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외환 위기/영향
1. 개요
1997년 외환 위기가 미친 영향에 대해 서술하는 문서이다.
2. 상세
199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말단 공무원은 '공부 못하고 특기도 없는 어중이떠중이들이나 하는 직종'이라는 이미지가 팽배했다.[1] 특히 부사관[2] 에 대한 인식이 최악이라 모집 인원 대비 만성적인 지원자 부족에 시달렸고, 이를 어떻게든 해결하고자 일반하사 등의 제도를 두거나 임관한 초임하사에게 '''장려금'''으로 1년치 연봉을 통째로 쥐어줄 정도였다.[3]
민간 사회에서도 워낙 경기가 좋다보니 대학을 졸업하기만 하면 9급 공무원보다 근무 여건도 좋고 급여도 높은 직장을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다. 1995년 당시 초임 9급 공무원의 월 급여가 약 50만원 정도였는데, 대기업이나 벤처기업에 들어가면 대략 100~120만원 안팎의 월급을 받을 수 있었다. 게다가 벤처기업에서는 신입사원에게 배당을 주는 것이 거의 관례였고,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와 같은 대기업에서는 이런저런 명목의 보너스를 넉넉히 지급했기 때문에 9급 공무원과 대기업 노동자의 실질 연봉은 거의 4배까지 차이가 날 정도였다.[4] 그리고 기업이나 노동자들이나 '첫 직장이 평생 직장'이라는 인식을 당연하게 가졌고 명목상이나마 정년을 보장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9급 공무원의 최대 장점 중 하나인 고용 안정성 역시 별 의미가 없었다. 또한 다니던 직장에서 해고된다고 해도 재취업이 용이했기 때문에 현재는 해고가 많고 구직이 어려웠던 것과는 달리 IMF 이전에는 해고가 적고 구직이 쉬웠다.
그러나 IMF 외환 위기를 맞으면서 수많은 대기업과 벤처기업이 줄줄이 무너지고, 살아남은 기업들도 정년보장이나 연공서열제를 철폐하고 본인의 능력껏 살아남는 서구형 경영 모델을 도입하며 수많은 이들이 직장을 잃게 되자[5] , 고용이 보장되는 공무원에 대한 인식이 수직상승했고, 그 여파가 지금까지 이어져 9급 공무원 합격하기가 어지간한 중견기업이나 일부 대기업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힘든 시대가 되었다.
2.1. 경제적 영향
IMF 주도의 신자유주의 처방을 받으면서 경제구조가 바뀌었다. 문민정부 말기에 정부는 '세계화'를 외치며 신자유주의를 따르자고 했지만, 정작 한국 내의 모든 경제주체는 아무 준비도 되지 않았다. 물론 정부도 마찬가지. 누구도 준비되지 않은 무한경쟁의 세계로 뛰어들게 된 것이다. 구조조정을 통해서 많은 기업들이 망했지만 살아남은 기업들은 더욱 강해졌다. 이 시기의 대기업들에 대해서는 "저승사자"라 일컬어졌던 이헌재 금융감독원 위원장[6] 이 '''"악역"'''을 맡아 LG반도체 정리, 삼성자동차 매각 등 대기업들이 "확실한 시행이 전제된" 자체 구조조정계획을 세우도록 강하게 압박하여 30대 그룹 전원이 '''5일 만에''' 구조조정 계획수립 및 제출을 완료하였다. 그리고 이 구조조정계획을 '''다시 이헌재가 수장을 맡은 은행감독원'''에서 심사해 미비점을 보완하도록 독려하였다.
하지만 '''공적자금 180조원이 투입되었는데''' 그 중 '''70조원이 회수 불가 처리'''가 된 흑역사도 생겼다. 이 중 대우그룹의 부실로 투입된 공적자금이 29조 8천억원이었다. 살려서 회수한 돈이 더 많았지만, 그 중에 살리는 데 실패했거나 일부는 제도 미숙으로 제대로 회수하지 못했다는 이야기. 공적자금 지원의 목적은 회사를 살려 업주에게 돌려주는 데 있는 게 아니라 고용을 유지하고 산업생태계를 유지해 국가경제를 굴러가게 하며 회사를 살리는 데 있기 때문이었다. 회수 못 한 공적자금이라도 노동자 월급주는 데 들어갔다면 목적대로 의미가 있다. 하지만 어쨌든 최선은 회사가 자립하도록 하고 고용을 늘리면서 지원자금도 회수하는 데 있으니까. 2019년 초까지 '''68.9%'''가 회수되었다.
1997년 1월 재계 14위 한보그룹 부도를 시초로 3월 삼미그룹(26위), 5월 한신공영이 각각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자금난으로 부도 위기를 맞던 진로그룹은 4월에 부도유예협약을 급히 체결했으나 9월 진로 등 6개 계열사에 대해 화의신청했다. 대농그룹 역시 5월 부도유예협약을 적용했다. 7월에는 기아그룹(7위)가 부도나 하청업체 수만 개를 부도위기로 몰아넣었고, 철강/정유 등 연관산업에도 심각한 타격을 입혀 큰 주목을 받았다. 당시 기아사태 처리를 둘러싸고 김선홍 회장과 재경원이 힘겨루기를 하는 중에 노조가 파업해서 처리가 지연됐고, 이에 따라 국내경제 대외신인도가 하락하고 외국투자자들이 철수하고 증권시장도 급속히 침체했다. 이에 정부는 10월 말 김선홍 회장을 경질시킨 후 진념 전 노동부장관을 법정관리인으로 선임해 한숨 돌렸다.
그 후에도 부도사태는 이어져 10월 쌍방울, 바로크가구, 태일정밀 등이, 11월 부도위기 중이던 해태가 화의신청하는가 하면, 뉴코아, 한라, 청구도 부도났다. 상황이 이리 되자 쌍용, 한화, 동아 등도 자금압박에 시달렸고, 이 중 쌍용은 쌍용자동차를 대우에 넘겨 한숨 돌렸다. 그 외 재벌그룹들 역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렵긴 마찬가지였고, 당시 대기업들은 보유 부동산을 처분하고 매물로 내놨으나 매매가 제대로 안 됐다. 그뿐만 아니라 삼성, 현대도 대규모 조직감축 및 투자규모 축소 등을 발표했으며, 타 그룹들도 같은 조치를 내놓았다. IMF 관리 뒤에도 1998년 거평그룹, 1999년 대우그룹 등이 부도나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대기업 부도행진은 증권 및 금융시장에도 영향을 미쳐, 1997년 한보사태를 기점으로 관치금융에 익숙한 금융기관이 치명타를 입어 제일은행과 서울은행이 부실화됐고, 이후 잇다른 기업 부도행진으로 금융기관은 적자만 계속되어 동년도 9월 말까지 국내 25개 일반은행 및 6개 특수은행이 겪은 무수익 여신이 28조 2천 346억 원에 달했다. 특히 제일, 서은은 무수익 여신이 각각 4조 5,187억 원, 3조 4,568억 원으로 1, 2위를 차지했다.[7] 이러한 부실여신으로 인한 경영위기는 종금사들까지 덮쳤는데, 은행과 달리 담보 없는 종금사들은 태국 등 동남아에서 단기자금을 빌려다가 그 나라에 장기투자했었다. 그런고로 5월 태국 외환위기 때 해외 금융기관들이 돈을 회수하여 부실화됐다.
그런고로 1998~1999년까지 동남은행, 동화은행, 대동은행, 평화은행, 경기은행, 충청은행, 보람은행 등 여러 은행들도 모두 부도나거나 다른 은행과 합병되어 사라지기도 했으며, 보험업계에선 두원생명, BYC생명, 조선생명, 해동화재, 국제화재, 삼신올스테이트생명 등이, 증권업계에선 고려증권, 동서증권, 동방페레그린증권, 한국산업증권, 장은증권, 환은살로먼스미스바니증권 등이 각각 합병되거나 매각 혹은 퇴출되기도 했고, 설령 살아남았다 해도 외국자본 지분참여를 받아들여야 했다.
기사를 보면 알겠지만 1997년 외환위기 이후 30대 그룹 중에서 30위 안에 그대로 있는 대기업은 오직 9개만 남았고 대부분 부도나서 없어지거나 살아남더라도 30위 밖으로 밀려난 경우가 많다.
2.1.1. 혹독한 구조조정 요구
대한민국의 향후 10년을 IMF와 미국 재무부가 결정하였으며, 2010년대에도 이때 형성된 구조가 이어지고 있었다.잘못을 했으면 계도를 할 것이지, 왜 죽도록 매를 때리는가?
ㅡ 같은 시기에 외환위기를 겪은 태국의 관료가 IMF의 "가혹한 처방"에 항의하면서 했던 말. 이 대사는 영화 국가부도의 날에서도 언급된다.
정부는 1997년 11월 21일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고 동년 12월 3일 IMF는 210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승인했고, 더불어 IBRD 세계은행이 100억 달러, ADB 아시아개발은행이 40억 달러를 지원하기로 하여 총 350억 달러의 국제기관의 지원이 결정되었다. 다음날인 12월 4일 긴급히 55억 달러가 공수되었다. 그리고 미국, 일본, 독일, 프랑스, 영국, 캐나다, 호주가 지원을 결정함으로 200억 달러가 추가로 지원되어 총 550억 달러를 지원 받았다. 이 중 일본은행에서만 100억 달러 이상을 지원받았다.
여기까진 '국제통화기금' 이라는 단체명에 걸맞는 아주 시기적절한 조치였다. 하지만 IMF의 구제금융 210억달러가 한국에 유입되는 조건이 세 가지 있었는데, 하나는 고금리, 다른 하나는 구조조정, 또 다른 하나는 공공재 영리화이었다.
2.1.1.1. 첫째, '''고금리'''
시중 은행의 '''금리를 연 29.5%'''까지 올려야 했다. 당시 기준금리였던 콜금리는 40%였지만 당연히 콜은 하루짜리니까... 실제로 민간은행에 적용되는 기준금리인 RP(2008년부터 한국은행 기준금리 지표물이다) 금리는 27%까지 올라갔다. "고금리로 자본유입을 늘린다."는 명분이었지만 무수한 기업이 도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도 그럴 것이 금리가 인상되면 시중의 화폐유통이 경색되어 단기적으로 경기가 악화된다. 물론 실물경제 자체가 파탄나지 않는 한 단기적 악화는 원상회복이 될 수는 있으나 당장 벼랑 끝에 몰린 상황에 언제 원상회복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당시까지 공격적인 투자를 통해 확장을 거듭해온 국내기업들에게 초고금리는 기업의 부채상환부담을 가중시켜 연쇄부도를 발생시키고, 대량의 실업과 경기후퇴를 유발하였다. 비상식적인 고금리에 대해 한국 내부는 물론이고 미국의 제프리 삭스 등의 경제학자들조차도 IMF의 고금리 정책이 몰고 올 부작용을 경고하였으나, IMF측은 이 경고를 완전히 묵살했다.
결국 고금리정책은 3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98년 1월 하순에 국내 금융기관을 외국에서 인수 가능하게끔 하는 '''금융시장 개방을 조건으로''' IMF와 '''재협상'''해 이율을 낮추는 "항복 선언"을 하게 된다. 그리고 1998년 5월에는 IMF가 마침내 정부측의 금리인하 요구를 받아들이고 IMF 프로그램의 금리 항목을 '조심스러운 인하'에서 '계속 인하'로 변경한다. 그러나 98년 5월에는 실업률이 이미 6.9%에 달해 1년전의 3배가 되는 등, 고금리 정책의 부작용이 나타날 대로 나타난 시점이었다. 고금리정책의 이론 상으로는 "경기과열로 인한 물가상승 방어" 혹은 "경상수지가 급격히 악화된 국가의 숨통을 틔울 수 있는 약"이지만, 경제위기 상황에서는 오히려 확인사살 혹은 그 이상이 될 수도 있는 극약처방이기도 하다. 또한 고금리 기조로 부채는 그 6개월간 오히려 더 늘었으며, 명예퇴직 후 자영업으로 생계를 꾸려나갈 개인사업자들은 높아진 이자를 갚기 위해 차환기채(돈 빌려 돈 갚기)를 할 수밖에 없을 만큼 어려운 시기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채권시장은 "미약하다"는 표현으로 설명이 어려울 만큼 비활성화되어 있었으며, 여기에 투자자들의 자본 유출이 금리 때문이 아닌 동물적 감각에 의한 위험회피 목적임을 감안하면 현실성, 적절성 측면에서 비판이 나오는게 자연스러운 일. 결정적으로 당시 전년대비 1/3토막 난 주식시장으로 유입된 극소량의 외환이 고금리로 채권시장에 유입된 양보다 많았다.
게다가 고금리는 외자가 급했던 DJ정부의 다른 정책과 맞물려 현재에도 흔적을 남기고 있는데, 금융시장 개방 과정에서 '''일본 대부업 자본에 한국 시장을 열어준 것'''이다. 이 시기 일본 정부는 때마침 끊임없이 이어지는 야쿠자들의 자살보험 이용을 막기 위해 이자제한법을 만들었고, 그 영향으로 야쿠자들의 주요 수입원이었던 사채 사업의 수익이 급감하기 시작했다. 특히 일본 최대의 야쿠자 조직인 야마구치구미는 전통적으로 사채 관련 사업에 영향력이 있었던 나고야 계열 조직들의 입지를 크게 흔들었다. 야마구치 구미는 일본내에서 재일교포 간부 및 단원들의 비중이 높았고, 이들 조직원과 간부들은 적극적으로 자신들이 보유한 한국 내 커넥션을 활용하여 한국 사채사업에 적극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정부는 박정희 정권 시절 사채를 단속하기 위해 만든 이자제한법 폐지를 진행하였고, 살인적인 고금리와 맞물려 일본계 사채업자들은 야쿠자조직의 막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기존의 토종 대부업체들을 싸그리 밀어내 버리고 사업을 독점하게 된다. 산와머니로 대표되는 일본계 대부업체의 광고가 부쩍 늘어난것도 이것이 영향을 주었다. 실제로 당시 가장 먼저 한국에 진출한 기업 중 하나인 아프로파이낸셜대부(현 OK금융그룹의 모태)는 J&K 캐피탈이라는 일본 쪽 페이퍼컴퍼니가 지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이곳의 최윤 회장은 현재는 한국인임을 전면에서 강조하고 있지만, OK저축은행 문제로 국적 건이 논란이 되기 전만 해도 나고야 출신 및 나고야 대학원을 다녔다는 기록이 계속 남아 있었다. 결국 20년 정도가 되어 가는 2010년대에는 상장기업을 인수 경영하고, 기업인수합병의 큰 손으로 행동하고, 증권, 저축은행을 인수해 경영하는 데에 이르렀다.
2.1.1.2. 둘째, '''구조조정'''
캉드쉬 총재와 나이스 단장의 압력에 따라 1997년 12월 한달 사이에 14개 종금사가 폐쇄되고 자기자본비율 8%를 맞추지 못하는 은행도 문을 닫기로 결정되었다.[8] 한국중공업, 한국통신, 한국전력공사, 한국담배인삼공사, 한국가스공사 등 굵직한 공기업들을 민영화 함과 동시에, 당시 '''공공부문 전체 인력의 20%'''인 14만 1천 명을 감원하였다. 그리고 대기업에서도 구조조정의 이름을 내걸고 명예퇴직, 희망퇴직 신청을 받기 시작했다. 구조조정이라는 단어가 나올만큼 한국이 정말 막대한 빚으로 망했다고 생각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2008년 ~ 2015년 연간의 일부 유로존 국가들처럼 진짜 돈이 없는 경우와, 돈은 있는데 당장 상환할 외화만 부족했던 경우가 다를 수 밖에 없는 만큼 그 적절성 여부를 놓고 오늘날까지 의견이 분분하다.
당시 전 산업계에 걸친 구조조정 유행으로 나온 것이 사내하청과 아웃소싱이다. 직영과 정규직을 줄이고 다단하청과 파견직, 비정규직을 대폭 늘리게 되었으며, 1990년대 중반부터 서서히 효과가 줄어들기 시작하던 낙수효과를 완전히 끊어 소득 양극화를 뚜렷한 사회현상으로 노출시켰다. 2010년대 노동관계 부조리의 거의 모든 내용이 여기서 시작되며, 정리해고 시기 가장 피해를 입은 계층은 여성 노동자들이었다.
이에 따라 노동운동도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전보다 더 거세지자, 차기 정권인 김대중 정부는 노동운동권 자체를 경제활성화의 걸림돌로 보고 강경하게 탄압하기 시작했다. 1998년 만도기계 파업을 비롯해 2000년 롯데호텔 및 사회보험노조 파업, 2001년 대우자동차 총파업과 화섬3사 노조 총파업 등지에서 보듯 사측과 공권력에 의한 유혈진압이 빈번했으며, 구속 노동자 수도 늘어 문민정부 때 632명이던 게 집권 5년 동안 총 892명으로 늘어나 '인권 대통령' 타이틀에 먹칠을 했다. 노무현 참여정부 들어서도 구속 노동자가 총 1,052명이나 늘어났는데, 특히 비정규직과 해고노동자 출신이 절반 이상이었다. 이러한 탄압 기조는 2000년대 후반까지 이어졌다.
돌이켜 보면 금융가 어르신들의 탁상공론의 끝을 보여줬으며 차라리 채무재조정 외에 자금수혈, 만약 그것이 안되더라도 거시경제적으로 방임했더라면 더 나았을 것이다.역사에 만약은 없다고들 하지만 고금리 정책이 아니었다면 마이너스 성장을 하더라도 -5.5% 성장까지는 미치지 않았을 것이다.
2.1.1.3. 셋째, '''공공재 영리화'''
이집트의 빵 보조금 폐지, 볼리비아 수도 영리화 등에서 보듯 한국에서도 전기, 가스, 수도, 의료, 철도 등의 공공재 일부를 정부가 아닌 기업에서 운영할 수 있도록 하는 발판이 이 시기에 마련되었다. 참고로 이 부분은 아직도 끝나지 않고 현재진행형인 상태다.
이렇듯 가혹한 구조조치로 인해 오죽하면 사람들이 IMF를 조선총독부에, 감독관을 총독에 비유할 정도였다.
2.1.2. 독자적 경제모델 모색
일부 경제전문가나 교양만화가 이원복 교수 등이 지적했듯, '한강의 기적'을 일으키는 요인이었던 일본 및 미국 경제모델 모방에 대해서도 문제가 제기됐다. 1980년대 후반 미국 경제가 기울자 줄곧 일본 경제를 본받았고, 이 과정에서 기업들은 버블경제 때 유행한 부동산 투기 같은 안 좋은 점까지 일본에서 배워왔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일본 경제도 불황이 일고, 외환위기를 맞게 되자 정부와 기업들은 연공서열제 및 평생고용제도를 폐지했으며 한창 유행하는 미국식 자본주의를 배우고자 했다. 그러나 이원복 교수는 2002년에 낸 저서 <새 먼나라 이웃나라> 우리나라편에서 "경제는 생물하고 같기 때문에, 국가 풍토와 국민의식에 맞춰 독자 경제모델을 만들어 경제를 살려야 한다"고 견해를 제시했다. 이에 따라 2000년대 들어서 산업화 시대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지식기반 경제체제에 맞춘 독자 경제모델을 개발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2.1.3. 변한 자가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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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살아남은 기업들에게는 뼈아픈 충고가 되었다. 정말 300%~400%라는 (2010년대 기준으로는) 말도 안 되는 부채율을 가진 '''건실한(?)'''[9] 기업들은 부채의 감축에 온 역량을 퍼부어 현재는 건실한 기업 치고 100%를 넘는 곳이 드물고 그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위기면역력과 긴축경영이라는 걸 배우게 되었다.[10] 자세한 내용은 소잃고 외양간 고치기지만... 그러한 이유 때문에 이제는 조금만 경제상황이 불안정하다고 판단하면 긴축경영이다 위기상황이다 하여 신규채용억제, 인원감축, 아웃소싱, 비정규직 이용 등의 방법을 사용하여 지나칠 정도로 고용을 줄여 실업이 늘고 고용상황이 안 좋아지며, 이에 따라 노사갈등도 더해간다는 부작용도 있다.
솔직히 1997년 이전 당시 대학만 졸업하면 기업에서 모셔간다는 것이 사실이었던 것은 대학진학률이 낮았던 점도 있지만 결국에는 그 과잉투자 때문이었으니까. 간단히 말하자면 신입 100명이 필요한 기업이 외환위기 이전에는 향후 성장할 것을 대비해서 입도선매 차원에서 정규직 150명을 채용했다면, 지금은 향후 나빠질 것을 대비해서 50명만 정규직으로 채용하고 50명은 비정규직, 아웃소싱 등으로 채용하여 언제든 필요에 따라 줄일 수 있도록 바꾼 셈이 된다. 또 대기업 총수들은 '그룹회장' 대신 '계열사 대표이사' 호칭을 써서 책임경영제를 강화하고 선단식 경영의 핵심이던 참모조직 '비서실'이나 '기획조정실' 등을 '구조조정본부'로 바꿨으나, 시간이 갈수록 문어발, 황제 세습 등 문제점이 점차 폭로되자 2003년 들어 삼성, 한화 등 일부 그룹을 제외하고 모두 조직이 해체되었다. 수입선다변화 정책도 이 외환위기의 영향으로 1999년 7월에 전면 폐지되었다.
외환위기 이전 시대 회사들의 수백 %가 되던 부채비율은 IMF 이후 세대가 보면 기절할 노릇이지만 숫자만으로 단정하는 것은 맞는 시각이라고 볼 수 없다. 이전에 그런 부채비율을 가지고도 기업이 크게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시장과 매출과 고용이 계속 확장되어 왔던 것이 이전까지의 국내외 경제 여건이었기 때문이다. 즉 20세기까지 한국의 기업들은 소위 대기업이라고 불리는 기업들도 사실상 실적보다는 성장세를 중요시하는 스타트업 기업처럼 취급을 받았다고 볼 수 있는 셈이다. 어디까지나 위기대비에 소홀했던 것이 잘못이며, 그런 부채비율 자체를 죄악시해서는 안 된다. 지금의 신흥국 시장을 바라볼 때도 마찬가지로 부채비율 하나에만 매여 있지 말고 그 나라 자체를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삼성전자 같은 경우에는 21세기에 들어와서 오히려 실리콘밸리의 유니콘 기업들의 뺨을 후려갈길 기세로 성장에 가속도를 붙여버리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기업들은 그 수준에는 미치지 못했고 이는 결국 한국이 선진국으로 진입하며 겪는 필연적인 성장률 하락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삼성 공화국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삼성전자의 존재감 만이 유난히 튀는 상황에 이른 이유이기도 하다.
2.2. 정치적 영향
이로 인해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 공약 당시 '''한국병을 반드시 고치겠다'''고 주장하여 대통령에 당선된 당시 대통령 김영삼은 인기가 절정을 달렸지만 1996년을 기점으로 지지율이 떨어지더니 오히려 임기말에 '''한국병을 고치기는 커녕 한국병을 부르게 한 원흉'''으로 전락해 국민들의 비난을 받아가며 퇴임하였다. 대선을 앞두곤 신한국당 지지자들과 이회창 대선후보가 YS를 비난하고 YS 인형 화형식까지 펼치며 현직 대통령을 사실상 당에서 쫓아냈다. 사실상 외환위기가 김영삼의 정치생명에 사형선고를 내린 결정타였던 것이다. 퇴임 이후에도 김포공항에서의 빨간물 계란투척 사건, 고려대학교 특강 무산 등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그 당시 고려대학교에서 김영삼을 특강자로 초청하였는데 이에 고대생들이 반발하는 뜻으로 김영삼이 탄 차가 학교로 진입하지 못하도록 막아 버리는 바람에 김영삼은 차안에서 수 시간 밀봉된 상태로 있었으며 꼼짝없이 차안에 갇힌 탓에 분유통에 소변을 봤다는 그야말로 굴욕을 당했다. 결국 김영삼은 강연을 포기하고 돌아갔다. 그리고 고대생 한 명이 김영삼에 손가락질을 하며 '''김영삼 개XX'''라고 욕까지 하는 바람에 민주산악회 회원들로부터 멱살을 잡히기도 하였다. 결국 그로 인해 고려대 총장이 학생들을 대신해서 김영삼에게 사과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때 김영삼과 동행했다가 곤욕을 치른 인물 중 하나로 당시 동아일보 사장이었던 화정 김병관이 있다. 김병관도 그 현장에서 "나 이사장인데..." 같은 소리를 해서 망신을 당했다.
심지어 퇴임 뒤인 1998년 3월 당시 PC통신 유니텔이 네티즌 1,78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김영삼은 '역사상 가장 지탄받아야 할 인물' 1위에 뽑히고 말았던 것이다. 대통령 임기 초기인 1993년에 서태지와 아이들을 제치고 무려 인기유명인 1위에 올랐던 것을 생각한다면, 김영삼은 그야말로 천국에서 지옥으로 급전직하한 것과 다름없었다. 2위는 전두환 전 대통령. 반면 '존경받아야 될 인물' 1위로는 백범 김구 선생, 2위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선정되었다. 그 뒤는 충무공 이순신, 세종대왕, 김대중 대통령이 뒤를 이었다. 사실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것이 경제가 망한 뒤에는 그와 관련해 굵직한 족적을 남긴 이가 기억나는 법이다. 여러 논란이 있지만 경제적 업적을 남겼다고 알려진 박정희 전 대통령을 떠올리는 것이 특별히 부자연스럽지는 않다.[11]
1997년의 이 참사는 15대 대선에서 후보들 간에 'IMF 재협상론'을 놓고 격한 논쟁을 벌였고, 결국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가 신한국당→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에게 신승을 거두는 계기가 되었다는 분석이 많다. 어느 나라를 봐도 나라가 부도가 난 때에 여당인 쪽이 차기 선거에선 지기 마련이다. 대선 경선 결과에 불복하여 독자 출마한 이인제 후보가 여당표 500만 표를 분산시키지 않았다면 김대중 후보의 당선은 아마 어려웠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지만, 이인제의 표가 과연 여당표였는가라는 의문을 가질수도 있다. 김대중 대통령은 선거 과정에서 국제적인 인지도를 통해 IMF를 비롯, 국제 외교로 경제 문제를 풀 수 있다는 부분과 자신이 이미 대중참여경제론 같은 경제학 책까지 집필한 경제 전문가였다는 것을 어필했었다. DJP 연합으로 인한 충청권 유권자들의 가세와 앞선 각주에 쓰여져 있듯 이인제 후보로 인한 득표 분산 등이 더 컸다는 분석도 많다. 자세한 건 15대 대선 문서를 참조.
그리고 국민의 정부 하에서 흔히 신자유주의로 일컬어지는 친 시장적 정책이 적극적으로 실행되었고, 이는 대한민국의 역사를 살펴보아도 전무후무하다고 할 정도였다. 신자유주의라고 하면 이명박 정부를 떠올리는 사람도 있겠으나, 오히려 이명박 정부는 IMF 이전에 가까운 국가주도 정책을 폈다. 그 예로 당장 대표 정책이 4대강 사업. 1996년 연말 여당의 노동법 날치기로 도입된 유연화된 노동제도도 서서히 진행되다가 이 위기로 인해 본격적으로 도입되었다. 물론 정리해고 같은 신자유주의적 정책은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기 이전 미셸 캉드쉬 IMF 총재가 직접 우리나라를 방문해 1997년 대선 유력 후보 3인(이회창, 김대중, 이인제) 모두에게 다음 대통령이 되면 IMF가 요구한 조치를 따르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받아놓았던 데다가, IMF의 구제금융을 무조건 받아야만 국가 신용이 유지되는 상황이었기에 누가 당선되었더라도 정리해고 조치와 공공재 영리화를 하지 않을 방법은 없었기는 하다. 다만 문제는 기업가들이 아닌 일반 국민들이 이 사건의 여파를 제대로 느끼기 시작한 것이 '''정리해고'''로 직장을 잃은 가장으로 인해 가정이 파탄났을 때부터였다는 거다. 때문에 이 시기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IMF를 불러온 게 김영삼 대통령 때라는 걸 모르거나, 혹은 알더라도 일부러 무시한 채 이후의 모든 경제적 위기 상황을 김대중과 그 후임인 노무현의 잘못으로 돌리게 되었다.
거기다 하필이면 기나긴 독재체제가 끝나고 처음으로 들어선 민주주의 체제에서 벌어진 사건이라, 그 전까지 있던 민주주의 옹호 기류에 찬물을 끼얹고 박정희, 전두환을 비롯한 독재자들의 옹호 세력이 힘을 얻게 하는 계기가 되어버렸다.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독재를 하든 부패를 하든 상관없으니 경제만 살리면 그만'이라는 기류가 형성되게 만들었다.
곁다리 얘기로, 1997년 동아시아 외환 위기는 한국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국내정치에도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특히 가장 크게 내홍을 겪은 곳은 인도네시아로, 30년간 독재를 해온 수하르토 대통령이 시민혁명에 의해 물러났고 이후 형식적으로나마 민주주의가 정착하게 됐다. 인도네시아 치하에서 억압을 받던 동티모르가 독립의 계기를 마련한 것은 덤이다.
2.2.1. 국방력에 미친 영향
1997년의 외환 위기는 국방력의 증대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는데 도입 과정에서 취소되거나 지연된 경우가 많아서 각종 전투/지원 장비의 도입이 늦다보니 게다가 주변 타 국가들과 비교하자면 질적, 전력 면에서 증강 속도가 상당히 늦어지는 영향이 발생되었다. 당장 아래의 경우가 극히 일부의 대표적인 사례로 크게 영향을 밝히자면 다음과 같다.
원래 대한민국 공군은 1980년대 후반 F-16C/D 블록 32형(F-16PB/PBU)이 도입되고 1991년 KFP 사업으로 F-16C/D 블록 52형(KF-16)이 선정된 이후 1993년에 대대적으로 공군력 강화를 위해 F-15급 전투기 '''120대'''를 도입할 계획(1차 FX 사업)을 발표했고, 1996년 서울 에어쇼에 후보기종인 프랑스의 라팔, 러시아의 Su-30과 Su-37, 미군의 F-15C와 F-15E가 참가하여 시범비행을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외환 위기로 국방비가 대폭 삭감되면서 사업이 일시 취소되었다가 도입 댓수를 '''40대'''로 줄여서 겨우 1999년에 FX 사업을 시작하여 F-15K를 도입할 수 있게 되었다. F-15K는 2차사업을 통해 총 61대까지 확보하였으나 원래 예정했던 120대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 댓수였고 그나마 2018년부터 2020년대 초반까지 3차 FX로 F-35가 40대가 도입될 예정이지만 여전히 원래 예정한 120대에 비해 20여대가 적은 수준이다. 이후 F-15K는 2대가 사고로 추락하여 2019년 현재는 59대를 보유하고 있다.
그 결과 원래는 FX 사업 종료와 함께 퇴역해야 했을 F-4 팬텀의 경우, 2018년 현재 RF-4C와 F-4D는 퇴역했지만 여전히 F-4E는 현역에 남아있는 상태이고 2024년까지 운용할 예정이다. 물론 F-4E는 F-35A가 들어오면서 순차적으로 퇴역하고 있다. 하지만 로우급의 F-5는 KF-X가 어느정도 배치된 2030년에 전량 퇴역할 예정이다.
그나마 미디움급인 KF-16(블록 52형)이 원래는 120대만 양산되고 마무리 될 예정이었으나 외환위기 시기를 전후로 KF-16 추가 생산이 산자부 예산으로 진행되어 2000년대 중반 KF-16은 140대가 양산되었다. 그 결과 F-16 계열(F-16PBU, KF-16)은 2019년 현재 167대를 운용하고 있다. 게다가 1990년대 조기경보기와 공중급유기 도입 사업도 진행될 예정이었는데 외환위기의 영향으로 상당히 지연되었다. 정확히는 1990년대 후반에 조기경보기 도입 사업으로 E-767을 고려하기도 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조기경보기가 도입된 것도 2010년대에 E-737을 도입했다.
여기에 공중급유기 도입 사업도 상황은 비슷해서 1990년대부터 계획에 있었지만 1997년의 IMF 외환위기로 연기 되었고, 이후에도 E-X, 1차 FX 사업 등에 번번이 우선순위가 밀렸다. 영토 밖으로의 원거리 작전을 할 일이 없다는 것이 주요 이유였다. 이후 조기경보기와 비슷하게 2010년대에 A330 MRTT#s-4가 선정되었고 2018년 하반기에 1호기가 도입되었다.
대한민국 해군도 본래 '''18척'''의 현대적인 구축함을 확보하기로 했던 KDX 사업이 대폭 지연되었고, KDX-1, 2, 3을 합쳐 총 '''12척'''으로 목표 수량의 2/3 밖에 도입하지 못했으며 특히 그중 가장 주력 임무를 담당해야 할 충무공이순신급 구축함은 해외파병 임무까지 겹치면서 혹사당해 예상 수명보다 빨리 퇴역해야 할 상황이 되었다. 이지스 구축함인 KDX-3 사업 자체가 불투명해져 원래 KDX-3급의 함급명으로 아껴뒀던 충무공 이순신의 존함이 KDX-2의 함급명으로 격하된 것도 그 영향이다.
게다가 1990년대 초반에 경량 항공모함(혹은 김영삼 항모)을 건조할 계획도 있었다. 물론 당시 국방부나 군 고위 관계자들이 '경항모의 도입은 주변국의 군비경쟁을 유발할 수 있다.'는 이유로 반대했으며 결국 예산은 전액 삭감되었다고 한다. 더구나 때마침 터진 외환위기 때문에 계획은 공식적으로 백지화되었다. 그나마 시간이 흘러서 2010년대 이후로 KDDX 개발, 인천급, 대구급 호위함 도입 등의 해군 전력을 증강시키고는 있다.
대한민국 육군도 120mm 주포 장착 전차인 XK2의 도입 사업이 연기되어 K1 전차를 개량[12] 한 K1A1 전차 추가생산으로 버텨나가야 했으며 AH-X(공격헬기 구매)도 진행될 예정이었다. 당장 AH-X 사업은 90년대 초반부터 구상되어왔으며 80년대말 중형공격헬기 AH-1S 도입 이후 공격헬기의 대형화 추세에 따르기위한 사업이었다. 그러나 IMF 사태에 따른 예산문제 등으로 표류하고, 2000년대 들어서는 KMH공격형에 우선순위가 밀려 잠정중단되었다. 즉 원래는 1990년대 초반부터 구상되어온 사업으로 AH-1 코브라를 대체할 목적으로 AH-64를 도입할 예정이었다. 역시 외환위기의 영향으로 지연돼서 이후 2010년대가 돼서야 AH-64E의 도입이 완료되었다.
게다가 K1A1 전차의 경우 2010년까지 480여 대가 양산이 되었는데 IMF 외환위기로 예산 부족 등의 영향으로 약 480여 대에서 적은 수량이 양산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나마 경제상황이 좋아지면서 다시 복구가 되었다. 그나마 XK2는 2007년에 시제 전차가 등장하고 2014년에 1차 양산분이 실전배치 되었고 2차 양산분 이후는 2019년부터 진행될 예정이며 K-3 차기 전차가 개발 중에 있다.
그 결과로 1997년의 외환위기로 인해 국방비의 증가가 한동안 늦어지면서 현대전에서 운용이 가능한 제대로 된 전투기 숫자가 부족하고 지원기 등의 정찰자산, 각종 신형 전투/지원 장비들의 도입과 개발이 늦어지면서 2020년 현재 국군은 현대전에서도 운용이 가능한 무기들도 꽤 있지만 그래도 M48A3K / A5K, KF-5 등의 한참전에 퇴역해야 되는 심각하게 노후화 된 군 장비를 혹사시켜가면서까지 여전히 운영하고 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2020년 지금은 1997년 외환위기때보다 예산이 늘어나서 다시 국방비를 증강하고 있는 상황이라서 순차적으로 각종 지원/전투 장비를 도입하고 있는데다가 1997년보다 상당히 국산화가 많이 진척되었고 이 영향으로 국산무기 개발이 어느정도 진행이 되다보니 추후 M48A3K 등의 노후화된 전력은 순차적으로 퇴역할 예정이기때문에 질적, 전력 면에서 분명히 개선되고는 있다.
2.3. 사회적 영향
2.3.1. 철도 및 항공 교통업계
외환위기 직전까지만 해도 신도시 건설 및 교통수요 증가, 도로교통 인프라 치중 등에 따른 낙후 등으로 많은 역이나 공항 등의 시설이 수요를 감당하지 못해 헬게이트가 열리는 곳이 많았다. 가뜩이나 2002 한일월드컵 유치에 성공하며 전체적인 철도 항공 교통시설의 확충이 요구되었고, 이에 따라 고속철도, 신공항, 지역별 지하철 신설계획 등 대규모 SOC 확충 계획들이 세워졌는데, 문제는 이 계획들이 세워진 시기가 대부분 IMF가 터지기 직전인 90년대 초중반이었다는 것. 많은 SOC 확충 계획들이 착수하기도 전에 외환위기가 터졌고, IMF가 지원이라는 명목으로 개입하면서 대부분 폐기되거나 갈아엎어졌다. 이미 벌여놓았던 공사들의 경우 공기가 늦춰지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대부분 공사들이 월드컵 즈음까지는 완공하는 것으로 계획되었으나, 외환위기는 그 대부분의 계획을 지킬 수 없게 만들었다. 서울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을 지나는 서울 지하철 6호선도 타 노선에 비해 난공사 구간도 많고 화강암 지대도 많이 지나가고 특히 보문역~돌곶이역 구간은 지질조사때에도 발견되지 않은 화강암 단층지반까지 발견돼서 난이도가 극악으로 돼서 예산도 많이 들어갔고 게다가 시공사 측도 3번씩이나 부도가 나서 개통이 늦어졌다. 6호선 전구간이 완전히 개통된건 2001년에 와서이다.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철도업계의 도시철도 사업도 큰 타격을 받았는데 '''서울 3기 지하철 계획이 서울 지하철 9호선과 3호선의 오금 연장을 제외하고 전부 폐지되었고''', 부산 4호선과 5호선, 대구 3~6호선, 대전·광주 2~5호선, 인천 2~3호선, 부산 3호선 반송선(이후 4호선으로 분리된 그것) 등 수많은 계획들이 지연 및 변경되거나 폐지되었다. 이 때까지의 부산 4호선은 부산항 앞바다에 인공섬 해상신도시를 매립해 연결하는 노선으로, 이후 2011년 3월 30일에 개통한 부산 도시철도 4호선(반송선)과는 전혀 다른 노선이다. 서울의 3기 지하철 계획이나 부산 도시철도 5호선처럼 같은 시기에 외환위기로 백지화되었던 다른 노선들은 대부분 경전철로 대체되어 재추진 중이지만, '''이 경우 노선의 핵심인 부산 앞바다 인공섬 계획 자체가 무산되면서 부활의 여지도 없이 완전히 폐기되었다.''' 추후 인공섬 대신 북항 재개발지구로 지정되어 개발이 한창 진행중에 있다. 또 대구지하철공사 측도 외환위기까지 겹쳐 1호선이 적자만 나자 빚을 갚기 위해 인력 감축을 거듭 감행했는데, 이는 2003년 대구 지하철 참사를 야기하는 요인 중 하나가 됐다.
많은 비용이 드는 당시 대부분의 지하 '''유인''' 운전 중전철 계획들은 현재 지상 무인 운전 경전철(모노레일 포함) 계획으로 대체되어 각지에서 건설되거나 운행되고 있다. 광주광역시 같은 경우는 1호선을 추후 계획 노선들의 환승용 보조 노선으로 먼저 착공하였지만, 2~5호선의 추후 계획이 전부 취소됨에 따라 1호선만 제대로 추진되어서 공기수송하는데 재정 부담의 심각한 영향을 받고 있다. 또한 고지가 눈앞이던 경부고속선 공사 또한 외환위기를 벗어나지 못했는데, 도중에 공사가 중단되어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고속선 완공을 제 시간에 이루지 못하였으며 대구~부산 구간은 도중 예산 절감으로 인해 고속선에 쓰이는 CWR 공법을 쓰지않고 기존 공법으로 레일을 깔았으며, 이 구간의 고속선 공사가 끝날 때까지 기존 경부선을 전철화시켜 밀양을 거쳐 부산으로 가는 방식을 사용하였다. 그래도 다른 간선, 도시철도 계획들은 모조리 취소되었지만 고속철도 계획의 경우 이미 서울에서 부산 방향으로 60%이상(서울~대구) 토목 공사와 시설 설치(교각, 터널, 선로, 가선, 신호)를 완료해 놔 도중에 중단하기 뭐한 상황이었기에 정부에서 되도록이면 살리려 했다고 한다.
사실 국제통화기금이 전면적으로 각 지방자치단체의 도시철도 계획을 철폐한 것은 아니었다. 지자체들이 도시/광역철도를 계획할 때 민자사업을 유도하여 당시 위기에 빠진 기업들을 구제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했고, 의도는 좋았다. 계획상 보면 알겠지만 3기 지하철 계획이나 각 지방들의 철도 사업은 지금 추진하려 해도 각 지방자치단체의 재정을 엄청나게 압박할 수밖에 없을 정도의 대규모 사업이었다. 그래서 어차피 100% 세수만으로는 불가능했고, 처음에는 민자사업을 다들 고민했었다. 서울 지하철 9호선 등 일부는 민자사업으로 사업이 성사된 것. 하지만 현실적으로 당시 민자사업을 할 수 있을 법한 수준의 기업들이 외환위기 과정에 줄줄이 쓸려 나갔으므로 추진 주체가 없어서 무산된 것. 나중에 현대자동차그룹이 출자한 서울 지하철 9호선 정도만 부활하게 된다.[13]
한편으로는 정부가 국고에 돈이 없는데 공공사업을 벌여 경기순환을 진작시킬 필요는 있었기에, 김영삼 정부 때 시작된 민자사업 형태의 공공사업 집행을 김대중 정부 때 크게 확대해 도로망을 확충하는 등 사업을 벌였다. 하지만 시행착오가 많아서 눈뜨고 코베이는 상황을 자초하기도 했고, 지역 정치인과 발주자와 채권자와 평가용역기관이 돈잔치를 벌이기도 했다. 이것은 김대중 정부 말기에 가서 고쳐지기 시작했고, 이후 정부는 민자사업을 엄격하게 심사하고 이미 집행된 사업에 대해서는 부채 재조정 등 뒷처리에 힘쓰는 처지가 되었다.
항공 교통 측면에서도 타격이 심했는데 수많은 외국 항공사들이 이 당시에 한국 노선을 단항하거나 운항 횟수 또는 운항 항공기 규모를 축소시켰다. 이때 철수한 다수의 외국 항공사들은 외환위기가 극복되고 인천국제공항이 개항한 후 하나둘씩 한국 노선 운항을 재개했다. 인천국제공항도 외환위기로 인해 개항이 지연되다가 2002년 한일 월드컵 개최 1년 전인 2001년에야 간신히 개항되는데 성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여러가지 이유로(대형 한국 국적사들의 텃세, 주변국인 중국이나 일본보다 작은 시장 규모, 안보 리스크 등) 복항하지 않고 있는 항공사들도 많은데 대표적으로 콴타스가 있다. 그리고 대형 한국 국적사들도 이때 이용률이 저조한 상당수의 노선들을 정리했다. 한국 노선 철수 이후 아예 항공사 자체가 망하는 바람에 복항하지 못한 항공사들도 있다. 예를 들면 안셋 오스트레일리아 항공이나 스위스에어. 반면 핀에어나 아메리칸 항공처럼 외환위기 이전에도 한국에 관심이 없었다가 2000년대 후반 이후에야 한국 노선에 취항한 항공사도 있다.
2.3.2. 자동차업계
현대자동차가 한국 시장의 최종 승자로 등극하게 되었다.
그 동안 치열한 경쟁을 벌인 기아자동차와 대우자동차, 쌍용자동차가 모기업의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매각[14] 됨에 따라, 기아차를 흡수한데다 유일한 국내 업체로 남은 현대차의 위상이 한층 높아지게 된 것이다. 삼성자동차가 가성비 및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A/S로 추격에 나섰다. 모든 조건 기간, 기한이 현대차보다 많았다고 한다. 예를 들어 현대자동차는 품질보장 기준을 5만km까지로 했는데, 삼성자동차는 10만km까지로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삼성자동차는 기존 시장의 진입장벽을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지분의 거의 대부분을 르노에 P&A로 매각하고 만다.
이 시기쯤에 양산할 예정이었던 스포츠 컨셉카인 르노삼성 SSC-1와 쌍용 W 쿠페가 이 사태로 취소되어 영원히 베이퍼웨어로 남게 되었다. 만약에 양산되었더라면 어울림 스피라보다도 5년~13년 앞선 국내 스포츠카로 등극했을 것이다. 굳이 5년~13년이라고 적은 이유는 스피라가 2002년부터 등장했지만 정작 양산화는 2010년에야 진입하게 되었다. 2001년 <자동차생활> 기사에 따르면, 아시아자동차도 '네오마티나'와 'ARV' 같은 독자모델을 개발해내 모기업 기아자동차와 안 겹치는 쪽으로 틈새시장을 노리려다 1997년에 기아그룹이 부도난 뒤 1998년 현대그룹에 팔려 라인업이 재편되면서 전부 엎어졌다. 대우그룹의 '세계경영' 기치에 따라 세계 곳곳에 생산기지를 퍼뜨린 대우자동차도 모기업이 부도나면서 2000년에 법정관리를 거쳐 2002년에 GM대우, 대우버스, 대우상용차 3개로 분할됐고, 대우-FSO와 워딩연구소, 대우-AVIA, 우즈대우-아브토 등 해외 계열사와 사업장들을 서서히 팔아치웠다.
1998년부터 일본의 명문 자동차회사 미쓰비시와 마쓰다의 국내 진출이 예상됐으나 이 여파로 없던일이 되버린듯 하며 결국 국내 진출한 일본 자동차업계의 최후의 승자는 토요타가 되었다. # 사실 미쓰비시와 마쓰다는 이미 이클립스와 MX-6가 수입되긴 했다.
2.3.3. 체육계
KBO 리그의 경우, 모기업이 직접 부도를 당한 해태 타이거즈와 쌍방울 레이더스는 선수를 팔아서(혹은 선수 임대) 연명했고, 이 때문에 하위권을 전전했다. 해태는 그나마 상황이 괜찮던 1996년 시즌을 앞두고 신인 박재홍의 지명권[15] 을 새롭게 출범한 현대 유니콘스로 양도했고[16] 선동열을 주니치 드래곤즈에 임대료 30억원을 받고 임대 보냈으며, 1997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하자마자 이종범을 50억 이상의 이적료를 받으며 주니치 드래곤즈에 보냈고, 조계현을 5억에 삼성 라이온즈에 양도했다. 이듬해인 1998년 시즌이 끝나자 임창용을 양준혁, 곽채진, 황두성에 20억원을 얹어 삼성으로 다시 보내야 했다. 또한 지명했던 유망주인 서재응, 김병현, 최희섭이 MLB로 가는 것을 손가락만 빨면서 지켜보아야 했다. 쌍방울은 그마저도 없어서, 1997 시즌이 끝나고 박경완을 이근엽+김형남+9억에, 1998 시즌 중에는 조규제를 박정현+가내영+6억에 현대 유니콘스로 양도했다. 1998 시즌이 끝나자 김기태와 김현욱을 양용모, 이계성, 20억원과 묶어서 삼성과 트레이드를 했다. 게다가 쌍방울은 1999년에 2군도 아예 없애버렸다. 해태는 2001년 시즌 중 현대자동차그룹에 인수되어 KIA 타이거즈로 재탄생했고, 쌍방울은 아예 '''팀이 해체'''되어 SK그룹이 자유계약이 된 쌍방울의 선수단 및 지명권을 인계하고 SK 와이번스로 '''재창단'''했다. 즉 '''실질적으로 쌍방울을 흡수했으나 형식적으로는 구단 자체를 인수한 게 아니다'''. 게다가 하이닉스가 최대주주였던 현대 유니콘스의 연고지 이전문제가 겹치면서 인천 야구의 정통성 논란이 터지게 되었다. 상세 내용은 삼청태 문서를 참고.
K리그의 경우 부산 대우 로얄즈가 현대산업개발에 인수됐다. 부산 아이파크는 대우 로얄즈 시절 축빠이던 대우의 김우중 회장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안정환, 김주성 등 많은 스타플레이어들을 앞세워 K리그 최고의 인기구단중 하나이자 강팀으로 군림했었다. 그러나 대우그룹의 도산으로 구단 해체 위기까지 갔다가 간신히 현대산업개발에 인수된 이후로는 기업구단답지 않은 투자로 점차 상위권에서 밀려나더니, 끝내는 2015년 기업구단 최초로 2부리그인 K리그 2로 강등됐다. 야구도시로 알려진 부산이지만, 롯데 자이언츠 이상의 인기를 누리던 90년대 대우 로얄즈를 생각해 보면...
대전 지역의 기업들이 컨소시엄을 구성해 창단했던 대전 시티즌도 계룡건설을 제외한 다른 구성 기업들의 도산으로 계룡건설의 후원으로 근근히 버티다 끝내 2006년 완전한 시민구단으로 전환했다. 시민구단화 이후 고질적인 재정난으로 역시 2부리그나 들락거리는 신세. 이 여파는 실업축구라고 안심할 수는 없어서 1997년에는 국민은행 축구단과 한일은행 축구단, 기업은행 축구단, 이랜드 푸마가, 1998년에는 (구) 할렐루야 축구단과 한일생명 축구단, 주택은행 축구단이 모두 각각 해체되었다.
프로농구의 광주 나산 플라망스도 역시 모기업인 나산그룹이 망해서 이후 골드뱅크-코리아텐더로 2단 변신 후 2003년 말 KTF(현 KT)에 인수되게 된다. 한편 여자농구의 경우 남자농구가 프로화에 성공하는 모습을 보면서 프로화에 의지가 없는 팀들을 정리하는 방법으로 프로화를 준비했으나 IMF 이전에 13개 팀이었던 것이 5개 팀으로 반토막 이상이 나는 후유증을 겪게 된다. 여자농구팀을 운영했던 다수의 팀들이 은행권 팀들이었다는 점을 생각했을 때는 상당히 큰 타격을 입었음이 분명하다. 실업 리그였지만 거의 프로리그나 다름없었던 배구 역시 전설의 남자배구팀인 고려증권 배구단이 모기업의 부도로 1998년을 끝으로 해체됐고, 여자배구는 더욱 더 심한 상황이었던지라 9개 팀이 5개 팀으로 쪼그라드는 암흑기를 맞았다. 후지필름, 효성, 한일합섬, SK케미칼이 해체됐다.
민속씨름(프로씨름)의 경우 1997년에 부산조흥금고 호랑이, 세경진흥 사자(구 삼익가구 사자)가, 1998년에 일양약품 원비[17] , 청구 청룡, 1999년에 동성[18] 백호(구 한보 멧돼지), 진로 두꺼비가 각각 해체되었다.
이 사태로 인해 올림픽과 아시안 게임에서 매회 메달을 따는 비인기 종목들도 안전할 수 없었다. 1997년에 국민은행은 테니스팀 및 사격팀을, 기업은행은 사격팀을[19] , 해태그룹은 역도팀을, 극동그룹은 동서증권 양궁팀을, 동아그룹은 동아증권 탁구단을, 외환은행이 여자 탁구단을 각각 해체한 걸 필두로 1998년에 제일제당은 자사의 마라톤팀, 쌍방울그룹은 야구팀에 앞서서 쌍방울 마라톤팀과 석탑건설 아이스하키단을, 조흥은행은 사격팀을, 1999년에 주택은행은 사격팀, 2000년에 대우중공업이 테니스팀을 각각 해체했다. 그 여파 때문인지 몰라도 2000 시드니 올림픽에서는 평소 10위권보다 낮은 종합 순위 12위라는 다소 부진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20]
2.3.4. 대중문화·IT업계
대중문화 업종도 심한 타격을 입기는 마찬가지. 산업 특성상 국민생활이 윤택해야 꽃피는 게 문화인데 이 때 한 번 죽었다 살아났다. 당장의 생계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절박한 처지의 실직자들이 거리에 쏟아져 나오고,그나마 직장에 남더라도 월급은 점점 더 깎여만 가는데 사람들이 대중문화에 신경쓸 여유가 있었을 리가 없다.
특히 환율에 영향을 받는 외국 뮤지션 공연의 경우 갑자기 뛰어오른 환율 때문에 공연 기획사들이 큰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물론 1998년 메탈리카 내한 때처럼 기획사에서 한국의 사정을 설명한 것을 이해하고 자신들의 개런티를 25만 달러나 깎아주는 대인배적인 사례가 있기는 했다. 그리고 게임이나 애니메이션 같은 콘텐츠 분야는 투자자나 유통사들이 대거 발을 빼면서 기존의 시장이 급격하게 무너지는 현상을 겪기도 했다.
특히 1998년에 방송된 국산 애니메이션 스피드왕 번개의 경우, 제작사 측이 당초 반응이 좋으면 세계무대를 배경으로 한 시즌 2 제작을 하기로 되어 있었고 흥행도 좋은 편이었으나 이 사태의 여파로 인해 그대로 시즌 2 제작계획이 엎어져 버렸다. 또한 같은 해 초 TV 방영을 시작한 바이오캅 윙고는 삼성그룹 계열 삼성영상사업단에서 야심차게 추진한 프로젝트였지만 종영 후 삼성영상사업단이 해체되면서 협력사였던 스타맥스를 통해 VHS 타이틀로만 출시되고 DVD로는 아예 출시조차 되지 않은 채 잊혀졌다.
출판만화 역시 엎친데 덮친 격으로 청소년보호법 파동의 여파와 외환위기 콤보로 1998년에는 성인만화잡지 <미스터 블루(세주문화)>, <매주만화(트루패밀리[21] )>[22] , <투엔티 세븐(도서출판 대원)>이, 2000년에는 <빅 점프(서울문화사)>까지 각각 폐간되었다.
기타 출판계도 1997년 고려원을 필두로[23] 수많은 출판사나 도매상들이 부도를 내거나 문을 닫았고, 살아남은 출판사들조차 정부에 긴급지원을 요청했다. 출판 트렌드도 시나 소설 대신 경제서적 중심으로 바뀌었다. 게다가 문인들도 주 독자층인 고학력/사무직 여성들이 대거 이탈하고 영상매체 보급으로 힘든 시기를 보냈다.
신문을 비롯해 케이블 TV, 비디오 유통, 게임, 영화배급 등의 대중문화산업에 참여했던 여러 대기업들도 관련 사업을 접는 상황이 벌어졌다. 1997년 대농그룹이 코리아헤럴드-내외경제신문을 신동방그룹에 넘긴 걸 시초로 하여 경향신문과 문화일보를 각각 소유한 한화그룹과 현대그룹은 1998년에 각각 두 신문사를 분사시켰고, 1999년 삼성그룹과 롯데그룹도 중앙일보와 국제신문을 각각 분리시켰다. 하지만 문화일보는 여전히 현대중공업의 영향력이 강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현대중공업 출자 공익재단이 상당수 지분을 소유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주요 언론사들도 직제를 축소/개편하는 등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지역 언론사들도 사정이 좋지 않아 1998년에 부산매일이 폐간되었고, 2000년에 영남일보가 부도났다.[24] 그 외에 1987년 정간법 제정 이후 우후죽순처럼 늘어났던 영세 지방신문사들도 발행을 중단하거나 폐간하기도 했다.
별도로 '삼성영상사업단'이란 미디어그룹을 만들어 운영했던 삼성그룹도 Q채널, 바둑TV, 캐치원 등 케이블 TV 채널들을 중앙일보로 넘겼고 영화, 음반, 비디오 부문을 정리하거나 분사하였다. 시사영어사는 1997년에 교육채널 마이TV를 선경그룹에 넘겼고[25] , 두산그룹 계열사 오리콤은 교육채널 두산슈퍼네트워크를 1998년에 재능교육으로 넘겼다. 현대그룹 역시 현대방송을 1999년 넥스트미디어그룹으로 넘겼다.[26] 그 외에 한샘출판도 교육채널 다솜방송이 1998년 케이블 역사상 최초로 부도를 맞자 이듬해 TV홈마트에 넘겼고,[27] KM뮤직(구 현대음향)도 2000년에 KMTV를 현대오토넷으로 넘겼다.
PC 게임 업계에선 1999년에 LG그룹 계열사 LG소프트가 LCD 제조업체 'LG-필립스LCD'로 업종을 전환하면서 게임사업부를 빼내 현재의 한빛소프트로 분할 설립했고, 소프트웨어 사업부는 LG전자로 넘겼다. 마찬가지로 SK그룹 역시 계열사 SKC 사업분야 중 하나였던 게임사업도 위자드소프트란 업체로 분사시켰으며 왕성하게 활동했던 비디오사업부는 2005년 'SKC미디어'로 분사시켰다. 게다가 이 무렵에 번들 CD 경쟁시대 과열, 인터넷 불법 다운로드 및 온라인 게임 시장 확대 등으로 인해 국내 패키지 시장은 점점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이렇다보니 게임 회사들은 원가 절감을 위해 이 무렵을 기점으로 주얼 게임 형식[28] 으로 파는 경우가 많아졌다.
국산 고전 명작 RPG로 손꼽히는 날아라 슈퍼보드 -환상서유기-는 개발 도중 IMF 사태가 터지면서 후반부를 날림으로 완성시켜 발매했다. 전반부의 탄탄한 스토리와 게임성에 비교해서 후반부는 복붙 미로를 통과해서 갑자기 최종보스전을 하고 끝나버리며 잔뜩 풀어놓은 떡밥도 전혀 회수하지 않은[29] 등 대놓고 날림으로 만들어졌기에 아직도 이 게임을 추억하는 팬들은 아쉬워하고 있다.[30] 제작진도 많이 아쉬웠는지 곳곳의 NPC들이 게임이 미완성이라 안타깝다거나 IMF 와중에 게임을 구매해주셔서 감사하다는 등의 멘트를 한다. 지금 와서는 발매 당시의 시대상을 떠올리게 해주는 요소가 되었다.
콘솔 게임은 마지막 대기업 정식수입 콘솔이었던 현대 컴보이 64가 현대 왕자의 난과 IMF까지 겹쳐서 망했어요가 되어버렸다. 이보다 그렇지 않아도 IMF 이전부터 수입선다변화[31] , 일본문화 봉쇄 등의 영향으로 반쯤 블랙마켓이었던 상황에서 불법 보따리장수를 통한 정품 구매층조차 철처하게 박살이 나서, 2002년 PS2가 한국시장에 진출하기전까지는 PC 게이밍보다도 더 복사문제에 훨씬 둔감한 시장이 되어 버렸다. 타 소프트웨어 시장도 마찬가지여서 정부의 지원 해지로 수많은 소프트웨어 개발업체들이 문을 닫거나 매각됐으며, 특히 부도 위기를 맞던 한글과컴퓨터는 회사를 살리기 위해 아래아 한글 개발중단 조건으로 한국마이크로소프트와 합작을 시도했다가 시민사회단체의 줄기찬 '아래아 한글 살리기 운동'으로 철회했다. 대신 '아래아 한글 8.15 특별판'을 1만 원에 출시해 국산 워드프로세서 사용을 권장코자 했다.
이 외에 대우그룹 모기업 (주)대우도 1999년에 영상사업부문을 동양그룹으로 매각했는데, 정확히는 대우시네마네트워크 채널을 신규법인 '오리온시네마네트워크'로, 영화관사업부를 '메가박스씨네플렉스'로 각각 분할매각시켰다. 영화 및 홈비디오사업부도 배급처인 세음미디어로 넘겼다.
당시 삼성, LG, 대우 등은 TV와 VCR 등의 영상 및 음향가전 하드웨어를 생산, 판매하고 있었기 때문에 관련 소프트웨어 분야에도 손대면서 시너지효과를 얻고자 하였다. SK의 경우 SKC에서 비디오테이프와 CD 등을 직접 생산하였기 때문에 역시 영상, 음반 분야에 진출하기도 했다. 이 때문인지 신흥 미디어재벌이던 제일제당과 동양그룹이 그 빈 자리를 메꿨으며, 제작투자도 대기업 대신 중소 벤처창업투자사나 금융권 중심으로 변경됐다. 당시 소규모였던 몇몇 연예 기획사들이 잇따른 아이돌 그룹의 대히트로 대형화된 상태다. 또한 대종상의 후원기업인 쌍방울이 부도나면서 1998년에 대종상이 일시적으로 폐지된 적이 있다. 당시 스몰마켓이던 인터넷 업계도 좀 타격을 입었는데, 1998년 두산정보통신이 '인터피아'를 아이네트에 넘겼고, 한글과컴퓨터도 '심마니'를 데이콤에 넘겼다. 1999년 현대정보기술이 '신비로'를 온세통신에 넘겼다.
무엇보다도 이 시기에 특기할만한 점은 나라종금 등등 일부 종금사들이 일본에서 끌어온 단기 차관을 연장시킬 방안으로 '''일본에 문화시장을 개방'''해야 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한미투자협정에 따라 국산 영화 스크린쿼터를 축소해야 됐다는 것이었다. 경제난으로 투자 활력이 떨어진 문화산업계였던 만큼 이 조치는 큰 폭탄과 다름없었고, 정부가 스크린쿼터 축소로 선회하자 영화인들은 '한국 영화의 종말이 찾아온다'며 명동성당으로 몰려가 시위하기까지 했다.
이 무렵에는 만화 분야처럼 사실상 준개방 상태에 있는 분야가 적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중화문화권에 흡수되지 않은 우리나라의 저력을 대통령 및 정부 관계자들이 언급하곤 했었다. 그만큼 충격이 컸던 사건이었던 것. 지금에 와서 보면야 선택권 면에서야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고, 이것이 문화 침체기 이후에는 전화위복이 되어 문화시장의 혁신을 이끌어내 결국 한류가 나올 수 있지 않았냐는 시각도 드물게 있다.
사회적인 흐름으로는,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이라는 경제적 부흥에 힘업고 '신토불이' 등의 레토릭으로 서서히 강해지고 있던 일종의 국수주의의 흐름을 완전히 뒤바꿔 놓은 걸 들 수 있다. 개인주의를 서구의 퇴폐적 풍습으로 여겨 배척하던 사회적 풍토가 어쨌든 IMF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이러한 것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적지 않아서, '한국적인 가치'에 대한 선호가 완전히 박살나고 자국혐오나 미국병도 심해졌다고 보는 사람도 꽤 있다.
그리고 지상파 3사도 10대 취향 오락프로 편성 축소를 감행해 KBS에선 2TV 주력 오락프로인 <슈퍼 선데이>와 <가요톱10>, <토요일 전원출발> 등을 일방적으로 폐지시켰다. KBS 측은 '''"경제가 나빠져 국민이 절망에 빠져있는데 연예 프로그램을 방송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라는 명분을 내세워서 종영시켰고, 그 자리를 <세 바구니의 행복>이나 <다큐멘터리 대한민국>, <국민대토론> 같은 교양 프로그램으로 채워나갔다. 물론 진짜 목적은 긴축 경영의 일환이었으며, 몸 값이 비싼 아이돌 가수들을 불러서 가요 프로그램을 찍는 것은 제작비가 많이 든다.[32]
다만 제작진들은 KBS의 일방적인 '신편성' 방침에 적극 반발했고, 시청자들이 KBS에 전화를 하면서 항의를 하는 등 후폭풍이 엄청나게 안 좋게 되자, KBS에서는 땜빵용으로 <브라보 신세대>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방송했지만 당연히 인기를 끌지 못했고, 다시 가요톱10의 뒤를 잇는 대중음악 순위 프로그램 뮤직뱅크가 신설되었다. 그리고 <슈퍼 선데이>는 <슈퍼TV 일요일은 즐거워>로 대체되었다. 심지어 <TV는 사랑을 싣고>와 <체험 삶의 현장>도 2TV로 옮겼는데, 일각에선 "광고수익 노리려는 꼼수 아니냐"며 안 좋은 시선으로 보았다.
한편 IMF 외환위기 당시 프리랜서 연출자들의 영화감독 데뷔작이 될 뻔한 <제이슨 리>(고석만) <쿠데타>(김종학) 두 작품은 투자자를 구하지 못해 무산됐고, MBC가 예전 인기 드라마 작품들을 재방영했으며, SBS는 김종학 감독이 프리랜서를 선언한 후 처음 연출한 모래시계를 '''모래시계를 시청하지 못한 비 수도권 민영방송 시청자들을 위한다.''''라는 그럴싸한 명목 하에 98년 1월 14일부터 2월 22일까지 수목, 토일 4회 재방송하기도 했다. 특히 <모래시계>는 역대 한국방송작가상 드라마 수상작 중 유일하게 밤 9시 50분에 재방영됐는데 수목 시간에는 30% 이상의 시청률을 기록했으나 주말 시간에는 최고 시청률 49%, 평균 시청률 20%대로 높은 인기를 끈 KBS 1TV 용의 눈물 때문에 10%대 시청률로 손해를 봤다.
아울러, 이승연, 김희선 두 미녀 스타를 전면에 내세운 KBS 2TV 주말드라마 웨딩드레스는 "IMF 시대에 역행하는 사치성 드라마"란 지적을 산 데다 경쟁사 MBC 그대 그리고 나에 밀려 조기 종영되어 주말연속극이 잠정적으로 폐지됐고, 1998년 <그대 나를 부를 때>를 끝으로 수목극을 잠정 폐지했는데[33] 이 작품 외에도 일요아침드라마가 없어지기도 했다. 이에 KBS의 이금림, 정을영, 이영희 등 인기 작가-PD들이 SBS로 떠났는데, 이들이 SBS 이적 후 처음 선보인 작품들은 거의 기대 이하의 성적에 그쳤거나 평판이 좋지 않았다. IMF 이후 대부분 프리랜서 연출자들은 외주제작사로 가거나 프로덕션을 직접 설립하여 제작사 겸 연출자로 활동한 한편 방송사와 계약을 맺은 뒤 연출만 했다. 설상가상으로 차태현, 송윤아 등 자사 공채 출신 탤런트들이 전속계약 종료 후 MBC, SBS 등 타 방송사 열차를 타면서 KBS 드라마는 하락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같은 시기 MBC도 <인기가요 베스트 50>, <특종 연예시티> 등을, SBS도 <TV 가요 20>, <70분 드라마>, <웃으며 삽시다>, <뉴욕스토리> 등을 폐지시켰다. 특히 MBC에선 개그맨 이철구가 1998년 1월 26일에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자살하여 충격을 주기도 했다.
한편 해외에서는 영화 타이타닉이 대박을 쳤다. 세계 최초 10억 달러 돌파 영화로 국내에서도 경제위기 상황에도 불구하고 서울관객 197만이라는 사상 최대의 관객을 기록하였다. 당시에는 한국에서 관객 수를 집계할 때 서울 관객 수만 집계하였다. 아카데미과학은 마침 그 때를 틈타서 이전부터 넘치던 1/350 타이타닉호 모형을 해외에 엄청나게 팔아치우고 새로 뽑은 1/400 신금형까지 대박을 쳐서 IMF 시대를 운좋게 흑자로 넘길 수 있었다.
1997년 4월 1일에 시행된 야간/할인시간 정액제는 이 사태로 입소문을 타 가입자가 증가해 '''국내 인터넷 정액제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1999년에 한국연예제작자협회가 국내 인기가수들을 총동원해 <NOW N NEW>란 컴필레이션 앨범을 냈고, 특히 타이틀곡 '지금 다시 하나되어'가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이 앨범은 한동안 잊혀지다가 2020년 코로나 사태 때 재조명됐다.
2.3.5. 취업 시장
취업 시장은 IMF사태의 영향을 온몸으로 받았다. 한국의 취업 시장은 이때를 기점으로 천국에서 생지옥으로 변했다. 실업률이 정부 공식 통계만으로도 2%에서 '''8.8%'''(1999년 2월)로 올랐다. 그 이전까지의 한국이 전세계에서 손꼽히는 저실업 국가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가히 몸서리가 쳐지는 끔찍한 실업률이다. 국민들의 인식 자체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이전까지 9급 공무원을 비롯한 공무원 직종은 대기업 직원보다 급여도 낮고 "할거없어서 공무원한다"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로 인식 자체도 낮았다. 실제로 경찰(순경) 시험은 경쟁률 미달도 심심찮게 나왔으며, 교사 임용고시도 매우 수월하게 통과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튼실하게만 느껴졌던 여러 대기업이 구조조정과 파산을 겪으며 상당수 국민들은 불안감을 느꼈으며, 안정적인 직장, 즉 국가가 채용하는 일자리를 찾는 경향이 커졌다. 이때를 기점으로 의대 입결은 더욱 올라가서 서울대를 제쳤으며, 또한 사관학교, 경찰대 입결과 인기도 크게 상승했다. 직업군인도 신청만 하면 대부분 장기복무를 했는데 이 시기를 기점으로 경쟁자가 넘쳐나고 말았다. 부대에서 부사관들의 군번을 살펴보면 87년 1명 88년 1명... 97년 1명 이런식으로 흘러가다가 이후 장기복무에 성공한 간부들이 가끔씩만 추가되는 걸 볼 수 있다. IMF로 인한 취업 인식의 변화는 2010년초 미국발 금융위기를 거쳐 불경기가 장기화되고 있는 2020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리고 IMF 사태 이전에 몇몇 유명 기업의 생산직 모집에서는 산업체 부설학교를 통해 고등학교 학력을 주는 조건의 중졸 사원 전형으로 원서만 넣으면 합격을 할 수 있었음에도 '''한번에 수십명이 미달이 날 정도였으나'''#, IMF 사태 이후로는 경쟁률이 크게 올라 고졸은 물론이고 대졸자도 들어가기 힘들 정도가 되어 버렸다.
자신이 해고당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혹은 그 사실을 주변에 차마 알릴 수 없는 실직자들이 아침에 양복 차림으로 출근하는 척하고 하루를 산에서 지내다 자신이 다니던 직장 퇴근 시간이 될 때쯤 귀가해 가족들에게는 직장에서 퇴근한 것처럼 보여주는 이른바 등산출근 현상이 언론지상에 보도되기도 하였다. 여기서 '등산'을 '오락실'로 바꾸면 한스밴드의 히트넘버 '오락실'의 가사내용이 된다.
한 가정의 아버지들이 당장 먹고 죽을 돈도 없는데 회사에선 해고당했고, 어쩔 수 없이 일용직이라도 구해서 하게 됐는데, 가족 앞에서 일용직에 출근하는 것을 보이는 게 부끄러우니 아침에는 양복을 입고 출근하는 척 한 뒤 공중화장실에서 공사장 복장으로 갈아입은 후 퇴근할 때 다시 양복으로 갈아입어서 겉으로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했단 클리셰는 이미 흔하고, 실제로 그때 당시 흔했던 일이다. 학교 끝나고 집에 가는 자식이 공사장에서 땀 뻘뻘 흘리며 일하는 아버지를 보고 상황이 어떤지 눈치 채지만 애써 외면했다는 경우도 있었다 한다.
회사가 사원을 가족 돌보듯이 대하던 관행도 영원히 사라지고 노동자목숨은 파리 목숨으로 변해버렸다. 이 시기 이후로 대부분의 기업이 45세 전후로 차장/부장까지 승진을 못하면 명예퇴직을 강요했다. 그리고 그 나이가 줄어들기는커녕 점점 더 앞당겨져 현재는 빠르면 30대 중후반에서 40대 초반부터 압박을 주는 곳도 늘어났다. 주요 대기업들은 1995-96년 연공서열제 폐지와 능력별 진급제를 도집했던 게 사실이나, 실제로 적용이 된 건 이때부터였다. 그리고 추가로 96년 12월에 벌어진 노동법 날치기 통과도 고용 불안정에 한몫했다.
당시의 취업시장 충격은 90년대나 2000년대 초반에 태어나 당시에는 어린이였던 사람들에게까지 그 여파가 이어졌고, 이때 시작된 청년실업 문제는 아직도 해결되지 못했고 앞으로도 해결하지 못할 부분이다. 더구나 호황이 아닌 불황과 어려움, 경제난 등만 겪으며 양극화 속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세대는 위축된 가치관 문제가 심각하다. 아래 기사에서 보듯 심각할 정도의 안정지향성 추구 등은 2020년대 현재에도 계속 사회문제로 나타나고 있다. 애초에 사회 구조가 바뀌게 된 것이 점진적으로 바뀌게 된 것이라기보다는 경제 위기에 의해 급하게 바뀌다 보니 사실 별다른 일이 없는 이상 어쩔 수 없다.
#명문대 → 교사·공무원…'꿈'은 사치가 된 아이들, 극단적인 안정성의 추구로 어린 학생들의 선호직업도 10년째 교사와 공무원이 1·2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위험부담을 감수하는 꿈이나 소망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어진 상태이다. 반상진 전북대 교육학과 교수와의 인터뷰에 따르면 “IMF 이후 학생들은 꾸준히 공무원, 교사 등 안정적인 직업을 선호하게 됐고 최근 양극화 현상의 가속화와 맞물려 과도한 안정성을 추구하게 됐다”고 한다. 교육부가 발표한 조사결과에서도 청소년의 꿈은 행복보다는 ‘안정’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 그리고 IMF 직후보다도 IMF로부터 20년도 더 지난 지금이 더 안정성을 추구하는 경향이 더 심해졌다. 1990년대에는 그래도 벤처기업이나 이런 쪽에 꿈을 가진 이들이 꽤 있었다. 심지어 1997년 당시 초등학생~고등학생들었던 80년대생들의 장래희망 1위는 무려 '''대통령'''이었다.
2.3.6. 물가
이 사태 이후로 그전까지 고정되었던 과자 등의 식료품 가격이 크게 인상되었다. 특히 환율의 영향을 많이 받는 밀가루값과 석유류값이 '''한달 사이에''' 50%-70% 상승하였다. 외환위기가 스태그플레이션의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이기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높은 실업률 때문에 괴로운데 환율 대폭등으로 물가까지 살인적으로 상승해 버리니 극한상황도 이런 극한상황이 따로 없다. 현재 과자의 과대포장의 원인 중 하나라고도 볼 수 있다. 특히 빅파이와 새콤달콤이 대표적인 예. 빅파이 같은 경우에는 외환위기 이후로 같은 가격에 크기는 더욱 작아졌다가, 다시 커졌을 때는 가격까지 덩달아 올라가면서 식감이 푸석푸석해지고 맛도 오히려 퇴보해 버렸다. 새콤달콤도 마찬가지로 외환위기 이전에는 7개에 100원(개당 14원)이었는데 이 사태가 일어나자 6개에 200원(개당 33원)으로 개수는 줄어들고 가격이 더 올라가 버렸다. 개당 가격으로 비교하면 2배 이상 오른 것. 아이스크림, 빙과류도 가격 인상을 피할 수가 없었는데, 사태 이전에는 아이스크림 1개당 가격이 대개 200~300원 선이었으나 외환위기 이후 300~500원으로 올랐고, (같은 시기에 투게더의 가격은 1000원) 얼마 지나지 않아 500~700원으로 다시 한 번 올라갔다.#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현재 시판 중인 대부분의 초콜릿에 카카오버터 대신 팜유를 추가한 것도 이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부라보콘역시 이 사태 때문에 '''단종'''될 뻔한 적도 있었다. 실제로 식료품의 가격인상, 과대포장, 가격담합 등의 문제점들이 IMF 사태가 일어난 해부터 크게 급증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시기는 다르지만 영국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는데, 영국에서 판매되고 있는 토블론 역시 2016년 말 브렉시트의 여파로 400g짜리가 360g으로, 170g짜리가 150g으로 양이 기상천외하게 줄어들었다. '''그러나 포장지 크기는 동일했다.''' #
요식업계에는 롯데리아의 IMF버거나 IMF국밥 등 IMF 수식어를 단 염가 메뉴들이 생겨났고, 2020년대 현재에는 절대로 불가능한 드립도 성행했다. 이 시기 외국계 패밀리레스토랑 브랜드가 다수 철수했고, 가격에 비해 음식이나 서비스의 품질이 애매했던 식당은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해 많은 자영업자가 길거리로 내몰렸다.
2.3.7. 사회 현상
IMF 외환위기 이후의 한국 사회는 그 전보다 훨씬 부정적인 방향으로 변화하였다. 다시 일어서기 위한 혼신의 노력 끝에 IMF체제를 조기졸업하였으나 IMF 외환위기는 한국 사회에 무수히 많은 불치병들을 남겼다. 3저호황 시절부터 이어져 온 고도성장과 완전고용의 신화는 깨졌다. 애꿎은 청년층은 대규모 청년 실업에 마주치고 N포세대로 몰렸으며, 가족해체, 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 황금만능주의가 사회 전반으로 퍼져나갔다. 6·25 전쟁 이후 최대의 국난이라고 누가 말하지 않아도 이미 모두가 다같이 힘든 세상이 온 것이다.'''국민은 피눈물 나는 세월을 견디고 버텨 위기를 극복해냈고 국가 경제는 더 크게 성장했지만, 외환위기가 바꿔놓은 사회경제구조는 국민의 삶을 무너뜨렸다.'''
IMF사태 이후 출산율은 급격히 하락하게 되었고, 이후 초저출산 상태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대한민국/출산율 문서를 참조 바란다. 당장 1998년 신생아 출생이 1997년에 비해 3만여명이 줄긴 했지만 다시 어느 정도 회복세를 보이는가 싶더니 외환위기가 진정된 2000년 신생아[34] 63만여명을 끝으로 근 20년 가까이 신생아 60만명선은 커녕 오히려 현재인 2020년 들어서는 30만명선도 위태해질 전망이다. 이러한 출산율이 급격히 줄어든 것을 체감할 수 있는 곳이 바로 교육현장으로, 2000년생부터 2002년생까지 학급수가 매 학년마다 2학급씩 점점 줄어들었다. 해당 연도의 신생아 출생은 2000년 63만여명-2001년 55만여명-2002년 49만여명이었다. 단 2년 사이에 14만명이 줄어든 셈. 2007년 적돼지해, 2012년 흑룡해 등 일시적으로 출산율이 오른 적도 있었으나 전체적인 하락세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2010년대 후반 3년에 걸쳐서 태어난 출생아의 수는 IMF 직전 1990년대 중반의 2년간 태어난 출생아 수보다 '''까마득하게''' 적다.[35] 물론 출산율 급락의 원인에 경제적인 어려움이 원인이라고 하기에는 성급할 수 있으나, 당장 위의 외환위기가 완화된 2000년에 신생아가 증가했다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경제가 어려울 때는 적어도 출산을 미루는 것이지 않을까라는 정도는 유추할 수 있다. 초혼 연령이 늦어진 것도 그렇고. 1996년까지만 해도 평균 초혼 연령은 남성 28세, 여성 25세 전후였다. 하지만 2003~2007년도의 평균 초혼 연령은 남성 30~31세 여성 27~28세였으며 2014년 남성 33세 여성 30세. '''한국인들이 흔히 쓰는 동아시아식 나이가 아닌 만 나이 기준이다.''' 초산 연령은 더 올라가서 1993년 26세였던 것이 2014년 32세로 상승했다.
또한 저출산 고령화 때문에 인구는 줄고 저성장이 예견되는 상황이라 투자 대비 수익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소비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성장이 덜할 뿐이다. 노인들은 노후 돈이 없으면 갈 곳이 없으니 절대 돈을 쓰지 않으며, 청년들은 돈이 없어서 못 쓴다. 이렇게 투자 가치가 높지 않은 시장인데다 일자리에 대한 공급은 수요를 한참 초과하고 있어 기업들은 인건비를 높여줄 필요성도 못 느끼고 있다. 장기적인 한국의 미래를 생각하면 오히려 지금 갖고 있는 자산도 중국이나 미국 등지로 돌려야 할 판이다. 실제로 한국의 해외 도피 자산은 세계 3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는 중국, 러시아 다음이다. 그리고 중국의 경우는 경제 스케일이 큰 것도 고려해야 하니 실질적으로는 경제적으로 상당한 막장인 러시아 다음이라고 보는 게 맞다.
국내에는 최소한의 투자조차도 꺼리지만 반대로 중국이나 제3세계 신흥국들에는 대기업들이 앞다퉈 투자하는 것이 명백한 증거다. 기업은 장기적인 미래보다는 현재를 중시하며 신흥국이라는 대안도 존재하기에 더욱 그렇다.
그 동안 가장들의 수입으로 가정 경제를 꾸려가던 구조였으나, IMF를 기점으로 하여 그 동안 취업시장에서 물러나거나 참여하지 않았던 주부들이 취업시장에 대거 뛰어들게 됐다. 그래서 IMF 이후에는 맞벌이가 이전 시대와는 달리 당연한 것으로 인식이 바뀌게 되었다. 사실 한국의 고용률은 IMF 이전보다 IMF이후가 더 높고 2000년대 이후 고용률이 크게 높아지기 시작했는데 이는 취업상황이 좋아진 것이 아니라 팍팍해진 경제상황과 관계가 있다. 이렇게 되다 보니 여성의 경제적 참여가 원인이 되어 여권의 신장이 큰 사회적 이슈로 부각되었으며, 기존까지 사회적으로 암묵되어왔던 사회적인 남녀불균형이 점차 바로 잡아지는 계기가 되었다. 교육에서 보다 심하게 배제된 기존 세대의 여성에 비해 점차 각 가정에서 여성에게 고등 교육을 시키게 된 것도, 그래야 먹고 사니까. 경제적 참여가 늘어나 발언권이 커져 인권 신장이 이루어진 예시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근현대 대부분의 인권 신장은 이렇게 일어난다. 미국의 노예 해방만 해도 배경은 인본주의만이 아니라 기업가들이 흑인을 급여를 받는 노동자로 쓰기 위해서라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듯이.
다만 그러다보니 가정 내에서 경제적 갈등이 심화되었는데, 심각한 경우는 가장의 경제적 무능이 큰 문제가 되어 부부간의 이혼이 늘어나 가족 해체가 심심치 않게 일어나기도 했다. 이 당시 초중고교를 다녔던 1980년대~1990년대 초반 태생의 사람들은 이 시기에 본인의 가정에서건, 주변에서건 '''IMF 때문에'''라는 이유로 여러 안 좋은 일을 겪거나 봤던 경험이 한 번쯤은 다들 있던 걸 생각해 보면 이 사건이 얼마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큰 영향을 끼쳤는지 알 수 있다.
이때 당시 주변에 죽거나 잠적한 사람을 본 적 있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대답하는 사람을 한 명은 꼭 찾을 수 있을 정도로 많은 비극적인 일이 일어났다. 몰려오는 빚과 부도를 감당하지 못하고 가족 단위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거나 야반도주를 택하는 사람들이 많았다.[36]
진짜 막장이었던 사건들은 바로 자해를 한 뒤 폭력 범죄의 피해자인 것처럼 신고해서 보험금을 받으려다가 들통나버리는 사건도 많았다는 것이다. 한 택시 기사는 택시 강도를 당한 뒤 범인들이 자신의 발을 기차 선로 위에 고정시켜 놓고 도망가는 바람에 발이 잘렸다고 해서 뉴스에 실렸으나... 결국은 얼마 못가 자기가 보험금을 노리고 한 짓이었음을 자백하고 말았다.
또, 1998년에 경남 마산의 한 가정에서는 아빠와 어린아들만 있던 집에 강도가 들었는데, 돈 있는 곳을 대지 않으면 아들의 손가락을 자르겠다고 협박하다가 그 집 아빠가 돈이 없다고 하자 진짜로 자르고 도망친 사건도 있었다. 그런데 이 사건도 알고 보니 보험금을 노리고 '''아버지가 친아들의 손가락을 자른 뒤 강도 사건처럼 신고했다는 게 밝혀져 충격을 주었다.'''
IMF에서 금융위기에 빠진 우리나라가 이를 극복하기 위해 외국 자본을 유치한다는 명목으로 이자율 상한선 폐지를 권고하자 이를 폐지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부작용으로 인해 오히려 고리 대금업이 성행하여 엎친데 덮친격으로 돈없는 서민들이 더욱 고통을 입었다. 얼마나 심했으면 '''연 2000%가 넘는 살인적인 이자율'''이 나왔을 정도. # 상술한대로 이 시기를 전후해서 러시앤캐시나 산와머니 같은 일본계 대부업체가 한국에 진출하기도 하였다.
1997년 하반기엔 일본 민단과 미국 각 지역 한인회 차원에서 외화 모국송금 운동을 벌인 바 있으며, 1998년에는 금모으기 운동이 있었다. 또한 국민들이 동전 모으기 운동에 동참해 너도나도 집안 곳곳에 있는 동전을 모으다 보니 동전이 쏟아졌고, 그 여파로 외환위기 이듬해인 1998년에는 오백원 주화를 전체 통틀어서 8,000여개 밖에 발행하지 않았다. 그마저도 대부분 외국인이나 한국은행 직원들에게 주는 민트세트로 발행하였고, 현재는 수집상한테서 대략 기본 50만원 선에서 거래된다. 특히 사용하지 않은 것은 100만원 선에서 거래된다.
이외에 교육 분야에서도 대다수의 초, 중, 고교들이 통폐합되거나 분교장으로 격하되었다. 물론 이때도 예나 지금이나 대부분 농촌에 많이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도시에도 있다. 특히 1999년도에 이러한 현상이 두드러졌다. 이외에 대학교도 IMF 외환위기의 여파로 없어진 대학이 있는데, 대표적인 예로 특수목적대학인 국립세무대학이 있다. 당시 세무대학은 학비 전액 무료, 전교생 기숙사 생활, 졸업후 국세청 8급 세무 공무원으로 특채되는 등 여러 특전이 주어져 입결이 연세대, 고려대 상위학과와 맞먹었다. 1997년 외환 위기 이후 서울대 중~하위학과 정도로 입결이 올랐다. IMF 외환위기로 인해 1999년을 끝으로 신입생 모집이 중단되었고, 최종적으로 2001년에 폐교되었다. 폐교 이후 그 자리는 국세공무원연수원으로 쓰다가 최근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서귀포혁신도시로 이전하였다. 그리고 국군간호사관학교도 같은 이유로 사라질 뻔했다.
사족으로 IMF 당시에는 농담조로 '나는 F학점이다'(I'm F(failed)), '나는 해고당했다'(I am Fired)라는 말이 유행했다. 실제로 이 부분은 초등학교 6학년 국어 교과서에 있었던 '가마솥'이라는 작품에도 나왔다. 심지어 '나는 좆됐다'(I'm Fucked)라는 표현도 있을 정도.
"총체적 난국"이라는 말도 이 무렵에 회자되었다. 정확히는 "total crisis"라는 영어의 번역. 이것은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라는 표현과 더불어, 언어의 마술사 박희태 전 대변인의 작품이라고 알려졌다. 그러나 이 말을 그가 만들어낸 것은 아니며 그냥 이 무렵부터 유명해졌을 뿐이라고. 그리고 때가 때인지라 세기말과 엮여서 그런지 '모럴 해저드(moral hazard)'라는 말도 자주 쓰이기도 했다. 사실 1997년의 외환 위기가 일어나게 된 가장 큰 원인이 국가가 위기에 대응하지 못한 무신경한 자세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며, 후에 IMF를 가까스로 넘겼으나 오히려 사회적으로 비윤리적인 사건이 증가하게 되면서 '모럴 해저드'를 많이 언급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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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언급했지만 7차 교육과정에서 초등학교 사회 교과서에 외환위기의 원인을 사실과 달리 국민들의 과소비 때문이라고 적혀 있는 것도 문제였다. '''정부와 기업의 잘못, 그리고 사치품 수입과 해외여행 자유화를 앞장서 누린 부유층의 "과소비"를 애꿎은 일반 국민에게 뒤집어씌운 셈이다.''' 학생들에게 올바른 지식을 제공해야 할 교과서가 오히려 거짓선동하는 셈이다. 이 문서를 쭉 읽으면 알겠지만, 1997년 외환위기는 국민 개개인의 과소비가 원인이 아니라, YS 정권의 '세계화' 정책의 대응 실패, 즉 시장개방에 따른 정부의 대응 미흡, 재벌들의 정경유착, 국가 경제체제의 구조적인 문제(펀더멘털)와 국제 투기자본의 자본 유동이 주 원인이라고 봐야 합당할 것이다.이것은 일개 개인이 외제를 안쓴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 덕분에 2010년도에 논란이 일기도 했지만 수정이 되지 않았다. 샴페인을 일찍 터뜨렸다는 말처럼 1990년대 중반에 국민들의 과소비 문제가 있긴 했다. 그러나 이것은 외환위기의 '원인'이 아니라 외환위기의 원인인 과잉투자로 인한 일부산업의 호황으로 인해 일부에서 과소비가 일어난 것이다. 해외여행이나 외국산 구매 등으로의 외화유출이 갑자기 커지긴 했다. 그러나 이건 김영삼 정부 이전까지 비상식적인 규제로 통제했던 걸 풀면서 커진 것이고, 주요한 원인이라고 보긴 어렵다.
1985~86년생들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거나 졸업 예정이어서 수학여행을 가야 하나 나라사정이 이렇다 보니 수학여행을 가지 못하고 졸업한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1986년생들이 피해를 많이 봤다. 어찌 보면 사회문제로 청소년들이 피해본 상황인 것. 여담이지만 이 시기에 태어난 1997~99년생들(빠른년생까지 포함) 또한 초, 중, 고등학교의 수학여행이 계획만 세우는 단계에서 아예 가고 싶어도 못가는 일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단, 2000~01년생 등의 경우 신종플루보단 나머지 문제로 못간 경우가 많아서 제외하였다. 워크아웃 종료가 2001년임을 생각해보자. IMF로 나라가 힘들던 시기에 태어나 또 다른 심각한 한국의 병폐로 인해 고통받게 된 케이스. 그 중 가장 심각한 일로 꼽히는 세월호 참사는 정부 관료의 입이나 언론에서 IMF와 엮여 표현되기도 했다.# 희생자의 대부분이 1997~98년생이었으니...
거기에 IMF 사태가 일어난 것을 노조가 노사분규를 일으키고 과도한 임금상승 등의 압력을 넣어 기업의 비용부담을 증가시킨 것이라는 식의 교육을 하고 있는 경우도 있는데, 사실 이 정도되면 그냥 아무 말 대잔치라고 봐도 될 수준이다. 정리하자면 IMF사태는 한국 사회에 만악의 근원으로 자리잡고 있으며,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다.
2.4. 세계경제의 변화
IMF의 구제금융을 받고 심한 구조조정 요구에 시달린 탓에 동아시아 국가들은 지역통화기금 창설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특히 김대중 대통령이 아시아통화기금 출범을 주창했을 정도. 그러나 IMF도 지역단위의 통화기금 체제가 들어서는 데에 딱히 찬성할 수만은 없는 입장이어서 아시아만 통화기금기구 창설은 쉽지만은 않았다. 그래도 2010년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한중일이 공동으로 조성한 치앙마이 이니셔티브(Chiang Mai Initiative)라는 금융협정이 공식 출범하게 되었다. 처음 협정이 체결된 것은 2000년 ASEAN+3 재무장관회의 때였다. 총 기금 1200억 달러 중 중국, 일본이 각각 32%, 한국이 16% 그리고 동남아 10개 국가가 총 20%를 분담한다. 물론 구제금융이라는 것이 아무 조건 없이 제공될 수는 없겠지만 대안이 존재하다 보니 그리스처럼 진짜 작정하고 막장짓만 하지 않는다면 적어도 필요한 수준 이상의 비상식적으로 과도한 구조조정 요구나 IMF가 작정하고 해당국가를 파산시키는 일은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IMF의 해당 문단을 참고할 것.
좁게는 대한민국이 맞이한 외환위기였지만 넓게는 동아시아 전체에 불어닥친 외환위기였을 만큼 그 후폭풍은 대단했다. 1997년 여름 태국에서 먼저 경제위기가 발생하여 동남아시아의 이웃나라들을 거쳤고, 이후 같은 해 가을에 한국까지 그 영향이 미쳤다. 이 외환위기로 IMF의 개혁요구를 충실히 따른 대한민국의 사례가 있는가 하면, 오히려 IMF의 구제금융을 거부하고 국고를 풀어 내수진작에 힘을 쓴 말레이시아의 사례도 있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든 간에 동아시아 각국은 외환보유고에 거의 노이로제에 가까울 정도로 집착을 하게 되며, 2000년대 초반부터 전 세계의 달러화, 미국 국채 등을 거의 폭풍흡입하듯이 빨아들였다. 비슷한 시기 경제위기를 겪었던 브라질,러시아와 경제위기까지 맞지는 않았지만 자신들도 외환을 충분히 확보하지 않으면 또다시 경제위기를 맞을 것이라고 여겨 이 대열에 동참한 인도는 덤.[37] 그리고 이 영향으로 금융위기 이전까지는 외환보유액 세계 TOP 10 국가의 다수가 미국이나 유럽 등 서구권 국가들이었지만 2019년 기준으로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스위스를 제외하면 모두 동아시아 국가 아니면 브릭스다. 그리고 순위에 들지만 않았을 뿐 외환위기의 진원지였던 태국 등의 동남아시아 국가들도 GDP 대비 상당한 양의 외환보유고를 쌓아놓고 있는데, 태국만 해도 무려 2,100억 달러에 달하는 외환보유고를 갖고 있어서, 무려 태국 GDP의 40% 가까운 액수를 외환보유고로 쌓아놓고 있다. 한중일의 외환보유액이 GDP의 25% 남짓인걸 감안해보면 엄청난 비율인 셈.
중국, 브라질, 러시아, 인도, 남아프리카 공화국 등 2000년대 들어 소위 BRICs라 불리는 신흥국들이 IMF의 현 체제에 대한 의문을 던지고 있다. 기존에 유럽의 독식 체제였는데 신흥국이 경제강국이 되었으니 미국과 유럽이 독식하던 IMF와 IBRD의 총재 자리를 넘보고 있다. 특히 2011년 도미니크 스트로스칸 전 IMF 총재가 성추행혐의로 중도 퇴진하게 되자 유럽과 제3세계는 서로 총재자리를 차지하려고 상당한 신경전을 벌였다. 2008년 이 사건보다 '''더욱 큰 부도 사태'''가 일어났었고, '''그리스 경제위기, 유로존 위기'''등으로 서구권의 세계 통화 패권에 대해 더욱 더 불신이 깊어지는 가운데에서도 기존 기득권 층은 '지금 유럽에 IMF위기가 도래했으니 차기 총재도 유럽인이 해야 그리스 위기를 쉽게 헤쳐나갈 수 있다'는 주장도 나왔지만 이미 유럽이 그런 소리를 하기에는 신흥국의 영향력은 너무나도 커져 있다. 유럽에 IMF 위기가 도래한 시기가 유럽인이 총재자리를 독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나온 것을 감안하면 일고의 가치도 없는 개소리다.
결국 2010년 서울에서 열린 G20 재무장관회의에서 지분의 6% 이상을 신흥국에 넘기고 유럽 이사 2명을 줄여 신흥국의 참여권을 확대하는 구조개편이 합의되었다. 이 과정에서 주최국인 대한민국의 역할이 매우 컸고, 대한민국 역시 IMF 쿼터에서 과소평가를 받았던지라 2010 G20 재무장관 회의를 통해 IMF 쿼터를 늘리게 됐다. 또한 2012년에는 그동안 관례적으로 미국이나 서유럽국가 출신이 맡아온 IMF 사무총장으로 중국 경제학자 린젠하이(林建海)를 임명했고, 뒤이어 세계은행 총재에 한국계 미국인인 김용(Jim Yong Kim) 전 다트머스 대학교 총장을 임명했다. 이젠 미국과 유럽도 신흥국가의 입김을 무시할 수는 없는 셈.
2.5. 돈을 번 사람들
항상 그렇듯 예외적인 소수의 케이스지만 이 시기에 돈을 번 사람들도 있었다. 발빠르게 변화를 선택해서 위기를 기회로 만든 사업가들, IT 네트워크의 확장으로 신사업을 개척한 사람들, 미국 달러, 금을 보유하고 있던 사람들, 금융권 대출이 막히니 몰리게 된 사채시장의 큰 손들, 혹은 다 같이 망국적 상황에 대해 이야기 할 때도 한국 경제의 회복에 베팅해서 싸게 매물로 나온 부동산과 주식에 투자한 투자자들이 있다.
이후 2020년 현재에는 한국은 물론이고 세계에서도 여러 차례의 경제 붕괴와 급속 회복을 단기간에 반복적으로 경험하다 보니 투자자들이 다들 이 패턴의 고인물이 되어버려 코로나 19 대유행이라는 상황 속에서도 오히려 이 상황의 매수가 당연한 것이 되어버려 주가가 실제 경기를 한참 앞서 달리며 이미 정상화 되어버리는 지경까지 와버렸고 97년 IMF 사태는 현재의 투자기법이 세계적으로 정착하는데 일익을 담당했다고도 볼 수 있다.(...)
[1] 특히 9급, 경찰, 부사관, 군무원 등의 직종에 대한 인식이 최악이었다. 하술하듯 봉급도 적고, 사회적인 이미지도 나쁘니 굳이 이 직종을 선택할 이유가 없었고, 경쟁에서 도태된 인원들이 가다보니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최악이었다. 그나마 국가직 9급이나 서울시 9급은 지금만큼은 아닐지라도 치열한 경쟁 탓에 괜찮은 인원들이 들어갔지만, 군단위 지방직 9급은 '''선착순'''이라는 말이 돌았을 정도였으니... 물론 9급 공무원, 군무원과는 달리 7급 공무원, 5급 공무원은 이 시절에도 합격하기가 매우 힘들었고, 지금과 마찬가지로 엘리트 대우를 받았다. 특히 '''5급 공무원'''이 되기위한 고시는 SKY 출신들이 치는 시험으로 지금보다 위상이 더 높았다.[2] 원래는 하사관으로 불렸으나 명칭의 어감 문제 및 대우개선을 목적으로 2001년부터 부사관으로 개칭했다.[3] 그래도 워낙 열악한 당시의 군대 환경때문에 못 버티고 나가는 인원이 태반이었다.[4] 또한 벤처기업에서는 본인의 능력에 따라 자기 연봉의 몇 배가 되는 거액의 배당금을 타낼 수 있었다.[5] 문제는 이 경영 모델도 완전히 서구식으로 바꾼 게 아니라 나이 제한과 연공서열제의 뼈대는 그대로 남겨 '''결합'''시켰다는 것이다. 이는 고용 시장을 더 얼어붙게 만들고 근속 안정성도 떨어뜨리는 최악의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6] 김용환 부총재가 경제구원투수로 대통령 당선자에게 추천한 사람이다. 수험 5개월 만에 행정고시(6회)에 합격한 수재로 30대 중반에 행시 1회 출신들과 동일한 직위로 일할만큼 초고속 승진을 했지만, 1979년 율산그룹 해체 당시, 주무 담당자로써 책임을 지고 공직을 떠났다가, 20년 만에 다시 친정으로 돌아온 것.[7] 원 출처: <1998 동아연감> p56.[8] IMF는 부실의 근원인 종금사를 폐쇄해야 경제가 회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하지만 부작용에 대한 아무런 대비도 없이 갑작스럽게 종금사가 폐쇄되자 대량인출사태가 발생하고 은행들은 자기자본비율을 맞추기 위해 돈줄을 죄였다.그 결과로 종금사 폐쇄 이후에는 하루짜리 콜금리가 법정상한선(25%)까지 올라 거래가 아예 끊기고 환율도 나흘 사이에 509원이나 금융공황이 발생하게 된다.[9] 1996년 말 30대 그룹 평균 부채율이 387%였다. 1998년 5월 부도난 30대 기업 거평 그룹이 부도 6개월 전까지 부채율 347%인 자사는 양호한 수준(두 번째 장, "부도 리스트~~~" 참조)이라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시절이었던 것.[10] 실제로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대한민국의 기업들의 경우 2018년 말 기준으로 부채비율은 75.3%로 2017년말 76.7%보다 떨어졌다. 또 부채비율이 200%를 초과하는 과다 부채 기업의 비중도 2018년 말 11.3%로 1년 전 12.6%보다 줄어들었다. 기업규모별로 보면 중소기업의 부채비율은 전년 말과 같은 수준인 56.2%, 대기업의 부채비율은 1년 전 77.7%에서 76.3%로 하락했다.#[11] 이로 인해 박근혜가 18대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던 것도 IMF 이후인 2000년대부터 기성세대를 중심으로 박정희 향수가 강해졌기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다.[12] 정확히 말하면 120mm 활강포를 기존의 K1 전차에 사용하기에는 부적절하여 각종 문제가 발생하여 이후 포탑과 각종 부품 등을 재설계하였다. 즉 외형만 제외하면 사실상 신규 전차에 가깝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13] 현재 서울시메트로9호선은 NH농협금융그룹이 최대주주다.[14] 특히 쌍용자동차는 중국 기업에 매각되기도 해 충격이 컸다. 당연히 핵심기술 유출 등의 문제가 불거졌고, 중국 기업에게 쓸만한 기술을 모두 강탈당한 후 부도나 치열한 노사분규에 시달리다가, '''인도'''에 매각되었다.[15] 박재홍은 1992 시즌 해태의 1차지명 선수였으나 입단을 거부하고 연세대에 진학했다. 당시 주로 대졸예정 선수들이 1차지명을 받았던 때에 고졸예정이던 그가 1차지명을 받았다는 것은 그만큼 해태가 박재홍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해태는 1996 시즌 1차지명 선수였던 김종국을 잡느라 박재홍까지 잡을 돈이 없었다. 고졸 우선지명 선수 중 대학시절 국가대표까지 지낸 포수 김상훈과 훗날 메이저리거가 되는 투수 서재응이 대학진학을 선택하는 것을 두 눈 뜨고 지켜봐야 했을 정도였다. 그나마 나머지 한 명인 투수 김상진을 입단시키기는 했으나 김상진은 1998 시즌 종료 후부터 위암 투병을 하다 1999년 6월 10일 요절하고 말았다.[16] 그 반대급부가 외환위기로 오늘내일 하던 해태 마운드를 힘겹게 지탱한 최상덕이다.[17] 강호동이 씨름선수 시절 바로 이 팀 소속이었다.[18] 모기업은 동성종합건설이다.[19] 2004년 재결성.[20] 하지만 시드니 올림픽은 네덜란드, 영국, 루마니아 등이 대분전하는 등 총 11개국이 금메달 10개 이상을 획득한 대회였다. 역대 올림픽에서 10개국 이상이 두자릿수 금메달을 획득한 대회는 시드니 올림픽이 유일하다.[21] 1996년 격주간으로 재창간될 당시 상호명은 미디어유니버스.[22] 모체인 주간야구가 스포츠신문들의 증면경쟁에 따른 기자스카웃이 이어지면서 93년 11월 말 없어져 폐간되었다가 96년 여름 격주간 형식으로 재창간됐다.[23] 사실 고려원은 외환위기 이전에도 무리한 사업으로 인해 점차 내리막길을 걸었고 1년 전 발행된 처음이자 마지막 일본어 교재인 '코츠코츠 일본어'가 저조한 판매율을 선보이면서 사정이 악화된 것도 한몫 했다.[24] 그러나 영남일보 자체는 계속 운영되었고 2005년에 조간으로 변경.[25] 2년 후 한국골프채널을 거쳐 SBS가 인수하여 현재는 SBS 골프로 존속하고 있다.[26] 이후 영화전문채널로 전환한 후 2002년 CJ E&M에 인수되어 홈 CGV를 거쳐 2005년 채널CGV로 변경하였다.[27] 다솜방송은 이듬해에 업종을 전환하여 의료+건강 26으로 개국했다. 이후 생활건강TV로 변경하였다가 2015년 폐국하였다. 현재는 카툰네트워크 계열의 부메랑 TV로 방영중이다.[28] 패키지와 매뉴얼을 축소하거나 아예 빼서 CD만 포장하여 판매하는 형식.[29] KCT미디어가 결국 도산하면서 영원히 이 떡밥들이 회수될 일은 없게 되었다.[30] 월드맵의 크기와 회수되지 않은 떡밥들을 통해 추정해보면 본래 기획한 게임의 볼륨은 2~3배 정도는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IMF 사태가 터지지 않아 이 게임이 계획대로 완성되렀다고 해도 정말 그만큼 더 재미있었을지, 오히려 미완성작이었던 현실에서보다 나쁜 평을 받았을지는 알 수 없지만.[31] 1997년 수입 자유화됨.[32] 그래서인지 가요톱10 막방이던 1998년 2월 11일 방영분에선 당시 아직 이름이 알려지지 않던 신인가수들의 비중이 높았고 그 중에서도 아직 순위권에 들지 못한 곡들을 많이 소개했다. 훗날 <흔들린 우정>을 히트시키게 되는, 1998년 당시 풋풋한 신인가수이던 홍경민도 이날 방영분에 출연했다.[33] 그 시간대에 <공개수배 사건 25시>가 편성됐다.[34] 일명 즈믄둥이[35] 2017~19년 출생아수 약 99만명 vs 1995~96년 출생아수 약 141만명.[36] 이의 근거로,1998년 경제난으로 인한 자살자가 1997년보다 '''41%'''나 증가한 뒤 그 이후로도 증가세가 꺾이지를 않고 있다.[37] 인도는 이미 1997년 외환 위기가 터지기 6년 전인 1991년 외환 위기에 처해 IMF의 구제금융을 받은 뼈아픈 기억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외환 위기는 인도로써도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일이었다.