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 트윈스/역사

 



1. 성적
2. 연표
2.1. MBC 청룡 시절(1982~1989년)
2.2. 팀명 변경과 함께 찾아온 첫 우승
2.2.1. 백인천 체제(1990~1991년)
2.3. 신바람 야구의 전성기
2.3.1. 이광환 체제(1992~1996년)
2.3.2. 천보성 체제(1997~1999년)
2.4. 암흑기의 조짐과 마지막 한국시리즈
2.4.1. 이광은 체제(2000 ~ 2001.5)
2.4.2. 김성근 체제(2001.5 ~ 2002년)
2.4.3. 이광환 체제 2(2003년)
2.5. 본격적인 암흑기
2.5.1. 이순철 체제(2004 ~ 2006년)
2.5.2. 김재박 체제(2007 ~ 2009년)
2.5.3. 박종훈 체제(2010 ~ 2011년)
2.6. 암흑기의 종식과 우여곡절의 시기
2.6.1. 김기태 체제(2012 ~ 2014.5)
2.6.2. 양상문 체제(2014.5 ~ 2017)
2.6.3. 류중일 체제(2018 ~ 2020)
2.6.4. 류지현 체제(2021 ~ )
3. 역대 시즌
3.2. 2000년대 이전
3.3. 2010년대
3.4. 2020년대
3.5. 2030년대


1. 성적


LG는 MBC때부터 야구를 특출나게 잘하지는 못한, 중상위~중위권의 이미지였다. 청룡팬들의 증언이 담긴 80년대 영상에서부터 이미 MBC/LG팬들은 스트레스를 상당히 받고 있다는 게 느껴질 정도로 강팀으로 뛰어오르지는 못하는 팀이었다. 원년에 백인천이 4할타자의 대기록을 세웠고 팀의 간판인 김재박을 비롯해서 선수 면면은 90년대 LG 황금기에 버금갈 정도로 좋았지만[1] 리더가 정해져 있지 않은 '방송국 야구단'의 한계가 명확히 있었던 것. MBC 청룡 시기의 최고 성적은 1983년의 준우승이다. 그래도 이 시기는 아직 OB가 '대전에서 올라온 팀'이라는 이미지가 박혀있어서 1984~1989의 삽질에도 서울팬덤이 크게 흔들리지 않았던 듯 하다. 그리고 당시 스타선수도 많고 아직 프로 출범 초창기였던지라 청룡올드팬들은 해당 시기를 암흑기라고 부르는 것에 거부감을 드러내고 있다.[2]
이후 LG 트윈스는 1990년, 1994년에 우승을 했다. 특히 이광환 감독의 '''신바람 야구'''를 내세운 1994년 우승은 현재까지도 LG 트윈스의 상징이자, 한국프로야구 발전에도 중요한 분수령이 되었다. '뉴욕 양키스가 될'''만한''' 팀'[3]이란 말을 들을 정도로 1990년대 중반의 LG 트윈스는 잘 나갔다. 현재도 LG 팬덤의 코어는 이 시기에 형성된 팬들과 그들의 아들, 딸들이다.
1990년, 1994년의 우승은 최초의 한국시리즈 준우승 이후 청룡의 1세대 선수들이 은퇴하기 전에 비교적 빠르게 찾아온 (7년) 황금기였고 아직 OB가 대전에서 올라온 팀이라는 차가운 시선을 벗지 못하고 있을 때 지방팀들의 전유물이었던 한국시리즈 우승을 수도 서울을 연고로 하는 구단에서 최초로 이루어내면서 '''LG는 90년대 황금기를 맞으며 서울의 야구팬들을 모조리 흡수해버리게된다.''' 2008년 이후 두 팀의 성적이 차이가 나게 되고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도 두산은 팬덤 '규모'에서 아직 LG를 쫒아가지 못하고 있을 정도. 1990~1994는 정말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그러나 1997년과 1998년 '''2연준'''(2연속 준우승)에 그치고, 2002년에는 객관적 전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김성근 감독의 '원조 벌떼 마운드' 운용으로 투수들의 팔과 어깨를 무진장 갈아대며 준우승을 했으나, 시즌 후에 김성근감독을 경질하고,[4] 1994년 우승 감독인 이광환 감독이 다시 지휘봉을 잡았으나 이때부터 LG에 암흑기가 도래했다. 1년 만에 짤리고 수석코치 금지어가 감독으로 임명되면서 창단 첫 최하위의 수모를 겪게 된다.[5] 2007년 시즌 팀의 프랜차이즈 스타 출신인 김재박이 화려하게 친정팀으로 돌아왔으나, 결과적으로 주전들의 철밥통 포지션 운영과 조공성 트레이드 등으로 비밀번호가 늘어났을 뿐이었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까지의 암흑기를 보내면서 얻은 별명이 칠쥐(7위+LG)이다.
2007년 시즌에는 시즌 막판 삽질쇼로 인해 화끈하게 100억 지르고 5위라는 성적을 거두었으며[6], 2008년에는 결국 2번째 최하위의 성적표를 받았다.[7] 참고로 2008년의 2번째 꼴찌는 팀 역대 최저승률 기록이기도 하다. 몇 년째 100억 단위로 돈을 쏟아 부으며 굴하지 않고 매 홈경기를 관전하는 구단주인 구본준 LG전자 부회장은 천사임이 틀림없다는 게 야구관계자나 팬들 사이에서 정설로 통'''했'''다.
실제로 엘롯기 중 기아 수뇌부는 아예 야구에 관심이 없어 운영은 현장과 프런트가 알아서 하고, 롯데 수뇌부는 구단을 그저 돈벌이 수단으로만 생각하는데 반해[8] LG 수뇌부는 꼬박꼬박 직관에 스프링캠프 때도 찾아가며 2군까지 꿰고 있을 정도로 야구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깊다. 그러나 그게 꼭 좋은 건 아니다.[9] 야구를 잘 모르는 구단주의 지나친 관심은 자칫 필요 이상의 간섭과 구단주에게 잘 보이기 위한 사장, 단장의 삽질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 그리고 실제로 LG의 팀 성격이 엉망이 된 것을 그 때문으로 보는 입장도 상당하다. 이상훈+이광환 체제에 대한 미련으로 김성근 축출도 그렇지만, 리빌딩에 들어가야 할 팀에 포지션까지 중복되는 즉전급 선수를 몇 년 동안 사들여서 팀 목표가 리빌딩도 아니고, 우승 도전도 아닌 애매하게 흘러가는 이유가 된 것이 그 이유. 이런 케이스가 미국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도 있으니 바로 휴스턴 애스트로스. 2005년 준우승 이후 지속적인 영입을 통해 대권을 노렸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계속 좋은 유망주들도 놓치자 성적이 수직으로 추락한 것이 닮았다.
그러나 2011년 방영된 이광용의 옐로우카드 LG 특집에서 그 충격적인 실상이 알려졌다. 구단주가 임명한 '''사장'''이라는 인간이 "야구에 대해 문외한"이며 그저 술만 좋아해서 스프링캠프 때 박종훈 감독과 기자들 앞에서 추태를 부렸다 하니... 그나마 이 보도 덕에 그룹에서 직접 '''감사팀을 파견'''하여 대대적인 재정비 작업에 들어가면서 현재는 평타는 치는 프런트로 바뀌었다. 비록 능력 부족으로 인해 지탄받는 점은 있으나, 2011년부터 시작된 백순길 단장 체제가 4년 이상 지속되는 것만 해도...[10]
이 시기에는 10년 동안 도무지 발전이 없는 팀 성적과 구단의 철밥통 코치와 스카우터들, 이러한 답답한 LG 트윈스의 구단 경영에 실망을 넘어 염증을 느낀 팬들 사이에서는 정말로 진지하게 GS그룹에 팀을 매각하는 것이 어떨까하는 논의가 계속되었다. FC 서울과 GS 칼텍스 여자배구단 등 GS 그룹이 운영하고 있는 스포츠단은 LG 그룹보다 괜찮은 성적과 운영을 하고 있기 때문. 물론 실제로 LG 그룹이 야구단을 GS 그룹에 매각할 확률을 제로에 가깝다. 그러나 2016년부터 GS의 스포츠단 운영도 막장으로 드러났기 때문에 실제로 넘어갔어도 잘 했을지는 의문이다.[11]
그러나 2013년[12]과 2014년[13] 연속으로 가을야구에 진출하면서 10년의 비밀번호를 끊어내는 데에 성공했다. 특히 2014년에는 김기태 감독의 사임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양상문 감독이 부임한 뒤 5할 -16 꼴찌에서 기적같이 4위에 안착하는 데 성공하면서 LG팬들을 기쁘게 했다.
2015년 구단 역사상 첫 9위로 최악의 한해를 보냈으나 2016년 젊은 선수들의 성장과 함께 2년 전처럼 5할 -14에서 후반기 대반전을 만들어내며 4위에 안착, 2년 만에 가을야구에 복귀하였다. 허나 2017년 후반기 불펜들의 연쇄적인 붕괴와 타선의 침체, 결정적으로 이병규의 은퇴식 다음날 윤지웅의 음주운전 시즌아웃과 제임스 로니의 야반도주 사건이 터져 평균자책점 1위를 찍고 가을야구에 실패했는데 95년의 해태 타이거즈 이후 처음 나온 기록이다.[14] 그리고 철밥통 서용빈이 드디어 짤렸다. 그리고 2018년 시즌 양상문 감독이 단장으로 승진하고 류중일 감독이 취임했으며 구단 역사상 가장 비싼 선수인 김현수를 115억에 영입했다. 그리고 김현수 효과와 함께 고정라인업 운영으로 양상문 시절 애매했던 타자들이 우후죽순 커리어하이 기록을 써가기도 했다. 그러나 불펜 불안과 고정라인업으로 인한 야수 체력 고갈로 시즌 내내 롤러코스터를 타던 팀 순위는 두산을 만날 때마다 패배하며 내려가기 시작했다. 결국 아시안게임브레이크 후 김현수의 시즌 아웃이 결정적인 치명타로 작용하며 두산에 전패 위기를 겪는 치욕 끝에 결국 2011년 이후 역대급 DTD로 8위로 마감했다. 그리고 결국 그렇게 욕먹던 강상수도 짤렸고 양상문도 단장 자리에서 사임하고 2019 롯데감독을 맡게됐으며, 빈 단장자리는 차명석이 맡게 되었다.
2019년 현재도 팀 뎁스가 두껍지 못하여 매 시즌 판도가 변하는 팀이라고 볼 수 있다. 그나마 차명석 단장이 이전 취임자들과 달리 고참선수들을 신경쓰는 모습을 보이면서 팀의 인기는 확실히 안정권에 들었다. 2019년에는 김민성이 사인앤트레이드로 영입되며 정성훈의 1루 전향 이후 무주공산이었던 3루수 자리에 어느정도 무게감이 생겼고, 지난해부터 이어진 류중일의 고정라인업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며 야수 전력에 안정감이 생겼다. 2년차를 맞은 타일러 윌슨과 소사 대신 영입한 케이시 켈리는 리그 최고의 외국인 원투펀치로 활약했다. 결정적으로 마무리 정찬헌의 이탈이 있었으나 고졸신인 정우영가 LG에서 이병규 이후 22년 만에 신인왕을 수상하는 등 불과 1년차에 불펜의 주축으로 자리잡았고, 고우석이 제구불안을 떨쳐내고 언터쳐블한 모습을 보여주며 뒷문을 단단하게 막은 것이 결정적이었다. 상위권 3팀과의 상대전적에서 밀려 우승 경쟁에서는 밀렸지만 전반기도 끝나기 전에 5강5약이 거의 결정된 분위기 속에서 일찌감치 승패마진을 벌어놓으며 구단 역사상 최다승 2위인 79승에 +15라는 여유로운 승패마진으로 4위를 기록하며 3년 만에 가을야구에 복귀했다. 그러나 불펜 붕괴로 인해 역사상 처음으로 준플레이오프 탈락을 기록했다.
2020년에는 뎁스 쪽에서 드디어 좋은 평가를 받기 시작했으며 심지어 우승에도 잘하면 도전해볼 수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윌슨의 부진과 차우찬의 부상, 이형종, 이천웅 등 주전 야수들의 줄부상, 마무리 고우석의 2개월 이탈 등 여러 악재가 겹쳤음에도 타선에서는 홍창기가 리드오프로 자리잡고, 투수에서는 이민호, 이정용, 김윤식와 같은 1~2년차 신예들이 등장하며 9월 초까지 선두 NC에 1경기차로 따라오기도 했다. 그러나 9월 이후 벤치의 쓸놈쓸 운영을 포함해 여러 차례 벤치 미스가 나오며 대역전패가 속출했고 결국 치열한 2~5위 경쟁에 돌입했다. 10월 선두 NC에 4연전 싹쓸이 승리를 기록하며 2위 수성에 유리한 고지를 선점했지만 총력전 선언이 무색하게 이상한 운영이 나오며 마지막 2경기에서 최하위권 두 팀인 한화와 SK에 연패, 결국 1승만 거두면 2위할 수 있었던 상황에서 최종전에서 4위로 추락했다. 결국 두산 베어스를 상대로 구단 포스트시즌 역사상 첫 스윕패와 함께 준PO에서 2년 연속 탈락하며 류중일의 3년 임기는 막을 내렸다.
메이저리그 팀으로 비유하자면 필라델피아 필리스, 일본프로야구 팀으로 보면 2010년대 들어 세대교체 실패+막장 프런트로 망가진 주니치 드래곤즈 라고 볼 수 있겠다. 타격 부분은 타자쪽으로 MVP급이 거의 없는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선수 육성 부분에서는 나가는 선수마다 다 터지는 마이애미 말린스. '''한마디로 답이 없다'''. 그나마 조금 나아지는 중이다.

2. 연표




2.1. MBC 청룡 시절(1982~1989년)


MBC 청룡 참조.

2.2. 팀명 변경과 함께 찾아온 첫 우승



2.2.1. 백인천 체제(1990~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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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말 MBC 청룡을 럭키금성그룹이 인수, 구단명을 LG 트윈스로 바꾸면서 역사가 시작되었다. 감독은 이전 청룡시절 영입한 백인천을 유임시키고, 신인 선수로 김동수, 이병훈을 영입, 1990년 1월 OB 베어스와 트레이드로 김상호를 내주고 최일언을 데려오면서 시즌을 준비했다.
그러나 시즌 시작 전에 이광은이 교통사고로 이탈하고, 신언호와 김기범, 박흥식도 부상으로 빠졌다. 또한 교통사고의 후유증이 남아있는 김건우는 기약없는 재활을 해야 했기에 팀은 큰 전력누수를 안고 시작했다. LG 트윈스로의 명칭 변경 후 치른 개막전인 OB 베어스와의 2연전에서 2연패로 시작한 LG는 5연승을 기록하며 잠시 선두를 가져갔지만 5월까지 6연패와 7연패를 차례로 기록하며 꼴찌로 처졌다. 6월 3일 태평양 돌핀스와의 홈경기에서 무기력하게 5:0 패배를 당하며 14승22패로 최하위에 머물자 경기가 끝나고 100여명의 홈팬들은 잠실구장 출입문 앞으로 몰려가 백인천 감독을 향해 청문회를 요구하며 감독 퇴진을 요구하기도 했다. 백인천감독 퇴진시위에 곤욕
하지만 곧바로 이어진 해태 타이거즈와의 원정 3연전을 모두 잡으면서 분위기를 반전시켰고 기세를 모아 8연승을 기록하며 5할을 맞췄다. 그리고 상승세를 이어가며 올스타전이 지난 7월 13일에는 꼴찌에서 불과 39일 만에 단독 1위로 올라섰다. 기존 마무리투수였던 김용수와 선발투수 정삼흠의 보직 변경이 신의 한 수였으며 지난해까지 유망주에 머물렀던 김태원문병권이 선발의 주축으로 자리잡은 것이 결정적이었다.
그러나 7월 빙그레 이글스 원정 4연전을 모두 내주며 대전구장 19연패라는 특정팀 원정 최다연패를 기록, 3위로 추락하며 분위기가 한풀 꺾였다.[15][16] 다행히 빙그레전을 제외하고는 루징시리즈 없이 보냈지만 8월을 마쳤을 때 선두 빙그레와 5경기차 3위에 머물렀다. 그 와중에 8월 26일 잠실 해태전에서 LG가 1:13으로 승리하자 분노한 해태팬에 의하여 잠실구장 패싸움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LG가 9월 2일에서 13일까지 태평양전 2승1패-OB전 3연승-빙그레전 2승1패-태평양전 3연승으로 10승2패를 기록하며 막판 스퍼트를 낸 사이 빙그레가 김영덕 감독의 계약 문제로 인해 급격하게 무너졌다. 9월 14일에서 17일은 LG의 휴식일이었는데 이때 선두였던 빙그레가 해태와의 홈 4연전에서 모두 패하며 LG는 가만히 앉아서 두 달 만에 선두를 탈환했다.[17] 그러나 LG가 삼성과 태평양에 갑자기 3연패를 당하며 빙그레를 스윕하고 기세가 올라온 해태에게 잠시 선두를 빼앗겼다가 다시 정신을 차리며 선두를 탈환했다. 그러나 해태의 잔여 경기수가 많아 매직넘버는 해태에 있었다. 그러다가 9월 28일 LG의 최종전에서 기적적인 일이 벌어졌다. 꼴찌가 확정된 OB와의 최종전에서 9회말 김동수가 극적인 끝내기 홈런을 치며 1대0 승리를 거뒀고 몇 시간 뒤 해태가 태평양과의 더블헤더 2차전에서 패하며 마침내 사상 처음으로 정규리그 우승을 차지했다.[18] 1위로 직행한 LG의 상대는 삼성 라이온즈였고 시리즈 직전까지만 하더라도 팽팽한 접전을 예측했지만[19] 결과는 4전 전승으로 LG의 창단 첫 우승과 삼성의 감독 정동진의 해임이었다. 이는 '''서울 연고팀 최초의 한국시리즈 우승'''이기도 했다. [20] 상세한 내용은 1990년 한국시리즈 참고.
불행하게도 1990년 우승은 곧바로 LG의 전성기로 이어지지 못했다. 프런트는 백인천과 계약 연장 문제[21]를 두고 대립했으며 일단 연말에 1991년에도 같이 가는 것으로 합의했다. 시작부터 삐걱거린 1991년 전반기는 지난해에 비해 투타에서 모두 확 떨어진 경기력을 보이고 있었음에도 하위권이었던 쌍방울과 태평양, OB를 탈탈 털어 강약약강으로 겨우 3~4위를 꾸준히 지켰지만 중반부터 선수들의 부상과 부진[22], 백인천 감독의 히트앤런 작전은 이미 수를 다 읽혀 전년도 만큼의 재미를 보지 못했고, 김용수와 정삼흠이 또다시 보직을 서로 바꿨지만 이번에는 별 재미를 보지 못했다. 롯데 자이언츠와의 4위 경쟁에서 밀려난 시즌 막판에는 백인천의 계약이 종료되던 시점에서 레임덕 현상으로 무너지면서 최종 순위는 53승1무72패, 신생구단인 쌍방울 레이더스와 공동 6위로 마감했다. 전반기 막장의 끝을 달리다 이재우 경질 후 윤동균 대행 체제에서 5할 이상의 성적으로 승률을 4할대로 끌어올렸던 꼴찌 OB와는 불과 1.5경기 차였다. 포스트시즌행이 사실상 무산되는 분위기였던 8월 말 백인천은 시즌 종료 후 떠나겠다고 선언했고 구단은 이를 곧장 받아들였다. 그리고 9월에는 LG로 팀명 변경 후 최다연패인 10연패를 기록했다. 쌍방울이 막판 3연패하지 않았더라면 최종 순위는 공동 6위가 아니라 7위였다.

2.3. 신바람 야구의 전성기


LG 트윈스 구단 역사상 가장 아름답고 뜨겁고 신바람이 넘쳐났던 리즈 시절이자 6년 사이 포스트시즌 5번, 한국시리즈에 3 진출하며 신바람 야구가 꽃피우던 시절로 이 때만 하더라도 LG 트윈스의 전성기라고 할 수가 있다.

2.3.1. 이광환 체제(1992~1996년)


후임은 OB의 전 감독이었던 이광환 감독으로 결정되었고, 이와 동시에 김재박과 이광은에게 은퇴를 종용, 이광은은 받아들였지만 김재박은 이를 거부하고 트레이드로 태평양 돌핀스로 이적했다. 그리고 1992년 시즌의 결과는 시즌 초반부터 하위권으로 떨어진 끝에 53승3무70패로 지난해와 승수가 같고 무승부 수가 2개 많아 승률은 조금 올랐으나 압도적인 최하위를 한 신생팀 쌍방울에만 앞선 7위로 마감하면서 더 안좋아졌다. 개막 이후 김용수의 부상과 정삼흠, 김태원의 부진, 김기범의 방위병 복무 등의 이유로 마운드 붕괴를 겪으며 한 달도 안 되어 꼴찌로 처지자 이광환은 홈팬들의 거센 야유와 사퇴 요구를 받았다. 언론에서도 연일 그의 야구철학인 자율야구를 거세게 비판했다. 거기다 이광환은 그해 6월 30일에 태평양에 윤덕규-박준태 트레이드를 하면서 팬들의 비난을 받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윤덕규는 3할이 가능한 타자였고, 박준태는 백업이었기 때문에 비난이 가중될 수 밖에 없었다.[23] 그래도 수확이 없던 건 아닌데 고졸 2년차 송구홍이 팀 창단 첫 20-20을 기록하고 지난해 극심한 소포모어 징크스에 시달렸던 김동수도 20홈런을 치는 등 젊은 선수들이 빈 자리를 메우기 시작하였고, 전반기 바닥을 쳤던 LG는 후반기인 7월과 8월에는 월간 5할 승률 이상을 찍으며 성적이 나아졌다. 이는 신바람 야구로 이야기되는 전성기의 시작을 예고하였다.
1993년 억대팔 이상훈의 가세와 김용수의 부상 복귀로 팀 전력 상승이 기대되었다. 1993년의 개막전은 해태 타이거즈와 하는 광주 원정이었는데, 이 경기를 잡으면서 4월 내내 승리 행진을 계속하면서 상위권을 찍었다. 특히 4월 30일의 잠실 해태 타이거즈 경기는 '''한국프로야구 르네상스의 시작'''으로 불리는데, 3연전 내내 만원관중을 동원하면서 본격적인 관중 몰이를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4월의 상승세는 계속 이어져 5월부터 줄곧 2위권을 지켰고[24][25], 그해 7월 23~25일의 잠실 삼성 라이온즈 3연전은 평일임에도 전 경기 만원을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26] 정삼흠이 한때 다승 1위[27]를 기록하며 8월초에는 해태를 1경기차까지 다 따라왔다. 그렇지만 8월달 '대구 대회전'으로 불리는 삼성과의 3연전을 다 내주고 9월달에 부진을 겪으며 4위로 내려갔지만 이미 포스트시즌 진출을 확정지은 뒤의 일이었다.[28][29] 9월 9일 잠실 쌍방울전에서 김태원은 구단 역사상 유일한 노히트노런을 달성했다.
그리고 시작된 준플레이오프는 OB 베어스랑 붙게 되었는데, 치열한 투수전 끝에 3차전에서 김경원을 무너뜨려 5:2로 역전승을 거두며 2승 1패로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했다.[30] 삼성과 플레이오프에서 맞붙어 초반 잠실에서 2패로 밀리는가 싶더니 대구에서 이상훈정삼흠이 3~4차전을 승리로 이끌어 동률을 이루지만 잠실 홈에서 열린 5차전에서 마지막을 넘지 못하고 탈락한다. 덧붙여 이 플레이오프에서는 '''윤찬김선진[31][32] 의 전설로 남을 뇌주루'''가 나오고 저 경기를 모두 날림으로서 아쉬움이 두 배가 되었다.
시즌이 끝난 그해 12월 1일 LG와 해태 팬들을 놀라게 한 일이 일어났는데, 바로 '''김상훈'''+이병훈과 '''한대화'''+신동수+허문회+김봉재 간 2:4 트레이드가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당시 미스터 LG로 불리던 김상훈을 하락세 조짐이 보이던 한대화와 바꾸자 프런트가 미쳤다는 소리가 나왔지만, 결국 결과는 LG의 완승으로 끝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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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설명한 트레이드와 송구홍의 군 문제 이탈, 주전 포수 김동수의 방위병 복무로 인해 1994년에는 포스트시즌 진출이 쉽지 않다고 대부분 전문가들이 예측했다. 하지만 류지현, 김재현, 서용빈의 신인 3인방[33]과 대폭발한 이상훈, 꾸준한 모습을 보여준 김태원, 정삼흠과 마무리 김용수, 노장 한대화노찬엽의 활약은 팀을 정규시즌 1위로 올려놓았고, 태평양 돌핀스와 대결한 한국시리즈도 4전 전승으로 초살시키며 1994년 시즌의 지배자로 올라섰다. 이해 한국시리즈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1994년 한국시리즈 참고. 그리고 신인왕 류지현을 배출하고 KBO 골든글러브 시상식도 5명[34]이 수상하면서 개인기록으로도 풍년을 맞았다. 참고로, LG 트윈스의 1994년 페넌트레이스 성적은 '''전 구단 상대전적 우세'''이다. 최장연승은 6연승에 불과하며 긴 연승은 없었으나 단 한 번도 3연전 스윕패를 기록하지 않았다. 또한 연패는 길어봤자 3연패였다. 마운드의 원투쓰리펀치 이상훈과 김태원, 정삼흠은 모두 15승 이상을 기록했으며 신인 인현배가 전반기 9승을 기록하는 등[35] 10승을 기록하며 선발의 한 축을 담당했다. 지난해까지 꾸준히 선발 로테이션을 돌며 이닝을 먹어주던 김기범이 부상으로 인해 5선발과 롱릴리프를 오갈 정도로 선발진은 매우탄탄했다. 중간계투에서는 차동철과 강봉수, 민원기, 차명석이 역할 분배를 하며 잘 맡아주었으며 뒷문은 김용수가 30세이브로 든든하게 막았다.
압도적인 우승으로 인해 LG의 전성시대는 길게 지속될 것이라는 전망이 있었으나 1995년 내야 핵심들이 죄다 방위병 크리를 맞는 악재를 맞았다. 방위병 문제는 전 구단 모두에 해당했으나 내야 핵심이 모두 빠지는 LG와 이종범이 빠지는 해태가 그 피해가 특히 컸다. 유격수 유지현, 2루수 박종호, 3루수 송구홍이 한꺼번에 방위병 복무를 했다.[36] 그리고 시즌 초 방위병 신분의 롯데 강상수의 의문의 강판 이후 방위병 출전 금지 조치가 내려지면서 한때 야구장에 있는데도 출전할 수 없는 상황이 있었다. 그나마 11월까지로 적용을 유예하기로 바뀌면서 일단 한숨을 돌렸다.
방위병 문제에 더해 투수 쪽에선 김기범이 13승으로 반등에 성공했고 김용수가 더 단단한 모습을 보여줬지만 반대급부로 김태원과 정삼흠이 흔들리며 노쇠화를 보이기 시작했다.[37] 그리고 야수 쪽에선 억대신인인 심재학과 조현이 기대에 못미쳤고[38] 김재현은 소포모어 징크스를 겪었으며 한대화와 노찬엽의 경기력은 떨어졌다.[39] 그럼에도 불구하고 끈끈한 조직력을 통해 초반 선두를 달리던 OB 베어스를 잡고[40] 8월 말 시즌 종료를 1달 앞둔 시점까지 OB 베어스에 6게임차 앞선 1위를 달렸지만 이광환의 잘못된 운영[41] 때문에 막판에 역전을 허용해 0.5게임차 2위로 시즌을 마쳤고 플레이오프에서 송구홍의 통한의 악송구가 나오며 롯데 자이언츠에게 2승 4패로 탈락하게 된다. 김태원의 갑작스러운 부진이 계속되며 선발 운용에 어려움을 겪자 이광환은 자신의 지론을 깨고 이상훈-김기범-정삼흠-박철홍의 4인 로테이션을 가동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잘 던지던 선발의 체력을 갉아먹는 결과를 초래했 타선의 침체 역시 1달 가량 두자릿수 안타가 안나올 정도로 최악으로 치달았다. 롯데전에선 특히 맥을 추지 못했는데 8월 이후에만 롯데에 1승7패를 기록하며 승률을 깎아먹었다. 결국 그해 9월 부터 시작된 어메이징한 추락의 끝은 정규리그에서 역전 당해 우승을 빼앗기고 플레이오프에서 업셋을 당해 3위로 끝나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었다.[42] 그해 이상훈은 순수 선발로만 20승을 따내는 괴력을 보여주었고, 이는 2007년 다니엘 리오스가 22승을 거둘 때까지 깨지지 않은 기록이 되었으며 토종 좌완 선발투수 기준으로는 2017년에 양현종이 20승을 기록할 때까지 그 누구도 넘보지 못했다. 당연히 KBO 골든글러브도 획득했다.
1996 시즌 지난해의 아쉬움을 만회하기 위해 절치부심했으나 이상훈의 척추분리증으로 인한 이탈[43]과 주축 투수들의 노쇠화[44], 부진이 겹쳐 하위권으로 추락했다. 새로 나오는 신진급 투수가 자리를 잡아야 했지만 당초 대학 졸업 후 1996년에 LG에 입단해야할 임선동이 일본에 진출하고 싶어서 떼를 쓰며 구단과 소송을 벌였으며 1차지명과 2차 1라운드였던 이정길손혁은 입단 후 사실상 사이버투수가 되며 경기에서 모습을 감췄다.[45] 송구홍유지현, 박종호가 방위병 복무를 마쳤지만 팀의 상황을 바꿀만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46][47] 한대화노찬엽의 노쇠화는 심해졌으며[48] 서용빈과 김동수 역시 2할 4푼대로 떨어지며 부진했다. 1995시즌 전반기 9홈런을 기록했던 조현은 어퍼스윙을 레벨스윙으로 교정하려고 했지만 오히려 타율이 2할대 초반으로 더 망가지고 말았다. 여기에 이광환의 이상한 운영이 지속되면서 전반기 7위로 추락했다. 김용수의 선발 재전환과 심재학의 성장이 유일한 볼거리였다. 결국 이광환은 올스타전 직후 경질되었으며 천보성이 감독대행을 맡았다. 프로야구 4강이 일찌감치 정해지는 흐름으로 순위경쟁이 사실상 힘들어지자 전년도 프로야구 1~2위를 다투던 OB와 무명의 2진급의 선수들을 대거 내보내는 등[49] 서로 꼴찌하고 싶어서 안달인 운영을 하면서 빈축을 사기도 했다.[50] 박철홍이 병역 문제로 이탈하고[51] 김기범은 구위 저하를 겪었다. 정삼흠과 김태원이 규정이닝을 소화하며 분전했지만 정삼흠은 아직 더 선수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음에도 이 해를 끝으로 은퇴하고[52] 김태원은 이 해가 풀타임 선발 로테이션을 소화한 마지막 시즌이었다. 1996년에 입단한 신인인 손혁은 시즌 막바지에 2경기 선발등판에 그쳤다. 시즌 내내 구단과 지명권 관련 소송으로 시끄러웠던 임선동은 2년 뒤 트레이드로 보내준다는 조건으로 7억 계약금을 받고 입단했다. 1996시즌을 마친 시점에서 선발진은 사실상 원점에서 다시 새판을 짜야하는 상황이 됐다. 투수가 부족한 LG는 1993년에 이어 3년만에 해태와 초대형 트레이드를 했다. 좀처럼 주전을 차지하지 못했던 외야수 2명 최훈재조현을 내주는 대신 투수 송유석최향남, 외야수 동봉철을 받아왔다. 그리고 노쇠화가 심해진 한대화를 쌍방울로 보내고 투수 신영균을 받아왔다.

2.3.2. 천보성 체제(1997~1999년)


천보성을 정식 감독으로 임명하고 맞은 첫 시즌인 97년,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4강에 못 들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그 예상을 비웃듯 초반에 10연승을 찍으며 선두로 치고 나가게 된다. 그러나 5월 4일 5:27 대참사를 겪고 삼성과의 압축 배트 시비를 기점으로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10승, 20승, 30승, 40승에 차례로 선착했으나 올스타브레이크를 기점으로 해태 타이거즈의 추격이 시작되고 삼성 라이온즈까지 가세하자 3위로 밀려났다가[53] 시즌 막판에 다시 9연승으로 힘을 회복하면서 해태에 1.5경기차 뒤쳐진 2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54] 플레이오프에서 다시 삼성을 만났고 유지현의 만루홈런, 서용빈의 역전 끝내기 2루타 등 명장면이 펼쳐진 혈투 끝에 3:2로 삼성을 잡지만 힘을 다 써버린 나머지 정규시즌에서 매경기 명승부[55]를 찍으며 상대전적 10승8패로 앞섰던 해태에게 투수진이 줄줄이 맥없이 무너지며 1승 4패로 준우승에 그치고 만다. 1997년 한국시리즈 참고. 이 시기에 등장한 선수가 이병규로 그해 신인왕과 골든글러브를 수상했고, 손혁, 임선동, 최향남, 전승남, 신국환 등 천보성이 키우거나 외부에서 데려온 선수들은 팀의 돌풍을 이끌었다. 김재현이 발목 및 허리부상에 신장염 문제로 1경기도 나오지 못했으나 트레이드로 온 동봉철이 그의 공백을 잘 메워줬다. 박종호의 부상을 틈타 무명 선수 신국환이 해태전 연장 끝내기 이후 '신데렐라'로 등극하며 주전으로 도약했다. 차명석이상훈은 구원투수임에도 10승을 기록하며 뒤를 받혔고, 이상훈은 생애 첫 구원왕에 올랐다.
하지만 1998년 시즌 전 이상훈이 일본의 주니치 드래곤스로 이적하면서 투수진은 약해졌고, 외국인 선수 제도가 시행되었음에도 마무리 마이클 앤더슨만 뽑는 등[56] 특이한 행보를 보였던 98시즌은 김용수가 다승왕을 하고, 시즌 중반에 버닝하면서 간신히 5할에서 겨우 1승 앞선 3위로 마감했다.[57] 그러나 포스트시즌이 되자 완전히 달라지는데, 엔트리에 부상중인 서용빈을 꺼내든 강수가 적중하고 8월에 영입한 주니어 펠릭스가 포스트시즌 내내 날아다니며 OB 베어스삼성 라이온즈를 박살내고 2년 연속으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하지만, 상대는 현대 유니콘스였고 전적에서 앞섰지만 정민태김수경을 위시한 투수진과 박재홍에게 농락당하며 또 준우승을 하고 만다. 1998년 한국시리즈 참고.
결국, 1998년의 준우승의 후유증은 팀을 기울어가게 만들었고 그 다음 해인 1999년 시즌 양대리그제가 시행되어 매직리그 3위, 전체 6위라는 초라한 성적으로 마무리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개막 후 20승에 선착한 팀이었지만 곧바로 급격하게 추락, 8월까지는 어찌어찌 5할대 승률에서 버텼으나 초반 하위권으로 추락했던 매직리그 3위 한화가 반등에 성공하며 결국 따라잡혔고 9월 이후 한화의 파죽의 10연승과 LG의 연패가 맞물리며 순위권에서 멀어졌다. 해체 직전 17연패의 쌍방울 레이더스의 연패를 끊어주는 굴욕도 당했다.[58] 마운드에서는 선발투수 손혁[59]과 마무리로 재전향한 김용수[60]가 분투했지만 그 뒤를 받쳐야 할 김광삼, 김상태[61]가 부진했고, 이에 투수진 보강을 위해 중심타자였던 심재학을 어깨가 강하다는 이유로 '''투수로 전향'''시키는 무리수를 두는데 투수진 강화는커녕 부상으로 신음하다가[62][63] 막판에 다시 타자로 돌아오는 등, 구단과 사이가 틀어지면서 투수진 강화는커녕 선수 본인과 구단 모두에게 좋지 않은 결과로 돌아오고 말았다.
반대로 야수진은 이병규가 '''30-30 클럽'''과 최다안타 역대 2위 기록을 쓰며 맹활약했고 김재현유지현, 김동수, 이종열도 잘 받쳐주었지만, 서용빈이 병역비리로 인해 구속되며 전년도에 이어 시즌을 완전히 날려버렸고 김선진과 신국환은 부진, 98년 후반기에 괜찮은 모습을 보여줬던 펠릭스와 99년 시즌을 앞두고 영입한 외국인 타자 케빈 대톨라는 기대에 한참 못미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64] 특히 대톨라는 3루수와 1루수를 소화한 적이 없는데 3루수로 쓰려고 영입하는 황당한 모습을 보였다. 외국인 둘을 합쳐서 김재현 하나만큼의 생산성도 보여주지 못해 차라리 심재학을 그대로 두고 외국인 투수 두 명을 뽑아 부족한 마운드를 보강하는 편이 훨씬 더 나았다.

2.4. 암흑기의 조짐과 마지막 한국시리즈



2.4.1. 이광은 체제(2000 ~ 2001.5)


1999 시즌의 부진은 천보성 감독의 사퇴를 불러왔고, 후임 감독으로는 MBC 청룡-LG 트윈스의 프랜차이즈 스타 출신인 이광은이 새롭게 감독자리에 올랐다.[65] 이광은은 이전 천보성이 상당부분 진행시킨 리빌딩보다는 다시 한 번 대권에 도전하겠다는 야심을 내보이며, 2000년 시즌 개막 직전 해태에서 트레이드 매물로 풀린 양준혁을 손혁을 내줘가면서까지 데려온다.[66][67] 허나 주전 포수 김동수가 FA로 삼성 라이온즈 행을 선택하고 투수 전향 관련으로 인해 구단과 사이가 틀어진 심재학현대 유니콘스로 트레이드하면서 전력은 이전보다는 약해졌다.[68]
어찌하여 이광은 체제로 개막한 2000년 시즌. 이광은 감독은 기존 자율야구 대신 선수들을 엄하게 통제하는 스파르타식으로 지도하게 되며 기존 자율야구에 익숙해져 있던 선수들의 반발을 불렀다. 팀 최고참이던 김용수가 항명하기도 했고,[69] 서용빈이 팀을 이탈할 정도로 선수단 장악에는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다.
성적만으로만 보면 매직리그 1위, 전체 4위를 기록하면서 나름 괜찮았다고 평가를 하는 쪽도 있지만, 이는 양대 리그 제도의 허점으로 인해 이득을 보게 된 것이다. 2000년 시즌을 앞두고 삼성 라이온즈롯데 자이언츠가 서로 리그를 바꾸면서 양대 리그 체제가 바뀌었고, 그 중 매직리그는 '''약체팀들의 집합소'''가 되어 버렸다. 이 상황을 적절히 이용하여 LG는 매직리그 '''1위'''가 되었지만 승률은 불과 '''0.515'''였으며 플레이오프에서 두산 베어스에 2승 4패로 패하고 만다. 여기서의 압권은 6차전으로 이광은 감독은 9회 2사까지 잘 막고 있던 김용수를 내려버리고[70] 장문석을 등판시키는 등 이해되지 않는 투수교체를 했고, 결과는 장문석이 안경현심정수에게 홈런을 맞고 패배하며 한국시리즈 진출이 좌절되고 만다.[71] 이 때문에 단장 신교식이 짤리고 최종준이 다시 단장이 된다.
이렇게 되자 LG는 2001년 시즌 '''우승을 위해''' 모든 강수를 던지니 2001년 시즌 첫 먹튀 '''홍현우[72]를 FA로 영입하고''' 한화 이글스에서 나온 댄 로마이어를 업어오는 데[73] 성공하며 타선은 그야말로 사기가 되었지만[74] 문제는 투수진. 김용수가 2000 시즌 후 은퇴하며 공백이 생겼고 전년도에 17승을 찍으며 특급 성적을 낸 외국인 투수 데니 해리거도 부진하게 된다. 이 때문에 2001년 시즌 초반 '''9승 25패'''라는 눈 뜨고 못 볼 OME급 성적을 찍자 그해 5월 이광은을 해임시키고 수석코치 겸 투수쪽 전권을 가지고 있었던 김성근을 감독 대행[75]으로 앉힌다.

2.4.2. 김성근 체제(2001.5 ~ 2002년)


김성근신윤호중무리로 '''기용'''해 불안한 투수진을 안정화시켰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팀을 4강권까지 올리는 데는 성공했지만 마지막 2%가 부족해 6위로 마감하게 된다. 참고로 시즌 마지막인 한화 이글스전에서 지면 꼴찌를 찍는 상황이었지만 이기면서 롯데 자이언츠에게 '''8888577의 암흑기를 선사해주게 된다.'''[76]
2001년 시즌이 끝나면서 구단은 중반부터 팀을 잘 추스른 김성근을 정식 감독으로 앉히고, 단장도 유성민으로 교체했다. 그러나 FA가 된 양준혁을 잡지 않았고[77] FA 보상마저 보상선수가 아닌 보상금으로만 받으면서 전력 보강의 기회마저 날려버렸다. 거기에 신인 지명에서도 이해를 할 수 없는 지명으로 인해 팜을 보강하기는커녕 오히려 삽질을 하고야 말았다. 내야를 보강하겠다고 실업팀을 거쳐 상무에서 뛰던 20대 후반의 김우석을 2차 1라운드 지명권을 써가면서 지명하였는데[78] 문제는 김우석을 지명하려고 거른 선수들이 바로 '''고영민'''과 '''조동찬'''이었다는 거다.
추가로 프런트 주도로 핵심 선수들의 연봉을 대거 깎아내기 시작하면서 유지현, 김재현, 이병규가 연봉조정 신청을 냈다. 결과는 유지현은 승리, 김재현은 삭감, 이병규는 동결로 끝났다.[79]
그리고 2002 시즌, 팀은 시즌 초 삼성에서 데려온 매니 마르티네스[80]가 부상으로 결장하고 현대에서 풀려서 영입한 톰 퀸란은 무안타 행진 끝에 방출[81], 간판 타자 이병규가 김성근 감독과 타격폼 문제로 갈등을 빚고 부진까지 겹쳐 2군으로 내려가는 등 난국에 빠지며 5월까지 중하위권을 전전[82]했고 김성근에 대한 반대 여론이 급증하게 되었다. 그러나 어깨 부상에 시달렸던 유지현이 부상에서 복귀했고 미국에서 이상훈을 다시 영입하고, 대졸 신인 박용택과 불펜의 이동현, 장문석을 기용하면서 여름부터 상승세로 전환하며 3~4위로 뛰어올랐다. 마지막에 위기가 있었지만 최종전 하루 전날 두산 베어스SK 와이번스에 '''역전패'''하며 극적으로 4강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그리고 준플레이오프에서 현대 유니콘스를 2승으로 일축, 플레이오프 KIA 타이거즈전에서 1승 2패의 상황에서 4차전 심성보의 결승타, 5차전 박용택의 활약으로 전문가들의 악평을 무색케하며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2002년 한국시리즈의 상대는 삼성 라이온즈. 전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6차전까지 끌고 왔지만 9회말 '''이승엽의 역전 3점포와 마해영끝내기 홈런'''으로 패하면서 '''준우승'''을 기록하였다.
2002년 포스트시즌의 선전으로 김성근의 입지는 탄탄해질 줄 알았지만, 11월 말 구단은 '''김성근을 해임시켰다.'''[83] 표면적인 이유는 김성근과 구단의 야구관이 맞지 않다는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정규시즌 초반의 부진으로 구단 수뇌부에서는 불만이 있었으며, 뒤에서는 한화 감독에서 물러난 이광환[84] 이미 내정해 김성근을 해임하려고 하였고 한국시리즈 준우승은 그 계기가 되었던 것이었다. 팬들 사이에서도 김성근을 두고 여러 갑론을박이 오갔으며 그 결과 다수 올드팬들과 김성근 추종자(노리타들의 프로토타입이라고 볼 수 있는)들이 팀을 떠나게 되었다.[85]
2002년 한국시리즈의 선전에도 프런트는 김성근을 해임하고, 동시에 사장 최종준도 사임하게 된다. 이를 메우기 위해 임명된 감독은 이광환, 사장은 훗날 부산 영도구청장이 된 어윤태였다.

2.4.3. 이광환 체제 2(2003년)


이광환 감독 체제로 바뀐 2003년 시즌이 시작되고, 초반에는 군입대한 서용빈[86]을 제외한 지난 시즌의 전력이 고스란히 유지되긴 했지만 SK 와이번스의 급성장, 여전히 강력했던 삼성 라이온즈, 현대 유니콘스, KIA 타이거즈에 밀려 중위권으로 밀려났고, 5월 29일에는 주축타자 이병규가 십자인대 부상으로 시즌아웃 판정을 받으며 전력에서 이탈했다.[87] 마운드에서는 선발 이승호가 두 자릿수 승수를 거두고 최다이닝, 탈삼진 1위에 올랐고, 불펜진에서는 류택현전승남이, 마무리는 이상훈이 버티며 투수진은 여전했지만 이동현장문석은 전년도 혹사[88] 여파로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이병규의 시즌 아웃으로 물방망이가 된 타선은 힘이 떨어졌고 전반기 때 간신히 지킨 4위 자리를 내주면서 8월부터 순위가 슬슬 내려가기 시작하였고 9월 들어 마무리 이상훈이 부상으로 시즌을 마감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월 중순까지 SK와 4위 경쟁하면서 버텼으나 한화와의 4연전 피스윕 기점으로 8연패를 기록하며 그나마 지키고 있던 5위자리를 내주고 전의를 완전히 상실하여 순위는 다시 올라가지 못하며 '''6위'''로 시즌을 마감하였다. 여담으로 시즌이 한창이던 2003년 7월, 이광환 감독은 구단 윗선에서 고참들인 이상훈, 유지현, 김재현에 대한 결정을 통보받았는데 그 내용인 즉 이 셋을 '''다음 시즌 전력구상에서 제외'''하라는 것. 당연히 이광환은 이에 반발했고, 시즌이 끝나자 프런트는 일본에서 코치 연수를 마치고 국내에 귀국한 선동열을 신임 감독으로 영입하겠다는 영입을 빌미삼아 그를 2군 감독으로 보내버렸고, 선동열 영입이 실패하자[89]대신 '''이순철'''을 새 감독으로 내정하면서 LG 트윈스, 아니 한국프로야구 사상 포스트시즌 연속 실패기록인 '''비밀번호 6668587667'''의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2.5. 본격적인 암흑기



2.5.1. 이순철 체제(2004 ~ 2006년)


새 감독이 된 이순철은 우선 이상훈진필중의 영입과 기타 사건 등 팀 분위기 저하 등을 이유로 2004년 1월 SK 와이번스에 양현석, 오승준을 받는 조건으로 보냈으며 FA 미아가 된 유지현 또한 SK로 이적시키려고 하였다. 2004년은 초반에 치고 나가며 줄곧 2위에 있었지만 6월부터 내팀내를 시작하며 추락하다 8월 후반에 8연승을 기록하며 다시 한번 4위싸움에 불을 지폈지만 4위가 걸린 9월 중순 5연전에서 SK와 KIA에 모조리 패한 기점으로 6연패에 빠지면서 순위 경쟁에서 나가 떨어지며 또 '''6위'''를 기록했다. 그리고 유지현이 은퇴한 데 이어 김재현은 프런트의 고관절 부상에 대한 각서에 실망하여 '''FA를 통해 SK로 가고 말았다.''' 보상선수 선발과정 또한 뒷목을 잡게 만들었는데, 당시 SK에는 정우람, 윤길현, 고효준, 윤희상, 신승현 등 많은 투수 유망주가 있었고 언론에서도 투수가 약했던 LG가 김재현의 보상선수로 투수 유망주를 지명할 거라는 예상이 나왔지만 3루수 포지션 보강 겸 SK의 전력을 약화시키겠다는 전략으로 안재만을 지명했는데 '''SK 전력에는 아무런 타격이 없었다.'''[90][91] 또한 시즌 말 병역비리 파동이 일어나면서 김광수, 이동현, 심수창 등 많은 유망주 자원들이 이탈하기도 하였다. 여기에 이동현은 2001년~2003년 간 무지막지한 혹사로 인해 토미 존 서저리를 받고 재활하게 되었으나, 이순철은 최소 1년 이상 재활을 필요로 하는 선수를 8개월도 안 되어 실전 투구를 지시하는 등 무리하게 당겨쓰려다가 재활은커녕 오히려 상태가 심각해졌고 이후 인대 재수술과 두 번째 토미 존 서저리를 받는 등 무려 '''5년간의 공백''' 끝에 돌아오게 된다.
2005년 또한 7월초에 잠깐 반짝하여 4위 탈환한걸 제외하고는 시즌 내내 중하위권에서 놀다시피하며 또 다시 '''6위'''로 시즌을 마감하였다. 이 시즌 전까지 LG는 통산 승률에서 5할 이상이었으나 이 시즌부터 5할대가 무너지며 4할대 통산 승률이 되었다.[92] 그나마 인상적인 장면이라면 SK와의 시즌 최종전에서 초대형 고춧가루를 작렬하며 플레이오프 직행 티켓을 두산에 뺏기게 한 것 정도. 2005년 11월에는 KIA와의 3대 3 트레이드를 통해 마해영을 영입했는데, 문제는 기아로 가는 3인 중 불펜의 핵심 장문석이 있었다. 장문석은 떠나면서 구단을 디스했는데, 팀을 위해 뼈빠지게 던졌지만 돌아온 결과는 토사구팽이었으니 그런 말이 나왔던 것.[93]
이순철의 마지막 해였던 2006년, 시범경기에선 1위를 했지만 정작 정규시즌에서는 부진에 부진을 거듭하여 최하위를 기록하면서 수많은 팬들의 분노를 불러왔고, 6월 3일 팬들의 대대적 시위는 그 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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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순철은 그라운드에 빠따를 던진 마지막 모습을 끝으로 6월 5일 해임되었고 남은 시즌은 양승호 코치가 감독대행으로 팀을 이끌었지만 이미 기운 팀을 되돌릴 수는 없었고 끝내 '''8위'''를 기록하게 되었다. 이는 구단 사상 최초의 꼴찌였다. 이순철 시기 3년 동안 구단 프런트는 송지만, 심재학, 박재홍 등 외부로부터의 트레이드 제안을 씹으며 전력 강화 기회를 스스로 걷어찼고, 진필중을 제외하면 FA 또한 거들떠보지 않았다. 외국인 선수도 알 마틴이나 루 클리어를 제외하면 실패에 가까웠으며 관광객 매니 아이바아마우리 텔레마코는 그 중에서도 최악이었다. 신인 선발 또한 2003년과 2005년을 제외하면 항상 똥망이었으며, 기껏 뽑아놓은 박병호, 정의윤, 우규민, 이대형, 이성열 등의 출장 기회는 제한적이었다. 현장에서는 써 먹을 선수가 없어 베테랑 위주로 돌릴 수 밖에 없었으며 자연히 전력은 막장일로로 치닫게 되었다.

2.5.2. 김재박 체제(2007 ~ 2009년)


이러한 상황에서 LG의 선택은 현대 유니콘스김재박 사단을 일부[94]만 제외하고 통째로 빼오는 것과 박명환의 영입이었다. 그러나 간판 타자 이병규주니치 드래곤스로 보내며 타선이 더 약해졌고 그 결과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2007시즌 LG를 유력한 꼴찌 후보로 찍었다. 그러나 시즌 결과는 5위로 8~9월달의 부진만 아니었다면 충분히 4강에 들 수 있었기 때문에 큰 아쉬움을 남겼지만, 이대형이 등장하면서 KBO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는 등 나름대로의 실적도 있었다.
이렇게 성적을 힘들게 끌어올렸다면, 그 다음은 전력을 더 올리기 위해 과감한 투자가 필요했지만 LG는 아니었다. 2007년의 선전에 안주해 프런트는 2007년의 전력 그대로 4강권에 도전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눈에 띄는 전력 보강은 없었다. 결국 2008년 시즌에 앞서 보강을 소홀히 한 대가는 2년만에 최하위라는 불명예스러운 성적으로 돌아왔다. 봉중근, 크리스 옥스프링을 빼면 선발투수진은 전멸했고 정재복정찬헌을 갈아넣은 불펜진은 이 둘의 선수 생명까지 같이 갉아먹고 말았다. 타선 또한 안치용과 시즌 중 들어온 로베르토 페타지니만 빼면 막장이었다.
이 때문에 구단 내부는 시즌 중 대대적인 감사를 받았으며 온갖 치부들이 밝혀졌다. 몇몇 자리만 빼고 대부분의 구단 직원들이 잘려나간 시기가 이 시기의 일. 새롭게 바뀐 프런트의 선택은 FA시장 영입이었으며 그 결과 이진영정성훈을 영입하면서 2009년을 대비했다.

2.5.3. 박종훈 체제(2010 ~ 2011년)



2.6. 암흑기의 종식과 우여곡절의 시기



2.6.1. 김기태 체제(2012 ~ 2014.5)



2.6.2. 양상문 체제(2014.5 ~ 2017)



2.6.3. 류중일 체제(2018 ~ 2020)



2.6.4. 류지현 체제(2021 ~ )



3. 역대 시즌




3.1. MBC 청룡



3.2. 2000년대 이전



3.3. 2010년대



3.4. 2020년대



3.5. 2030년대




[1] 1990년 한국시리즈 우승은 이 시기의 선수들이 주축이 되어 '청룡의 우승'이라고 봐도 된다.[2] 그럴만한 이유는 1986년과 1987년 후기리그에서는 비록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지만 선두다툼을 시즌 막판까지 끌고갔기 때문이기도 했다. 각각 OB 김형석의 최동원 상대 마지막 운명의 한 방과 김건우의 교통사고 부상이 겹쳐서 포스트시즌이 아쉽게 좌절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전기/후기 중 한 번은 2위 안에 들어야 포스트시즌 진출이 가능했고 현재와 같이 3위나 4위로는 포스트시즌에 진출할 수 없었다. 포스트시즌만 못 가서 그렇지 5할 승률 이상 시즌도 8시즌 중 4번으로 적어도 중간은 했던 팀이었다.[3] 언론에서 하도 한국의 양키스라고 보도하는 바람에 최근의 LG팬들은 이 별명을 싫어한다.[4] 당시 사장 어윤태의 '''"이건 김성근의 야구지 LG 야구가 아니오."'''라는 멘트는 당시 프런트와 김성근의 골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보여준다.[5] 이 시기 금지어의 행태는 KTF 매직엔스(現 kt 롤스터) 시절의 김철 감독과 더불어 삽질의 대명사로 남는다.[6] 다만 이때의 평가는 의외로 좋았던 편. 전년도보다 더 약해진 전력임에도 성적이 좋아졌기에 팬들은 다음 시즌을 기대하게 했지만, '''더 질러야 할 상황에서 프런트는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고 그 결과는...''' 딴 거 다 필요 없이 큰 돈 주고 산 박명환이 2008년에 그렇게 무너질 줄 누가 알았겠는가...[7] 하지만 LG그룹은 이걸 광고로 사용했다.[8] 그러나 KBO 리그에서 자생으로 운영되는 구단은 전무하며 그 중에서도 롯데는 2019년 선수단 연봉 전체 1위를 기록했다.[9] 대표적인 예가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현 구단주 피터 앙헬로스. 홈런과 거포에 환장해 팀의 밸런스를 무너뜨렸다.[10] 백순길 단장은 단장을 맡기 이전에는 LG그룹 고객서비스 부문. CS(고객 만족) 경영팀장을 역임한 바 있다. 이 경력 때문인지 팀 케미스트리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는 부분을 차단하는 데 능하다는 평을 받는다.[11] GS스포츠의 운영은 성적보다 관중동원 같은 마케팅에만 치중해서 해당 팀 팬들에게 평가가 매우 안좋다.[12] 업셋 당해서 3위[13] 4위[14] 팀 평균자책점 1위를 하고도 가을야구를 못 했다는 점을 기준으로 두면 사실 최초는 84년의 OB다. 출범 원년부터 84년까지는 전/후기 1위 팀들로 한국시리즈만을 치르고 끝이었으며, 이 시즌의 OB는 전후기 통합승률 1위에 시즌 팀 평균자책점이 '''2.53'''으로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는 1위 기록이지만 전/후기 모두 2위에 그쳐 기회 자체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15] 안타까운 점은 4경기에서 3경기가 역전패였으며 나머지 1경기도 4:4로 맞서던 8회말 2실점하며 무너져 지독한 대전 징크스를 이어갔다. 대전구장 19연패의 악몽은 8월 17일 이용철의 호투로 5:2로 승리하며 마침내 벗어났다.[16] 빙그레는 MBC 청룡인 1988년부터 1992년까지 5년 연속 LG를 상대로 절대우세 내지 압도했다. LG는 1988년부터 빙그레에 6승12패, 3승1무16패, 7승13패, 3승1무14패, 3승15패로 도합 22승2무70패, 승률은 .239에 불과할 정도로 매우 약했다. 이때 대폭 깎였던 승패마진과 2000년대 후반 류현진으로 인해 LG는 2020년이 끝난 현재까지도 통산 한화전에서 4할대 후반으로 열세에 놓여있다. 심지어 약체인 삼청태를 겪었던 삼청태현도 한화전 통산 승률은 5할이 조금 넘는다.[17] 1위 LG에서 4위 삼성까지의 승차가 3경기 안일 정도로 치열한 선두 다툼을 펼쳤다.[18] 다만 MBC 청룡 시절에도 1983년 후기리그 우승과 함께 전후기 통합 승률 1위를 기록한 바 있다. 단일리그 체제에서 정규시즌 첫 우승은 맞다.[19] 그해 포스트시즌은 모든 시리즈가 스윕승이었고 휴식일이 길어 체력적인 영향은 덜 받았다. 다만 상대전적에서 LG의 13승7패 절대우세로 LG의 우세가 조금 더 예상되었다.[20] OB베어스가 원년인 82년에 한국시리즈 우승을 했지만 그당시에 연고지는 대전이었다.[21] 백인천의 증언에 따르면 MBC 시절 맺은 감독 계약은 표면상으로는 2년이었지만, 실제로는 1+1 계약이었다고 한다. 백인천 본인은 첫 해 통합우승을 차지했으니 당연히 좋은 조건에 재계약할 줄 알았는데, 프런트 직원에게 변호사의 공증을 받은 1+1 계약서까지 들이밀었는데도 프런트는 사태를 무마시키려고 하기는커녕 오히려 "백인천이 미국인 코치 영입에 반발해서 깽판친다"고 언론플레이를 했다고...[22] 투수쪽에서는 전년도 선발의 축들이었던 김태원과 문병권이 부진했으며 정삼흠, 김용수, 김기범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심했다. 그리고 시즌 중 정삼흠은 빈볼시비로 10경기 출장 정지를 먹기도 했다. 타선에서는 윤덕규와 노찬엽 정도만 3할을 치며 분투했을 뿐 나머지는 기대 이하였다. 특히 불과 전년도 신인왕에 골든글러브를 수상한 김동수는 1할대로 부진했다.[23] 아니나다를까 윤덕규는 트레이드 되자마자 다음날 LG를 상대로 끝내기 안타를 쳤다. 물론 박준태도 얼마 후 LG에서 끝내기를 쳤다.[24] 92시즌 4승14패, 3승15패로 굉장히 약했던 롯데-빙그레와의 경기에서 10승8패로 우위를 차지하며 상대전적을 뒤집었다.[25] 초반만 되면 잘 치는 박준태가 초반 버닝했고, 김상훈은 전반기 안타&타점 1위였다. 후반기에는 이 둘의 타격감이 확 떨어지면서 LG 타선이 물타선이 되었고 이로 인해 LG 성적도 같이 추락했다.[26] 이 3연전에서 스윕승을 거뒀고, 마지막 경기는 3:1로 지던 경기에서 9회말 6점을 내며 역전승했는데 3:3에서 대타 최훈재가 상대 마무리 김상엽을 상대로 끝내기 만루홈런을 쳤다.[27] 아쉽게도 8월 19일에 14승을 기록한 다음 한달 넘게 승리를 기록하지 못해 결국 다승왕을 이해 LG 상대로만 6승을 기록한 조계현에게 내줬다.[28] OB보다 순위가 낮았던 유일한 날이 시즌 최종전이었다. 시즌 막바지까지 OB는 후반기 내내 안정적으로 4위를 기록하고도 LG와 3경기차 이내를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LG가 조금만 더 후반기에 분발했더라면 준플레이오프는 없었고 OB의 가을야구 실패 비밀번호를 7자리로 만들뻔했다.[29] 꼴찌 태평양전에서 타선이 물타선이 되며 상대전적 9승1무8패로 유독 고전했는데 해태는 그 태평양을 17승1패로 때려눕혔다.[30] 김태원이 2승의 주인공이 되었다.[31] 플레이오프 5차전에서 나온 이 뇌주루로 인해 방출대기명단에 올랐지만 1년뒤에 그 한타석에서 보여준 엄청난 한방 덕분에 그때의 뇌주루는 묻혔으며 기억하는 팬들 또한 많지 않다. 그리고 선수생활도 몇년 더 연장할 수 있게 되었다.[32] 만약 뇌주루가 나오지 않았다면 LG가 최초로 리버스스윕이 가능했었을지도 모른다.[33] 서용빈은 신인 최초 사이클링히트를 기록하면서 2017년 이정후가 이 기록을 깰 때까지 신인 최다안타와 함께 3할 타율을 기록했다. 류지현은 3할 15홈런 51도루를 기록하며 신인왕을 수상했다. 김재현은 21홈런 80타점 21도루로 홈런 3위, 타점 2위에 오름과 함께 최연소 20-20을 기록했다.[34] 포수 김동수, 1루수 서용빈, 2루수 박종호, 3루수 한대화, 외야수 김재현 [35] 선동열이 선발등판한 해태를 상대로 완봉승을 기록하기도 했다.[36] 홈경기와 원정경기 내야의 구성원이 완전히 달라졌다. 홈경기는 3루 송구홍(지타 한대화), 유격 유지현 2루 박종호이지만 원정경기는 3루 한대화 유격 이우수 2루 이종열이였다. 이로 인해 홈경기와 원정 경기 간 편차가 심했다. 롯데 원정에서 1승8패로 크게 부진했다.[37] 그나마 5선발 듀오였던 박철홍과 오희주가 각각 9승과 3승으로 기대 이상의 모습이었고 부상으로 빠져나간 인현배의 자리를 채웠다.[38] 조현은 전반기 9홈런으로 맹활약했으나 후반기 어퍼스윙의 약점이 노출되며 후반기 급락했다. 심재학은 그나마 타율에 비해 볼삼비와 출루율은 좋았는데 당시에는 타율이 낮으면 저평가받는 분위기였다.[39] 스탯티즈 기준으로 팀내 야수 WAR 1위가 방위병 유지현일 정도로 타선이 약화됐다.[40] 상대전적에서 11승1무6패로 압도했다.[41] 이광환 감독의 잘못된 운영이 없었다면 LG는 2연패를 달성했고 왕조로 이어질수 있었을지도 모른다.[42] 2019년에 SK 와이번스키움 히어로즈에 7.5게임차, 두산 베어스에 9게임차로 앞서고 있다가 두산 베어스에게 따라잡혀 승차는 없었지만 상대전적에서 열세로 인해 2위로 밀려났고 플레이오프에서 키움 히어로즈에게 스윕패 당하면서 1위 → 3위 추락이 재현되었다.[43] 마무리로 전향했다.[44] 특히 1997년에는 504 대참사가 일어났다![45] 손혁은 시즌 막판 3차례 등판했다.[46] 유지현은 타율 0.249로 부진했다. 그나마 좋은 선구안으로 출루율은 1할이 더 높았다.[47] 반면 해태는 4월까지 꼴찌였으나 방위병이었던 이종범이대진이 제대한 뒤 탄력을 받아 3년만에 우승을 기록했다.[48] 한대화의 노쇠화 때문에 한화의 황대연을 트레이드로 영입했지만 별다른 효과는 없었다. 그리고 한대화는 이 해를 끝으로 쌍방울로 트레이드되었다.[49] 권용관, 최동수, 신국환, 허문회 등 무명의 선수들이 이때 기용되기 시작됐다.[50] 당시 최하위는 신인드래프트에서 최고 신인 2명을 우선 지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51] 공익판정을 받아 1997년과 1998년은 군복무에 나섰는데 이후 박철홍의 아버지는 뇌물을 주고 공익 판정을 받아냈다는 혐의로 2000년 구속되었다.[52] 은퇴경기인 롯데전에서 5이닝 1실점했음에도 패전 기록을 하나 더 추가했다.[53] 전반기를 1위로 마쳤으나 7월 이상훈과 최향남이 빠진 사이 마운드의 붕괴로 7승12패에 그쳤다.[54] 2년 전 3위팀 롯데에 6승12패로 호구잡힌 것처럼 3위팀 쌍방울을 상대로 6승12패로 매우 약했던 점이 한국시리즈 직행에 실패한 원인이 됐다. 전주구장에서 14연패의 악몽에 시달렸다가 안재만의 결승타로 탈출했다.[55] 4월 첫 만남에서 3경기 연속 연장승부에 이종범의 끝내기 실책, 신국환의 끝내기 안타 등 역전경기를 찍더니 6월에는 김응용 감독 참외 사건이 나온 경기에서 양팀의 마무리투수이자 구원 1-2위였던 이상훈과 임창용이 나란히 불쇼를 펼친 끝에 LG가 이긴 경기도 있었다. 9월에는 9회 2사에서 허문회의 출루 후 이병규의 동점타로 연장에서 역전한 경기도 있었다.[56] 주니어 펠릭스도 뽑았지만 연봉 협상에서 틀어지며 앤더슨만 계약했다.[57] 이 해 프로야구 성적은 외국인선수의 활약이 크게 좌우했는데 조 스트롱과 스캇 쿨바가 활약한 현대는 전준호의 부활과 신인 김수경의 입단, 박경완, 이명수 등의 영입이 더해져 리그에서 압도적인 성적을 냈다.[58] 서스펜디드 경기를 치른 끝에 졌다. 2020년 한화가 두산과의 서스펜디드 게임에서 18연패를 끊으면서 쌍방울과 LG의 서스펜디드 경기가 기사로 다루어지기도 했다. 17연패의 쌍방울이 서스펜디드경기 전에 1패를 추가한 상황에서 역사상 마지막으로 치른 경기인건 맞는데 공식 기록상으로는 LG와의 경기를 통해 17연패를 끊고, 마지막 경기가 아니게 됐다. 만약 LG가 이겼다면 쌍방울의 기록은 19연패였다.[59] 팀내 유일한 10승 투수.[60] 당시, 40 가까이가 될 무렵인데도 불구하고 20세이브 이상을 거뒀다.[61] 1차 지명으로 뽑은 신인 선수여서 기대가 더 컸으나 최종 성적은 '''147⅓ 이닝 9승 15패 방어율 6.17'''로 망했다.[62] 애초에 타자가 쓰는 어깨 근육과 투수가 쓰는 어깨 근육 부위 자체가 다르다고 한다. 평소에 쓰지 않았던 근육을 쓰게 되니 부상이 찾아올 수밖에 없는 것. 실제로 뒤늦게 투수로 전향한 권준헌 역시 투수 전향 초반에는 어깨가 싱싱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이후 부상으로 고전하며 얼마 가지 못했다.[63] 펠릭스와의 재계약, 김상호 영입으로 심재학 자리를 빼앗고 투수 전향하지 않으면 트레이드할 것이라고 협박했다. [64] 둘 다 20홈런 이상 치지 못하였다. 당장 타팀은 우즈, 샌더스, 로마이어, 호세, 데이비스, 스미스 등이 홀로 30개씩 쳤지만...[65] 아이러니하게도 전임 감독 천보성과 후임 감독 이광은은 2012년 입시비리 당시 혐의가 드러나면서 나란히 연루되고 만다.[66] 당시 양준혁을 상대로 해태에 트레이드된 손혁은 이에 반발하면서 트레이드를 거부,(당시 김응용 감독이 있던 해태의 쌍팔년도식 덕아웃 문화와 열악한 인프라 등으로 인해 해태로 트레이드되는 걸 거부했다는 말이 있다.) LG와 해태 양쪽 구단에 은퇴를 선언하고 잠적해버리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고 만다. 결국 해태에서 임의탈퇴 공시된 뒤 미국으로 건너가 1년 동안 야구를 쉬다가 2001년 김성한 해태 감독의 요청으로 인해 임의탈퇴가 해제되며 해태로 복귀했으나 이미 야구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렸는지, 예전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고 결국 두산으로 트레이드된 뒤 얼마 안 되어 30대 초반의 이른 나이에 은퇴하고 만다. 어찌보면 트레이드 하나가 선수의 인생을 꼬이게 만든 셈.[67] 이광은의 이러한 정책 때문에 피를 본 것은 안상준 등 한창 자리잡고 있던 유망주들이었다.[68] 이후 심재학은 현대로 떠나 두번째 우승에 일조했고 2001년 두산으로 건너가 3할 4푼대 타율과 골든글러브를 찍는 등 커리어 하이 시즌을 보냈고, 2년 연속으로 우승을 맛보게 된다. 반면 심재학의 맞트레이드 상대였던 최원호는 LG의 마지막 한국시리즈인 2002년 한국시리즈에서 삼성 마해영에게 역사적인 끝내기 홈런을 맞은 투수라는 임팩트가 큰 데 이어, 이후 LG에서도 2005년을 제외하면 별 활약을 하지 못하게 된다. 거기에 현대 또한 심재학을 1년간 잘 기용하면서 한국시리즈 우승까지 했고 트레이드 카드로 활용해 두산에서 '''심정수'''를 받아오는 등 결과적으로 이 트레이드는 현대의 압승으로 끝나게 된다.[69] 이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김용수는 기량이 여전히 남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2000년 시즌 후 은퇴하고 만다.[70] 여기에는 두 가지 정설이 있는데 첫번째는 이광은 감독과 김용수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아서 잘 던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내려버렸다는 것과 두번째는 시리즈 내내 부진했던 장문석의 사기를 복돋아 주기 위해 그랬다는 설이 있다. 이후 김용수가 2000년 시즌을 마치고 은퇴하게 됨에 따라 이 경기는 김용수의 현역 마지막 경기가 되고 말았다.[71] 특히 심정수는 2차전까지 부진 했는데 심정수가 때린 홈런은 모두 승부를 짓는 홈런들이였다.[72] 이 때 까지만 해도 LG는 그가 해태에서 했던 만큼은 아니여도 그래도 평타 이상을 해줄거라 믿고 영입을 했다. 작년도 신규 창단팀이였던 SK가 돈을 더 많이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단지 팬이 있어야 야구를 즐기고 싶어서 LG를 선택하였다. 또한 부진 하였을 때 잠실에서 출장하면 스트레스가 잘 풀리기에 좋았다 라고 언급했지만 그 결과는...[73] 당시, 유승안 한화 이글스 수석코치에 따르면, 로마이어가 아예 혼자 선수들 타격 지도까지 했다고... 로마이어가 그만 두지 않으면 유 수석코치 본인이 그만 두겠다고 응수를 했었다.[74] 이 당시 언론에서는 양'''준'''혁-로'''마'''이어-김'''재'''현-홍'''현'''우 네명의 이름 두번째 글자만 따서 '준마재현'이라고 부르며 타선만큼은 '''우승권'''이라고 평가했다. 게다가 상위타선에는 발빠르고 정교한 유지현과 이병규도 있었고. 그러나 막상 시즌 들어가니 양준혁만 대활약을 했고 김재현도 평타 이상으로 쳤지만 로마이어는 코칭스태프와의 불화로 시즌 중반 퇴출됐고 홍현우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75] 하지만 김성근은 리그 전반기 시점에 홈런에서 10위권 및 타점 1위를 찍던 로마이어를 퇴출한 우를 범했다.[76] 여담으로 2001년 롯데의 승률은 0.457이며 KBO리그 역대 최고 승률의 꼴찌이다.[77] 다만 이것은 양준혁이 선수협 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었던 것과 본인이 LG와 우선협상을 하던 중 LG가 제시했던 금액보다 훨씬 높은 금액을 불러버려 협상을 진작에 파토내버린 것도 있다. 김성근에 따르면 구단이 양준혁을 꼭 잡아야 한다면서 내치지 말라고 그렇게 반대를 하였다.[78] 2000년까지 삼성 2군 감독을 했었고 2001년 초까지 LG 2군 감독을 했던 김성근이 상무에서 군 복무 중이던 김우석을 높게 평가하면서 강력하게 뽑아 달라고 했다는 말이 있다. 문제는 김우석이 수비는 높게 평가받았으나 타격은 2군 무대에서도 좋지 못한 편이라서 2차 1라운드에서 뽑힐 정도는 아닐 수준이었다는 것.[79] 유지현은 프로야구 역사상 유일하게 연봉조정신청에서 선수가 구단을 이긴 케이스이지만, 이로 인해서인지 구단에 찍혀 반 강제성 은퇴를 하고야 만다. 김재현은 이 후 고관절 부상과 각서 사건으로 인해 아시다시피... 이병규는 훗날 FA가 되자마자 뒤도 안돌아보고 NPB 러브콜에 LG와 협상도 제대로 하지 않고 주니치 드래곤즈와 계약해버린다.[80] 외국인 최초 사이클링 히트를 쳤었고 발 느린 그 전 해 삼성 선수들 중 팀 도루 1위였다.[81] 이 선수는 현대에서 제계약 거부 당시 은퇴 준비였는데 LG 수뇌부에서 그의 파워를 보고 1시즌을 같이 하자고 불렀었다. 명백한 LG 프런트의 삽질.[82] 이병규에게 있어서 생애 첫 2군행.[83] 그러나 이후 10년 암흑기원인누구였는지 생각해보면 결과적으로는 좋은 결정이었다.[84] 이 당시 한화 감독을 맡고 있었던 이광환은 성적에 상관 없이 다음 시즌인 2003년부터 한화 구단이 차기 감독인 유승안을 내정하려는 사실을 알게 되자 2002년 후반기에는 거의 태업에 가까운 경기 운영을 보여주었다.[85] 이상훈이나 김재현 등의 선수들이 이순철 감독 시절 감독 및 프런트와 갈등을 빚다 팀을 떠나면서 잠시 그들이 자리잡았던 SK 와이번스로 올드팬들이 어느 정도 이탈했다가 김재박 재임 시기 돌아오기도 했다. 단, 김재박호 시절에는 FA 영입이 잦고 유입이 많았지만, 대신 개인 성적들은 좋고, 성적이 별반 다름 없어서 팬들이 고통을 받았었다.[86] 이 때, 한국 나이 32살로 매우 늦게 입대했다.[87] 98년 2년차 징크스를 제외한 역대 시즌에서 가장 불운한 커리어 로우였다.[88] 둘 다 김성근 감독의 눈에 걸려 죽어라 던졌다. 중간 계투에도 불구 하고 '''100이닝'''을 돌렸으니...[89] 이 당시 잠실 라이벌 팀 두산 베어스도 선동열을 차기 감독으로 영입하기 위해 9년 간 두산 감독을 맡아서 두 번의 우승을 이뤄낸 적 있던 김인식 감독을 사퇴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선동열은 스승 김응용이 있는 삼성 라이온즈의 수석코치로 가게 되며 결론은 두 구단 모두 애꿎은 감독을 내쳐버린 셈이 되었다. [90] 오히려 SK는 안재만을 LG에 내주자 롯데에서 FA 미아가 되어 나온 전천후 내야수 김태균을 사인 앤 트레이드 방식으로 영입하여 3루수 공백을 메웠고, 이후 1차 지명으로 입단한 최정이 3루수 자리를 차지하였다.[91] 당시 LG가 지명할 거라고 예상했던 투수들인 정우람, 윤길현, 고효준, 윤희상, 신승현은 알다시피 몇 년 후 SK의 주축 투수가 되었고, 반면 안재만은 LG에서도 부상 등으로 별 활약을 보이지 못하고 얼마 안 가 은퇴하고 말았다.[92] 2004년까지 LG의 통산승률은 두산보다 앞서있었다. 2005년을 기점으로 LG와는 반대로 두산은 통산 5할대에 진입했다.[93]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장문석은 KIA로 이적한 후 팬들로부터 팀 분위기를 저해한다는 비판을 받게 되었으니… 특히 김진우의 방황에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까였다.[94] 김시진, 이명수, 염경엽이 현대에 남았고, 염경엽은 현대 해체 후 LG로 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