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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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대교와 기독교의 경전 문헌 모음집이다. 유대교에서는 구약 성경을[2] 경전으로 하고, 기독교에서는 예수의 부활·승천 이후 집필된 책들을 신약으로 추가하여 경전으로 삼고 있다.
또한 이슬람의 쿠란 속에서 내용과 구절들을 뒷받침할 때 많이 언급되는 책이다.[3]
2. 명칭
국어사전에 의하면 성경(聖經)은 넓게는 종교 일반의 책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다만 현대 한국어에서 이런 의미로 쓰이는 경우는 사실상 용례가 소멸하다시피 했고, 압도적으로는 그리스도교의 책에 대해 쓰인다. 기타 한자 문화권에서도 성경이란 단어를 기독교의 경전만을 가리키고 있으며[4] 기타 다른 종교의 경전은 고유 명사(쿠란, 베다 등)으로 지칭하고 있다.[5][6]'''성경3(聖經)'''
발음[성ː경]
「명사」
「1」 종교상 신앙의 최고 법전이 되는 책. 기독교의 성경, 불교의 팔만대장경, 유교의 사서오경, 이슬람교의 코란 등이 있다. ≒성전.
「2」 『기독교』 기독교의 경전. 신약과 구약으로 되어 있다. ≒성경전서, 성서.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영어의 Bible은 이집트의 파피루스와 어원이 같다. 당시에는 서적이 동물의 가죽[7] 을 나무막대 등에 돌돌 말아서 한 면에만 글을 쓰던 형태와, 지금의 책과 비슷하게 제본하여 양면에 글을 쓰는 형태가 있었다. 이때 지금의 책과 비슷하게 만들던 것이 파피루스다. 영어의 Bible이라는 단어는, 이 파피루스를 당시 전 세계로 수출하던 페니키아의 비블로스(Byblos)라는 도시에서 따왔다. 단순히 파피루스의 발음이 순화되어 비블로스로, 그리고 그 비블로스가 바이블로 바뀌었다는 견해도 있다. 둘 중 어느 경우이든 Bible을 직역하면 '서적(書籍)'이 된다.
3. 영향력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책'''[8] 이자 세계 베스트셀러 1위의 스테디셀러. 2010년 기준으로 통산 25억 부에서 60억 부 정도가 판매된 것으로 추측되며 집계 이전까지 감안하면 그보다 더 많은 수가 팔린 것으로 예상된다. 선교의 목적으로 성경을 무료로 배포하는 경우도 상당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실제로 출판되고 읽힌 성경의 부수는 이보다 몇 배는 더 많을 수도 있다.
성경 속 인물들에서 따온 사람들의 이름, 성경을 소재로 한 서양 예술 작품들과 각종 문학, 음악, 조각, 그리고 성경 속 사건들을 기념하는 부활절 문화 등 전 세계에 널리 퍼진 기독교 문화권의 상당 부분이 성경에 기반한 기독교적 관습에서 비롯되었다.
현재의 서양 문화에 끼친 영향은 매우 지대하며,[9] 이슬람 문화에도 적잖은 영향을 주었다. 예수의 신성(神性)을 부정하는 이슬람도 기독교와 같이 유대교를 뿌리로 두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쿠란도 성경과 내용이 완전히는 아니지만 유사하거나 비슷한 부분이 많다. 문학적으로 변형하여 잔혹한 단락을 부분적으로 순화시킨 버전의 성경이라고 해도 틀린말이 아닐 정도. 그래서 저자가 무신론자인 책에서도 성경 구절이 직접 인용되거나, 성경에서 비롯된 일화나 인명, 지명 등이 사용될 정도. 또, 많은 창작물들에서 성경이 소재로 사용된다. 당장 서구권만 가도 존(요한), 피터(베드로), 메리(마리아) 등 성경에서 따온 이름들이 굉장히 많다. 예수의 경우는 서구[10] 보다는 오히려 이슬람 세계에서 '이사'라는 인명으로 가끔 쓰인다. 근대 이후로 지구상에 기독교 선교사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 거의 없어지면서 기독교 문화와 거의 무관했던 곳은 전근대의 동아시아나 서·남아프리카[11] , 아메리카, 오세아니아 정도? 또 기독교가 전 세계로 퍼진 현대에는 동북아시아 정도일 것이다.
성경을 열성적으로 가르쳐주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요즘에야 성경 내용을 한 줄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워낙 다양한 주제와[12] 다양한 형식이[13] 한데 엮여 있어서 내용을 요약하기가 힘든 책이다. 성경 내용의 주요 흐름이 어떻게 되는지를 요약하는 것 자체가 기독교 교파마다 달라서 통일되고 확정된 요약은 거의 없다. 현대에 들어 오락거리로 크게 환영받는 그리스 로마 신화나 북유럽 신화에 비하면 오락거리로서의 성격은 희미한 편이다.[14] 기본적으로 무대가 사람 사는 땅에 맞춰져있어서 성격 자체도 차이가 나는 편이고.[15] 하지만 서양 대중문화 속에 완전히 녹아들었기에 각종 문학작품이나 드라마, 연극 등에서도 성경의 영향을 받은 부분이 있는 경우가 많고 등장인물도 성경에 나오는 인물의 이름을 변형시킨 경우도 많기에 그 흔적을 아는 사람은 찾기 쉽다.
어떤 분야에서 성경처럼 떠받드는 책을 '무엇무엇의 바이블'이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가령,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공산주의의 바이블, 동의보감은 한의학의 바이블이라는 식으로.
'''한국 기독교 성경은 개신교와 천주교의 것이 다르다.''' 개신교 측에서 천주교와 함께 공동번역성서를 만들었지만, 여전히 개역한글판을 주로 사용했다. 개신교는 단일교파인 천주교와 달리 의견이 통일되지도 않기 때문에, 어느 번역본을 쓰는지는 교파나 예배당마다 미묘한 차이가 있다.[16] 반면 천주교는 줄곧 공동번역판을 쓰다가, 결국 2005년 11월 말(대림시기)부터 공식적으로는 사용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오래된 천주교 신자들은 최소한 공동번역성경을 하나쯤 소장하고 있다. 이 부분의 자세한 내용은 성경/번역 문서 참고. 그 외에 상기한 대로 성경 목록도 좀 다르다.
4. 권수
현대에는 단일한 책 1권으로 엮어져 나오지만, 실제로는 '''여러 문서들을 한데 묶어서 만든 전집(全集)'''이다. 때문에 성경전서라고도 불리며 총 73권(가톨릭) 전문 다운로드. 혹은 66권(개신교)이다. 성공회를 비롯한 개신교에서는 일찍이 유대교의 마소라 본문에 포함되지 않았던 7권을 외경이라 부르며 제외하지만, 가톨릭에서는 이 7권을 '제2경전'으로서 정경으로 분류한다.[17] 여기에 예수를 기준으로 기록 시기를 구분하여 구약 39권(개신교) · 46권(가톨릭) · 신약 27권으로 나뉘며, 세세하게 들어가면 역사서, 예언서, 시집, 복음경, 서간문 등등 여러 구분이 있지만 성경공부 많이 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면 여기까지는 잘 모르고 대부분이 구약과 신약 정도만 구분한다.
여기서 약(約)은 주와 인간 사이의 약속(約束)을 뜻한다. 즉, 구약은 구세주를 보내주겠다는 옛날의 약속, 신약은 구세주가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새로운 약속이다. 다만 신약이 있으니 구약이 무의미하다는 식으로는 기독교에서 간주하지 않는다. 비유하자면, 구약은 성경이라는 올리브 나무의 뿌리이며, 신약은 열매이다.
신구약을 영어로는 각각 Old Testament, New Testament라고 하는데, 일반명사 'testament'는 증언, 유언이라는 뜻이나 성경의 'Testament'는 약속이 적힌 증명서라는 뜻이다. 어두의 대소문자 차이에 주목하자.
기록 연대는 기원전 1,000년경부터 기원후 200년대까지 추정하지만, 고문헌들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정확한 작성 연대는 아무도 모른다. 가장 오래전에 기록된 책부터 가장 최근에 기록된 책 사이의 연대가 약 1,200년이나 되어서 당연히 저자도 여러 명. 한 사람이 1권만 쓰기도 하고 여러 권을 쓰기도 했기 때문에 저자가 누구인지 언급되지 않는 부분도 있다. 생각보다 세간에 알려진 저자가 실제 저자일 가능성은 거의 없고, 많은 책이 저자 불명. 몇몇 책은 후대에 가필된 내용이 있다는 의심 혹은 확증도 있기도 하다. 구약의 정립 역사에 대해서는 후술한다.
현재의 신약 성경 목록이 완성된 건 로마 제국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구약성경의 경우는 그 이전에 유대교에서 어느 정도 정립되어 있었으나, 신약의 경우는 느슨하고 통일되지 않았었다. 지역 교회마다 경전으로 인식하는 문서가 달랐을 정도. 그러다가 서기 367년에 성 아타나시오가 현재의 신약 27권 목록을 제안한 것이 397년에 열린 카르타고 공의회를 통하여 동/서방 교회를 막론하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고, 구약의 경우는 마찬가지로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46권을 확정하였지만 이는 서방교회에서만 받아들여졌다. 그 후 개신교에서는 교단별로 공회를 열어서 구약을 39권으로 축소하는 데 합의하였다. 자세한 것은 외경 참고.
5. 정경과 외경
교파별 정경 일람 (한국어 위키백과)
교파별 정경 일람 (그리스어 위키백과)
외경 (히브리어 위키백과)
성경에 포함되어 있는 내용을 담은 복음서나 기록들을 정경(正經), 그 안에 포함되지 않은 성경들을 외경(外經)이나 위경이라고 한다.
일단 천주교는 구약에서 제2경전(총 7권)을 정경으로 인정하고 있는 반면[18] , 개신교는 이를 외경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래 구약성경이 어디까지 경전이고 아닌지는 교회내에서도 논란거리였다. 70인역이 정경인지 히브리어 경전이 더 우월한지 의견차가 있었으나 70인역을 따르는 집단이 다수였다. 이는 397년 서방교회의 카르타고 공의회에서[19][20] 구약 정경을 규정할 당시 제2경전이 포함된 그리스어 70인역 성서를 주된 기준[21] 으로 정했다. 반면 개신교는 마르틴 루터가 히브리어 성서의 우월성을 중시한 소수 교부들의 의견대로 구약정경 39권만을 따른 이후 대부분의 종교 개혁가들이 루터의 의견을 따랐기 때문이다.
즉 개신교의 정경은 본래 구약이 히브리어로 쓰인 만큼 '그리스어 성서보다 히브리어 성서가 더 오래되었고 더 정경에 가까울 것'이라는 의견[22] 에 따라 70인역을 배제하여 결정된 것이다. 물론 종교개혁 당시 마르틴 루터나 장 칼뱅이나 모두 '외경은 정경만큼의 권위를 가지고 있지는 않으나 읽으면 유익하다'고 평가했으므로, 오늘날 개신교에서 외경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쓰여진 내용의 진실성이나 역사적 가치 등도 상당 부분 인정한다. 단지 경전으로서 종교적 권위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대의 '''상당수''' 학자들은 얌니아 회의 자체가 실제로 개최되었는지, 외경을 읽는 자들을 저주내렸는지, 설령 회의가 개최되었더라도 '구약 정경 39권'이라는 결론이 여기서 도출되었는지에 대해서 강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일부 개신교 학계에선 집회서 읽는 이단 저주기도문 얘기로 얌니아 회의는 개신교 정통성을 무너뜨리려는 가톨릭 학계의 음모론 취급도 한다. 실제로 얌니아 회의가 있었더라도 여기서 정경을 규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게 그들의 주장이다. 이 회의의 존재자체에도 회의적인 경우도 늘고있다. 실제로 오늘날 얌니아회의는 존재가 부정되는 추세다.[23] 뿐만 아니라 결정적으로 1947년부터 발견되기 시작한 사해문서는 '''히브리어로 쓰여진 가장 오래된 성경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어 70인역 성경에 포함된 제2경전의 일부[24] 와 희년서 등의 위경을 포함한다.''' 다만 이 문서는 그냥 유대 신비주의 에세네파 문서로 보는 경향이 있다. 본래 그전까지 2천 년간 제2경전은 원문인 히브리어 경전에서 한 번도 발견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개신교, 유대교로부터 제2경전이 정경에 포함되지 못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고있다. 설령 사해문서가 발견됐다 하더라도, 초기 교회 시절부터 히브리어 원본이 안 보였던 제2정경(외경)은 그 권위가 의심스럽다면서 개신교에선 신경쓰지 않는다. 대표적으로 불가타 성경의 저자인 히에로니무스와 완성된 신약 성경의 목록을 제시한 아타나시오스 등이 대표적인 제2경전 반대파였다.
기독교가 정경화 작업을 완료한 것은 4세기다. 그 이전에도 기독교에서 성경의 정경화에 대해 관심을 보인 것은 사실이지만, 주목할 만한 권위있는 결정이 내려진 것은 아니었다.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유대교에서 내부의 기독교인들을 외경을 보았기에 멸망당해 마땅할 이단으로 몰아 축출했다는 정도이거나, 기독교 내적으로 당시 이미 확정된 유대교의 타낙 목록에 관심을 보이며 그들의 성경과 우리의 성경이 다르다는 점을 구분하는 정도일 뿐이며, 우리의 성경에 '외경'이 포함되었다는 단편적인 정보만 전해질 뿐이다. 즉, 4세기에 들어서야 기독교 내적으로 확고한 결정이 내려진다는 점에서 어디에서 무슨 주장을 어떻게 하든 사실상 개연성이 부족해질 뿐이다.
그렇기에 '유대교 전통에는 속하지만 타낙(유대교 정경)은 아니되, 기독교 정경으로써의 지위에 논쟁이 있는 문서'를[25] 정경으로 인정하여야 하는지에 대한 논란은 학술적인 문제 뿐 아니라, 가톨릭, 정교회, 개신교 간의 근본적인 신앙관의 충돌 문제로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26]
정리하면 구약이라고 부르는 유대교의 답습 부분이든 아니면 신약이라는 기독교의 자체적인 경전이든 관계 없이 "유대교가 먼저 정하고 난 한참 다음에야 자체적으로 그동안 70인역을 따르자는 다수파 기준대로 기독교 내적으로 정한 것"인데, 이것이 나중에 "개신교가 생겨날 당시 자증성과 같은 자체적 교리 타당성과 과거 히브리어 경전을 더 중시한 소수교부의 의견에 따라 그동안의 주장을 무효화하고 새로이 성경관을 세운 것으로 보면 된다. 어차피 개신교는 성경이 무오하고 교황과 공의회도 오류가 있다고 보니 이거 가지고 논쟁하기도 그렇다.
개신교에선 제1경전과 제2경전 사이에는 신학적으로 다소 차이가 있다고 본다. 제1경전이 주의 권능과 은총을 중시한다면, 외경은 교회와 신앙 공동체(제2경전에 의하면 이스라엘)를 중시한다고. 그 외에도 마카베오기 하권의 구절 등을 거론하며 사상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인정하지 않는다. 또 다른 것은 신약성경의 '''인용성의 차이'''인데, 일반적 인용과 성경 권위로서의 인용이 있다는 것으로 신약성경의 인용한 구약의 구절들을 보면 성경 권위에 따른 인용에는 외경의 내용이 없다는 사례를 든다. 일반적인 인용으로는 그리스 철학자 말이나, 외경의 목록도 포함된다. 대한성서공회의 설명과 멋진비움의 블로그 내용에 나온다.
정교회는 76권을 정경으로서 인정하지만 각 국가별 교회에 따라서 약간의 시선 차이가 있으며, 주요국의 정교회는 공통적으로 제2경전에서 교리를 도출하지는 않는다.[27] 천주교는 이 70인역을 다시 라틴어로 번역한 성 히에로니무스의 불가타 성서를 주된 기준으로 70인역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므낫세의 기도와 에스드라 1, 2서가 빠져 있다.
유대교도 구약은 기독교와 공유하며, 그중 모세5경이라 불리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토라'''(율법)로서 특히 중요시한다. 또 신약을 대신하여 탈무드가 성경에 준하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유대교와 정 반대로 초기 기독교의 이단 종파 중에는 아예 구약은 인정하지 않고 신약성경만 정경으로 인정한 교파도 있었다. 마르키온파 참고.
참고로 정경이나 외경과 대비되어 위경으로 분류된 문서들에 대해 위서 판별 같은 외적 판단 없이 순수하게 내용으로 평가하는 내적 평가로 비교하자면, 위경으로 분류된 문서들 대부분은 왜 교회에서 버려졌는지 현대적 기준에서 봐도 이해가 된다. 위경으로 분류된 문서들 대부분은 무슨무슨 묵시록 같은 말세 사상을 조장하는 종말론 문서들이다. 아무개가 바울 같은 사도나 예언자들의 도움으로 지옥 구경을 하고, 악마가 갖은 방법으로 죄지은 자들을 고문하는, 철학적으로는 아무 의미 없는 장면들만 나오다가 예수나 주를 만난다는 천편일률적인 내용이다.
이런 문서들이 교회 내에 계속 있었다면 큰 문제가 되었을 것이 분명하고 철학이나 종교적인 의미도 없으니, 어느 종파가 주도권을 잡던 간에 사장될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음은 분명하다.
물론 정경 중에서도 요한계시록 같은, 정경으로 확정되고서도 논란을 일으킨 문서가 있다. 정경으로 확정되고 나서도 수세기 동안 정경에서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이 이어졌고, 현대에도 워낙 자기 입맛에 맞게 왜곡하는 사이비들이 많다보니 굉장히 주의 깊게 취급된다. 위경 중에서도 베드로 복음서처럼 나름의 철학을 담고 있으나 교파 간의 교리 차이로 인해 사장된 것도 있기는 하다. 예를 들면 이집트 어느 수도자의 무덤에서 발견된 베드로 복음은 전체가 아닌 일부만 발견되었다. 살펴보면 현대의 4복음서와 내용이 비슷하나,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4복음서와는 달리 아무런 고통없이 무덤덤하게 있었다는 구절이 나온다. 현대 신학계에선 바로 이 구절이 문제가 되었을 것이라고 본다. 예수가 고통스럽게 피를 흘리며 죽었다는 4복음서의 공통적인 내용이 기독교가 주장하는 삼위일체, 즉 예수가 참 주면서 동시에 참 인간이었다는 증거가 되는데, 예수가 고통 없이 죽었다는 내용은 예수가 인간이 아닌 주라고 주장하는 가현설(假現說) 주장자들(예수가 인간의 모습을 빌린 주이었다고 주장했던 영지주의의 일파)의 주장의 근거가 될 여지가 있으니.
6. 구약성경
6.1. 명칭
율법과 예언서와 그 뒤를 이은 다른 글들을 통하여 위대한 가르침들이 우리에게 많이 전해졌습니다.
-집회서 머리글 1절[28]
תנ"ך. 신구약 전체를 성경으로 인정하는 기독교와 딜리 오늘날 유대교에서는 히브리어 성경만을[30] 성경으로 인정한다. 이를 유대교에서는오늘날의 유다인들은 히브리어 성경을 가리킬 때 미크라(''Miqrq'', 독본 곧 회당에서 읽히는 책)라 부르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세 부분으로 구성된 성경의 각 부분, 곧 토라(Torah, 율법)와 느비임(Nebiim, 예언서)과 크투빔(Ketubim, 성문서)의 첫 글자를 모아 만든 타낙(Tanak)이라는[29]
용어를 사용한다.
-드 쀠리Albert de Pury, "구약성경의 경전", Th. 뢰머Thomas Römer 외 공저, 《구약성경 입문》Introduction à l'Ancien Testament 제1권 (수원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19), 18쪽
의 앞자만을 따서 타낙(TaNak, תנ"ך)이라 불러왔다.[31] 토라, 느비임, 케투빔의 삼분 구조는 유대교에서 인식하는 위계적 순서 및 회당 전례에서의 상이한 사용에도 상응한다. 토라가 가장 중심이고, 여기에 대해 주해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느비임이고, 케투빔은 시편과 다섯 메길롯을[32] 제외하면 상대적으로 그 중요도가 떨어진다.
때문에 유대교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그리고 '구약'이라는 표현이 구약성경에 대한 부당한 평가절하를 부른다는 반성에서 '타낙' 혹은 '히브리 성경'이 중립적 표현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타낙과 구약은 (상당 부분 겹침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동일한 개념인 것은 아니다. 개신교에서 인식하는 구약의 정경 목록은 타낙 정경 목록과 완전하게 동일하지만 가톨릭과 정교의 정경 목록이 타낙 정경 목록과 차이가 있다. 가령 지혜서의 경우, 유대교에서는 지혜서를 타낙으로 생각하지 않는데, 굳이 그리스도인이 지혜서를 타낙이라고 표현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유대교 입장에서는 "지혜서는 구약이다"라는 말보다 "지혜서는 타낙이다"라는 말이 훨씬 더 기분 나쁘고 자극적일 수 있는 것이다. '히브리 성경'이라는 표현도 중립 용어로 쓰기엔 유사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또한 '구약이라는 표현이 구약 성경에 대한 부당한 평가절하를 부른다고 하기에는, 舊라는 말은 그 자체로는 가치중립적이라는 반론이 제기된다. 오래되었다는 것은 뿌리깊음을 의미할 수도 있고,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교는 초창기부터 구약 성경을 '낡았으며 폐기되어야 할' 문서가 아닌 '뿌리'로 인식해왔다. 초창기 그리스도교는 예수가 메시아임을 '구약을 통해서' 보이려 했지, 이를 오래된 문서라며 치워버릴 의도가 없었다.
그 때에 예수께서 "너희는 어리석기도 하다!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그렇게도 믿기가 어려우냐? 그리스도는 영광을 차지하기 전에 그런 고난을 겪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하시며 '''모세의 율법서와 모든 예언서를 비롯하여 성서 전체'''에서 당신에 관한 기사를 들어 설명해 주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말했거니와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나를 두고 한 말씀은 반드시 다 이루어져야 한다." 하시고 성서를 깨닫게 하시려고 그들의 마음을 열어주시며 "성서의 기록을 보면 그리스도는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난다고 하였다.
루가 24장 25-27절, 44-46절(공동번역)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 내부에서 '구약'이라는 표현에 대한 비판이 없는 것은 아니며, 오늘날 독어권 신학자들 일부는 구약성경(Alte Testament)이라는 용어 대신 의식적으로 첫째 성경(Erstes Testament)이라는 말을 사용한다.올리브 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그 가지 몇 개가 잘리고 그 자리에 야생 올리브 나무 가지를 접붙였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접붙인 가지들은 올리브 나무 원 뿌리에서 양분을 같이 받게 됩니다. 말하자면 여러분은 이 야생 올리브 나무 가지들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잘려 나간 가지들을 업신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럴 생각이 날 때에는 '''여러분이 뿌리를 지탱하는 것이 아니고 뿌리가 여러분을 지탱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로마 11장 16-17절(공동번역)
아이히슈테트 교구 사제로 서품되어 뮌스터 대학교에서 구약성서학과 구약주석학 교수로 봉직한 가톨릭 성직자 에리히 쳉어(Erich Zenger)는 《구약성경 개론》(Einleitung in das Alte Testament)에서 구약성경이라는 명칭은 "아예 따옴표 속에 집어넣거나 다른 명칭으로 대체하거나 최소한 보완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쳉어는 구약성경이라는 용어의 대안으로 '첫째 성경'(Erstes Testament)을 지지했는데 그 논거는 다음과 같다:[33]
- 비록 '오래된/옛날의(舊)'라는 낱말이 반드시 부정적 함의를 지닌 것은 아니며 舊를 新과의 대립이 아니라 상관성의 관점에서 파악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명칭은 구약성경의 자기 이해에도 부합하지 않으며 유대교의 이해에도 상응하지 않는다. 유대교로부터 교회의 의도적 분리가 비로소 이 명칭을 만들어 냈거니와, 실질적으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구약을 '시효 지난' 부분으로 오독하게 했으며 '신약에 의해 능가되고' '낡아 버린' 문서들을 여전히 고수한다는 의미에서 유대교에 대한 평가절하와도 결부되어 있다.
- '첫째 성경'이라는 명칭은, 그리스도교 신학적으로 타당한 다음 명제를 옳게 반영한다: ⓐ첫째 성경은 하느님이 당신의 '첫째/맏 아들(참조: 탈출 4,22; 호세 11,1)인 이스라엘과 맺은 저 '영원한' 계약을 증언한다 ⓑ이 계약은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이민족들도 그 안에 이끌어 들이고자 하시는 거대한 '계약 운동'의 '시작'이다.
- '첫째 성경'은 '둘째 성경'을 가리킨다. 후자가 전자 없이 존재할 수 없듯이, '첫째 성경'이라는 그리스도교적 명칭 또한 첫째 성경 자체만으로는 (그리스도교 신학적으로 볼 때) 온전한 그리스도교 성경이 아니라는 사실에 주의를 환기시킨다.
6.2. 개요
타낙은 근대적인 저자 문학이 아니라 고대적인 전승 문학이기에, 수많은 전승들이 인용되어 있다. 따라서 히브리 민족이 단일혈통이 그대로 쭈욱 이어져 온 것은 아니라는 것도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여러 부분에서 당대 주변 민족들의 문화와 관습의 자취가 많이 섞여 있다. 기본적으로 천지창조와 유대인들의 종교적인 기원과 역사, 율법의 성립을 다룬 토라(모세오경), 역사서(히브리인과 왕국 시대의 역사), 찬미가, 여러 시와 문학들,(시편과 잠언, 욥기, 아가 등), 성전 건축과 각종 종교행사 관련 기록, 종교에 근거한 법률(율법)적인 문제에 대해 논하는 내용, 그리고 예언자들의 당대 유대 사회에 대한 경고와 미래에 대한 예언을 기록한 예언서(호세아, 요나, 이사야, 느헤미야, 다니엘 등)와 제2경전(토빗기, 유딧기, 마카베오 상,하권, 바룩서, 지혜서, 집회서)으로 구성되어 있다.
타낙은 무척이나 긴 시간에 걸쳐서 여러 필자가 참여하여 만들어졌다고 전해진다. 모세는 기원전 10세기 이전에 모세오경을 작성하였다고 하고[35] , 다윗은 시편의 대부분을 지었다고 하며, 솔로몬은 잠언의 대부분을 작성하였다고 한다. 솔로몬 이후 바빌론 포로 귀환 이후까지 여러 예언자들이 예언서를 작성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저자와 연대에 대한 전통적 견해는 소극적으로든 적극적으로든 수정이 가해지고 있다. 먼저 기원전 10세기 전의 문헌은 없었다는 것이다. 이유인즉, 그전에는 애초에 팔레스티니에 독서 문화가 없었기 때문. 따라서 경전연구자들은 대부분 언어학적 지식이 있는 경우라면 기원전 10세기 이후의 기록된 것이라는 점을 정설로 볼 수밖에 없으며, 실상적으로는 문법이나 문체상의 문제가 있고 그 기록 방식의 엄격성을 고려하면 특히 오경의 경우 전통적인 연대의 개연성이 낮아진다. 참고로 현재까지 학자들이 발견한 성서 사본 중 가장 오래된 것은 기원전 7세기경[36] 에 기록된 민수기 6장. 연대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아래의 '성서 주석학적 연대 정리' 참조.
또 워낙 오랜 전승을 담고, 다양한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 문헌이다 보니, 서로 다른 신학적 관점을 보여주는 경우도 종종 있다. 대표적으로 요나 선지자는, 자신들의 나라를 멸망시킨 이방인들의 도시가 심판받아 망하기를 바라다가 주님에게 혼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근데 잘 읽어보면 요나 선지자의 경우 소돔과 고모라같은 케이스와 달리 이방인들의 도시(니느웨)가 멸망하지 않은 건 왕부터 천민까지 철저히 회개한 결과다. 그래서 심판을 하지 않은 것. 또한 거기에 그치치 않고 회개한 요나서의 니느웨 사람들이 마지막 때에 믿는 자들과 함께 부활해 신약 시대의 타락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심판할 것이라는(누가복음 11장 30~32절) 엄청난 언급도 있다.
타낙에서 일관된 내용들을 보여주지 않고 서술 시각이 다른 것도 신학적 종파간의 문제와 분쟁에서 기인한다. 구약 내에서 나타나는 관점의 경우는 정치적 상황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즉, 여러 분파주의적 관점이 섞여들고 정치적으로 볼 때 이건 넣어야 한다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 교차하게 되는 것을 고려해 보면 관점이 일관된 것이 더 이상하다.
정리해 보면 실질적으로 구약 경전이 수립된 것은 적어도 기원전 6세기 이후, 기원전 3~4세기경, 그리고 체계적인 경전이 나타난 것은 기원전 2세기경으로 보는 것이 맞으며, 그것이 정경으로 확립된 것은 1세기 말엽으로 보는 것이 정석적인 견해다.
율법서(모세오경) 같은 경우는 고대 유대인들의 종교 의례·생활 규범에 대한 교리를 제시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고대 부족사회를 반영한 율법이다 보니 좋은 율법도 있지만 현대 기준으로는 반인권적인 규정도 많다. 타낙에 묘사된 총 율법의 수는 613개나 된다고 한다. 자세한 것은 성경/구약 교리 요약을 참고. 지금도 하레디유대인들 같은 극단적인 사람들은 이를 최대한 많이 지키려고 한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예수의 십자가 희생과 사도들의 신학적 논쟁을 통해 율법에서 신자들을 해방[37] 시켰기 때문에, 현재 기독교에서 십계명을 제외한 구약의 자잘하고 삶의 제약이 심한 율법들은 강제로 지킬 필요가 없다는 것이 정식 교리다.
성경은 종교적 관점을 중시하며 역사적 정확성은 높지 않지만 중동 강국들의 흥망성쇠 흐름을 따르고 있으며, 역사에 관심있는 사람들이 보면 '''아니 이 사람이 왜 성경에 나오냐''' 싶은 사람들도 많다. 대표적인 예가 바빌론의 네부카드네자르(느부갓네살)와 페르시아 제국의 왕들. 특히 키루스 대제(고레스)는 유대인을 해방시켜준 기름 부음 받은 이며,크세르크세스(아하수에로)가 에스더의 남편이란 것 등 신앙의 자유를 보장한 페르시아에 호의적인 이야기가 많다. 또한 제2경전에 속하는 마카베오기에서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나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 등 헬레니즘 시대의 인물들이 (부정적으로) 언급되기도 하다.[38] 또한 에스델서에는 클레오파트라와 그의 남편 프톨레마이오스가 언급되며, 마카베오 상권 8장에서는 고대 로마의 공화정, 원로원, 집정관 등에 대한 간단한 설명도 있다. 예언서의 경우에는, 주변 국가인 아시리아, 신바빌로니아, 페르시아 등의 흥망성쇠가 언급되어 있기도 하다. 또한 기년법이 당시 그 지역에 영향을 끼치던 패권 국가를 따르는 경우도 흔하다. 이를테면 학개에서는 이 책의 배경이 다리우스 제2년이라고 1장 1절부터 밝히고 있고, 신약의 경우도 루카 복음서 3장 1절에서는 세례자 요한의 활동 시기가 티베리우스 15년이라 밝히고 있다. 그렇기에 역덕들이 보면 의외로 소소한 재미를 찾을 수도 있다. 다만 성경을 가지고 중동 역사를 공부할 때 히브라인들의 역사를 주로 서술하기 때문에 중동 전역의 역사를 아우르기에 부족하다는 점을 명심해야되고,. 비록 성경이 당시 중동의 역사를 반영은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히브리인들의 관점에서 서술되어 있기에 이점에 있어서 주의해야 한다.[39] 물론 두권의 마카베오기처럼 정말 본격적으로 역사를 서술할 목적으로 쓰인 책들도 있지만, 그런 것들을 모두 감안해도 성경만으로 중동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역사라는 관점에 한정해서 보자면) 불경만으로 고대 인도 역사를 공부하는 것과 비슷하게 한계점이 많다. 성경의 저자들이 실제 역사를 말하려는 의도가 없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 화법이 오늘날 흔히 생각하는 역사책과는 차이가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히브리인들은 전통적으로 구약을 율법서와 예언서와 성문서로 나누었는데, 성문서에는 지혜 문학과[40] 역사서, 시서 등이 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오경(율법서)도 예언서도 아니라면 성문서로 취급되며, 약간 의외이게도 다니엘#s-1은 예언서가 아니라 성문서로 분류되어 있다. 유대교에선 율법서>예언서>성문서 순으로 그 권위를 해석한다.
또 타낙을 제대로 읽다보면 그야말로 방대한 분량에 걸맞는 온갖 종류의 범죄나 논란이 되는 사건들, 전쟁들이 등장한다. 창세기 초부터 동생을 죽이는 카인이 나오질 않나, 창세기에서 죄로 인해 멸망받았다는 소돔에서 유일하게 구제받은 롯은 의로운 인물로 대접받지만, 자신을 구해주러 온 천사의 등짝을 보려는 마을 폭도들을 달랜답시고 '''자기 딸의 등짝을 대신 보라는''' 제안을 한다거나[41] , 이후에 배우자가 없어 대를 못 잇게 된 딸들의 의기투합에 의하여 근친상간을 '''당하게''' 된다거나 등. 그 다음에 그 딸들의 자손이 저주받으며 그들이 저주받은 이유는 저 역강간 때문인데, 여기에도 현대인의 관점으로 이해하기 힘든 연좌제가 적용된다. 죄를 지은 것은 롯의 딸들인데 그 자손들까지 저주를 받았다는 것이다.[42]
그 외에도 사사기에 마을 무뢰배들에게 레위인의 아내가 강간당하고 죽임을 당하자 그 시체를 인수분해해서 각 지파에게 보냈다는 내용부터[43] 서로 머리채를 휘어잡고 옆구리를 칼로 뿍찍뿍찍했다는 내용까지… 이 정도면 고어물을 능가한다. 또한 옛 조상이 사는 땅,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돌아온 유대민족은 지금껏 그곳에 살던 타 민족들과의 전쟁을 벌여 땅을 점령해가는 내용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데, 죄가 너무나 만연하여 소돔과 고모라같이 너무나 악한 민족을 멸절시키는 내용이 나온다. 대표적인 예로 예리코의 전투나 가나안 정복기 등을 들 수 있다. 이집트에서 탈출한 히브리인들에게 정복당하고 멸망당하는 가나안 족속의 죄목도, 이집트에서 탈출하기 몇 백 년 전 기록인 창세기와 구약 제2경전인 <지혜서> 등지에 기록되어 있다.
흔히 유대 민족이 타 민족을 전멸시키고 노략질을 한 것에 대해 하느님이 벌했다는 오해를 하는데,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학살과 노략은 모두 '''극선하다는 하느님의 명령으로 시행된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심지어 사울의 경우처럼 다른 민족의 소유를 전멸치 않았다는 이유로 벌을 받는 경우도 있다. 덕분에 이는 기독교를 비판하는 이들의 좋은 떡밥거리가 되기도 한다. 당시 이스라엘 주변 국가와 민족들은 수간, 인신공양, 문란한 문화 등 야만적인 관습이 많았는데 성경에서는 이를 타락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타낙, 특히 모세오경 중에는 이런 식으로 현대 가치관으로 이해하기가 힘든 내용이 심심찮게 나온다. 이런 서술은 고대 유대인들의 생각을 반영한 것이다. 예를 들면 롯의 자손들이 대대로 저주를 받는 것은 당시 연좌제가 당연했기 때문이다. 고대인들의 기준으론 축복은 자손 대대로(수천 대까지) 받는 것이고 저주도 자손 대대로 받는 것이 당연했다. 그 시대야 그것이 수용될 만한 것이라 하더라도 현대에서도 그것을 수용해야 하는지는 문제가 될 수 있다.
6.3. 구약 성경 정립의 역사
유대교는 타낙(히브리 성경)을 율법서(토라,기독교에서는 모세오경이라 부름), 예언서, 성문서(시편 등)로 분류한다. 이 중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이 율법서이며, 유대교의 구약관은 율법서를 중심으로 한 동심원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본래 율법서에 적혀있는 내용들은 오늘날과 같은 형태가 아니었으며, 부분적인 기록이나 구전 등으로 흩어져 내려오던 것이다. 그러나 기원전 597-587년의 바빌론 유배는 유대인의 정체성에 심각한 위기를 초래했다. 이스라엘과 하느님 사이의 관계를 떠받치고 있는 모든 기둥들이 뿌리째 흔들린 것인데, 왕은 유배 당했고 하느님 현존의 상징인 성전은 파괴되었고, 하느님의 선물인 '약속의 땅'은 이방인에게 점령 당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도대체 누구이시고 그분은 어떤 방법으로 백성에게 개입하시는지를 말할 수 있는 다른 길을 모색해야 했다. 따라서 히브리인들은 기존 문헌들을 총합하여 '움직이는 조국'이라 할 수 있는 율법서를 써내게 된다. 특히 바빌론을 무너뜨리고 뒤를 이은 아케메네스 페르시아는 피지배 민족에게 종교적 자치권을 부여하였고, 히브리인들이 종교적인 전승들을 법전의 형태로 엮는 데 적대적이지도 않았다. 이렇게 율법서는 크게 네 가지 계통의 문헌이 합쳐져 작성된 것으로 흔히 여겨진다.그라츠(H. Graetz, 1871) 이후의 지배적인 이론에 따르면, 구약 경전의 세 부분은 - 이 부분을 이루는 책들이 오래된 것이라는 속단을 배제한 채 - 점진적으로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토라는 페르시아 시대 말기 이전, 늦어도 400년 330년 사이에 집대성되었으며, (전기 예언서와 후기 예언서가 잇따라 배열된) 지금 형태대로의 느비임은 기원전 200년경(Steck, 1991 참조),[44]
다시 말해서 팔레스티나에서의 프톨레마이오스 시대 말기에 출간되었다. 한편 크투빔은 훨씬 불규칙적이며 보다 개방적인 하나의 총서를 이루고 있었다. 이 총서는 기원후 1세기 말 '야브네(Yabne)[45] 종교회의'에 라삐 유다교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 비로소 마무리되었을 것으로 본다. 기원후 70년 로마제국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난 다음 크투빔 수집이 마감되었으며, 그 결과 성경 전체가 완성을 보게 된다. 이로써 유다교의 위경적인 종교문학 양산에 종지부가 찍히고, 이단적이라 평가된 작품들, 특히 묵시적 또는 그리스도교적인 작품들이 유다교 경전에 삽입되는 일이 차단된다. 야브네의 라삐들은 팔레스티나와 디아스포라의 유다교 공동체에 확고하면서도 공인된 '기록들'을 제공함으로써 유다교가 새로운 국가적 재앙 속에서도 살아남을 가능성을 부여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로의 히브리어 성경이 탄생한 배경이라고 말할 수 있다.
-드 쀠리Albert de Pury, "구약성경의 경전", Th. 뢰머Thomas Römer 외 공저, 《구약성경 입문》Introduction à l'Ancien Testament 제1권 (수원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19), 24-25쪽
첫 번째는 J문헌(야훼계 문헌)이다. 이는 가장 오래된 문헌으로,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지칭하기 위해 기원 설화로부터 시작해서 오로지 야훼라는 고유 명사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불린다. J문헌은 인간 창조로부터(창세 2, 4ㄴ-25) 모세의 죽음(신명 34), 더 나아가 땅의 정복에(여호 19)[49]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의 백성의 역사를 이야기한다. J문헌은 왕정 초기, 좀 더 자세히는 솔로몬 시대(기원전 940년경)에 기록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J문헌의 핵심 본문은 창세기 12,1-3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소명 이야기로 보이며, J문헌 계통의 저자는 이스라엘에게, 이 본문에서 이루어진 약속들이 다윗과 그의 후계자가 주도한 완정 제도의 설정과 함께 실제로 성취되었음을 상기시키려 노력한다. 또한 J문헌은 유다 지파를 다소 편애하는 감이 있는데, 여기서 저자가 유다 지파 출신임을 알 수 있다.[50]
두 번째 문헌은 E문헌(엘로힘계 문헌)으로, 이 문헌은 하느님을 엘로힘이라 부르기에 이렇게 불린다. 독일어로는 '야비스트'(Jahwist), 영어로는 '야위스트(Yahwist)'나 '저호비스트(Jehovist)'라 불리는 편집자를 통해 야훼계 문헌과 일찌감치 결합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며, 그 결과 창세기 20-22장의 아브라함 이야기의 경우 엘로힘계 문헌은 단편으로만 남게 되었다. 탈출기부터는 E문헌을 찾아내는 데 어려움이 많으며 야훼계 문헌에서 엘로힘계 문헌을 떼어 내는 작업을 포기하는 경우도 많다. E문헌은 경외심과 도덕적 자세를 강조한다. 또한 E문헌은 북 왕국 예언자들과 가깝다는 점에서, 북 왕국에서 나온 문헌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이후 북 왕국이 아시리아에게 멸망하면서 남 왕국에 유입되어 받아들여진 것을 보인다.
세 번째 문헌은 D문헌(신명기계 문헌)이다. 이 문헌은 신명기의 최초 본문을 가리키며, 기원전 622년 요시야 임금의 개혁을, 특히 예루살렘 성전을 합법적인 유일한 성소로 격상시킨 중앙 집권 정책을 정당화시키는 데 기여했다. D문헌은 계약과 선택을 주제로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관계를 강조한다. 또한 D문헌이 율법을 말하는 부분은, 또한 반복적이면서도 열정적인 독특한 문체로 율법을 설명한다.[51] 물론 D문헌은 신명기에만 쓰인 것은 아니고, 신명기 이외의 율법서에서도 문체의 연속성이 나타난다. 이를테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조상들의 하느님' 등의 표현은 D문헌의 문체다.
네 번째 문헌은 P문헌(사제계 문헌)으로, 창세기 1장의 천지 창조의 첫 번째 이야기로 시작해서 모세의 죽음 또는 약속의 땅 진입으로 마감된다. 이 문헌의 의도는 사제 제도, 할례, 파스카 축제 등 제의 제도의 정당화에 있다. P문헌은 '''가장 늦은 시기에 작성된 최후의 문헌이자 율법서의 기초 문헌'''으로, 다른 문헌들은 P문헌의 보충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시기적으로는 바빌론 유배 시대나 그 이후 히브리인들의 정치적 자립이 결여되어 있던 시기에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P본문들은 표현이 간결하며, 수적 정확성과 족보에 관심을 가지며, 경신례와 전례에 관계 된 모든 것을 선호한다. 이러한 P문헌의 특징은, 바빌론 유배로 인한 공간적 분산을 전제로 하면서도, 페르시아 시대에 사제단과 재건된 성전을 중심으로 유대인 공동체를 조직하려는 시도를 드러낸다. 그렇기에 유대인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제시되는 제의와 축일들을 자주 언급한다.
이와 같이 여러 본문이 합쳐져서, 페르시아 시기 때 우리가 아는 율법서의 최종형태(혹은 최종형태에 매우 근접한 모습)이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율법서는 에즈라가 이를 확정하고 기원전 398년 공포한 이래 공적인 결정의 척도가 되었다. 페르시아 정부는 이때부터 다섯 권으로 된 '모세의 책들'을 제국의 모든 유대인들을 다스리는 헌장으로 인정하였으며, 제국의 유대인들 또한 이 책들에 신앙과 실천 생활에 관한 문제를 조정하고 해결하는 규범적 가치를 부여했다.
율법서에 이어서 집대성 된 모음집은 '예언서'이다. 예언서는 전기 예언서와(여호수아기, 판관기, 사무엘기 상하권, 열왕기 상하권) 후기 예언서로(이사야서, 예레미야서, 에제키엘서, 12개의 소예언서) 나뉜다. 예언서는 토라에 버금가는 규번적 권위를 가지지는 못하지만, 율법을 실천적으로 주해하는 기초가 되었고 율법의 효력을 넓혀 나갔다.
마지막으로 확정된 것은 '성문서'이다. 이는 예루살렘 성전의 경신례와 회당 집회 때 사용되었고, '시편'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성문서의 책들은 권위나 수용 면에서 그 사정이 각기 달랐다. 각 권의 권위는 그 용도에 따라 큰 차이를 보였다.
이렇게 율법서, 예언서, 성문서가 합쳐진 것이 오늘날 우리가 부르는 구약의 기초 형태다. 그러나 이 시기까지는 정경목록이 확정되지는 않았다.
이후 헬레니즘 시대가 도래하면서 유대교와 구약은 변화를 맞이한다. 한 히브리 공동체가 기원전 4세기 말엽에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시워졌으며, 이때에 팔레스타인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강역에 있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페르시아가 그러했던 것처럼 종교적 특권을 히브리 공동체에 허용했으며, 이 특권으로 히브리인들은 국가의 보호 아래 고유한 율법으로 관리되는 '민족'을 이루면서 자신들의 경신례와 문화적 특수성을 보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집트의 유대인들은 점차 일상에서 그리스어를 쓰게 되면서, 율법 역시 그리스어로 곧 번역되었다. '아리스테아의 편지'라 불리는 문서에 의하면 이 번역은 프톨레마이오스 2세 시대에 왕명으로 알렉산드리아에서 이루어졌으며, 예루살렘의 대사제가 선정한 팔레스티나의 72명의 유대인 학자들이 일을 맡았다고 한다. 여기서 번역된 책을 '칠십인역'이라 불리게 된다. 또한 아리스테아의 편지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이 그리스어로 번역된 율법이 히브리어 율법과 동일한 가치를 지녔다고 인정한 것이 드러난다.
처음에 칠십인역은 율법만을 번역하였으나, 후에 율법에 이어 유대교의 신앙과 삶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되는 책들도 번역하게 되었다. 예언서와 시편이 먼저 번역되었고 기타 문서들이 작품의 영향력과 권위에 따라 그 뒤를 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마저도, 유대교 전체에서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경전의 범위를 자세히 알기는 어렵다. 단편적인 사실들은 그나마 남아있는데, 로마인들에게 맞섰던 유대인들의 최후 저항 요새였던 마싸다(기원전 73년 함락)에서 집회서 두루마리 하나가 발견되었기에 회당에서는 집회서가 쓰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분파별로는 여전히 복잡하다. 사두가이는 오직 율법서만을 인정했으며, 오늘날의 용어를 쓰자면 '가장 좁은 정경 목록'을 사용했다. 한편 쿰란의 에세네 공동체는 토빗기와 집회서는 물론 바룩서도 사용했으며, 에녹서나 희년서와 같은 몇몇 외경들과, 공동체 생활을 규제했던 공적인 문서(공동체 규칙서, 성전(聖戰) 규칙서, 성가책, 새 예루살렘서 등)에도 똑같은 권위를 인정하였다.
그리고 그래츠에 따르면 기원후 80년에서 100년 사이쯤에, 바리사이 유대인 학자들은 얌니아에 모여 경전 목록을 작성한다. 우선 이들은 논란이 되던 몇몇 책들의 권위를 확인했으며(코헬렛, 아가, 에스테르기), 그들이 보기에 최후의 예언서라 할 수 있는 하까이서와 즈카르야서와 말라키서 이후의 책들은 경전 목록에서 제외했다. 이와는 달리,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한 디아스포라의 유대인 사회는 70인 역을 보았기에 제2경전에 속하는 책들은 물론 주요 외경들까지 경전으로 받아들여 사용하였고, 이는 그곳에서 주로 활동하던 기독교 세력에게 계승되었다.
기독교는 앞서 설명하였듯이 1세기에는 유대교 회당에서 유대교의 한 분파로서 활동하였기에 당연히 유대교에서 쓰던 경전들을 계승했다. 다만 1세기 유대교는 하나의 통일되고 일관된 공동체가 아니었고 '정경 목록' 역시도 유대교 내부에서는 통일되지 않았었다.[52] 다만 대략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이른바 얌니아 회의에서 제외된 상당수의 책들을, 이미 직업이 끝난 그리스어 역본을 바탕으로 계속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2세기 초 랍비 아키바의 할라카와, 3세기 초반 오리게네스의 증언은 이를 잘 보여준다. 랍비 아키바는 집회서 등의 외경을 보는 무리(당시 나자렛파로 불리던 유대계 기독교인)들을 멸망당해 마땅한 이단으로 저주하며 유대교 안에서 축출을 시도하였다.[53] 오리게네스는 얌니아에서 확정된 유대교 성경을 수용하는 방향으로 기울어 있던 자들을 반박하며, 구약 성경의 그리스말 역본을 기초로 한 '기독교 성경'의 권위를 옹호하였다. 이렇게 기독교 경전은 서방 교회를 중심으로 점진적으로 확정되어 나갔다. 그러나 동방 교회는 경전을 확정할 규범 마련을 위해 어떠한 법적인 결정도 내려 본 적이 없으므로, 오늘날까지도 정경목록에 대해 통일되지 않은 입장을 보여 왔고, 정교회권 신학자들의 견해도 약간씩 다르다. 반면 서방 및 북아프리카 교회는 카르타고 공의회와 인노체시오 1세 교황의 편지가 입증하고 있듯이 4세기 말경부터는 제2경전을 포함한 공통 목록을 소유하게 되었다.
6.4. 성서 주석학적 연대 정리
구약 성경의 시기는 대략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54]
6.5. 타낙의 3분 구조와 구약의 4분 구조의 해석학적 체계
타낙의 3분 구조(토라, 느비임, 케투빔)는 바탕에서 서로 연결된다.
토라의 끝과 느비임의 시작:
느비임의 끝과 케투빔의 시작: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여호수아는 지혜의 영으로 가득 찼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의 말을 들으며, '''주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실천하였다.'''(신명 34,9)
(야훼께서 여호수아에게): 오직 '''너는''' 더욱더 힘과 용기를 내어, 나의 종 '''모세가 너에게 명령한''' 모든 율법을 명심하여 '''실천'''하고, 오른쪽으로도 왼쪽으로도 벗어나서는 안 된다. 그러면 '''네가''' 어디를 '''가든지''' 성공할 것이다. 이 '''율법서'''의 말씀이 네 입에서 떠나지 않도록 '''그것을 밤낮으로 되뇌어,''' 거기에 쓰인 것을 모두 명심하여 '''실천해야''' 한다. 그러면 '''네 길이 번창하고 네가 성공할 것이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지파들에게): '''주님의 종 모세께서''' ··· '''너희에게 이르신''' 말씀을 '''기억하여라.'''(여호 1,7-8.13)
토라와 느비임의 연결에 의해서, 여호수아가 '율법서'로서의 모세의 토라를 글자그대로 준수하는 첫 사람이라는 점이, 바로 그렇기에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그의 길이 성공한다는 언명이 강조된다. 그리고 느비임과 케투빔의 연결에 의해서 ㄱ. 악인과 의인의 대비 ㄴ. 야훼의 심판과 연결된 종말론적 관점 ㄷ. 야훼의 가르침(토라)을 통한 구원이 강조된다.'''너희는 나의 종 모세의 율법,'''
내가 호렙에서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모세에게 내린
규정과 법규들'''을 기억하여라.'''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리치지 않으리라.(말라 3,22-24)
행복하여라!
악인들의 뜻에 따라 '''걷지''' 않고 ···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토라)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 하는''' 일마다 '''잘되리라.'''···
의인들의 '''길'''은 주님께서 알고 계시고
악인들의 길은 멸망에 이르기 때문일세.(시편 1,1-3.6)
그리고 마지막으로 케투빔의 마지막인 역대기에 의해서 타낙은 종결되는데, 이를 통해 AD 1세기의 예루살렘 성전 파괴를 극복하고자 하는 종결 의도가 드러난다:느비임에 관하여 스텍(O.H. Steck, 1991)은 이 거대한 경전 일체가 정리되어 나간 단계를 추적했다. ''Corpus propheticum'' 곧 네 권의 예언 신탁집{{{-2 (이사야서, 예레미야서, 에제키엘서, 열두 소예언서)은 기원전 220년 이전에 문학적 구성이 완료되었을 것이며, 기원전 200년경에 신명기계 '역사'의 둘째 부분, 곧 미래의 '전기 예언서'(여호수아기, 판관기, 사무엘기 상하권, 열왕기 상하권)가 삽입됨으로써 지금의 느비임으로 그 폭을 넓혀갔을 것이다. 이 예언집은 매우 인상적인 구조를 보여준다. 이스라엘의 역사 이야기, 모세오경에 직접 연결되는 이야기로 시작해서, 이 역사와 관련된 예언 신탁 모음을 열거한다. 따라서 이 예언집은 '이야기'와 '받침 본문'을 병치시키고 있다. 느비임은, 서언과 결어가 증명하고 있듯이, 정리 단계부터 토라에 분명하게 연결되고 토라와의 종속적인 관계 속에 자리하게 된 작품이다.
'''서언'''(여호 1,1-2.7-8)
《1절) 야훼의 종 모세가 죽은 뒤, 야훼께서 모세의 시종인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다. 2)“나의 종 모세가 죽었다. 그러니 이제 너와 이 모든 백성은 일어나 저 요르단을 건너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주는 땅으로 가거라. 7) 오직 너는 더욱더 힘과 용기를 내어, 나의 종 모세가 너에게 명령한 모든 율법을 명심하여 실천하고, 오른쪽으로도 왼쪽으로도 벗어나서는 안 된다. 그러면 네가 어디를 가든지 성공할 것이다. 이 율법서의 말씀이 네 입에서 떠나지 않도록 그것을 밤낮으로 되뇌어, 거기에 쓰인 것을 모두 명심하여 실천해야 한다. 그러면 네 길이 번창하고 네가 성공할 것이다(..)”》.
'''결어'''(말라 3,22)
《22절) 너희는 나의 종 모세의 율법, 내가 호렙에서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모세에게 내린 규정과 법규들을 기억하여라. 23) 보라, 야훼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24)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리치지 않으리라》.
아울러 느비임의 결어는, 비록 엘리야의 역할이 아직은 여전히 토라의 설교자의 역할로 머물러 있다 하더라도, 종말론적인 나아가 메시아적인 관점을 향해 열려 있는 것 같다. 이 결어는 예언자들의 시대가 마감될 것임을 예고하는 즈카 13,2-5에서도 강조된다.
2절) 만군의 야훼의 말씀이다. 그날에 나는 이 땅에서 우상들의 이름을 없애 버려, 그들이 다시는 기억되지 못하게 하겠다. 또한 나는 예언자들과 더러운 영을 이 땅에서 치워 버리겠다. 3절) 그런데도 어떤 사람이 계속 예언하면, 그를 낳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에게, ‘너는 주님의 이름으로 거짓을 말하였으니 이제 더 이상 살지 못한다.’ 할 것이다. (···) 4절) 그날에 예언자들은 예언을 하면서도 저희가 본 환시를 부끄럽게 여기며, 속이려고 입던 털옷을 걸치지 않을 것이다. 5절) 그러면서 '나는 예언자가 아니라 땅을 일구는 사람이오. 사실 젊어서부터 땅이 나의 전 재산이었소.' 하고 말할 것이다.(즈카 13,2-5)
-드 쀠리Albert de Pury, "구약성경의 경전", Th. 뢰머Thomas Römer 외 공저, 《구약성경 입문》Introduction à l'Ancien Testament 제1권 (수원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19), 42-44쪽
한편 그리스도교의 구약 성경이 취하는 4분 구조(오경, 역사서, 지혜문학, 예언서)는 시나이에서의 '원계시'인 토라가 처음에 자리잡고, 다음의 3가지 블록에 의해 일종의 '역사신학적' 도식을 의도한다:페르시아 임금 키루스 제일년이었다. 주님께서는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고,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의 마음을 움직이셨다. 그리하여 키루스는 온 나라에 어명을 내리고 칙서도 반포하였다.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는 이렇게 선포한다. 주 하늘의 하느님께서 세상의 모든 나라를 나에게 주셨다. 그리고 유다의 예루살렘에 당신을 위한 집을 지을 임무를 나에게 맡기셨다. 나는 너희 가운데 그분 백성에 속한 이들에게는 누구나 주 그들의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기를 빈다. 그들을 올라가게 하여라.”(역대 36,22-23)
[62]
그리고 바로 이를 통해서 그리스도교의 구약과 신약이 병렬적으로 연계된다:
[63]
6.6. 구약 성경의 판본
본래 히브리말 성경들은 모음을 기록하지 않았다. 이는 히브리어의 특성에 기인하는데, 이를테면 '축복'이라는 개념을 나타내는 어근을 로마자로 나타내면 BRK이다. 그리고 barek은 '축복하다', berak은 '그가 축복했다', bereku는 '그들이 축복했다', yebarek은 '그가 축복할 것이다', baruk은 '축복된 자'(남성형), beruka는 '축복된 자'(여성형), beraka는 '축복'을 의미한다. 때문에 문맥에 따라 낱말을 다르게 읽었고, 이는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히브리어가 사어가 되면서, 모음을 표기할 필요성이 생겼다. 때문에 AD 7세기경 유대교 학자들은 자음으로 된 본문에서 각종 점과 줄을 덧붙이는 방식으로 모음을 기록하였고, AD 10세기경 유대교는 공식적으로 확정된 히브리말 성경 본문을 가지게 된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마소라 본문'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마소라 수사본은 AD 820-850년경 필사된 것으로 모세 오경만을 전한다. 마소라 본문 전체를 담고 있는 가장 오래된 수사본은 AD 10세기 초기에 필사된 것으로, 코덱스 알레프(Codex Alep)라 불리나 오늘날에는 불행히도 훼손되어 전해진다. 현재 가장 널리 인용되는 마소라 수사본은 샹트페테르부르크 박물관에 보관된 수사본으로, 1008년경 필사된 것으로 여겨진다.
물론 마소라 본문 역시도 완벽한 것은 아니며, 쿰란 본문(이른바 사해문서)과 비교할 시 적지 않은 차이를 보인다. 또한 칠십인역이 참고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가상의 히브리 성경과도 적지 않은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마소라의 원본인 자음 본문(원 마소라 본문)은 이미 AD 1세기 말 유대교에서 다른 본문들보다 더 우월한 지위를 인정 받은 상태이다. 그러나 역시 그렇다 하더라도 마소라 본문을 100% 완전히 신뢰하기에는 무리가 있기에, 번역자들은 마소라 본문이 변질되었다고 판단되는 경우 다른 본문들을 참조하여 이를 땜빵하곤 한다.
6.7. 구약 교리 요약
정확히 말하면 유대교 율법들을 요약한 문서다.
기독교 신약의 경우 교구 및 종파에 따라 이견이 있는 경우가 많고 그결과, 성경 인용의 절대다수는 성서학 논쟁이 될 수도 있다.
7. 신약성경
'''신약성경'''은 히브리 성경과 달리 '''그리스어'''(코이네 그리스어)로 쓰여졌다. 이는 당시의 예수를 믿고 따르던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다른 지역들에 따른 언어 차이를 해소하기 위해 헬레니즘 시대의 공용어였던 그리스어를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고대 시절부터 로마 제국의 동부 지역에서는 라틴어보다 그리스어가 더 많이 쓰였다.
내용은 예수의 행적과 가르침을 기록하고 해석한 4권의 복음서, 예수가 부활하고 승천한 뒤 교회를 수립하고 복음을 전하며 박해받은 사도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사도행전, 사도 바오로가 각 지방의 교회들에게 보낸 바오로 서간과 바오로 이외의 서간들, 마지막으로 종말론적 내용을 다룬 요한계시록까지 합계 27권으로 되어 있다. 즉,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행적, 교훈(복음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유대인으로부터 비 유대인에게로 전파된 과정(사도행전), 복음의 의미와 그리스도인의 자세(서신서), 종말론적 신앙과 최후 승리(요한묵시록)을 집대성한 문서다. 현재의 문서는 서기 50-150년(100년간)에 걸쳐 성립되었다.
또한 사도행전과 사도들의 서간문은 정식 신약성경으로 인정받기 전에도, '신앙을 올바로 전하는 글'이라 하여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참고문헌처럼 널리 읽혀졌다.
예수의 행적 중에도 애꿎은 무화과 나무에 저주를 내린 일처럼 곳곳에 의아한 부분들이 많다.[64] 참고로 20개가 넘는 복음서 후보(?)들 중에서, 모순이 적고 예수 그리스도의 참 된 행적이라고 판단된 '정경'을 추려낸건 카르타고 공의회 때다. 그래도 복음서마다 모순되고 상이하거나 없는 내용이 적지 않다. 하지만 각 복음서의 기본골격이 한 증인의 목격담과 회상, 기록임을 분명히 하기에 각 화자마다 이 디테일한 차이에 대해서는 크게 문제삼지 않고 있다.다만, 각 복음서가 모두 독립적인 것은 아니고 서로가 서로의 자료를 베끼며 자신의 자료(혹은 주장)을 끼워 넣은 것이 많다. 때문에, 어떤 복음서가 먼저 나왔는지를 연구하는 분야도 있다. Q 사본 참고.[65]
신약성경의 사도행전에서는 지금도 알려진 아르테미스 여신을 섬기는 그리스 사람들을 기독교 신자로 전도하려다 그리스 로마 신화 숭배자들에게 몰매 맞을 뻔하는 사도 바오로의 이야기도 나오고, 윤리와 철학을 배우는 사람이면 반가울 '''에피쿠로스 학파 와 스토아 학파의 지식인'''들도 지나가듯 나오긴 하지만 출현한다.
신약은 367년에 성 아타나시오가 신약성서 '정경' 27서를 확립해 발표하기 전까지는 정경과 외경의 구분이 느슨했다. 당시 문헌들은 손으로 직접 베껴 쓴 필사본이기 때문에 오류가 있을 수 있고, 다문화로 이루어진 로마 제국이기에 번역과정과 배포과정에서 필사자가 가진 문화적 배경을 반영하여 첨삭하며 얼마든지 내용을 수정할 수 있었다. 또한 누구든지 성서를 쓸 수 있었고, 유명한 사도들의 이름을 빌려서 글을 쓰는 것이 일종의 관행이었다. 이에 이교도 비평가 켈수스나 교부인 오리게네스 등의 사람들은, 신약뿐 아니라 구약조차도 신학적 풍토와 필요성에 의해 여러 번 첨삭되고 가필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한 바 있다. 현대에는 성서비평학적으로 가짜 서신으로 강하게 추정되는 문서나 첨삭된 부분들을 어느정도 추려낼 수 있는데, 이를 테면 바오로 친서로 추정되는 문서들과 문체가 상이하다거나,[66] 당시(1세기 안팎)에는 없던 후대(3세기~)의 단어들을 사용하거나, 당시의 확인된 역사와 모순이 있거나 등등의 경우를 의심해 볼 수 있다. 당연히 신약 정경 중에도 가짜 서신으로 의심되는 서간들이 몇몇 확인 되었으나[67] , 그렇다고 성서적 권위가 없어진 것은 아니며 내용에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보지도 않는다. 굳이 비유하자면 육도삼략이 태공망의 저서이든 이름만 빌려 쓴 책이든 간에, 병법가들은 신경을 쓰지 않았고 신경을 쓸 필요도 없던 것과 비슷할 것이다.
8. 읽거나 해석하는 방법
주님께서는 성경에서 인간을 통하여 인간의 방식으로 말씀하셨기에 성경 해석자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신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성경 저자들이 정말로 뜻하고자 한 것이 무엇이며, 주님께서 그들의 말을 통하여 나타내고자 하신 것이 무엇인지를 주의 깊게 연구해야 한다.
성경 저자들의 진술 의도를 알아 내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것들 중에서 ''문학 유형''들도 고려해야 한다.
왜냐하면 진리는 본문에서 역사적·예언적·시적 양식 또는 다른 화법 등 여러 양식으로 각각 다르게 제시되고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 해석자들은 성경 저자가 제한된 상황에서 그 시대와 문화의 여러 조건들에 따라 당시의 일반적인 문학 유형들을 이용하여 표현하려 하였고 또 표현한 그 뜻을 연구해야 한다. '''성경 저자가 글로써 주장하고자 한 것을 옳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에 널리 쓰이던 그 지방 고유의 사고 방식, 언어 방식, 설명 방식 그리고 사람들이 상호 교류에서 관습적으로 사용하던 방식들을 면밀히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성령을 통해 쓰여진 성경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읽고 해석해야 하기 때문에, 성경 본문들의 뜻을 올바로 알아내기 위해서는 전체 교회의 살아 있는 전통과 신앙의 유비(類比)뿐만 아니라 그에 못지않게 성경 전체의 내용과 일체성을 세심하게 고려해야 한다. 성경 해석자들의 임무는 이러한 규범에 따라 성경의 뜻을 더 깊이 이해하고 해석하도록 노력하는 데 있다. 그리하여 어떤 의미에서 준비의 역할을 하는 연구로써 교회의 판단은 성숙하게 된다. 성경 해석에 관한 이 모든 것은 결국 주님의 말씀을 보존하고 해석하라는 주님의 명령과 그 직무를 수행하는 교회의 판단에 속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 계시헌장12
아래에 나와 있는 성경의 대부분의 논란은 여기서 발생한다고 봐도 좋다.사람들이 지적인 이유로 성경을 읽어야 할 필요는 있지만, 이를 하나님의 메시지로 믿는 것은 전체적으로 전혀 다른 문제로 고려된다.
성경을 진리의 말씀으로 읽을 것인지, 종교 경전 중 하나로 읽을 것인지, 유익한 문화서적·역사서적으로 읽을 것인지는 독자 개개인마다 다를 것이다.
성경을 성령의 감동으로 만들어진 진리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더라도 같은 기독교 내에서도 성경의 읽는 방법을 놓고 종파가 갈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어떤 해석이 옳은 것인지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8.1. 성경에서 근거하는 태도와 방법
- 온유함으로 받는다(약1:21)
- 말씀을 믿음으로 받는다(딤후1:13; 히4:2; 11:6)
- 말씀을 사랑한다(시119:48, 97,113, 167; 딤후1:13)
- 말씀이 풍성히 거하도록 한다(골3:16)
- 말씀을 마음에 둔다[68] (눅2:19-51; 시119:11)
- 말씀을 즐거워한다(시119;99, 148)
- 날마다 상고한다(요5:39; 행17:11)
- 종일 묵상한다(시119:97)
- 주야로 묵상한다[69] (수1:8; 시1:2)
- 성령의 조명을 받아 상고한다[70] (요14:16-17; 벧후1:20-21)
- 말씀을 따라 삼간다(시119:9)
- 항상 곁에 두고 읽는다(신17:19; 수1:8)
- 자세히 읽는다[71] (사34:16)
- 지도자의 도움을 받아 깨닫는다(행8:30-31; 17:2)
- 말씀에 순종한다(약1:22; 벤전2:8; 계1:3)
- 자녀들에게 가르친다(신11:19)
- 논쟁이 아니라 유익을 위해 힘쓴다[72] (딤후2:14; 딛3:9)
8.2. 성서주석학을 통한 성경 읽기
우리는 일상에서 말을 할때든 진지한 문어체를 구사할때든, 문자적 의미와 비유, 수사적 의문 등을 자연스럽게 섞어가며 발언한다. 요컨대, 우리는 서로간에 '문학적 의미'로 의사소통을 한다. 그리고 성경 역시도 글이니만큼, 본문 자체는 '문학적 의미'에서 독자에게 말을 한다. 그렇기에 성경을 문자적으로만 혹은 비유로만 파악하려는 것은 올바른 독법이라 할 수 없다. 다만 저자와 독자 사이에 놓인 시공간의 격차 때문에 본문의 문학적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고, 그렇기에 진지하고 열정적인 학습 태도가 필요한 것이다.[73]성경의 의미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는 문자적 의미literal sense다. 문자적 의미는 눈이 보이는 글자 그대로의 의미다. 대부분의 경우 문자적 의미만으로 충분할 수 있지만 많은 경우 이 의미만으로 성경의 깊은 가르침을 파악할 수 없다. 문자적 의미만을 고집하는 축자주의literalism는 때로 근본주의 해석을 낳고 이 해석이 반인륜적 범죄를 부추길 수 있다.
둘째는 문학적 의미literary sense다. 문학적 의미는 성경 저자가 본문 안에 담아 전달하려는 메시지다. 이 의미를 밝혀내기 위해서는 역사비평의 제반 방법이 유용하다. 그러나 문학적 의미에만 매달리게 되면 성경 본문을 과거의 틀에 가둘 수 있다. 또한 본문 해석에 대한 수많은 가설과 이론으로 본문 자체를 해체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셋째는 영적 의미spiritual sense다. 영적 의미는 문자적 의미와 문학적 의미를 넘어서 성경을 읽는 오늘의 독자에게 성령께서 선물하시는 현실적 의미다.
-바오로딸, 《거룩한 독서를 위한 성경 주해》 총서 머리말
가령 신명기에서 전쟁에 관한 율법을 보자. 신명기는 '''"히타이트족, 아모리족, 가나안족, 프리즈족, 히위족, 여부스족을 모조리 전멸시켜야 한다"'''(신명 20,17)고 말한다. 이는 마치 전쟁 중인 이스라엘인 독자에게 가나안인 전멸을 의도하는 것처럼 읽힌다. 하지만 그러한 독법은 단지 현대인의 감수성과 충돌하는 것을 넘어, 신명기 본문이 의도하는 1차적 의미와도 거리가 멀다. 여기 제시된 민족들은 신명기가 저술될때 이미 사라졌기에 이들 민족에 대해 유다인 독자가 느끼는 감정은 현대 한국인이 거란족에 대해 느끼는 감정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따라서 실생활에 문자 그대로 적용할 수도 없었다. 아래에서 게오르크 브라울리크 지적하듯, "이 법은 가나안 원주민들을 꼬집어 열거하고(20,17), 훗날 다른 민족들에 대한 절멸 전술은 분명히 반대한다. 실제로 가나안인들의 근절을 겨냥했다면, 이 법은 대상 없는 요구를 한 셈이다." 오히려 신명기는 이미 쇠퇴한 과거의 민족들에 대해서는 절멸을 말하지만, 독자와 인접하여 사는 인근 민족들에 대해서는 절멸 언급을 피하는 곡예를 구사한다.[74]
또한 저자의 의도와는 별개로, 후대 독자들의 '수용 미학'[75] 관점도 배제해서는 안된다. 물론 성경 역시도 많은 문학 작품들이 그러하듯이 '저자가 의도한 의미'를 경원시할 수는 없지만, 많은 문학작품들이 그러하듯이 '어쩌면 저자가 생각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새로운 의미'를 가지기도 한다.신명기가 서술하고 또 명령하는 가차없는 폭력에 의한 땅 정복은 하나의 관념적 구상물이다. 이것은 신앙이 요구하는 철저함의 상징, 하느님께서 당신의 일을 역사 안에서 완수하신다는 사실의 상징이다. 이민족 전멸 명령의 정형화된 적용은, 가나안 땅 점유 이후의 전쟁들뿐 아니라 훗날 유배로부터 이스라엘의 귀향과 관련해서도, 단호히 배제된다.
열두 지파로 이루어진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을 완전히 정복하고 그곳 주민 전체를 전멸시켰다는 전쟁은, 그 가설을 신명기가 설계하고 그 가설의 성취를 여호수아기가 보도하지만, 역사상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그 땅 주민들의 씨를 말린 잔혹하고 거룩한 전쟁이라는 표상은, 오래된 전승 요소들[예컨대 전리품 획득을 포기하고 신에게 사람·가축·물적 재화를 완전(절멸) 봉헌하는 승전, 이른바 헤렘''herœm''전쟁에 관한 보도들. 이미 멸망한, 부분적으로는 전설적인 종족들 목록. 토박이 종족들의 추방을 포함한 땅 약속들]을 의도적으로 체계화하고 일반화한다. 이 은유Metaphrik의 개별적 모티브들(예컨대 군사적인 테러 위협)은 아무래도 신아시리아의 선전포고와 언어와 표상 세계에서 자극받은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이스라엘 초창기의 '사실史實적' 재구성을 의도했던 것은 아니니, 이민족 절멸 계명은 문학적으로 처음부터 '''우화적·종교적'''인 의미에서 말해진 것이다. 과연 이 계명은 일러야 요시야 시대에서, 즉 이 계명이 적용되는 종족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시대에서 유래한다. 기원전 7세기 말엽인 그 당시 이스라엘은 이미 자기 땅의 큰 부분을 다시 잃었다. 적과 적의 소유물을 절멸시킨다는 헤렘이라는 개념은, 온 땅이 너희 소유이며, 너희가 하느님을 철저히 신뢰하기만 하면, 그분은 그것을 너희에게 넘겨주실 것이다, 또는 잃어버린 땅을 다시 마련해 주실 것임을 암시하고자 했다. 하느님은 당신을 믿고 순종하는 모든 사람을 위해, 당신께 맞서는 모든 자에게 압도적 승리를 거두신다. 여호수아기의 경우도 비슷한데, 이 책은 (신명기계 가나안 땅 정복 설화의) 이 발생사적 단계에서 신명기와 조화를 이룬다. 가나안 땅 점유가 처음에는 정탐자들의 보고를 듣고 난 이스라엘의 불신 때문에 좌절되었고(신명 1,32; 참조: 9.23-24), 여호수아 주도하에 성공했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선물이었다(요약: 여호 21,43-45). 여기서 묘사하는 전투들의 철저성은, 여호수아기의 본디 의미에 따르더라도, 이스라엘 역사 초창기의 초토화 전술에 대한 사실史實적 확언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느님 신뢰의 철저성에 관한 설화적 상징이다. 이 철저한 하느님 신앙(이에 근거해 이스라엘은 초창기에 자기 땅을, 즉 자신의 행운을 얻었다)의 전쟁 은유는 또한 훗날 수백 년간의 국가 존립 이후 실패한 역사의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모세가 요르단 동쪽의 아모리족 임금들과의 헤렘 전쟁을 약설略說하기 전에, 신명기 화자話者의 중간 언급은 뒤이어질 야훼와 이스라엘의 정복 전쟁들과 이민족 절멸을 세계사적 '통례적'인 현상들로 상대화한다. 야훼께서 편을 드셨던(2,21.22) 이스라엘 이웃 종족들(2,12.23)도 이미 당시의 전前 주민들을 결딴냈다.
'''신명기 7장'''의 관점에 따르면, 헤렘은 이스라엘에 대한 야훼 애착의 한 귀결이며, 이스라엘이 하찮고 숫자 적고 힘없지만 야훼에게 선택된 것은, 이 세상에서 그분의 역사적 행동의 도구가 되기 위함이다. 약속의 땅의 강력한 일곱 민족을 절멸(완전) 봉헌하라는 명령의 배경에는, 전쟁을 역사 안에서의 신의 '심판'으로 여기는 근동의 통상적 견해가 있다. 여기서는 인종차별주의적이거나 민족주의적인 경향을 정당화하려는 게 아니며, 참으로 겨냥하는 바는 인간의 행동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끝끝내 신뢰해야 할 이 세상에서 하느님 행동의 절대주권임을 이 관념의 보편주의적·신학적 단초가 분명히 알려 준다.
'''9,1-7'''에서 요르단 서쪽 땅의 정복이란, 은총과 공로에 관한 엄밀한 신학적 논증의 표현 수단일 따름이다. 이 논증은 이스라엘의 완고함을 염두에 두고, 가나안인들의 악함을 평준화한다. 그러므로 양쪽 모두 땅에 대한 권리 주장을 할 수 없다. 이스라엘이 자신의 끊임없는 거부·실패에도 불구하고 그 땅을 얻는다면, 그것은 오로지 야훼께서 우두머리 조상들에게 하셨던 맹세에 충실하신 덕분이다. 다시 말해, 순전한 은총의 선물이다.
'''20,10-20'''의 전쟁에 관한 법은 후대의 전쟁들과, 여호수아 지휘하의 유일회적 주민 절멸 정복 전쟁을 명백히 구별하고 있다(20,15-18). 이 법은 가나안 원주민들을 꼬집어 열거하고(20,17), 훗날 다른 민족들에 대한 절멸 진술은 분명히 반대한다. 실제로 가나안인들의 근절을 겨냥했다면, 이 법은 대상 없는 요구를 한 셈이다.
'''29,21-27'''은 유배를 앞서 내다본다. 그때에는 다른 민족들에게 대항하는 일이 아예 없어질 것이다. 다른 민족들은 이 재앙의 원인을 묻다가, 자신들의 대답을 통해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께서 역사 안에서 당신의 권리를 관철하셨다고 이스라엘과 함께 신앙고백을 하게 될 것이다. 예전에 가나안의 일곱 민족을 그렇게 위험스러운 존재로 만들었던 상황이 반전된 것이다. 요컨대 그들은 이스라엘을 자기 하느님에게서 떨어져 나가도록 미혹할 터였다.
이어지는 '''30,1-10'''의 귀향 예언은 유배된 자들을 이민족들 사이에서 데려옴과 관련하여, 이집트 탈출 때와는 달리, 하느님의 폭력 행위에 관해 전혀 말하지 않는다. 특히 약속의 땅의 새로운 소유에 관한 예언에, 이민족 절멸에 관한 언급은 전혀 없다. 이스라엘의 집합과 약속의 땅으로의 귀환은 이스라엘의 폭력 행위 없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는 원칙적으로 타당하다.
-게오르크 브라울리크G. Braulik OSB, "신명기", 에리히 쳉어Erich Zenger u.a., 《구약성경 개론》 Einleitung in das Alte Testament (분도출판사 2012), 259-261쪽
가령 구약성경의 아가에서 이러한 예를 볼 수 있다. 아가는 유대교에서도 그리스도교에서도, 하느님과 '여성으로 표현된 백성'의 사랑을 노래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본문 그 자체로만 보자면 아가는 그냥 남녀간의 사랑노래이며, 신학적인 이야기는 본문 안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따라서 오늘날의 주석학자들은 아가의 문학적 의미를 주석하는데 주력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독자들의 우의적 감상이 무가치해지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구약 정경에 아가가 들어가 있다는 것이, 본문 그 자체에서는 보이지 않는 우의적 해석을 맥락적 의미에서 옹호해준다.
성경이 쓰여진 시대는 인쇄 기술이 미발달하였고, 일일이 필사를 하여 옮기던 시대였다. 때문에 간혹 앞뒤 일관성의 문제가 제기되기도 하나 많은 기독교 종파들은 대체적으로 하나의 성령 아래에서 씌어졌기에 내용상의 오류나 불일치는 크게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예를 들어 예수가 태어날 것을 가브리엘 천사가 예고하는 장면에서는,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나자렛의 요셉에게 예고하는 것으로 나오나 루카 복음서에서는 성모 마리아에게 예고하는 것으로 나온다. 그래서 기독교계에서는 복음서의 상이한 차이를 '모두 다 받아들여'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수태고지 장면은 처음에 성모 마리아에게 예수의 탄생을 예고한 후, 성모 마리아의 정절을 의심하던 나자렛의 요셉에게 다시 한번 예고한 것이라는 식으로. 복음서마다 상이한 십자가상 7언(가상칠언)의 발언 차이도 복음서마다 묘사된 모든 말을 예수가 다 했다고 보는 게 신학계 정설이다.아가의 신학에 관한 물음에 관련하여 거듭 숙고되는 문제를 쿨C. Kuhl은 이렇게 둘러 말한다: "아가에는 종교적 사상이라는 게 전혀 없다. 과연 책 전체에서 첫 줄부터 끝 줄까지 하느님도 종교도 ··· 나오지 않으며, 그래서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이 책이 정경이 될 수 있었고 더구나 축제 두루마리에 들어가게 되었는가라는 물음을 회피할 수 없다."(C. Kuhl, ''Das Hohelied und seine Deutung'', 1937, 141). 아가에 대한 우의적이고 제의적인 해석은 이른바 매우 세속적인 이 사랑 노래 모음집에서, 텍스트 자체는 제공하지 않는 신학적 의미를 끄집어내려는 시도라고 흔히 비판받는다. 하지만 문학 기호론적 관점에서만 보더라도, 우의적 해석을 아예 그릇된 것으로 평가할 수는 결코 없을 것이다. 한 텍스트의 의미는 그때그때의 맥락에 의해서도 규정된다. 하나의 문학적인 텍스트, 다시 말해 다소간 '열려 있는 텍스트'는 다양한 맥락화를 통해 다양한 의미를 획득한다.아가를 성경이라는 맥락 안에서 읽는 독자에게는 [하느님과 당신 백성 관계의 길고 긴 여정에 관해 이야기하는 성경에서, 이 관계는 사랑과 혼인이라는 개념과 은유를 통해서 표현되거니와{{{-2 (참조: 호세 2장; 예레 2장; 에제 16장; 23장)}}}] 우의적·예형론적 이해가 실로 수긍이 간다. 아가의 이른바 '원래 의미'를 되찾고자 하는 것은 반反맥락화 또는 재맥락화의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루트거 슈빈호르스트쇤베르거Ludger Schwienhorst-Schönberger, "아가", 에리히 쳉어Erich Zenger u.a., 《구약성경 개론》 Einleitung in das Alte Testament (분도출판사 2012), 680-681쪽
성경은 만들어지고 전해지는 과정에서 편집되거나 첨가된 것이 많다. 그래서 후대에 첨가된(혹은 그렇다고 의심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적지 않은 현대 번역에서 해당 부분을 괄호 치고 주석으로 '오래된 사본에는 해당 내용이 없다'고 표시한다. 예를 들어 마가복음의 끝자락 또는 요한복음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 이야기가 있다. 필사자들의 의도적인 왜곡도 있을 수 있지만 기독교는 공인되기 이전에는 탄압받고 숨어서 믿는 종교였기에 기록물 역시 은밀한 방법으로만 전수될 수밖에 없었고, 그 과정에서 확인·대조를 못 한 것이 한 원인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을 때에는 그 내용이 역사적 배경이 나오지만 모든 서술이 실제 사건에 100% 기반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감안해야 한다.
또한 상기되었듯, 성경에는 비슷한 내용인데 논점은 다른 경우도 있다. '누구누구가 멸절당했다'라는 내용과 '누구누구는 구원받았다'라는 기록(예리코 vs 니느웨)들이 그 예시. 다만 종교적인 관점에서는, 예를 들어 예리코는 악의 길을 걸어 멸절되는 원리를, 니느웨는 전도자의 자세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식으로 서로 다른 논점을 가지고 파악함으로써 모순을 피해갈 수 있는 경우도 있으니 그 점은 고려하자.
8.3. 토마스 아퀴나스의 성경 읽기
스콜라 신학의 알파이자 오메가인 토마스 아퀴나스가 「신학대전」 제1권 제1문제에 아주 친절하게 정리해 놓았으므로 참고해보자. 물론 기독교라는 신앙의 틀에서 성경을 해석할 때의 지침이지만, 오늘날의 신자들에게도 매우 유용한 가르침이다.
제9절: 성경은 은유적·상징적 화법을 써야 할 것인가
병행문헌: 「명제론집」 제1권 서문 제5절: 제34구분 제3문제 제1절, 제2절. 「이교도논박대전」 제3권 제119장. 「보에티우스의 삼위일체론 주해」 제2문제 제4절 참고.
아홉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성경은 은유를 쓰지 말아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사실 앞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76]
최하위 가르침의 고유한 것은, 모든 학문 중에 최상위를 차지하는 이 학문에는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가지가지의 유사(類似)나 표상(表象, 표현)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은 모든 가르침 중에 최하위에 있는 시가(詩歌) 고유의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유사를 사용하는 것은 이 학문에는 적합하지 않다.1.그 밖에도 이 가르침의 임무는 진리를 명백하게 드러내는 데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진리를 드러내는 사람들에게는 포상도 약속되어 있다. 「집회서」 제24장 제31절에서는 "나를 빛내는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라."고 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유사를 통해서는 진리가 은폐된다. 물체적 사물들의 유사 밑에 신적인 것들을 전달하려는 것은 이 가르침에 적합하지 않다.
1.그 밖에도 어떤 피조물들은 탁월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신적 유사에 접근한다. 따라서 만일 피조물들에서 어떤 것은 하느님한테로 (하느님과 비슷한 것으로) 취해진다면 이런 채택은 할 수 있는 한 탁월한 피조물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며 최하위의 피조물들에서 이루어질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흔히 이런 사례가 발견된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반론이 있다.
「호세아서」 제12장 제10절에서는 "나는 그들에게 환상을 많게 하였으며 예언자로 하여금 내 유사를 사용케 하였다."라고 한다. 어떤 것을 유사에 의해 전하는 것은 은유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은유를 쓰는 것은 거룩한 가르침에 속한다.
나는 이상의 것에 답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신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물체적 유사 밑에 전하는 것은 성경에 적합하다.''' 사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그 본성에 따라 배려한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감각적인 것을 통해 초감각적인 것, 가지적인 것에 이르는 것이 본성적이다. 그것은 우리의 모든 인식이 감각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에서 영적인 것이 물체적 사물들의 은유 밑에 우리에게 전달되게 되는 것은 적절한 것이다. 또 디오니시우스가 「천상위계론(天上位階論)」 제1장에서 "신적인 광명은 여러 거룩한 베일로 감싸이지 않고서는 달리 우리에게 비쳐질 수 없다."고 한 것도 바로 이 점을 말한 것이다. 영적인 것들이 물체적 사물들의 은유 밑에 제시되게 되는 것은,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제1장 제14절에서도 "나는 유식한 사람에게나 무식한 사람에게나 의무를 지고 있습니다."라고 한 바와 같이,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인 것으로 주어지는 성경에게 합당한 것이다. 그것은 초감각적인 것을 그 자체로서는 이해하기에 적합하지 못할 만큼 무식한 사람들도 어떻든 성경을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1.그러므로 첫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시가(詩歌)는 그 표현을 위해 은유를 사용한다. 그것은 표현이 인간에게 본성적으로 즐겁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경이 은유를 사용하는 것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필요하고 유익하기 때문이다.
1.둘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신적 계시의 빛은 디오니시우스도 말하는 바와 같이, 그것을 가리고 있는 감각적 형상 때문에 소멸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진리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것은 계시를 받은 정신들로 하여금 유사성 안에 머물러 있지 않고 오히려 초감각적인 것들의 인식으로 그 정신들을 들어올리기 위해서다. 또한 계시를 받은 사람들을 통해 다른 사람들도 이런 세계에 대해 가르침을 받게 하기 위해서다. 따라서 성경의 한 곳에서 은유로 전해지는 것이 다른 데서는 더 명백히 설명되는 것이다. 또한 형상적(形像的) 숨김 자체는 탐구자들의 훈련을 위해서도, 불신자들의 조소에 대비하기 위해서도 유용하다. 여기에 대해 「마태오 복음서」 제7장 제6절에서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마시오."라고 한다.
1.셋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디오니시우스가 「천상위계론」 제2장에서 가르치는 바와 같이, 성경에서 신적인 것들을 고귀한 물체의 형상들로보다는 천한 물체의 형상들로 전하는 것은 더 적절한 것이다. 이것은 세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쨰로는 이렇게 함으로써 인간 정신이 더 쉽게 오류에서 해방되기 때문이다. 사실 이때 신적인 것들에 대해 말해지는 것은 고유한 의미로 말해지는 것이 아닌 것이 명백하다. 만일 고귀한 물체의 형상들로 신적인 것들이 표현된다면, (이런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있을 수 있을 것이며, 특히 물체보다 고귀한 어떤 것을 전혀 생각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것들이 아주 의심스러울 것이다. ─둘째로는 이 방법이 이 세상에서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 갖는 인식에 더 적합하기 때문이다. 사실 하느님에 대해서는 무엇인가보다는 무엇이 아닌가가 우리에게 더 명백하다. 따라서 그 유사가 하느님에게서 멀면 멀수록 더욱더 그런 유사는 하느님에 대해 우리가 말하고 생각하는 것을 넘어 하느님에 대한 더 참된 평가를 하게 된다. 셋째로는 이와 같은 방법으로써, 신적인 것이 부당한 사람들에게는 더욱더 감추어지는 것이다.
제10절: 성경은 한 자구(字句) 안에 여러 의미를 갖는가
병행문헌: 「명제론집」 제1권 서문 제5절, 제4권 제21구분 제1문제 제2절 제1소문제 제3이론에 대한 해답. 「능력론」 제4문제 제1절. 「임의(자유)문제토론집」 제3권 제14문제 제1절, 제7권 제6문제 전체.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제4장, 제7강 참고.
열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성경은 한 자구 안에 여러 의미, 다시 말해 역사적 혹은 자의적(字義的) 의미, 우의적(寓意的) 의미, 전의적(轉義的) 내지는 도덕적, 신비적(천상적) 의미 등 여러 의미를 내포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사실 한 성경 안에서의 여러 의미는 혼란과 기만을 조성하며 논증의 견고성도 없게 된다. 따라서 의미가 다양한 명제들에서는 논증이 진행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런 논증에 따른 어떤 오류들이 지적된다. 그런데 성경은 어떠한 오류도 없이 진리를 드러내는 데 있어 효과적이어야 한다. 따라서 성경에서는 한 자구 안에 여러 의미가 전해지면 안 된다.
1.그 밖에도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앙의 유익론」에서 "구약이라고 불리는 책은 네 가지로 전달된다. 즉 역사적으로, 원인론적으로 소급하여, 유비적으로, 우의적으로 전달된다."고 한다. 그런데 이 넷은 앞서 말한 넷과는 다른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성경의 같은 자구가 앞서 말한 네 가지 의미로 해설되는 것은 적합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1.그 밖에도 앞서 말한 의미 외에도 그것들에 내포되지 않는 비유적 의미가 발견된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반론이 있다.
그레고리우스는 「도덕론」 제20권에서 "성경은 그 화법 자체로 모든 학문을 초월한다. 그것은 같은 언사(言辭)를 통해 행적을 말함과 동시에 비의(秘義)를 나타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나는 이상의 것에 답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성경의 작가는 하느님이다. 하느님은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 말만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사물 자체도 제공하는 능력을 갖는다. 그러므로 모든 학문에 있어서 말은 의미를 표현하는데, 이 학문은 말로 표현된 사물들이 또한 다른 어떤 것을 의미케 하는 고유성을 지닌다. 그러므로 말이 사물을 표현하는 첫째 표현이 첫째 의미에 속하는 것이다. 이런 첫째 의미는 역사적 내지는 자의적 의미다. 그런데 말을 통해 표현된 사물들이 다시 다른 사물들을 표현하는 의미 표현은 영적 의미라고 불린다. 그리고 이런 영적 의미는 자의적(字義的) 의미에 기초를 갖고 있으며 또 그것을 전제로 한다.
이 영적 의미는 세 가지 모양으로 구분된다. 사실 사도도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서간」 제7장 제19절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옛 법은 새 법의 상징이다." 그리고 디오니시우스가 「교회위계론」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새 법 자체는 '미래 영광의 상징'이다. 또한 새 법에 있어서는, 머리(그리스도)에서 행해진 것은 우리가 행해야 할 것들의 징표다. 그러므로 옛 법의 것들이 새 법의 것들을 의미한다는 데는 우의적 의미가 있으며, 그리스도에 있어서 혹은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들 안에 이루어진 것들이 우리가 행해야 할 것들의 상징이라는 데는 도덕적 의미가 있다. 그리고 영원한 영광 안에 있는 것들을 의미할 때는 천상적 의미가 있다.
그런데 작가가 의도하는 바는 자의적 의미이며, 또한 성경의 작가는 모든 것을 동시에 그 지성으로 파악하기 때문에 '''자의적 의미를 따라 성경의 한 자구 안에 여러 의미를 발견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론」 제12권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부적(不適)한 것이 아니다.'''
1.그러므로 첫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이와 같은 의미의 다수성은 다의성 혹은 (이와 비슷한) 다른 종류의 다수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하나의 말이 많은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 의미들이 다수화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말을 통해 의미가 표현된 사물 자체들이 다른 사물들의 징표일 수 있으므로 다수화되는 것이다. 이렇게 성경 안에서는 어떠한 혼란도 야기되지 않는다. 그것은 모든 의미는 하나의 의미, 즉 자의적 의미에 기초를 갖기 때문이다. 다만 이 점에서만 논증이 이끌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아우구스티누스가 도나투스파인 빈센티우스를 반박하는 서간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우의적 의미로 말해지는 바에서 논증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이로 인해 성경에서 어떤 것이 잃어버려지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영적인 의미 안에 내포된 신앙에 필요한 것으로서, 성경의 다른 곳에서 자의적 의미로 명백하게 전해지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1.둘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이미 말한 셋, 즉 역사, 소급적 원인, 유비 등은 자의적인 의미라는 하나에 속한다. 아우구스티누스 자신도 설명하는 바와 같이 역사는 어떤 것이 단적으로 서술될 때이고, 소급적 원인이란 말해지는 것의 원인이 지적되는 경우인데, 예컨대 「마태오 복음서」 제19장 제8절에서 모세가 왜 아내를 버릴 허락을 주었는지의 원인을 주께서 직접 지적하시는 경우다. 그것은 그들의 마음의 완고함 때문이라고 하신다. 그리고 유비는 성경의 한 곳의 진리가 다른 곳의 진리에 배치되지 않는 경우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 네 (의미) 중 우의적인 것만이 세 영적 의미를 위해 제시된다. 예컨대 성 빅토르의 위고는 우의적 의미 안에 신비적(천상적) 의미도 포함시킨다. 그는 그의 「명제론집」 제3권에서 세가지 의미, 즉 역사적·우의적·전의적(비유적) 의미만을 제시한다.
1.셋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비유적 의미는 자의적 의미에 내포된다. 그것은 어떤 것은 말을 통해 고유하게 표현되고 또 어떤 것은 형상적(形像的)으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때 자의적 의미는 형상(形像) 자체가 아니고 형상화된 것이다. 예컨대 성경에서 하느님의 팔이라고 할 때 자의적 의미는 하느님이 이런 지체를 지녔다는 뜻이 아니고 오히려 지체를 통해 표현되는 것, 즉 작용의 능력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서 확실한 것은 성경의 자의적 의미에는 결코 거짓이 내포될 수 없다는 것이다.
8.4. 그리스도교 입장에서의 구약 읽기
그리스도인 독자가 구약의 내적 역동성의 종착점이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인식할 때, 이것은 소급적인 인식이며 그 출발점은 본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도들의 설교를 통해 선포된 신약의 사건들에 있다. 그러므로 유다인들이 본문 안에서 선포된 내용을 보지 못한다고 말해서는 안 되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에 비추어, 그리고 성령 안에서 본문 안에 숨겨져 있던 '''잉여 의미(surplus de sens)'''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교황청 성서위원회(위원장: 요제프 라칭거), 《그리스도교 성경 안의 유다 민족과 그 성서(Le peuple juif et ses Saintes Écritures dans la Bible chrétienne)》, 제2부 가.6. 씀.[77]
여기서 관건은 결국 성경의 개개 텍스트들의, 그리고 그리스도교 성경의 경우에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두 부분의 고유한 가치와 의의를 인정해 주고, 그것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규범적 토론으로 이끄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해석학을 규범적 토론의 해석학이라 이름 붙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방법론상으로''' 또는 '''대화상으로''' 이 토론은 이를테면 같은 눈높이에서 이루어지거니와, 여기서는 그때그때 논의되는 하느님 인식들과 하느님 이해들이 신중히 비교되고 관련지어지고 분석되어야 한다.
...... 간단한 예를 통해 설명해 보자.
'''코헬렛'''이 죽음을 인생의 종지부로 주장한다고 해서, 신약성경의 부활 소식에 근거하여 그 책을 신학적으로 불완전한 것으로 비난하고 또 거기서 신약성경에 의해 지양되어야 '''마땅한''' 구약성경의 전형적 한계를 보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에게도 매우 유익한 코헬렛의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하며 더 나아가 신약성경의 부활신학에서 한 중요한 차원을 빼앗는 것인즉, 이 차원은 바로 코헬렛과의 대화에서 명료해진다. 코헬렛은 죽음이 인간 삶을 끝장내며 이것은 하느님도 취소하시지 않는다고 도발적이고 매정하게 강조하지만, 그렇다고 코헬렛에게 인간의 삶이 의미 없는 것이 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반대다. 죽음의 권세에 맞서 코헬렛은 즐거움을 촉구하거니와, 즐거움은 하느님의 선물이요(3,13) 그 안에서 하느님 자신이 인간에게 당신의 말씀을 전달하신다.(5,19). 이렇게 즐거움은 인간이 자신의 필멸성에 대한 인식을 뛰어넘고, 또 자기 삶을 하느님의 현존 안의 삶으로 이해할 수 있는 체험이 된다. 코헬렛의 하느님은 현재의 하느님이니, 그분은 현재의 삶을 안배하시고 사람을 가상의 세계로의 혹은 아예 환상적인 미래로의 도피에서 지켜 주고자 하신다. 그런 도피를 코헬렛은 가로막는다. "네가 가야 하는 저승에는 일도 계산도 지식도 지혜도 없기 때문이다"(9,10). 코헬렛이 '죽음 '''후의''' 삶'이라는 관념을 거부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하느님 현존의 시간으로서 '죽음 '''전'''의 삶'에 대한 중시다. 이것은 그리스도교의 관점에서 보아도 고유한 중요성을 지닌 언명인즉, 신약성경과 상충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죽음 전의 삶'과 '''근본적''' 연장선상에 있는) '죽음 후의 삶'에 대한 믿음에 하찮지 않은 심층 차원을 선사한다.
-에리히 쳉어(Erich Zenger) u.a., 《구약성경 개론(Einleitung in das Alte Testament)》, 이종한 옮김, 33-34쪽.[78]
28. ... 신약 성경이 존재하기에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의 관계에 대한 질문, 예를 들어 신약 성경의 내용이 구약 성경의 내용을 대신하거나 무효화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제기된다. 2세기에 마르키온이 이러한 입장을 내세웠다. 그는 신약 성경이 약속의 책인 구약 성경을 낡아 버린 것으로 만들어, 해가 떠오르면 달빛이 더 이상 필요 없듯이 새로운 것의 광채 안에서 구약 성경이 사라지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히브리 성경과 그리스도 성경의 뚜렷한 단절은 결코 그리스도 교회의 공식적인 가르침이 되지 못하였다. 오히려 그리스도 교회는 144년에 마르키온을 쫓아내며 그가 주장한, 구약 성경의 모든 요소를 제거한 순수한 '''그리스도''' 성경이라는 개념을 배척하였다. 그리고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의 주인이신 유일하신 하느님에 대한 교회의 신앙을 증언하여 두 성경의 일치, 곧 '''계약들의 일치'''(concordia testamentorum)를 견지하였다.
29. 물론 이는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이 맺고 있는 관계의 일부일 뿐이다. 구약 성경의 공동 유산은 유다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유대의 중요한 바탕이 될 뿐만 아니라 두 신앙 공동체들의 관계에 근본적 긴장을 야기하였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신약 성경에 비추어 구약 성경을 읽는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곧 그리스도인들은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표현한 확신을 지닌 것이다. “신약은 구약에 감추어져 있으며 구약은 신약 안에서 드러난다”(「구약 칠경 발췌 주해」[Quaestiones in Heptateuchum], 2,73). 이러한 의미에서 대 그레고리오 교황은 구약 성경은 신약 성경의 선포이며 신약 성경은 구약의 최고의 주해라고 정의하였다(「에제키엘서 강론」[Homiliae in Ezechielem], I, VI, 15;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하느님의 계시에 관한 교의 헌장 「하느님의 말씀」[Dei Verbum], 16항 참조).
30. 이러한 그리스도론적 주해는 그리스도인들이 신약 성경을 구약 성경의 완성으로 여길 뿐만 아니라 신약 성경이 구약 성경을 대신하는 것으로 여긴다는 인상을 쉽게 줄 수 있다. 이러한 인상이 올바르지 않다는 것은, 서기 70년의 제2성전 파괴라는 재난 이후에 유다교도 성경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성전에 묶여 있던 사두가이들은 이 재난에서 살아남지 못하였기에,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고유한 방식을 이미 발전시켰던 바리사이들을 따르는 랍비들이 유다교 신앙의 중심이 되어 성전 없이 성경을 읽고 해석하게 된 것이다.
31. 이에 따라 이 상황에 대한 반응이 두 가지로 나타났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성경을 읽는 새로운 두 방식, 곧 그리스도인들의 그리스도론적 주해와 역사적으로 발전하게 된 유다교의 랍비 방식의 주해가 나타난 것이다. 이 두 방식의 주해는 저마다 성경을 새롭게 해석하는 방법을 담고 있기에 그 관계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새로운 중요한 문제가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 교회와 성전 파괴 이후의 랍비 중심의 유다교는 나란히 발전하였지만 서로 대립하고 서로에 대하여 알지 못하였기에 이 문제를 신약 성경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었다. 수세기에 걸친 이러한 상반된 입장을 넘어서서, 성경을 읽는 새로운 이 두 방식들이 서로 대화를 나누어 “풍요로운 상호 보완성”을 이해하고 “하느님 말씀의 부요를 깊이 이해하도록 서로 돕도록”(「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 249항) 하는 것이 유다교와 가톨릭이 나누는 대화의 과제가 되었다. 2001년 교황청 성서위원회에서 발표한 「그리스도교 성경 안의 유다 민족과 그 성서」(The Jewish People and Their Sacred Scriptures in the Christian Bible)는 그리스도인들이 “유다교의 성경 해석이 가능한 해석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고 또한 인정해야 하며 “그것은 제2성전 시대의 유다교 성서와 연속성을 지닌 해석으로서 병행적으로 발전한 그리스도교 해석과 유사한 해석”이라고 말한다. 그러고 나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이끌어 낸다. “이 두 가지 해석 모두 각자의 신앙관과 연관되어 있는데, 해석은 그 신앙관의 결과이자 표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가지 해석을 다른 해석으로 환원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22항).
-교황청 유다교위원회, 〈가톨릭과 유다교의 관계에 대한 신학적 문제에 대한 숙고〉[79]
9. 번역
역사가 오래된 책이고 인기도 많다보니 번역본 수도 많고 번역과 관련된 설왕설래도 무지하게 많다.
한국어에서는 외래어 표기도 가톨릭, 개신교, 공동번역 성서, 외래어 표기법이 다 달라 문제가 되고 있다.
10. 논란
11. 성경의 책들
괄호 안의 글자는 한국 개신교에서 쓰이는 성경책명 약자. 기본적으로 각 권 제목의 첫 글자를 사용하지만, 첫 글자가 겹칠 경우 2번째 글자를, 그도 겹칠 경우는 세 번째 글자를 쓰거나, 특정 글자를 뽑은 뒤 그 뒷자의 초성을 받침으로 끌어다가 쓴다. 참고로 성경에는 원하는 경서를 찾기 쉽게 보통 세 권씩 묶은 다음 책장 옆면에 동그랗게 공간을 내어 '창출레', '민신수' 등으로 약자를 표시해 놓는 경우가 많은데, 뒤로 갈수록 글자가 안드로메다로 가기 때문에 생각없이 표시들을 읽다 보면 '학슥말', '딤딛몬', '히약벧' 등과 같은 외계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어디까지나 약자로만 쓰이기 때문에 별 상관은 없긴 하다.
한국 가톨릭에서는 그냥 변형없이 제목의 앞 두 자를 약자로 쓴다. 상, 하, 첫째, 둘째 등은 앞에 아라비아 숫자로 표시한다. 예를 들면 사무엘기 상권은 '1사무'.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이 책장에 세 권씩 표시해 놓을 때는 중복되건 말건 첫 번째 글자만, 변형 없이 표기한다. 위에서 말한 '학슥말', '딤딛몬', '히약벧'과 같은 경우도 '하즈말', '티티필', '히야베' 등으로 매우 깔끔하게 표시된다(일부 판형은 '창세탈출레위', '티모티토필레'처럼 두 글자씩 된 것도 있다). 영어 성경도 개신교, 가톨릭 가릴 것 없이 상, 하, 첫째, 둘째 등은 앞에 아라비아 숫자로 표시한다. (예: 고린도후서 → 2 Corinthians) 장과 절을 나누는 기호도 한국 개신교에서는 콜론(
:
)을 쓰지만 한국 가톨릭은 콤마(,)를 쓴다. 이러한 차이는 한국에서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가령 독어권의 경우 동일한 고린도전서를 가톨릭에선 1 Kor라고 쓰고 Eins Korinther라고 읽지만, 개신교에선 1Kor라고 붙여쓰고 Erster Korinther라 읽는다.
물론 이건 신학적 차이라기 보다는 각 공동체 정체성의 표현으로 보아야 할 것이므로, 뭐가 옳다 그르다로 싸우는 일이 없도록 하자.
11.1. 히브리 성경
히브리 성경은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대부분에서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정경이다. 그 외의 구약 책들은 각 교파의 인정 여부에 따라 제2경전 혹은 외경으로 불린다.
다음 표의 셀 배치는 그리스도교에서 인식하는 히브리 성경 순서 및 그리스도교의 4분 구조(오경, 역사서, 지혜문학, 예언서)를 따랐다. 다만 가장 오른쪽 열의 숫자는 타낙의 순서를 의미하며, 해당 열의 T, N(n), K는 순서대로 토라, 느비임,[80] 케투빔이다. 밑줄은 '축제 두루마리들'(megillōt)을 의미한다.[81]
11.2. 제2경전
본문 읽기[86]
히브리어 성경 39권 외에 가톨릭이 구약으로 인식하는 경전들을 말한다.
현대 개신교에서는 교파에 따라 입장은 다른데, 아예 교회 공동체에서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대표적으로 개혁주의 계통 근본주의 교단, 성경침례교 등)이 있는가 하면, 주의 말씀으로서 따를 수는 없지만 역사적인 가치나 학문적인 가치는 있다고 보는 입장(대표적으로 성공회[87] )도 있다. 이 때문에 성서학이나 신구약 중간사 연구 자료로 활용하고자 제2경전이 수록된 가톨릭이나 정교회의 성경까지 구비해 놓는 개신교 목사들도 있다. 다만 18세기 말까지 모든 전승의 개신교는 제2경전을 (정경으로서는 아니더라도) 성경에 실었다.
엄밀히 말하면 1세기 경의 원시 교회 공동체에서 확정된 성경 목록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성경 목록 확정 작업이 이루어지는 4세기 경에 좁은성경 목록과 넓은성경 목록을 지지하는 주장이 팽팽하게 맞섰고, 이 중 서방교회의 경우로 한정하여 설명하면 카르타고 공의회를 바탕으로 넓은성경 목록이 보편적으로 채택되었으며,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는 유대교 경전의 입장을 수용하여 외경을 배제한 좁은 목록을 택했다.프로테스탄 전승은 이 책들을 경전으로 인정하기를 유보한 나머지 결국 어떤 경전적 지위도 부여하지 않았다.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신앙에 필요하다기보다는 '유익한' 작품으로 취급됨으로써 그야말로 완전히 거부되었던 것은 아니다(묵시록들은 루터[M. Luther]의 다양한 성경 판에서 늘 자리하고 있다). ('숨기다'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동사에서 파생한) '외경'(''Apocrypha'')이라는 명칭으로 묶여, 이 책들은 성경 판에서 부차적인 자리로 밀려났다. 18세기 말까지 모든 전승의 개신교는 이 책들을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사이에, 또는 성경 끄트머리에 모아 놓았으나, 이후 규모가 큰 성서학회의 영향 아래 외경들은 (Segond,[88] Osterwald 등과 같은) 개신교 성경 판에서 점차 사라져 갔으며, 오늘날 이 책들에 대한 관심이 다시 일어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Th. 뢰머Thomas Römer 외 공저, 《구약성경 입문》Introduction à l'Ancien Testament 제2권 (수원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19), 250쪽[89]
아래의 7권은 가톨릭, 정교회에서 인정하는 소위 '제2경전'이다.[90] 이 책들은 유대교의 카논이 확립되기 전 그리스어로 번역된 구약성경인 70인역(Septuagint) 성경에는 포함되어 있으나, 이후 유대교 정경으로 확립된 마소라 사본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은 책들이다. 개신교에서 제2경전을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고 외경으로 분류한 표면적 이유는 '마소라 사본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과 '그리스어판만 있고 히브리어 원본이 없다'는 것이 대표적이다.
여기서 'LXX+'는 칠십인역 추가분을 말한다. 이들은 원래 그리스어로 쓰인 책들과 히브리어/아람어에서 번역된 책들로 나눌 수 있는데, 유딧기, 지혜서, 마카베오 하권, 에스테르기 칠십인역 추가분, 칠십인역 다니엘서 14장은 전자에 속한다. 반면 마카베오 상권, 집회서, 토빗기, 칠십인역 다니엘서 13장은 후자에 속한다.
11.3. 동방교회의 구약성경
동방의 교회들은 대부분 경전 목록에 대하여 결정을 내린 적이 없기에 엄격하지 않은 목록을 가지고 있다. 가령 정교의 정경 목록이 시리아의 목록과 다를 뿐만이 아니라, 심지어 정교 안에서도 획일적인 정경 목록은 없다.
11.3.1. 정교회 구약성경
정교회 경전은 칠십인역성경이라는 (에스테르기와 다니엘서를 포함한) 그리스어 역본의 히브리어 경전 책 전체를 포함하며, 여기에 그리스어로 ''anagignōskomena''('인정받은 책', 이 의미에서 유래한 '읽힌 책')로 규정되어 권위가 문제시되지 않는 열 권의 책이 덧붙여진다. 우리는 여기서 로마 가톨릭교회의 모든 제2경전, 정교회 경전 구분에 따르면 (유딧기, 토빗기, 마카베오기 상하권, 지혜서, 집회서, 바룩서, 예레미야의 편지 등) 여덟 권의 책을 더 만나며, 서방교회 경전에 없는 마카베오기 3권과 (그리스어 에즈라기 상권과 고대 슬라브어 에즈라기 하권이라 불리는) 에즈라기 3권 등 두 권이 포함된다.
다른 책들의 경전성은, 이 문제에 대하여 결정을 내린 적이 없는 정교회 안에서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 책들 가운데는 흔히 (이미 다른 곳에서 확인된 다른 오데스[Odes, 송가들]와 함께) 므나쎄의 기도와 시편 151편이 거론된다. 마카베오기 3권과 에즈라기 3권은 각각 (그리스 정교회에서) 마카베오기 4권과 (에즈라기 3권이라 부르는 러시아 정교회에서) 에즈라기 4권으로 자주 보충된다.
-Th. 뢰머Thomas Römer 외 공저, 《구약성경 입문》Introduction à l'Ancien Testament 제2권 (수원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19), 378쪽
11.3.2. 시리아 구약성경
시리아 성경들은 (에스테르기, 욥기, 아가, 에즈라-느헤미야기, 또는 역대기에 있어 몇 가지 난제와 함께) 히브리어 경전 책 대부분을 취한다. 로마 가톨릭교회의 제2경전도 모두 수용되었으며, 가끔 에즈라기 3-4권, 마카베오기 3-4권, 므나쎄의 기도, 시편 151편도 발견된다. 바룩의 서간 또한 여러 차례 등장하며, 마소라 수사본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반면에 (바룩의 서간을 포함하는) 바룩의 시리아어 묵시록은 가끔 확인되었다가 결국 시리아어 성경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이 책은 성경으로서의 권위를 인정했던 시리아 저자들에 의해 수차례 인용되었다. 오데스 역시 전례 수사본 밖으로 밀려났으며, 시리아어 외경 시편들과 지혜서는 시리아 성경에 들어선 적이 없다.
-Th. 뢰머Thomas Römer 외 공저, 《구약성경 입문》Introduction à l'Ancien Testament 제2권 (수원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19), 378-379쪽
11.3.3. 아르메니아 구약성경
아르메니아 경전 목록은 여러 개가 있으나, 이 목록들은 그리스어로 번역되(거나 그리스어로부터 영향을 받았)고 아르메니아 교회에서 실질적인 권위를 인정받지 못한 상태이다. 아르메니아 성경과 전례 독서에 관심을 가진다면, 우리는 쉽게 - 칠십인역성경의 통상적인 제2경전 이외에 - 요셉과 아세넷, 요셉의 생애, 열두 성조의 유훈, 예언자들의 생애, (아르메니아어로 에즈라기 3권이라 불리는) 에즈라기 4권, 므나쎄의 기도와 같은 그리스어 또는 시리아어 번역 작품을 만날 수 있다.
다른 책들은 아르메니아 구약성경에서 쉽게 확인되지 않는다. 특히 에녹의 환시와 모세의 죽음과 예언자들의 기타 다수의 '생애' 또는 '죽음'의 경우이다. 이 작품들이 성경으로서의 권위를 누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Th. 뢰머Thomas Römer 외 공저, 《구약성경 입문》Introduction à l'Ancien Testament 제2권 (수원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19), 379쪽
11.3.4. 에티오피아 구약성경
에티오피아의 다양한 경전 목록 연구는 두 개의 경전을 밝혀냈다. 두 경전 모두 (구·신약) 성경 전체를 합쳐 81권에 이르나, 그 차이와 구성은 다양하다.
현대 에티오피아 성경에 의해 받아들여진 '협의의 경전'은 그리스어 역본으로 - 에스테르기와 다니엘서의 첨가 부분과 시편 151편을 포함하여 - 히브리어 성경책 전체를 담고 있다. 여기에 에녹서, 희년서, 에즈라기 3-4권, 토빗기, 유딧기, (마카베오기 1-4권과 아무런 관련이 없이 경전에 빠져있는) 에티오피아어 마카베오기 1-3권, 지혜서, 집회서, 바룩서, '예레미야의 나머지'라 불리는 책을 애가와 함께 엮은 예레미야의 역대기 또는 '바룩의 나머지 말씀들'이 덧붙어 있다. 나아가 므나쎄의 기도가 있으나 (2역대 33,12에 이어) 역대기에 통합된 채 별도의 온전한 책을 이루지 못한다는 사실을 지적하자.
'광의의 경전'은 성경책들의 다른 셈법을 제안한다. 에즈라-느헤미야기를 제외하는 대신에, 요셉 벤 고리온 유다인들의 이야기를 덧붙인다. 이 책은 그러나 지금은 에티오피아의 통합 정교회에 의해 사용되지 않는다. 이사야의 승천과 같은 다른 작품들은 협의의 경전에도, 광의의 경전에도 속하지 않는다.
-Th. 뢰머Thomas Römer 외 공저, 《구약성경 입문》Introduction à l'Ancien Testament 제2권 (수원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19), 379-380쪽
11.4. 신약성경
복음서, 사도행전[93] , 서간서(서신서), 예언서(요한묵시록)로 구성되어 있다. 신약의 서간에서 ●로 표시된 것은 주석학적 관점에서 바울로 친서이다.[94]
가톨릭 성경 / 공동번역 성서 / 개신교 성경은 각각 성경의 제목을 붙이는 데에 규칙이 있다. 가톨릭 성경과 공동번역 성서는 '~에게'나 '~의' 등과 같은 조사를 쓰는 반면에, 개신교 성경에서는 조사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짧고 간결하게 제목을 붙인다. 천주교 성경에서는 복음서와 단 한편으로만 이루어진 서간은 '~의'를 빼고, 베드로 서간과 요한 서간같이 두 편 이상인 서간에서는 '~의'를 사용하는 반면에, 공동번역 성서는 모든 복음서와 서간에 '~의'를 사용하고 있다. 천주교 성경에서는 특정 지역의 교회로 보낸 바울로의 서간들은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이라 하고 히브리서는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서간'이라 하는 반면에, 공동번역성서에서는 모두 '~인들에게 보낸 편지'로 통일하였다.
공동번역 성서의 각각의 제목들 가운데 천주교 성경 명칭과 개신교 성경 명칭을 섞은 느낌이 드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 천주교에서는 '루카' / 공동번역에서는 '루가' / 개신교에서는 '누가'
- 천주교에서는 '코린토' / 공동번역에서는 '고린토' / 개신교에서는 '고린도'
- 천주교에서는 '필리피' / 공동번역에서는 '필립비' / 개신교에서는 '빌립보'
- 천주교에서는 '테살로니카' / 공동번역에서는 '데살로니카' / 개신교에서는 '데살로니가'
'''바오로 서간들'''오늘날에도 성경 판본들은 그 사용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 준다. 눈 밝은 사람은 목차만 보고도, 그 독자가 어떤 교파에 속해 있는지 또는 어디에 귀속감을 느끼는지 알아챈다. ...... 신약성경에서도 서간들의 순서가 판본에 따라 상당히 미묘한 차이를 보인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야고보서와 히브리서다. 한 가톨릭 성경 판본에서는 야고보서가 '가톨릭 서간들'을 이끈다. 반면 한 루터 성경은 야고보서를 서간 전체의 끝에서 두 번째 자리에 놓는다. 그리고 '가톨릭 서간들'이라는 분류는 기피한다. 가톨릭 성경 판본에서는 바오로 서간집을 종결짓는 히브리서 역시, 루터 성경 판본에서는 뒤로 밀려나 야고보서 앞에 자리잡고 있다. 취리히 성경은 가톨릭 성경 판본의 순서와 일치하지만, 히브리서는 바오로 서간집에서 집어내어 '나머지 서간들' 맨 앞에 놓았다(1955년 판본: 그러나 2007년 판본은 전혀 세분하지 않았다).
||<tablewidth=100%><width=34%> 독일어 공동번역 성경 ||<width=33%> 루터 성경 ||<width=33%> 취리히 성경(1955) ||
||<^|1>···
로마서, 코린토 1·2서, 갈라티아서, 에페소서, 필리피서, 콜로새서, 테살로니카 1·2서, 티모테오 1·2서, 티토서, 필레몬서, 히브리서
'''가톨릭 서간들'''
야고보서
베드로 1·2서
요한 1·2·3서
유다서
'''요한 묵시록'''||<^|1>···
'''서간들'''
로마서, 코린토 1·2서, 갈라티아서, 에페소서, 필리피서, 콜로새서, 테살로니카 1·2서, 티모테오 1·2서, 티토서, 필레몬서
베드로 1·2서
요한 1·2·3서
'''히브리서'''
'''야고보서'''
유다서
'''요한 묵시록'''||<^|1>···
'''바오로 서간들'''
로마서, 코린토 1·2서, 갈라티아서, 에페소서, 필리피서, 콜로새서, 테살로니카 1·2서, 티모테오 1·2서, 티토서, 필레몬서
'''나머지 서간들'''
'''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 1·2서
요한 1·2·3서
유다서
'''요한 묵시록'''||
가령 독일어 성경 번역들을 보면 공동번역에서는[97] 서간을 바울로 서간과 가톨릭 서간으로 구분하고, 바울로 서간의 맨 마지막에 히브리서가 온다. 반면 루터 성경에서는 히브리서와 야고보서의 순서를 뒤로 옮겼으며 취리히 성경(1955)에서는 책의 배열 순서는 전통을 따르되 히브리서를 바울로 서간에서 제외했다. 이는 신학적인 이유보다는 각자의 전통을 따른 것이다.[98] 물론 각 번역이 반드시 위에서 설명한 카테고리 3개 중 하나를 따르는 것은 아니지만, 소모적인 감정 싸움을 막기 위해선 어느정도는 이 배열법들을 알아 둘 필요가 있다.이 상이한 순서는 신학적 결단에 기인한다: 루터에게 야고보서는 '짚북데기 편지'였다. (바오로 서간들과는 달리) 믿음에 비해 행업을 너무 강조하기(야고 2,14) 때문이다. 히브리서 역시, 이른바 두 번째 회개 가능성을 허용하지 않는(히브 6,4-8) 것만으로도, 루터에게 호감을 얻지 못했다. (믿는 이의 죄의 용서는 오직 은총으로 가능하다는 것이 루터 신학의 한 핵심이었다.)
-Martin Ebner/Stefan Schreiber (Hrsg.), 『신약성경 개론』, 이종한 옮김, 분도출판사, 2013, 13-15쪽[96]
11.5. 외경 및 위경
정경에서 제외된 문헌이다. 특히 가톨릭이나 정교회의 제2경전 부분을 개신교에서는 외경이라 표현한다. 후대의 창작물의 경우 위경이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개신교에서 외경으로 통칭하는 경우도 있으며, 가톨릭에서는 보통 이러한 문서를 외경으로 표현하므로 외경이라는 말이 주로 쓰이고 있다.
나무위키에서는 구분을 위하여 일반적인 내용은 외경 문서로, 거의 대부분의 주류 종파에서 인정하지 않는 경전은 위경 문서로 분리하여 서술한다.
한편 신약의 경우는 기독교의 모든 종파에서 27권만을 인정하기 때문에, 이 27권에 들어가지 않는 책은 모두 위경으로 불린다. 대표적인 위경으로 토마스 복음서나 유다 복음서가 있다. 4세기 이전의 초기 기독교에서는 클레멘트 1서·2서, 헤르마스의 목자, 디다케[99] , 바르나바 서간, 베드로 묵시록, 야고보 원복음, 코린토 3서, 테클라행전 등을 정경에 포함시키는 경우도 있었으나, 27권의 신약 정경 목록이 확정되면서 이들은 외경으로 빠졌다.
12. 등장인물(등장순)
- 이름순 정렬은 분류:성경/등장인물 참고.
12.1. 오경
- 아담#s-1.2
- 하와(이브#s-2)
- [100]
- 카인(가인)
- 아벨
- 에녹
- 노아
- 니므롯
- 아브라함
- 사라#s-1
- 롯
- 하갈#s-1
- 이스마일#s-1(이스마엘)
- 이사악(이삭)
- 레베카#s-1(리브가)
- 야곱
- 라반#s-1
- 레아#s-1.1
- 라헬
- 유다
- 요셉(창세기)
- 모세
- 아론#s-1.1
- 미리암#s-1.1
- 여호수아#s-1
- 발람
- 발락#s-1
12.2. 역사서
- 여호수아#s-1
- 라합#s-2
- 기드온#s-1
- 삼손#s-1
- 룻
- 나오미
- 역대 이스라엘 국왕
- 사무엘
- 사울
- 다윗
- 골리앗
- 요나단
- 요압
- 나단
- 압살롬
- 솔로몬#s-1
- 엘리야#s-1
- 엘리사#s-1
- 에즈라(에스라)
- 느헤미야
- 유딧
- 토빗
- 에스텔(에스더)
- 크세르크세스 1세(아하수에로)
- 하만#s-1
- 유다 마카베오
12.3. 지혜문학
12.4. 예언서
12.5. 복음서 및 사도행전
- 성모 마리아
- 마리아의 남편 나자렛의 요셉
- 예수
- 헤롯왕
- 동방박사
- 세례자 요한
- 12사도
-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
- 라자로, 마르타, 마리아 남매
- 회당장 야이로와 그의 딸
- 마리아 막달레나
- 헤롯의 의붓딸
- 본시오 빌라도
- 바라빠
- 아리마태아의 요셉
- 스테파노 부제·집사
- 사도 바오로
12.6. 서간 및 묵시록
13. 에피소드
14. 성경 디자인 선택 요령
- 판본을 고려하는 경우: 성경은 다양한 크기의 판본으로 출판되고 있는데, 용도에 따라 적절한 판본을 택하는 것이 중요하다.
- 포켓, 특소형(A6 이하, 국반판 이하) - 휴대하기에 매우 좋다. 그러나 글자가 너무 작아서 책상에 앉아 통독하기에는 무리이며, 빠뜨리거나 잃어버리기도 쉽다.
- 소형(B6 계열, 46판) - 포켓·특소형과 중형 사이의 중간 포지션. 예배용이나 휴대용으로 중형이 무겁다 싶으면 이쪽이 좋지만, 진지한 통독용이 주된 용도라면 중형을 고려하는 게 낫다.
- 중형(A5 계열, 국판) - 다용도로 쓰이기에 적당한 크기. 통독용으로도 괜찮고, 예배용으로도 괜찮고, 휴대하기에는 나쁘지 않은 수준.
- 대형(B5 이상 크기, 46배판~국배판) - 책상 위에서 진지하게 통독할 용도라면 분위기도 나고 글자도 비교적 커서 특히 시력이 나쁜 사람이 보기에 편하다. 그러나 휴대용이나 예배용으로 쓰기에는 크고 무겁다.
- 제본 유형을 고려하는 경우
- 하드 커버 - 가죽 커버 장정에 비해 값은 비교적 저렴하지만 휴대용으로는 좋지 않으며, 탁상용, 장서용으로 적합하다. 무선제본(glued binding)된 것도 있고 실제본(sewn binding)된 것도 있다. 국외에서는 하드 커버에 가죽을 씌운 성경(독서대에 놓고 쓰는 전례용 대형 성경)을 볼 수 있는데, 20만 원이 넘는 가격에 판매된다. 서가 소장용으로는 실제본 된 하드커버가 가장 가성비가 좋다.
- 비닐 커버 - 보급형 성경책에 흔히 사용된다. 값이 싸다는 장점이 있지만, 표지가 쉽게 너덜너덜해지는 단점이 있다. 비닐커버는 자주 쓰다보면 접질려지는 부위에 금이 가면서 결국은 뜯겨나간다.자주 읽어볼 것이라면 양장본이나 가죽(인조가죽·천연가죽·재생가죽)커버를 쓴 성경책을 선택하는 편이 낫다.
- 가죽 커버 - 값이 비싸지만 견고하고 오래 간다는 장점이 있다. 오픈형과 지퍼형이 있는데, 한국 개신교 성경책 한정으로 오픈형보다 지퍼형이 더 일반적이다. 가죽 중에서도 천연가죽을 쓴 것이 가장 비싸고 그 가치를 가장 높게 쳐주지만, 오늘날 나오는 가죽커버의 성경의 대부분은 천연가죽이 아닌 인조가죽(PU)이다. 1990년대까지 나온 가죽커버 성경들은 인조가죽이 아닌 돼지가죽이나 소가죽을 쓴 것이 많았지만, 제작비용을 낮추기 위해 점차 인조가죽이 그 자리를 대체했다. 단 가죽커버을 쓰는 영미판 성경책 중에 bonded leather라는 설명이 있는 책은 인조가죽이 아닌 재생가죽을 쓴 책이다. 참고로 인조가죽도, 재생가죽도 아닌, 진짜 천연가죽커버를 쓴 책은 정말 비싸다.그중에서도 염소 가죽커버(goat skin leather)를 쓴 성경책이 가장 비싸, 그 가격이 최소 10만 원대다.[105] 영미권의 영어성경책을 기준으로, 비교적 하급인 돼지가죽이나 소내피가죽을 쓴 것도 최소 5만 원. 한국에서는 일부 성경 수집가가 아닌 이상 가죽의 품질과 종류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많지 않지만(이 때문에, 한국어 성경책은 인조가죽커버를 쓴 것들이 지배) 서양에서는 성경 커버 덕후들이 적지 않아 일부 출판사에서는 고급 천연가죽 커버를 사용한 성경을 내놓기도 한다. 천연표피가죽은 너무 거칠게 다루거왔거나 관리를 엉망으로 하지 않는 이상 원형을 상당히 오래 유지하며[106] , 천연내피가죽은 사용을 반복하다보면 겉면 코팅이 벗겨지는 수준이고[107] , 재생가죽과 인조가죽은 사용을 반복하다보면 가죽과 코팅이 점점 떨어져나간다. 인조가죽의 경우 아예 가죽이 가루로 떨어져나간다! 최근에는 개신교, 천주교 막론하고 국내 성경출판업계에서는 천연가죽커버 사용을 장기적으로 검토 중에 있다고 한다. 인조가죽커버 내구성에 관한 클레임 때문인 듯.
- 천연가죽 커버 - 가장 품질(내구성)이 좋고, 가장 비싸다. 재생가죽, 인조가죽과 다르게 칼로 일부러 찢거나 관리를 엉망으로 하거나 그러지 않는 이상 가죽 커버자체가 갈라지거나 부스러지지 않는다. 그중에서도 염소가죽을 제일로 쳐준다. 품질은 염소가죽 > 소가죽 > 돼지가죽[101] 순이다. 그리고 표피가죽(skin 또는 top-grain)은 내피가죽(split)보다도 더 고급이다. 외피가죽은 흔히 goatskin, calfskin으로 불리는 가죽이 이쪽이며 천연가죽 재질의 지갑처럼 견고하고 질기다. 내죽(split)가죽은 벨트에 쓰이는 가죽과 비슷하며 표피가죽보다는 내구성이 떨어진다. 물론 내피가죽이라도 재생가죽, 인조가죽에 비해 내구성은 훨 낫다. 양가죽 커버는 흠집이 잘 난다는 단점 때문에 한국에서는 인기가 없고, 외국에서도 그리 고급으로 쳐주지는 않는다. 아무런 설명(goatskin, calfskin, calf-split, cowhide 등) 없이 단지 'genuine leather'로 홍보하는 성경책은 십중팔구 하급의 돼지내피가죽(pig split)을 썼다고 보면 된다. 고급 천연가죽 커버를 사용하는 출판사로 케임브리지대 출판부, Allan 등으로 알려져 있다.[102]
- 재생가죽 커버 - 인조가죽에 비해 천연가죽 느낌에 가깝지만 내구성은 천연가죽에 비하면 떨어진다. 천연가죽 조각과 합성수지를 섞어 접착제로 가공하여 만든다. 가죽계의 MDF라 할 수 있는 가죽. 재생가죽이라도 천연가죽 성분 포함율에 따라 품질이 달라진다. 가죽 섬유 이외의 잡다한 것을 집어넣은 비율이 클수록 품질이 떨어진다. 다만, '내구성에 대해서는 기대하지 마라'는 일반적인 평가 답게, 저렴하게 마구 쓸 용도가 아닌, 오래 두고두고 쓸 용도라면 천연가죽 커버를 쓴 것을 선택하는 것이 훨 낫다. 가격은 인조가죽 커버를 쓴 성경책과 비슷한 수준이다. 영미권에는 재생가죽 커버를 쓴 성경책이 흔하지만, 한국에서는 이런 성경책이 거의 없다.
- 인조가죽 커버 - 요즘 나오는 가죽 커버 성경책 중 특별히 천연가죽이나 재생가죽를 썼다고 명기하지 않는 이상 거의 이쪽이다. 2000년대 초반 이후에 나온 가죽커버 성경은 거의 이쪽이다.[103] 폴리우레탄으로 만든 것이 일반적이지만, 영미권의 일부 초염가판 성경책처럼 종이와 합성수지를 섞어서 만드는 경우도 있다. TruTone, Duo-Tone과 같은 이탈리아제 인조가죽은 매우 부드럽고 탄력성과 신축성이 매우 우수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흠집이 잘 나며, 무더위 때 방치하면 합성수지 성분이 녹아서 다른 물건에 달라붙는 경우가 있다는 단점이 있다. 내구성 측면에서는 아무리 좋은 인조가죽도 천연가죽 보다 한 등급 아래로 쳐준다. 인조가죽은 천연가죽처럼 오래 갈 것 같지만, 몇 년을 쓰다보면 반드시 인조가죽이 가루처럼 떨어져나간다.[104] 따라서 인조가죽을 쓴 성경책은 곱게 오래 모시라는 용도로 쓰기 보다는 그냥 싼값에 쓰는 것으로 쳐주자. 이렇게 인조가죽의 내구성이 안 좋다보니, 인조가죽 커버가 너덜너덜해진 성경을 리폼해주는 업체들이 늘고 있다. 가죽 공방에서는 단순한 표지갈이, 예술제본 공방에서는 무선제본된 책을 분해하여 수작업으로 다시 제본하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물론 개인의 취향이지만, 비싼 가격을 들여 맡길 가치는 충분해 보인다.
- 천(fabric/canvas) 커버 - 가죽 커버만큼이나 견고하고 오래 간다. 하드 커버에 천을 씌울 수도 있고, 소프트 커버로 제작할 수도 있다. 주로 청바지와 동일한 재질의 천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 페이퍼백(paperback) - 국내에서는 보기가 쉽지 않지만 유럽, 미주 등에서는 흔하게 볼 수 있다. 성경을 자주 참고해야 하는 신학생, 목회자 및 신도들이 서브용으로 많이 사용한다. 가죽커버를 사용한 성경과 다르게 보조용으로 마구 쓰는 용도로 주로 쓰인다는 것. 페이퍼백 성경책 중 대부분은 떡제본(glued binding)이라 견고하지 못하다.
- 종이: 일반적으로 고급 박엽지가 사용된다. 성경책에 쓰인 종이의 품질은 변색이 잘 안 되는 등 다른 책에 비해 좋은 편이지만, 박엽지의 높은 단가는 커버의 질이 점점 떨어지는 주요 원인이다. 다만 영미권의 페이퍼백 성경책의 경우 일반 단행본 페이퍼백과 다를바 없다.
- 찬송가 합본 여부: 찬송가 합본판은 성경책과 찬송가를 따로 챙겨야 하는 번거로움을 덜 수 있어 예배용으로 많이 사용된다.[108]
- 색인: 옆면에 반달 색인이 있을 경우 성경 구절을 좀 더 편리하게 찾을 수 있다.
- 주석, 해설 여부: 한편 개역 성경 중에는 관주[109] 가 붙어 있는 것도 있으며, 톰슨 주석성경처럼 주해, 해설이 덧붙여진 성경이나 일러스트, 도판 등이 첨부된 성경도 있다.
- 외국어 병기: 국한문 혼용, 영한, 일한, 중한, 불한 성경 등이 판매되고 있다.
- 세로쓰기/가로쓰기: 개역한글판 성경은 70년대까지는 거의 세로쓰기로 출판되었으나 80년대부터 가로쓰기로 편집된 개역한글판 성경이 나오면서 빠르게 소멸되어 갔고 90년대에 이르면서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현재 세로쓰기로 된 개역한글판 성경은 더 이상 나오지 않지만, 헌책방에 가면 세로쓰기로 된 개역한글판 성경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 색상: 개신교 성경의 경우 과거에는 비닐, 가죽, 하드커버 불문하고 검은색 표지가 압도적이었으나 지금은 표지 색상이 다채로워지면서 오히려 검은색 표지를 보기가 어려워졌다. 또한 책 태두리를 빨간색 물감으로 도색하거나 마블링한 것, 금박, 은박을 입힌 것 등이 있다.
- 오픈식/지퍼식: 일반 책 형태로 된 오픈식과 지퍼가 달려 열고 닫을 수 있는 지퍼식이 있는데 근래의 개신교 예배용 성경들은 오픈식보다 지퍼식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 기타 편집 방식에 따라: 특수한 의도 하에 편집된 성경들도 시중에서 볼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오디오북, 낱권 성경, 시대 순으로 성경 텍스트를 재배치한 통독 성경이다.
- 한편 인쇄 매체가 아닌 오디오나 전자책 형태로 나오는 성경도 있다.
- 오디오 성경: 카세트 테이프나 오디오 CD, MP3로 나온 성경으로 낭독 방식이나 녹음 속도에 따라 몇 가지로 구별된다.
- 평면 낭독: 성경 텍스트를 그대로 낭독한 것.
- 입체 낭독: 성경 텍스트에 극적 요소를 가미하여 낭독한 것으로 대화체의 경우 남성 화자의 경우 남성 성우가, 여성 화자의 경우 여성 성우가 분담하며 배경 음악이나 효과음 등을 삽입하기도 한다.
- 정속 낭독: 일반적인 낭독 속도로 녹음된 것.
- 고속 낭독: 고배속으로 녹음된 것으로 보다 짧은 시간에 집중하여 들을 때 효과적이다.
- 전자 성경: PMP, MP4, 스마트폰을 통해 열람할 수 있도록 E-Book 형태로 나온 성경.
- 오디오 성경: 카세트 테이프나 오디오 CD, MP3로 나온 성경으로 낭독 방식이나 녹음 속도에 따라 몇 가지로 구별된다.
15. 참고: 성경 시대의 화폐 단위와 도량형
'''화폐 단위(구약)'''
||단위 ||정도 || 우리 화폐(원)[110]
||||게라 ||1/10 베카 || 2천||
||베카 ||10게라, 1/2세켈 || 2만||
||세켈(하루 품삯) ||2베카, 20게라 || 4만||
||미나 ||50세켈, 100베카 || 100만||
||탈렌트 ||60미나, 3000세켈 || 1억 2천만||
||금 1세켈 ||은의 16배 || 64만||
||금 1미나 || || 3,200만||
||금 1탈렌트 || || 19억2천만원||
'''(신약)'''
||유다 화폐 ||그리스 화폐 || 로마 화폐||
|| ||1렙톤[111]
[112] || |||| ||2렙톤 || 1콰드란스||
|| || || 4콰드란스=1아스||
|| ||1드라크마 || 16아스=1데나리온[113]
|||| ||2드라크마=1디드라크마 || 2데나리온||
||1세켈 ||1스타테르 || 4데나리온||
|| ||25드라크마 || 1아우레우스||
||30세켈 ||1미나 || 100데나리온||
||<-3> *1탈렌트=60미나, 6천데나리온=240아우레우스||
'''무게 단위'''
||단위 ||정도 || 미터법(g)||
||게라 ||1/20세켈 || 0.6||
||베카 ||10게라, 1/2세켈 || 5||
||핌 ||1.5베카, 3/4세켈 || 7||
||세켈 ||2베카, 1.5핌 || 11.5||
||미나 ||75핌, 50세켈 || 685||
||탈렌트 ||60미나, 3000세켈 || 41.1Kg||
'''길이 단위'''
||단위 ||정도 || 미터법(cm)||
||손마디 ||1/12[114]
|| 2||||엄지-검지사이 ||4손마디, 1/3테파 || 7.5||
||테파 ||12마디, 3엄지-검지 || 22.5||
||손목-팔꿈치사이 ||3.75엄지-검지, 1.25테파 || 30||
||암마/페키스 ||6·7엄지-검지, 2뼘 || 46||
||두 팔 ||4암마, 8테파 || 2m||
||스타디온 || || 185m||
'''부피(고체) 단위'''
||단위 ||정도 || 미터법(l)||
||록 ||1/4캅 || 0.5||
||캅 ||4록 || 2.2||
||오메르 ||7록, 1.8캅 || 4||
||스아 ||3.33오메르 || 13||
||에파 ||1/10호메르, 3스아 || 40||
||레텍 ||15스아, 5에파 || 200||
||호메르 ||10에파, 2레텍 || 400||
'''부피(액체) 단위'''
||단위 ||정도 || 미터법(l)||
||록 ||1/12힌 || 0.5||
||캅 ||4록, 1/3힌 || 2.2||
||힌 ||12록, 3캅 || 6.5||
||스아 ||6캅, 2힌 || 13||
||밧 ||3스아, 6힌 || 40||
||호메르 ||10밧, 60힌 || 400||
-정태현 《성서 입문 상권》 개정판 73쪽
16. 참고: 성경 시대의 달력
||순번식 ||우리식 ||가나안식 ||바빌론식 ||히브리식 || 농사||
||첫째 달 || 3월||아빕 ||니사누 ||니산 || 보리, 아마 수확
햇곡식 축일||||둘째 달 || 4월||지우||아야루 ||이야르 || ||
||셋째 달 || 5월|| ||시바누 ||시완 || 이른 무화과 수확||
||넷째 달 || 6월|| ||두우주 ||탐무즈 || 포도 수확||
||다섯째 달 || 7월|| ||아부 ||압 || 올리브 수확||
||여섯째 달 || 8월|| ||울룰루 ||엘룰 || 대추야자, 여름 무화과 수확||
||일곱째 달 || 9월||에타님 ||테쉬리루 ||티쉬리 || ||
||여덟째 달 || 10월||불 ||아라삼누 ||마르헤쉬반 || 밭갈기, 겨울 무화과 수확||
||아홉째 달 || 11월|| || 키슬리무||키슬레우 || 씨뿌리기||
||열째 달 || 12월|| ||테비투 ||테벳 || ||
||열한째 달 || 1월|| ||샤바투 ||스밧, 세바트 || 아몬드 꽃 핌||
||열두째 달|| 2월|| ||아다루 ||아다르 || 감귤류 과일 수확||
||윤달 || || || ||베아 || ||
-정태현 《성서 입문 상권》 개정판 78쪽
17. 기타
- 성경에 수록된 책들 중 가장 긴 책은 시편이며[115][116] , 가장 짧은 책은 요한 2서다.[117] 또한 가장 긴 장은 시편 119편이며[118] , 가장 짧은 장은 시편 117편이다.[119] 한편 성경 전체에서 가장 긴 절은 에스테르기/에스더 8장 9절이며[120] , 가장 짧은 절은 테살로니카 1서/데살로니가 전서 5장 16절이다.[121]
- 2008년 해리스폴에서 조사한 미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책 1위#, 2014년 역시 이 조사에서 1위를 기록했다.# 2위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대한성서공회에서 펴낸 보급판 성경의 옆면은 빨간색으로 처리되어 있었는데, 그 이후에는 환경규제 강화, 생산단가 절감 문제 등으로 지금은 성경의 옆면은 빨간색으로 처리되어 있지 않다.[122]
- 국제기드온연합회에서 학교, 병원, 군부대(특히 훈련소), 교도소, 호텔 등 숙박시설에 무료로 성경을 배포해 주기도 한다. 국내에는 신약전서에 시편, 잠언이 부록으로 추가된 휴대용 크기(B7 크기)의 파란색 비닐표지 성경이 가장 널리 보급되어 있으며, 그밖에 국문과 영문이 병행된 신약성경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다.[123]
- 성경은 같은 언어라 해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거듭 번역되었기에 언어, 특히 문자로 기록된 언어의 발달, 변천 과정을 연구할 때 중요하고도 유용한 참고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예를 들어 킹 제임스 성경을 보면 17-18세기 영어가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알 수 있으며, 개역한글판 성경을 보면 20세기 전반의 한국어의 모습을 대강 알 수 있다. 그래서 전세계 언어학자들이 (주로 기독교 문화권에 속한)각 나라이나 민족들의 언어들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알아내는 핵심 참고 서적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며, 현재는 쓰이지 않더라도 과거에 쓰인 사어의 어휘나 문장에 대해 알아볼때 성경이 핵심 자료로 쓰이기도 한다.
- 천주교 신자가 제2경전이 포함된 일부 개신교 영어 성경을 구입할 경우, 반드시 With Deuterocanonicals (apocrypha), 또는 Catholic edition 문구가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다만, With Deuterocanonicals 문구가 있는 성경은 우리나라의 공동번역성서 초판처럼 제2경전 문서들이 따로 모아서 배열되는 식으로 되어 있기에, 가톨릭 성경처럼 제2경전이 배열된 것을 원한다면 Catholic edition 문구가 있는 성경책으로 고르자. 사실 Catholic edition 문구가 붙은 개신교 성경 대부분은 가톨릭 교회의 인준을 받았다는 의미로 imprimatur를 받았다.
- 신학대학이나 신학대학원 등에 입학할 사람들, 특히 신학대학원에 입학할 사람들이라면 학부든 대학원이든, 신입학이든 편입학이든 성경 시험은 거의 필수적으로 준비해야 한다. 특히 총신대학교 같은 보수적인 색채의 학교 같은 경우는 지망하는 과가 신학과가 아니어도 성경 시험이 필수이니 유념할 것.
- 나무위키에서는 성경의 각 서의 호칭을 공동 번역의 호칭으로 사용하고 있다.
- 현재 세계 성경의 최대 산지는 놀랍게도 기독교에 대하여 비우호적인 중국이라고 한다. 전세계 성경의 25% 물량을 책임진다고... 이때문에 미중 무역전쟁이 아무리 심해도 성경만큼은 절대 관세인상 품목에 들어가지 않을 거라는 농담도 있다.
- 조선 역대왕 이름을 외울때 태정태세문단세하는것처럼 한국의 개신교인들중에서 성서목록을 외우기 위한 한글자 줄임말[124] 늘어놓기도 있다. 구약은 '창출레민신수삿룻삼상삼하왕상왕하대상대하스느에욥시잠전아사렘애겔단호욜암옵욘미나합습학슥말' 신약은 '마막눅요행롬고전고후갈엡빌골살전살후딤전딤후딛몬히약벧전벧후요일요이요삼유계' 심지어 목록가라는 이름으로 노래도 있다. #
- 그리스 로마 신화, 북유럽 신화와 더불어 서양 창작물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요소 중 하나이다. 개신교와 천주교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다고 해도 아담과 이브, 선악과, 엑소더스, 방주, 솔로몬 등 구약의 요소들이나 예수, 12사도의 이름, 묵시록의 4기사, 사탄 등은 한번이라도 들어봤을 것이다.
- 독일 함부르크에선 나치 독일의 히틀러성경이 발견되었는데 십계명이 아닌 십이계명으로 조작한 성경이었다.#
18. 바깥 고리
- 성경.txt 파일을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쉽게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다운로드 용량은 공동번역판 기준 3.6MB 이다. 듀얼코어 이상급의 CPU를 가진 오늘날의 컴퓨터에선 큰 무리 없이 잘 열리지만, 살짝 렉이 걸린다. 286 수준의 CPU를 단 옛날 컴퓨터에선 창세기 한권을 띄우는데도 오래 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