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 유신/조선과 일본의 차이점

 


1. 개요
2. 개혁 세력의 집권 여부
2.1. 일본
2.2. 조선
3. 근대화 기반 마련
3.1. 지리적 배경
3.2. 일본
3.3. 조선
4. 외국어 통번역
4.1. 일본
4.2. 조선
5. 정치 구조
5.1. 일본
5.2. 조선
6. 시기적인 행운
6.1. 일본
6.2. 조선
7. 국부(國富)와 세금 제도
7.1. 일본
7.2. 조선


1. 개요


일본분명한 명분, 방향성(화혼양재, 급진 개혁), 추진력을 지니고 개혁을 시도한 반면, 조선은 꽉 막혀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뒤늦게 크게 당하고서야 불리한 조건으로 개항을 시도한 것이 두 나라의 운명을 갈랐다고 보는 의견이 있다.
물론, 조선일본의 운명을 단순히 개방 시기의 차이만으로 분석하려는 것은 무리이고, 다수의 요인들이 수백 년간 누적된 결과의 영향도 컸다. 조선보다 남서방향으로 돌출된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서구 세력과의 접촉이 조선보다 훨씬 빨랐으며, 따라서 서구 문물에 대한 이해도도 당대의 조선과 비교하면 월등하게 높은 상태였다.[1] 당시 막부의 사실상 수도였던 에도는 막부의 정책으로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여 인구가 100만에 육박하는 당시 세계에서 손꼽히는 대도시 중 하나였으며[2] 임진왜란 이후 발전한 자기 생산 및 은광 개발 등 상공업이 급속도로 발전하여 경제적으로 획기적으로 번영하고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인구증가도 꾸준했다. 물론 19세기까지는 공식적으로 나라의 문을 닫아왔었으나, 어쨌든 네덜란드와 교류을 이어왔고(나가사키에 인공섬 데지마 설치해서 사실상 무역특구 조성) 그것도 단순히 몇몇 사치품을 들여오는 수준이 아니라 정밀한 인체골격도를 일본어로 번역하고 가라쿠리 로봇을 만들었으며 서양의학을 가르치는 학교(난숙)를 설립했으며 도자기우키요에같은 일본의 문화예술이 유럽으로 건너가 자포네스크를 유행시키는 수준이었다.
조선은 그에 비하면 서양과의 직접적 교류는 아예 전무했으며[3] 조정은 외척에 의해 시달려 제 기능을 하지 못했고 사회적으론 빈곤과 삼정의 문란에 의한 반란, 신분계층의 동요가 지속되어 비교적 안정되었던 일본의 사회와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단적으로 일본은 이미 서구와 '''직접적인 교류를 통해 외교 경험을 쌓아왔으며,''' 이를 바탕으로 급동하는 제국주의 시대를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우리도 일찍 문을 열었으면..."하고 아쉬워 하지만 '''그냥 문 연다고 해서 근대화되는 것이 절대 아니다.'''' 문을 여는 순간 되돌아갈수 없을 정도로 쏟아져 들어오는 어마어마한 대격변을 견뎌낼 수 있는 내공이 있어야 하는 것이며[4] 서구 열강이 각종 문물을 공짜로 베푸는 것도 전혀 아니다.[5] 당장 일본만 해도 19세기 당시 인구가 조선의 2배에 달하고 상공업의 발달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격차가 벌어져 있었음에도 에조 공화국내전을 치르고 러일전쟁으로 파산위기에 처했다가 제 1차 세계대전으로 구사일생하고 연이어 벌어지는 칼부림과 암살 등 내/외부적인 위기가 엄청나게 많았고, 결국 계속되는 위기 끝에 제 2차 세계대전에서 한계에 도달해 몰락한 것이다.[6] 조선보다 자체 여건이 훨씬 우수했던 일본도 근대화 과정에서 몇 번이나 고꾸라질 뻔하다 겨우 성공했는데, 조선이 과연 문을 일찍 열었다고 해서 근대화에 성공했을지 의문이다.[7] 즉 개항을 얼마나 빨리 하냐가 아니라, 얼마나 개항을 위해 적극적으로 준비했냐가 관건인 것이다.
한국인의 '일본은 빨리 개혁개방 했다'라는 인식 자체가 잘못된 것이, 일본은 원래 조선처럼 쇄국을 했고 흑선개항, 즉, 무력을 통해 미국에게 강제로 개항당한 것이다.[8]

2. 개혁 세력의 집권 여부


어떻게 보면 '''가장 중요한 요인'''. 즉, '기존의 집권자들이 개혁 의도가 있었는가', 혹은 그러지 않았다면 '개혁 의지를 가진 이들이 수구 세력을 몰아내고 집권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2.1. 일본


일본은 적어도 위기 상황이라는 현실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일본이나 조선이나 서민이 무지몽매한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적어도 일본의 집권층은 국제정세를 직시할 줄 알았다는 것이다.
17세기 에도 시대부터 막부네덜란드와의 정기적 교역과 그 무역항구인 데지마의 상관을 통해 서구의 정세와 기술, 문화에 대해 정기적으로 보고를 받고 있었다. 이 때문에 다른 어떤 아시아 국가들보다 빠르고 정확한 서구의 정보를 접할 수 있어 이성적인 판단이 가능했다. 봉건적 구체제로서 근본적인 개혁에 한계를 보였던 에도 막부사쓰마, 조슈 등의 웅번의 실력자들과 하급 무사들이 뒤엎는 데 성공, 구체제 자체를 갈아엎었다. 이 과정에서 결과적으로 막부라는 구체제를 갈아엎으면서도 훨씬 더 구체제의 유산인 천황을 전면에 내세웠다. 이유는 그 천황이 자신들의 집권의 명분을 가져올 수단이었기 때문이다.[9]
다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메이지 덴노가 서구에 우호적이지 않아서 잘못하면 개혁의 속도가 지지부진해질 수도 있었다.[10] 사실 신정부 측의 각 번들도 무진전쟁 이전 까지는 존황양이[11]를 주장하거나 막부 편이었지만, 시모노세키 전쟁으로 열강에게 호되게 당한 이후로는 전부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일본을 개혁하는 것으로 생각이 바뀌었다. 그러면서도 신정부는 현명하게도 존황을 계속 유지하여 천황의 권위를 인정했고, 실질적인 권력은 유신을 이끈 신정부의 실력자들이 그대로 가져갔다. 이들은 신정부가 제대로 자리를 잡은 뒤 작정하고 총체적인 근대화를 진행시켰다.[12] 천황이라는 민심 장악 수단과 실제 성과가 이어져 불만도 거의 없었고, 그나마 당시 대표적 보수파인 사이고 다카모리의 입장도 너무 급한 개혁과 사무라이들의 집단 실권만 막자는 입장이었지 적극적 개혁 자체는 찬성하는 경우였다.
정리하자면 실제 역사속의 막부 타도는 근대화를 추진하는 신세력이 구세력인 막부를 몰아낸 사건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서양에게 굴복하고 일본을 개항한 막부에 분노한 존황양이[13] 세력이 일으킨 것이다. 심지어 사쓰마 번주의 경우는 그냥 자기들이 새막부를 열고 싶어했다는 평가까지 있을 정도다. 다만 그 존황양이파가 열강의 힘을 직접적으로 체감한 후 '''매우 재빠르게 태세전환'''하여 급진적인 근대화를 추진하게 되었던 것. 이 때문에 신정부 수립 이후에도 내부적으로 잡음과 숙청이 끊이지 않았는데, 존황양이 사상이라는게 고위층에게는 그냥 막부와의 정치싸움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명분이었지만 하급 사무라이들의 경우에는 진심이었기 때문이다. 존황양이 지사들 사이에선 '''신주일본을 외국에 바친 막부를 타도한다고 해서 충성을 바쳤는데 이놈들이 막부랑 다를 것 없이 서양에 고분고분 하네?''' 하는 불만이 팽배했던 것.
결국 메이지 유신의 명분은 왕(천황, 사실상 일본 그 자체)을 드높이고, 외세(오랑캐, 서구)를 배격한다는 존황양이(尊皇攘夷)[14]였다. 이를 위해 일본의 정신(혹은 고유한 것)을 바탕으로 서양의 기술을 활용한다는 화혼양재(和魂洋才)를 기본 골자로 하여 근대화를 시작하였다.[15] 이후 급진파와 온건파가 알력 다툼을 하는 양상이 된 것이다.
지리적으로 열도 동부를 기준으로 태평양과 접하고 그 넘어로 바로 미국 서부까지 마주하고 있으며 서양인들 또한 이러한 지리적 특성에 주목하여 일본이라는 나라에 관심을 두기도 하였다. 게다가 섬이라는 독립적인 지형이나 중국을 숭상하는 영향이 조선에 비해서 덜 하였다는 점도 영향을 주었다. 무엇보다 일본은 지리적으로 백두산이나 압록강을 경계로 중국 대륙과 경계를 하면서 그로 인해서 중국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아온 조선과는 다르게 섬이라는 독립적인 지형으로 인해서 중국 대륙과도 바다 사이로 떨어져있으며 이러한 지형의 혜택과 태평양을 마주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미 해외로 뻗어나갈 수 있기도 하고 국제적으로도 섬이라는 특성과 태평양과 접한 섬나라라는 특성 때문에 서양인들 입장에서는 밀접하기가 유리해보일 수 있다.

2.2. 조선


'''"이른바 미리견(彌利堅)은 부락만 있을 뿐인데, 그들 가운데 워싱턴이라는 자가 있어, 도시를 개척하고 터를 다졌으며, 바다 밖 양이들과 서로 통교하니…이들은 바다를 왕래할 때 약탈하는 습성이 있고, 해적과 다를 바 없습니다…."'''

고종의 질문에 대해, 영의정 김병학이 답한 내용. 당시 조선 조정의 좁은 국제적 식견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문답이다. '''단''', 저기서 나오는 '부락(部落)'이라는 단어는 미국의 개별 주(State) 즉, 행정구역상의 주(州)를 뜻하는 것으로 정말로 촌락을 의미하는게 아니다. 실제로 국역본이 아닌 원문과 김병학이 인용한 《해국도지(海國圖誌)》의 내용을 살펴보면 부락(部落)의 진짜 뜻을 알 수 있다. 과연 신미양요 시점에서 조선은 미국을 몰랐는가?

당시 조선에서는, 세도정치기의 문벌 가문들은 국제정세에 대해서 별반 지식, 관심, 대책이 없었고, 이들의 대외관은 중화사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역외 문화를 전부 오랑캐의 문화로 보는 그것이었다. 이는 명나라의 멸망 이후 조선을 '우월한 중화 문명의 유일한 계승 국가'라는 '소중화(小中華)'론의 대두가 큰 부분을 차지한다. 이 소중화론은 거슬러 올라가면 명나라의 멸망 이후 노론의 거두인 우암 송시열북벌을 외치면서 제기된 것이 본격적인 소중화론의 시작으로, 중국의 정통 왕조인 명나라를 계승한 것은 오랑캐청나라가 아니라 바로 조선이라는 논리였다. 이는 송시열의 유명으로 제자들이 만동묘를 세운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만동묘는 '명나라 황제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즉, 이제 중원에서 유일한 문명이었던 중화가 파괴되고 야만적인 오랑캐가 들어섰지만, 그들은 정통이 아니며 조선만이 유일하게 중화(문명)의 정통을 이었다는 선언이었다. 이러한 사실들을 미루어 볼 때, 소중화론의 가장 큰 원인은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명나라의 멸망과 북벌론 즉, 인조효종 대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 뒤, 영조대에 이르면 담배고구마, 감자가 들어왔고[16] 안경[17], 망원경, 지도, 자명종[18], 서구의 책자까지 다 들어왔다.[19] 하지만 이런 선진 문물에 관심을 가진 것은 정치 권력과는 인연이 없던 일부 실학자들 뿐이었고, 정치 권력을 쥔 안동 김씨는 전혀 선진 문물에 관심이 없었다. 이 때부터 이미 싹수가 보였던 셈이다.[20]
흥선대원군세도정치를 타파하고 각종 개혁을 시행하며 내치에는 힘을 썼지만 권력의 중앙집권화에 너무 신경을 쓰느라 서양에는 거부적인 태도를 드러냈다. 그렇다고 흥선대원군이 아예 처음부터 반대한 것은 아니다. 흥선대원군이 대외개방을 염두에 둔 흔적은 남아있으나(천주교 신자를 통해 프랑스와 접촉 시도), 두 번의 양요오페르트 도굴 사건을 겪으면서 쇄국 정책이 정점에 이르렀다.
당시 흥선대원군경복궁 중건으로 노동력이나 돈을 반강제로 걷거나 서원을 철폐하는 등 오로지 중앙집권화를 위한 행동을 위주로 했다. 물론 근대화에는 강력한 중앙집권 권력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흥선대원군은 중앙집권화 자체에만 신경썼지 더 나아가 근대화를 추구한 것은 아니었다. 서원 철폐 등 백성에게 이득이 된 정책도 없지는 않았지만, 경복궁 중건을 보면 진정으로 민심을 신경쓰는 것도 아니었고 서원 철폐는 백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냥 원칙대로 시행한 정책이었을 뿐이다.[21]
흥선대원군 실각 이후에 고종은 왕이 된 이후에도 명성황후와 함께 매관매직에 빠지긴 했지만 고종 또한 매우 많은 노력을 하였다. 특히 군사 관련해선 그야말로 엄청난 노력을 가했다. 거기에 프랑스는 조선의 후견국을 자처하며 갖은 노력을 다해줬다.[22]특히 육군은 프랑스식과 미군식을 가저오기도 했다.[23] 하지만 조선에게 주어진 시간은 매우 적었고.[24] 조선과 비교도 못할정도로 서구의 간섭도 별로 없이 해왔던 것이다.[25] 그니까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 무엇보다 대한제국이 본격적으로 공장을 짓고 자체적인 소총 생산을 시작한때가 1905년 그니까 을사조약때다. [A]결국 뭔갈 제대로 해볼려고 한 시기에 을사조약 맞고 5년 정도밖에 안되는 시간이 남지않게 되버렸다. 결국 조선은 근대화에 대해 엄청난 노력을 행했지만 시간이 너무나 부족했다.[26] 결국 조선은 매우 적었던 세금[27](이건 사실 체급의 차이가 크지만.)과 너무 적었던 시간이 매우 컸다.
당시 근대화를 이끌어갈만한, 이른바 개화파라 부를만한 인사는 당시 조정에는 박규수가 유일했고 민영익, 김홍집, 김옥균처럼 훗날 이름을 날렸던 개화파 인사들은 1870년대쯤에나 막 30대에 관직에 오르기 시작했던 사람들이었고 그나마도 갑신정변 때 상당수가 쓸려나갔다. 박영효 같이 살아남은 자들은 외국에 의탁하거나 친일파로 변모.
조선의 경우는 지리적으로도 중국 대륙과 백두산과 압록강 등을 경계로 접해있는 영향으로 중국 대륙의 영향을 많이 받아온 점이 있으며 또한 조선의 양반들 또한 공자와 맹자 등 중국 학자들이 지은 고서를 통해서 학문을 익혀왔다는 점에서 보수적인 색채가 짙다. 또한 중국 대륙과 경계하면서 일본 열도와 바다 사이로 마주하고 있어서 서구 기준으로는 지리적으로 은둔의 나라로 알려졌을 정도로 일본에 비해서 뒤늦게 알려진 점도 있다. 또한 쇄국정책을 오랫동안 취해왔던 조선왕조의 보수적인 기여도 한몫한다.

3. 근대화 기반 마련



3.1. 지리적 배경


조선과 일본이 각각 자리잡은 한반도일본 열도유라시아의 극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쪽 세계와의 연결 길은 중국이라는 거대한 국가로부터 가로막혀 있었다. 하지만 극동이라는 같은 악조건에도 이들 사이엔 큰 차이가 있다. 한반도에 자리한 조선은 '''대륙 국가'''였고 일본은 태평양 위에 존재하는 '''해양 국가'''이다. 이 차이는 조선과 일본의 운명에 쐐기를 박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은 해양국가라는 특성상 외세의 침략이 적었고 거대 국가인 중국의 영향이 상대적으로 적어 독자적인 문화와 사회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더욱이 고립된 국가라는 이유로 외부 세계와의 접촉이 적었기에, 쇄국을 하기는 했지만, 비교적 서구와의 접촉을 유동적으로 진행하였다.
더군다나 15세기부터 대항해시대가 시작됨에 따라 문물은 대륙이 아닌 바다를 통해 이동되었다. 일본은 동아시아의 돌출된 해양 국가라는 지리적 이점을 통해서 외양선을 타고 온 유럽인들을 조선보다 한걸음 더 빨리 마주하게 된다. 메이지유신이 시작되기 300여년전 이미 일본은 포르투칼과 접촉하고 이들과 교류하여 타네가시마 총을 개발하였으며, 이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와도 직접적인 일대일 교역을 하게 되면서 서쪽 세계와 직접적으로 만나게 된다. 지리적 이점을 통한 서양과의 300년간의 경험은 곧 메이지유신으로 이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반면 조선은 서쪽과 북쪽이 중국으로 인해 교류의 길이 꽉막혀 있어서 중국을 통하지 않으면 서쪽 세계와는 도통 교류할 수 없었다. 더욱이 극동이라는 악조건은 조선을 체계적으로 화이관이라는 대외관으로 물들게 했다. 세상을 중국 중심을 바라보는 탓에 조선은 결국 중국과 중국의 간섭을 받는 세력외의 외부 세계와 유동적으로 교류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조선이 자리한 한반도는 태평양으로 연결되는 남해와 동해 역시, 일본 열도로부터 길게 가로막혀 있어 지도를 볼때 '''지리적으로 외부 길이 꽉막혀 있는 구조이다.'''
예외로 한반도 남쪽에 위치한 제주도바다와 곧장 연결되는 터라 헨드릭 하멜이 타고 있는 네덜란드 상선이 표류한 적이 있었고 조선도 서양과 직접적으로 교류할 길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외 몇번의 외양선 표류도 있었고,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조선과 직접적으로 교역하기를 원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상술했던 화이관으로 인해 이들을 오랑캐 취급하고 자신들보다 열등한 인종으로 바라보는 탓에 서쪽 세계와 건설적인 외교관계를 만들어 갈 수 없었고 결국 이러한 미래를 만나게 된 것이다.

3.2. 일본


단기적인 배경을 떠나 근본적인 측면을 살펴 볼때 서구화에 대해 일본은 의도했든 의도치 않았든 준비가 상당히 잘 되어 있었다. 16세기전국시대 때부터 지방/중앙 정부 차원에서 유럽과 직접 교류를 해오며 가톨릭을 받아들이거나 조총과 같은 기술을 도입하였고 전국적으로 쇄국했던 에도 막부 시절에도 본토에는 들어오지 못하게 했지만, 인공섬을 거점으로 네덜란드와는 제한적으로나마 교류하면서 주기적으로 들어오던 국제정세에 관한 최신 정보(오란다 풍설서)와 난학[28]을 통해 지식인층 뿐만 아니라 민중들에게도 서구의 사상과 문물이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주입되었다.[29] 개혁 자체가 급했을 뿐이지 그것을 보고 적응할 정도의 준비는 이미 이루어졌었다는 것. 흑선개항 역시 하급관리나 농민들은 놀랐어도 막부나 유력 번에서는 '올 게 왔구나'라는 느낌이었다. 이미 네덜란드를 통해 중국이 두들겨 맞는 것을 다 알고 있었기 때문.
이러한 일본의 사상적 변화는 에도 시대 중·후기에 파견된 조선 통신사들에게 큰 위화감으로 작용했을 정도로 지대했다.## 일반적으로 막부가 근대화를 거부하고 4번이나 거부한 끝에 개방했다는 인상이 짙지만 실상 막부 역시 근대화를 꾸준히 추진했다. 단지 중국의 중체서용, 조선의 동도서기와 비슷한 양상이었을 뿐이다.

3.3. 조선


조선서양과 직접적인 교류를 하진 못하고 '''중국이나 일본을 통해 간접적으로''' 하는 양상이 더 짙었다. 동시대 조선과 일본에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도착한 양인들의 수가 크게 차이 나며, 일본까지 가는 항로가 개척된 이후에도 조선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유이다. 이 때문에 조선은 직접적으로 양인들과 교류할 수 없었고 그럴 생각도 없었다.
벨테브레헨드릭 하멜 일행의 표류와 같은 기회가 있었지만 비슷한 사례가 있던 일본과 비교해보면 조선은 그들로부터 서구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거나 다른 서구인과의 대화 창구로 사용하지 못했거나, 않았고 그들로 인해 서구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는 일도 없었다.[30]
또한 일본에서는 각 지방들이 서로 나뉘어 서구와의 교류나 근대화에 관한 경쟁을 벌였지만, 명분상으로나마 중앙집권체제였던 조선에서는 지방의 세력들은 서로 손잡아 재산이나 불리기 바빴지 성장이나 대외교류 따위에는 관심이 거의 없었다.[31] 일본은 사츠마 같은 일개 '지방도 군함을 20척 가까이 보유했던 데에 비해[32][33] 조선은 대한제국 시대에야 짐배에 포얹은 양무호광제호가 전부였다.[34][35]

4. 외국어 통번역



4.1. 일본


외국어 통번역문화가 발달했다는 점도 상당히 중요한 점인데, 비록 막부쇄국 정책을 유지했을지언정 에도 시대 중후기에 이르면 수많은 난학숙(네덜란드 학문을 가르치는 학교)이 설립되어 민간인이 네덜란드어 의학서나 백과사전을 완역하거나 네덜란드 상인들의 거류지인 데지마에서 흘러나오는 소식들을 통해 세상 물정을 어느 정도 접할 정도였고, 또 대대로 네덜란드어를 통번역하는 가문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덤으로 영국, 미국, 프랑스 등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나라의 사람들과 교류할 때도 영어프랑스어네덜란드어를 거쳐 간단하게 의사소통할 수도 있었다.

4.2. 조선


조선서구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해 항상 청나라를 통해야만 했고 청나라에서 번역된 문서가 오기까지 엄청난 시일이 걸렸기 때문에 교류는커녕 자체적으로 의미 있는 의사소통을 하는 것조차 힘들었다.[36]
이러한 실정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가 바로 유명한 헨드릭 하멜의 표류이다. 조선은 그들이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조차 몰라서 그저 "남만인(南蠻人)"이라고만 부르고[37] 별 관심을 보이지도 않았지만, 13년 뒤 하멜 일행이 조선을 탈출해 일본 나가사키에 이르렀을 때 나가사키의 '총독(부교)'은 네덜란드어 → 포르투갈어[38] → 일본어 통역을 통해 그들을 심문한 결과 금방 그들의 정체 및 표류, 억류, 탈출 과정 전부와, 덤으로 당시 조선의 내부 사정(!)까지 상당히 세세한 수준으로 캐냈다. 즉, 이미 17세기에 불과한 이 시점에서도 일개 무역도시의 행정관이 일국의 군주보다도 정보력이 앞섰다는 뜻이다.

5. 정치 구조



5.1. 일본


서구에 대한 접촉이나 학문적 이해도 면에서 결코 일본에 뒤떨어지지 않았던 중국의 경우도 전면적 개화에 실패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정치사회적 구조적인 측면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일본의 경우, 조정은 실권이 없으며 막부라는 이원정부가 통치하는 불안정한 체계였을 뿐 아니라, 막부가 그나마 중앙집권단체에 해당하긴 했지만 일본 전국시대도쿠가와 막부로 바뀐 상황 등을 보면 일본의 막부라는 존재는 '''제일 강한 다이묘 가문'''의 의미가 강했을 뿐이었다. 이는 임진왜란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한 탓에 여러 유력자들이 힘을 잃는 동안 와신상담을 하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그대로 막부를 꿀꺽한 시점에서 알 수 있듯이 일본의 중앙집권체제는 불안정한 상태였다.
체제를 정당화하는 철학적 근거도 미약했고, 무력적 우위를 바탕으로 각종 지방세력들을 굴복시켰던 막부가 크게 쇠퇴해가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외 위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막부의 실정에 대해 반기를 들 수 있는 지방세력들이 이미 준비되어 있었으며 이들이 존황과 근대화를 (물론 우여곡절이 있었을지언정) 새 캐치프레이즈로 내걸 수 있었던 것이다.[39]

5.2. 조선


중국조선의 경우 역사적으로 오래전부터 중앙집권화를 완성하였으며[40], 철학적(이데올로기)으로 뒷받침되는 체계적이고 탄탄한 정부 제도 및 관료제 하에 안정적인 정치체계를 이루었다. 기존의 정치체계가 이론적으로는 근거가 탄탄하고 대단히 안정적, 효율적(?)으로 운영되었고 실질적으로는 그렇게 권력이 대대로 상속되며 고착화해 속된말로 '''고인 물'''이 되어버리며 웬만한 사회적 충격으로는 이를 뒤바꿀 만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이를 일거에 변혁시킬 정치세력도 생성되기 어려웠다. 실제로도 조선은 이러한 체계적인 정치 체계로 임진왜란, 병자호란, 경신대기근 등의 국가가 무너질만한 대혼란 속에서도 국가를 건재하게 이끌어갈수 있었다.
덤으로 일본이 했던 개혁은 중국, 조선에선 이미 예전부터 비슷하게 실행되고 있었던 것이 대부분이었다. 체계적인 관청도 6조로 어느 정도 있었다. 고종이 통리기문아문을 세웠음에도 근대관제로 바꾸지 않은 것도 갑오개혁을 보듯 궁내부, 외부를 제외하곤 이미 있었기 때문이다. (6조는 각각 인사, 재정, 교육, 군사, 외교, 법집행, 공공공사를 담당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서구학문을 학습하기도 했기 때문에(열린연단 문중양 편 참조) 역설적으로 동도서기의 이념이 정당성을 가질 수 있었다.(<탐스러운 동아시아사 9강>, <우리역사넷>).

6. 시기적인 행운


앞서 언급한 개혁세력의 집권과 의지가 내부적으로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면, '''이 시기적인 행운은 외부적으로 가장 큰 요인이다.''', 참고로 근대화를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며 개항을 했지만 결국 영국에게 농간을 당해, 결국 보호령으로 들어가버린 이집트[41]와 역시 근대화를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며 개항을 했지만,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와 영국령 인도제국 사이의 완충지대의 역할을 통해 독립을 유지했던[42] 태국의 차이만 봐도 알 수 있다.

6.1. 일본


메이지 유신이 일어나기 직전에는 일본의 각 번들이 서로 대립하고 여기에 막부와 토막파까지 대립하는 분열 양상을 보였다. 이 때 서구 열강이 개입해서 더욱 분열을 조장했다면 일본의 근대화는 까마득했을 것이다. 그런데 무진전쟁 등 일본의 분열이 극에 달한 1860년대 무렵의 시기는, 하필이면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프로이센 등 주요 서구 열강들이 모두 일본에 신경을 쓸 수 없던 시기였다. 미국은 남북전쟁이 한창이었고, 영국은 세포이 항쟁애로호 사건으로 인한 제2차 아편전쟁, 태평천국 운동 등으로 인해 인도중국에 눈길이 가 있었다. 프랑스는 멕시코 내전 개입, 베트남 침략,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으로 인한 중부 유럽 정세의 변화 등으로 바쁜 상태였다. 러시아 역시 이제 막 연해주를 차지한 상태인데다 그레이트 게임이라는 영국과의 대립 상황으로 인해 아직 일본에 관여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리고, 러시아, 프랑스, 영국 세 나라 모두 일본에서는 쿠로후네 사건이 일어난 해와 같은 1853년부터 3년간 크림 전쟁을 치렀으며, 50만이 넘는 사망자를 내고 패배한 러시아는 패전의 충격으로 인해 전쟁 중 황제 니콜라이 1세가 죽고, 크림 전쟁으로부터 15년 후에야 겨우 흑해 함대를 재건할수 있었을 정도로 어수선한 상황이었다. 사실 각종 서구 열강들이 제대로 침략의 손아귀를 뻗칠 수 없는 상황에 빠진 이런 천금 같은 시기에 개항한 나라는 동양 각국에서 일본이 유일하다.
이렇게 일본이 천재일우의 기회 속에 개항할 수 있었던 상황은 미국에 의해서 유발되었는데, 당시 미국은 초강대국이 아니라 아직도 노예제를 운영하며 농산품과 원자재를 유럽 공업국들에 수출하는 게 주요 산업이던 국가로, 먼로 독트린이 나온지 불과 30년밖에 지나지 않았을 시기었으며 유럽 각국들에 비하면 열강에 포함시키기도 어려운 정도의 나라였다. 그러던 중 19세기 중반 영국 등 서구열강들의 세력이 동남아시아를 넘어 중국을 본격적으로 넘보기 시작하자, 이렇게 되면 미국 입장에서 어물쩡대다간 태평양 너머에서는 자국의 지분을 하나도 요구할 수 없는 상황이 되기 일보직전이었다. 이에 미국의 국력이 아직 태평양 너머 본격적으로 세력을 뻗어나가기에는 한참 미치지 못함에도[43] 일단 태평양 너머에 자국의 지분을 확보해 두기 위해 먼저 일본을 강제 개항시키기로 1853년 매튜 페리 제독이 이끄는 함대가 출동했던 것이다. 이렇게 일본을 강제로 개항 시킨 미국은 정작 얼마 못 가서 곧바로 남북전쟁에 빠져들며 자국 내부상황을 수습하기 바빠 일본에 신경 쓸 상황이 되지 못했고 강제개항이라는 악재가 남북전쟁이라는 바다건너의 사건탓에 일본이 20년간 문제 없이 개혁을 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준 유례없는 행운이 되어준 것으로도 볼 수 있다.

6.2. 조선


조선이 개항할 당시에 서구 열강들의 관심도는 한반도로 향하고 있었는데[44], 정한론이 대두된 일본뿐만 아니라 청나라 역시 조선에 대해 기존의 자주국 체제하의 조공 관계가 아닌 근대적 종속 체제의 형태로 영향력을 뻗으려고 시도하는 상태였으며 러시아 또한 부동항을 확보하기 위해 한반도에 대단히 적극적으로 진출하고 있었고 영국 등은 이러한 러시아를 막는다는 구실 하에 거문도를 무단 점거하는 등, 온갖 서구 열강들이 맞부닥치고 침탈하려고 달려드는 상황 아래 이를 막아내며 개화를 진행해야 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나마 조선이 사실상 자주적으로 개혁했던 광무개혁도 러시아의 개입으로 다른 열강이 절대로 얼씬 못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조선과 일본의 운명의 차이에는 이러한 차이도 상당히 작용했다.

7. 국부(國富)와 세금 제도



7.1. 일본


이미 당대의 일본조선 사이에는 상당한 국력차가 존재했다. 물론 인도청나라를 보면 단지 국력이 강하다고 해서 서구화도 수월했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분명 무시할 수 없는 요소였다.
일본조선보다 인구가 많았고 영토도 넓었다. 면적은 1869년 홋카이도일본 행정구역으로 편입되기 전까지는 조선에 비해 1.3배 정도였다. 홋카이도를 영토로 편입하는 과정도 소수의 수렵채집 원주민을 제외하고는 무주공산 수준이라 장애물이나 방해요인이 거의 없다시피 하였다. 일본족이 혼슈 북쪽까지 확장하는데 들인 수고조차 한민족이 북쪽 영토를 확보, 사수하기 위해 여진족(9성, 4군 6진 등), 거란족(강동 6주, 대거란전) 등과 전면전에 가까운 사투를 벌인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조선보다 덥고 습한 기후 탓에 넓은 지역에서 2모작이 가능한 농업 조건도 일본이 더 좋은 편이었다. 또 일본은 특이하게도 연교차가 크면서도 강수량은 고른 기후(대신 그 습도 때문에 한여름에는 정말 답이 없다. 나라 전체가 한증막이라고 생각하면 된다.)라서 농사 짓기가 대체로 수월한 편이다. 반면 조선은 겨울이 일본보다 길고 건조해서 농사짓기에 매우 불리했다.
또한 화산지형이라는 지질학적 특성 상 구리의 매장량이 많은 것도 일본의 큰 이점이었는데, 에도 막부 시절 본격적으로 개발된 이와미 은광의 은은 17세기 전세계 은 유통량의 30%를 차지할 정도였고, 일본은 이 은과 구리를 이용해 네덜란드, 중국, 조선과 무역을 할 기초자본을 축적하여 활발한 무역활동을 할 수 있었다. 이와미 은광의 은이 고갈 조짐을 보여 일본에서 은 수출을 감소시킨 것이 19세기 초 조선 경제에 큰 타격을 주고 삼정의 문란을 촉발한 한 원인이라는 분석도 있다.
상공업의 측면에서도, 전국시대 이래 꾸준히 상공업이 발달해 이 시기에 많은 기업들이 출몰하였고[45] 상인들이 득세하여 사농공상의 계급 체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또한 지방에 할거하는 영주들이 전략적으로 성하도시(조카마치)를 거점화하면서 도시화율도 더 높았으며, 쇄국정책에도 불구하고 대외 무역도 활발해 이미 에도 중기에는 상당한 수준의 시장 경제를 이룩하고 있었다.
세율 관련해서는 일본의 경우 에도 막부가 '''"농민은 살려만 둔다"'''일 정도로 처음부터 강한 세제를 운영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후술된 대로 막부에서만 거두는 세금이 통상 35%[46]였는데, 이는 번국에서 자체적으로 거두는 세금을 제외한 비율이다. 즉, 35%를 세금으로 내고나서도 번국에서 또 따로 세금을 거두었다는 것. 이는 참근교대를 비롯한 에도 막부의 번국 쥐어짜기 정책에도 원인이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잇키를 막기 위했던 점도 있었다. 반란도 최소한 먹고는 살만해야 일으키는 것이다.

7.2. 조선


조선은 건국부터 민본주의 사상을 건국이념으로 삼고 세종대왕 시절 전분 6등법 등으로 구체화하여, 세율은 10%(공식적인 세금 5%+잡세 등)에 불과하였다. 조선 말기 세도정치 시절 삼정의 문란이 급격화되지만, 이건 정부에 들어가는 세수가 폭증한 게 아니라, 자주농이 몰락하고 소작농화 하면서 생긴 농민에 대한 지주의 소작료 착취 및 지방 세무관들의 세금 착복 문제이다.
또한 18세기 이전까지는 중계무역으로 상당한 부를 획득했던 조선18세기~19세기에 들어서면서 환금작물이던 인삼의 대외 수요 급감과 조선을 거치지 않은 직계무역 활성화 등으로 오히려 대외무역이 위축되었다.
조선 정부는 (겉으로나마) 백성(농민)들을 나라의 근본으로 명시하고 이들의 생활 안정을 최우선으로 하여 세금을 최대한 덜 걷어 운용했고 그 덕택에 전근대 사회 단계에선 전세계적으로도 안정된 국가에 손꼽힐만 했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변질되었다. 또한 조선의 세금체계를 보면 토지에서 나오는 곡식을 내는 전정과 사람의 노동력을 대상으로하는 부역, 그리고 지방의 토산물을 바치는 공납이 있었으며 10분의 1만 냈다는 것은 전정만의 이야기이고 의도적으로 부역과 공납을 쏙 뺀 채 이야기 한 것이다. [47] 조선은 정말 다채롭고 어마어마한 종류의 세금을 걷어들인 국가였다. 훈련도감의 병사들을 운용하는데 필요한 세금이라 하여 삼수미를 걷고, 세금 걷는 관리들이 고생한다며 이를 위로하기 위해 인정미를 걷었으며, 세금을 운반하는 와중에 부패나 재해로 손실이 발생할테니 '''손실분 예상치까지 미리 걷는''' 곡상미, 항구에서 조운선에 실린 곡식을 하역하는 인부들의 임금을 주기 위해 걷어들이는 하선입창미, 조세행정에 쓰이는 종이값을 백성들에게 전가시키는 창작지미 등등 정말 별의별 세금을 다 운용한 나라다. 전정(田政)의 세율이 10분의 1에 불과해봤자 전정(田政)은 조선 농민들이 부담해야 하는 수많은 세금 중 하나에 불과하다.
참고로 앞서 언급한 여러 종류의 세금은 중앙정부, 즉 조정에서 걷는 세금만 늘어놓은 것이며 지방세인데 곡식의 품질이 좋은지 나쁜지 알아보기 위해 미리 쌀 몇 섬 챙겨놔야겠다며 간색미를 걷어들이는 기록을 보자면 실로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다. 조선에는 유럽의 부르주아나 일본의 조닌처럼 기존의 지배계층과 맞먹으며 새로운 기류를 형성하는 신흥 상인집단이 끝끝내 나타나지 못했다. 단 분명 조선이 일본의 농노보다 세금이 적은건 사실이다. 환곡 제도를 보면 조선은 일본보다 백성들에게 신경을 많이 썼음을 알 수 있다.[48])[49] [50]
원래 조선은 땅의 비옥도로 세금을 걷는 결부제를 운영했으나 18세기 전반이후 양전이 시행되지 않았다. 그래서 조선은 부역실총으로 각도 각군에 세금을 액수를 조사해서 문서화시키고 그것을 동결했다. 이를 비총제라고 한다. 그러나 잡세 특히 수송비는 완전하지 않았고 그리 문서화 되지 않았다. 이것은 조선의 문제점이다. 그러나 조금더 생각해봐야 되는게, 중앙재정만이 아니라 지방재정도 있어야 한다. 그래서 중앙 재정과 더불어 비공식적인 지방재정이 공존했다. 그래서 세금도 지방마다 차이가 나고 부과방식도 차이가 컸다. 그래서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조선은 최대한 세금을 아끼려고 노력했고 그것은 이원적인 재정구조로 나타났다. 다만 문제는 그 지방재정의 세금부과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것이다. 조선은 최대한 합리적으로 세금을 매기려고 노력한 거다. <조선왕조 재정시스템의 재발견>
요약하자면, 명목상 세율은 낮았으나, 조선 후기에 들어갈수록 부실한 토지 조사와 부정부패로 낮아지는 세수, 회계와 재정관리 능력부족으로 비효율적으로 운용되던 재정, 그것을 매꾸기 위해 각종 잡세의 남발, 지방에 대한 통제능력이 부실해지고, 행정체계가 무너져 폭등하는 지방세 등등의 이유로 실질적 세율은 폭등했지만 정작 정부에서 운용 가능한 재정은 세종시절보다 떨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하나 덧붙이지면 조선의 상업이나 경제가 일본에 비해 못하다고 하는데 물론 일본보다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상업은 수공업수준에서는 상당히 발달했다. <개항기 면업에서 볼 수 있는 시장구조의 함의>에 조선은 일본과는 다르게 장시를 중심으로 한 농민시장이 발달했고 농가겸업으로 면포를 생산했는데 상품을 생산하는 지역과 그렇지 않은 지역이 나누어져 있고 그 면포는 도를 넘어 유통되었다. 그리고 그 수준은 1780년대 영국의 면포생산량에 필적했고 수입품까지 합치면 면포 절반을 시장에서 구입했다. 그러나 조선의 시장은 도시중심으로 발달한 일본에 비해 세금을 부과하기 힘들었다.
자원 문제또한 비슷하다. 물론 조선의 자원이 없는건 아니였지만 일본과 중국에 비해 부족했고 금같은 자원은 북부에 몰려 있었다.[51]
전근대에 금과 은은 곧 화폐를 의미했고 화폐의 유통량은 곧 경제력을 의미했다. 전근대 한국이 지독하게 상업 발전이 더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전근대 조선의 경제력은 곧 농업생산량이었고 이것을 물물교환 형태에서 화폐경제로 변화하려면 막대한 량의 금과 은이 있어야했다. 운산금광은 전근대에는 채광이 안 됐고 은도 조선의 농업생산량을 커버해주지 못했다. 은을 일본의 수입하긴 했지만 턱없이 부족했고 중국에 조공을 하기 위해서 줄줄 세던 것도 은이었다. 즉, 조선은 일본처럼 엄청난 양의 은광도 없었고 금광은 있었지만 전근대에 채광이 안 되었다.
물론 흥선대원군 시기 북부에 있는 자원들을 개발하기 시작하며 조선 후기에는 이를 바탕으로 개항말 조선 세수에 크게 도움을 보태긴 하긴 했다.[52][53]


[1] 뿐만 아니라 기독교 박해를 했다고는 하나, 네덜란드와 지속적으로 직접 교류를 했던 점이 컸다. 당시 조선은 청나라에 100% 의존해서 서구 문물을 간접체험했기 때문에, 온전히 서구문화를 파악할 수 없었던 반면, 일본은 네덜란드와의 직접교류를 통해 서구문물을 직접적으로 접할 수 있었다.[2] 손꼽히는걸 넘어 당시에도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였다. 과거에도 현재도 넘사벽으로 인구가 많은 중국, 인도도 100만명이 거주하는 도시는 없었다. 또한 도시화가 상당히 진행되고 인구도 많았던 프랑스영국 조차도 100만이 안 됐다. 전근대 일본의 특징이기도하고 지금도 꾸준히 연구되고 있다.[3] 그나마도 명나라청나라에 의존하는 형식이었다. 사신 일행으로 갔던 사람들이 "명나라에 갔더니 이런게 유행이더라", "이번에 청나라에 갔는데 이런게 있더라"와 같은 입소문으로 알려졌고 그것도 (성리학에 대한 비판도 사문난적이라 깎아내린) 사대부들에 의해 "요망한 것"이라고 불리며 배척되었다. 하다못해 연암 박지원이 쓴 열하일기조차 지도층 사대부들이 연암을 이단아로 취급한 까닭에 거의 듣보잡 취급받는 정도였으니 당시 조선과 문화적으로나 언어적으로도 판이하게 달랐던 서양에 대한 정보가 제대로 전달이 됐을리가 없다.[4] 공산주의 국가들이 갑자기 붕괴되고 자본주의로 이행했을 때를 보면 이해가 쉽다.[5] 당연하지만 서구 열강의 문물 제공은 식민지화를 위한 것이다. 그 첫단계가 바로 문물 제공을 위한 개항, 그게 아니라 해도 개항 그 자체가 서구만 일방적으로 유리한 불평들 조약으로서 개항할 당사국을 위함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하다.[6] 하지만 여기에서는 일본도 근대화를 제법 어설프게 한 면도 많았다.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같은 다른 나라에서는 듣도보도 못한 일도 이런 데서 기인한다. 즉, 당시 일본은 서구 열강의 기술은 따라잡았어도 사고방식 자체는 센코쿠 시대에 머문 사무라이에 불과했다.[7] 일본의 근대화는 2차대전 때까지 인프라 면에서 서구 열강에 비해 많이 밀렸다. 제도적인 면이나 은행 신설과 같은 경제적인 면, 전기시설과 같은 기본적인 인프라는 있었지만, 일본이 구미 열강들을 질적으로 따라잡은 시간은 메이지 유신 이후 100년이 한참 지난 1970년대 들어서였다.[8] 물론, 차이는 있다. 미국은 단지 무역의 이익을 위해 일본을 무력으로 개항했지만, 일본은 조선을 '''아예 영토로 삼으려 무력으로 개항시킨 것이다.'''[9] 초창기 사쓰마. 조슈 등 이른바 유항이라 불리는 세력들은 존황양이를 내세웠지만 사쓰마, 조슈 모두 각각 사쓰에이 전쟁과 4국 함대 포격 사건을 겪고는 '양이를 외쳤다간 우리부터 박살날 판이다.' 라고 여겨 양이 대신 개국을 외쳤는데, 이렇게 되면 막부와 다를 바 없다 보니 적극적으로 토막을 외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사쓰마는 이전 까지 양이는 조슈와 동일했지만 공무합체, 즉 천황의 조정과 막부가 합쳐지는 방식을 주창했다. 조슈는 반대로 존황양이를 이전 부터 주장했지만, 똑같이 개국을 외치는데 누군 집권하고 누군 물러나라 할 수는 없기에 존황이라는 전혀 다른 구호를 내세운 것. 물론 그렇기 때문에 천황은 허수아비였고, 코메이 덴노가 이 쪽에 의해서 죽었다는 설안중근이 언급할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다.[10] 헌데 그거와 별개로 나중에 거의 점심을 양식으로 고정하여 먹었을 만큼 즐겼으며, 당뇨에 걸리기 전까지 화과자와 함께 양과자도 하루에 한 번 이상씩 디저트를 챙겨먹었다고...[11] 천황의 이름을 높이고(존황), 외세를 배격(양이)[12]대일본제국 헌법에서 보이듯 모든 권력 자체는 천황이 가지고 있었다. 그니깐 천황이 마음먹으면 의회도 해산가능한 일종의 프로이센식 입헌군주제를 가지고 있었다. 단지 천황이 관례상 행하지 않았던 것.[13] 세부내용은 차이가 있지만 대충 일본판 위정척사파라 보면 된다[14] 존왕양이(尊王攘夷)라고도 한다.[15] 사실상 일본식 중화사상이라고도 볼 수 있다.[16] 단 담배, 감자는 각각 선조, 숙종때에 들어왔다. 이미 담배는 인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었을 정도였고 거기서 임진왜란 이후 들어왔다 식으로 기록되어 있었다.[17] 안경도 선조때 들어와서 김성일도 안경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워낙 비싼 고가품인데다가 어르신 앞에선 안경을 쓰면 안된다는 예법이 있어서 대중적인 물건은 아니었다.[18] 조선 자체에서 수리 뿐만이 아니라 카피하여 왕에게 진상했다는 기록도 있다.[19] 영조가 망원경을 부숴버렸다는 얘기는 기록을 잘못 해석한 것으로, 영조가 부순 것은 천문관측 기구인 '규일경'이었다.[20] 이런 이유는 하필 인조 이후 소중화사상이 발생한 이유이기도 하다. 즉 "우리가 중화인데 어찌 오랑캐 풍습을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라는 것 물론 군사 등 일부는 받아들여 홍이포 등을 도입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극히 제한적인 도입이었다. 단, 세도정권이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지 반대했던 건 아니다. 즉 서양문물이 들어오든 말든 상관없었다는 소리.[21] 다만 서원 철폐의 명분으로 백성에게 민폐가 된다는 것을 내세우긴 했다.[22] 이는 당시 영국이 지원하던게 일본이라는 특성상 그레이트 게임이 발동했다고 보는게 옳을듯[23] 출처:https://blog.naver.com/kkumi17cs1013/221721449479 /https://blog.naver.com/kkumi17cs1013/221760896764/https://cafe.naver.com/bitethatbait/58944[24] 윤요호 사건으로 부터 을사조약까지 30년밖에 안된다. 일본도 쿠로후네 사건부터 따지면 20년 정도 아니냐? 라는 식의 말이 있을까봐 적는데 일본도 20년 정도의 시간동안 금문의 변 보신전쟁 서남전쟁등 꺵판이 다 나면서 내전을 2번이나 겪었다.[25] 간섭이라기 보다는 지원의 형식으로 프랑스가 막부측 영국이 신정부군 측에 지원하긴 했지만 조선이 당한 간섭에 비하면 간섭이라고 볼수도 없는 수준이다.[A] 출처: #[26] 간혹 조선도 그 시간에 일본처럼 내전하면 되지않나? 라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을텐데. 그러면 당장 조선을 눈독들이던 일본과 청나라 그리고 서구열강들이 어떤 모습을 취할지는..[27] 프랑스 고문단 조차도 1800년대 후반에 대놓고 조선은 세금이 너무 적다. 근대화 할려면 지금보다 더 걷었야 한다. 라며 조언을 했을정도로 세금이 (그들이 보기엔) 매우 적었다. 출처:https://blog.naver.com/kkumi17cs1013/221546532948[28] 사실 난학보다는 국학을 근대 일본의 기반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더군다나 난학은 널리 퍼진 것도 아닌 일부만 연구하던 학문이었다.[29] 일례로 에도시대에는 네덜란드에서 전래된 현미경을 통해 눈의 결정이 기하학적인 육각형 모양임이 알려져 이를 무늬로 한 유카타가 팔려나갔을 정도이다.[30] 다만 1609년에 바타비아 총독이 일본에 조선과의 직교역을 신청한 것(물론 일본은 이미 중계무역으로 이익을 보고 있던 터라, 반려되었다.) 등을 보면 서구인들이 조선을 아예 몰랐다고 보기는 어려울 듯.[31] 이는 일본봉건제, 조선은 중앙집권제였기 때문이다. 일본 다이묘의 경우, 강한 자치권을 가지고 있어, 자신의 영지의 힘과 경제력은 즉 자신의 영향력을 의미한 반면, 조선은 지방 세력이라고 해봐야 사병따위 엄두도 못내는 지방 양반이나, 국가에서 파견한 지방관 정도였다. 동기부여에서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32] 단, 사츠마가 세력과 영향력이 강하고 재정도 튼튼했던 '웅번(雄藩)'이기는 했다.[33] 물론 이는 꼭 긍정적인 면만은 아니다. 근대화 하나만 보면 긍정적인 요소라 할 수도 있겠지만, 일개 지방이 자체적으로 군함을 20척이나 보유했다는 것은 그만큼 중앙의 지방의 통제력이 강하지 못하다는 것. 다시 말해서 지방이 중앙을 상대로 반기를 들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고, 실제로도 반쯤은 그리 되었다.[34] 단, 상선은 조선도 개항 이후에는 수로를 통해 물자를 운반하던 경강상인들의 주도로 수많은 증기선들이 들어왔다.[35] 전부는 아니다. 대한제국 역시 대형함을 사들이려는 노력을 하긴 했다. 청년학파에서의 어뢰정 논리가 논파당하기도 했다.#[36] 에도 막부도 초창기엔 알파벳을 외우고 십여 개의 단어를 암기하는 수준에 불과하였으나 1811년에 외국어 전문번역기관이 설립되고 나서 해결되었다.[37] 아마 벨테브레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의사소통이 더 힘들었을 것이다. 나중에야 일본 측이 알려줘서 그들이 '화란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38] 현장에 직역이 가능한 통역사가 없었다고 한다.[39] 에도 막부는 체제에 대한 철학적 근거를 채우기 위해 조선에서 성리학(퇴계학 쪽)을 적극 수용하였다 그리고 일본에선 이러한 성리학을 중심으로 해서 여러가지 학문이 퍼저나오는데 하나는 성리학과 불교,중국학을 모두 배척하고 일본 고유의 학문을 연구하자는 국학과 하나는 성리학의 영향을 매우 짙게 받은 존황양이 사상의 근본이 되는 미토학파다.[40] 한반도 역사에서 일본처럼 중앙권력이 약화되어 전국시대에 준하는 혼란기가 왔던 건 통일신라 말에서 그나마 3개로 정리됬던 후삼국시대 사이 뿐이였고, 그 통일신라도 말기에나 그랬지 그 외 시기엔 내내 중앙귀족의 권력과 지위가 막강해 중세 일본식 봉건제와는 큰 차이가 있었다.[41] 물론 헛되지는 않았는지 이집트는 1922년으로 대한민국보단 빨리 독립을 했지만, 이집트도 1952년까진 영국의 영향권에 있었다.[42] 물론 독립은 유지했지만, 태국 외곽지역은 프랑스와 영국에게 꽤 많이 넘어갔다.[43] 실제로 미국필리핀을 식민지화할 수 있었던 것도 1896년에나 가서였다.[44] 미국은 시어도어 루즈벨트의 팽창주의 아래에서 중국 시장 진출을 위해 아시아 진출을 적극적으로 노리고 있었고, 영국과 프랑스는 이미 식민지 확보를 어느 정도 마친데다가 독일 제국의 성장을 견제하기 위해 슬슬 파쇼다 사건을 비롯한 내부 정리와 협력 관계로 돌아서며 러시아의 부동항 확보를 막기 위해 이목을 집중하고 있었고, 러시아는 크림 전쟁의 패배 이후 새로운 부동항 확보를 위해 한반도 진출을 적극적으로 노리고 있었다. 즉, 이 당시 열강들은 이미 내부 정리를 끝마쳐 놓은 상태에서 모든 시선을 청과 조선으로 돌려놓은 상황이었다.[45] 이 때문에 일본오래된 기업들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나라로 꼽히고 있다.일본의 경우 ▲1천년 이상 기업은 7개 ▲500년 이상 32개 ▲200년 이상 3천146개 ▲100년 이상 5만여개 등이다. 출처 : SBS 뉴스[46] 원칙적으로는 4공 6민 내지 5공 5민으로 4~50%이나 실제 과세 기준액이 하향되었다. 여기서 눈치챌 수 있지만, 현대에도 일본의 세율은 꽤 큰 편이며 유럽처럼 세금에 기댄 복지 시스템도 일찍 발달했다. '생활보호'라 하여 실업자니트들에게 꽤 많은 보조금을 줘서 사회문제까지 될 정도다.[47] 조선 후기의 조세제도를 보면 전세는 영정법 시행 이후엔 결당 4~6두를 납부하는 것으로 제도화되었고 공납의 경우엔 대동법 시행 이후엔 결당 12두를 납부해야 했다. 여기에 결작과 삼수미를 포함해도 결당 20두 수준이였다. 1결당 수확량을 감안하면 중앙정부에서 징수한 세금이 많다고 말하기엔 어려웠다. 군역의 경우엔 균역법 시행 이후엔 1년에 1필을 납부하게 되었다. *[48] 출처: https://cafe.naver.com/booheong/156350[49] 조선왕조실록으로 세율을 계산해본 결과 중앙에서 때간 세금은 6% 정도이다. https://cafe.naver.com/booheong/146334[50] 흔히 말하는 세도정치에서의 부세수취율 조차도 경북,안동지역 한하지만 20% 언저리이다. https://cafe.naver.com/booheong/60476 세도정치 시기에도 20% 언저리였다는 말이다. 참고로 조선의 소작농은 지주한테 소작비만 내지 세금은 안냈다.[51] 당장 조선 최대의 금광인 운산금광이 북부에 있었고 조선 최대의 은광이 있던 단천 음광조차 북부에 있었으며 가장 생산력이 많았던 16세기 말에서 조차도 1년에 5천냥 정도밖에 못캤다. 이게 연은분리법 나오고 나서도 저정도였다. 동시대 일본에선 이와미 은광이 터질때였는데 말이다. 거기에 조선은 구리,청동도 부족하였다. 총통에 쓸 청동이 부족해서 절에 있던 청동을 녹여서 썼다는건 이미 유명한 일화다.[52] 흔히 개항기에는 홍삼으로 돈벌었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초기 한정이고 후기부턴 북부에 있던 자원들이 개발되기 시작하며 꽤나 돈을 벌어다 줬다.[53] 출처:https://blog.naver.com/kkumi17cs1013/2217608967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