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훼
1. 개요
야훼는 유대교·기독교·이슬람·바하이 신앙 등의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에서 숭배하는 유일신의 본래 이름이었고, 이들 종교가 유일신교로서 확립된 현재는 이름이 아닌 호칭이다. 타나크에서는 '야훼'/'야웨'/'여호와' 등으로 부를 때도 있지만 대부분 그냥 '아도나이(주, 主)'라고 한다. 아랍어로는 흔히 '알라'라 칭하며 아랍계 기독교인들과 무슬림, 바하이들이 주로 이렇게 부른다. 한국에서는 '하느님'[1] 혹은 '하나님'[2] 이라 한다. (추가적으로, 가톨릭에서는 천주라고 부르기도 한다.)모세가 하느님께 아뢰었다. "제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서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고 말하면 그들이 '그 하느님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물을 터인데, 제가 어떻게 대답해야 하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곧 나다."''' 하고 대답하시고, 이어서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분은 '나다.' 하고 말씀하시는 그분이라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러라."
2. 상세
동시대 다른 중근동의 신들이었던 바빌론의 마르두크나 수메르의 엘이나 가나안의 다곤, 바알 등의 숭배는 지금은 사라졌으나 현대에까지 야훼 숭배는 지금까지도 살아남아 '''세계적인 종교'''를 이루고 있다. 엘 항목에 들어가보면 알겠지만 성경에서는 야훼를 엘로 부르는 용례가 많다. 성경에서의 용례를 보면 가나안의 이방신으로서의 엘과, 아브라함의 하느님을 일컫는 엘을 개념적으로는 구분하고 있지만, 용어 자체는 가나안의 '엘'에서 영향을 받았다. 비슷한 사례로, 라틴어에서 제우스를 일컫던 이칭인 'Deus'와 불교에서 제석천을 일컫던 이칭인 '천주(天主)'가 그리스도교의 어휘에 흡수된 사례를 들 수 있다. 라틴어에서는 그리스에서 제우스(Zeus)라는 단어를 들여왔을 때 'Deus'라고 표기했다. 여기서 제우스를 일컬어 'Deus Pater(아버지 신)'로 불렀고 이 단어가 변화해 라틴어로 제우스를 뜻하는 'Iuppiter'가 나왔다.
한편 유대인들은 기독교인들이 야훼에 대해 논하는 것을 매우 불쾌하게 생각한다. 애초에 기독교 자체가 유대교에서 갈라져나온 신앙이므로 자신들의 민족신으로 여겨지는 야훼가 언급되는 걸 좋아할 리가 없다. 게다가 야훼니 여호와니 하며 이름을 발음하는 것도 유대인들한테는 금기이기 때문에 민감한 사항.
3. 역사
히브리어에서 야훼는 'יהוה'라고 기록된다. 이를 가리키는 표현은 'השם המפורש(hashem ham'forásh, 명시적 이름)'이다. 그런데 이 이름은 모세 시대에 보편적으로 알려져 있던 신인 엘(EL)[3] 에서 파생된 제의적인 이름일 것으로 보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히브리인들은 온 세상을 다스리는 최상의 신의 개념을 가지고 야훼를 숭배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신들은 거의 다 자연 종교의 신들로서 그 신들은 대부분 이 땅에 사는 인간들의 생활을 좌우하는 자연의 변화를 주기적으로 주관하는 것일 뿐이었다. 그 신들은 농경 사회나 유목민 사회를 막론하고 제례를 통해서 자연을 주관하는 신으로 권위를 인정받는 정도였다. 그러나 그 신들의 행위는 매우 제한적이었으며 먼 미래까지도 주관하는 기능을 가진 적은 없었다. 가령 바알은 매 7년마다 찾아오는 풍년과 흉년의 사이클에서 풍년을 위해서 자연법칙을 주관하는 일만 했었다. 그러나 야훼는 달랐다. 야훼는 그 어떤 자연물과도 동일시되지 않았고 각자 담당하는 분야가 있는 다른 신들과 같은 제한을 받지 않는다. 모든 것을 주재하는 신이었다. 자연을 주관했지만 오히려 자연법칙은 야훼의 전능함을 보여주는 많은 도구 가운데 하나에 불과할 뿐이었다.[𐤕 𐤟 𐤅𐤓𐤇𐤌𐤕 | 𐤊𐤉 𐤟 𐤋𐤏𐤔𐤕𐤓 𐤟 𐤊𐤌𐤔 𐤟 𐤄𐤇𐤓𐤌𐤕𐤄 | 𐤅𐤀𐤒𐤇 𐤟 𐤌𐤔𐤌 𐤟 𐤀[𐤕 𐤟 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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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종들을 (죽였다.) 왜냐하면 내가 아쉬타르 그모스를 위해서 제물로 구별해 놓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야훼'''의 … 을 탈취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그모스 앞으로 옮겼다. 이스라엘의 왕은
야하스를 건축하였다. 그리고 그는 나와 전쟁을 하는 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그모스는 그를 (내) 앞에서 쫓아냈다.
메사 석비 17~19행. 성서학연구소 BIBLIA (PDF) 번역.
그리고 성경에 나와 있는 야훼의 권능은 주기적으로 반복을 거듭하는 자연계의 사건들과 관련되어 있기보다 반복될 수 없는 역사적인 사건들과 관련이 있다. 히브리 민족을 이집트에서 구출해올 때, 야훼는 자연계의 모든 권능, 예를 들면 전염병이나 바닷물, 바람, 지진, 메뚜기, 개구리와 같은 것들을 이용해서 자신의 전능함을 보여주었다. 더욱이 그는 매 역사 가운데 고통당하는 자신의 백성을 직접 찾아와서 각각의 역사적인 사건에 대한 해답을 내린다. 비록 이스라엘에도 야훼를 위한 제사가 있었지만 다른 신들의 숭배에서 보는 것과 같이 신을 달래기 위한 것이나 신들의 인간적인 관계회복을 촉구하기 위한 제사는 아니었다. 야훼를 위한 제사는 야훼가 모든 역사 가운데 직접 개입해서 그 백성을 인도해 주는데 대한 감사와 찬양의 제사였다. 그러므로 이스라엘과 야훼는 제사를 통해서 정기적으로 만나야만 했다.
보편적으로 학계에서는 야훼 종교의 기원을 기원전 9세기 중엽에 두고 있다. 기원전 840년경 세워진 메사 석비에 의하면 이스라엘 왕국과의 영토 분쟁을 종식한 모압의 왕 메사가 느보에 있던 야훼의 기물들을 모압의 신인 크모시 제단에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반면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야훼 종교는 기원전 15세기 모세에 의해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사건에 대한 기록이 구약성경 출애굽기 3장에 나타난다. 야훼 종교라는 이름 그 자체는 성경에 나타나지 않지만 야훼를 유일신으로 섬기는 사람들의 종교를 일반적으로 야훼 종교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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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의하면 야훼가 자기 이름을 맨 먼저 나타낸 사건은 모세가 떨기나무 근처에서 그를 만났을 때 야훼가 직접 자신의 이름을 가르쳐준 것에 기인한다(출애굽기 3장 14절). 여기에서 야훼는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다"라고 말하는데 이 히브리어 음역 "예흐예 아셰르 예흐예"는 영어로 "I am who I am" 정도로 번역된다, 우리말로 직역하면 '''나는 나인 자다'''라는 말이 될 뿐이다.
우가릿 문서에 의하면 이 '엘'이라는 어구는 '창조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 단어를 '창조하다'라는 의미로 해석한다면 "나는 창조하는(탄생시키는) 야훼다"라는 의미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고대 이집트의 문헌들 가운데 아문 라 신과 아톤 신에게 적용했던 정형구절 가운데 출애굽기 3장 14절과 유사한 표현이 있는데 여기에서는 "나는 존재하게 된 것을 있게 하는 그분이다"라고 나타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 말의 의미는 야훼는 그 존재의 기원이 무엇이며 누구에 의해서 생성되거나 출생되었다거나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 즉, 야훼는 누구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도 아니며 스스로 있는 자존자라는 말이다. 이러한 야훼의 이름에 담겨 있는 속성이 아브라함계 종교와 다른 신앙의 차이점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다른 신화에 나타나는 신들은 저마다 그 기원이 있고 대부분이 창조되거나 부모 신들의 결합으로 생긴 것들이지만 야훼는 자존자로서 그 어느 누구의 간섭이나 도움이 없이 스스로 존재하는 자인 것이다.
족장 시대의 야훼는 한 부족의 신으로만 섬겨졌으며,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요셉 이 네 족장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족장 시대에는 야훼는 한 집안의 신으로만 섬겨졌다. 물론 성경 저자는 이 시대에도 야훼가 온 우주를 통치하는 왕이었음을 강조하고 있으나, 아직까지 히브리인들은 부족 공동체였으며 야훼 역시 그 부족의 신으로만 섬겨졌다.
특히 야훼가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창세기 12장 1-3절)에 의하면 지금은 비록 한 개인에 불과한 족장들이지만 그 후손의 시대에 가면 그 민족이 하늘의 별과 바다의 모래와 같이 번성할 것임을 약속했다. 그래서 이 약속이 족장 시대를 이어서 내려오게 되었다. 예를 들면 야훼는 아브라함에게 한 언약을 상기시키기 위해 이사악에게는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느님이다"라고 말했고, 야곱에게는 "네 조부 아브라함의 하느님"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요셉에게는 "네 조상 아브라함의 하느님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야훼의 언약이 족장 시대를 걸쳐서 계속 전수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오토 카이저나 아이히로트와 같은 학자들은 구약성경의 주제를 "하느님의 언약"이라고 보았으며 그 언약이 가장 잘 전수되는 이야기가 바로 족장들의 이야기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족장 시대의 야훼는 그저 한 부족이 섬기는 유일신에 불과했다.
왕정 시대에 들어가면서 야훼와 이스라엘의 관계는 야훼가 왕이 되고 이스라엘은 그의 백성이 되는 신정정치로 접어든다. 그러므로 야훼와의 관계가 좋은 왕들은 그 왕권을 보장받게 되고 그렇지 못한 왕들은 왕권을 보장받지 못하게 된다. 야훼와의 관계가 대체로 좋았던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에는 이스라엘 왕국이 유례 없는 번성을 했지만 야훼를 떠난 악한 왕들의 통치가 계속되던 시기에는 마침내 나라가 분열되고 다른 나라에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가는 결과를 낳았다. 성경 저자는 이 모든 결과가 사람들이 야훼와의 관계를 잘 유지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보았다.
포로 시대에도 야훼는 그 백성 이스라엘에게 끊임없이 소망을 불어 넣어 주었으며 마침내 고국 땅으로 귀환한 이스라엘은 그 동안 야훼와의 관계가 좋지 않아서 이런 결과가 왔다고 생각하고 야훼와의 관계회복을 위해서 성전을 건축하고 종교의식을 개혁하는 등의 일련의 조치를 취함으로써 야훼의 백성으로서의 위치를 확립하려는 노력을 했다.
야훼가 모세에게 가르쳐 준 이름이 바로 야훼이다. 통상적으로 히브리인들은 야훼라는 이름 대신 '''아도나이'''(אדוני)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지엄한 야훼의 이름을 피조물이 감히 부를 수 없어서 야훼를 경외하는 의미에서 "주"(主)라는 의미를 가진 아도나이라고 부른다. 야훼를 가리키는 이름은 그 외에도 여러가지가 있는데 모든 이름이 다 야훼의 인격적 특성과 관련되어 있다. 이스라엘에 있어서 야훼는 유일신이다. 아브라함 이후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은 야훼는 이스라엘의 친권자로서 그 권리를 행사하고, 이스라엘은 야훼의 자녀로서 그 의무와 권리를 행사하게 되었다. 야훼는 매우 인격적인 동시에 신적인 권위를 함께 가지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 이스라엘을 위해서 안타까워하며 때로는 분노하기도 한다. 이스라엘의 죄를 보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기도 하며 죄에 대한 엄중한 심판을 내리기도 한다.
한편 이스라엘 왕국에서는 야훼 외의 이방신을 같이 섬기던 풍습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래 '표현' 문단에 서술된 '야훼와 그의 아세라'도 이와 관련되었다는 관점도 있다. 유일신으로서 야훼는 스스로 다른 신들과 같은 가치를 가지고 숭배될 수 없다. 따라서 오직 야훼만이 숭배의 대상이므로 다른 신들을 섬기는 자들은 야훼의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왕정 시대의 야훼주의는 강력한 정치적인 뒷받침이 있어야만 그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었다. 그래서 야훼는 왕들에게 자신과의 관계를 잘 설정해서 그 계약 안에서 정치를 할 경우 그 치세를 축복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이때 야훼와의 관계를 비교적 잘 유지했던 다윗이나 솔로몬, 히스기야와 같은 왕들의 통치기간은 매우 평화로운 날들이었지만[4] 므낫세나 오므리와 같은 왕들의 통치는 매우 불행한 시간의 연속이었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야훼는 자신의 뜻을 전달할 때 항상 예언자(선지자)나 판관(사사) 등을 통해서 말한다. 아주 특별한 경우 야훼가 직접 백성들 사이에 나타나기도 하지만, 이것은 그야말로 아주 특별한 경우로서 구약에서도 단 몇 차례만 나타날 뿐이다.[5] 대부분은 간접적인 방식으로 나타나서 자신의 의지를 알린다. 제사장들이나 예언자들은 야훼의 뜻을 알기 위해 신점 의식을 치렀는데, 그 가운데 가장 흔한 것이 제비뽑기였다. 이 제비뽑기에 대해서는 성경에 많이 기록되어 있는데, 제비를 뽑아서 범인을 잡거나 제자를 택하는 일은 그 당시에는 매우 흔한 일이었다.
그 외에도 고대 근동에는 여러 종류의 신점 행위가 있었는데 대표적인 행위로는 동물의 간이나 내장을 이용해서 점을 치는 행위, 그릇에다 물을 채워놓고 그 위에 기름을 떨어뜨려 기름이 퍼지는 모양을 따라서 점을 치는 행위, 막대기를 이용해서 점을 치는 행위, 화살을 이용해서 점을 치는 행위, 꿈을 통해서 점을 치는 행위 등이 있었다. 사람들은 이러한 방식을 통해서 야훼의 방식을 알고자 했고, 는 예언자들을 통해서 전파되었다.
바빌론 포로 시기는 야훼 종교가 매우 침체된 시기였다. 70년 간의 포로생활 동안 이스라엘은 민족적 정체성을 많이 상실했으며 종교적으로도 암울한 시기였다. 아시리아에 의해서 먼저 기원전 722년에 식민지가 된 북왕국 이스라엘과 아시리아를 정복한 바빌론에 의해서 기원전 586년 식민지가 된 유대는 야훼에 대한 종교적 의무를 수행하지 않았으며, 그 결과 안식일과 할례를 제외한 모든 종교의식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 때에도 야훼는 포로기의 예언자인 에제키엘이나 예레미야를 통해서 야훼와의 계약관계를 기억하고 충실한 종교적 생활을 할 것을 강조했으나, 이스라엘은 너무도 쉽게 바빌론의 문화와 종교에 동화되어 버렸다.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이 바빌론의 포로가 된 것은 야훼와의 관계를 잊어버렸기 때문이라는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면서 동시에 포로기의 암울한 현실 가운데서도 야훼가 그들을 구원하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말 것을 선언했다. 그러나 한마디로 말하면 포로생활을 하는 기간은 야훼 종교의 암흑시기라고 할 수 있다.
바빌론 포로 시기 이후 하깨와 즈가리야 그리고 느헤미야, 즈루빠벨, 에즈라와 같은 젊은 개혁가들에 의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후 가장 먼저 실시된 개혁이 바로 야훼에 대한 종교적인 의식과 가르침의 회복이었다. 그들은 무너진 야훼의 제단을 수축하고 안식일과 할례, 파스카를 강조했으며, 도덕적 성결과 윤리적 정결을 강조했다. 그리고 이제 다시 포로 시기와 같은 암울한 현실을 당하지 않으려면 다시 야훼에 대한 신앙을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그들은 바빌론에서 태어나서 성장한 제2세대를 위해서 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하는가 하면, 야훼가 그들의 조상들을 위해 한 일들을 되새길 수 있도록 토라(모세 5경)를 강조하는 교육을 강화했다. 이러한 일련의 개혁을 통해서 개혁가들은 야훼에 대한 신앙을 회복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포로생활을 하고 귀환한 지도층과 포로기간 동안 이스라엘에 남아서 온갖 수탈과 착취를 경험했던 사람들 사이에서 발생한 갈등은 쉽게 해소되지 않았으며, 포로생활을 하고 온 지도층 사람들에 의해서 주도된 종교개혁은 결국 본토에 남아있던 사람들의 방해에 의해서 일시 중단되는 비극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연이어서 기원전 4세기부터 시작된 그리스의 통치는 더욱 더 심한 다신론적 상황을 야기시켰고, 기원전 54년 로마가 그리스를 정복하고 예수 시대 전까지 온갖 예언과 환상이 즐비한 혼란스러운 시대가 다시 시작되었다. 한편 이 시기에 야훼 신앙은 그리스 철학, 좀 더 확실하게 말하자면 플라톤 철학과 만나게 되었다. 야훼에 플라토니즘적 존재론이 들러붙으면서 온갖 떡밥이 생성된 것이었다.
야훼는 유일신이며 창조자이기 때문에 그리스인들은 야훼를 존재론적으로 이해하게 되었고, 나중에 플라톤 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영향을 받으면서, 야훼는 영원불변의 절대적 존재인 우주의 제1원리 같은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런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절대 존재가 질투를 한다는 둥, 분노를 한다는 둥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논쟁이 벌어졌다. 초월적 존재가 왜 인간처럼 사사로운 감정을 보이냐는 것.
일단 당시 지중해 세계에서 플라톤 철학이 대세였기 때문에 여기서 비롯된 질문, "왜 신이 이 세상을 이 따위로 만들었나?" "온 세상을 창조한 절대자가 왜 유대인만 편애하고 타민족은 잡아 죽이냐?" 하는 등의 질문이 무시될 수는 없었다. 반면 플라톤 이후에 나타난 헬레니즘 철학[6] 은 플라톤의 불생불멸적 이데아를 수용하지 않았고, 심지어 유물론적인 경우까지도 있었으므로 기독교가 이런 헬레니즘 철학과 연결된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그리스도교 신학이 나올 수가 없다. 기독교 신학에서 문제가 되는 그리스철학은 플라톤 철학을 말하는 것이다.
중세 신학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성 토마스 아퀴나스를 정통으로 삼는데, 전자는 플라톤 철학을, 후자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활용해 신학 체계를 만들었다. 하여 현대 기독교 신학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과연 '''예수가 플라톤 주의자였는가?'''라는 문제다.
이와 같이 야훼 종교는 약 2천년 이상의 역사를 통해서 많은 변화와 갈등을 겪었다. 우리가 이러한 역사적 변화를 통해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야훼 종교 역시 그 시대적인 삶의 자리에 따라서 부흥과 쇠퇴의 길을 걸었다는 것이다.
한편, '''예수가 주장하는 아버지가 야훼인지에 대해서는 반론이 있다.'''[7] 첫번째로 토마스 복음서[8] 에서는 예수가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그리고 나의 것은 나에게."라고 말한다. 로마 황제와 야훼를 동일선상에 놓고, 자신을 따로 말하고 있다. 토마스 복음서의 내용은 현존하는 정경의 4복음서의 내용과 대부분 일치하기 때문에 대충 영지주의 문서니 하면서 넘어갈 수가 없는 내용이지만, 이게 원전에 더 가까운 자료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아직 확답할 수 없다.
두번째로, 논리적으로는 아버지라는 말 자체에 인격성이 있는데 이러한 인격신은 그 자체로 제약성을 띠기 때문에 절대적인 유일신일 수 없다는 의견이다. 이에 의하면 예수가 말하는 신의 절대성은 '존재의 절대성'이 아니라 '인간과의 관계의 절대성'이 된다고 한다. 예수의 가르침만 봐도 예수의 아버지는 구약에 나오는 야훼와는 여러 모로 차이가 있다. 애초에 신을 개인적인 '''아버지'''로 규정한다는 것부터가 구약과 매우 다르다. 이건 모세 오경이든 후대의 예언서든 마찬가지의 문제. 또한 전술/후술하듯 구약에서 야훼는 본래 유대 민족의 신이었다. 출애굽기만 봐도 "나는 이스라엘 백성이 불평하는 소리를 들었다. 너는 그들에게, '해거름에 고기를 먹고 아침에 떡을 실컷 먹고 나서야 너희는 나 야훼가 너희 하느님임을 알게 되리라.' 하고 일러주어라."[9] 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러한 해석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반론이 있다. 첫째, 신구약 중간 시대의 변천에 대한 고찰이 결여되어있다. 메시아가 하느님의 아들로 올 것이라는 전승은 예수 출현 훨씬 이전부터 유대교 분파 중 에세네파 공동체에서 내려오던 전승이었다.[10] 에세네파가 소수 종파이고 그리스도교와의 관계성도 논란이므로 넘어간다고 치더라도, 두번째로 예수 자신의 발언은 그가 아버지를 야훼라고 주장했음을 입증한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는 시편의 기도문을 인용하는 등 그는 구약을 즐겨 인용하고, 스스로를 이사야서의 다음 구절에 나오는 야훼의 종과 명백하게 동일시하였다.
그리고 사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의외로 엉뚱한 곳에 매우 명확하게 제시되어있다. 바로 이레네오의 저서 "이단논박"[11] 에 나오는 저술이 그것으로, 이레네오는 단호하게 "신이라 불리는 존재는 아버지(성부), 그의 아들(성자), 그리고 '''입양된 자들''' 뿐이다."라고 말한다. 사도전승/개신/개혁을 통틀어 기독교계 전반에 걸처 하느님의 자녀란 말을 자주 쓰는데, 이게 그냥 생각없이 할 소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레네오의 이단논박에서의 서술은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이 '''하느님의 아들로 입양되는 것'''이며, 이레네오는 극초기 기독교와 중기 기독교 사이의 인물이기 때문에 매우 신뢰성 높은 서술이다.[12] 야훼를 아버지라 지칭하는 것이 오히려 당연한 것이다!
세번째로, 야훼의 성전에서 모친 성모 마리아에게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라고 발언한 점(루가의 복음서 2:49, 공동번역 성서)에서 예수는 자신의 아버지를 야훼로 인식하고 있다. 네번째로 "너희가 사람의 아들을 높이 들어올린 뒤에야 내가 누구라는 것(Ego sum)을 알게 될 것이다. 또 내가 아무것도 내 마음대로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주신 것만 말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요한 8, 28)"에서 보듯 예수는 자기 자신을 Ego sum이라고 드러내는 독특한 화법으로 자신을 야훼라고 선언하였으며,자신과 아버지는 동일한 본질을 지녔다고 설명했다. 이 문서에서 여러번 강조되지만, 야훼는 성부에게만 해당되는 호칭이 아니다. 그리고 Ego sum은 존재적 절대성을 극도로 강조하는 표현이다. 다섯번째로, 애초에 유대교에서 고백하는 야훼는 인격신이다. 따라서 예수가 주장하는 아버지에게 인격성이 있다고 해서, 야훼가 아니라고 말한다면 넌센스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유대교에서도 예수가 주장하는 아버지가 야훼가 아니라는 식의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유대교가 부정하는 것은 예수가 진짜 야훼의 아들이다라는 믿음이지, 예수가 스스로를 야훼의 아들이라고 믿었다는 것은 부정한 바가 없다.
그나마 이슬람의 경우에는 이야기가 다를 수 있는데, 이슬람교에서는 성경은 본래 야훼의 메시지를 담고 있었으나 변개되었고, 쿠란에는 그 메시지가 100% 온전히 보전되어있다고 본다. 그리고 쿠란에서 예수가 야훼의 아들이며 야훼 그 자체라는 말이 강하게 부정된다. 어차피 성경은 이슬람교의 입장에서 보자면 변개되어 신뢰성에 문제가 있기도 하고. 보통 예수에 대해 언급할때는 복음서의 예수를 말하지만, 굳이 복음서에 한정시키지 않는다면 가장 유효한 반론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비슷한 사례로, 역사적 예수 떡밥을 도입하여 복음서의 묘사에 반론을 제기하는 경우도 있다. 다만 역사적 예수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거의 난장판에 가까울 정도로 정립이 안되어있고, 특히 예수가 주장하는 아버지가 야훼가 아니라는 떡밥이 학계에서 진지하게 논의된 적은 없다. 정확히 말하면 관심 자체가 없다.
결국 예수의 아버지 논란(?)을 정리하자면 이렇게 된다.
- 복음서의 예수는 명백히 스스로가 야훼와의 어떤 특별한 관계를 이룬다고 주장하였고, 유대교에서도 예수가 자신의 신격의 아버지가 성부라고 주장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애초에 예수는 그 때문에 사형당했다.
- 쿠란에서는 예수가, 자신은 야훼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 역사적 예수 연구에서는 이 떡밥에 관심이 없다.
4. 이름과 호칭에 대하여
원래 유대인들은 신의 이름을 히브리어로 יהוה라고 쓰는데, 이를 라틴어계 문자로 옮기면 YHWH 또는 YHVH가 된다. 테트라그라마톤(τετραγράμματον)[14] 라고 불리며, 직접 불려서도 기록되어서도 안 되었기 때문에, 읽을 때는 아도나이(나의 주님)라고 바꾸어 읽었다. 그런데 고전 히브리 문자에는 모음을 표시하는 기호가 없었기 때문에[15] , 세대가 지나며 어떤 모음을 붙여서 읽는지를 잊어버렸다.
다만, 히브리어에 모음이 아주 없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물론 모음을 굳이 쓰지 않아도 자기들끼리는 알아서 잘 읽을 수 있는 문자인 것이 맞긴 하지만, 고전 히브리어에도 모음이 분명히 있었으며, 지금까지 발견된 여러 성경 사본에도 후대의 혼란(모음이 무엇이 붙는지에 따라 의미가 확 바뀌는 히브리어 특성상)을 막기 위해 '''모든 글자에''' 모음을 붙인 사본도 여럿 발견되었다. 다만, 십계명의 제3계명을 철저하게 지키기 위해 테트라그라마톤에는 모음을 붙이지 않고 말 그대로 감히 읽기가 두려워 읽지 않은 것이지, 처음부터 자음으로만 계시되었거나 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후세 학자들이 YHWH를 어떻게 읽는지 연구한 끝에 여러 학설이 나왔다. 르네상스기에 신의 이름을 음역해보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재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임시방편으로, 기록된 네 자음(YHWH)에 히브리어 독음 아도나이(Adonai)의 모음을 끼워넣은 것. 야호바를 라틴어식으로 읽으면 '여호와'[16] 가 되며, 이를 한국의 개신교에서 받아들였다. 덕분에 개역성경이나 개역개정판의 성경은 죄다 여호와로 기록되어 있다.
YHWH의 원래 발음에 대해서는 야흐오, 야흐와 등의 다양한 학설이 있지만, 야웨 또는 야훼라고 읽는다는 주장이 가장 유력하게 여겨지고 있다.[17][18] 다시 말하자면, 학자들간에 YHWH의 첫번째 모음이 'a' 라는 데에는 이론이 없으나 2번째 모음이 'e' 라는 데에는 이견이 존재하는 상황이다. 아무튼 19세기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성서학자들은 야훼라는 이름을 다시금 사용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그리스어 필사본에서는 YHWH를 야훼로 발음하고 있다고 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가톨릭 신자가 전례나 기도 중에 '''신의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것을 금지'''하였다. 그에 맞추어 가톨릭 성경 역시 그 부분을 주님(dominus, κύριος) 등으로 치환하여 재판하였다. '야훼'의 발음이 언제든지 잘못된 것으로 밝혀질 여지가 남아있을 뿐 아니라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는 10계명의 계명[19] 에 충실하기 위해서이다. 다만 가톨릭 신자가 학술적인 이야기를 하는 데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개신교의 개역 성서에서는 옛날부터 사용했던 이름인 '여호와'를 존중하여 개정판에도 그대로 수록했으나, 표준새번역 및 새번역 성경에서는 YHWH를 모두 '주'로 치환하였다. 이는 70인역 및 불가타, 루터 독일어역, 제임스 흠정역 등이 모두 그 4글자를 '주'로 치환한 교회의 전통을 따른 것이라고 한다.[20] 물론 YHWH와 결합된 이름인 '''여호와 이레''', '''여호와 닛시''', '''여호와 샬롬''', '''여호와 샤마''' 등은 그냥 개역 성서의 표기에 익숙해진 독자들을 고려해 여호와로 표기했다.[21]
여의도 순복음 교회를 비롯한 기독교하나님의성회(순복음) 교단의 경우는 개신교임에도 성경과 찬송가의 '여호와' 표기를 '야훼'로 바꿔 사용한다.
야훼라는 이름 뒤에 수식어가 붙어 하나의 뜻을 형성하기도 하는데 대표적인 예로는 다음 것들이 있다.
- 야훼 이레(여호와 이레) - 창세기 22:14 야훼께서 준비하신다는 뜻
- 야훼 닛시(여호와 닛시) - 출애굽기 17:15 야훼께서 승리케 하신다는 뜻
- 야훼 라파(여호와 라파) - 출애굽기 15:26 야훼께서 치료하신다는 뜻
- 야훼 삼마(여호와 삼마) - 에제키엘 48:35 야훼께서 거기에 계시다는 뜻
- 야훼 샬롬(여호와 샬롬) - 판관기 6:24 야훼께서 평화를 주신다는 뜻
- 야훼 로이(여호와 로이) - 시편 23편 전체 야훼께서 나의 목자 되신다는 뜻
테트라그라마톤에 해당하는 Y, H, W ,H 이 4문자를 게마트리아로 풀면 각각 10, 5, 6, 5로 26이 나온다.
이슬람에서는 야훼를 지칭하는 이름이 99가지나 있는데 이를 '''아스마 알라 알 후스나(أسماء الله الحسنى 신의 아름다운 이름들)'''라고 한다. 그 이름들 중에서 자주 쓰이는건 당연히 '''알라(الله)'''. 알라는 정관사 알(ال)과 신을 뜻하는 일라(إله)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아랍어 단어이며, 아랍어와 같은 셈어파인 히브리어와 아람어의 '엘'과 어원이 같다. 그런데 흔히 '알라'라고 하면 오직 이슬람의 신만을 뜻한다고 생각하지만 아랍계 기독교인들도 자신들의 신을 '알라'라 부르며, '알라'는 아랍 지역에서 신이라는 뜻을 가진 보통명사로 자주 쓰인다.
한편으로 현대 천주교의 정상급 신학자로 평가받는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자신의 저서 <나자렛 예수>에서 다음과 같이 이 이름을 풀이한 바 있고, 가톨릭 성경에서 이 이름을 직접 서술하는 게 기피되는 까닭도 이 글로 이해하는게 가능하다.
당시에는 많은 신이 있었다. 그래서 모세는 하느님의 이름을 묻는다. 실제로 하느님은 다른 신들과 비교해 특별한 권위를 지닌 분으로 당신의 신분을 밝히신다. 그런 의미에서 하느님의 이름이라는 관념은 일차적으로 다신교를 믿는 세계에서 통용되는 관념이다. 그러니 이런 세계에서는 모세의 하느님도 당신의 이름을 말해주어야 했다. 그러나 모세를 부르신 하느님은 여느 신이 아니고 진짜 하느님이시다. 본래 참된 의미의 하느님이란 여럿일 수 없다. 하느님은 본질상 한 분 뿐이시다. 그러기에 그분은 신들의 세계에 있는 신들 중 하나로 등장하실 수 없다. 그분의 이름이 다른 신들의 이름 가운데 하나일 수는 없다.
이와 같이 하느님이 주시는 응답은 모세의 물음에 거절하는 답이기도 하고 그 물음에 응하는 답이기도 하다. 그분은 당신 자신에 대해서 "나는 있는 나다."하고 말씀하신다. 그러니까 그분은 단순히 '있는 분'이다. 이스라엘에서는 하느님이 당신의 신원을 몸소 밝혀주신 이름, 곧 '야훼YHWH'라는 이름을 소리내서 부르지 못하도록 금지했다. 그것은 그분의 이 이름을 다른 신들의 이름 가운데 하나로 격하시키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성경을 새로 번역하면서 이스라엘에게는 언제나 신비에 차 있고 함부로 발음해서는 안 되었던 이 이름을 여느 이름처럼 적어놓는 경우가 있다. 그 결과 그분의 신비를 일반적인 종교사의 평범한 사례로 끌어내리게 되었는데 이것은 옳지 않다. 하느님께는 그분을 그려 보일 수 있는 어떤 그림도, 그분을 부를 수 있는 어떤 이름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자렛 예수> 국역번 1권 221~222p에서 인용
4.1. 한국어에서
한국에서는 천주교와 정교회, 성공회 및 여호와의 증인은 '''하느님''', 대부분의 개신교 교파들과 후기성도 교회, 이슬람은 '''하나님'''이라고 호칭한다. 최초로 천주교 교리서를 동양 언어로 집필한 마테오 리치가 '신'을 대체하기 위한 표현으로 동양권 내의 문화에서 적절한 표현을 찾던 중에 불교의 제석천을 의미하는 '天主'를 사용했으며, 한국 가톨릭의 신자들도 '천주님'이라고 불렀다. 이 번역덕에 많은 신자들은 '기독교의 YHWH'를 상제(上帝), 제석천 등의 관념과 유사하게 이해하였고, 이것은 매우 큰 효과를 발휘하여 한국 대중들이 별 거부감이나 이질감 없이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하는데 공헌했다.[22]
이후 개신교가 한국에 유입되면서, 가톨릭을 따라하여 역시 '천주님'으로 절대신을 호칭한다. 문제는 당시 개신교를 보는 가톨릭의 입장은, '빼도박도 못하는 이단 놈들'이었고, 당연히 개신교 쪽과 가톨릭 쪽의 갈등이 있었다. # 이후 개신교 측에서 '천주님'이라는 호칭을 '하ᄂᆞ님'(하ᄂᆞᆯ + 님)으로 변경하고 [하나님]이라 발음했다.[23] '하ᄂᆞ님'을 '하나님'이라고 읽은 이유는 당시 개신교 숫자가 많았던 평안도 지방[24] 에서 '하ᄂᆞᆯ(天)'을 '하날'이라고 발음해서 '하ᄂᆞ님' 또한 '하나님'이라 발음했기 때문이다.
이후 1977년 가톨릭과 개신교가 함께 '공동번역성서'를 출간하면서, 한국 가톨릭에서도 이 '하ᄂᆞ님'이란 번역을 받아들였다. 이 당시에는 표준어가 널리 퍼졌기 때문에 그에 따라 당연히 '하나님'이 아닌, '하느님'을 공식적인 호칭으로 채택하게 된다. 공동번역성서를 사용하는 '성공회'와 '정교회' 역시도 하느님이라는 호칭을 채택한다. 다만 당시 천주교측과 합의한 종파는 개신교 중에서는 마이너였고, 공동번역성서에 참가하지 않은 대다수의 개신교 종파들은 하나님이라는 호칭이 여전히 주류이다. 일부 견해로는 이를 유일신의 의미를 강조한 '하나' + '님'으로 풀이하여 '하느님' = '하늘' + '님'과 구분하기도 한다. 한국 이슬람에서도 '하나' + '님'이라는 해석을 받아들이고 있다.
4.2. 진짜 이름을 갖는가
흔히 '야훼'라고 불리우지만, 범재신론에 따르면 모든 것을 궁극적으로 포괄하는 신은 그 자신을 다른 무언가와 분리해서 부르는 '이름'을 가질 수 없다고 한다. '이름'이 있는 순간부터 모든 것을 포괄한 그 자신의 바깥 영역이 존재한다는 소리가 되니까. 예컨대 우리는 동그랗고 딱딱한 과일에게 '사과'라는 이름을 붙이면서 '사과인 것'과 '사과가 아닌 것'을 구분하는데, 신학적으로 신은 모든 것을 포괄한 '''존재'''이므로 '''신을 신이 아닌 다른 무엇인가와 구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철학적으로 접근했을 때 소쉬르의 이론에 따르면 이름을 가진 특정 기호는 다른 기호와 구분되는 것으로만 자신을 특정할 수 있는데, 이 경우 신에게 이름을 붙이게 되면 신과 같은 층위에서 '신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있다고 필연적으로 가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유일신 종교에서는 이런 문제를 회피하기 위해 신이 이름을 갖지 않는다고 하게 되는 것. 물론 성경상의 신은 "나는 나다"라는 히브리어의 한 형태로써 지칭되지 실제이름이 밝혀진 적이 없어서 회피한다고 보긴 힘들듯.[25]
5. 표현
이외에 출애굽기의 묘사처럼 온 몸이 빛나는 인간의 형상인 경우도 있다. 따져보자면 인간의 몸을 입고 왔을 당시 즉 예수의 모습, 보통은 예수와 비슷하게 생긴 흰 세마포 옷을 입었을 수도 있지만, 보통은 머리와 수염이 하얀 구름위에 있는 노인 정도로 묘사하거나, 말로 표현하기 힘든 초현실주의적으로 그려지거나 아예 실체가 없는 빛덩이로도 묘사한다.
한편 토마스 아퀴나스는
라며 신을 바다로 비유해 표현했다.신은 시작도 끝도 없는 무한한 바다와도 같다.
이 바다는 끊임없이 출렁이며 물살과 물방울, 안개를 시도 때도 없이 형상하는데 이는 우리 존재물들이다.
바다는 물방울을 포괄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 부분은 물방울 속에 들어있기도 하다.
바다가 출렁일 때 모든 것이 잠깐 나타났다 곧 사라진다.
허나, 이 바다는 무작정 출렁이기만 하는 것이 아닌 끝없는 지혜와 거룩한 의지로 충만해 자신의 계획대로 출렁인다.
어떤 묘사를 하든, 이는 모두 신의 영광 또는 신의 위엄으로 신이 현현한 모습이지 신의 본체는 아니다. 신은 영이라 '''실체가 없다.'''
결론적으로는 모두 맞다고 볼 수 있다. 야훼는 어떤 모습이라도 취할 수 있는 존재이며 굳이 모습을 취할 필요가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성경에서는 '''하느님은 영이시라 인간과 같은 형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며, 신학을 조금이나마 안다면 창세기의 "우리의 모습을 본 따 우리와 같이"의 신의 말이 물리적 형태가 닮았음을 의미하는게 아니라는 것은 알수 있다.
애초에 전지전능하다는 시점에서, 모든 것을 초월했다는 시점에서 그에게 본모습이란 개념은 통하지 않는다. 무엇을 그리거나 표현해도 그게 야훼의 모습이 될 수 있다. 전지전능하면 원하는 모습으로 언제든지 바꿀 수 있으니까.
시간적으로 보면 과거부터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항상 존재하기 때문에 일반상대성 이론에 시공간은 같은 본질이므로 공간적인 개념 도 마찬가지로 이곳에 있는 동시에 저곳에 있고 모든 곳에 동시에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형태 자체를 논할 수 없다. 모든 곳에 동시에 있는 물체는 어떻게 생겼을까 하는 것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전지전능한 초월한 존재기 때문에 우리의 능력으로는 그려낼 수도 없다는 것. 간단하게 비유하자면 ∞을 100으로 나누어 봤자 간단하게 표현해도 여전히 ∞이라는 식이다. 때문에 유대교나 기독교, 이슬람에서는 그림이나 석상 등 사람이 볼 수 있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은 신성 모독으로 간주하거나 다른 이교도 신으로 여긴다. 기독교 중 개신교, 그중에서도 츠빙글리와 칼뱅의 영향을 받은 개혁교회들은 시각적 요소를 엄격하게 배제하고 있다. 이슬람에서는 매우 중요한 문제로, 이슬람교에서 신은 그 어떤 시각화한 이미지도 가지지 않는다. 인간의 형상이 아닌 하다못해 두루뭉술한 빛으로도 표현해서는 안된다.
6. 특징
6.1. 유일성
야훼와 고대 근동 종교 문헌의 가장 크고 분명한 차이점은 신의 숫자이다. 창세기는 다수의 신을 믿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신은 오직 한 분이라고 가르친다. 창세기에서는 오직 하나의 신이 하늘과 땅, 바다, 땅과 식물, 천체, 동물과 사람 등 만물을 창조하였다고 나온다. 따라서 각 창조물이나 영역에 별도의 신이 존재하지 않고, 신들끼리 경쟁하지도 않는다. 유일신이 만물을 주재하며, 모든 것을 통제하는 것이다.
6.2. 초월성
위의 유일성과 연동해서 또한 창세기 기사에서 눈여겨 볼 점은 초월성이다. 즉 야훼는 모든 피조물 이전에 존재했었고, 만물을 창조한 주인으로, 만들어진 사물과는 구분된다. 어떤 의미에서 야훼는 자연 질서를 초월하여 그 외부에 있는 '초자연'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 말에서 '초자연적'이라는 단어가 파생했다.
우리는 이런 야훼의 특성이 당시 이스라엘 이웃 나라들의 신관과 얼마나 다른지 볼 수 있다. 그들에게는 하늘과 달, 태양 등이 곧 신이었고, 최소한 신들은 이런 자연요소와 불가분의 관계였다. 이집트의 세티 1세가 지었거나 그를 위해 지은 오시리스 신전 천장에는 누트 여신의 이야기가 새겨져 있다. 누트는 하늘처럼 공중에 펼쳐져 있었다. 공기의 신 슈가 누트를 떠받들고 있다. 슈는 땅의 신 게브 위에 서 있다. 해와 달과 별을 포함한 다른 신들은 누트의 다양한 부위에서 형성되었다가, 적절한 시간에 다시 돌아갔다. 슈는 누트를 떠받들고 있을 뿐 아니라, 넷에서 여덟 신의 도움을 받아 하늘에 있는 물을 막고 있다. 이처럼 세상의 각 요소는 개별 신과 연결되었다.
그런데 성경에 계시된 신관은 다르다. 야훼는 태양이나 폭풍 가운데 있지 않고, 이 세계를 초월하여 다스린다. 그리하여 공간이든 시간이든 만물을 다스리는 유일신은 자연법칙에 종속되지 않는다. 자연과 우주마저 야훼의 일부가 아니라, 그가 창조한 피조물에 불과했다.
6.3. 전지·전능·전선
'''전지(全知, Omniscience)·전능(全能, Omnipotence)·전선(全善, Omnibenevolence)'''[26]
'''절대자답게 능력에는 한계가 없다. 말 그대로 전지전능'''하다. 말 한 마디로 만물을 창조하고(창세기), 홍해를 갈랐다가 도로 합쳐놓으며(출애굽기),[27] 소돔과 고모라를 하루만에 불과 유황으로 '''흔적도 없이''' 날려버린다.(창세기)[28] 그리고 이미 폐경한 늙은 부부가 아이를 낳고, 의미가 담긴 꿈을 꾸게도 한다. 물론 천지창조 7일째 되는 날 안식하였다고 나오지만, 일곱째 날에 피곤해서 안식했다는 암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29] 오히려 안식일의 '쉼'은 창조 활동의 마감을 뜻했다.[30] 이외에도 수많은 기적을 행했지만 전지전능하기 때문에 해 멈추기(여호수아), 죽은 사람 살리기(4복음), 흐르던 폭포물 자르기(여호수아), 모든 첫 생명을 죽이기(출애굽기) 등등 인간이 생각할 때 과학적으로 말도 안되고 우주의 법칙을 근간째 뒤흔들며 위배하는 행동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야훼에게는 정말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바빌로니아 서사시 에누마 엘리쉬에 등장하는 압수 주신은 자신의 소생 에아의 주술로 잠에 빠진다. 그는 잠을 자는 동안 결박을 당하고, 죽음에 이른다. 그러나 야훼는 이 정도로 유약하지 않다. 그는 창조 세계에 속하지도 않고, 종속당하지도 않고, 오히려 창조 세계를 초월한다. 성경에서 야훼는 자신을 물질세계와 시간을 초월하는 존재로 계시한다. 야훼는 세계를 창조했지, 세계에 얽매이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7일 창조에 대한 의문에 대해 히브리 시대의 '하루'는 24시간 단위의 '하루'만 칭하는 것이 아님을 유의하는 게 좋다. 성서의 다른 책들에서도 하루(날)이 수 일에서 수십 일을 가리키곤 한다. 즉, '창조의 날들'은 실제의 일주일이 아니라 일곱으로 나눠진 수천만년의 기간일 수 있다는 것. 이러한 해석을 신학적으로는 '골격해석'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성서무오설을 믿는 사람들이 들으면 스프링처럼 튀어오르며 반발한다.[31] 애초에 지구가 도는지 태양이 도는지도 모르는 고대인들에게 '우주는 137억년 전에 빅뱅을 통해 힉스입자가...' 하며 설명해주는 게 의미가 있을까? 성경은 그런 과학책이 아니다.
다만 오해를 막기 위해 말하자면,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전능'은 '절대자의 본성에 모순되지 않는 한 하고자 하는 것을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능력'을 일컫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은 전능하시니까 나쁜 짓도 하실 수 있나요?" 같은 질문은, 그리스도교 교의로 볼 때 상당히 맥빠지는 질문인 감은 있다.'''하느님께서 당신의 본성에 모순되지 않는 한 하고자 하시는 것을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능력.''' 하느님의 작용적 속성에 속한다. 하느님께 있어서 지성과 의지와 능력은 하나이며 서로 명확히 구별되지 않는다. 이 능력은 하느님이 지니신 최고 권위의 표현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마태 28:19)고 하신 말씀에서 그 권위가 나타나 있다. 이 능력으로 세상에 하느님의 왕국을 확장시키는 것이다. 전능은 세상의 창조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인식되었고(창세 2:7, 이사 29:15-16, 예레 18:1-6, 로마 9:19-24), 지혜와 관련되었다(지혜 7:24-25, 욥기 37:14). 하느님의 전능은 또한 당신의 구원능력을 통하여 나타났고(출애 4:1-5, 예레 16:21, 이사 50:2), 그리스도 안에서 절정을 이루었다(마태 8:1-27, 골로 1:10-12). 그리스도의 강생, 기적, 부활 등은 그리스도가 지닌 능력의 표현이며(루가 1:35, 사도 2:22-24), 그리스도 자신은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이 지니신 전능의 표현이다(1고린 1:18-25). 이 전능에서 성령이 참여하고(1고린 2:4-5, 에페 3:16, 로마 1:4, 15:13:19 ), 사도계승을 통하여 교회 안에 전달되며(사도 1:8, 1데살 1:5, 2디모 1:7-8), 성세성사를 통하여 그리스도 교인들에게 전해진다(에페 6:10-13, 골로 2:12).
가톨릭 대사전, '전능' 항목
성부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삼위일체론 교리에 의하면 같은 본질이나 다른 위격, 단순하게는 외아들인 걸로 나온다. 청나라에선 기독교 신자인 홍수전이라는 사람이 뭔가 계시를 받는 듯한 꿈을 꾸고서, 이 성부의 둘째 아들을 자처하며 태평천국운동을 일으켰다. 홍수전 외에도 성부의 둘째 아들 같은 걸 자칭한 사람은 종종 있었다.
이 이외에도 기본적으로는 선을 나타내지만, 선이라는 개념을 좀 더 명혹히 하기 위해 그에 반하는 악을 만들어내고 반면교사로 만들어내기 위한 수단으로써 악을 방치한다는 것. 악을 저지르면 지옥에 가기 때문에 현세의 사람들이 악인들이 벌받는 것을 보고 선과 악의 개념이 더 명확해진다는 설이다.
또 하나로는 전지(모든 것을 알고)·전능(모든 것을 행할 수 있는) 성질에 있다는 것. 특히 전지(모든 것을 알고 인식한다)라는 것은 애초에 인간만이 멋대로 신이 선하다고 믿는 것일 뿐 사실 신에게는 그런 경계가 없다는 것이다. 선과 악의 경계 자체를 초월하여 그냥 이것 저것 만들다보니 선인도 악인도 창조된 것이라는 설이다. 이를 자조적으로 보는 입장의 소설이나 애니메이션 등에서는 마치 신이 세상을 심시티 게임하는 것처럼 묘사하기도 한다.
등등등 이런 식으로 아예 이 전지전능을 부분을 하나의 항목으로 만들어도 될만큼 여러가지 설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딱히 대다수 사람들에게 공감 받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특히 소설이나 애니메이션 등에서 해석된 신은 종교인들이 보면 펄펄 뛸 정도의 내용들로 가득한지라.
허나 일단 역사적으로 증명된 사실을 놓고 보면 이런데…
- 불완전에서 시작해서 어느새 전지전능: 사실 초기 기독교의 논쟁, 특히 영지주의와 보편교회의 논쟁에 대해서 가장 심각하게 이뤄진 것이 이 창조의 완전성에 대한 고찰이다. 이 경우 영지주의자들은 반대로 창조가 불완전한 상태라고 주장했고, 반대로 보편교회측은 완전한 형태로 시작되었다고 주장했던 것. 사실 창조적 불완전성의 문제로 보면 이 전능자의 문제는 해결이 된다. 불완전한 전능이란게 있을 수가 없으니… 하여 이 초기교회의 문제는 "일원적 이원론"으로 보는데, 창조를 시행한 주체는 둘, 그러나 그 근본은 하나인 것. 이 논쟁의 결과는 자유의지와 원죄를 주장하는 4세기의 교리투표로 인해서 결정되었다만, 원래 기독교의 출발에서도 신의 완전성에 대한 의문은 계속적으로 주장되었던 것이다.
- 전능자의 의미에 관점을 맞춘 해석: 사실 유대교는 이 전능자에 대해 별로 의구심을 가지지 않기 때문에 불완전한 창조를 두고 "그건 창조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라는 정의를 내린바 있다. 즉, 실은 기독교의 개념은 이 개념에서의 "반증이나 반론"을 하면서 발전하게된 것인데, 악이라는 개념에 대해 유대인들의 발상은 "완전한 창조를 이뤄지게 하는 것에 대한 반발"을 의미하는 것으로 도태를 의미하는 형태를 가지고 있었고, 애초에 아담이 실락하게 되는 이유도 창조의 프로세스로 해석해버리는 등, "신은 완벽하기는 한데 일단 창조가 완전치 않다"는 부분을 근거로 한 주장을 제시하였던 바가 있다. 즉, 사실상 똑똑한 처사인 것이, 결론적으로 이들이 주장한 것은 현대의 진화론과도 별로 대치되지 않는 관계로… 문제는 이 사상의 근간이 민족주의화 된 것이 바로 유대인의 상대적 우월주의인데, 반대로 이 세상의 창조를 형평성있게 완성할 수 있는 존재는 유대인이 유일하다는 주장인 셈이다.
6.4. 만들어지지 않은 신
다른 종교의 신화 속에는 그들의 신들이 만들어진 과정이 나와 있다. 그런데 출애굽기에는 모세가 처음 야훼를 만났을 때, 당신의 정체가 무엇이냐고 묻는 장면이 있다. 이에 대해, 야훼는 자신을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이다.'라는 말로 설명했다.
자신을 '스스로 존재하는 자'라고 설명한 까닭은 자신은 누군가의 자식이거나 혹은 어떤 초월자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는 점을 말한 것이다.[32]
인간이 섬기는 대다수의 신들이나 초월자들은 대부분 자신을 낳아준 부모가 있다.[33] 즉, 그들은 스스로 존재하고 싶어서 존재한 신이 아니라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태어나거나 만들어진 신이다.
반면 야훼는 자신은 스스로의 의지로 존재한다는 것을 말함으로서 다른 신들과 구별되는 초월적인 존재임을 부각한 것이다.[34] 물론 다른 종교에도 이와 비슷한 창조주나 조물주라는 개념은 있지만[35] 이런 신들은 우주의 법칙을 관장하지 인간사에 관여하는 신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섬기지는 않았다. 창조신이면서도 인간사에 깊게 관여하는 야훼가 굉장히 특이한 케이스. 즉, "창조신을 섬기는 근본주의"임을 주장한 것인데… 이것도 좀 사연이 있는 편이다.
사실 중근동의 종교는 지역 실세에 따른 종교의 문제가 있어서, 도시국가 1이 지역의 패권을 잡으면 그 도시국가의 종교가 킹왕짱이 되는 습성이 있었기 때문에 "주신의 위치는 언제나 변동성"이 있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사실 이런 창조신 놀이는 그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으로 "주신이 부족신들 위에 서기 적당한 형평성"을 주장하기 위한 일종의 설정놀이라고 할 수 있겠고, 달리 말해서 "그 다른 신들(후대의 천사)"위에 서는 당위성은 그 신들의 "애비이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고려되는 것과도 같은 논리다.
후대 유대교의 해석 개념에서는 이것이 태초로부터 스스로 존재하기로 규정된 것, 즉 태초의 무한으로부터 처음 존재하게 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하며, 실제로 이 개념은 카오스로부터 태어난 우라누스와 가이아 등과 비슷한 견지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이것이 나중에 "다신교의 신들보다도 우위에 있는 근본적인 신의 존재"를 부각하기 위해 공식화된 것으로 볼 수 있을 듯.
6.4.1. 존재 그 자체(ipsum esse)
위 서술의 연장선이다. 출애굽기에서 나타난 존재론적 고찰의 연장선으로, 토마스 아퀴나스가 집대성한 특성이다.[36] 야훼는 그 어떤 가능태도 배제되는 순수 현실태이며, 그렇기에 야훼는 불변한다. 또한 그는 완전한 순수 현실태이기 때문에, 그 어떤 존재자도 그의 원인이 될 수 없다. 그렇기에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면 야훼에게 가장 적합한 이름은 '거기 있는 자'(신학대전 I, 13, 11)이다. 그러므로 야훼는 '그의 존재이다'(신학대전 I, 3, 4c). 따라서 존재야말로 야훼의 본질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후세의 신학자이자 20세기의 가장 저명한 가톨릭 신학자로 꼽히는 카를 라너(Karl Rahner)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을 계승하면서도 스승이었던 하이데거의 철학을 수용하여, 인간이 유한성(시간성)에 걸릴때 무한성인 야훼를 인식할 수 있으며, 이는 피조물 중 오직 인간에게만 부여된 능력이라 하였다. 이해가 안간다면 "I am a wiki-user"라는 문장을 생각해보자. I와 wiki-user는 존재자이며, am에 대응되는 것이 바로 '존재'다. 존재는, 그것을 통하여 존재자가 있게하는 그러한 완전성이다. 그리고 서방교회에서는 바로 이 '존재'를 야훼라고 해석한다.
6.5. 성적인 존재가 아님
다른 종교 및 신화, 전설의 신들은 사람과 비슷한 존재로 묘사된다. 중근동 신화는 물론이고 대표적으로 그리스 로마 신화와 북유럽 신화만 봐도 드라마를 방불케 하는 신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물리적, 성적 정복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이는 피조물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야훼는 다르다. 야훼는 우월한 인간이 아니다. 야훼에게는 약점이 하나도 없다. 창세기는 야훼가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 즉 "남자와 여자"를 창조했다고 말한다.[37] 결코 성별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야훼는 남자도 여자도 아니지만, 양성 모두 야훼의 일부분을 표현한다.하느님께서는 결코 인간의 모습이 아니시다. 그분께서는 남자도 여자도 아니시다. 하느님께서는 성을 구별할 여지가 없는 순수한 영(靈)이시다. 그러나 남자와 여자의 ‘완전성’은 하느님의 무한하신 어떠한 완전성, 곧 어머니의 완전성, 아버지와 남편의 완전성을 반영한다.
- 가톨릭 교리서 370항
6.6. 일신인가 주신인가
구약에서 나오는 야훼에 대한 내용은 일관적으로 일신교적이며, 다른 이방신의 실존에 대한 묘사는 찾아볼 수 없다. 십계명의 두번째 계명에서 다른 이방신들을 서술한 내용 때문에 모세오경에서 야훼의 유일신적 요소와 다신교 신앙의 주신(主神)적 요소가 함께 묘사된다는 오해가 있는데, 이는 부적절한 이해이다. 해당 계명에서는 이방신을 섬기는 행위를 범죄로 못박고 있는 것이지, 이방신이 실제로 존재하여서 세계에 영향력을 끼친다는 묘사가 없기 때문이다. 모세오경에는 이방신이 권능을 행사하는 장면이 전혀 없으며, 야훼의 목소리는 지속적으로 서술되지만 이방신들은 야훼의 권능 행사에 대항하는 묘사조차 없다. 창세기 천지창조 일화의 야훼는 해와 달과 별과 괴물들마저도 창조하는데, 이는 천체와 신을 동일시하고, 흔히 괴물들을 신의 대적자로 설정하는 고대 다신교 세계관과는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다신교에 대한 서술들은 야훼가 다신교의 주신이라는 내용보다는, 유대인이 야훼 신앙을 받아들인 이후에도 다신교적 습관을 버리지 못한 흔적을 후대 기록자들이 남긴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아브라함이 하란 땅에서 부름을 받을 당시에, 유대인들은 각기 다른 신을 믿었다고 묘사되며, 아브라함이 팔레스타인에 정착할 때 최초로 야훼만을 믿기로 계약하고, 그 후에 모세가 이집트에서 유대인들을 모아 탈출한 이후에 계약이 갱신된다. 그럼에도 이집트나 바빌론 지역에서도 다신교적 습관은 남아있었고, 이런 다신교적 습관을 범죄로 정한 것이 신명기 5장과 그 병행구절인 출애굽기 20장에서 나오는 십계명의 두번째 계명인 것이다. 여기서 야훼는 스스로를 질투하는 하느님으로 묘사한다. 또한 신명기 7장에서는 이방신의 제단은 허물어야 한다고 묘사된다. [38]
생각건대, 타나크가 가나안 정착 과정 및 이후에도 이방 풍습의 유입을 막지 못하고, 다신교처럼 야훼와 바알을 동시에 숭배하거나, 혹은 동일시하던 유대인들을 경계하기 위해 쓰였던 점으로 검토한다면 이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즉 지금 너희가 동일시하는 그것들은 신도 아니며[39] 적어도 모세오경의 뼈대가 되는 텍스트가 작성되는 시기에는,[40] 유일신적 요소와 주신적 요소가 병존된 것으로 보인다.[41]
6.7. 기독교의 신관(神觀)
예수를 메시아로 믿고 구원의 주체로 받아들이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시작이며, 4세기 이후 여러번의 종교적인 논의 끝에 예수가 유대교의 야훼와 동일한 존재로 설파되었다. 삼위일체론을 정설로 채택한 주류 교단들은 예수와 성부, 그리고 성령의 세가지 페르소나가 야훼라는 하나의 본질 및 본성을 지닌 한 하느님으로 믿는다. 다만 예수는 특이하게도 인간의 본질 및 본성도 지닌다. 말하자면 참 인간이자 참 하나님인 자. 현대 기독교 종파 대부분은 일반적으로 예수를 하느님이자 그리스도로 믿으면서 예수를 통한 구원을 인정한다.
6.7.1. 삼위일체론
모든 기독교가 그러는 것은 아니지만, 삼위일체론을 믿는 기독교에서는[42] 야훼가 실체로는 하나이되, 성부-성자-성령의 3가지 위격을 이룬다고 본다. 그렇기에 예수 역시 실체로는 야훼라고 보며, 야훼에 대응되는 개념은 '성부'가 아니라 '주(Dominus)'로 본다.[43] 그러나 이 문서와 나무위키에서 야훼는 '성부' 쪽을 가리키는 경우가 굉장히 많으므로 이 부분에는 오해에 주의하여야 한다.
야훼가 성부'''만''' 지칭하는 명칭이라는 주장은 당연히 틀린 것이라고 봐도 된다. 나무위키 뿐만 아니라 많은 경우에 야훼는 성부의 뉘앙스로 말해지는 경우가 많지만, 삼위일체를 전제로 할 땐 그 어디에도 예수가 야훼가 아니라는 서술은 없다. 물론 성자와 성부를 구분지어 말할 때 예수는 당연히 성부가 아니며 예수는 당연히 야훼의 아들로 신약에서 고백되지만,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의 고백처럼 또한 '하느님에게서 나신 하느님(야훼의 아들인 야훼)'이기도 하다.야훼란 이름의 의미에 관해서는 견해가 갈린다. ① ‘그분이다!’는 의미의 환호성(yah!)이라는 견해 ② ‘있다’는 의미의 동사(hyh 혹은 hwh)에서 유래한다는 견해, 즉 모세가 하느님으로부터 ‘나는 곧 나다’(출애 3:14)라고 들었던 이름을 백성에게 전할 때 간접화법으로 ‘그는 곧 그다’라고 했다는 견해, ③ 모세의 질문에 대한 주님의 거절이라는 견해(소극적으로 유비적인 답변을 하신 예, 출애 33:19-23) ④ 주님의 영원성을 강조하여 ‘나는 곧 나였던 나일 것이다’(I shall be what I was)라고 번역하는 견해, ⑤ 하느님의 속성을 가리키는 자존(自存)을 의미한다는 견해 등이 그것이다. 생각건대, 이 모든 설명은 하느님의 이름이 출애 3:14에서 동사 ‘있다’(qal)의 형태에 근거를 두고 있음을 간과하는 흠이 있다. 문법적으로 야훼는 이 동사의 원인을 나타내는 형식이어서 "그는 있도록 한다. 그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그렇게 존재하도록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 이름은 만물의 창조주이신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묘사하는 것이다.
가톨릭 대사전, 야훼 항목 中
야훼라는 호칭이 성부에 한정된다는 오해는, 구약에서 드러난 하느님은 모두 성부라고 넘겨짚는 오해 때문이다. 하지만 구약에서든 신약에서든 야훼는 3개의 페르소나를 가진 하나의 실체이며, 그렇기에 구약에서 말하는 야훼를 굳이 성부에 한정할 필요는 없다. 물론 그렇다고 구약에 나온 야훼가 성부인지 성자인지 성령인지 명확하게 구분할 필요도 없고, 성공적으로 구분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냥 '성부만 활동한 건 아니구나' 정도로만 이해하면 족할 것이다.[44]
근본적으로 이런 오해는 삼위일체론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나오는데, 삼위일체론에 의하면 성부는 야훼가 맞다. 그리고 성자도 야훼가 맞으며, 성령 또한 야훼이다. 예수를 보고 '하느님'이라고 부를 수 있고, 또한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부를 수도 있듯이, 예수는 '야훼'로도 '야훼의 아들'로도 모두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 되었을때 그 호칭이 '예수는 하느님이 아니다'라는 선언이 될 수 없듯이, '야훼의 아들'이라는 말 역시도 '예수는 야훼가 아니다'라는 선언은 아닌 것이다. 삼위일체론은 성부, 성자, 성령이 합체(?)해서 야훼가 된다는 이론이 아니며, 각각의 페르소나는 완전히 100% 야훼라고 고백된다.
종합해서 정리하자면 다음 명제는 삼위일체론을 전제로 할 때 모두 참이다.
- 성부는 야훼이다.
- 성자는 야훼의 아들이다.
- 성자는 야훼이다.
- 성령은 야훼이다.
6.7.2. 구원
비 기독교도이든 기독교도이건 죄가 있다면 야훼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즉, 교회에 돈을 얼마를 바치고 이교도를 탄압하며 전 세계를 기독교의 영향 아래 몰아 넣는다해도 죄가 남는다면 절대 야훼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애당초 그 과정을 이루는 중에 수 많은 죄를 범하게 된다. 예수는 복음을 전하랬지 이교도를 강제 개종시키고 무신론자를 처형하라고 한 적은 절대로 없다. 야훼의 나라와 야훼가 죄를 거부하나 안타깝게도 첫번째 사람인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는 죄를[45] 지은 이후로는 모든 인간의 죄의 영향력 아래에 놓이게 되었으며, 죄가 없는 깨끗한 사람은 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이 죄 사함을 받고 죄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그가 나의 모든 죄를 다 지고 죽었음을 믿어야 하는 것이다. 이게 기독교의 근본, 핵심 교리이며 인간이 예수를 왜 믿어야 하는지의 이유, 예수야말로 신이 인간을 위해 놓아준 유일무이한 다리이며 모든 교회(개신교, 가톨릭, 정교회)가 이 부분만은 완전히 동일하다. 포용적인 가톨릭에서조차도 예수를 배제한 구원은 잘 모르겠으나 예수를 통한 구원은 100% 확실한 구원이라고 말하고 있다. 얼핏보면 이교도나 무신론자도 죄만 안지었다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식으로 쓰여있으나 안타깝게 예수 이외의 확실한 구원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예수를 믿지 않는다면 기독교도들도 모두 100% 천국을 가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게다가 성경에서는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은 무고죄라고한다. 완전무결하며 오류가 없는 하느님이 "이는 너희를 위해 내주는 내 아들이며 나의 대행자이다."라고 말하며 예수를 보내고 기적을 행함으로서 직접 보여주기까지 했으나 그걸 거짓으로 치부하고 결국 완전무결하며 오류가 없는 야훼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죄를 씌우는 무고죄를 범한다는 것.
예수님 믿으면 지옥에 안 간다[46] 라는 구원관(매우 거친 요약이지만)을 내세웠으나, 역사적으로 수많은 굴곡을 거쳐 현대 가톨릭과 정교회의 구원관은 "성부도 믿고 예수도 영접하고 '''착한 일도 해야''' 천당 간다."로 바뀌었다… 라고 잘못 아는 사람들이 많다. 엄밀히 따지면 이 문장은 명제 자체가 잘못되었다. 가톨릭과 정교회에서는 '~~해야 구원받는다'라고 교리에 규정지어 놓지 않았다.[47][48] 자세한 내용은 가톨릭항목에서 '개신교와의 교리적 차이'부분을 참조하면 될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착한 일 하면 구원받는다'라는 주장은 가톨릭과 정교회가 분리되기도 전에 이단취급 받은 '펠라기우스''''라는 자의 주장이다. '''기독교의 기본적이고 종파를 초월한 공통된 구원관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해주신다'''는 것이고 이를 베이스로 하여 종파별로 해석이 달라진다. 그러나 어느 종파든 간에 인간의 행위를 구원의 조건으로 보는 것은 잘못된 시각이라고 규정한다. 로마서에서 사도 바오로(바울)가 인간은 자신의 능력으로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여하튼 매우 강경한 개신교와 다르게 가톨릭과 정교회가 '타종교를 존중'하는 자세로 전환한 건 사실이지만 여전히 유일신을 믿으며 '구원은 주님을 통해'임은 변하지 않는다.[49]
한편 개신교에서는 교파와 상관없이 이신칭의, 즉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며 옳은 행위는 믿음의 열매라고 본다. 이는 신학적 진보 보수 여부와 상관없이 대다수 교파가 동의하는 것이다.
자세히 후술하겠지만 예수를 믿지 않고 죽은 위인들이 지옥에 갔느냐는 논제에 대하여 '''성경에 명확하게 나오지 않아서, 함부로 판단하기 어렵다.'''고 한다. 이런 근본주의적 맥락에서 보면 충무공 이순신이나 세종대왕은 예수를 믿지 않았으니 지옥에서 훨훨 타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하지만 '''공식적으론 모른다는 것이 답이다. 성경에 안 나오는 것을 멋대로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은 행위로 간주하기 때문.'''[50] 같은 맥락으로 보자면 '자살하면 지옥간다'란 말도 개신교 교리상 잘못된 말이다.[51] 다만 로마서엔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은 양심에 따라 심판한다는 구절이 있다. 그러나 명확히 듣도보도 못한 이의 구원을 확실히 말해주진 않아서 모른다고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결론을 내리자면, 그 어떤 '''정통 기독교 교단에서도''',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같이 예수를 믿지 않고 죽은 '''위인들이 지옥에 가거나 가지 않았다고 확정적으로 말하는 교단은 단 하나도 없다.'''[52] 어디까지나 '''성경에 없으므로 모른다'''이다. 이는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개신교 자체가 사람은 그 자신의 의로움으로 천국에 갈 수 없으며, 무조건 예수를 향한 믿음을 통해서만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교리를 확고한 진리로 상정하기 때문이지만, 듣도보도 못한 사람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 '그럼 소위 복음을 들었더라도 예수를 안 믿은 의로운 사람이나 위인들은 지옥에 간 것이냐?'라는 비판에 대해서 말하자면 '''개신교 교리상 의인은 오직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하나뿐'''이기 때문에 이런 비판은 애초에 무시한다.[53]
여하간 이러한 구원관이 유대교와 이슬람, 기독교의 가장 중대한 차이기도 한데, '''유대교에서는 구원의 대상이 유대인, 이스라엘 민족만'''이다. 그러던 것이 기독교에 와서는 '''구원의 대상이 전 인류로 확장'''되었다.[54] 이로 인해 유대교에서 파생된 기독교는 자신들의 교리를 널리 세계에 전파하려고 했기에 세계에서 손꼽히는 유명한 종교 중 하나가 된 것이다. 그런데 사실 기독교와 이슬람 이전에도 이미 유대교는 유대 민족의 차원을 넘어 세계 종교화되는 모습을 보여왔는데, 구약성경의 많은 대목들에서 '열방(세계의 여러 민족)이 주님께로 돌아오리라'는 내용을 발견할 수 있다.[55]
뭐 사실 이 문제는 세계화보다는 "영방이라는 개념이 가진 좁은 의미" 문제인데, 부족국가 사회의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사실 영방을 따져 봐야 그 주변국에 대한 문제만을 생각했을테니 뻔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며, 당연하지만 그들이 알고 있는 부족 국가 간의 한계가 극명하니 어쩔 수가 없었던 듯.
또한 그 기독교의 포교개념에도 실은 이런 저런 문제가 많은데, 사실 유일신의 배타적 개념은 여기서 탄생한다. 이슬람과는 다르게, 기독교가 포교 대상으로 삼은 지역들은 남미 등 대륙에서 떨어진 지역들이었고, 이런 것에는 사실 사연이 있다. 종교개혁 당시 점점 위축되는 가톨릭 세력에 위기감을 느낀 스페인-합스부르크 왕가는 이 당시부터 "가톨릭 개종을 늘려서 새로운 동맹을 창출"하는 것을 모토로 중남미로 밀고 들어가게 되고, 개신교는 북미 지역을 공략하게 되는데, 공통점은 "종교가 바로 동맹의 여건"인 것이었다. 당연하지만, 무기기술의 우위를 바탕으로 해서 밀고들어간 이들이 문명화를 이유로 내세운 플롯이 종교였고, 당연하지만 "우리가 이렇게 우월한 문명을 지닌 것은 유일신을 믿기 때문"이라는 주장으로 귀결되는 개종 강요는 실은 흔한 일이었지만, 실은 이 과정에서는 종교동맹이라는 요소가 강조되어 "개신교로 개종하거나 가톨릭으로 개종하거나"라는 사연이 있는 것은 당연했다.
정교회의 경우는 좀 더 복잡한데, 사실 러시아 정교회나 각국 정교회가 부흥하게 된 시점은 합스부르크로부터 동유럽권이 독립을 하려 하고, 러시아가 동구권에 큰 영향을 주던 그 시점부터이다. 즉, 반대로 가톨릭을 고수하는 것은 매국적 관점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에 친러/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정교회가 주류를 차지하게 된 것.
전자와 후자의 차이는 극명해서 전자의 경우는 사실은 "이교도의 신에 대해 문명의 우월성을 기반으로 하여 개종을 강요하는 경우"다. 즉, 전자의 유일신은 "필히 전지전능해야하고, 다른 신을 찍어 눌러야 하는" 신이었고, 후자의 경우는 같은 신을 믿는데 형식주의적인 부분에서 다른 점(주로 정치적인 부분)의 논쟁이 주안점이 되며, 실은 "기독교와 이슬람" 역시 같은 선상에 있다는 것이 문제다.
즉, 정리하면 당연한 말이지만, 구원에 대한 논증을 하는 가톨릭이나 정교회의 문제 역시, 기타 교리적 상이점과 더불어서 "근본 교리의 수정은 불허하되, 지엽적 차원에서의 해석에는 개방된 그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 된다. 반대로 "개혁주의적인 입장의 개신교는 거의 무조건 과거 형식을 비판해야 하는 관계로 구원관에 대한 명확한 분기에 대해 다른 해석을 주장할 수 밖에 없는 경우"였고, 이런 결론으로 말미암아서 각각의 개념 차이가 발생하고 유일신에 대한 관점해석이 달라지는 것은 뭐 별달리 이상한 일은 아닌 게 된다.
허나 그보다 더 근본적인 부분은 종파의 구조적인 면에서도 찾을 수 있는데, 개신교는 인정하지 않고 정교회나 가톨릭은 인정하는 것, '보편교회의 권위'라는 면이다. 이 두 종파의 경우,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사도들을 주교로 삼아 세웠고 현재의 주교들은 그 사도들의 후계자라고 믿는다. 그렇기에 '성경' 뿐만 아니라 교회의 전승, 사도단(주교단)의 해석 등을 모두 중시하는 것이다. 따라서 특히 성서 비평이 본격적으로 발달한 근대 이후로는, 이 두 교회는 성경에 대한 문자주의적 오류에 빠져들 위험이 그나마 줄어들게 된다. 그렇기에 구원관에 있어서 현대에는 다소 유화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는 것이다. 가톨릭에서 세례와 구원의 관계만 하더라도 이러한 면모를 볼 수 있다. 종교개혁 시기에 있었던 트렌토 공의회에서 "만일 누가 세례는 자유로운 것으로서 구원에 필수적인 요소가 아니라고 주장한다면, 그는 파문받아야 한다.(7차 회기 中)"라고 언급할 정도로 가톨릭 교회는 세례가 구원의 유일한 수단임을 강경하게 표현하였으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그러나 구원 계획은 창조주를 알아 모시는 사람들을 다 포함하며, 그 가운데에는 특히 무슬림도 있다.(교의헌장 中)"라고 언급하고 무신론에 대해서도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잘못된 언행이 오히려 무신론의 발생 원인 중 하나가 되고 있음을 지적할 정도로(사목헌장 19) 입장이 온건해졌다.[56]
물론 두 교회의 이러한 구조는 아전인수식 교리 해석을 부추기는 부작용이 나올 수 있다는 문제점이 있다. 특히 전근대 시대에는 해당 사회 속에서 두 교회가 하나의 공공기관 역할을 하였기에, 교회가 세속적인 패권을 민중에게 휘두르는 폐단이 있었다. 이를테면 교무금(헌금)을 세금으로써 거두고 세례성사와 장례미사에 대하여 높은 대금을 받는 행태가 그것이다.[57] 이러한 면에서 볼때 두 교회의 구원관이 유화적 것에 대해 (과격하게 표현하자면) "불리해지니까 설정놀음 하는거 아니냐?"라는 교회 밖의 비판도 비록 신자들은 억울하게 느낄 수 있을지언정, 불합리하고 이치에 맞지 않는 비판이라고는 할 수 없다. 교회가 공공기관 역할을 하였고 유럽인들의 윤리관과 분리할 수도 없던 전근대와 달리, 근대에는 교회와 윤리의 분리가 시도되었고 그리스도교의 구원관이 편협하다는 비판 역시도 다수 제기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유화적 구원관을 재검토할 수 밖에 없었던건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면에서는 특히 수직적이고 단일화된 교단 체제를 갖춘 가톨릭이 비판을 피해가기 어렵다. 다만 이에 대해서는 애초부터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명제를 받아들이다가 뒤늦게 설정 뒤집기했다는 비판이 타당한가에 대한 반론에 여지도 있을 순 있는데, 이에 대해선 Extra Ecclesiam nulla salus 문서 참조.
고로 실제로 이 구원관의 차이를 보면 유일신의 해석에 대한 정도 차이가 있음은 실은 간단히 파악할 수 있는 문제랄 수 있겠다.
6.7.3. 비종교인을 위한 구원관 비유
위의 글이 너무 난잡해 비유로 풀어 쓰면 이렇다.
이 비유에서 포도원을 '''세상''', 소작인을 '''사람''', 주인을 '''야훼''', 아들을 '''예수'''로 보면 명확하다. 모든 인간이 결국에 멸망하는 이유는 자신이 이 지구의 주인이 아니면서 주인행세를 했기 때문이라고 보고 그것이 각종 매체에도 나오는 기독교의 첫번째 죄 교만이다."또 다른 비유를 들겠다. 어떤 지주가 포도원을 하나 만들고 울타리를 둘러치고는 그 안에 포도즙을 짜는 큰 확을 파고 망대를 세웠다. 그리고는 그것을 소작인들에게 토지로 주고 멀리 떠나갔다.
포도 철이 되자 그는 그 도조를 받아오라고 종들을 보냈다.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 종들을 붙잡아, 하나는 때려주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쳐 죽였다.
지주는 더 많은 종들을 다시 보냈다. 소작인은 이번에도 그들에게 똑같은 짓을 했다.
주인은 마지막으로 '내 아들이야 알아보겠지.' 하며 자기 아들을 보냈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그 아들을 보자 '저자는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이고 그가 차지할 이 포도원을 우리가 가로채자.' 하면서 서로 짜고는
그를 잡아 포도원 밖으로 끌어내어 죽였다.
그렇게 했으니 포도원 주인이 돌아오면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사람들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 악한 자들을 모조리 죽여버리고 제때에 도조를 바칠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원을 맡길 것입니다."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 마태오의 복음서 21장 33절~41절
이 비유에서 농부들이 주인이 왔을 때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는데 뭘까? 그것은 주인이 보낸 아들을 존대하고 그를 따르는 것이다.
6.8. 이슬람의 신관(神觀)
이슬람의 신은 종교학적·계보적으로는 유대교·기독교의 야훼와 같은 존재이고, 따라서 이슬람도 기독교와 유대교랑 같이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로 묶어 분류된다. 역사적으로도 중세 유럽에서는 이슬람과 자신들이 같은 신을 믿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대에는 일부 보수 기독교에서는 신학적인 노선 차이 때문에 다른 신이라고 주장하며 동질성을 부정하기도 한다. 가톨릭에서는 이슬람과 기독교가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어지는 창조신이자 유일신 신앙을 공유하고 있으며, 이슬람에서 고백하는 신은 기독교의 하느님과 동일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
6.8.1. 다른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들의 신과 동일한가
무슬림들은 자신들의 신을 유대교와 기독교의 신인 야훼와 동일시한다.[58] 무슬림들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 이 세 종교의 신자들을 가리켜 'Ahl al Kitab(People of the Book, 성서의 사람들)'이라고 칭한다. 또한 쿠란에는 "우리의 신과 너희의 신은 같은 한 분의 신이시니, 우리는 그 분께 순종함이라."고 되어있다 한다. 무함마드가 기독교인들에 대해 다른 다신교도들과 다르다고 여겼던 것도 같은 신을 믿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일례로 이라클리오스 황제가 이끄는 동로마 제국의 군대가 로마-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하자 예언자 무함마드와 초기 무슬림들이 크게 기뻐했다는 기록이 있다.
다음은 가톨릭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인류의 빛〉(Lumen Gentium, 교회헌장)의 내용이다.
또한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권고 〈아프리카 교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그러나 구원 계획은 창조주를 알아 모시는 사람들을 다 포함하며, 그 가운데에는 특히 무슬림도 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신앙을 간직하고 있다고 고백하며, 마지막 날에 사람들을 심판하실 자비로우시고 유일하신 하느님을 우리와 함께 흠숭하고 있다.
비슷한 취지의 말을 베네딕토 16세는 권고 〈중동 교회〉에서 하였다.대화의 노력에는 모든 선의의 무슬림들도 포함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많은 무슬림들이 아브라함의 신앙을 본받고 십계명에 따라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만, 교리적으로는 기독교에서 보는 신과 이슬람에서 보는 신의 성격이 매우 다르다. 이슬람에서 신은 '낳지도 태어나지도 않으신'[59] '유일한' 존재이나 기독교에서 신은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적 특성을 포함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 속성이 매우 다른 존재라고 보고 있다. 기독교의 신은 예수를 자신의 아들로 인정하지만 이슬람의 신은 그를 그저 한 명의 예언자로 여기는 등 차이가 많다.교회는 그 보편적 성격과 소명이 요구하는 대로 다른 종교인들과 대화를 나누어야 합니다. 중동에서 이 종교간 대화의 토대는 그리스도인을 유다인과 무슬림과 결합시켜 주는 정신적 역사적 유대입니다. 이 대화는 주로 정치적 또는 사회적 질서를 실질적으로 숙고해 보는 것이 아니라 신앙에 관한 신학적 관심사를 바탕으로 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는 성경에 근거하고,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인류의 빛」(Lumen Gentium)과 비그리스도교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선언 「우리 시대」(Nostra Aetate)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유다인과 그리스도인과 무슬림은 똑같이 모든 사람을 창조하신 한분이신 하느님을 믿습니다.
또한 아랍어에서 신을 일컫는 명칭 '알라'는 아라비아의 메카 쿠라이시 부족이 믿었던 토착 종교의 최고신이었던 알라 탈라[60] 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주장하는 몇몇 기독교인과 유대교인들은 알라가 야훼와 같은 존재라는 말을 불쾌히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다. 이 부분은 후술.
진보적인 성향의 기독교 종파는 이슬람의 신과 기독교의 신이 종교학적으로는 동일하다고 분석하지만, 보수적인 성향의 기독교 종파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유대교에서는 기독교의 신도 자신들의 야훼와 같은 존재로 보지는 않는다. 이 역시 삼위일체가 문제가 되기 때문. 그러므로 기독교에서는 유대교의 야훼를 자신들과 같은 존재로 보지만, 유대교에서는 이를 부정한다. 이는 이슬람과 기독교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61]
우선 이를 이해하려면 이슬람의 교리에서 성전(聖典) 개념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신이 인류에게 내린 계시는 전체 140여개이며, 그 성전 중 가장 신성한 것은 모세에게 내린 오경, 다윗의 시편, 예수의 복음서, 무함마드의 쿠란 4종이다. 그 중에서 무슬림들은 쿠란을 신의 뜻을 전달한 가장 완전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무슬림들은 쿠란과 함께 다른 계시서를 믿고 있으며 유대교와 기독교 등 계시서를 믿는 사람들을 '경전을 가진 사람들'(people of the Book)'이라고 일컫는다. 쿠란 이전에 많은 계시가 있었지만 이슬람의 기본 입장은 쿠란이며, 현존하는 "성서"들은 본래 의미를 상당부분 잃어버리고 변질되었다고 여긴다. 그래서 무슬림들은 성경을 근거로 주장하다가도, 쿠란과 상충되는 부분은 "변질된 부분"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62]
그렇다면 계시가 되는 성전을 보면 기독교의 신 그리고 유대교의 신은 결국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과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기독교의 신관과 이슬람의 신관은 엄연히 차이가 있다. 다만, 종교학적으로 치면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로서 두 신은 같다고 볼 수 있다.
기독교에서 보는 신은 이른바 삼위일체로서의 하느님이고, 이슬람에서의 신은 그 어떤 중간자도 존재할 수 있다는 대원칙을 강조한다. 쿠란 112장에는 "영원하신 하나님, 그는 오직 한 분이시다. 그는 낳음당한 적도 없고, 태어나지고 않았고 그를 낳은 자도 없느니라"라고 한다. 이것은 이슬람의 신은 신민적인 신이 아니고 신의 피조물인 삼라만상의 신이라는 것이고, 신 그 자신 외에는 어떤 사람이나 동물로 신격화할 수 없다는 것이다.[63]
일부 기독교 신자들 말에 의하면
고 하는데, 우선 메카 만신전의 알라는 후발과 구분되는 별개의 신이었고, 후발은 알라의 딸로 여겨졌다. 고대 아랍인들이 생각했던 알라가 원시천존처럼 명목상 최고신인지, 아니면 실질적인 기능을 하고 있었는지조차 불분명하다. 일단 만신전 내에서도 다른 신들과는 본질적으로 구분되는 창조자였으며, 우상으로 형상화되지 않았다. 게다가 만약 저것이 사실이라도 '''신의 성격이 변경된 이후의 종교가 이슬람교인 것'''이며, 이러한 변경은 '''종교의 근본 자체에 대한 수정'''이기 때문에 수정 전의 아랍 이교와 이후의 이슬람 종교는 서로 단절된 관계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고대 아랍인들이 생각했던 '알라'는 튀르크인들이 믿었던 '텡그리'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쿠란에서는 아랍인 정령숭배자들이 알라에게 딸이 있다는 거짓 왜곡을 하고 있다고 비난하는 구절을 여럿 찾을 수 있다. 가나안의 엘과 유대교의 엘로힘[64] 이 별개인 것처럼."알라는 메카 지방의 여러 신들 중 최고신인 후발이고, 다만 무하마드가 메카지방에서 이동 후 유대인들을 포섭하기 위하여 유대교의 하느님과 동일하다고 변경한 것이므로 엄연히 따지면 유대교와 기독교의 하느님과는 같은 존재가 아니다. 코란의 초기 부분에 알라의 두 딸에 대한 이야기가 써있지만 이 역시 알라와 하느님을 동일시 하면서 이것들을 부인하는 구절이 적히게 된다."
개신교 내에서 바울로 신학의 권위자인 김세윤 교수는 기독교의 신은 초월자인 동시에 내재자인데 이슬람의 신은 초월자이지만 내재자는 아니라고 주장한다.[65] 즉, 같은 신으로 보지 않는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기독교의 신과 이슬람의 신이 서로 다르다고 말하지는 않았으나 이와 동일하게 이러한 두 종교 간 신관(神觀)의 차이에 대해 언급하기도 하였다.
7. 야훼의 비윤리적인 모습
7.1. 이슬람에서
이슬람의 신은 타 아브라함교의 신과 비슷한 성향을 보인다. 성경과 마찬가지로 쿠란을 보면 폭력적인 구절이 있기도 하나 긍정적인 구절도 존재한다. 애초에 쿠란 자체가 성경과 내용이 비슷하기 때문에 그렇다. 악해보이는 구절도 전후 맥락을 뜯어보면 은근히 그럴만한 상황이 있는 경우가 있다.[66] 결국 단순히 구절만 뜯어서 보면 안된다는 이야기다. 어떤 것이든 전후 맥락을 보고 판단하는 것이 필요하다.
8. 현대 창작물에서
과거에는 백발 백인 남성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요즘은 그런 스테레오타입도 많이 사라지고 있다. 도그마에서는 '''여자'''로 나온다. 브루스 올마이티에서는 흑인 배우인 모건 프리먼이 연기하였다. 이집트 왕자, 엑소더스: 신들과 왕들, 십계, 이웃집에 신이 산다[67] 등 다양한 애니메이션, 종교영화에 등장한다.
심슨 가족 시즌 23 3화에서는 대단히 치졸하게 나온다. 호머 심슨이 "지옥 따위 없어, 신도 없다고"라고 말하면서 플랜더스의 성경책을 불태우려하자 호머 심슨의 집 천장을 날려버리고 등장하면서 호머가 바트 목조르는것처럼 'Why you little'을 장엄한 음성으로 말하면서 호머를 목졸라 죽이고 마지한텐 플랜더스가 했다고 뒤집어 씌운다. 자세히 보면 심슨 세계관에 나오는 예수처럼 손가락이 5개다. 참고로 심슨에 나오는 모든 인물의 손가락은 4개.
9. 모티브를 가져온 것으로 보이는 것들
9.1. J. R. R. 톨킨 세계관의 일루바타르
대놓고 나오지도 않고, 작품만으로는 알 수 없기는 하지만, 그 이름 풀이(영어로 ALL FATHER)로 정체를 암시하고 있고, 아틀란티스와 누메노르의 동일화를 표현함으로 결국 동일존재로 인식함을 알려준다. 그의 본명은 에루의 경우는 영어 The One으로 번역이 되고 이건 더 노골적이다.[68] 기독교와 아무 관련이 없는 아틀란티스가 근거로 등장하는것은 작가의 성향과 관련이 있는데, 신앙심이 깊은 가톨릭 신자였던 톨킨 성향상 그의 이야기를 현실과 연관성을 둔 이상 다른 존재로 만들기는 힘들었을 것이란 점을 둘 수가 있다. 다시 말해 그의 세계관인 가운데땅이 고대 지구의 이야기라는 시초가 되는 것이 저 아탈란테고(발리노르는 떨어져나가고, 땅을 둥글어지며-즉 행성이 되며-, 지형은 현재와 비슷해진다)이야기를 통해 현실과 연결시켰는데, 톨킨의 입장에서 일루바타르는 결국 야훼라는 것.
사실 반지의 제왕까지만 해도 일루바타르가 야훼일지 아닐지는 알 수 없다. 실마릴리온 등 세계관이 완성되며 확정된 것으로 봐야 한다. 다만 톨킨 자신이 일루바타르와 아훼가 동일인물이라고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다. 다만, 소문에 의하면 톨킨은 아칼라베스(athrabeth)에서 멜코르를 창세기의 뱀 처럼 쓰다가 중간 여백에 '이렇게 계속 나가다 보면 성경의 패러디가 되어 버리지 않겠는가' 라는 말을 남기고는 HoME 10권 분량에서 이런 제반 신화에 대한 저작을 그만둔다는 말이 있다. 이건 소문이 아니라 실제 기록이다. 원문 여백에 실제로 존재한다.
다만 그가 쓴 작품의 성향과 여러 모티브를 봤을때, 일루바타르와 야훼의 연관성은 부정할 수가 없고 비현실적 세계를 다룬 소설(주로 판타지 계열)에서 가장 야훼에 가까운 존재라 볼 수 있다. 적어도 단순히 이름만 가져다 쓴 존재들과 비교하면 그 연관성은 격이 다르다.
그래서인지 누메노르인들이나 엘프들이 일루바타르에 대해 보이는 신앙을 언급하면서도 그 형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냥 누메노르에서 일루바타르에게 제사를 지냈다로 끝… 어쨌든 이들의 신앙은 기독교가 아니고 관련도 없지만(시대상으로 봐도 엄청난 과거가 된다), 작가가 작가인 만큼 직접적으로 드러나진 않아도 그 뼈대는 종종 나타난다(골룸을 살리는 것에 대한 대화나 일루바타르의 의도나 등등). 그 신이 기독교의 야훼 하느님과 동일존재라도 별 문제가 없을 정도로 톨킨은 자신이 말한대로 자신의 신화가 기독교의 교리와 조화를 이루게 저작했다. 하긴 현실상도 같은 신 두고 3개종교(기독교, 이슬람, 유대교)가 존재하고 실질적인 분리를 보면 수도 없는데(가톨릭, 정교회, 개신교, 수니파, 시아파, 등등등) 새로운 신화를 만들면서 역시 같은 신 두고 이런 종교들이 창조되기 전 원시 시발점으로서의 다른 신앙을 만드는 것은 그에게 별 부담감이 없고, 그의 신념과 조화를 이루는 선택이였을 것이라 여겨진다.
일루바타르와 아훼의 인식이 위의 내용들과 차이가 나는 것은 여기서 다루는 야훼는 기원전 하고 한참 전의 구약의 야훼, 유대인의 야훼를 다루기 때문이고, 일루바타르는 톨킨이 믿는 20세기 중후반의 신약을 주 바탕으로 한 야훼를 바탕으로 했기 때문이다. 시대가 2000년 + 천년 이상 차이나는데 인식이 같을 리가 있나.
9.2. 기타
- 가즈 나이트: 제홉. 선신계의 지배자이며 4명의 창조주급 신 중 한 명. 이름이 나오기 전까진 아버지 신, 최고 선신 등으로 불렸다. 이름을 보나 포지션을 보나 야훼 그 자체. 애초에 여호와의 스펠링인 Jehovah를 영어식으로 읽고, A를 묵음으로 돌릴 때의 이름이 제홉이다.
- 갓 오브 하이스쿨: The King. 대홍수로 세상을 멸망시킨 전적이 있는 부분이나, "나는 알파요, 오메가라. 시작이자, 끝이니." 라는 대사, 샤오첸의 회상 중 "너희 중에 죄없는 자만이 이 자에게 돌을 던져라." 라는 대사를 한 것을 보면 모티브는 야훼로 보인다.
- 나니아 연대기: 작가의 기독교 신앙과 책 내의 세계창조와 마지막 심판을 고려하면 기독교에 영향을 받은것으로 보인다. 특히, 아슬란은 자기희생과 그 전지전능함을 보면 예수를 모티브로 함이 명확하다.
- 디르=리피나 세계관에서 고신중 하나인 절대신.
- 아튼 시미니: 마비노기 세계관의 주신이자 전능한 자. 야훼에서 모티브를 따온 존재.
- 상주전신관학원 팔명진의 최종보스 아마카스 마사히코의 급단 성스러운 네글자(안메이조 이마데우스).
- 신좌만상 시리즈: 무참. 성격이나 행동양상은 일반적인 야훼의 이미지와는 많이 다르지만 상징물이 세피로트의 나무이며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원죄를 가지게 하여 악과 싸우게 하였다는 점에서 야훼에서 따온걸로 추측된다.
- 메르쿠리우스: 과거 어느 순간 자신이 '빛이 있으라'라고 했던 것 같다고 말한 부분이나, 자멸인자인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성유물이 롱기누스의 창인 걸로 볼 때 메르쿠리우스 또한 어느정도 야훼에서 모티브를 따온걸로 추측된다.
- 이말년 서유기: 서왕모의 생일잔치에 초대된 수많은 신들 중 한 명으로 등장. 본인이 유일신이라면서 다른 신들을 듣보 잡신 취급하는 바람에, 되려 다른 신들 사이에선 왕따(...)를 당하고 있다.
- 엑스맨: 아포칼립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아포칼립스가 자신이 여러 생애에 걸쳐서 불리웠던 여러 이름들 중의 하나가 야훼라고 말한다.
- 유희왕 5D's: 궁극 시계신 세피론. 최종보스 Z-one이 사용하는 카드군인 시계신은 설정상 단순한 카드가 아니라 진짜 천사의 현현이며, 10장의 시계신마다 각각 그 세피라를 관리하는 천사를 상징한다. 그리고 Z-one의 에이스 카드이자 숨겨진 11번째의 시계신이며 최후 최강의 시계신인 궁극 시계신 세피론은 세피로트의 나무 중앙에 존재하는 숨겨진 세피라이자 모든 세피라를 통합하는 다아트(Da'at), 그리고 이 세피라의 관리자인 야훼를 상징한다. 마찬가지로 세피라의 세피라 트라 그라마톤 또한 야훼의 위치에 해당된다.
- 프로메테우스(영화): 인류를 과학적으로 창조한 외계인 엔지니어로 나온다.
- DarkMatter2525: 이 영상에서 야훼는 '전지전능을 자처하는 무능한 신'으로 묘사된다. 자세한 건 문서 참조.
- OH, MY GOD!: (주) HeaveN의 사장.
- SCP 재단: 변칙 개체에 적대적인 단체인 세계 오컬트 연합 전신 단체에게 죽는다. 단, 셈족의 태양신이라 테일에 따라 딴 종교에 야훼는 살아있는걸로도 묘사된다. 예수도 멀쩡해서 후일 매미 신에게서야 인류를 위해 희생된 후에 잊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