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C 바르셀로나/역사

 



1. 개요
2. 설립, 그리고 생존 (1899 ~ 1909)
2.1. 우승 목록
3. 캄프 데 라 인두스트리아에서의 합병 (1909 ~ 1919)
3.1. 우승 목록
4. 황금 세대 (1919 ~ 1930)
4.1. 우승 목록
5. 고통의 역사 (1930 ~ 1939)
5.1. 우승 목록
6. 인내의 시간 (1939 ~ 1950)
6.1. 우승 목록
6.2. 1945년 ~ 1960년 (첫번째 전성기)
6.3. 1960년대 (기나긴 암흑기 1)
6.4. 1970년대 (기나긴 암흑기 2)
6.5. 1980년대 (기나긴 암흑기 3)
6.6. 요한 크루이프의 드림팀
6.7. 1996년~2008년


1. 개요


클럽 창설 년도인 1899년부터 현 시대까지의 FC 바르셀로나 역사를 정리하는 문서이다.
모든 소제목과 주요 내용은 바르셀로나 공식 홈페이지를 참조하였으며 홈페이지와 같이 10년 단위로 정리되어 있다.

2. 설립, 그리고 생존 (1899 ~ 1909)


1899년 10월 22일, 바르셀로나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이 점점 널리 퍼지는 축구의 인기에 힘입어 스위스인 조안 감페르를 주축으로 <로스 데 포르테스> 신문에 창단 광고를 실어 클럽의 탄생을 알렸다. 11월 29일 솔레 힘나시오에서 스위스인 오토 쿤슬, 욀터 윌드, 잉글랜드인 윌리엄 파손스, 독일인 오토 마이어, 카탈루냐인 루이스 드 오소, 바르토메우 테라다스, 에흐리크 두칼, 페레 카보트, 카를레스 푸올, 주제프 요베트과 조안 감페르를 포함하여 11명이 회의를 진행하였고 만장일치로 팀 명을 Futbol Club Barcelona로 정하기로 했다. 창단 당시에는 프로 축구단이 아닌 취미 축구단으로 창단 되었다.[1] 창단 이후 1년 동안 보나노바 종합 운동장을 홈 구장으로 사용했다.
'''1899 ~ 1900, 보나노바 종합 운동장'''
1900년, 카탈루냐 최초의 축구 대회인 1900-01 코파 마카야가 개최되면서 바르셀로나 역시 대회에 참가하였다. 총 6개 팀이 참가하여 리그 방식으로 진행될 예정이었지만 SD 산타하흐가 기권을 선언하면서 5개 팀의 리그 방식으로 진행되었고 승리 시 2점, 무승부 시 1점, 패배 시 0점의 승점 방식을 적용하여 6승 1무 1패 승점 13점을 달성하며 히스파니아 AC에 이어 2위로 대회를 마감하였다. 이 대회에서 조안 감페르가 31 득점을 기록하며 득점왕 타이틀을 차지하였다. 그리고 다음 시즌인 1901-02 시즌에는 6개 팀의 리그 방식으로 진행되었고 바르셀로나가 우승을 차지하며 역사상 첫 트로피를 차지하였다. 1902-03 시즌에는 클루브 에스파뇰에 이어 준우승을 차지했고 바르셀로나 주 컵 대회인 코파 바르셀로나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첫 컵 트로피를 차지하였다. 이 시즌을 마지막으로 코파 마카야는 폐지되엇다.
1903-04 시즌부터는 캄피오나트 데 카탈루냐가 새로 개최되었고 1904-05, 1908-09, 1909-10 시즌에 우승을 차지하였다.
'''1909-10, 캄피오나트 데 카탈루냐 우승'''

2.1. 우승 목록


'''코파 마카야: 1901-02'''
'''코파 바르셀로나: 1902-03'''
'''캄피오나트 데 카탈루냐: 1904-05, 1908-09, 1909-10'''

3. 캄프 데 라 인두스트리아에서의 합병 (1909 ~ 1919)


1908년, 클럽 구성원은 38명에 불과했고 이에 대해 조안 감페르는 클럽을 더 크게 만들고 싶었다. 나머지 구성원의 동의를 받아 초대 회장으로 등극하였고 지난 10년 사이에 4번의 홈 구장 변화가 있었던 만큼 제대로 된 홈 구장의 필요성을 느끼면서 1909년 4월, 캄프 데 라 인두스트리아를 공식 홈 구장으로 선택하였다.
'''1909년 4월, 캄프 데 라 인두스트리아'''
1910년, 제대로 된 축구단으로서의 발걸음을 내딛기 위해서는 클럽 엠블럼이 있어야 한다고 판단 하에 새로운 엠블럼이 만들어졌다. 이후 이 엠블럼은 현재까지 사용되는 엠블럼의 배경이 되었다.
'''Futbol Club Barcelona 첫 엠블럼'''
드디어 제대로 된 홈 구장이 생기고 난 뒤 현재는 코파 델 레이에 참가하여 1909-10, 1911-12, 1912-13에 우승을 차지하였다. 그리고 1910년부터 처음으로 국제 대회에 참가하기 시작했는데 카탈루냐, 바스크, 그리고 남부 프랑스 팀들이 참가한 피렌스 컵에 참가하여 1910, 1911, 1912, 1913까지 네 시즌 연속 우승을 차지하였다. 기존에 참가하던 카탈루냐 리그인 캄피오나트 데 카탈루냐에서도 10년 사이 5번의 우승을 차지하였다.
이렇게 클럽이 부상할 수 있던 이유는 바르셀로나 최초의 슈퍼 스타이자 현재까지 유일한 1군 아시아 출신 선수, 파울리노 알칸타라의 맹활약이 있었다. 1911-12 시즌부터 고작 만 15세의 나이로 바르셀로나로 합류하여 최고의 활약을 보여주었고 1915-16 시즌까지 총 4시즌을 소화하고 보헤미안 SC로 이적하였다.
바르셀로나의 좋은 성적과 알칸타라의 등장으로 클럽의 인기는 점점 올라갔고 클럽에 대한 바르셀로나 시민들의 지지도 끝을 모르고 올라가면서 이 덕에 금전적인 도움 역시 받을 수 있었다. 홈 구장에 점점 많은 팬들이 몰리자 자리가 부족해졌고 그럼에도 경기를 놓치기 싫었던 팬들이 지붕과 담벼락에 걸터앉기 시작하면서 이때부터 엉덩이를 뜻하는 '꾸레'라는 단어가 바르셀로나 팬을 지칭하는 별명이 되었다.

3.1. 우승 목록


'''캄피오나트 데 카탈루냐: 1909-10, 1912-13, 1915-16, 1918-19, 1919-20'''
'''코파 델 레이: 1909-10, 1911-12, 1912-13'''
'''피렌스 컵: 1910, 1911, 1912, 1913'''

4. 황금 세대 (1919 ~ 1930)


1920년대부터 축구 자체의 인기와 규모 역시 날이 갈수록 커지면서 좋은 활약을 보이던 바르셀로나는 파울리노 알칸타라, 주젭 사미티에르, 리카르도 사모라와 스타 선수들의 등장에 힘 입어 더 큰 클럽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덕분에 1922년, 드디어 바르셀로나 자체 소유의 홈 구장 캄프 데 레스 코르트로 홈 구장을 이전하게 되었다. 22,000명의 정원을 목적으로 건축되었고 전체 입석으로 입장할 시 60,000명까지 수용할 수 있었다.
'''1922년, 새 홈 구장 캄프 데 레스 코르트'''
1924년 12월 7일과 8일, 클럽 창단 25주년을 기념하여 레알 우니온 데 이룬과 이틀 연속 기념 경기를 개최하였다. 그리고 이 날을 기점으로 11명으로 시작했던 클럽 구성원은 25년 만에 12,207명으로 늘었다.
1928년 코파 델 레이 결승까지 진출하였고 연장전이라는 개념이 없었던 당시였기에 무려 2차례나 무승부 경기를 치르고 마지막에 치러진 3번째 경기에서 3대1로 승리하였다. 이 경기는 바르셀로나 경기 중 최초로 라디오로 라이브 중계가 된 경기로 남았다.
그리고 1929년 2월 12일, 라리가가 창설되어 코파 델 레이 우승 클럽 자격으로 대회에 참여하였다. 4달 반 동안 대회가 진행되었고 승점 25점으로 라리가 최초의 우승 타이틀을 거머쥐게 되었다.
'''1929년, 사상 첫 엘 클라시코'''

4.1. 우승 목록


'''캄피오나트 데 카탈루냐: 1920-21, 1921-22, 1923-24, 1924-25, 1925-26, 1926-27, 1927-28, 1929-30'''
'''코파 델 레이: 1921-22, 1924-25, 1925-26, 1927-28'''
'''라리가: 1929'''
1936년 스페인 내전이 발생했고, 과달라마 근처 전선 지역에 잘 못 들어간 주제프 수뇰 회장이 체포되었다가 프랑코 군에게 총살당했다. 1939년 프랑코 독재체제 수립 후 카탈루냐 기 및 카탈루냐어가 금지돼 팀명마저 'CF 바르셀로나'가 됐다.

5. 고통의 역사 (1930 ~ 1939)


1930년 7월 30일, 클럽 설립자이자 초대 회장이었던 조안 감페르가 개인적인 문제로 안 좋은 선택을 하면서 향년 52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되었다. 주제프 수뇰이 제 2대 회장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1930년, 조안 감페르의 사망'''
1936년, 스페인 내전이 발생하였고 과달라마 근처 전선 지역에 잘못 들어간 주제프 수뇰이 체포되었다가 프랑코 군에게 총살 당했다. 고작 6년 사이에 2명의 회장을 잃게 된 바르셀로나의 운영진은 굉장히 혼란스러운 상황을 맞이했다.
이런 와중에 스페인 내전으로 인해 스페인이 갈리게 되면서 스페인의 전 지역 클럽들이 참여하는 라리가를 진행할 수 없게 되자 1936-37 시즌, 6개의 카탈루냐 클럽과 4개의 발렌시아 클럽이 참가한 지중해 리그가 개최되었고 14경기 7승 6무 1패 승점 20점으로 우승을 차지하였다.
내전으로 인해 코파 델 레이도 진행할 수 없게 되자 카탈루냐 지역 팀들만 참여하는 리가 카탈라나가 개최되었고 이 대회에서도 17경기 14승 1무 2패 승점 29점으로 우승을 차지하였다.
기존에 참가하던 캄피오나트 데 카탈루냐에서도 최강자 다운 모습을 보여주며 또 10년 사이에 5번의 우승을 거머쥐었다. 그리고 1939-40 시즌을 끝으로 캄피오나트 데 카탈루냐는 폐지된다.
하지만 내전으로 인해 대회의 규모 역시 매우 작아지게 되었고 이로 인해 클럽의 경제적 부분에 타격이 오게 되자 선수들을 아메리카 투어라는 명분으로 아메리카 대륙 클럽들로 보냈다.[2] 여기서 벌어 들인 돈은 이후 클럽 재건에 큰 도움이 된다.

5.1. 우승 목록


'''캄피오나트 데 카탈루냐: 1930-31, 1931-32, 1934-35, 1935-36, 1937-38'''
'''지중해 리그: 1937'''
'''리가 카탈라나: 1937-38'''

6. 인내의 시간 (1939 ~ 1950)


스페인 내전 종료 이후 바르셀로나는 사회적, 경제적, 그리고 스포츠 적인 부분에서 모두 최악의 상황을 맞이했다. 하지만 다행히 1939년 6월 29일, 캄프 데 레스 코르트의 재개장이 허가되었고 이와 동시에 세사르 로드리게스가 바르셀로나에 나타났다. 이후 바르셀로나에서 1955년까지 뛰면서 456경기 304골의 기록을 남기게 된다.
'''1939년, 캄프 데 레스 코르트 재개장'''
재개된 코파 델 레이에서 1941-42 시즌 우승을 차지한다.
그리고 1944년, 주젭 사미티에르가 바르셀로나 감독으로 돌아온다. 복귀와 동시에 1944-45 시즌, 17년만에 라리가 우승 타이틀을 되찾아 온다.
1947년 사미티에르가 감독직을 내려놓고 엔리크 페르난데스가 부임하게 되고 1947-48 시즌, 라리가 우승을 차지한다. 1948-49 시즌에는 라리가에서도 우승하고 FIFA의 인증을 받은 유럽 클럽 대항전 라틴 컵에서 스포르팅 CP를 꺾으며 대회 초대 우승팀 타이틀을 얻게 된다.
'''1949년, 라틴 컵'''

6.1. 우승 목록


'''라리가: 1944-45, 1947-48, 1948-49'''
'''코파 델 레이: 1941-42'''
'''라틴 컵: 1948-49'''

6.2. 1945년 ~ 1960년 (첫번째 전성기)


40년대 중반부터 바르셀로나는 전성기에 들어가서 1945, 48, 49년에 각각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1950년대에 들어선 후에도 라슬로 쿠발라가 활약하면서 당시 스타 군단을 구축했던 레알 마드리드와 경쟁하며 1960년까지 4번 우승했다.

6.3. 1960년대 (기나긴 암흑기 1)


1957년 팀의 숙원사업이었던 캄 노우가 드디어 완공[3]되었다. 캄 노우 완공에 힘입어 바르셀로나는 다시 한번 힘을 내어 유리피언컵 5연대 와중에 있던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58-59시즌, 59-60시즌에도 우승을 차지했다. 하지만 캄 노우 건설은 바르셀로나에게는 진정한 재앙이 되었는데, 캄 노우 건설로 무지막지한 자금을 쓴 바람에 바르셀로나는 재정난에 빠졌고 이후 10여년간 우수한 선수를 영입하지 못했다. 기존에 활약하던 멤버들이 은퇴하면서 바르셀로나는 급격한 침체에 빠졌으며 1960년 이후 1985년까지 25년 동안 리그 우승 단 1회(1974년), 1990년까지 30년으로 보면 단 2회(1974년+1985년)에 그치는 기나긴 터널과도 같은 암흑기에 빠져들었다.
한편 60년대 중반 레알 마드리드는 기존의 스타 멤버들이 은퇴한 후 해외의 스타를 영입하는 정책을 버리고 자국의 젊은 선수들을 영입하는 순혈 정책(ye-ye)으로 전환하였다. 레알 마드리드는 당시에는 실패로 불리기도 했던 이 정책으로 3년에 한번 꼴로 우승에 실패하며 다른 팀에 주기적으로 우승 기회가 돌아왔다. 하지만 레알이 당시 주기적으로 우승을 놓친 것도 전력상의 문제가 아니라 팀 내부 문제 때문인데 우승을 하지 못한 해는 아슬아슬하게 준우승을 거둔게 아니라 아래 리그 중위권으로 확 쳐져 버렸다.
이런 상황에도 바르셀로나는 우승을 차지하지 못하는 중상위권팀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6.4. 1970년대 (기나긴 암흑기 2)


최악의 암흑기인 60년대를 지나고 70년대에 들어서며 재정난도 숨통이 트였다. 1971년 '토탈 풋볼의 창시자' 리누스 미헬스를 감독으로 선임하였고, 이어 1973년에는 당시 세계 최고 이적료를 지불하면서 AFC 아약스의 천재선수 요한 크루이프를 영입했다. 그리고 크루이프를 영입한 바로 그 시즌인 1973/74 시즌에 14년만의 리그 우승을 차지하였다. 이러한 활약으로 크루이프는 그 다음 시즌까지 2년 연속 발롱도르를 수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크루이프가 5시즌 동안이나 바르셀로나에서 활약했지만 우승은 첫 해 밖에 차지하기 못했다. 사실 크루이프가 활약하던 시기는 레알 마드리드의 ye-ye세대가 1세대에서 2세대로 세대 교체하는 와중에 우승 아니면 중위권으로 성적이 널을 뛰던 시기였고, 레알 마드리드로서는 진정한 첫 암흑기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70년대에도 바르셀로나는 단 한번 우승하지 못했고 오히려 우승권 경쟁도 펼치지 못했던 시즌도 많았다.

6.5. 1980년대 (기나긴 암흑기 3)


1978년 회장 직선제를 부활시켜 주젭 유이스 누녜스가 당선되었다. 누녜스가 회장이 된 후 바르셀로나는 기나긴 암흑기를 끝내고 서서히 강팀으로 변해갔다. 하지만 바르셀로나의 발전 속도는 상당히 더뎌서 누녜스의 긴 재임기간 중 팀이 암흑기를 끝내기까지는 12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걸렸고, 때문에 현임 시절 누녜스는 팬들에게 비난받았던 시절이 훨씬 길었다. 어쨌든 바르셀로나는 한층 넉넉해진 재정을 바탕으로 누녜스 시절 슈퍼스타들을 영입하기 시작했다. 1982년에는 역대 최고 이적료로 디에고 마라도나를 영입하였고 이후에도 게리 리네커, 베른트 슈스터, 안도니 수비사레타 등 슈퍼스타들을 영입하였다. 한편 우도 라테크, 세자르 루이스 메노티, 테리 베너블스, 루이스 아라고네스 등 당대의 명장들도 줄줄이 영입하여 팀을 거쳐갔다.
하지만 이렇게 돈지랄을 하기 시작했지만 당장 성과가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성과는 매우 더디게 나타났고, 10년 이상이나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 바르셀로나는 1980년대에도 라리가에서 단 한 번(1985년) 밖에 우승하지 못했다. 때문에 누녜스 회장의 전반기에는 팬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기도 했다. 특히 레알 마드리드가 80년대초 ye-ye세대에서 독수리 오 형제 세대로 넘어가며 과도기 5년간 한동도 우승을 못하던 사상 최악의 암흑기에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바르셀로나는 더욱 저조한 성적을 보였다.
1985년 11년만에 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한숨 돌리나 했지만, 이후 상황은 더 나빠졌다. 레알 마드리드는 80년대 초반 5년 연속 리그 우승에 실패하는 최악의 암흑기를 보냈는데, 암흑기를 보내는 동안 레알은 손가락만 빨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유소년 시절부터 독수리 오형제들을 길러내고 있었다. 80년 중반 이들은 마침내 포텐을 터트렸고 이후 레알은 80년대 후반 라리가 5연패를 차지하며 다시 한번 전성기에 이르렀다.
누녜스 회장의 팀 개혁을 반신반의하며 지켜보던 팬들도 점차 지쳐가기 시작했다. 스타선수들을 줄줄이 영입할 때는 환호했지만 문제는 이렇게 화려한 스타군단을 모아 놓고도 구슬을 꿰지 못하며 신통치 못한 성적을 보였기 때문이다. 레알이 사상 최악에 빠져 있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우승을 놓치지자 누녜스 회장에 대한 원성이 높아졌다.
1985년 드디어 우승을 차지하며 여론을 반전시키는 듯 했다. 이제 돈지랄의 성과를 보이기 시작했고 이를 바탕으로 앞으로도 리그 우승을 이어갈 것이라는 자신감 있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바르셀로나의 우승은 잠자던 레알의 독수리 오형제를 깨웠고 이후 레알이 라리가 5연패를 이어가면서 누녜스 회장의 입지는 점차 위태로워져 갔다.

6.6. 요한 크루이프의 드림팀


이런 상황에서 누녜스는 마지막 패로 1988년 팀 레전드인 요한 크루이프를 감독으로 영입했다. 누녜스의 전폭 지원을 약속받은 크루이프는 기존 선수단을 사실상 전원 방출하고 자신이 원하는 새로운 팀을 만들었다. 호세 마리 바케로,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 미카엘 라우드루프, 로날트 쿠만, 게오르게 하지, 호마리우 등 스타선수들을 줄줄이 영입하며 '드림팀'을 구성했다. 크루이프의 드림팀은 거의 완전한 외인구단이었다. 크루이프 이전 80년대 초중반에도 바르셀로나는 그 어느 팀보다 스타 용병이 많은 팀이었지만, 크루이프 트림팀은 외국인 국적 용병 4인 이외에 스페인 국적이지만 바스크 출신인 호세 마리 바케로, 안도니 고이코에체아, 치키 베히리스타인, 안도니 수비사레타 등 바스크 4인방으로 주전 스쿼드를 구성했다. 때문에 주전 스쿼드에 카탈루냐 순혈이 없는 팀이 되어 버렸다. 물론 팬들의 엄청난 비난이 있었고 크루이프는 유스팀에서 성장한 카탈루냐 순혈 펩 과르디올라를 부랴부랴 주전으로 올려서 바르셀로나 팬들의 폭발을 서둘러 진화했다.
하지만 초반에는 쏟아부은 돈에 비해 결과가 신통치 않아 비아냥을 듣기도 했다. 특히 엘클라시코에서 참패하면서 팬들에게 큰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이후 쓸어모은 선수들이 서서히 돈값을 하면서 1990년 이후 정상 궤도에 올랐으며 1994년까지 라리가 우승 4회, 챔스 우승 1회를 차지했다. 90년대 중반에는 드디어 숙적 레알 마드리드 CF와의 엘클라시코에서도 앞선 전적을 보였다. 당시 바르셀로나는 유스 출신의 순혈 정책을 실시하던 레알 마드리드에게 돈 지랄로 해외 선수들을 사모아 우승한다는 비난을 듣기도 했다.
하지만 1994년 이후 라우드루프, 호마리우, 스토이치코프 등 주전 선수들과 갈등이 불거졌다. 또 그동안 팀의 우승에 기여했던 노장 선수들을 가차없이 쳐내면서 팀 케미가 박살나기 시작했다. 바르셀로나 중흥의 1등 공신이었던 라우드루프를 관중석에 앉히는 수모를 주어 세계 축구팬들을 충격에 빠뜨렸고, 그 와중에 호마리우는 훈련에 성실히 임하라는 크루이프 감독 면전에 "당신이나 감독 똑바로 하라."고 대놓고 개기는 등 팀 분위기는 박살나버렸다. 결국 94년 여름과 95시즌 여름 사이에 라우드루프, 호마리우, 스토이치코프, 쿠만, 수비사레타 등 드림팀의 주축 멤버들이 크루이프와의 불화로 줄줄이 이적하면서 바로셀로나 드림팀은 1년만에 공중분해되고 말았다. 이에 그동안 크루이프를 전폭적으로 지원해줬던 누녜스 회장과도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고, 결국 1995/96 시즌을 마치고 크루이프가 자진 사퇴하는 형식으로 감독에서 물러났다.

6.7. 1996년~2008년


크루이프의 후임으로 아약스의 루이 판할을 선임하려고 했으나 계약 기간이 아직 남아있어 바비 롭슨을 임시로 선임하여 1996-97 시즌을 준비하였는데 이때 그 유명한 호나우두의 1시즌 원맨쇼가 펼쳐지면서 아깝게 놓친 리그를 제외한 미니트레블을 차지하였다.
1997년에는 바비 롭슨과 호나우두가 1시즌 만에 팀을 떠나고, 롭슨의 후임으로 루이 판할을 감독으로 선임하였다. 호나우두가 이탈했음에도 판할은 아약스에서 키운 제자인 파트릭 클라위버르트, 프랑크 더부르루이스 엔리케, 히바우두, 필립 코퀴 등이 활약하면서 라리가 2회 우승을 차지하였다. 이 당시 보여준 막강한 전력 덕분에 1999-00 시즌에는 트레블 후보로도 꼽혔으나 시즌 중반 감독과 선수진의 갈등 외 여러 문제가 터지면서 팀의 분위기가 안좋게 흘러갔고 결국 시즌을 무관으로 마치면서 감독과 회장이 동반 사임하는 막장극이 벌어진다.
2000년에는 조안 가스파르트가 회장으로 부임했으나 팀의 성적은 영 신통찮았고, 이 시기에 그 유명한 루이스 피구의 충격적인 이적이 일어나기도 했다. 결국 가스파르트 단장은 자신이 사임시킨 것과 다름없었던 판할을 다시 감독으로 불러들였는데 이에 판할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히바우두가 팀을 떠나기도 했다. 영광의 시절을 보냈던 감독을 복귀시키고 후안 로만 리켈메를 영입하면서 야심차게 시작한 2002-03 시즌은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비교적 괜찮았지만 리그에서는 한때 16위로 처지는 등 위기를 겪었다. 결국 판할은 복귀 첫 시즌도 넘기지 못한 채 시즌 중 사임했고 그를 영입한 가스파르트 회장도 동반 사임하게 된다. 판할이 경질되고 라도미르 안티치가 투입됐지만 리그 최종 6위로 시즌을 마치면서 그 역시 팀을 수습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판할이 감독으로 재임하는 동안 펼친 유망주 육성 정책은 나중에 빛을 발하는데 이때 카를레스 푸욜, 차비 에르난데스가 1군에서 활약하기 시작했으며, 안드레스 이니에스타, 빅토르 발데스가 1군에 데뷔했다.
2003년 취임한 조안 라포르타 회장은 프랑크 레이카르트를 감독으로 선임하고, 파리 생제르맹 FC에서 호나우지뉴를 영입하는 등 스쿼드의 개혁을 꾀한다. 그러한 노력으로 2004-05 시즌에는 호나우지뉴, 사무엘 에투, 루도빅 지울리, 데쿠 등 이적생들의 활약과 유스 출신 차비 에르난데스와 카를로스 푸욜 등의 활약이 더해져 6년만의 리그 우승을 차지하였고 2005/06 시즌에는 리그 우승과 함께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까지 거머쥔다. 그리고 이때 리오넬 메시가 데뷔 시즌을 치렀다.
그러나 그렇게 다시 전성기를 맞을 것 같았던 바르셀로나는 감독의 선수단 장악 실패, 호나우지뉴와 데쿠의 사생활 문제 등이 겹치면서 갑자기 거짓말같이 무너졌다. 2006-07 시즌은 무관으로 끝났고 2007-08 시즌은 잠시 반등하는 듯 했으나 결과적으로 무관으로 끝났다. 결국 시즌 후 레이카르트를 경질하였고 논란의 주범인 호나우지뉴는 AC 밀란으로, 데쿠는 첼시 FC로 이적한다. 그리고 새로운 감독으로 팀의 레전드였던 펩 과르디올라가 선임되었고, 이때부터 팀의 중심이 리오넬 메시에게 넘어가면서 바르셀로나의 전성기가 막이 오른다.

6.8. 2008-09 시즌




6.9. 2009-10 시즌




6.10. 2010-11 시즌




6.11. 2011-12 시즌




6.12. 2012-13 시즌




6.13. 2013-14 시즌




6.14. 2014-15 시즌




6.15. 2015-16 시즌




6.16. 2016-17 시즌




6.17. 2017-18 시즌




6.18. 2018-19 시즌




6.19. 2019-20 시즌




6.20. 2020-21 시즌




[1] 쉽게 설명하자면 우리나라의 조기 축구회 같은 개념으로 창단했다고 생각하면 된다.[2] 지금으로 생각하면 의미는 다르지만 임대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된다.[3] 이때 그린벨트 관련 프로젝트를 허용해준 사람이 바로 스페인의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다. 이후 프랑코는 바르셀로나 창립 75주년 메달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