보면, "회흘(回紇)의 일명은 회골(回鶻)이다."하였고, 《원사(元史)》중에는 외올얼부[畏兀兒部]가 있는데 외올(畏兀)은 곧 회골이었고 회회는 또 회골의 변한 소리다. 또 《고려사(高麗史)》에,“원(元)의 사람이 고려 사람으로 하여금 외오얼[畏吾兒] 말을 가르쳤다.”하였으니, 외오얼은 또 외올(畏兀)의 변한 말이다. 합밀은 한(漢) 때에는 이오(伊吾)에 속한 땅이요, 당(唐)에 이르러서는 이주(伊州)에 속한 땅이다. 고려 말기에 설손(偰遜)이란 이가 곧 회골 사람으로서 원에 벼슬하다가 공주(公主)를 따라 동으로 와서 이내 고려에 벼슬을 하였고, 이조(李朝)에 들어와서 벼슬한 설장수(偰長壽)는 곧 설손의 손자이다.'''

- 열하일기 합밀왕(哈密王)편 / 박지원


4. 관련 문서


[1] 선악주로 가는 군대를 이끄는 장군이란 뜻인데 선악주는 오늘날 몽골 셀렝게 강 인근 지역을 말한다.[2] 소그드인들은 발해의 말을 당나라로 수출하는 무역에 종사했었다.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킬 당시 주요 군자금 출처 중 하나가 바로 자신을 지원하는 소그드인 커뮤니티가 발해산 말을 매매하면서 얻은 수익이었다 한다.[3] 셀주크 투르크 제국에서 투르크어 사전을 편찬하며 볼가 강부터 타림 분지까지의 투르크어족 문학과 언어를 집대성한 마흐무드 알 카슈가리는 위구르인은 아니었으나, 위구르인들의 교육 시스템의 수혜를 받은 사람이었다.[4] 쌍화가 위구르식 삼사, 혹은 아랍식 삼부사를 음역했다는 가설도 있다.[5] 이 사람의 아들이 바로 설장수다.[6] 당시 고려는 채식을 장려하던 불교 문화의 영향으로 도축 기술이 쇠퇴해서 고기에 배변 냄새 등이 배는 경우가 많았으나 무슬림들이 도축한 고기는 좀 더 발전된 도축기술이 사용되었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